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소와 친해져라
박은덕
사람이 한번 미소를지으면 얼굴에있는 26개의근육[웃음근육]이 움직이고 한번 인상을 쓰면 나쁜근육 40개가 움직인다고한다. 즉 한번 인상을 쓰면 두번이상은 웃어줘야 손해를 보지않는다는것이다.
사람으리 얼굴은 4년에 한번씩 윤곽이바꿔지고 뼈는 2년에한번씩바꿔진다고한다.
아무리 험상궂은 인상이라도 늘 웃음을 잃지않으면 곧 포근하고 후덕한인상을 가지게될것이다.
굳어있는 안면근육을 미소로풀어주면 근육역시 4개월에 한번씩 변한다고한다.
'내면의 얼굴은 내것이아니라 상대방의것이라고한다'고 웃음의 아버지인 노만카슨스[norman cousins]는'웃음은 방탄조끼다'라고말을한다. 사람이 꼭 좋은일이있어서 기쁜 마음으로 웃는것보다는 억지로라도웃어주면 기쁨이생겨난다고한다.
미소라는 보약은 만병통치약이기도한다.
많이들 알고있겠지만 요일별웃음을 말해본다.
월요일-원래부터 웃는날이다.
화요일-화가나도웃는다.
수요일-수도없이웃는다.
목요일-목숨걸고웃는다.
금요일-금방웃고또웃는다.
토요일-토실토실웃는다.
일요일-일어나자마자웃는다.
나는매우긍정적인 성격을 가진소유자이다.
살아가면서 직장일이나 인관관계에서 벽에 부딪쳤을때 누구나한번은 자신의 삶을 좀더 나은 방향으로 비추고 싶다라는 생각을 할것이다. 행운역시 용기있는 자에게만 찾아온다.
이것은 아주 사소한 일에도 정확히 들어맞는 진리이다.
어느누구를 만나든지 첫인사는 미소로 그를 맞이해야하며 헤어짐역시 미소로해야한다.
적어도 3번이상은 웃어야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든다.
어떤이는 이렇게 말을한다.
1]아침에 일어나자마자웃는다.
2]식사할때 음식을놓고 웃는다.
3]화장실에서 용변을 볼때도 웃는다.
4]잠자리에 들때 하루를 감사하며 웃는다.
사실 살면서 웃음거리를 만들자고하면 하루에도 수십번은 웃을수 있을것이다.
평생에있어서 약 20일밖에 웃지않는다는 사실이 그저 답답할뿐이다.
프랑스 극작가 마르셀빠뇰[marcer pagnol]은 [웃음에대하여]라는 책에서 웃음이란 우월감의 표현이라고 말했다.
예를들어 길거리에 바나나 껍질이 떨어져있는데 누군가가 밟고 넘어졌다.
이광경을 보고 웃는다는것은 '자신이라면 바나나껍질따위를 밟고 미끄러지지않았을 것아다'라는것을 상대방에 대해 우월하다는 의식이 웃음이라는 표현을 통해 나타난다는것이다.
그렇다면 우월감이 웃음을 유도한다는셈인데 쓴웃음이나 울면서 웃는 웃음은 무엇일까?
어떤 철학자는 우월감이아닌 열등감�문에 웃음을 지을때가 있다라고한다.
울면서 거울을 보고 웃는게 여자의 웃음이아닐까싶다.
사람과 사람사이를 연결해주는 커뮤니케이션의 한 수단이라고도한다.
웃는다는것은 사람만이 가질수있는 매우 높은 수준의 감정표현이며 문화적 소산이라는 것을 알수가있다.
프랑스의작가 앙드레모루아 [andre maurois]는 유머 [hu-mor]와 에스프리[esprit] 의차이를 다음과같이 이야기했다.
에스프리란 위에서 사람을 비판하는 것이며 유머는 아래에서 위를 비판하는 것이다.
채플린의 영화 [독재자]처럼 히틀러에게 지배 당하는 사람들이 히틀러의 흉내를내며 관객들을 웃기게한것처럼
아래에서 권력자와 세력을 가진 사람을 비평하는 것이 유머라는 것이다.
앙드레 모루아가 정의한 유머와는 별도로 웃음이 자기자신에대한 비평이라는 설도있다.
요즙 tv 강의에서나 워크� 등에서보면 [웃음치료사]라는 강사들이 제법인기가있다.
1시간30분정도의 정해진 시간속에서 경제니 가정상담이니 처음 10분은 귀에 쏙 들어오지만 사실 집중하기란 힘들다.
언젠가 웃음치료사들이 강단에 서면서 손과 얼굴등 즉 몸으로 웃게하며 소리로웃게한다.
언제 졸음이 왔냐는듯 청강생들은 생기가 넘쳐나고있다.
웃음에는 빈정거린다거나 피상적인웃음 그리고 풍자적인 웃음등과같은 형태의 웃음을 자주 얘기하게된다.
그러나 나는 어떤이들이 나에게 미소를 보내면 왠지 그들과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든다.
웃음은 소통 이기도하다.
'원하는 것이 있을때 칼을 얻으려하지말고 웃음으로 그것을 이루라' 라고 셰익스피어는 말을한다.
또한 구약성서 시편에서는 '분을 그치고 노를버려라 불평하지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다.
화를 겉으로 드러내지 말라는 말도있다.
