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기 아리랑 4.......풍기바람, 풍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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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한번 씩 고민한다.
어떻게 살아야 제대로 사는 것인가!
의견이 분분하고 정답이 각각이니
사람들은 갈등하기 마련이다.
신은 인간이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도록 만들지 않았다.
영원한 삶도, 절대적인 권력도,
불변의 미와 건강도,
그 중의 어느 것 하나라도 완벽하게
소유한 사람은 없다.
태어나게 해 놓고 죽게 만드는
아이러니에서 출발하는 인간들의 삶.
그 짧은 생 앞에 극악스런 경쟁을 해가며
아등바등 살면서도 나는 일등,
너는 이등 하며
나름의 잣대까지 재는 것이 인간이다.
신의 입장에서 보면 가소롭기 그지없겠지만,
생이 한낱 먼지 같다고 해서 갓 쓰고
도포자락 휘날리며 죄다 김삿갓 되어
살 수는 없는 게 또한 인생이다,
삶이 허무하다하여 50여년을 떠돌며 살아보라.
그것 역시 만만한 일은 아닐 것이니.
아마, 나는 어느 날부터인가 내 삶이 좀 맘에 안 든다고 생각했나보다.
쭈욱 맘에는 안 들었지만 갈등이 갈증까지 불러일으키고 점점 울화가 치미는 걸 보면 말이다.
해가 바뀔 때면 증상이 더 심해진다.
네 개의 답안 해석을 놓고 하나씩 읽어 내려갈 때마다 이건 분명 답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정확한 해답은 기억해 낼 수 없어 골치가 아픈 늙은 수험생 같은 일상. 답답하다.
이대로, 해 왔던 대로, 살던 대로 그냥 쭉 가야 해? 라고 생각하자
머릿속 프로펠러가 오랜만에 작동을 시작한 듯 끼이끽 거리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너무나 오래 세워 둔 탓에 어디에다 윤활유를 발라주어야 할지를 몰라 버둥거렸지만 좌우지간 돌기는 돌았다.
생각해, 어느 누구도 너를 도와 줄 수 없으니 스스로 생각해야 해.
그러나 프로펠러의 작동만으론 2%가 부족했다. 에라~ 모르겠다.
나는 옷을 챙기고, 지갑을 챙기고, 열쇠를 챙겼다. 그리고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무작정.
2009년 12월 어느 날, 저녁이 밤으로 진입하기 직전에 시동을 켰다.
그리고 그 길로 쉬지 않고 달렸다. 멈출 수 있는 곳에 멈추리라.
아니 멈추고 싶은 곳에서 멈추리라. 무얼 만나도 만나겠지.
암흑이든 사람이든, 불빛이든, 혹은 바람이든...
두 시간 조금 지나 차가 멈추었고 멈춘 곳은
'만남의 광장’이라 쓰여진 거대한 입간판이 서있는 어두운 주차장.
서너 대의 차량이 세워져 있는 그 광장은 텅 비어 있었다.
낯설고 을씨년스러운 겨울 밤 풍경. 조금 두려워졌다.
시동을 끄고 차 문을 열고 나오는데 ‘크악’ 하는 비명소리와 함께 칼 날 같은 바람이
나를 향해 달려든다. 사나운 날짐승이 먹이를 덮치듯.
너무나 갑작스런 타격에 순간 숨을 쉴 수 없었지만 익숙한,
어쩐지 너무나 익숙한 어떤 냄새가 촉각을 자극했다.
오그렸던 어깨를 펴며 나는 그를 향해 서서히 두 팔을 내밀었다.
“안녕, 바람아, 오랜만이야”
나는 풍기를 와 버렸고, 그리고, 제일 먼저 바람을 만났다.
하늘이 도운건지, 허구 헌 날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짱짱한 겨울바람의 기세가 너무 반가웠다. 나만 반가웠나?
너 따위 알 바 아니라는 듯 다시 한 번 얼굴을 갈겨대는 거친 그의 인사에
‘훅’ 하고 한 번 더 숨을 들이 마신 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니
차량 안에 몸을 감추고 이동하는 사람들 외엔 아무도, 그 누구도 걸어 다니는 사람이 없다.
