춘포역 ‘추억의 간이역’ 대 ‘일제강점기 표준설계’ 기차역은 1910년 한일병합 이전부터 지어졌으며 병합 이후에는 다양한 규모와 건축양식의 역사(驛舍)가 가속도를 내며 들어서기 시작했다. 병합 이전의 기차역 건설은 겉으로는 건설권을 불하받거나 공동사업 형식을 띠었다. 이미 이때부터 일제는 한반도의 철도산업을 수탈 도구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흔히 ‘간이역’이라고 부르는 소규모 기차역도 수탈에서 중요한 일부분이었다. 간이역에는 ‘표준설계’라고 부르는 일정한 공통 형식이 있었다. 건축 공사를 쉽게 하고 사용도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 말 그대로 표준 내용을 정해서 반복 건축한 것인데, 일제강점기 때 한반도 전역의 시골에 지었던 수백 채의 간이역은 모두 이 표준설계를 따랐다. 해방이 되어 1960년대가 될 때까지 이 양식은 변하지 않았다.
표준설계는 제일 기본적인 내용이기 때문에 그 설명부터 간단히 하면서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구조는 겉에서 보면 콘크리트 같지만 목조가 대부분이다. 나무로 골조를 세운 뒤 그 위에 철망을 치고 다시 기름종이를 바른 다음 흙으로 1차 마감을 하고 마지막으로 도장(塗裝)을 하는 형식이다. 그 속에 맞이방(대합실), 매표소, 역무실, 숙직실, 차양 등을 기본 기능으로 갖추었다. 건물 본체는 직사각형을 기본 형태로 갖는 단순한 형태이며, 차로 쪽은 돌출부 없이 평평하게 가는 것이 보통이고 역무실이 철로 쪽으로 몇 미터 정도 돌출하는 경우가 많다. 지붕은 박공경사지붕(지붕 끝을 삼각형 모양으로 정리한 경사진 지붕)인데 맞이방과 역무실은 주 지붕과 직각 방향으로 박공을 따로 냈다. 하늘에서 지붕을 내려다보면 십자가 형태이다. 따로 낸 박공에는 역명이 들어간 간판을 걸었고, 맞이방 앞 대기공간에는 긴 차양을 냈다. 맞이방 출입문과 역무실 돌출부 창에는 일자 차양이 났다. 이 정도면 간이역에 대한 건축학적인 설명은 아쉬운 대로 다한 셈이다.
1914년 춘포, 수직 비례와 식민성의 시작 1910년대 중후반 익산ㆍ군산 일대는 간이역의 탄생지라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 간이역의 표준설계는 익산의 춘포역과 군산의 임피역 두 곳에서 완성되었다. 먼저 춘포역의 건축적 구성부터 살펴보자. 춘포역의 전체 구성은 앞뒤 면이 다르다. 어디를 앞으로 봐야 할지 애매하기 때문에 앞뒤라는 말 대신 차로 쪽 면과 철로 쪽 면으로 나누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차로 쪽은 들고남 없이 평평하다. 큰 육면체의 본체에 박공지붕을 얹은 것이 전부로 매우 단순한 구성이다. 최초의 역이라 분화가 덜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이 있는데 수직 비례이다. 수직 비례, 혹은 그 짝과 함께 생각하는 수직ㆍ수평 비례 문제는 해방 이후까지 계속된 40여 개의 간이역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건축적 주제인데, 이곳 춘포역에서 수직 비례가 먼저 나타난 것이다. 간이역에서 수직ㆍ수평 비례는 중요한 조형적 기준이다. 다분히 건축적인 내용일 수 있으나 좀 더 일반적인 감성으로 치환할 수도 있다. 수직 비례는 일본답거나 서양다운 조형성인 반면 수평선은 한국답다. 물론 이런 이분법이 늘 맞는 것은 아니다.
수직 비례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수직성 반대편에 있는 수평성이 한국다운 조형미의 하나라는 사실이다. 간이역에 나타나는 수직성은 단독으로 생각할 수만은 없는 조형 요소이다. 그 짝인 수평성과 함께 생각해야 하며, 이 과정에서 수평성이 상징하는 한국다움을 개입시킬 수 있다. 수직성을 추구한 것이 단순히 서양식 건물을 짓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타난 현상 이상의 목적을 가질 수 있으며, 그것은 한국다움을 누르거나 죽이려는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는 뜻이다. 앞서 말한 ‘농촌 지역을 제압하려는 목적’도 크게 보면 이것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춘포역에 나타난 것과 같은 수직 비례는 한국의 전통 건축에서는 흔하지 않은 낯섦이다. 당시 이런 시골구석에서는 분명 처음 보는 이질적인 느낌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결코 가벼운 역사성이 아니다. 향후 전개될 식민지 개발의 방향과 성격을 예견하는 역사성을 갖는다. 그렇다고 지금 150층 광풍을 주도하는 사람들이 일제의 수직선 인식을 이어받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수평선이 수직선에 당했다는 패배의식을 만회하기 위해 우리도 가일층 수직선을 지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의도는 ‘애국심’이다. 우리도 빨리 근대화를 이루어 선진국이 되어야 한다는 상식적 애국심이다. 수직선 자체가 나쁘다는 것도 절대 아니다. 인간의 조형 환경, 특히 근대사회에서는 수직선이 제일 중요한 요소이다. 문제는 방향과 정도이다.