사람이 신이아닌 이상 어떻게 화를 속으로만 삭일수있을까? 표정 하나하나에 비춰지는게 그때의 기분이고 생각인것을...
웃자, 웃다보면 험상궂은 인상도 온화해질테고 날카로운 눈매도 웃는 눈매로 변해갈것이다.
영국이나 유럽에서는 유머를 매우 높은 수준의 문학으로 평가하고 있다고한다.그에비해 동양권늬 나라에서는
약간 낮은 것으로 치부해버려 안타까운현실이다.
사람만이 가진 매우 높은 수준의 감정표현이며 문화적 소산이라는 것을 알수가있다.
웃음이 사람과 사람의 사이를 연결해주는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라면 사람을 웃게하는 것은 결코 정박한것이아니다.
그러나 유머를 포함한 웃음은 다 똑같은 것이아니며 그리 단순항것또한 아니라한다.
즉 웃음이란 인간의 다양한 감정의 표현이라할수있다.
웃으면 행복해진다.
많은 철학가들은 웃음의 본질이 고도의 정신활동의 상품이라한다.
그렇다면 사람을 웃기는것또한 인간관계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가 작용하지않을까?
***************************************************************************************************
기도의 방법과 힘
박은덕
기도는 본래 단순하지만 심오한것이다.
기도를 어려워하는 사람들은 어린이의 단순함으로 시작해야할것이다.
세상에 많은사람들은 각기 다른신을 믿고있다 기도교 불교 무슬람 등등...
사람들은 각자가 믿는 신에게 진심어린 마음으로 기도를 할것이가 나는 하나님을 믿기에
내가믿는 하나님께기도하는 이야기들을 써볼까한다.
하니님을 믿지않는 사람은 그져 애해를 바랄뿐이다.
기도로 하나님을 믿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직접몸으로 체험하고 판단해보라고 얘기해보고싶다.
나는 무슨일을 진행할때마다 늘 기도로시작한다. 몇달을 교회에 안간적도 있고 예배를 드리지 못했지만
집에서라도 꼭 혼자만의 기도시간을 정해놓고 늘 하나님께 보고하며 허락을 받곤한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쉬지말고 기도하라. [[살전5;17]"
하지만 깊이있는 기도를 하기란 어려운것같다. 기도는 우리의 직업과 위치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할수있다.
건강한자나 병든자나 대통령이든 어린이든간에 기도는 머리로 하는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한다는 것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든 다른신을 믿는 사람이든 다 아는 사실일 것이다.
인간의 정신은 매우 한정되어 한가지를 생각하면 다른 한가지를 생각할수 없기�문이다.
기도는 방법은 정해놓고 하는 것이 좋을 것같다.
성경을 읽을�도 빨리 읽으면 사람의 깊은 의미를 찾지 못하기 때문에 아마도 꽃주위를 날아다니면서도 꿀을 얻지 못하는 꿀벌과도 같을 것이다. 책역시 마찬가지다 빨리 읽보다는 천천히 하나하나 �놓지않고 읽어야 독서에 큰도움이된다.
대부분 초신자들은" 성경을 읽지못한다면 기도를 하지 말아야할까요?" 말하는 사람도있다.
기도는 눈먼사람이나 움직일수 없는 중증장애인이나 귀먼사람도 할수있다.
나는 기도로써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알았고 꼭 이루어 주신다는 것도알았다.
말을 배우기 전부터 교회를 다녔던 나는 처음 배운노래도 찬송가였고 처음읽었던 책도 성경책이었다고 내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내생에 3번은 꼭 성경말씀은 내손으로 써보ㅏ님께 약속을했다.
나는 신학을 했고 한학기 과제로 신.구약을 자필로 써야했다.
분량이 너무많아 포기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남 두꺼운 노트 20여권과 수십자루의 볼펜을 사용했다.
내최고의 보물로 간직했지만 지금은 목사님이신 둘째언니가 보관하고있다.
두번째는 2년전에 시작을했다. 게으름에 취미를 삼아 지금 구약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예례미야애가서]
언젠가는 꼭 성공을 하겠지만 난 내 아이들에게 유품?으로 주려고한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영적으로 메마른 시기가 꼭오게된다.
그러나 그 시기가 온자체가 문제가아니다 내가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것이다.
인내와 겸손과 평온한 마음으로 ...거룩한 침묵으로 하나님을 기다려야 한다고본다.
나를 내려 놓을 � 하나님의 명령과 뜻이 조금씩 나에게 임한다는 사실이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앞에 자신을 내려놓도록 권유를 받는다.
즉 나를 내려놓고 하나님을 의하라는 것인지도모른다.
나는 30대 초반에 회사생활에 쫓기어고 힘들어 한동안안식일을 못지킨적이있다.
하지만 내자신이 놀란건 날마다 기도를 한다는 것이다.
일할ㄸ�나 출근할때나 또 누군가를 만날때도 마음의 기도를 하루에도 몇번씩 한것이다.
" 주님!오늘 하루를 당신께맞깁니다." 하고 "이렇게 쉴수있는 밤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로 맺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온갖힘든일 다하고 내자녀가 밖에서 누군가에게 폭행을 당하면 그 아이를 찾아 꾸중하고싶고 타이르고싶을것이다. 하물며 사랑의 하나님이신 분꼐서는 내자녀를 고통속으로 빠지게하는 이들을 그냥 두지는 않을게아닐까?
나는 날 핍박하거나 날 헐뜻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을 벌하려고 하지않는다.