고작 8시 20분, 그럼에도 풍기는 어둠과 정적 속에 잠겨 있고,
그 바깥 어둠의 세계는 칼바람이 휘젓고 있었다.
자, 이제 무엇을 하지?
무턱대고 오기는 왔는데, 초대해 준 이가 없으니 다시 길을 잃었어.
차창 유리창을 뚫지 못해 씩씩거리는 바람을 응시하며 그렇게 차에 앉아 중얼거렸다.
어쨌든 그냥 갈 수는 없다는 생각에 광장을 빠져나와 서서히 움직인다.
예전의 우리 집. 내 가슴 속 깊이 웅크리고 앉아 언제나 베틀 소리를 반주하며
추억의 DNA를 기억의 세포막으로 감싸고 들어앉은 옛 집으로 차를 몰았다.
다 큰 여식들을 위해 엉성한 시멘트 벽돌로 올려 진 이층 별채는 겨울만 되면
시베리아 벌판처럼 바람이 숭숭 들이찼다. 몇 겹씩 이불을 덮어 쓰고 자도
아침이면 얼얼하게 언 콧잔등. 그래도 이층 방을 고수하며 내려오길 거부하는
막내 딸 고집에 두꺼운 스치로폼을 덧대고 노란 꽃 벽지를 발라
언제나 병아리 봄 날 같았던 그 방. 조금 방풍이 되긴 했었지만
이층이라 고약한 바람 소리가 그야말로 걸작이었던
그 방에 누군가의 존재를 알려주듯 불이 켜져 있었다. 올려다보니 옛날,
그 방에서 들었던 겨울바람의 랩소디가 들려오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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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기의 겨울은 예고편도 없다.
바람이 겨울을 끌고 오기 때문이다.
산짐승의 울음소리를 몰고 오듯,
으르렁거리는 그들의 소리.
지상에 흔들 수 있고 건드릴 수 있는 물체만 만나면
깡그리 뒤 엎어 버릴 듯 악을 쓰며
징을 쳐대던 그 바람들.
그래서 당연히 바람은
소리를 갖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란다.
어쨌든 눈을 감고 듣고 있노라면 저 바깥엔 틀림없이
뭔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던 그 소리들.
초원을 질주하는 말발굽 소리가 두두두두 지나가고,
수천마리 쥐새끼가 천정을 뚫는 듯
드르르륵 드르르륵 드릴 소리가 따라오고,
어느 집 간판을 겨냥했는가.
어퍼컷으로 치고 빠지기를 계속하듯 두들겨대면
그때마다 후렴처럼 따라 붙던
‘쩔그렁!’ 소리. 아이고, 누구 집인지
오늘 간판 다 부서지겠구나. 염려가 되었던. 그 뿐인가, 죄 없는 감나무를 뒤흔들면
흡사 자식을 잃은 어미가 새끼 이름을 부르며 온 거리를 헤매고 다니듯 한 맺힌 소리가
바람 속에 뿜어져 나왔지.
휘이이잉~영자야~ 휘이이잉~갱자야~.함께 자던 언니가 어머? 너 이름 같아! 라고 말하면
겁나고 속상하고 약 올라 그 소리를 모조리 언니 이름으로 둔갑시켜 앙갚음했던 기억의 소리들.
그 소리를 못 들은 지가 몇 년이나 되었나. 어디에 가서 누워야 다시 또 들을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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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기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숙명적으로 바람을 만난다.
어디서 만들어져 내려치는 바람인지
정확한 답변을 들려준 이도,
굳이 알려 하는 이도 없이
저 쪽 죽령재 어디쯤에선가
바람공장이 있다고 추측들만 했다.
“풍기는 왜 이리 바람이 쎄?”
하고 물으면 “원래 풍기는 바람이 쎄.”라는 막연한 대답만 돌아온다.
풍력 계급 10의 노대바람 같은 풍기 바람. 원래 센 바람. 천 년 전부터 있던 바람.
싸늘한 바람의 잔재를 온 몸으로 뒤덮어 쓰고 들어서는 어미는 걸핏하면
‘몸서리난다’ 는 소릴 했고 그 말에 나는 늘 진저리 쳤다.
