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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밥이 탐날수록 염불은 제대로 해야 한다
1971년에 맺었으나 한동안 소원했던 인연을 2008년말의 평해대로 답사때 회복한 강릉
해장국집(메뉴'옛길' 67번, 평해대로5회글 참조)을 찾아가 저녁식사를 했다.
혼신을 다해 벌어놓고 떠난 늙은이의 2세는 골프장 출입하느라 바쁘고 3대째 머느리가
운영을 도맡다 싶이 하고 있는 식당 '춘하추동'이다.
단골을 고집한다는 것은 변화를 두려워한다는 뜻도 되지 않은가.
내가 바로 이에 속하는 늙은이인가.
식당에 이어 잠자리도 옛집을 고집했으니.
동가홍상(同價紅裳)이라건만 더욱 새로운 시설들을 두고도 4년 전(평해대로답사때)에
복원한 30여년에 걸친 인연의 집을 찾아간 늙은이다.
4년만에 찾아온 늙은이를 알아볼 사람 없지만 낯익은 시설들이라 정서적으로 편했으며,
내가 단골집을 고집하는 이유다.
안인(安仁)까지는 공군비행장 때문에 해안에 얼씬도 할 수 없으므로 늦잠을 잘 정도로
느긋한 아침이었다.
그러나 찜질방을 나서는 순간 마음이 돌변했다.
어제 중지한 남항진으로 가서 공군비행장 언저리를 돌아가겠다고.
남대천으로 간 까닭인데 상쾌하고 의욕적인 걸음을 멈추게 한 플라카드(placard).
'대선후보들은 강릉역 지하화에 대한 입장을 밝혀라'
'(사)2018동시모'(평창동계올림픽의 성공과 강릉시의 발전을 위한 시민들의 모임)라는
단체가 내건 치졸하기 그지없는 요구에 정나미가 떨어졌다 할까.
지역의 내로라하는 사람들의 결사체가 이렇다면 강릉은 어떤 곳인지 불문가지 아닌가.
과연 강릉시는 이 정도 밖에 되지 않은 지자체?
동계올림픽을 빙자하여 자기 고을을 발전시켜 보겠다는 지역이기주의를 이해한다 해도
대통령 후보가 코레일(Korail) 사장 후보 정도로 보이는가.
알량한 표를 가지고 있다 해서 이래도 되는가.
잿밥이 탐날수록 염불은 제대로 해야 하건만.
아무 능력 없으면서도 3수까지 해서 유치한 동계올림픽이니 성공하기 바란다.
그러나 살펴본 유럽의 성공한 개최지들이 내게 준 답은 터무니없는 욕심이라는 것.
게다가 온갖 난제를 함께 풀어갈 각오는 커녕 지역이기주의에 매몰되어 있으니 실패가
눈에 보인다.
그럼에도, 내 예측이 100% 틀리고 완벽하게 성공하는 대회가 되기만을 나도 열망한다.
짓거리로 보아 영광은 자기네가 독식해도 좋지만 실패의 뒤치닥거리는 온 국민의 몫이
되겠기 때문이다.
백두대간 삽당령의 북쪽계곡(강릉시 왕산면 목계리)에서 발원해 성산면 구산리를 거쳐
강릉시를 관통해 동해로 빠지는 32km 강릉 남대천.
한반도 남쪽에만 벌써 3번째(북에서 남으로/내륙인 철원과 동해의 양양에 이어)다.
아침8시가 넘었는데도 손님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는 천변의 새벽번개시장을 뒤로 했다.
코스모스와 물억새(나는 이름표로 알뿐 물억새와 갈대를 구분하지 못함)가 한들거리는
가을 아침의 남대천길이 한가롭고 편했다.
마냥 걷고 싶은 천변길이지만 하구의 섬석천 때문에 어제 지나온 아라나비, 솔바람다리
남쪽(남항진)으로 이어질 수 없다.
아쉬움을 지닌채 공항대교로 올라섰으며 꽤 많이 우회하여 남항진으로 갔다.
야경(夜景)과 달리 시들한 남항진해변(南項津).