어울림과 변화무쌍, 한국다운 건축미 자체의 어울림이 뛰어난 춘포역. 하물며 그 위에 이렇게 예쁜 차양을 내고 구조미학을 뽐내며 어울림의 미학을 보여주는 장면이 다른 역에는 없다. 가히 춘포역만의 대표적 특징이라 할 만한데, 근대 간이역에 한국다운 건축미가 스며들어간 결과라 할 수 있다. 아래쪽 출입문이 어울리다 보니 그 위의 차양도 함께 어울리는 것은 당연하다. 구조미학 자체도 아름다울뿐더러 차양 두 장이 사이좋게 어울리는 모습은 한옥의 채 구성이나 창 배치 등에서 관찰되는 한국다운 어울림의 미학이라 할 수 있다. 춘포역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이 지점의 매력은 결국 두 개의 문과 그 위 두 장의 차양, 즉 네 개의 요소가 서로 어울리는 모습이다.
차양의 어울림은 아래쪽 출입문의 어울림을 보강해준다. 서로 직각으로 마주하다 보니 마치 동기 간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지지부재는 지지부재끼리, 상판은 또 상판끼리 좋은 짝을 이룬다. 망치머리 같은 지지부재의 끄트머리가 어울리는 장면이 특히 재미있다. 손을 뻗어 악수를 청하는 것 같기도 하고 주먹끼리 마주쳐 하이파이브를 하는 것 같기도 한데, 상판이 어울리는 장면은 모자챙을 들어 보이며 서로 웃는 것 같다. 의인화가 넘쳐나며 모두 어울림을 지향하는 관계이다. 그 출처는 ‘정(情)’이다. 정 문화는 한국다운 정서의 으뜸으로 부모, 형제, 친구, 사제, 상사와 부하 등 모든 인간관계에 대입할 수 있다. 건축, 미술, 요리 등 장르와 분야를 뛰어넘어 제일 밑바탕에 깔린 사람에 관한 기본 인식이라는 뜻이다. 정이 제일 잘 드러날 수 있는 건물 종류는 주택인데, 그중에서도 한옥은 특히 그렇다. 곳곳에 의인화를 통해 사람 사이의 정을 건축으로 표현한다. 그 흔적이 시간을 뛰어넘어 이곳 춘포역의 철로 쪽 역무실 돌출부의 출입구와 차양에까지 남아있다.
생각 고르기 - 근대 간이역의 역사적 의미 서정성 대 식민 역사 해방 이후에도 간이역은 1960년대까지 수십 채가 지어졌다. 표준설계를 잘 따른 역들도 많으나 지역에 따라 특징들을 형성하기도 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등록문화재 간이역을 기준으로 분류한 한국형, 산간형, 도심형, 바닷가형은 대표적 예이다. 아픈 역사를 많이 담고 있어서 역사성이 심각한 건물이지만, 이제는 서정성의 대상이 되었다. 간이역은 언뜻 보면 일본식 주택 같기도 하고 서양식 교외 주택 같기도 하며, 꼼꼼히 뜯어보면 한옥 같은 한국다움이 스며있다. 이렇게 여러 양식이 혼재되어 있다 보니 간이역이 온전히 지켜지기란 힘들었을 것이다. 한국다움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일본식 주택과 서양식 교외 주택과 같은 외국 양식과 섞여서 나타난 한국다움은 ‘순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그대로 이어지기가 힘들었다. 한국적인 것만 추출해내자니 한옥 같은 원형 문화재가 있고, 그렇다고 혼혈 양식을 그대로 받아들이자니 민족적 감정이나 자부심과 맞지 않았다. 1960년대까지 일제의 표준설계에 따라 기차역을 세운 것은 미처 식민 잔재를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후 기차역은 ‘새마을양식’이라는 이름으로 지어졌다. 경제성에 모든 것이 맞추어진 단조로운 콘크리트 박스형 건물이었다. 이후 근대 간이역은 추억 속으로 사라지면서 자연스럽게 소멸되어 갔다.