지구 표면이 태양에 의해 불균일하게 데워지면서 공기의 압력이 달라지고,
그래서 큰 압력인 고기압이 작은 압력인 저기압으로 흘러가며 생겨나는 게 바람이라고 과학은 말한다.
그 과학이 별로 실감나지 않는 건 바로 옆 동네만 가도 바람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기압차라고? 손바닥만 한 동네에서? 웃기네! 했다.
그렇지만 학교 시험지엔 과학이 가르쳐 준 정답을 선택했다. 웃기네! 라고 쓸 용기는 없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날 선 바람인지 풍기 바람을 흔히 칼바람이라 한다.
변변한 장갑 하나 없이 먼 길을 걸어 다니는 친구들의 볼때기와 손등은 마치 면도날 같은 바람의 표식이
지그재그로 그려져 있었고, 갈라진 여린 살 틈엔 붉은 핏줄이 얼지도, 풀리지도 않은 채 맺혀 있었다.
두툼한 외투 하나 갖추어 입지 않고, 그 사나운 바람을 이고, 지고 다니면서도 사내아이나 계집아이들은
까딱없었다. 눈빛이 초롱초롱했다. 바람은 아이들을 강하고 드세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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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니 기억이 난다.
겨울 아침, 가방을 들고 골목을 벗어나면
주먹을 한 번 더 꽉 쥐고 깊은 숨을 내 쉬며
신작로에 들어서야 했다.
밤 새 온 거리를 두들겨대며 난리 법석을 떨고도
분이 덜 풀린 바람은 형체 있는 것만 나타나면
기를 쓰고 덤벼들었다.
허공만 휩쓸고 다니기엔 성이 차지 않았을까?
수돗가 찌그러진 세숫대야를 축구공처럼
몰고 다니다 변소 옆구리에 쌓여진
연탄 재 사이에 처박고, 개집을 뒤집어엎고,
미처 걷지 못한 빨래를 지붕 위 전봇대에
걸쳐 놓고도 아직도 나는 배가 고파~ 우우 거리다가,
말랑말랑한 아이들이 나타나면 환장을 하고 덤벼들었다.
실제로 어떤 아이는 벌렁 나자빠지기도 했다.
순흥통로에서 금계동 쪽으로 기를 쓰고 걷노라면 빈 들녘에 과녁이 되는 건 오로지 사람들.
꽁무니바람이면 오죽이나 좋으련만, 내리치는 맞바람은 가슴팍을 얼얼하게 만들고,
양 볼때기를 감각 없는 나무 껍데기로 만들었다. 고개를 있는 대로 처박고
흡사 투우사를 향해 달려가는 싸움소처럼 그 바람을 뚫고 걷다보면
‘뭐 이딴 게 다 있노?’ 하면서 은근히 오기가 솟구쳤다.
‘그래?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 번 해 볼래?’ 그때부터 고개를 처 들고
가슴팍을 내밀며 걷기 시작하면 신기하게도 별 거 아니게 느껴지던 그 드센 바람결.
반격의 전진을 시작하니 느슨해지는 공격? 아니지, 그저 바람에 순응이 되었겠지.
길들여지지 않으려면 길을 들여야 하는데 어디, 그 바람이 길들여질 바람이기나 한가.
그렇게 우리는 칼바람에 길들여졌고 순응했지만, 바탕에 근성을 키워나갔다.
그럼에도 누가 바람에 얻어맞아 사망했다던가, 날려가 행방불명 됐다는 소리는
들은 적 없는 걸 보면 사납기는 해도 그리 악랄하지는 않은 바람이든가.
두산동 쪽으로 핸들을 돌리니, 그나마 읍내에 있던 상점 네온마저 끊겨,
암흑의 거리가 펼쳐진다. 동네는 좁아도 어둠은 깊다. 그때, 갑자기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바람을 찾아다니는 별난 여자가 횡재를 한 기분. 빛깔도, 질량도, 형체도 없는 바람 속에
하얀 눈발이 섞여들면서 무늬가 새겨졌다. 현란한 재봉질에 새까만 비단 폭 위로
흰 매화꽃이 새겨지듯 조금씩 노대바람의 몸통이 눈발에 드러나는 것이다.