안인으로 가는 해변이 18전투비행단으로 인해 막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름대로 남쪽 목(項)인데 잘려 있으니 그럴 수 밖에.
막다른 골목, 막다른 집은 도둑들도 기피한단다.
퇴로가 없기 때문이라는데 발전할 수 없다는 뜻도 된다.
남항진교를 되건너 섬석천 둑길을 걸었다.
강릉시 성덕동(城德洞) 지역인데 4년전 평해대로 때 도로를 따라야 했던 한을 풀기라도
하려는 듯 비행장쪽으로 붙었으나 전투비행단은 마냥 허용하지는 못하겠다는 듯.
병산교 앞에서 길바닥과 전주의 바우길 화살표 따라 논밭길, 마을길을 걸어야 했다.
해안 아닌 들판, 규모는 작아도 추수를 앞둔 황금들을 걷는 기분도 별미라 생각하며.
이 길가 소나무에 해파랑길 표지판이 붙어있는데 적잖이 의아스럽기도 했다.
해파랑길 조성자들도 이 지역에서는 몹시 궁해졌나 보다.
이륙하는 공군전투기들의 굉음 때문에 일상생활은 물론 축산업에도 지장이 많겠다.
어쩌다 마주치는 바우길과 해파랑길 표지를 무시하고 길을 만들어 갔다.
공군 초소권내의 작은 마을에 이채로운 건물이 돋보였다.
'창의력으로 미래를 꿈꾸는 곳', '햇빛사랑' 간판을 단 큰 집이다.
노랑 소형버스와 여러 대의 승용차가 주차중인 것으로 보아 어린이집일 것이다.
공군 가족을 위주로 한 교외 스쿨이라고 짐작되는 집이다.
작은 농촌 마을에 이 집을 드나들 어린이들이 있겠는가.
늙은 길손을 감동 먹인 '과정도 예술행위다'
두산동 핸들(차돌이 많아서 흰돌이었는데 변음되었단다) 정류장으로 진출했다가 다시
청량동길로 들어섰다.
지리멸렬하는 야산길에 시장기까지 겹쳐서 지쳐갈 때에 맞춰 도로(입암로)에 진출했고
식당(옛고을암소한우촌)에서 아침 겸 점심을 먹은 후 새로운 결정을 했다.
공군18전투비행단으로 인한 골목 뒤지는 일은 그만 하고 안인진으로 가는 것.
평해대로 때는 남강로였다고 기억되는데 도로명이 바뀌었나.
율곡로를 따라 섬석천을 건너 비행장교차로, 어정교차로를 지난 후 하시동교차로에서
옛길(시동서당길)을 따라 강동면소재지로 갔다.
이 글을 쓸 때 어둑해가는 시간에 걷던 평해대로 때 생각이 나서 그 때를 되돌아 보았다.
<강릉시내 직행길 남강로 곁을 뜸하게나마 오가는 영동선열차가 존재를 과시하려는 듯
남기고 가는 둔탁한 쇠소리가 싫지 않았다.
강릉 공군기지에서 발진한 야간훈련 전투기의 굉음도 생명의 소리처럼 느끼게 된 것은
외로운 밤길이기 때문이었을까.
'남강로'는 7번국도의 부담을 덜어주는 보조도로인가.
강동면을 시내권으로 묶는 수단인가.
아무튼, 홀로 걷는 늙은 길손에게는 편한 밤길이게 했다.>(2008년말 평해대로 글)
띠(茅草)가 많아서 뙡마을, 또는 모전(茅田)이라 했다는 모전리 교차로, 삼거리를 지나
군선강(群仙/군선교)을 건넜다.
강릉시 강동면과 왕산면, 옥계면의 삼각 꼭지점인 만덕봉(1.035m)의 장구목에서 발원,
강동면 언별리 단경골을 거쳐 북동류해 동해로 빠지는 강원도 유일의 강이란다.
유량이 줄어들어 군선천으로 강등되었다지만.
강을 비롯해 아름다운 경관에 도취된 신라 사선(四仙/영랑, 술랑, 남석, 안상)이 뱃놀이
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관동지역은 황당한 사선 이야기 빼면 공허하겠다.
