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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한 悔恨>
“할아버지가 돈이 좀 있느냐고 묻지 않아요? 그래서 내가 욱 해서 질렀지요. 아, 내가 평생 두부 한 모니 콩나물 한 봉지하며 살았는데 무슨 돈이 있느냐고? 있을 때 마누라에게 좀 맡겨 두면 이럴 때 쓸 거 아니냐고, 돈이란 죄 다 그저 움켜쥐고 있다가는 몽땅 퍼지르고 남은 게 무어 있느냐? 했더니 멍하니 그냥 쳐다보시더라고요.”
“아 하, 어르신께서 이제야 회한이 생기는 갑네요. 손자가 색시를 데리고 인사를 오니 그윽한 심정에서 얼마라도 주고 싶었던 측은지심이 드셨는갑니더.”
할머니는 딸기 밭에서 칠닥이를 만나자 작심한 듯 푸념을 늘어놓았다.
아내에게나 자식에게 금전적으로도 냉정했던 할아버지는 손자에게만은 그 아쉬움의 일단을 내 비치고 말았다. 평생을 강직함으로 일관해 온 오재길의 인간적인 나약함에 콧날이 매웠다.
오재길은 한국의 간디라 불리는 함석헌선생의 제자였으며 다석(多夕) 류영모선생이 또한 함석헌의 스승이니 이 세 분의 강직함이란 괘를 같이하고 있을 터이다. 그러나 백세를 바라보는 노인 오재길에게 있어서 오늘은 사십 여 년 전의 아련한 과거의 추억에 빠져 들었다.
농사지으라고 평택으로 쫒아버린 둘째 아들이 대를 이을 장손을 낳았다는 것이다. 두 형제에게 이미 네 명의 손녀를 본 터라 내심 손자를 안게 될 오재길은 안절부절못하며 몸을 푼 며느리를 맨 발로 마당을 서성이며 기다리고 있는 회상에 젖어서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할아버지의 망연했을 잔상이 남은 칠닥은 딸기밭에서 부인인 할머니에게 은근히 화제 이어 건넨다.
“전 번에 왔던 손자는 할아버지가 무척 고대했던 자손인 갑씨더?”
“하나니까요.”
“그라이요, 손녀만 쭉 보시다가 손자를 얻었으니 말이시더. 마당에서 맨발로 기다리셨다면서요?”
“호 호 호...”
할머니는 해맑게 웃었다.
첫아들에게 손녀 둘, 둘째 아들에서 역시 손녀 둘을 먼저 얻고 난 후에 첫 손자가 태어난 것이었다.
“그랬던 손자였는데 이자 색시를 델꼬 오이, 용돈이라도 좀 주고 싶었던 모양인데 할머니가 막 투박하시니 기가 죽으셨겠니더?”
“아니, 돈을 생전에 나한테 좀 주면서 쓰라고 했더라면 이럴 때 쓰잖아요? 그거이 내가 좀 그래요, 땅을 팔아서 어느 교회 부지를 천 평이나 사 주었는데 그것도 나에게는 한 마디 말도 안하고 그랬어요. 그거이 다 우리 오빠가 해 준 것인데, 이것(농장)도 그렇지 않아요? 의논 한 마디도 안하고 자기 맘대로 재단으로 묶어 버렸고, 무어라고 이렇게 하자 그러면 당신 일이나 제대로 하라고 호통이었어요. 예전에 내가 고아들을 몇 데리고 있었는데 그 아이들이 있는 데서도 막 그러고 그래서 내가 말을 잘 안했지요. 내 일만 하고 그랬는데 아, 이제 와가지고서는 할아버지가 돈이 아쉽잖아요? 책갈피 같은데 돈을 넣어 두더라도 나를 안 줘요. 그런 성격이 돼나서 내가 정말. 이제 와서 손자에게 좀 주고 싶었던가 봐요. 작년부터 증손자 한 번 안고 싶다고 그래요. 통장 하나 만들어서 나한테 맡겨뒀더라면 억울하지는 않지요. 내가 어디서 돈을 빼서는 자식한테 물려주기나 했으면 내가 이렇게 억울하지는 않지요.”
