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를 펴시기 바랍니다. 룻기는 다른 책에 비해서는 조금은 익숙하죠. 해마다 어버이 주일이 돌아오는 바람에. 그래도 룻기라는 책을 차근차근 다 설명하지를 않거든요. 우리는 오늘 잠간 룻기라는 책을 살펴보겠습니다. 룻이 살았던 때가 바로 사사들의 때입니다. 사사시대 그 어간인데 언제인지는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1장 1절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그냥 흉년이 든 것이 아니고,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흉년이 들었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 사사기를 읽어왔기 때문에,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가 어떤 때냐? 구약시대의 종교의 암흑기. 그들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했더라. 계속 반복되는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들었다. 뭘로 받아야 합니까?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까?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들었다는데 뭘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이런걸. 정리하지 않고 그냥 막연히 읽었다 그건 아무런 의미도 없고 시간과 정력 낭비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그 의미를 알고, 역사적 배경과 그 책이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하신지 그런 걸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그 책이 언제,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어디서, 베들레헴에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 이렇게 기본을 가지고 명료하게 정리를 해야 합니다. 모든 책이 마찬가지입니다. 책 한 권을 통전적으로 보아야지, 그 책의 어디에 잘된다 복준다는 없는가 하여 요절을 찾아서 일절 요절을 외우면 안 됩니다. 우리교회에서는 요절 못외우게 해요. 혹시 여러분들도 요절을 빼서 들고 다닌 분들이 있으면, 원래 있던 곳에서 다 갖다 꽂아 놓으세요, 그 요절을 뽑아 들고 다닌 사람들은 절대 성경공부를 안됩니다. 요절 앞에도 안보이고, 요절 뒤에도 안보입니다. 요절이 너무 눈이 부시기 때문에 아무 것도 안보입니다. 그런 신앙은 전혀 신앙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전부 다 온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요절을 외우라고 암송하라고 하던데, 저 혼자만 요절 외우지 말라고 할 것입니다. 여러분, 시계를 보세요. 지금이 4시 11분으로 가리킵니다. 보통 시계를 볼 때, 시 침하고 분침을 보지요? 초침을 보지 않고 실제로는 시침 분침을 봅니다. 그러면 뭐하려 시간을 다 가지고 다닙니까? 시침하고 분침만 가지고 다니지. 그 두개만 보니까, 시침하고 분침만 갖고 다니지, 그럼 몇 시인지 알겠어요? 그런 것처럼 성경 요절만 빼가지고 다닌 사람들은 성경을 절대로 배우지를 못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이 성경을 배우지 못하느냐? 신비주의자. 결코 성경 공부를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막 어떤 방언을 받겠다는 사람들은 방언을 한번 받으면, 그 다음부터는 공부를 안 합니다. 자기가 성령의 은사라고 방언을 받으면, 자기가 성령의 은사인 줄 알고, 이산 저산 더 신비한 것, 더 쇼킹한 거, 더 짜릿한 것, 더 뿅 가는 것을 추구하니까,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자기욕심, 자기소원이 꽉 들어찬 사람은 성경공부가 안됩니다. 우리가 성경공부를 안된 이유를 쭉 빼면, 제일 기본이 요절주의, 기복주의, 신비주의, 체험주의, 자기중심주의,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통해서 자기 소원을 이루려고 하는 자기 욕심이 꽉 들어찬 사람은 성경공부를 할 수가 없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빈 마음, 열린 마음, 빈 마음을 가지고, 조용히 하나님의 음성은 온전히 들으려고 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사기, 룻기 할 때,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에 하면서 배경이 나옵니다. 대개 기승전결할 때 그 땅에 흉년이 들었다 하는 거죠. 흉년이 들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가 아닙니다. 저주는 끝장이에요. 징계는 끝장이 아니죠. 징계는 과정입니다. 과정. 이거는 심판도 아닙니다. 심판도 끝장입니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심판인지, 저주인지, 징계인지, 그걸 알아야 합니다. 물질적인 손해라든지, 이런 것은 제일 가벼운 것에 속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징계할 때, 물질적 경제적 손해, 어려움, 이런 것은 아주 제일 가벼운 징계입니다. 하나님이 때리면서 네 놈 종아리 걷어라. 딱 때리는 거에요. 그 정도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때릴 때 때리면 어떻게 하느냐? 때리면 맞아야 합니다. 그런데 때릴 때 자세가 세 가지가 나옵니다. 어떤 자세이냐. 첫째가 대들어요. 반항을 하는 사람이에요. 둘째, 도망을 가요. 메롱하면서 도망을 갑니다. 세 번째는 매를 순히 받고, 징계를 순히 받고 회개를 합니다. 이게 기본입니다. 이런걸. 배워야 성경을 배운 겁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는 말을 듣지 않으면 때립니다. 사랑하지 않고 그냥 버린 자식은 아무 짓 하던지 손을 대지 않습니다. 무슨 죄를 짓든지 내버려 둡니다. 그런 자식은 버린 자식입니다. 하나님의 유기. 내버려두고 내버려둡니다. 성경에는 여러 군데에 버린 자식에 대해서 말을 합니다. 받으시는 아들들마다 근실히 채찍질한다는 겁니다. 아들이니까. 사생자라면 몰라도 아들이라면 반드시 징계하고. 그래서 하나님에 징계할 때, 가벼이 여겨도 안 되고 도망가도 안 되고 회개해야 합니다.