내 아버지이신 그분꼐서 다 알아서 해주시기�문이다.
자녀가 부모를 믿지않으면 누굴믿겠는가? 흔히 기독교인들은 십자기를 힘없이 짊어지기도하고 혹은 강하게 짊어질수도있다.
하지만 십자가의 무게는 다 똑같다고본다.고통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길 바랄뿐이다.
우리집은 다른가정처럼 번드르한 가훈은없다. 그걍 .감사합니다 .이다 감사란말은 참으로 사람을 기쁘게한다.
이유없이 그냥좋은것이다. 마음에서 우러나지않는 신앙은 오래가지 못하며 햇볕에 바랜옷과같다고 하듯이 마�메서 없는 감사역시 마찬가지일것이다.
나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저버린경우가 많지만 하나님꼐서는 단 한번도 나와의 약속을 어기지 않으셨다.
각 교회마다 예배하는 방식이 조금은 다르겠지만 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송구영신 예배는 각성도를 에게 하나님말씀 한구절씩이 주어진다. 어릴적에는 그냥 책갈피로 사용했고 별뜻없이 넘겼지만 지금의 나는 한해를 꼭 그 말씀대로 산다는것이다.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글을쓰게�고 봉사도할수있게�다.
하니님꼐서는 여러가지의 축복을 내게 주신것이다.
인내라는 쓰디쓴열매를 달디단꿀로 바꿔주셨고 또한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며 항상 내편이란는것을 경험케 해주셨다.
태양은 오염된 수증기를 끓어당긴다.조금씩 태양에 가까이가면서 오염된물질을 희석시켜 자연스럽게 정화시킨다.
그러나 차이점은 수증기는 자유롭게 이끌리나 스스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는것이다.
우리 영혼이 하나님 안에 들어가는것은 많은 노력이 없어도 자연 스럽게 이로어질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중심에서 강하게 우리를 이끄시기 �문이다.
그 중심이 높고 영적으로 고귀할수록 멈추지않고 계속 격렬히 움직이고 힘이 솟는다고한다.
사람은 누구나가 눈을 감자마자 기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도는 삶의 근원이고 메마른 영혼을 풍요롭게 만들고 죄에서 멀어지게할 원천이다.
글쓰는 작가들은 자신을 노출시켜야 좋은글을 쓸수있다라고 얘기를한다.
하지만 남편이있는여자가 아내가 있는 남자가 누군가를 미치도록 사랑한다면 솔직하게 노출시킬 사람이 과연 몇이나될까?
아마도 하나쯤은 숨기고 싶은것이 있을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 기도드릴때는 내 모든것을 노출시켜야한다.
아니하더라도 다아고 계시기 때문이다.사람이 죄를 짓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면 아니될것이다.
회개하는 영혼들에게 더좋은 것을 주실거라고 난 믿는다 . 나의 마음이 방심해 지거나 세상의 유혹을 받을때는 직접 그들과싸우지말고 그분께 모든것을 맞겨야할것이다.
어린아이들은 귀신이나 괴물꿈을 자주꾼다. 겁에질리고 놀라 기겁을해도 엄마를 보면 안심하고 엄마의 품에서는 금새 그모든것들이 사라진다.세상에 빠지더라도 예수그리스도의 임재하심이 헤쳐나갈지혜와 용기를 우리에게 부어 주실것이라믿고 믿음으로 유혹을 물리쳐야 할것이다.
기도는 값진 진주이고 숨어있는 보물이란 말도있다.
영으로란 말은 인간적이고 물질적인방법에서 빠져나와순수한 영으로 들어가는것을 얘기한다.
진리로란말은 인간의 연약함은알고 진리되신 하니님앞에 모든것을 내려놓아야함을 의미하기도한다.
두가지 진리만이있다. 전부와 전무이다.
아담이 생명을 잃고 쫓겨남으로 영원한 생명도 �았겼지만 사도 바울은 예수그리스도로인해 다시 살아났다고말한다.
"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있다면 새로운 피조물이요이로 이전것은 지나갔으니 바로 새거이되었도다."[고후5;17]
나는 영혼의 이끌림을 받을때를 따라야한다고생각한다.
그힘의 근본은 하나님의 사랑이기때문이다.
모든일에는 처음과 끝이있다.만약 우리가 항상 처음에서 멈춘다면 끝을 볼수가없을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갈수있는 방법또한 없다.
처음에는 노력을 해야할것이고 나중에는 열매를 즐겨야할것이다.
세상과 연결되어 있는 밧줄을 끊어 내야만하고 강하게 기운차게 노를저어 출발점 항구에서 점차 멀어지고 마음쏙으로 이끌려지도록 노력해야할것이다.
죄에서 멀어지면서 내면으로 돌아서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기도를 썩 잘하지는 못한다.한때는 내자신이 놀랄정도로기도를 잘할때도있었다.
과연 하니님께서는 그 기도만을 응답해주실까?
하나님꼐서는 기술이 필요하지 않아도 진심어린 기도는 받아주심을 난 경험으로안다.
기도에도 여러가지 방법이 있다는 걱을 난 말하고싶다.
"예수꼐서 이르시되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꼐로 올자가 없느니라"[요14]
**************************************************************************************************
10년 후의 딸에게 쓰는 편지
박은덕
이제12살이 되는구나.
곧 사춘기 소녀가 될테지? 벌써 너희반친구들중에는 브래지어를 하는얘들이있다구?