할머니의 푸념은 농장을 재단으로 묶어 둔 데에로 이어졌다.
할아버지는 일찌감치 전 재산을 사회 환원에 뜻을 두었더랬다. 2002년 사재 20억 원을 출연하여 재단법인 “제주생명농업” 설립허가를 받기에 이른다. 그렇게 설립된 농장은 현재 둘째 아들 오중신이 원장으로 운영하고는 있지만 그에게도 농장의 지분은 한 푼어치도 없는 셈이다.
그 원장의 아들이며 노인의 하나뿐인 손자가 서울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노령으로 농장에서 칩거하고 있는 할아버지에게 색시를 데리고 인사를 온 것이다.
평생을 필요하다는 곳에는 금전적 배려를 아끼지 않고 희사했으며 마지막 남은 재산조차도 재단법인 설립에 써버린 노인은 이제 와서 당신의 핏줄에게는 용돈 한 푼 줄 형편이 아닌 것이다.
<정농회>
“저 입구에 나가서는 언제 올까하고 마냥 기다리시기에 올 때 되면 옵니다. 걱정 마세요. 했더니 손님 오면 뭘 대접 하냐고 또 걱정하잖아? 며느리가 다 알아서 합니다. 걱정 말라고 했지.”
할아버지는 정농회 손님의 방문을 이른 아침부터 조바심을 내어 기다리고 있다. 할아버지는 그런 모습을 보는 할머니의 힐난의 소리를 들어야 했다.
식당에서 며느리에게 흐뭇한 마음으로 할아버지 흉을 보는 할머니도 손님을 기다리는 설레는 마음은 매 한 가지다. 아울러 손님모시기에 며느리가 노부부의 심정을 참고했으면 하는 거다.
“아, 왜 할아버지의 걱정하는 자유를 빼앗고 그러세요!”
칠닥이의 농담에 할머니는 다소 겸연쩍게 웃었고 며느리 성권사도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할아버지에게는 특별하고도 특별한 정농회. 그 정농회 간부가 농장을 방문하는 일은 할아버지 뿐 아니라 이 댁 식구들에게 적잖은 자존감을 일깨우는 경우일 것이다.
오원장은 공항에 마중을 나가서 정농회인사 세 사람을 모셔왔다.
정농회 회장 주형로는 홍성의 풀무농업학교 출신이다.
풀무농업기술학교는 1958년 개교한 국내 최초의 대안학교이다. 이 학교의 졸업에는 농업의 창업논문을 제출하여만 하는데 주형로는 매우 우수한 논문을 써 냈다. 부인 또한 이 학교의 출신으로 이들은 훗날 홍등면에서 대단위 유기농 공동체 마을을 만들어 냈다. 주형로는 벼의 오리농법 국내에 도입하여 이 부분 최고의 전문가 가 되어 노무현의 봉하마을 벼농사에도 오리농법을 지도를 하게 된다. 노무현 서거 장례식에 조문객으로 모습을 칠닥이는 방송 영상을 통해 목격한 바가 있었다.
부회장 정경식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경남 사천에서 풀무원농장으로 들어 가 원경선선생과 생활했다. 이 농장에서 전명순을 만나 결혼하여 변산으로 내려가 둥지를 틀면서 이곳에 유기농을 전파하고 생산자 공동체 ‘한울공동체’를 결집하는 동시에 전주에서 이덕자와 함께 ‘한울생협’을 설립하고 성공적으로 발전을 시킨다. 칠닥이는 변산에서 정경식과 5년의 인연을 맺은바 있어서 이번에 십 이 년 만에 재회하게 된 셈이다. 더불어 동행한 정농회 사무국장은 귀농교육을 받고 귀촌하여 정농회 실무를 맡은 중년의 남자인데 칠닥이에게는 전국귀농운동본부의 교육생 후배라 밝혀져 두 사람은 반갑게 인사를 했다.