여기 이 사람을 잘 보세요. 그쯤 했으니까 봅시다.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우거하였는데,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여러분 줄을 그으세요.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유하더니’ 잘못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때릴 때 거기서 징계를 달게 받고, 매를 순순히 받아들이고 회개하고, 받은 징계 자체가 흉년이기에, 당연히 흉년이 어렵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더 어렵습니다. 그 가난한 사람들이 있으면 돌아보고 해야, 징계를 받아들이는 자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도망을 갔습니다. 가도 갈 곳이 따로 있지, 모압 지방으로 갔습니다. 그 곳은 10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는 저주받은 땅으로 간 거에요. 저주받은 땅으로 갔어요. 3절/ ‘나오미의 남편 엘리멕렉이 죽고’ 그러니까 때릴 때 가볍게 때릴 때 그걸 대들거나 도망을 가거나 잘못 가면 죽는 수가 있습니다. ‘죽고 나오미와 그 두 아들은 남았으며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아내를 취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이 나오미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습니다. 남편 죽는 것을 보면 질겁을 하고 기겁을 하고 그냥 회개하고, 뉘우치고 각성하고 그냥 돌아와야 할텐데, 미련을 대고 거기서 모압 여자들을 둘씩이나 며느리를 보았습니다. ‘거기 거한지 십년쯤에 말론과 기룐 두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여러분 이야기가 굉장히 빨리 진전되지요? 5절까지가 벌써 10년이 넘어갔습니다. 결론은 남자란 남자는 다 죽고, 과부만 남았는데, 청산과부 둘하고 늙은 과부 하나하고 과부협동 조합이 되어 버렸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하기는 어떻게 해. 빨리 심방을 가봐야지. 그래서 심방을 가보니까 처량하게 되었습니다. 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여. 가 보니까 댓돌 위에 흰 고무신이 세 켤레가 나란히 있습니다. 방에서 들리는 한숨 쉬는 소리. 나오미가 한숨을 쉬면, 오르바가 한숨을 쉬고, 룻이 또 한숨을 쉬고. 그 때는 텔레비전도 없고 인터넷도 없고 잡지도 신문도 없고, 애도 없고 손자도 남자도 없고, 무슨 낙으로 살겠어요? 마주 보면서 한숨 밖에. 여러분, 한숨 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자고 나서 한숨, 또 자고 나서 한숨 쉬면 며칠이나 버티겠습니까? 사람이 조금 어렵게 살아도 믿음이 있어야 되고 소망이 있어야 되고, 사람은요, 하다못해 거짓 소망이라도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내일은 오늘보다 낫겠지 하는 거짓 소망이라도 있어야 오늘을 참습니다. 금년 농사는 망쳤지만, 내년 농사는 낫겠지. 잘될지 안 될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거짓 소망이라도 있어야 사람이 살 것 아닙니까?
사람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을 할 사람도 없고, 사랑을 받을 사람도 없다면, 믿음은 하나님을 팔아먹고 왔는데, 뭘 믿을게 있어야지, 소망은 여자가 무슨 소망이 있어요. 남자가 있어야 소망이 있지, 사랑은 사랑의 대상이 다 죽었기에 남은 것은 한숨 밖에 없습니다. 셋이 마주 보면서 처량하게 그것도 나오미는 이억만리에서 와서 남편 하늘같이 의지하던 남편 잃어 버렸지, 생태 같은 아들 둘이나 잃어버렸지. 지금 같으면 여자들 셋이서 식당 같은 걸 하면 되지 않겠는가만, 한국 사람들은 하다 안 되면 무조건 식당을 합니다. 왜냐하면 식당을 해서 망해도 그릇은 남기 때문이죠. 세계에서 식당이 제일 많은 나라가 한국입니다. 그때는 여자들은 살아갈 길이 없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여성들이 홀로 되면 살아갈 길이 없습니다. 그냥 자기 몸을 종으로 팔던지, 아니면 몸을 팔던지,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마주보며 한숨만 쉴 수 밖에 없었는데, 6절에‘그가 모압 지방에 있어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들었으므로’ 아니 흉년이 들면 한해 두해지, 연부년 계속해서 흉년이 들지를 않습니다. 얼마 지나서 하나님께서 양식을 또 주셨다는 것이지요. 그 소식을 듣고 나니까, 고향 생각이 간절해 집니다. 나오미가. ‘이에 두 자부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으로 돌아오려 하여 있던 곳을 떠나고, 두 자부도 그와 함께 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행하다가, 나오미가 두 자부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와 나를 선대한 것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너희로 각각 새 남편의 집에서 평안함을 얻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 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자, 나오미가 처음에 여기를 떠나자고 일어서는 데, 그것은 같이 며느리들하고 거기를 떠나자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떠나버려야 이 젊은 것들이 재가할 수 있을 것 아니에요? 