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창원이 처음으로 기자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직접 기자에게 편지를 보내 면회를 요청하고 옥중 인터뷰에 응한 것. 한때 빙의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이기고 새롭게 제 2의 인생을 준비 중인 그가 옥중생활과 2000년에 있었던 결혼설 해프닝에 대한 심경 등을 털어놓았다.
99년 검거 당시의 신창원 모습. 검거 당시 그가 입고 있던 옷은 그해 여름 최고의 유행 상품이 되었다.
지난 4월24일, 기자에게 뜻밖의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청송 제 2교도소에 수감 중인 신창원(38)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지난 2000년 9월경 그에게 편지를 보낸 적이 있으니 근 4년 만에 답장을 받은 셈. 편지엔 거두절미하고 ‘한번 만나고 싶으니 하루빨리 면회를 와달라’고 되어 있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신창원은 97년 1월 부산교도소를 탈옥해 99년 7월 붙잡힐 때까지 2년6개월 동안 신출귀몰한 도피행각을 벌였던 ‘희대의 탈옥수’. 하지만 그가 유명해진 것은 단지 그 때문만이 아니다. 도피생활을 하며 훔친 돈을 장애인 수용시설과 소년소녀 가장들에게 기부하는가 하면 가난 때문에 새우깡 등을 훔치다 종국엔 무기수가 되어야 했던 가슴 아픈 사연과 인간적인 고뇌, 사랑하는 여인들에 대한 애틋한 심경을 담은 일기장을 통해 드러난 그의 인간적인 면모에 사람들이 연민의 정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세인의 관심은 ‘신창원 신드롬’이라 할 만했다. 검거 당시 입고 있던 옷은 그해 여름 최고 유행 상품이 되었고, 나중에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2000년 9월경 한 여인과 옥중 결혼할 예정이라는 기사가 나가자 본지에 웨딩드레스와 턱시도를 무료로 기증하겠다는 전화가 걸려올 정도였다. 그의 이름이 붙은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최근에도 그가 고입 검정고시에 합격했다는 사실이 모든 언론에 보도될 만큼 신창원은 여전히 세인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하지만 신창원은 지금까지 기자들을 만나 자신의 생각을 정식으로 밝힌 적이 없었다. 대부분 추측보도이거나 그의 가족과 변호사의 입을 통해 들은 단편적인 이야기였을 뿐이다. 많은 기자들이 청송교도소를 찾았지만 그를 만나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런데 이번에 처음으로 그의 생각을 제대로 들을 기회가 생긴 것이다.
서둘러 4월30일에 면회를 하겠다는 내용증명의 편지를 보냈다. 그가 편지에 ‘오기 전에 먼저 서신으로 연락을 달라’는 말과 함께 ‘답장을 받아보지 못할 수도 있으므로 꼭 내용증명으로 보내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는 기자를 만나려는 의지가 강했다.
4월29일 오후, 서울을 출발해 굽이굽이 도는 산길을 따라 6시간을 달린 후에야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으로 둘러싸인 첩첩산중 경북 청송군 진보면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곳에 그 유명한 청송교도소가 있다.
다음날 아침 면회신청을 했다. 접수창구에서 “신창원을 면회왔다”고 하자 담당직원이 “오늘 아침 신창원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며 반갑게 맞았다. 직원에 따르면 신창원은 한 달에 4회 면회를 할 수 있다고 한다. 보통 아버지 신흥선씨를 한 번, 누나 등 가족을 한 번씩 고정적으로 면회를 하고 나머지 두 번은 주로 그를 종교적으로 돕는 교인들이나 친구들을 만나는데 모르는 사람은 면회를 신청해도 신창원이 거절을 한다고.
면회신청을 한 지 20여 분이 지났을까, 면회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중으로 된 아크릴 창 너머로 파란 수의를 입은 남자가 보였다. 아크릴 창 가까이 다가가자 가벼운 미소를 머금은 채 신창원이 서 있었다. 오랜 수감생활로 얼굴이 많이 야위었을 것이란 예상과 달리 그는 지난 2000년 재판정에서 보았을 때보다 오히려 얼굴에 살이 올라 있었다. 또한 당시 그의 얼굴엔 독기가 남아 있었는데 지금은 무척 평온해 보였다. 감기 때문에 가볍게 코를 훌쩍거리긴 했지만 몸도 건강해 보였다.