단경골(檀京)은 또 하나의 두문동이었던가.
고려왕조의 수 십명 충신들이 이 곳 깊은 산골로 숨어들어 종묘를 봉안하기 위해 제단을
만든 곳이라 하여 단경골이라 불리게 되었다니까.
안인삼거리에서 다시 만나는 영동선 철로를 건너 안안해수욕장, 안인항에 들렀다.
이조때 수군 만호영이 있었다는 안인진리의 어촌정주어항이다.
만호는 고려와 이조의 10진법에 따른 수군편제(백호, 천호, 만호 등)다.
1만명의 병사를 거느린 만호는 무관직 종4품이었으며 현 체제로는 령관급일 것이다.
병력 규모로 보면 별(星)이 되겠지만 당시의 종4품은 중령 또는 대령?
영동선과 나란히 가는 해안로(율곡로)는 '안보전시관'이 있는 '강릉통일공원'을 지난다.
해안의 함정전시관과 산자락의 안보전시관으로 나뉘어 있다.
강릉시가 개설했다는 괘방산 '안보체험등산로'도 있다.
1996년 9월?일, 잠수정으로 침투한 북한 무장군인들이 괘방산 줄기를 따라 도주하다가
화비령 ~ 청학산에서 자살했는데(11명?) 이 사건이 계기가 되었단다.
함정전시관 옆에 전시되어 있는 작은 함정이 당시 침투했던 잠수정.
철길과 자리바꿈해 피암터널 2개를 통과한 해안로는 등명락가사(燈明洛加寺)를 지난다.
신라 선덕여왕이 정승에 올리려 했으나 거절하고 승려가 됐다는 진골(眞骨)의 자장율사
(慈藏律師)가 세운 사찰이란다.
'수다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된 후 고려조에 등명사로 개명되고 중창했으나 천년 사찰이
이조의 승유억불정책의 제물이 되었다가 부활했다고.
곧, 마주친 물체는 건물인지 조형물인지 괴상한 이미지인 하슬라아트월드.
비탈 위 넓은 터(75.000평)의 이색적인 건물로 강릉의 신라때 지명 '하슬라'+'Art World'
(예술세계)의 합성어란다.
예술가 4명이 3년여의 각고로 2003년 10월 개관했다는데 과정을 중시하는 예술가들이
만들어가는 테마파크라 할까.
"과정도 예술행위"라는 이 예술가들이 늙은 길손을 감동먹였다.
초(超)과정, 탈(脫)과정이 순수예술의 극치인양 일탈을 합리화 하는 예술가들에 비해서
전위예술을 지향하면서도 윤리적 기반을 공고히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파리 뽕삐두센터를 연상케 하는 괴상한 물체는 하슬라아트월드에 따른 뮤지엄호텔.
'6. 25남침사적탑'을 지나 등명해변으로 내려갔다.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도 있다.
1950년 6월 25일, 38도선 전역에서 남침을 개시하기 1시간 전인 새벽 3시에 북한군은
이미 남쪽 해안으로 침투해 이곳에 상륙했다는 것.
이 때 희생된 민간인들의 넋도 위로하기 위해 함께 세웠단다.
침략은 늘 휴일과 미명에 시작된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 때를 가장 소홀히 하는 건망증 때문에 비극의 역사는 반복되고 있다.
4년 전의 평해대로 길에 등명해변 식당에서 푸대접 받은 기억이 떠올랐다.
<백사장 따라 등명항까지 가려는 무모에 체력과 시간이 낭비되었다.
말쑥한 신사 맵시라야 하는가. 매일 목욕해서 땀내도 나지 않건만 허술한 차림의 늙은
나그네라 무전취식할까 겁나는가.
점심장사를 마치고 쉬려는 참이라 불청객인가.
등명해변에서 나와 들른 식당(등명횟집)이 시큰둥했다.
하긴, 삼척에서 예까지 걸어와 첫 식사를 하려는 늙은이가 온 정신으로 보이지 않겠지.>
정동진, 정동진역, 정동진어항
정동진에 도착했을 때도 그랬다.
<정동진역에서 역무원의 신경질적 응대 후라 관광안내 직원의 호의가 돋보였나.