시어머니가 있으면 시어머니, 나 재혼 할래요. 그리할 수 있겠어요? 못하니까, 나오미가 그래도 센스가 있는 여자입니다. 자기가 내가 떠나야 되겠다, 하고 헤어지자고 하니까, 세상에 그래 살아도 또 정이 들어가지고 헤어지지 못하겠다고 따라 붙는 데, 그래가지고 헤어지자고 하자, 울도 못하고 너무 한꺼번에 엄청난 일이 겹치니까, 눈물도 조금 슬퍼야 나지, 워낙 큰 슬픔이 닦아오면 눈물도 안 나옵니다. 정신도 하나도 없고 울도 못하고 있었는데, 이제 헤어지자고 하니까. 나오미는 남의 집의 귀한 딸을 둘 씩이나 데려다가 청산 과부를 만들어놓고 나오미가 뭐 내 팔자야 하고 울지도 못합니다. 반대로 이 젊은 오르바하고 룻은 시어머니 앞에서 울지를 못합니다. 시어머니는 남편을 잊어버리고, 아들 둘 다 잃어 버렸기에 젊은 것들이 함부로 울 수도 없습니다. 눈물도 못 비치고 한숨만 쉬고 있다가 헤어지자고 하니까, 이제 막 참았던 눈물이. 눈물의 성분이 복잡합니다. 울음보가 터져 나오니까, 방성대곡하고 실컷 울었어요. 울고 나니 후련 했을 겁니다. 문제는 해결이 안 되어도 실컷 울고 나면 후련합니다.
나오미가 내 딸들아 돌아가라. 나는 이제 아무 소망이 없어. 나는 그렇지만 너희는 그럴 필요가 없다. 다른 것도 없으니 얼마든지 새 출발을 할 수 있다.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해서 어떤 남자를 얻어서 아들을 낳아서 그 아들을 키워서 너희의 신랑감으로 할 때까지 그 때까지 어찌 기다리겠느냐? 내가 너희들도 보니까 솔직히 너희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더 미어지니까, 너희가 낸 눈앞에 안보여야 내가 마음이 편하지. 하고 등을 떠 미니까, 울다가 오르바는 생각을 해 받겠지. 그렇지, 뭐 따라가 봐야 뭐가 있겠느냐. 하고 시어머니 볼에 뽀뽀하고 자기 집으로 갔습니다. 이거 뭐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때 룻을 보고 네 동서도 갔으니 너도 따라가라 하고 등을 떠밀었더니 15절 ‘나오미가 네 동서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맹세를 해 버립니다. 맹세를 해 버리면 옛날 사람들은 더 이상 말을 못합니다. 그 맹세가 임하면 큰일 나니까. ‘나오미가 룻의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보통 우리가 설교를 할 때 룻을 보고 효부 룻이라 하면서 어머니 곁에 끝까지 남아주었다고 칭찬하고 하는데, 맞는 말이죠? 맞는 말인데, 내가 룻을 만나 물어보았습니다. 자기도 왜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느냐? 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선수를 빼앗겼답니다. 가려면 먼저 가야한데, 오르바처럼 동작이 빨라야 됩니다. 오르바가 먼저 가 버렸습니다. 자기 혼자 남았습니다. 어머니 나도 갈래요. 빠이 빠이 할 수 있겠어요? 여러분, 자매들 대답 좀 해보세요. 자신이 있습니까? 어머니 잘 가세요. 나도 갑니다. 할 수 있겠어요? 안간 게 아니라 사실 못간 것입니다. 사람 같으면 못갑니다. 가려면 오르바처럼 먼저 가야지. 그런 것을 보면 룻이 속이 깊은 여자입니다. 마음씨가 착하고 속이 깊은 여자입니다. 대개 여자들은 속은 깊은 게 어려운데, 여기 여자들 말고 다른 데. 여자들은 속이 안 깊은데 룻은 속이 참 깊은 여자입니다.
맹세를 하여 할 수 없이 같이 오는데 ‘이에 그 두 사람이 행하여 베들레헴까지 이르니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을 인하여 떠들며 이르기를 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나오미란 말은 기쁨, 희락, 우리나라 식으로 하면 희순이 입니다. 정말 늘 기뻐하고 늘 명랑하고 늘 행복해야 할 희순이인데 그 마을 사람들이 이게 희순이가 아니냐. 할 때 나오미가 이르기를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마라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쓰다는 말입니다. 인생의 쓴맛을 보았다.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이 사람들이 모압으로 갈 때, 가난하고 어려워서 간 게 아닙니다. 상당히 풍족해서 나갔어요. 이게 문제입니다. 사람이 만약에 정말 먹고 살 길이 없어서 어디로 갔다면, 그게 큰 문제가 안될 수 있습니다. 먹을 것이 없을 때 아브라함도 애굽으로 갔었습니다. 생명이 우선이기 때문에, 정말 먹고 살수 없으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다윗이 시장할 때 한 것을 잊지 못했느냐? 제사장 외에는 먹을 수 없는 것을 다윗이 제사장도 아니면서, 놉에서 진설병을 먹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시장할 때 한 것이기 때문에, 생명이 우선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걸 허물로 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한데 이 사람들은 풍족할 때 나갔어. 이건 진짜 문제가 됩니다. 만약에 흉년이 들면 부자 여유 있는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챙기고 돌보며 창고를 열어서 다 나누어야지, 꾸어줄지라도 같이 살려야 합니다. 싹 다 팔아 뭉쳐서 자기들만 잘살겠다고 나갔단 말입니다.