보통 재소자들은 머리를 빡빡 깎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신창원의 머리는 그렇게 짧지 않았다. 곱슬머리여서 더 길게 느껴졌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생각하던 재소자 머리는 아니었다.
“교도소 규정에 머리 스타일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어요.”
그의 팔목으로 눈길이 갔다. 과거 그를 변론했던 엄상익 변호사가 쓴 글에 따르면 신창원은 변호사 접견을 할 때도 수갑을 두 개나 차고 있었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날은 수갑을 차고 있지 않았다. 그의 표정과 모습에서 ‘이젠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제법 자유스럽게 생활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2000년 재판정에 섰을 때의 신창원 모습.
인터뷰는 1시간 동안 이루어졌다. 처음엔 이중으로 된 투명 아크릴 창이 가로막고 있는데다 신창원의 목소리가 낮은 편이어서 귀를 쫑긋 세워야 했다.
-지금도 독방생활을 하고 있나요?
“예. 이젠 독방에서 혼자 있는 게 더 편해요. 공부하기도 좋고요.”
-불편한 점은 없고요?
“요즘은 식사도 잘 하고 잠도 잘 자고 있어요.”
-하루 일과는 어떤가요?
“교도소 일과는 아침 6시30분에 기상해서 저녁 8시에 취침하는 거예요. 하지만 저는 보통 공부를 하거나 다른 것을 하다 새벽 1시쯤 잠자리에 들어요. 중간에 하루 40분 정도 운동장에 나가 다른 재소자들과 어울려 운동을 해요.”
-워낙 유명하니까 다른 재소자들과 함께 어울리다 보면 불편한 점도 있을 것 같은데요?
“저에게 와서 사인을 해달라는 재소자도 있었어요(웃음). 하지만 저 자신이 특별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서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있어요. 일주일에 한 번 재소자들을 위한 예배시간이 있는데, 그때 제가 특송도 해요.”
그는 이곳에 와서 세례를 받는 등 기독교에 완전히 귀의했다. 그가 ‘종교적인 아버지’라고 부르는 김신웅 장로에 따르면 신창원은 예배를 볼 때 종종 기타 반주에 맞춰 특송을 부르는데, 즐겨 부르는 노래는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라고 한다.
“솔직히 말해서 아직 예수님이 너무 좋을 뿐이지 예수님을 온전히 사랑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어요. 자주 절망하고 나약해지는 저를 보니까요. 지금도 쓰러졌다 다시 일어서고 다시 좌절하고 다시 일어서는 중이에요.”
2002년 8월경 엄 변호사가 쓴 글에 따르면 당시 신창원은 “감방에 있으면 죽은 사람이 자꾸 나타나요. 목에 시꺼먼 밧줄 자국을 하고는 저에게 다가와요. 어떤 때는 그 사람이 벽에서 나오기도 해요. 그러면 뒤에서 교도소 직원들이 따라 나와 그 죽은 사람의 목을 조르는 거예요. 겁이 나서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겠어요. 살려주세요” 하며 고통을 호소했다고 한다.
-한때 귀신이 보인다며 고통을 호소했었는데, 여전히 그런가요?
“탈옥하기 전에 이곳에 수감된 적이 있는데 그때 자살한 사람이 두 명 있었어요. 죽은 모습을 제 두 눈으로 보았어요. 그 사람들이 밤낮으로 나타나 무척 힘들었어요. 0.8평의 너무 작은 독방에 갇혀 있는데다, 아무도 만날 수 없다 보니까 그런 환상이 보였던 것 같아요. 독방에 오랫동안 있다 보면 흔히 생길 수 있는 현상이라고 하더군요. 지금은 괜찮아요.”
-어떻게 치유가 되었나요?
“6개월 정도 지나 교도소측에서 방을 조금 넓은 1.4평 독방으로 옮겨주고 운동시간에 다른 재소자들도 만날 수 있게 해주었어요. 그러니까 죽은 사람들이 안 보이더라고요.”
종교 귀의한 후 동료 재소자들에 대한 사랑 느끼고 새 인생 설계그는 최근 고입 검정고시에 합격해 화제가 되었다. 초등학교 3학년 이후 제대로 학교를 다닌 적이 없는 그가 공부를 시작한 지 불과 3개월 만에 시험에 합격했기 때문이다. 합격 축하의 인사를 건네자 “부끄럽다”며 계면쩍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대입 검정고시를 준비해야 하지 않나요?
“8월에 있을 대입 검정고시를 목표로 준비하고 있어요.”