1976년 1월 오재길은 원경선과 뜻을 같이하여 정농회를 창립하게 된 동기는 일본의 고다니 준이치 애농회 회장의 한국 방문이 계기가 되었다.
일본 애농회는 애국구국, 인격교육, 애농정신이라는 원칙을 바탕으로 1946년 2월 창립이 되었다. 애농학원은 일본에서 유기농을 교육하는 유일한 사립 고등학교이기도 하다.
고다니 준이치는 풀무농장 연수회 강의에서 화학비료와 농약을 쓰는 관행농법의 문제점을 설명했다. 그는 과거 일본이 한국 사람에 저지른 만행에 대한 사죄의 뜻에서라도 일본농업의 전철을 한국은 밟지 않기를 부탁했다. 이에 오재길을 비롯한 몇 몇의 선각자들이 바른 농법을 지향하는 ‘정농회’를 결성하였다. 당시에는 군사정권이 녹색혁명의 기치를 걸고 통일벼를 개발하여 보급에 강제적이었으며 농가는 화학비료와 농약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온 나라가 식량증산에 매진하고 있을 때이다. 정농회는 국가시책에 정면으로 반하는 바른 농사를 목표로 무농법과 화학비료를 마다하고 퇴비를 사용하는 농법을 고집하면서 관官의 감시와 심각한 압박이 받게 된다. 이런 어려운 시기에 오재길은 정농회 초대회장을 맡아 14 년 동안이나 굳건히 조직을 이끌어 나갔다.
정농회 역사가 40여 년이 되었고 이제 100 세가 가까워지는 오재길노인에게 정농회 제자들이 육지에서 제주도로 행사를 준비하기 위한 방문인 것이다. 오재길 전 회장이 돌아가시기 전에 제주도에서
한국의 정농회와 일본의 애농회 평화교류 행사를 개최하기 위한 사전 답사의 일정이다. 유기농업 선구자 오재길선생에게 의미를 둔 것이다. 특히나 이 번 모임은 일본의 애농회 회원들도 참석할 예정이어서 한, 일 공동 행사가 되는 의미 있는 사례로 남을 것이다.
이들은 이 박 삼일 동안 농장에 묵으면서 11월에 있을 행사를 준비하고 재회를 기약하고는 육지로 떠났다.손님맞이에 기분 좋은 걱정을 하시던 선생께서는 손님이 돌아가신 후 그동안 칩거하시던 방문을 열고 외출에 나선다. 11 월 더 많은 이들이 찾아온다는 소식에 그 때 의연한 모습으로 맞이하고자 다리에 힘을 기르기 위함이다.
회장 주형로는 페이스 북에 선생의 근황을 올렸고 정농회 회원들이 선생을 그리워하는 답 글을 했으며 농장지기 칠닥이가 대신해서 답 글을 올렸다.
2015년 11월 9일 제주도 표선면의 가시리마을, 유체프라자에서 정농회, 애농회의 제18회 한일 평화교류회가 열렸다.
"권사님도 얼른 준비하시소?"
"아녀요! 아녀, 나는 안가우 할아버지나 모시우."
"아이, 할아버지가 오늘 연설도 하시고 할 텐데 가셔서 보시기도 하시고, 음식도 드시고 하시면 좋잖니껴?"
칠닥이는 오늘 행사에 잔뜩 기대감에 차 계신 할아버지를 보면서 할머니의 동행을 권하는 참이다.
"저양반이 온 세상을 다 다녀도 나는 한 번도 같이 가 본 적이 없어요. 같이 가자는 소리를 들은 적도 없고...."
생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오재길선생의 출장에 그의 부인은 일단의 섭섭함을 담은 사양을 완곡하게 하면서 농장에 남겠다고 하는 것이다.