내가 풍족하여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나이다. 자 이 풍족이라는 게 꼭 재물만 두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남편 있겠다, 아들 있겠다, 재물 있겠다,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이 그렇게 나갔는데, 돌아올 때는 남편도 잃어버리고 아들도 잃어버리고, 한 십년 있다 돌아올 때는 재물도 다 까먹어 버리고, 비어서 빈손으로 돌아오게 했다. 이걸 나오미가 압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은즉,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나는 나오미가 아니라 마라다.’ 말마라 나는 쓴맛을 보았다.
‘나오미가 모압 집에서 그 자부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래도 그들이 돌아올 때가 때가 보리추수를 시작할 때 베들레헴에 이르렀다.’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아닙니다. 살고자 하면 사는 길이 있습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살고자 하는 의지가 있으면 길이 있습니다. 너무 쉽게 요즘 사람들이 자살을 하는데, 살고자 하면 사는 길이 있습니다. 미국 캐나다 접경에 있는 나이아가라 폭포에 가면, 자살을 많이 하는 곳이 있습니다. 자살을 하는 곳이 화려하거든요. 폭포의 물 안개가 있고, 환상적이니까, 이왕이면 죽어도 화려하게 죽겠다고 해서 그 곳에 가서 죽습니다. 하도 자살을 많이 하니까, 거기다가 한번만 더 생각해 보시오 라고 써 놓았어요. 바람이 불어서 써놓은 글이 돌아가 버렸어요. 자살을 하려고 들어갈 때는 못보고 들어갔다가, 막상 죽기보다는 살아보자고 다시 마음을 먹고 돌아 나오는데, 보니까 ‘한 번 더 생각해 보시오’ 그래서 빠져 죽어 버렸습니다. 한번만 생각해보라 말도 들어갈 때 생각하는 것하고, 나올 때 생각하는 것하고, 다르지 않습니까. 믿거나 말거나. 그러니까 죽을 각오를 하면 사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2:1절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 중 유력한 자가 있으니 이름은 보아스더라.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나로 밭에 가게 하소서. 내가 뉘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갈지어다.’ 사실은 룻이 이삭을 주우러 가겠다는데, 어머니되는 나오미 입장에서는 가라 하기도 그렇고, 가지 말라고 하자니 굶어 죽을 판이니 입장이 곤란합니다. 아마 그때 룻의 나이가 열여덟이나 스무 살이 안 되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고대 사회에서는 스무 살까지 늙도록 놔두지 않습니다. 대개 열다섯, 열여섯에 시집을 보냅니다. 스무 살도 채 안 되었는데, 그것도 이방에서 온 여자야. 임자도 없어 남정네들 일하는데 보내 봐. 전부 남자들이 키득키득 하면서 임자도 없느니, 하면서 낄낄대고 웃고 하면, 그건 얼굴에 불을 담아 붙는 거죠. 그런데 보내야 되니까, 나오미는 가라 하지도 못하고, 가지 말라고 하자니 목구멍이 포도청이니까.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성경에 우연히 라는 말이 다섯 번 나오는데, 낱낱 보면 우연이 아닙니다. 아주 필연적입니다. 하나님의 인도입니다.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의 밭에 이르었더라.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으로 부터 와서 베는 자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주시기를 원하나이다.’ 노사 관계가 이 정도는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 이렇게 되겠습니까? 뭐 빨간 띠 머리에 매고 결사반대, 그건 데모하는 건 좋은데, 머리에 붉은 띠 좀 매지마. 제발 거참, 볼 때마다 창피하고 민망한 거에요.