아스팔트 도로 바닥에 안개처럼 눈이 쌓이자 심술궂은 바람이 휘휘 쓸고 다니며 빗자루 질을 한다.
텅 비어있는 희방사 매표소. 돈도 안내고 통과한다.
언덕 고바위에 방앗간에서 갓 빻은 쌀가루가 뿌려진 듯 제법 눈길이 훤한데,
더 올라가려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씩씩한 남자가 그럴 땐 아쉽다.
오르기를 포기하고 옆 주차장에 차를 대고 바깥으로 나오니,
수백 년 소나무가 처연하게 바람을 쐬고 있다.
눈가루를 흩뿌려 공중돌기를 하고 있는 바람이 키를 키우지 못하고
제자리 뛰기를 하는 건 저 나무들 때문인가..
돌연히 나타난 방문객의 행보가 미심쩍은 듯 내 몸을 검색하는 눈바람. 상쾌하고 시원하다.
어디쯤일까.
산마루에서 내리 부는 냇바람과 골바람이 만나는 지점은.
그들이 겹쳐 씨름질 하다가 벌판에서 부는 벌바람과 뒤섞여지는 지점은 또 어디쯤일까.
그 분탕질을 어째서 풍기바닥에만 유난스레 펼치는 걸까.
산을 올려다본다. 칠흑 같은 어둠 저 너머 분명 바람 공장이 있는데,
밤중엔 견학 할 수 없다는 듯 완강한 거부의 울음소리가 웅웅거린다.
저 시퍼런 바람 소리에 갇혀 죽더라도 좋아라! 그런 시가 있었던 거 같은 데
지은이는 어디에서 시퍼런 바람 소리를 보았을까. 혹시 풍기바람을 생산하는
저 소백산 능선에 섰던 건 아니었을까? 갇혀 죽어도 좋다할 만큼 오감의 절정을 느꼈을
그 사람, 죽지는 않았을 테지. 뭘 봐도 보고 뭘 느껴도 느꼈을 테지.
그래! 나도 한 번 바람공장에 가 보자. 어릴 적 5월에 보았던 비로봉 남실바람결이 아닌
미친 듯한 된바람을 보러가자. 풍기 바람의 절정은 겨울이 아니던가.
잡념과 상념의 호미질을 쉴 새 없이 반복하면서, 풀빵과 알밤을 으적거리며 씹어 넘기다 보니
참 나, 내가 지금 뭘 하는가 하는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그래 어쩌면, 네 덕분에 내가 버티고 살았는지도 몰라.
네가 날 후려치며 키웠기에 쓰러지지 않았는지도 몰라.
네가 키운 저 풍기 사람들 중엔 별사람이 다 있었지,
너를 바람막이로 살아온 사람들은 생을 거부하지 않고 살았으나,
지 성질을 못 이겨 뒤집혀 진 사람들은 네 곁으로 앞당겨 가기도 했지.
거칠고 투박한 말투도, 좀처럼 웃지 않는 무표정도,
차라리 쪼개지면 쪼개졌지 살살거리는 짓거리는 못한다는 억센 자존심도,
어쩜 네 영향인지도 모르겠어. 수천리 밖 고향을 등지고 이곳으로 몰려 온
이북 피난민들이 쉽게 동화되어 자리 잡고 살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그들처럼 꺼칠한 모양새를 한 풍기 사람들의 기질 때문인지도 모르지.
살살거리는 사람들 속내가 사실은 더 모질고 약은 법. 화끈하게 받아주고,
화끈하게 내치는 성질 안에, 여린 식물의 잎맥 같은 정줄기가 흐르는 풍기 사람들.
그 역시도 네 작품이 아니었을까?
떠오르는 장면이 있어.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여학생만 보면 주소 적힌 쪽지를 날리던 도시
남학생들. 희멀건 얼굴에 장대 같은 키, 거기다 둥실둥실한 살집이 얼마나 멋져 보였던지.
연신 한 쪽 눈을 찡긋거리며 윙크를 보내던 패거리들의 구애에 시골 계집애들 얼굴이 홍시가 되곤 했지.
아침나절 곱게 갈래머리 땋고 숙소 바깥으로 서너 명의 친구들과 산책을 하는데,
지나가던 네 명의 희멀건한 시티보이들이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거야.