강릉시청의 관광과 중국어담당인 점과 어투, 성명(金延宣) 등으로 미루어 중국교포라는
느낌인데. . . . .12월 중순의 싸한 바닷바람에 움츠러들려 했는데, 그녀가 내놓은 따뜻한
녹차의 김속에 정(情)이 피어나는 듯 했다>(평해대로 글)
정동진리의 원 이름은 고성동이었단다.
마을 중앙에 천지개벽때 고성에서 떠내려왔다는 작은 동산 고성산(高城山)이 있다해서.
그 까닭에 고성사람이 해마다 세금을 받아 갔단다.
어느 해, 마을 주민들이 뭉쳐서 세금을 낼 수 없으니 산을 가져가라고 역공을 폄으로서
고성인은 세금을 받아가기는 커녕 다시는 오지 않게 되었다나.
강동면 산성우리와 옥계면 낙풍리 사이, 해발754m 피래산에서 발원한 정동진천을 중심
으로 북쪽(현1리)과 남측(현2리) 두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북쪽은 물이 흐르는 쪽으로 내리퍼먹고 남쪽마을은 반대쪽에서 치퍼먹는단다.
그래서 속이 서로 다르며 미묘한 갈등관계에 있다는 두 마을의 정동진리.
초라한 해안간이역이 이렇도록 번화하게 된 까닭이 무엇일까.
'한양궁궐의 정동쪽에 있는 바닷가' 라 해서 정동진이라 했다 하나 실제 위도상으로는
서울의 도봉산과 일치한다는 정동진.
동해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뜨는 곳이라는 관광 프리미엄도 간절곶, 호미곶에 밀렸다.
바다와 최근접역으로 기네스북에 올라 있다는 것도 각광받은 후다.
그러므로 그런 것이 이유가 될 수는 없다.
TV의 위력이다.
드라마 '모래시계'와 그 촬영지가 동시에 뜨게 된 1995년 이후다.
주말의 청량리역이 바빠졌고 철도공사의 상술이 주효했다.
해돋이(맞이)열차는 전국화 되었다.
여기에, 1996년 북한의 일조가 있었다.
북한 잠수정 침투와 정동진을 매스컴이 집중 보도했으니까.
내가 정동진에 처음 들른 것은 1970년대 초의 여름이다.
승용차 2대에 분승한 우리는 설악산에 오른 후 강구(경북영덕)로 가는 도중이었다.
한양의 정동이라는 이유만으로 비포장 좁은 길을 달렸으나 삼엄한 경비가 초를 쳤다.
1996년 말에는 어망에 걸려서 좌초했다는 북한 잠수정(함정전시관에 전시)을 보겠노라
달려갔으나 봉변당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이후, 자의 타의가 겹쳐 들를 때마다 격세지감을 느끼게 했지만 정동진이라 해서 우리
나라 관광지의 혐오스런 발전 전형(典型)에서 예외일 리 없다.
난개발과 시설의 무리한 난립, 불결과 불친절과 바가지 상혼 등.
오죽하면 신규시설을 놓고 영업권 침해 운운하며 자기네 끼리 한판 붙기 까지 했을까.
어촌정주어항 정동진항 ~ 심곡항의 해안로가 뚫렸으리라 기대하고 해안을 고집했으나
엄두도 낼 수 없는 해안단구(海岸段丘)에 되돌아 나와야 했다.
해안을 멀리 하여 난 헌화로를 따라 썬크루즈리조트, 조각공원이 있는 해발60m 고개를
넘어 심곡리 어촌정주어항을 향해 내려갔다.
한데, 헌화로(獻花路)는 삼국유사(水路夫人의 獻花歌)에서 비롯되었다는데 사건의 주
무대인 임해정(臨海亭)을 하루거리나 남겨놓은 정동진~옥계 간을 왜 헌화로라 했을까.
"깊은 골짜기 안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의 심곡리(深谷)의 어항.
속초의 외옹치항을 연상케 하는 마을이며 항구다.
피래산 줄기가 마을 뒤 남북으로 길게 뻗어 마을을 안온하게 하고 있다.