저도 원래 데모 왕초입니다. 중학교 다닐 때, 교장 쫓아내고, 신학교 다닐 때, 데모 대책 위원장되서 이사장 쫓아내고, 노회 또 와가지고 뒤집어 엎어가지고 길바닥에 나앉고. 그래도 머리에 이런 건 안합니다. 아주 깨끗하게 젠틀하게 하는 겁니다. 데모라는 것도 품위가 있어야 합니다. 손 딱 놓고 가만히 있어. 그냥. 막 노래 이런 것 하지 말고, 추태 부리면서.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저는 학교 문제로 투쟁할 때, 3학년 4학년 제쳐놓고 2학년이 전교 대표로 해서 이사장 밀어내기를 하는데, 수업거부. 그런 것 안합니다. 우리는 등교를 거부해 버립니다. 전부가 집에 가서 가만히 있으라고 했습니다. 내가 다 타결되면 연락할테니까. 그러기에 교수라든지 이사회라든지 와 가지고 학생들을 설득을 해봐야 하는데, 학생들이 콧배기가 보여야 설득을 하지. 역대 신학생 선배 중에 다 데모 앞장 섰다가 다 목이 짤렸습니다. 데모하고도 잘리지 않는 것은 제가 유일한 사람입니다. 잘리게 하는 것은 데모가 압니다. 그리고 완전 정상회담하듯이 아주 단독으로 가서 제가 그랬지요. 학생들 전교생에게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그러니까 여러분, 이 학교를 살리려면 정말 죽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죽는다는 것은 학교를 없애버리고 학교를 문 닫을 각오를 하고 시원치 않는 학교는 없어져야 하니까. 자퇴 원서를 다 내라. 자퇴원서. 이게 관철되지 않으면 우리 전교생이 학교를 자퇴한다는 원서를 내 손에 주면 내가 가서 협상을 하겠다. 그런데 전교생이 하는데 4학년들은 여태까지 하고 조금만 하면 졸업인데 도저히 안 쓰는 겁니다. 그런데 1.2.3 학년은 노전도사의 말이 맞다 해서 거의 70 몇 %가 다 썼습니다. 자퇴 원서를 가지고. 전권 위원장하고 협상을 합니다. 제가 어린 아이도 아니고 장난이 아닙니다. 보세요. 전교생의 자퇴 원서가 있습니다. 이것을 뿌려버리면 이 학교는 오늘로 문을 닫습니다. 전권위원장 목사님 시대에 이 학교 문을 닫았다고 하면 되겠소. 안되겠소. 안되겠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내 놓은 안은 절충이라든지 협상이 아니고 100% 관철입니다. 이건 대화 하자는 게 아니니, 읽어보시고 옳으면, 100% 들어주던지 안 들어주던지 내가 날려버리면 학교 끝나버리니까, 시골 뽕나무 밑에 나오는 위원장은 겁대가리가 없는 거죠. 내가 뭐 쫓겨나봐야 지리산 밖에 더 갑니까? 전부 다 자퇴원서를 갖고 있기에, 뿌려버리면 끝나는 거에요. 전교생을 놓고 설득할 때 그랬어요. 우리가 이 학교를 베자. 싹 베어 버리면 그 뿌리에 생명력이 있으면 새로운 그루터기가 움이 돋아 날 것이고, 베어도 만약에 베었는데 새로운 움이 돋아나오지 않으면, 이미 뿌리부터 죽은 거다. 자체가 그러니까, 이러나저러나 베자. 오케이? 자퇴원서를 쓴 것입니다. 연세가 많은 전권 위원장이 버들버들 떱니다. 나는 안 떠는데 그래서 열 가지를 내어놨는데, 한 가지라도 빼도 안 되고, 그대로 관철되어야 하고, 보라고 이게 다 실천되어야 할 것이 아니냐고. 그래가지고 부산 동노회 전도사 때 가서 노회원들한데 진정서를 올리면서. 진정서가 아니고 협박성이지요. 여호와의 일을 태만히 하는 놈들은 저주를 받을 거라고. 학교가 구멍가게도 30년이 지나면 모양이 바뀔텐데, 부산노회, 경남노회, 진주노회, 울산노회, 동노회, 5개 노회가 노회목사 장로가 불알 차고 이게 뭐 하는 거냐. 당시에 백경숙이라는 여자가 치마를 두르고도 당시에 산업 대학 4년제 대학을 만들었는데, 믿음하고 기도하는 데 무슨 학교를 거지같이 하고 있느냐? 며 독한 말을 써서 보냈는데, 아마 지금도 어디에 그 원고가 있을 겁니다. 전 노회원들에게 뿌려놨더니, 노회가 발칵 뒤집어져가지고 진짜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다 관철해가지고 제가 안 짤리고 이사장이 밀려나고 그리할 때도 우리가 붉은 띠 그런 것 안 매었습니다. 보이는 머리에 기름을 쫙 바르고 나와야 합니다. 싸움을 해도 좀 품위있게 해야지요. 너무 노동 문화가 좀 천박합니다. 좀 멋있게 젠틀하게 할 수 없어요? 앞으로 좀 이런 것도 달라져야 합니다.
5절 ‘보아스가 베는 자들을 거느린 사환에게 아르되, 이는 뉘 소녀냐? 베는 자를 거느린 사환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나오미와 함께 모압에서 돌아온 모압 소녀인데 그의 말이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하였고,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그들의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왜 보아스가 자기 소녀들에게 건들리지 말라고 했을까요? 괜히 남자들은 건들어 보고 싶어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베들레헴이나 한국이나 그건 똑같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성경이 얼마나 진실하게 썼는지. 그 남자라는 것은 변한 게 없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베들레헴이나 한국이나 똑같습니다. 건들리지 말라 했다.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의 길어 온 것을 마실지니라. 룻이 땅에 엎드려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어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모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들렸느니라.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룻이 가로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시녀의 하나와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시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거참 인사를 참 잘합니다. 그렇죠? 사람이 은혜를 입으려면 인사를 잘해야 합니다. ‘식사할 때에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 네 떡 조각을 초에 찍으라. 룻이 곡식 베는 자 곁에 앉으니 그가 볶은 곡식을 주매 룻이 배불리 먹고 남았더라. 룻이 이삭을 주우러 일어날 때에 보아스가 자기 소년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그로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며 또 그를 위하여 줌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로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 하니라.’