소위 수작을 부리려는 거였지. 싫을 수가 있나, 싫은 척 수작을 받아 넘기고 있는데,
갑자기 남학생 세 명이 나타났어. 걔들이 누군지 나는 지금도 몰라.
친하지도 않았고 말을 주고받은 적도 없었거든. 좌우지간 우리학교 남학생인 건 틀림없었는데,
아니 나타나자마자 그 시티보이들을 향해 참으로 민망한 언어를 내뱉는 거겠지? 저런,
무식한 촌놈들이 있나 하면서 너희들이 뭔 참견이냐고 막 말을 하려는데 말이야.
그 순간 희한한 광경이 벌어졌어. 정말 믿을 수가 없었지.
한 대 쥐어박는 모션만 취하고, 다소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좀 무식한 언어를 전달했을 뿐인데
말이지, 갑자기 덩치 큰 네 명의 시티 보이들이 무릎을 꿇는게 아니겠어?
비굴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조아리는 것도 믿기지 않을 판인데,
약속이나 한 듯이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고 비는데 말이야, 생각 해 봐.
우리 학교 남자애들 키는 걔네들 어깨 밖에 안 오고 덩치는 삼분의 이나 될까 말까 했단 말이지.
맞받아 치고받으면 누가 봐도 시티보이의 우승이 뻔 한 건데 싸우기도 전에
항복을 하다니, 그것도 여학생들 앞에서 말이야, 남자 자존심?
그거 그때는 더 유별나게 탱탱하지 않나? 도대체 믿을 수가 없었어.
누군가 “가 버려!”라는 말에 무릎을 꿇은 시티 보이들이 허겁지겁 도망을 가자
세 명의 카우보이들이 이렇게 말한 게 기억 나.
“짜슥들이, 어데 우리 여학생을 건드려! 죽을라꼬”
그러면서 우리를 힐끗 쳐다보며 또 이랬지.
“싸돌아 댕기지 말고 어여 드가!”
굉장하지? 그 촌스런 머슴애들이 어디에다 그런 깡다구를 숨겨 놓고 있었을까?
물론 바람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우습게 봤다가 큰 코 다친다더니,
그 사건이 있은 뒤로는 절대 우리들의 카우보이를 우습게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그 기질이 모두 좋은 곳에만 발휘된 건 아니지만 어쨌든 그것도 바람의 작품임에는
틀림없을 거다. 풍기 카우보이들, 그 깡다구로 아주 잘 살고 있거나
혹은 아주 못살고 있을 거 같은 생각을 떨칠 수 없는 것도 바로 저 바람의 색깔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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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기 사람!
소백산이 끼고 앉아
천혜의 자원을 제공해 주는 덕분에
도대체 겁날게 없는 사람들.
성질이 급하고, 말투가 억세며,
지기 싫어 하니 주장이 강하다.
비굴한 걸 싫어하나, 약자에겐 약하다.
알랑거리는 사람을 아마 제일 싫어할 것이다.
통이 크고, 화끈한 걸 좋아하니 여러 개 놓고 골라야 하는 건 성미에 안 맞다.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고 가 분명한 편이라 한번 맺어진 친구는 죽자 살자 함께 간다.
그렇다고 좋은 것만 있는가하면 그렇진 않다.
묘하게도 패거리문화가 발달되어 협동이 잘 되지 않고, 의견이 분분하다.
성질 못 이겨 자기 명줄을 반납한 사람도 꽤 된다.
바람의 여파로 성공한 사람들이 어느 지방보다 많지만,
그 바람 피하려고 들어 앉아 도박하다 패가망신한 사람도 많다.
유난히 추운 겨울이 계속된 이듬 해 봄이면,
하룻밤 새 전 재산을 털고 없어진 사람들도 적지 않다.
정말 없어져야 할 나쁜 버릇들. 이 글 쓰고 협박전화 받는 건 아닌지 좀 겁난다.
식당에 들러 주문을 하면 반가운 기색이 전혀 없는 주인 얼굴. 풍기 사람이다.
정화조 푸는 아저씨께 좀 깍아달라 하면, 난감한 표정 끝에 남는 게 별로 없으니
안깍으면 안되냐고 되묻는다면 풍기 사람이다.