현재 간이역에는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요소들이 덧씌워져 있다. 무엇보다 사람들은 간이역에 담긴 아픈 역사에 대해 너무 모른다. 일제강점기 자체에 대해 무딘 우리의 국민성일 수도 있고, 건물 규모가 작고 파급효과가 작은 시골 역이라서 그럴 수도 있다. 혹은 아무도 나서서 정확하게 지적을 하지 않아서 생긴 무지의 소치이거나 서정성이 너무 강해 아픈 역사를 가린 것일 수도 있다. “예쁘면 모든 것이 용서된다”는 농담 아닌 진담이 통용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간이역을 옹호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 역시 간이역에 대한 태도는 양면적이다. 간이역에 서린 아픈 역사를 지우고 순수 조형적 관점에서 보면 서정성이 강한 건물이라는 사실은 인정한다. 그러나 한국 현대사에서 범상치 않은 역사성을 갖는 건물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고려 없이 순수 조형적 관점에서만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문화재 지정 및 수리, 보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아무튼, 지금 내가 이 책을 쓰는 목적은 간이역에 담긴 서정성을 감상하자는 것도 아니고 문화재 지정에 대해 토론하자는 것도 아니다. 간이역의 역사성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이것을 건축적 관점에서 살펴보자는 것이다.
원창역, 율촌역 표준설계의 확산과 분화, 근대 간이역의 4가지 유형 일제는 한일병합 이전부터 ‘일본―한반도―중국과 러시아 대륙’을 하나로 이어주는 간선 노선들을 건설했다. 병합이 되자 일제는 ‘한반도 경영’이라는 명분 아래 각 지역까지 파고드는 여러 지선 노선들을 차례로 부설했다. 21개 등록문화재 간이역을 기준으로 보면 경부선에 심천역, 경의선에 일산역과 신촌역, 중앙선에 팔당역, 구둔역, 반곡역, 동해남부선에 송정역과 남창역, 전라선에 춘포역과 율촌역, 곡성역, 경전선에 남평역과 원창역, 철암선(영동선)에 도경리역, 경춘선에 화랑대역, 대구선에 동촌역, 진해선에 진해역, 군산선에 임피역, 가은선에 가은역, 장항선에 청소역, 문경선에 불정역이 각각 위치한다. 이외에도 수많은 다양한 이름의 노선들이 건설되었는데 주요 목적은 물자 수탈과 한반도 식민경영이었으며 여기에 관광주의가 가세했다. 물자 수탈은 당연히 곡물과 지하자원이 중심이었으며 대동아전쟁이 일어나자 여러 군수물자도 중요 품목이 되었다. 제일 먼저 일제는 호남의 곡창지대와 서해안의 항구도시를 연결하는 노선을 건설했고, 강원도와 충북 일대 지하자원을 수탈하기 위한 산간 철도를 건설했다. 한반도 전역을 연결하는 노선으로 확장했는데, 한반도 전역을 수탈 대상으로 삼으면서 각 지역을 효율적으로 연결하고 식민통치를 물리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서였다. 북한으로 확장된 노선은 중국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한 전진기지의 목적도 함께 가졌다. 근대 간이역은 이런 일제 철도건설의 주요 거점들이었다.
이런 역들에서는 ‘춘포―임피’ 양식에서 완성된 표준설계가 말 그대로 표준적으로 반복, 사용되었다. 표준설계가 반복되는 과정에서 일정한 변형이 함께 일어났다. 변형 내용에 따라 몇 가지 경향으로 분류가 가능하다. 각 경향의 기본 특징들은 노선별로 나타나기보다는 지역별로 나타난다. 여기에서 지역이란 특정 도시나 읍내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도심, 농촌, 바닷가, 산간 등 지리적 상황을 말한다. 이에 따라 1920년대 이후 한반도 전역으로 퍼져나간 간이역을 네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한국형으로 원창역, 율촌역, 가은역, 일산역, 팔당역 등이 여기에 속한다. 한국형이라 함은 말 그대로 표준설계에 한국다운 특징을 크게 가미했다는 뜻이다. 둘째, 산간형으로 도경리역, 심천역, 반곡역 등이 여기에 속한다. 세 역은 강원도와 충청북도 산간 지역에 위치한다. 건축적으로 보면 수직선이 두드러진다. 표준설계의 기본 내용이 제일 잘 지켜진 점도 공통점이다. 셋째, 도심형으로 신촌역, 화랑대역, 동촌역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 역들의 위치는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지금과 달리 도심 외곽이었으나 건축적으로 보면 큰 머리 하나를 갖는 공통점을 보인다. 이런 의미에서 큰 머리형 혹은 일두형(一頭形)이라 부를 수 있는데, 머리가 유난히 큰 이런 형태는 도심에서 눈길을 끌기에 적합하다. 넷째, 바닷가형으로 진해역, 남창역, 송정역이 여기에 속한다. 바닷가에 위치해서인지 흥겨운 분위기로 변형된 점이 공통적 특징이다. 이 유형 역시 한국다움이나 도심형 등 다른 특징이 섞여 나타난다. 표준설계에 대한 의무감이 상대적으로 약한 탓으로 볼 수 있다.