-고등학교 과정은 훨씬 어려울 텐데, 너무 촉박한 것 아닌가요?
“고입 검정고시를 시작하기 전에는 막연히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해보니까 그렇지 않더라고요. 대입 검정고시도 그렇지 않을까요. 얼마 전에 모의고사 문제집을 풀어봤어요. 아직 제대로 공부하지도 않았는데 평균 70점이 나오더라고요. 중학교 과정을 튼튼히 하면 대입 검정고시도 그다지 어렵지 않은 것 같아요. 문제는 합격여부가 아니라 얼마나 좋은 점수를 받느냐예요. 점수가 좋아야 오라는 대학이 있을 테니까요.”
신창원이 수감되어 있는 청송제2교도소 입구.
-갑자기 공부를 시작한 이유가 뭔가요?
“제 형량이 무기징역에다가 22년6개월이 추가된 상태예요. 그러니 언제 세상에 나갈지 몰라요. 적어도 60세 이전에 나갈 일은 없다고 생각해요. 따라서 이젠 바깥세상에 대한 동경이나 밖에 나가서 뭘 해야겠다는 생각이 없어요. 그보다는 교도소 안에서 무엇을 하며 지낼 것인가를 생각해야죠. 그런데 안에 있으면서 저를 닮으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저는 실패한 인생이에요. 저 같은 사람이 또다시 나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다시는 저 같은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이 안에서 도움을 주고 싶었어요.”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건가요?
“범죄심리상담학을 공부해 재소자들을 상담하는 일을 하고 싶어요. 현재 범죄상담을 하는 분들은 이론적 공부는 많이 했지만 경험이 없으니까 범죄자들의 생각과 바람, 생활, 환경에 대한 불만 같은 것을 잘 몰라요. 범죄자들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같은 범죄자예요. 범죄자들이 저에게는 마음을 열지 않을까요? 대학에서 이론을 배워 저의 경험과 기독교 사상을 조화시켜 재소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싶어요.”
-재소자인데 대학진학이 가능한가요?
“솔직히 걱정이 돼요. 학사고시는 교재를 보내주면 그걸로 공부하고 리포트를 제출해 학점을 따는 방식이어서 재소자들이 종종 진학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학사고시에 범죄심리상담학 과정은 없어서 일반 대학에 진학해야 해요. 교수들이 저를 받아줄지 모르겠어요.”
-도피생활을 할 때부터 책을 많이 보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요즘은 어떤 책을 읽고 있나요?
“이해인 수녀님이 책을 많이 보내주셨어요. 대부분 어린아이처럼 맑은 마음이 깃든 책들이에요. 그 책들을 읽으며 많은 감동을 받았는데, 지금은 공부하느라고 못 보고 있어요. 대입 검정고시가 끝나면 다시 봐야죠.”
기자가 신창원과 인연이 닿은 것은 2000년 옥중결혼설 때문이었다. 당시 기자는 신창원과 결혼을 약속했던 이씨와 서너 차례 만나면서 두 사람의 진실한 사랑을 확인하고, 진심으로 둘의 앞날을 축복했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결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씨는 현재 울산에 있는 장애인 학교에 근무하면서 야학을 하는 등 여전히 봉사의 삶을 살고 있다.
-과거 화제가 되었던 결혼설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는데요, 어떻게 된 건가요?
“제가 장애인 시설에 가본 적이 있어서 아는데, 그곳에서 일하는 분들은 정말 천사예요. 그녀 역시 그곳에서 일한다고 해서 면회를 허락했어요. 일주일에 한 번 면회실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솔직히 인간적으로 끌렸고, 사랑의 감정을 느꼈어요. 그래서 결혼을 결심했는데, 막상 결혼설 기사가 나가니까 무척 힘들어하는 거예요. 저는 그런 고통까지 감당할 각오를 하고 결혼을 결심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더라고요.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안에 있는 저는 더 고통스러웠어요. 저는 가장 싫은 게 사랑하는 사람이 힘들어하는 거예요. 15년 전에 첫사랑이 있었어요.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후 그녀가 힘들어하는 걸 감당할 수 없어서 제가 먼저 헤어지자고 했어요. 그리고 그 아픔을 잊는 데 7년이란 세월이 걸렸어요. 그런 아픔을 또다시 겪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사랑하지만 헤어지자고 했어요. 그해 11월쯤 마지막으로 면회를 오고는 안 왔어요.”