오원장과 성권사 부부가 나란히 행사장으로 출발했고 오재길선생은 칠닥이가 모시고 행사장으로 향했다.
큰사슴이오름 중턱에 위치하여 한라산이 마주 보이고 표선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가시리 유체프라자는 밤이라 형광불빛만 찬란하다.
칠닥이의 오른손에 왼손을 의지하며 오재길은 행사장 입구를 향하는 계단을 천천히 오른다. 행사장 로비에 오재길이 들어서자 많은 정농회 회원들이 반갑고도 감동어린 표정으로 그를 맞았다. 김재형장로가 선생을 모시고 카페로 안내를 했다.
"저를 아시겠습니까?"
"글쎄 많이 본 것 같은데...."
구십 육세 노인의 기억에 김장로는 울컥 했다. 그 자신이 농장 초창기에 육 년이나 선생을 도와서 기초를 닦은 장본인데도 불과 십여 년 남짓 만에 이렇게 연로하셨구나, 하니까 죄를 지은 듯 서러웠다.
정농회 핵심이었던 김재형은 2002년 오재길로부터 제주도에서 법인체 농장을 개척하자는 제안을 받고 그 부부가 함께 농장을 일구다가 지금은 경기도 화성에서 자연형 양계사업을 하면서 한 살림에 납품하고 있다. 오래 동안 한 식구로 생활 했던 그를 노인은 이제 흐려지는 기억 속에서 멀어진 것이다.
선생의 주위로 과거의 동지들이 모여 들었다.
14년 동안 정농회 회장 재임 시 사무국장으로 오래 동안 보필하던 정상묵 전 회장이 인사를 올린다.
당시 열혈 정상묵도 이제는 환갑 나이를 넘겨서는 선생의 두 손을 지긋이 부여잡고는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하다. 정상묵은 정농회에서 시작한 농민운동이 경기도 양평군 양수리 두물머리에 사 형제가 농사의 터전을 잡고부터 여러 분야에서 그 업적이 크다. 경실련 생협을 비롯하여 두물머리식품에서 시작하여 팔당소비자 생협으로 발전시켰고 팔당생명살림연대와 팔당유기농운동본부등으로 분화하여 많은 유기농 후계를 만들고 소비자를 엮어내었다.
카페에서 노인은 분주한 부부를 만난다.
"선생님, 저 생각나세요? 권준권 마누라, 원경섭씨 딸이요!"
"그래? 그래, 생각이 나."
다소 수다스러운 중 후반의 여인은 원경선 선생의 딸인 원혜덕이다.
원혜덕은 원경선선생의 이 남 오 녀 중 넷째 딸이다. 그녀는 십 팔세부터 풀무원농장에 들어 와 가족같이 생활하던 김준권과 사랑을 키우다가 결혼하게 된다. 김준권은 1976년 당시 정농회의 가장 젊은 창립회원이었다. 그는 사십여 년 동안 정농회의 총무, 부회장 회장을 거치면서 후진교육에도 힘쓰면서 생명역동농업을 실천하고 있다.
"우리 아버지가 저 모습이었어. 돌아가시기 얼마 전부터 저렇게 편안한 표정이셨지." 원혜덕은 이미 타계한 아버지 원경섭을 회상하면서 안타까운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저 분이 임락경목사님이시지요?"
"맞아."
임락경목사는 1945년 전라도 순창 생이다. 그는 스스로 돌파리 목사라 칭하는데 이치를 깨달으면 돌파를 한다는 뜻이란다. 장애인들과 같이 생활하는 그의 시골교회는 망 할 교회를 기원한다. 장애인을 위한 교회니 만큼 그들이 더 이상 도움이 필요치 않는 세상이라면 존재치 않아도 될 교회라는 것이다.