참 놀랍구나 엄마는 지금 10년후의 너를 생각하며 편지를 쓴단다.
22살의 예쁜 여대생이 되어있을 숙녀에게 말이다.
너도 머지않아 어엿한 하나의숙녀가 될테니까말이야
예쁜딸아!
너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엄마가 살아온 옛날과는 많이 차이가 날줄로 믿는다.
모든것이 급속도로 변화되어가고있지...
사사람들이 사소한일로인해 얼마나 마음에 상처를 입고있는지를 알아갈 숙녀가된 네가 엄마의 딸이라는점에대해 감사하며 축복이라 생각한단다.
인생은 고통스러운 일도 많단다. 열심히 공부해서 취직도 해야하며 후배들이 자신을 추월하기 위해쫓아오고 윗사람은 자신이 추월당하지 않기위해 아랫사람을 뒷발로 차서 떨어뜨리기도하지...너도 곧 사회인이 될테니까말이야
엄마는 딸이 뚜렷한 주관을 가지고 자신의 기준에 맞추는 것이 다른 사람의 무책임한 이야기를 따르는것보다옳다고 생각한단다.
유명한 퀴리 부인은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받았고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주관을 굽히지 않았다가 결국 독약을 받았으 모딜리아니는는 엉터리환쟁 [화가] 이라는 말을 들었다는 사실을 기억허기 바란다.
기억나니?
네가 초등학교2학년�였지.
우리가 단둘이 처음으로 여행갔을때말이야...
우리 모녀는 4박5일간을 동해안으로 여행했고 마지막날에 돈을다써버려 엄마의 핸드폰줄에 메달려있는 금한돈의 십자기를 팔았잖니? 그때 엄마가쓴 시도 기억하겠지?
그때는 여름방학이엿고 여행 마지막 날이 네생일이였단다.
소설가 박경리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1년전이구나 토지 문학공원갔었지...
엄마에게는 일생에 잊을수 없는 여행이 될것같구나 우린감사할게 너무나 많구나
세상에는 물이 반절정도 채워진것을보고 '반절이나 채워저있다.'는 사람과 '반절밖에 채워지지않았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쯤은 너도 알고있겠지? 지금 네가 닥치는 현실에 감사하는 딸이길 바란다.
멋진 남자친구도생겼겠지? 아니면 학점 �문에 날밤새며 도서관 신세를 지고 있지않을까?...
여러가지 생각이 드는구나 기회는 자기자신이 만드는거란다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는것에대해 아무리 한탄한들 무슨소요이있을까?
자시의 행동에 자신을 갖기를 바란단다.
링컨은 촛불아래서 공부했고 에디슨은 만족스런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발명가가되었단다.
하루에 한번이라도 '난 행복해'라는 말을 되새기며 사는 너이길 바란단다.
아마 그 두사람도 자신의 불행을 핑계로삼아 노력하지 않았다면 성공하지는 않았을거라고본단다.
예쁜딸아!
친구와의 관계나 이성간의 관계에서 가끔은 말다툼을 할�가 있을거야 분명히 해두어야할것은 자신이 무슨일 때문에 이럴게화를내고 있는가를 먼져 알라야한단다.
만일 그것이 최근의 일로인해 발생한것이라면 그자리에서 솔직히 풀어버려야해 너의 뇌도 좀 쉬어야하지 않겠니?
자신의 분노를 시원하게 겉으로 발산하지 못하면 마음이 상쾌할수가없단다.
나의딸 민지야!
아주 오래전부터 여자라는 존재는 임신과 출산에결부되어왔고 임신중에 여자가 일하는것을 금해왔기때문에 우리 여성들은 사회의 업무로부터 제외받을슈밖에 없었단다.
내가 너희 나이또래였을때에는 여성이면 누구나가 아내가되어 어머니가 되는것으로생각하곤 했단다.
그래서 고등학교나 대학을 졸업하고 직업을갖더라도 아내나 어머니가 되기전에 잠시 거처가는 임시직업이라생각도 했었단다.
하지만 너희 세대에는 어머니가 되는것을 자기가 선택할수 있는 문제일거라 생각이 드는구나
어쩔수 없이가 아니라 진정으로 어머니의 희망에 따라 태어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는거야 굉장한 발견이지?
또 한가지 여성이 얼마나 강한지아니? 남성이 여성보다 달리기를 잘하고 힘이세지만 여성은 추위에 잘견디는 힘이 남성에비해 월등히 뛰어나가든 또한 평균수명도 훨씬높다는것 대단하지않니?
앞으로 너는 여러 부류의 남성들과 만나게 될거야 어떤유의 남성이 자기에게 어울리는지를 현명하게 판단할수있도록 부지런히 연습하도록하렴 진정으로 원하는 희망이 무었인가를 염려해 두고있으면네가 그릇된 선택을 하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거야
엄마는 비록 늦게결혼을했지만 너희 아빠를 만난건 내 인생의 최고의 선택이었단다.
엄마처럼만 했으면 좋겠구나.
내딸민지야!
아윈슈타인은 이런말을 한적이있지
'성공한 사람이 되려고 하기보다는 그 사람이 없으면 곤란하다는 귀중한 존재가되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성공을 목표로하라는 교육을 받으면서 자랐단다.
실패는 악마으ㅏ 그림자와 같은 존재라고 말이야 혹여 무슨일에 실패하드라도 남의 이목 따위에 신경써서는 안된단다.