-지금이라도 다시 시작할 생각은 없나요?
“지금은 여자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요. 서로 힘들 뿐이니까요. 제가 이곳에 있으면서 여자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요. 그건 버려야 할 욕심이라고 생각해요. 이젠 이성보다는 동료 재소자들, 하나님과의 사랑에 더 매진하고 싶어요.”
신창원은 올 8월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 내년엔 대학에 진학하고 싶다고 했다.
-이씨를 만났을 때 ‘신창원이 직접 그려준 것’이라며 초상화를 보여준 적이 있어요. 무척 잘 그렸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지금도 그림을 그리나요?
“부산교도소에 있을 때 너무 외로워서 그림을 그렸어요. 하지만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 아마추어 수준도 못 돼요. 지금도 그림을 그리고 싶은 생각은 있지만 배울 기회도 없고, 도구도 없어서 못하고 있어요.”
-도피생활을 할 때 쓴 일기나 간간이 소개된 옥중편지들을 보면 초등학교 교육도 제대로 못 받은 사람의 글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감동적인데, 글을 계속 쓸 생각은 없나요?
“탈옥했을 때는 다시 감옥에 가는 게 죽기보다 싫었어요. 그래서 죽는다는 전제 아래 유서를 쓰는 심정으로 일기를 쓴 거예요. 글을 쓴다 하더라도 제 개인적인 이야기는 쓰고 싶지 않아요. 정말 쓰고 싶은 게 있다면 ‘사랑’이에요. 가족에 대한 사랑, 이웃에 대한 사랑, 신에 대한 사랑…. 탈옥했을 때 가장 부러웠던 게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었어요. 저는 한 번도 그렇게 남을 위해 땀을 흘려 일을 해본 적이 없거든요.”
-사회에 나가 남을 위해 땀 흘려 일하고 싶은 바람이 있는 건가요?
“사회에 나간다는 기대는 안 해요. 그보다는 교도소 안에서 내가 남(동료 재소자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요. 그래서 공부를 하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지난해 절도를 하다 붙잡힌 범인이 청송감호소에 있을 때 당신으로부터 범죄기술을 배웠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는데요?
“그 기사를 보고 너무 황당했어요. 만난 적도 없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청송감호소에 있었다고 하는데, 저는 줄곧 청송 제 2교도소에 있었잖아요. 교도소가 틀린데 어떻게 만나 범죄기술을 배웠다는 건지 모르겠어요. 기자들이 한 번이라도 저나 교도소측에 확인했다면 그런 어이없는 기사는 안 나갔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89년에 우발적 살인의 공범이라는 이유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는데, 죄에 비해 형량이 과하다는 생각이 들어 탈옥을 한 것인가요?
“그렇지는 않아요. 형량에 대해선 전혀 불만이 없어요. 제가 사람을 직접 죽이지는 않았지만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무기징역을 받은 거고, 22년6개월의 추가형량 역시 탈옥을 했으니 당연히 받아야 할 형벌이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추가로 기소되었던 강간혐의가 무혐의 판정을 받은 게 고마울 뿐이에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오늘 저를 만난 것을 기사로 쓰더라도 과장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썼으면 좋겠어요. 넘어지고 쓰러진 모습, 부족한 모습, 이기적인 모습을 보았다면 그 모습 그대로 써주세요. 다만 이제 제가 새롭게 일어서려고 한다는 것만 이야기해주시면 고맙겠어요.”
그와의 면회를 마친 후 돌아오는 길에 신창원이 말한 김신웅 장로를 만났다. 김 장로는 신창원과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갱생의 삶을 살도록 돕고 있는 정신적 지주다. 그는 신창원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무척 힘들어했는데 이젠 마음도 편해지고 잘 지내고 있다고 전했다.
“창원이는 남을 위한 배려가 대단해요. 제가 갈 때마다 사탕 같은 것을 한 봉지씩 주곤 하는데, 그러면 재소자들에게 그 사탕을 나눠줘요. 그걸 참 즐겁게 생각해요. 무엇이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있어도 자기가 독점하기보다는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하고요.”
그는 신창원을 무척 신뢰하는 모습이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창원이는 한번 목표를 정하면 그걸 위해 끝없이 노력하는 성격”이라며 “창원이가 공부를 꾸준히 할 수 있도록 사회적으로 도움을 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작성일 | 2004.06.10
■ 글·최호열 기자 ■ 사진·동아일보 사진DB파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