광주무등산의 기독교 공동체 동광원에서 결핵환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이현필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그는 강원도 화천에서 역시 장애인들과 함께 농사를 지으면서 환경과 먹을거리를 기초로 하는 건강교실을 운영 한지가 오래다. 임목사는 어깨에서 옆구리로 사선방향으로 여행 가방을 멘 체로 영락 없는 시골사람 모습에 건장한 발걸음으로 카페로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어 허~ 일가상을 타? 허 대단하네."
2015년도 일가상 농업부문에서 수상한 전양순이 오재길과 마주 앉았다.
일가상은 가나안 농군학교를 창설한 일가 김용기장로를 기념해 제정한 한국에 있어서, 노벨상이나 막사사이상을 견줄 만 한 것이다. 오재길은 이 상의 농업부문 최초 수상자이기도 하다.
"강대인과 전양순이 중매는 내가 했습니다."
정농회에서 오재길의 중매로 전양순과 인연을 맺은 강대인은 이후 전남 벌교에서 쌀도사로 불리는 벼농사의 대가가 되었다. 선친이 농약 중독으로 사망한 뒤 정농회에 가입하여 생명동태적농법으로 농업인 대상, 석탑산업훈장, 자랑스러운 농업인상, 친환경농업 최우상등으로 결실을 맺었다. 강대인은 나이가 들자 명상에 심취하게 되었고 팔영산 토굴에서 단식수련 중에 2010년 초에 기도하는 자세로 숨졌다. 고인이 된 강대인의 업적을 부인과 딸이 이어가다가 일가상 수상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정농회 사십 년은 이렇게 전국 각지에 큰 거목을 키워 왔다.
정농회 한일교류행사는 2박3일 일정으로 짜임새 있고 의미 있게 진행되었다.
양측 단체의 회장 인사말이 이어졌고 일본 측 인사의 발언에는 몇 몇 회원이 번갈아 가면서 통역을 하였으나 잦은 실수가 웃음을 자아내어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오재길선생의 격려사 차례에 칠닥이는 노인을 부축하여 연설대로 모셨다.
마이크를 부여잡은 노인의 발언은 힘차고 또렷하였다. 여직 칠닥이의 도움으로 거동했다는 사실이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이 순간은 노인이 활발히 정농회 활동을 하던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는 것이다. 식장 한편에서 선생을 지켜보는 칠닥이에게 울컥하는 감동이 목젖을 쳐 올라 왔다.
매일 담벼락에 붙어 서 서 꼬박꼬박 조는 노인이 있었다. 노인은 연로하여 마을사람들은 그가 오래 살 거라는 생각을 하는 이는 없었다. 열반을 연습하는 중인 셈이다. 묵은해가 가고 새해 설날을 맞은 지 보름째, 정월 대보름행사로 마을에서는 액운을 쫒는 사물패가 북과 징 꽹과리와 장구를 치면서 골목골목을 누비고 있었다. 맴을 돌면서 풍물을 연주하던 꽹과리 잡이가 역시 담벼락에서 조는 노인에게 꽹과리채를 건네자 젊은 패거리와 조금도 뒤처지지 않게 역동적으로 꽹과리를 쳐 댔다. 노인은 머리를 박자에 맞추어 좌우로 격렬하게 흔들며 열정에 빠져 들었다. 사물패의 꽹과리채가 노인을 수십 년 전으로 순식간에 이동시킨 것이다. 1999년 칠닥이가 전라도 변산에서 목격한 감동이 데자뷰를 타고 오늘 이 현장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선생의 카랑카랑한 목청으로 한일 간의 미래에 대해 연설은 기운이 넘쳤지만 앞 서 한 내용을 반복하고 반복되는 현상을 극복하지 못했다. 사회자가 조용히 다가와서 귀엣말을 건네자,
"에~ 할 말은 많으나 주최 측의 요청에 의해 이만 줄이갔습니다!"
한 일 회원들 일동의 큰 박수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정농회는 익어가고 있고 선생은 늙어가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