마치 설악산 줄기가 동해로 뻗어 외옹추의 병풍역할을 하고 있는 것 처럼.
고개를 거의 내려갔을 때 내 옆에 와서 정지한 한 승합차가 승차를 권했다.
이 지역 감리교회의 차량인 듯 한데 고마워서 타기는 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 내렸다.
그리고 원 위치로 돌아갔다.
옥계면 금진항으로 가는 해안길 헌화로,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든다는 기묘
하고 신비스런 바위들의 전시장을 스쳐갈 수 없기 때문이었다.
호의가 되레 시간과 체력을 소모하게 한 셈이다.
4년전, 이 길의 연장선인 평해대로의 평창 운교리(방림)교회 목사의 호의도 그랬는데.
심곡리(강동면)쪽 해변의 산자락에는 합궁골이 있다.
남근과 음문이 결합하는 형국이라 하여 합궁(合宮)이라 이름짓고 필연적으로 부수되는
남녀의 금슬과 후사 이야기까지 창작했으리라.
전국의 산야에 남근과 음문 형상의 석물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성기(性器)신앙이 오랜 세월 전통적 무속신앙에 깊숙히 자리하고 있음을 의미하리라.
한데, 헌화로와 합궁골을 한 안내판에 묶어 연관 지으려 한다는 느낌을 받게 한다.
헌화로의 근거인 헌화가가 수로부인과 순정공(純貞公)의 찰떡 금슬에서 비롯되었음은
사실이지만 성기신앙과 결부될 수는 없잖은가.
전자가 로맨틱한 사랑이라면 후자는 동물적 생산을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성에 대한 동경의 한 표현일까
강릉시의 남단인 옥계면 금진항(玉溪 金津)에 들어섰다.
금진리의 국가어항이 차량들로 몸살을 앓고 있다.
동해안에서 유난히 많이 집중하는 강태공들 때문이란다.
TTP방파제에 촘촘히 박혀있는 조사들 덕을 보는 곳은 당연히 낚시마트일 것이다.
더러는 잡은 고기로 안주삼아 술을 마실 뿐 차량운전 때문에 제약을 받는다면 횟집에는
이렇다할 보탬이 되지 못할 것이므로 인기있는 손님이 되지 못하겠는데.
장마당처럼 붐비는 금진항을 벗어나 금진해수욕장을 지나면 옥계해변이다.
현기증이 일 만큼 고속도로와 국도, 지방도로와 기타도로에 철도까지 얽히고설킨 구간.
평해대로 때 주수천과 낙풍천을 건너야 했고 고속도로를 제외한 모든 도로를 옮겨 타야
했던 지역을 역(逆)으로 통과해야 한다.
편하지 않은 구간을 앞에 두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여기, 강릉시 옥계해변과 동해시 망상해변은 무시로 드나들고 거닐었던 지역이라 대중
교통편이 있다면 망설이지 않고 이용했을 것이다.
버스정류장 푯말은 있으나 운행 횟수가 워낙 적어서 불편하단다.
골목에서 여행용 캐리어를 끌고 나온, 어촌 분위기에는 화려하게 느껴지는 중년여인의
말에 다시 걷기를 시작했다.
얼마 가지 않아 한 택시가 내 옆에 멈춰섰고 내게 승차를 권하는 차안의 여인.
조금 전에 버스정류장에서 만난 중년여다.
동해시 고속버스터미널로 가는 중이라며 복잡한 구간을 편하게 벗어나라는 호의다.
자녀가 거주하는 구리시(?)에 가기 위해서 택시를 불렀는데 어르신에게 도움이 된다면
더없이 다행이라는 그녀.
복잡한 도로망뿐 아니라 한라시멘트의 무역항인 옥계항의 공기, 7번국도인 옥계~망상
도로사정 등 심란한 문제가 한둘이 아닌데 일거에 날려버린 여인이다.
65번동해고속도로, 7번국도와 영동선 철도가 나란히 가는 도직해변길을 오랜만에 차로
달리며 낭만적인 분위기를 느껴보았다.
도보 여행자는 긴장에 빠져 즐길 겨를이 없는 길인데.