제가 성경을 읽다가 참 여러 군데 감동을 받은 데 있지만 이 장면은 참으로 놀라운 곳입니다. 우리가 어려서 시골에서 보리를 베도 보고 이삭을 주어 봤거든요. 이삭을 주운 사람이 오죽하면 이삭을 줍겠어요? 근데 보통 우리가 이삭 주운 사람이 나타나면, 일군들에게 흘리지 말라 뒤에 줍는다. 우리는 대개 흘리지 말라. 뒤에 줍는다고 할 건데, 이 보아스는 일군들에게 일부러 줍는 사람을 생각해서 조금씩 뽑아서 흘리라고 합니다. 모르기는 해도 아마 창세 이후로 유일한 사람이 아니겠나. 그래서 그날 룻이 많이 주었어. 아니 흘러주는데 누가 못주어. 남자들이 서로 많이 흘려 주는거야. 많이 흘러주는 쪽으로 예쁜 여자가 따라오니까. 서로 막 뽑아 주어가지고 억수로 많이 주었는데, 떨어보니까 보리가 한 말이 넘는 거야. 보리 한말이면 보리는 한 번에 밥이 되지 않기에 두 번을 삶아야 되는데, 뚱뚱 부어서 량이 많이 불어납니다. 보리 한 말 같으면 고부간에 먹으면 한 달은 먹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룻이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 그 주운 것을 떠니 보리가 한 에바쯤 되는지라. 그것을 가지고 성읍에 들어가서 시모에게 그 주운 것을 보이고 그 배불리 먹고 남긴 것을 내어 시모에게 드리매, 시모가 그에게 이르되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 너를 돌아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 룻이 누구에게서 일한 것을 시모에게 알게 하여 가로되 오늘 일하게 한 사람의 이름은 보아스니이다. 나오미가 자부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복이 그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그가 생존한 자와 사망한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의 근족이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 하나이니라. 모압 여인 룻이 가로되 그가 내게 또 이르기를 내 추수를 다 마치기 까지 너는 내 소년들에게 가까이 있으라 하더이다. 나오미가 자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너는 그 소녀들과 함께 나가고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 이에 룻이 보아스의 소녀들에게 가까이 있어서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치기까지 이삭을 주우며 그 시모와 함께 거하니라. 룻의 시모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로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함께 하던 시녀들을 둔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이 아니냐 그가 오늘 밤에 타작마당에서 보리를 까불리라. 그런즉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마당에 내려가서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고 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가서 그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그가 너의 할일을 네게 고하리라. 룻이 시모에게 이르되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 하니라. 그가 타작마당으로 내려가서 시모의 명대로 다 하니라. 보아스가 먹고 마시고 마음이 즐거워서 가서 노적가리 곁에 눕는지라. 룻이 가만히 가서 그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웠더라. 밤중에 그 사람이 놀라 몸을 돌이켜 본즉 한 여인이 자기 발치에 누웠는지라. 가로되 네가 누구뇨?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시녀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당신은 우리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가로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빈부를 물론하고 연소한 자를 좇지 아니하였으니 너의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내 딸아 두려워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 나의 성읍 백성이다 아느니라. 참으로 나는 네 기업을 무를자나 무를 자가 나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으니 이 밤에 여기서 머무르라. 아침에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려 하면 좋으니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코자 아니하면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행하리라. 아침까지 누울지니라.’
아침까지 재워서 보아스가 자기 이불 밑에 들어온 여인을 손도 안 대고 가만히 재워서 아침 일찍이 깨워서 그리고 보리를 여섯 번 대어서 주면서 시어머니에게 가는 데 빈 손으로 가면 안되지. 이걸 이고 가거라 해서 들어왔습니다. 나오미는 밤새도록 일이 어찌 되었을까 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룻이 아침에 날이 밝기 전에 보리를 이만큼 이고 왔어요. 애야, 어찌 되었느냐고 물으니 이차여차 말하더이다. 그래 그 어른이 항상 그렇지. 원칙을 무시하지 않는 어른이다, 그러나 그 어른은 일을 성취할 때까지 쉬지 않을 거니 기다려 보자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다.