수평적이고 유기적인 한국형 간이역 원창역과 율촌역은 전라도 남해안 역을 대표한다. 결론부터 요약해서 말하자면 두 역에서는 한국적 특징이 많이 나타난다. 앞서 언급한 한국형의 원천이다. 일본다움이 약하다고 해도 표준설계를 기본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주로 지붕에서 나타나고 있다. 지붕 형식을 제외한 나머지는 한국답다. 실제로 이어 붙인 형상이나 아래쪽 몸통을 보면 지붕도 상당히 한국답다. 원창역과 율촌역에서는 일단 전체 구성이 매우 느슨해졌다. 춘포역과 임피역은 짜임새가 있고 본체의 중심이 확실하며 들고남이 적다. 육면체의 기하학적 윤곽을 정형적으로 확실하게 잡았다는 뜻이다. 원창역과 율촌역에 오면 이것이 거의 깨진다. 제일 먼저 비례가 수평적으로 바뀐다. 춘포역과 임피역의 꼿꼿하던 자세 대신 옆으로 퍼져 나가는 구성이다. 사람에 비유하자면 팔다리가 따로 놀거나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편하게 쉬고 있는 모습이다. 혹은 유기적이라 할 수도 있다. ‘유기적’이라는 말 속에는 두 역의 구성이 타이트하거나 가지런하지 않다는 뜻도 들어있지만, 동시에 이런 구성이 제멋대로 생겨서 엉성하고 미완성적인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이유와 목적 아래 생겨난 것이라는 뜻도 들어있다. 한마디로 자연스럽다는 뜻이다.
한국 농가를 닮아서 상대적이고 편안한 ‘원창―율촌’양식 이런 차이에 대해서는 세 가지 유추적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 기능 유형에 대한 유추인데 원창역과 율촌역은 한국의 농가를 닮았다. 춘포역과 임피역이 기차역다운 것과 대비되는 대목이다. 춘포역과 임피역의 짜임새 있고 정리된 모습은 불특정 다수를 상대해야 되는 공공건물에 요구되는 객관적 특징의 산물이다. 기차역을 처음부터 기차역으로 생각하고 시작했다는 뜻이다. 원창역과 율촌역은 많이 다르다. 간판 떼고 차양 떼고 보면 영락없는 시골 농가이다. 앞서 말한 ‘옆으로 퍼져나가는 구성’과 ‘유기적 특징’ 등이 이에 해당되는 내용이다. 너무 농가처럼 생겨서 처음에 두 역을 찾는데 애를 먹었다. 반쯤 덤불 속에 묻혀있는 원창역을 보고 그냥 농가려니 하고 지나쳤을 정도였다. 차마 이 건물이 기차역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둘째, 민족적 분위기로 볼 때 춘포역과 임피역이 일본답다면 원창역과 율촌역은 한국답다. 춘포역과 임피역은 들고남의 정도를 잘 조절했으며 부재들의 맞물림도 명확해서 기합이 잘 들어간 군인을 보는 것 같다. 반면 원창역과 율촌역은 한국답다.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편한 게 제일 좋다는 한국다운 철학이 묻어난다. 소박하고 재래적이지만 정이 간다. 일면 무질서해 보이고 사전계획 없이 현장에서 끌리는 대로 지은 것 같아 보이지만, 각자 원하는 바를 존중하고 그에 따라 취하고 싶은 자세를 취하도록 놔둔다. 한국다운 주관주의 혹은 상대주의이다.