강릉시 남단 도직해변과 동해시의 북단해변 망상(望祥)을 지나 노봉삼거리에서 내렸다.
어달해변을 걸어서 묵호항으로 가기 위해.
1970년대말까지도 옥계~망상의 헤변은 송림과 백사장 외에는 편의시설이 전무했으며
대중교통이 열악해 쓸쓸할 정도로 호젓했다.
지금의 고속도로가 옛 7번국도였으며 해안에는 철길 외에는 아무 길도 없었다.
지금은 '일출로'라는 이름의 해안로가 묵호항으로 뚫려있지만 엄두도 낼 수 없었으니까.
가장 흔한 어촌이름 중 하나인 대진동(大津)이 여기에도 있다.
대진해변을 지나 있는 어촌정주어항 대진항의 등대는 서울 경복궁의 정동방이란다.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이다.
정동진은 광화문의 정동이라 하고 대진등대는 경복궁의 정동방이라니 이곳 사람들에게
한양궁궐이 강릉시 또는 동해시 만큼이나 광대하게 보이는가.
강원도기념물제13호 해안봉수대가 있는 어달산 밑 마을이라 해서 어달동(於達)인가.
어달해변과 어촌정주어항 어달항, 일출로가 온통 거대한 횟집거리다.
이렇게 많은 횟집들에 공급할 고기가 바닥나서 양식어업, 원양어업으로 충당할 수 밖에
없는데 식도락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에 와있는 것 아닐까.
해안은 임해공장에 잠식당하고 원양(남태평양) 역시 무한한 어고(魚庫)가 아니잖은가.
어달동에서 묵호로 넘어가는 지점 해안에 크고 검은 바위가 기둥(柱)처럼 서있다.
마치 도봉산의 주봉처럼.
까마귀가 알을 깠다 해서 까막바위란다.
일출로가 조성되기 전에는 바다가운데 있었을 것이다.
예전에는(등대가 없었을 때?) 고깃배들이 이 바위를 기준으로 해서 항해했으며 이 바위
주변에 고기가 많아 갈매기와 까마귀들이 몰려들었었단다.
그런데, 이 바위의 위치는 서울 숭례문의 정동이라고?
숭례문이 경복궁 남쪽에 있으며 까막바위의 위치가 대진등대 남쪽인 것은 맞지만.
강원도는 왜 서울의 정동에 맞추는데 혈안이 되어 있을까.
도성에 대한 동경의 한 표현일까.
함경도 외에는 각 지방이 정남, 정서에 맞추려고 서울을 임의로 끌어가고 있다.
이조500년을 돌이켜 보면 한양 천도를 주장한 무학대사가 돌팔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느 경망스런 대통령의 주장대로 다시 천도가 되었더라면 정동, 정서, 정남 모두 부질
없는 짓이 되고 말았을 텐데.
까막바위 옆 '문어상'도 황당한 설화를 지니고 있다.
침입한 왜구에게 희생당한 마을의 어진 호장(이장)이 즉시 문어로 환생, 왜구를 물리쳐
마을의 수호신이 되었다는 것.
그렇다면, 이곳 어민들은 문어를 조상처럼 모셔야 하건만 수호신이라 하면서도 앞다퉈
잡는데 혈안이 되어 있으니.
물도, 바다도, 물새도 검다 해서 묵호(墨湖)라 했다는 묵호항 수변공원에 도착했을 때는
점등이 시작된 6시가 되었다.
삼척지역 탄광의 무연탄 반출용 작은 항구에서 시작해서 무역항으로 발전한 항구다.
행정구역 묵호동 또한 삼척군 북평읍과 더불어 새 지자체 동해시의 근간이 되기 전에는
명주군 묵호읍이었다.
이미 어두워진 시간,수변공원과 변화된 묵호항, 등대 등 볼거리들의 야경감상보다 우선
해야 하는 일은 찜질방을 찾아가는 것.
누누히 말하지만 이 늙은 길손의 잠자리로는 찜질방을 능가할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천막은 단지 가장 작은 선일 뿐 결코 최선이 아니다.
묻고물어 부곡동의 찜질방, 금강산건강랜드를 찾아간 이유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