실패란 주관적인 판단을 근거라하고있지 그래서 세상의 눈으로 보면 실패라고 할수있지만 자신의 게임운영면에서보면 성공이랄수도있어 예를들어 아브라함링컨은 대통령이 될때까지 번번히 실패만거듭해왔지만 그는 남다른 성공자로서 사람둘에대한 동정심과 높은 지성을 겸비한 인물이�단다.
자신의 척도와 가치관으로 인생의 성공여부를 판단하는것이 중요한것같구나 비록 세상사람들이 손가락질 한다고해도 자기의신념을 굽히지 않는 네가 되길 바란단다.
나의천사딸아!
누군가가 이런말을 한적이 있더구나.
'거짓말을 함으로써 입게되는 최대의 손해는 두번다시 사람들로부터 신용을 받지 못하게되는 것이다.'라고
네가 어릴�도 항상그랬지 하나님께 맹세코 거짓말이 아니라고...
다큰 너의 모습이 궁금하고나 어아도 키는 1m70cm가 넘을테고 도회지풍의 세련된 여대생이 되었겠지?
엄마는 그때에도 항상 글을 쓰며 책을 읽을테고 말이야...
너희 오빠는 군대가 있겠구나 지근처럼 추운 겨울이면 어쩌지?
지금 엄마가 이글을 쓰고있을때 너는 안네의일기를 읽고있고 오빠는 반 친구들하고 컴퓨터 야구게임을 하고있단다.
아빠는 할아버지댁에 가셨고...
10년후에도 할아버지 할머니가 살아계실까?
우리 기도하자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라고 우리딸이 시집갈때까지 말이야
엄마는 지금 참 행복하단다.숙녀가될 딸을 상상하니 저절로 웃음이 막 나오는구나
세상에 단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내딸아!
사랑한다 예쁘게 자라다오
지금처럼만...
**************************************************************************************************
나의 발명품
-최광윤-
내가 학창시절에 배운 바에 의하면 발명(發明)의 뜻은 새로운 것을 생각해 내거나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하고, 발견(發見)이란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을 먼저 찾아내는 것을 말한다. 한영사전에서는 ‘발명하다’는 ‘invent’, ‘발견하다’는 ‘discover’라고 구별하여 영어로 번역해 놓은 것을 본다. 그러나 좀더 따져보면 발명이나 발견은 구별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또한 그 원리를 찾아내는 일을 발명이라 하던 발견이라고 하던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그래서인지 실상은 영어에서도 ‘invent’와 ‘discover’가 두루뭉술하게 쓰이는 경우를 종종 본다.
에디슨이 전축을 발명했다고 하지만 그 원리는 세상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고, 다만 에디슨이 누구보다도 먼저 전축의 원리를 깨달은 것뿐이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원리란 있을 수 없지 않은가!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친구들 중에 상당히 부유한 가정의 아이가 있었다. 그 친구가 어느 날 건빵을 한 봉지 가져와서 먹고 있었다. 철없는 마음에 그 친구 턱밑에서 침을 꿀꺽꿀꺽 삼켜가며 좀 얻어먹을까 하고 바라다가, 용기를 내어 “한 개만 줄래?” 하고 발설했지만 친구는 건빵봉지를 움켜쥔 채 그 자리를 도망치듯 피했다. 그때 나는 그 친구 뒤통수에다 대고 나도 모르게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라고 소리쳤다. 당시에는 내 스스로 생각하여 한 말이지 누구한테 들었다거나 책속에서 그 말귀를 인용한 말이 아니었다.
후에 중학교에 입학해서야 그 말귀는 우리 격언들 중에 있는 말로 사람은 처지가 뒤바뀔 수 있다는 뜻으로 쓰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말귀는 물론 오랫동안 우리 조상님들이 삶을 사시면서 갈고 닦아 전하는 귀중한 교훈이지만 내게 있어서는 발명한 말이나 진배없었다. 여하튼 그 짧은 말귀 때문에 내가 명석한 두뇌를 가진 똑똑한 아이라는 생각을 학창시절 내내 갖게 되었고 그 점이 나로 하여금 공부를 열심히 하는 계기가 됐음을 고백한다. 구태여 교육용어를 빌려 표현하면 내가 남보다 낫다고 생각할 때에 긍정적으로 교육효과가 나타난다고 하는 “피그말리온 효과”를 단단히 본 셈이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는 말귀는 시체(時體)말로 “할 수 있다(I can)”는 슬로건을 생각나게 한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서양 격언과도 통하는 말인 것 같다. 처지를 바꾸어 생각해보자는 역지사지(易地思之)를 간접으로 암시할 수도 있다. 이 위대한 말귀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는 말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내 가슴에서 머물다가 언제 어느 때이고 내가 부르면 “네”하고 쇳소리를 내며 튀어 나왔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이 말귀는 내 머릿속에서부터 발끝까지 인동초 뿌리처럼 자존심의 발을 내리고 내 자아를 겹겹이 둘러싸서 보호해 주었다. 그 덕분에 나는 스스로 ‘발명을 한 사람’ ‘똑똑한 사람’ ‘무엇이든지 해 낼 수 있는 사람’ 임을 자위하며 아무리 힘들어도 ‘이것쯤이야’ 하면서 우리 가족의 가장으로서 한시도 한눈을 팔지 않았다.