내가 기억하는 풍기 사람의 대표선수는 작은 키,
다부진 체격에 런닝구 한 장만 걸치고,
옹찬 겨울바람 속을 철철 넘쳐나는 막걸리 통을 여섯 개나 자전거에 달고도 지친 기색 없이
씽씽 달리던 그 아저씨다. 거짓 없는 얼굴에 진실한 노동의 댓가를 아는 멋진 남자.
자식을 때린 선생님께 고맙다고 인사하는 것도 풍기 사람이다.
먼 데서 왔다고 하던 일 팽개치고 무작정 있어주는 친구들,
돈 떼먹은 친구가 고향에 못 오는게 가슴 아프다며
돈보다 우정을 따진다면 그도 풍기 사람이다.
각각의 개성은 투박해도 외지와 충돌이 생기면 일시에 같은 편이 된다.
타지방 대 풍기의 싸움이 일어난다면 글쎄? 아무리 지역이 협소해도
절대 풍기는 만만하지 않을 것이다.
고집 센 사람들. 이웃지방과 잘 협조해서 사세요,
라고 하면 아!! 우리끼리도 잘 살아! 할 사람들.
그러나 들여다보면 정이 넘쳐나는 사람들.
그런데, 그런 풍기사람들이 점점 없어지고 있다.
어쩌면 도시의 얄팍한 바람결을 묻히고 돌아 온 나부터
그 물을 흐리고 있지 않은지 반성해야겠다.
눈보라치는 산중 작은 기와집에서 불빛이 발갛게 새어 나온다.
어찌나 신기하던지, 시선을 떼지 못하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바람기둥 안에 둥지를 튼 새 집처럼 창살 엮은 한지창이 내뿜는 그 불빛이 너무 따뜻했다.
미친 척하고 창문을 두들겨 볼까?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서요,
하며 문을 열어 달라할까? 만일 열어줘서 들어갔는데 남자가 있다면?
거기까지 진행하다 웃고 만다. 아마 그리되면 풍기 아리랑이 아니고 소설이 나오겠지.
배가 고팠지만, 영혼이 맑아지는 듯 했다. 바람을 만나러 이곳에 온건 아닌데
이곳에 오니 바람을 써야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매력적인 너무나 매력적인 풍기의 상징, 바람!
어둠속을 배회하며 그 바람의 진동을 어설프게 느꼈으나
마치 잃어버린 님을 다시 만난 듯 가슴 셀레였다.
어째서, 점점 풍기에 매료되는 걸까? 올라오는 길에 그 생각을 가장 많이 한 것 같다.
- 바람의 집적소, 소백산 능선을 오르다 -
얼마나, 겁을 집어먹고 마음을 조였는지 생각보다 훨씬 빠르고 쉽게 정상을 만났다.
해발 1010미터 지점에 닿았을 때도 바람은 정찰병만 보냈는가, 쉽사리 몸통을 보이지 않는다.
흐르다 얼어붙은 물 아래엔 얼지 못한 물줄기가 노래를 하고,
파묻혀 눈감고 있는 만물은 소생을 꿈꾸며 성질 급한 등산객들의 소음을 견디고 있었다.
숲은 고요했고 계곡은 평화롭게 잠자고 있었다.
도시 인근의 산과 다를 바 없어 오히려 이상했다.
하지만, 나는 보았다. 버스에서 내려 아득한 저 먼 곳에 순백의 이불을 덮고 누워있는
소백산 비로봉을. 거대한 산짐승들이 포개져 엎드려 있는 듯한 능선들 사이에 흰 뿔을
곧추세우고 있는 우두머리의 위상을. 청정한 하늘빛살이 천지를 내려쬐고 있었지만
녹여 흘러내리기엔 역부족일 듯한 얼음 봉오리. 그 빛살도 감당해 낼 수 없는
그 무언가가 분명 있을 터. 그 곳에 당도할 때까지 긴장의 끈을 놓아선 안 된다는 걸.
아~ 바람에 접속하기 위한 서투른 교신을 얼마나 되풀이 했을까,
오르고 걷고 미끄러지며 어느 지점에 발을 디뎠을 때,
판도라 행성의 여신처럼 갑자기 나타난 얼음나무들.