한국다움 대 일본다움, 가깝지만 너무 다른 두 나라 셋째, 춘포역과 임피역은 일본식 근대 간이역의 표준 유형인 반면, 원창역과 율촌역은 한국식 농가를 모티브로 차용한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로써 1910년대 ‘춘포―임피 양식’은 기능주의적 서구 기차역 유형, 1930년대 ‘원창―율촌 양식’은 한국다운 농가 유형으로 대비 구도를 만들 수 있다. 문화의 흐름이란 항시 양면적인 것이어서 이 과정에서 크진 않지만 일본이 한반도에 동화되는 현상도 일어났다. 원창역과 율촌역에 나타난 한국다움은 일본식 표준설계인 춘포역과 임피역이 한반도의 시골 분위기에 동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변형 상태에 대해서는 양면적 해석이 가능하다. 원형 양식의 순도라는 관점에서 보면 완성도가 훼손당하는 변질 단계에 해당된다. 표준설계가 처음 완성될 때에는 규범과 형식이 잘 지켜지는데 이것이 다음 단계에서 응용될 때에는 자유로운 재해석과 변형이 가해지는 것이 양식사에서 일반적으로 관찰되는 현상이다. 반면 표준설계가 다양성을 포괄하는 긍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박공의 없고 있음, 균형 우위 대 형식 우위 원창역과 율촌역의 전체 구성은 중심 본체에 작은 덩어리를 더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여러 덩어리를 병렬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지붕도 산만하다. 몸통과 지붕 모두에서 중심도 사라졌다. 제일 두드러진 현상이 박공이 없는 것이다. 차로 쪽이나 철로 쪽 모두 없다. 원창역과 율촌역에서는 박공이 사라지고 산만한 지붕이 대신한다. 지붕 구성은 몸통 구성과도 연관이 깊다. 리듬감이 절묘한데 박공을 넣으면 이것이 깨진다. 방향과 형태 모두에서 지붕 전체의 흐름에 파격을 가하기 때문이다. 원창역과 율촌역 같은 유기구성에서는 이것은 피하는 것이 건축적으로 마땅하다. 지붕의 한결같음이 더 중요한데 이것을 잘 알고 그렇게 했다. 결과적으로 두 역 모두 차로 쪽 전경이 한국답게 되었다. 친절한 시골 아낙네를 보는 것 같다. 격식을 차리지 않아도 좋은 편한 느낌이다. 지붕 선의 흘러내리는 모양새도 한국답다. 리듬을 타고 부드럽게 이어지는데 이를테면 ‘구성진 가락’에 해당되는 건축 장면이다. 격하지 않으면서 가늘고 길게 이어지는 한국다운 인연의 개념도 같은 정서이다. 뒷동산 능선의 흐름이 물리적 배경이다. 굽이굽이 흐르는 실개천도 마찬가지이다. 원창역은 증거까지 보여준다. 지붕 너머 뒷동산이 보이는데 그 능선의 리듬이 지붕선과 장단을 잘 맞추고 있다. 장단이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길고 짧음이다. 이것은 곧 호흡이고 가락이니 한국다운 정서를 대표한다. 뒷동산 능선과 지붕선이 장단이 잘 맞아 “짝짜꿍”을 이룬다. 지붕 윤곽과 선의 미학 선의 미학은 간이역의 전형적 장면 가운데 하나이다. 모든 역이 다 갖추지는 않으나 여러 역에서 관찰할 수 있다. 모든 간이역에 나타나는 장면은 아니지만 분명 간이역이 주는 아름다운 건축 조형미 가운데 하나이다. 춘포역은 완성된 상태는 아니나 제법 갖추었다. 이곳 원창역과 율촌역에서 무르익을 대로 익었다. 선의 미학은 면의 미학과 대비된다. 간이역의 전체 분위기는 면의 미학이다. 몸통은 육면체 덩어리 느낌이 강하고 지붕은 판재 느낌이 강한데 둘 다 면의 미학을 만들어내는 주요 출처들이다. 여기에 악센트로 선형 요소가 들어가는데, 바로 차양을 받치는 기둥과 지붕 윤곽선이다. 지붕 윤곽선은 사선을 가로 그으며 선의 미학을 제대로 보여준다. 본래 선이란 그 속성이 한 곳에 가만히 머물질 못한다. 흔들고 뻗고 출렁인다. 이런 선의 미학 자체는 한국다운 건축미 가운데 하나이다. 한옥을 보면 흰 회벽 정도가 면의 미학을 줄 뿐 나머지는 선으로 이루어진다. 지붕조차도 처마 선이 가장 뛰어난 아름다움이다. 기본적으로 면 요소인 지붕에서 선의 미학을 대표로 뽑아내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선의 미학은 건축에 앞서는 보편적인 한국미이다. 거추장스러울 법도 한데 한복에 고름을 갖춘다. 바람에 날리는 고름은 봄바람에 설레는 처녀 마음을 상징하며 한국다운 여성미를 대표한다. 국수를 봐도 그렇다. 얇디얇은 소면과 냉면에서 굵은 칼국수에 이르기까지 굵기 차이를 가지고 선의 미학을 즐겼다. 건축에서도 처마선과 문살에 이르기까지 굵기 차이를 가지고 선의 미학을 즐겼다. 건축에서도 처마선과 문살에 이르기까지 선으로 집을 지었다.