시골 고등학교를 나와서 농업계 대학을 졸업하고 영어교사가 되었을 때도 영어 콤플렉스를 그렇게 이겨냈다. 나이가 들어 대학원에 입학하고서도 열심히 공부하여 좋은 성적을 갖게 되는 원동력이 또한 그 말귀였다. 특히 오랫동안 지루하고 힘든 평교사의 길을 어느 때는 묵묵히, 또 어느 때는 지혜롭게, 또 다른 때는 이를 악물고 인내하며 성공적으로 사도를 마감했다고 자평할 수 있었던 것도 전적으로 그 발명이 만들어낸 자존심 때문이었다.
어느 스님이 “사람의 한 평생은 꿈길을 가는 것과 같다”고 하셨다. 정말 지나온 세월을 뒤돌아보면 인생은 하룻밤 동안에 걸어보는 꿈길처럼 짧고 허망한 것이라고 생각될 때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렇듯 짧은 인생에서 발명품 하나 ―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 ― 를 가슴속에 품고 살아가니 허망한 삶은 아니라고 자위(自慰)한다. 왜냐하면 이 발명품은 내 원초적 마음에 자존심을 깊이 심어서 생존의미를 부여하는 위대한 길잡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이 발명품을 생각하면서 당당하게 살아갈 것이다.
********************************************************************************************************
사 각 형
-최광윤-
누가 집을 어떤 모양으로 지으면 좋겠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나는 직사각형으로 지으면 좋겠다고 대답했다. 이유를 묻기에 만약에 직사각형으로 집을 지으면 우선 집을 짓는 일이 비교적 쉬워서 단가(單價)가 적게 들고 완공된 후에는 안정감을 느끼며 또한 후에 집을 고쳐야 할 필요가 있다면 직선과 “90도” 각도의 단순성으로 인하여 수리하기가 쉽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사각형은 그리기가 쉽다. 마주보는 두 변(邊)의 길이가 같고 “90도” 각도로 변과 변이 만나도록 그리면 되는 것이다. 반면에 도구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정삼각형은 “60도”의 각을 정하기가 쉽지 않으며 원은 더구나 곡선의 일관된 흐름이 원주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그리기가 아주 어렵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사각형을 많이 본다. 책상, 냉장고, 휴대폰. 자동차 등 무수하게 많다. 사각형의 구조물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많이 보이는 것은 안정감이 있고 제작이 용이하기 때문일 것이다.
요즈음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가장 선호하는 얼굴이 타원형인 듯싶다. 타원형이다 못해 브이(V)라인을 선호하는 노래마저 유행하고 있는 걸 보면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유행가의 영향을 받았는지는 몰라도 사각형의 얼굴을 타원형으로 만들기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턱을 깎는 사람들이 있는가 보다. 옛날에는 타원형의 얼굴이 흔하지 않았으나 요즈음에는 텔레비전을 켜도 서울 명동을 가도 거의 모두가 타원형의 얼굴들이다. 내 사견으로는 희소가치가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다.
타원형은 약간 신비하게 보일 수는 있으나 좀 불안해 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한 가지 예로 타원형인 계란은 혼자의 힘으로 설 수 없다. 그래서 미 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라는 사람이 계란세우기 내기를 제안하고 오만을 부리며 계란 끝을 깨서 세워 보인 웃지 못 할 실화도 있지 않은가! 이렇듯 타원형은 스스로 설 수 없으니 어디로 굴러갈지 불안하다. 불안 속에서는 의지를 찾아보기 어렵다. 확고한 뜻은 안정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법이니.
실은 타원형의 얼굴보다는 사각형의 얼굴에 더 품위가 서려있다. 사각형 얼굴은 친근감이 있으며 편안해 보이고 때로는 의지와 정직이 배어 나온다. 위인들의 영정(影幀)에서 얼굴이 사각형인 분들이 많은 이유가 여기 있지 않을까?
옛날 사람들은 한 때 지구가 네모형이라고 믿은 적이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대지(大地)는 몇 억만년이 흘러도 변함이 없다고 생각하여 사각형이라고 상상하지는 않았을까?
대학이나 대학원을 졸업할 때에 사각모자를 쓴다. 초지일관(初志一貫)으로 고난을 극복하고 목표한 학문을 이루었다는 명예의 표시로 씌워 주는 모자이다. 하지만 사각모 속의 숨은 뜻은 이제 사각형처럼 인생을 안정된 속에서 “90도”의 각도로 반듯하게 살아가라는 심오한 전언(傳言)이 숨어 있는 건 아닐까?
빛은 방해물만 없으면 직선으로 나가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자동차를 운전할 적에도 운전대를 건드리지 않으면 차는 직선으로 나간다. 물도 직선으로 흐르려는 경향이 있다. 속도를 가진 모든 것들은 직선으로 나가려는 특성이 있다. 직선은 한도 끝도 없이 뻗어 나간다. 어딘지 피곤을 연상하게 된다. 쉬질 못하고 달려만 가니 말이다. 직선이 면적과 부피를 이루며 안거(安居)하게 하려면 서로 “90도” 각도로 만나야 한다. 서로 다른 직선이 상호 의지하고 절묘하게 견제(牽制)하며 사각형을 이루어야 한다.