줄기부터 가지 끝까지 은빛 크리스탈 꽃잎을 매달고 찬란히 흔들리고 있는
거대한 눈꽃 군락. 철저한 순백을 주문받고 최상의 순백으로 복종하는
아름다운 겨울 산의 지킴이들.
흰 눈이 스며들고 바람에 부딪힌 흔적을
꽃으로 승화한 거룩한 나무들.
절정의 순간을 향해 몸부림쳤을 몸짓이
너무나 투명하여 눈이 시려온다.
한 번도 본 적 없으니 상상이나 했겠는가,
지상에다 놓을까 말까 망설이다
에라 선심이다 하고 내주었을 신의 은총을
발견한 어리석은 내 입에서,
탄식의 한숨소리와 황홀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나는 알았다. 멀리서 보고
그저 짐작하지 말아야 함을.
산줄기의 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그 얼음 봉우리가 사실은 뿔이 아니고
눈꽃나무들이 그대로 곡선 되어
능선을 이루고 있다는 걸.
당신의 살 속에 뿌리를 두게 한 고마움의 표식으로
그대로 얼어붙어 몽블랑(흰 산)으로 태어났음을.
수많은 그들의 순종을 아낌없이 받고 누운 거대한 능선들 사이에
드디어 비로봉 정상이 나타났고 그때부터 폭풍 같은 바람이 후려치기 시작했다.
모조리 헤쳐 모여! 를 지시했는지 바람들은 봉우리 곳곳에 매복하고 있다가
선발대를 선두로 거세게 진격해왔다. 바람의 집적소, 비로봉을 사수하기위한
그들의 공격은 처음부터 맹렬했고, 절대 사정을 두지 않겠다는 듯 화살처럼 쏟아졌다.
‘나는 네게 접속해야 해!’
접촉의 발걸음을 힘겹게 뗄 때마다
‘수신 거부!’ 의 교신을 전달 받은 바람이 전속력으로 달려든다.
막을 수 없어. 막지 마 제발!
나는 이미 바람 행 특급 열차를 타고 능선을 굽이치고 있어.
바람의 역, 바람의 공장, 바람의 집적소를 찾아 죽을힘을 다 해 왔는데
제발 나를 받아 줘! 애원했다.
이곳이 바람의 시발 지였니? 바람의 중계소에서 교신하는 신호에 따라
저 아래 풍기에다 퍼부은 바람의 양을 넌 어디에 기억하고 어디에 기록하고 있지?
악을 쓰고 기어오를 때마다 나의 영상마저 끊어 놓으려는 듯 등줄기를 강타하는 주먹바람.
바람의 제왕과 눈의 여신이 만나 세운 바람 궁전. 그 어느 것도 허용하지 않고
그 어떤 욕망의 흔적도 새길 수 없는 신성한 제단 위에 한 점 구름도 없는 청정한 물 빛 하늘.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오른쪽엔 태양이 왼쪽엔 낮달이 떠 있으니 기묘한 풍경.
아~ 도대체 누가 이곳을 만들었단 말인가.
고꾸라지지 않으려 악을 쓰는 몸짓이 마치 터닝이 안 돼 지직거리는
라디오 주파수처럼 비틀거린다. 몸을 곧추세워 기를 쓰고 일어서는데
재차 등줄기를 강타하는 바람. 오기 외엔 방법이 없지. 획! 하고
몸을 돌려 바람과 마주 하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어퍼컷을 날리는 바람.
휘청거리는 복서. 모세혈관에 흥분의 시신경들이 몰려들었다.
곧 바로 항복하고 뒤돌아서는데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도저히 제어할 수 없을 만큼, 마치 울음이 터지듯....
능선 한가운데 바람터널에 갇혀 웃고 있는
여자의 이빨 사이까지 들이차는 눈바람 공격에
서서 웃을 수 없어 기어 올라가며 웃었다.
눈가에 눈물이 맺혀 떨어졌다.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절대 위력 앞에
무너지는 나의 오만, 통과는 있어도 정착은
불가능하리라. 그 와중에도 나의 동공은
쉴 새 없이 사진을 찍어 둔다.
기억해야 하므로.
이 순간은 절대 되돌아오지 않는 다는걸 아니까.