일산역, 팔당역 편한 시골 할머니 품, 한국형 일산역 일산역은 지금 비교적 번화한 도시 속에 갇힌 형편이지만 지어진 당시에는 시골이었다. 그래서인지 첫인상이 시골 할머니 느낌이다. 일산역이 갖는 한국다움의 의미이기도 하다. 원창역과 율촌역은 처음부터 비정형 모습을 섞어 지었다. 반면 일산역은 처음에는 수평―수직 구도로 지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이쪽으로 조금 기우뚱, 저쪽으로 또 조금 기우뚱하면서 전체적으로 찌그러진 모습이 되었다. 마치 시골 할머니가 그렇듯이. 불안하거나 불쾌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친근하고 편안하다. 할머니 품 같은 느낌은 세부 장면에서 느낄 수 있다. 차양은 부분적으로 내려앉고 휘었다. 홈통도 수직선에서 조금 벗어나 있다. 창틀도 반듯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벽 모서리 선도 약간 기우뚱한 것 같다. 차양도 지붕 선하고 나란하지 않고, 본 지붕과 박공지붕이 만나는 지점도 깔끔하게 맞물리지 않는다. 처마 선은 일직선을 달리지 못하고 기운다. 전체적으로 자 없이 가위만 가지고 종이를 오려붙여 만든 느낌이다. 특별히 멋을 낼 이유도 없고, 일본식 주택을 닮았는지 아닌지를 따질 이유도 없다. 표준설계에서 벗어났는지 지켰는지 고민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냥 내 편한 대로 사는 모습 그대로이다. 시골 할머니 집에 가면 만나는 장면이다. 할머니 집이 아니라 할머니 자신을 닮은 것 같다. ‘시골스럽다’는 말이 제일 잘 어울리는데, 같은 시골이라도 살아 숨 쉬는 시골의 느낌이다.
대책 없이 옆으로 긴 팔당역과 비대칭 창 팔당역은 간이역 가운데 제일 단순하다. 제일 특이하다면 특이할 수도 있다. 일자형이라 그렇다. 그 흔한 박공 한 장 없고 돌출부도 없다. 폭 3미터에 길이 19미터의 긴 육면체 하나로 되어 있다. 형태만 특이한 것이 아니라 들어앉은 품새와 위치도 그렇다. 플랫폼을 따라 길게 늘어서 있다. 보통은 개찰구가 있고 공터와 건널목을 지나 플랫폼에 진입하게 되어 있는데, 팔당역은 그 자체가 플랫폼이기 때문에 문만 열고 나가면 바로 기차를 탈 수 있다. 간이역을 말마따나 ‘임시역’으로 본다면 팔당역이 그 표본인 셈이다. 지금도 아주 작은 역을 보면 별도의 역사 없이 플랫폼에 대기실을 겸한 가설 시설만으로 역을 만드는 경우가 있는데 팔당역은 이 가설 역을 제대로 된 건물로 지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어쨌든, 대책 없이 길기만 한 것 같은데 자세히 보면 상당히 한국답다. 창 배치에서 그렇다. 건축적으로 봤을 때, 이렇게 긴 건물에 창을 내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작은 창을 동일하게 반복하는 방식과 크고 작은 창을 내키는 대로 아무렇게나 배치하는 방식이다. 우리 조상들은 같은 창을 가지런히 반복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한옥의 정수는 비대칭으로 낸 창이다. 크기, 모양, 위치 모두에서 그렇다. 큰 놈과 작은 놈, 긴 놈과 네모난 놈을 섞어 썼다. 벽 한중간에 내기도 하고 바닥에 바짝 붙여 맨 아래에 내기도 했다. 지붕에 붙이기도 하고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심지어 모서리에 내기도 했다. 모두 그때그때 형편에 맞추기 위해서였다.
비대칭은 나름대로 미학이 있다. 우선 빡빡하지가 않다. 조금 어수룩하고 해학적일 수도 있는데 이는 친숙함의 원천이다. 사람을 압박하거나 강요하지 않아 편하게 만든다. 크기와 모양을 견주어보는 등 머릿속에서 조형작용을 유발시킨다. 조금 센스가 있는 사람은 조형작용을 대비나 닮음, 사람 사이의 관계로 해석한다. 친구들 여럿이 어울려 노는 모습, 가족이 오순도순 모여 있는 모습, 어머니가 자식을 데리고 있는 모습, 부부가 의지하고 있는 모습 등등이다. 비대칭은 절대 불안하지 않다. 좌우가 다른 모습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다면 이는 그 사람이 균형 감각이 매우 뛰어나다는 것이 된다. 마음과 해석의 문제라는 뜻이다. 이 모든 것들이 팔당역의 창 배치에 들어있다.