룻기4:1절 ‘보아스가 성문에 올라가서 거기 앉았더니 마침 보아스의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그가 와서 앉으매 보아스가 성읍 장로 십인을 청하여 가로되 당신들은 여기 앉으라. 그들이 앉으매’ 사실은 우리가 장로가 된 것은 이런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을 도우라고 된 거지요. 거야 그렇지. 우리가 농번기다 하고 차일필하고 사실 뭐 엘리멜렉은 죽은 사람은 죽은 거고, 산 사람은 살아야 되는데, 이참 무관심하게 차일필일한 게 사실이요, 근데 지금 책임을 두고 말하면, 이 사람이 나보다 한 촌수가 더 가까우니 물어볼 일이 있으니, 물어보겠는데, 네가 물으면 물을 것이요. 네가 물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물을 것이다 하니 해야지요. 그냥 해야 되는 게 아니라, 나오미가 팔아먹었던 전답을 다 물여서 돌려주고, 이거 이거를 다 해야 한다고 하니, 아니 장로님이 알다시피 내 살림이 뻔한데 나는 부담이 되서 못합니다. 하고, 신발을 벗고 다음 타자에게 넘겨줍니다. 신발을 받아가지고 다음 타자가 퇘해 가지고 그 신발을 가지고 형제 집세우기를 즐겨하지 않은 놈은 이렇게 한다면, 만인 앞에서 때립니다. 그 다음부터는 형제 집 세우기를 즐겨하지 않았다고 신 벗기운 자의 집이라고 지목 당하고 왕따는 기본이고 그게 법인데, 율법은 그렇지만 보아스가 워낙 점잖은 사람이고, 베들레헴이 인심이 좋은 곳이기에 그렇게는 하지 않고. 보아스가 기업 물을 자의 책임이 합법적이다고 절차를 장로가 다 보증을 합니다.
4장 9절 ‘보아스가 장로들과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내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산 일에 너희가 오늘날 증인이 되었고,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취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잇게 하여, 그 이름이 그 형제 중과 그 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않게 함에 너희가 오늘날 증인이 되었느니라.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가로되 우리가 증인이 되노니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 집을 세운 라헬,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너로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케 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이 소년 여자로 네게 후사를 주사, 네 집으로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 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에 보아스가 룻을 취하여 아내를 삼고 그와 동침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그로 잉태케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여인들이’ 그 여인들이 누구냐면 지난번에 떠들며 이르기를 이게 나오미가 아니냐 하던 그 여인들입니다. 그 여인들인데 그 마을에서 가장 유력한 보아스가 그 집을 챙겨주고 거두어 주고 하니까 갑자기 분위기가 변해서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자부가 낳은 자로다.’ 아니고 베들레헴의 여자들도 수다가 유명합니다. 온 동네가 부산하고 떠들썩한 거죠. 사실은요, 보아스가 나이가 한 50에서 60이 넘었습니다. 노인네입니다. 룻은 스무살 안팎입니다.이게 보아스가 룻에 집에 가서 무슨 말론의 후사를 잇게 한 게 아닙니다. 그런 수혼법이 아니고, 다른 말고 하면 먹고 살 길이 없으니까, 나오미가 룻을 보아스 집에 팔아 넘긴 겁니다. 보아스가 룻을 사는 겁니다. 룻을 팔아가지고 자기가 전에 팔았던 전답을 다시 물러내서, 생업을 잇게 하는 건데, 룻이 보아스 집에 가서 아들을 낳아서 보아스의 아들이 되게 하는 겁니다. 그때 까지 보아스는 연세가 많은데도 후세가 없었는가 봐요. 한쪽은 후사가 생기고 한쪽은 나오미는 먹고 살 길이 생긴 것이고, 룻은 또 자기의 안식처를 얻은 것입니다.
가끔 질문이 들어옵니다. 왜 보아스가 룻의 방에 들어가서 아들을 낳아가지고, 말론의 아들이 후사가 된 게 아니고 거꾸로 되었습니까? 하던데 이거는 수혼법이 아니고, 우리 같으면 후사가 아니고 씨받이입니다. 씨받이. 씨받이처럼 후처로 팔려간 것입니다. 일반 약삭빠른 요즘 여자들 같으면, 내가 할아버지한테 어떻게 들어가요. 하면서 옥신각신할 건데, 세상에 나오미가 가라고 한다고 해서 갔습니다. 그 보아스가 감격해 하는 게 3장 10절 ‘가로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빈부를 물론하고 연소한 자를 좇지 아니하였다.’ 연소한 자 젊은 남자를 추구하지 않고 시어머니가 시키는 데로 다 했구먼. 그래 시어머니가 너를 나한테 팔겠다고 한 모양인데, 그걸 그대로 시킨다고 다 했나 하고 보아스가 참으로 감격을 합니다.