한 때 초록 이였던 풀들이 모두 엎드려 그대로 얼음풀이 되었구나.
그 초록물은 뿌리에 저장되어 있겠지. 그래서 뽑히지 않으려고 누워 있는 거겠지.
이곳마저 침범 당할 수 없어 그토록 사나운 고함을 지르는 건가.
깨어나라! 그리고 욕망하라. 울부짖으며 인간을 자각하게 하는 바람의 뭉치들.
납작하게 엎드려 겸손하게 살라고 나를 몰아치고 있다.
쓰러지지 않는 방법을 네가 가르쳐줬는데, 나는 또 쓰러지려 해!
네가 준 사나운 기가 다 빠져나간 여자에게 다시 일어 날 수 있는 힘을 줘!
수천 년 전 지조를 아직도 지키는 넌 해답을 알겠지?
차선책은 싫으니, 최선의 방법을 가르쳐달라고 소릴 질렀나, 그랬던 거 같다.
한바탕 매운바람 맛에 혼쭐난 사람들을 배려했는지 비로봉 정상에서
달밭골 쪽으로 하산하자마자 거짓말처럼 물러난 바람. 기이할 정도로 바람한 점 없는 숲 길.
얼이 빠져 무엇을 봤는지 무엇을 느꼈는지 아무 자각도 없이 내려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선명해지는 시각과 촉감과 후각의 기억들이 내 몸에 스며들었다.
30년 만에 대찬 바람의 세례를 받고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은 아이처럼 나는 설레였다.
하릴없이 흘러가는 인생을 눈앞에 빤히 쳐다보면서도 어찌할 바를 모르던 미숙아가
그 세월을 훑어내어 지혜의 기름을 짤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
운명을 의지로 바꿀 수 있다고 바람은 말했다. 너무 외로워하지 말라고,
누군가가 항상 네 곁에 있다고, 혹 그것이 사람이 아니라 해도 두려울 게 없다고,
언제나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풍기 바람을 기억해 내라고...
오직 나에게만 하는 소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풍기에 살았던
풍기 사람끼리 올라간 소백산.
그들은 한 때 그 바람을 맞으며 살고,
그 바람에 키를 키웠다.
그래서 누구나 풍기의 상징이 무엇인지 안다.
세월이 흘러 억센 그 바람의 흔적이
몸에서 빠져나가자 누구보다도 바람을
그리워하고, 바람이 맞고 싶은 사람들.
오늘 그 바람을 찾아 바람공장을 견학하고
기쁘게 바람을 보고 돌아간다.
낯 선 타지방 사람들 몇몇이 함께 끼어 풍기 밥을 먹었다.
바람맞으러 온 사람들을 찾아 온 또 다른 풍기 사람들.
그들을 얼싸안고, 손을 잡고,
웃음과 선물을 안기는 그들을 보면서
타지방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느꼈으리라.
멋도, 매너도, 말투도 투박한 이들에게
분명 특별한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고.
그것이 바로 풍기 바람이 흔들어 빚어낸
풍기 사람만의 정나누기 인사라는 걸 구태여 가르쳐 줄 필요는 없겠지.
매혹적인 너무나 매혹적인 풍기 바람을 만나고 돌아가는 차 안에서
언제나 풍기 사람이길 바라는 내 고향사람들과 섞여
오래오래 행복했다.
2010.2
이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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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경진님
오늘도 깊은 감동으로
풍기 칼바람의 정체성과 본질을 담은 좋은 글 잘 읽었어요
이제는 풍기 아리랑만 마시고
많은 사람들에에 깊은 감동을 주는 좋은 소설을 쓰세요!
황진이님! 고향의 매서웠던 겨울 바람을 따뜻하게 표현해 주셨네요! 고향인들을 강인하게 단련 시켜준 고마운 고향바람! 중학생 시절 새벽에 일어나 신문을 돌릴때 숨이 콱 막힐 정도로 내 얼굴을 때리던 야속했던 그 바람! 그러나 황진이님과 같이 "한번 맞짱 떠볼까!"하고 맞부딪혔던 기억이 새롭군요! 그 바람 맞으며 살아온 우리 금계인이여! 올 6월에 한번 뭉쳐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