양심, 용기, 정의, 결단 등의 단어는 사람의 곧은 성품을 표현하는 말들이다. 허나 이런 성품들을 분리하여 놓고 보면 어딘지 미완성된 감이 엿보이고 때론 썰렁해 보일 때도 있다. 이런 각각의 품성들이 서로 간에 조화를 이루어야 비로소 완성된 인격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 본다. 마치 직선들이 “90도”로 만나서 반듯한 사각형을 이루듯 말이다. 직선만 가지고는 영적인 표시물은 되겠지만 면적과 부피를 가질 수 없고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보아도 볼 수 없지 않은가?
사각형은 선(線)의 영원한 안정된 모습인 것이다. 직사각형의 중요성을 우리는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장구(長久)한 역사는 이런 점을 여기저기에서 잘 말해주고 있다.
********************************************************************************************************
소매끝동 단추
-최광윤-
남자라면 신사로 대접받기를 원한다. 허나 신사가 되는 일은 만만치 않다. 우선 신사는 말과 행동이 같아서 상대방에게 믿음을 주어야 한다. 다음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예절을 간직해야 한다. 이렇게 ‘신사’라는 낱말은 신뢰감이 있고 예절이 반듯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외향보다는 마음이 고와야 한다.”고 가르쳤으나 실제는 여러 경우에 그렇지 못하였다. 상대방의 마음을 푸근하게 해주기는커녕 불안을 느끼게 만든 때가 허다했다. 그런 일들 중에서도 지금 이순을 훨씬 넘긴 내 마음 한 구석에 요지부동으로 남아 시시 때때로 부끄러움으로 볼을 물들이는 사건을 여기 적어본다. 글로라도 표현하면 마음이 한결 가볍고 덜 미안할 것 같아서다.
“가” 고등학교에서 근무한지가 일년도 안 되는 햇병아리 교사 시절이었다. 당시에는 전화가 수동식이어서 경운기 시동 걸 듯 손잡이를 돌리고 교환수에게 어디어디 대달라고 하면 상대방 전화기에 연결시켜주었다.
숙직을 하던 초여름 밤이었다. 갑자기 친구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전화기 손잡이를 돌렸다.
“어디를 연결해 드릴 까요?”
지금 까지는 듣지 못했던 여인의 매혹적인 음성이 튀어나왔다. 꿈속에서 천사의 목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그 목소리에 취해 멍하니 있으니 목소리가 재차 들려왔다.
“어디를 대드릴까요?”
그제야 정신을 불러들여 간신히 말하였다.
“예, ☓☓리, 2☓☓번 대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바로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예쁜 목소리가 응답했다.
나는 이튿날에도 그 목소리에 취하여 안 해도 되는 곳에 전화를 해야만 했다. 들으면 들을수록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며칠을 대리숙직을 자청해가며 전화를 해댔다. 그 여인의 목소리를 들어야만 잠이 올 지경이었다.
‘목소리가 이리 아름다운데 얼굴은 어떨까? 얼굴도 보나마나 천사처럼 순진하고 곱겠지. 몸매도 아담하고 치마저고리가 잘 어울리는 허리가 가늘고 엉덩이가 항아리형인 여인일 것이다. 마음씨도 비단결 같을 것이다. 그렇고 말고’
내 마음은 상상의 날개를 한껏 펴서 무제한의 고도로 창공을 날고 있었다. 심지어는 여인의 걸음걸이도 아장대는 비둘기 걸음을 닮았을 것이라고 상상했다.
며칠 후에 나는 그 목소리에 대고 제안을 했다.
“실례합니다만 좀 만나봅시다. 제가 어디에 근무하는지는 아실 거구요.”
그 시절에는 교환은 마음만 먹으면 교환실에 가만히 앉아서도 누가 어디로 무슨 내용의 통화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난 후에 여인은 답을 하였다.
“요즈음은 너무 바빠서 안 됩니다.”
나는 이 말속에 숨은 뜻을 캘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 말속에 답이 있어 보였다. 당장은 바쁘지만 좀 시간이 흐르면 만날 수 있다는 말로 해석한 것이다. 다시 한 번 제안을 했다.
“그럼, 다음주 토요일은 어떻습니까?”
집요한 공세에 할 수 없이 굴복하는 듯한 어투로 여인이 말했다.
“정 그러시면 그때 가봐서 시간을 내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나는 일방적으로 네거리에 있는 “나”다방에서 토요일 오후 5시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 여인은 침묵했으나 거듭 다그쳤다.
“기다리겠습니다. 꼭 나오세요.”
그리고 잠시 후에 전화에서 아련하게 “네”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어떻게 일주일이 갔는지 몰랐다. 토요일 아침부터 이발소를 드나들며 머리 모양을 다듬었다. 유별나게 옷에 신경을 썼다. 때가 여름이니 몸매가 잘 드러날 수 있다는 생각에 이 옷 저 옷 입어가며 거울을 보고 또 봤다.
토요일은 다방이 붐비는 날이다. 나는 약속한 자리를 선점하기 위하여 약속 시간보다 훨씬 전에 다방으로 나가서 자리를 잡았다. 쓸데없이 엽차를 몇 잔씩이나 시켜 마셨다. 오늘에서야 천생연분을 만날 수 있다는 부푼 꿈은 자꾸만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보게 만들었다.
약속시간 5시가 가까워졌을 때 흰색 반소매 블라우스에 회색 스커트를 차려입은 키가 아주 작은 여인이 출입문을 넘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설마 저 여인이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아니겠지.’