4:16절 ‘나오미가 아기를 취하여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그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주되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 나오미가 낳은 게 아니죠. 맨날 업고 다니기를 나오미가 업고 다니니까, 놀려 먹는 겁니다. 하여 그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비인 이새의 아비된 거죠. 간추리면 야곱에게서 유다, 유다에게서 베레스, 베레스의 세계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았고,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첩보원 살몬을 낳았고, 살몬은 여리고 기생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모압여자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았더라 하는 걸 보면, 다윗의 족보를 챙겨 보는 중에 이런 그림 같은 이야기가 나온 거에요. 다윗이 어느 날 베들레헴에서 양치기가 갑자기 그냥 왕이 되고 나니까, 다윗이 이 가문이 어떤 가문이뇨 하고 거슬러 올라가서 조사를 하는 중에, 이 그림 같은 이야기가 보리밭의 러브 스토리. 이 칠흑 같은 사사기, 황량한 사막 같은 곳에서 오아시스같이 사랑과 인정의 샘이 솟아나는 그런 아름다운 이야기가 나온 거에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해마다 오순절 때 전 국민이 이 책을 읽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해마다 히브리 달력으로 4월 9일에 예레미야 애가서를 읽습니다. 그리고 부림절은 에스더서를 읽습니다. 그리고 유월절에는 아가서를 읽고, 초막절에는 오경을 읽습니다. 다 명절마다 읽는 책이 있습니다. 우리는 뭐 성탄절도 안 읽고, 부활절도 안 읽고, 감사절도 안 읽고, 아무것도 안 읽고. 이런 책이 룻기라는 책입니다. 사실은 뭐 룻 이야기가 아니라, 다윗의 족보를 챙기는 중에 나오는 겁니다. 이야기는 결국은 모든 이야기는 다윗의 이야기를 끌고 가려고 하는 겁니다. 룻을 소개하려고 한 게 아니에요. 그런데 이 이야기가 너무 감동적이고, 룻은 이방여인 모압여인. 정말 불행하게 되었지만 하나님께 돌아오니까, 그런 여자를 이용해서 하나님도 선물을 준비하신 겁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 사람이라도 하나님을 등지고 삐딱이 가는 사람은 죽는 수가 있고, 10대 뿐만이 아니고 천대까지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는 저주 받은 땅에서라도, 그래도 하나님께 돌아오니까, 그런 여자를 위해서라도 선물을 준비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수가성 우물가에서 여자를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뭐 예배가 어쩌고 하다가, 예수님께서 네 남편을 데리고 오라 했어요. 갑자기 허를 푹 찌릅니다. 여자가 또 순발력 있게 젭싸게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합니다. 예수님께서 없기는 뭐 없어 하지 않고 그래 네 말이 옳도다. 예수님은 항상 네 말이 옳도다고 합니다. 이게 예수님의 타고난 대화기법입니다. 네가 전에는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도 살고 있는 사람도 네 남편이 아니니까, 네가 남편이 없다는 말이 맞도다. 항상 예수님은 네 말이 많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여자가 바로 내가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예수님께서 네가 말일 하나님의 선물과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군인 줄 알았다면, 네가 오히려 물을 달라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너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었을 거야. 여러분, 이 전에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살고 있는 남자도 자기 남자도 아니라. 이런 여자 같으면 선물은 무슨 선물, 돌멩이를 준비해야지. 다 돌멩이를 준비할텐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여자를 위해서 준비한 선물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을 위한 선물도 있는 줄 믿습니다. 선물하니까 바로 아멘 나오네요.
베들레헴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그림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림을 그릴만한 이야기입니다. 지금 우리가 성지 순례를 가도, 베들레헴을 잘 못갈 수도 있습니다. 왜냐면 지금은 거기가 다 아랍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성경에 이름 있는 유명한 곳은 전부 다 아랍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참 아쉽지만 저는 93년에 다녀왔지만요. 거기 가면 예수님이 탄생했던 자리에 기념 교회를 세워 예배당이 서 있는데, 지극히 거룩한 곳을 가면은 마리아의 양수가 터졌던 자리, 예수님께서 땅으로 쏟아졌던 자리에 특별한 표시를 해 놨는데, 그 자리가 옛날에 여관의 마구간 터이고, 그 마구간의 터가 보아스와 룻이 살던 집이라고 합니다. 옛날에 그 동네거든요. 그 집이. 우리 어릴 때, 지금은 그런 이야기는 안 나오는데, 어릴 때 사회책인지 도덕책인지 모르겠는데, 형제간이 들녘에서 노적가리 곁에 자다가 동생은 나야 아직도 애들이 없지만, 형님은 조카들도 많은데 하면서 자기 곡식을 한 아름 안고 형님 노적가리에 보태준다고 가져가고, 형님은 동생은 새로운 살림살이에 얼마나 어렵겠냐고 갖다준다고 너무 많이 가져오다가 앞이 안보이니까, 둘이 길에서 부딪혀 넘어진 사건이 있습니다. 거 누구냐 하나는 형님이고, 하나는 동생이야. 서로 갖다준다고 가다가 부딪혔어. 그게 아주 오래된 이야기인데, 거기 가서 알고 보니까, 그 내용이 베들레헴입니다. 실화입니다. 유대 탈무드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베들레헴은 각종 아름다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보아스하고 룻이 살았고, 살몬하고 기생 라합이 살았고, 여관집에서 예수님이 태어났고, 베들레헴은 떡집이라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참 많은 곳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은 사사기 시대와 그 사사시대에 있었던 아름다운 이야기, 다윗이 태어난 동네, 다윗의 동네라는 베들레헴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읽어 보았습니다. 이제 사무엘상서, 사무엘하서, 열왕기상서, 열왕기하서, 역사서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지각을 열어주셔서 주의 말씀을 학자같이 알아듣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출처: 요시야 원문보기 글쓴이: 요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