신촌역, 화랑대역 옷가게에 깔려 겨우 살아남은 신촌역 신촌역은 동명의 지하철역이 생긴 다음부터 넘버 투로 밀리는 슬픈 운명을 맞이했다. 이후부터는 힘든 나날의 연속이었다. 지하철역과 구별하기 위해 ‘기차’라는 단어를 붙여 ‘신촌 기차역’ 혹은 ‘기차 신촌역’이라고 불러야 했다. 신촌 민자역사 얘기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옛날 신촌역은 완전히 애물단지가 되었다. 시행사 쪽에서 보면 돈벌이에 걸림돌일 뿐이었다. 거의 ‘알박기’수준으로 버티고 있는 걸로 밖에 안 보였을 것이다. 처음에는 완전히 철거하려 했다. 민자역사가 대형 의류매장을 낀 상업시설로 결정되면서 돈벌이에 도움이 안 된다는 단순무식한 논리였다. 여기저기에서 보존운동이 일어났다. 이대를 비롯한 신촌 일대 시민세력들이 연대해서 보존운동을 폈다. 여러 해 동안 밀고 당기기를 한 끝에 결국 새 역사 앞에 옛날 역을 다시 짓는 걸로 타협하고 공사를 진행했다. 어쨌든, 타협의 결과가 지금의 모습이다. “고무신에 껌 붙은 것처럼”, “고목나무에 매미 붙은 것처럼” 거대한 상업 건물 한 편에 애물단지로 빌붙어 있는 형국이다. 이곳의 원래 주인이었는데 세월의 무상에 밀려 공룡 같은 옷가게들에 깔려 있다. 이 오래된 기차역은 늘 불쌍하게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오랜 세월 잘도 버텨왔다.
신촌역, 한국다운 덩어리 미학과 기하학적 비대칭 기차 신촌역은 그렇게 만만한 역이 아니다. 생김새부터 안정적 조형미를 갖추었다. 정육면체 비례를 갖추어서 안정적 덩어리 느낌을 풍긴다. 심심할까봐 지붕 쪽을 툭툭 잘 쳐냈다. 절반 정도 높이에서 45도 각도로 경사지붕을 낸 다음 정상부에서 앞쪽으로 살짝 한 번 더 쳐내 부분 모임지붕을 만들었다. 선의 변화는 적절하고 기하 미학은 경쾌하다. 애교머리를 한 올 내린 격인데 경직되기 쉬운 정육면체 비례에 레몬즙 한 방울 떨어뜨린 것 같은 상쾌한 파격이다. 이런 처리는 매우 한국적이다. 큰 머리형 구성은 한국 특유의 덩어리 미학의 일환이다. 떡의 미학은 그 최고봉이요, 댓돌과 다듬잇돌이 그 뒤를 잇는다. 두상 하나만으로 이루어진 불상도 같은 격이다. 은진미륵에서 볼 수 있듯 미륵불도 이 구성이다. 모두 추억 속의 생활 미학이다. 큰 머리형 구성은 도심에 잘 맞는 조형이다. 시골 간이역이 옆으로 길게 누운 다음 작은 덩어리 몇 개를 나누어 더한 ‘여러 머리 형’ 구성인 것과 대비된다. 도심에서 작은 건물이 여러 덩어리로 나뉘면 무시받기 십상이다. 분산은 허점이 될 수 있다. 기능적으로도 안 맞는다. 엄격한 좌우대칭 창은 이런 전체적 분위기에 적절한 구성이다.
좌우 동형대칭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딱딱하지만은 안다. 기하학적 분할이 뛰어나다. 지붕 경사선의 끝은 정사각형 입면을 수평으로 이등분한다. 출입구 차양의 위치와 일치한다. 눈이 좀 밝은 사람이면 마음속에 선 하나 슥 그어보고 지긋이 웃을 수 있다. 기하 단위들의 어울림에 섬세하게 신경을 썼다. 출입문과 양옆 두 개 창이 수직으로 발기했지만 차양과 그 위의 수평창이 눌러주니 과하지 않다. 마지막으로 간판이 한 번 더 힘을 보탠다. 모자를 잘 씌워 안심할 수 있는 형국이다. 기하를 참 잘 썼다. 수직과 수평 사이의 줄다리기는 어느새 손잡고 빙빙 도는 원무의 어울림으로 발전한다. 잘 섰고 잘 참았으니 그 힘이 즐거운 놀이에 쓰였다. 이쯤 되면 대칭 구도를 비대칭으로 끊어보는 재미를 즐길 수 있다. 차양을 중심으로 위아래의 기하 처리가 대비된다. 아래쪽은 직사각형 세 개가 차지하면서 정형적인 분위기이다. 위쪽에서는 파격을 모색한다. 사선으로 쳐낸 선은 기울기가 완만해서 편안한 수평 느낌을 준다. 위쪽 박공의 급한 사선과 맞장구를 친다. 같은 사선이니 닮겠다는 뜻이고, 기울기가 다르니 진정시키려 든다. 밀고 당기는 양면 작전이다. 그래서 흥겹다. 그 위의 간판은 나중에 붙인 것 같은데 차양 위 창의 파격을 잠시 진정시킨다. 그것도 잠시, 박공 꼭짓점을 부분 모임지붕으로 처리해서 삼각형 고깔을 씌운 꼴이 되었다. 사각형 속에서 수평―수직이 구축한 십자 축 질서를 쿨렁 한 번 흔든 격이다. 끄트머리였기에 그야말로 한 번 ‘쿨렁’으로 끝났다.
단순함이 미덕인 화랑대역, 큰 박공 하나와 넓은 맞이방 화랑대역은 간결하다. 큰 박공 건물 한 채가 전부다. 그 속에 맞이방과 매표소, 역무실이 모두 들어있다. 육군사관학교의 별명인 화랑대 앞에 있는 이 역은 사관생도처럼 반듯하고 단정하다. 정면에서 보면 특히 그렇다. 창과 차양 같은 디테일을 최대한 자제해서 기합 잘 들어간 사관생도처럼 곧은 모습이다. 단순함을 넘어 추상적 분위기까지 느껴지는데 결국 기하학적 덩어리감이라는 근원적 미학을 지향하는 느낌이다. 근원성은 삼원색의 칼라코드가 강화시킨다. 나중에 칠한 것인데, 건축 성격에 잘 맞추었다. 노란 벽면에 빨강색과 파랑색으로 포인트를 주어 삼원색을 갖추었다. 맑은 날 보면 마치 강렬한 세 가지 원색으로 꾸몄던 코닥필름 광고사진을 보는 것 같다.
단순함의 미학은 절묘한 좌우 배치로 더욱 살아난다. 안정적이면서도 흥겨운 조형성을 동시에 갖췄다. 좌우 동형대칭은 아니지만 비대칭적 대칭이다. 좌우 동형대칭이란 말 그대로 가운데를 축으로 삼아 접으면 좌우가 똑같이 겹친다는 뜻이다. 이런 구성은 자칫 단조로우면서 권위적이 되기 쉽다. 이것을 피한 것은 변화도 주고 친근하게 보이고 싶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비대칭적 대칭이 그 조형 전략이다. 비대칭적 대칭이란 언뜻 보면 비대칭으로 보이는데, 천천히 따져보면 좌우 조형감각이 대칭이 된다는 뜻이다. 이 전략 속에는 두 가지 의도가 숨어있다. 좌우 동형대칭의 단조로움은 피하되 너무 번잡해지는 것 또한 피하겠다는 양면성이다. 흥겨운 율동감이 느껴지면서도 흐트러지지 않고 절제력이 묻어난다. 좌우가 따로 놀지만 균형은 확실히 잡고 있어서 불안해 보이지 않는다.
맞이방에 들어서면 넓은 공간감이 대표적 특징이다. 여러 다른 간이역들보다 확실히 넓다. 이번에도 친숙함을 계속 유지하는데 정사각형의 비례감이 그 비밀이다. 건축적으로 보면 ‘내외부 일치’라는 것으로 외관에 나타난 큰 머리형과 그 속 공간이 일치한다는 뜻이다. 이는 솔직성으로 건축적 미덕 가운데 하나에 해당한다. 겉 다르고 속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외관을 보면서 가졌던 큰 머리의 인상이 안에 들어와서도 동일하게 계속되면서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 이것 또한 상식의 힘이지만 살다 보면 지켜지기 힘든 경계의 미학이요, 더욱이 이것을 건축적으로 구현해 보인다는 것 또한 쉽지 않은 일이다. 하다 보면 과해지고, 아차 싶어 줄이다 보면 빈약해지기 쉬운 게 인간의 부족함이다. 상식과 중용이 가장 지키기 힘들다는, 그렇기에 진부하지 않고 오히려 더 큰 가치를 갖게 된다는 역설의 미학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