한편으로 그 여인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한 채 가벼운 도리질을 해가며 정말 내가 만나야할 여인을 위해 표정을 가다듬고 있었다. 눈의 초점이 그 작은 여인을 벗어나서 다시 출입구에 두고 있는데 전화에서 듣던 고운 목소리가 바로 코앞에서 들렸다.
“ ‘가’ 고등학교 선생님이십니까?”
정신이 퍼뜩 들어 목소리의 주인공을 쳐다보았다. 바로 그 키 작은 여인, 그 여인이 단정하게 테이블 앞에 서 있었다. 그 목소리에 이 여인의 체격은 상상이 되지 않아서 여인의 얼굴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얼굴이 아주 작고, 눈 코 입도 오목조목하였다. 침묵이 흐른다는 것을 감지하고서야 코맹맹이 소리를 냈다.
“네, 그렇습니다만. 아, 그럼 우체국에서 오신.... .”
서있는 여인에게 앉기를 권하였다. 작은 몸매에 작은 얼굴, 정말로 내 이상형과는 너무 거리가 먼 여인이었다. 이런 얘기 저런 얘기가 오갔지만 줄곧 내 입에서는 초점을 잃은 언어가 이어졌다. 날씨, 직장, 친구 등등을 주제로 수박 겉핥기식의 형식적인 대화가 흐르고 있었다.
얘깃거리가 거의 바닥이 나고 어색한 공기가 탁자를 누르기 시작할 때, 난데없이 여인은 핸드백에서 성냥갑만한 포장된 물건을 꺼내서 내 앞으로 밀어 넘기며 정중하게 말하였다.
“와이셔츠 커프버튼(cuff's button)입니다.... .”
여인의 외향과는 어울리지 않는 통 큰 맘씨의 선물을 받곤 어리둥절하다가 이내 선물을 준비하지 못한 부끄러움으로 내 볼은 빨갛게 물들었다.
“저는 준비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커피 값이나 내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을 얼버무렸고 상대방은 그냥 미소만 머금고 있었다.
커피 값을 부랴부랴 내고는 다녀가라는 한마디 말을 던지곤 헤어졌다. 물고기를 먹다가 실 가시가 목에 걸린 것처럼 무언가 개운치 않은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내 방에서 화끈거리는 볼을 감싸 안고 생각해 보아도 오늘의 행실은 정말 ‘이게 아니다’ 싶었다. 혼기 찬 남녀의 만남에서 상대방이 이상형이 아니더라도 귀한 선물을 받았으면 저녁식사는 제안해야 신사답다는 생각이 압박해 왔다. 만약에 그 여인이 요즈음 말로 ‘쭉쭉 빵빵’ 미인이었다면 내 태도는 달라졌을 것이다. 칼국수는 이 집이 일품이고 갈비탕은 저 집이 잘하니 어디에서 저녁을 먹겠느냐고 얼굴 가득 웃음을 얹고 저녁식사 선택권을 주었을 것이다.
나는 이 일이 있은 후로 전화걸기를 의식적으로 자제해 왔고 피치 못해 전화를 걸더라도 시간에 쫓기는 사람처럼 이쪽의 직장이름 마저 생략하고 최단시간에 통화가 연결되기만을 숨을 죽이며 기다렸다. 얼마쯤 세월이 흐른 후에 이 여인의 목소리는 전화에서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다른 우체국으로 전출이 되었는지, 그만두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매년 스승의 날에는 양손에 꽃을 받아 쥐고는 어설픈 내 양심에 채찍을 가한다. 양심에 눈을 흘긴다.
‘정말 그 여인의 마음씨는 참으로 아름답지 아니했던가!’
*******************************************************************************************************
달무리 별 셋, 별 하나
한용운
어두 컴컴한 인적도 뜸한 밤길에 열한시는 넘었을까?
보름을 갓 지났는지 약간 이지러진 달이 제법 높이 떠 있다. 멀리서 바라다 볼 수록 부드러운 빛을 흐믓한 웃음같이 흘리고 있는듯하다.
초 저녁에는 매우 밝은 달이었으나 어디에서 몰려 왔는지 엷은 구름떼가 빙 둘러저 있어서 마치 고운 은빛 가루를 한껏 뿌려놓은 것처럼 자욱한 달빛이 아닌가?
달무리가 그 선명한 테를 아주 넓게 두루고 둥그렇게 자리를 잡고 있다. 그 많고 많았던 별들은 모두 어디로 숨었는지 보이지를 않는다. 길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달 무리를 자세히 바라보니 그 달무리 가운제에 별빛 하나가 희미한 빛을 흘리고 있다.
우리 부모님 그 마음 그 달무리 속에 먼 별빛 하나.....
왠지 자꾸 서글픈 생각이 든다.
예전에 필자가 매우 어렸을적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따라서 먼 시골의 외갓집을 갔었다. 외할아버지의 초라루 삭망전(朔望奠)을 지내기 위해서였다. 그때 필자의 나이는 아홉살이었다. 그리고 어머니 등에 이제 갓 세돍이 지난 여동생 순이가 업혀 있었다.
요즈음 같으면 자가용 승용차로 아침에 갔다가 전ㄱ에 돌아오며는 되는 그런 거리였지만 그 예전에는 그 멀고 먼 시골길을 순전히 걸어서만 가고 돌아와야 했었다.
몇일 전에는 옥수수 엿을 고았다. 그리고 엇그저깨는 절편 떡을 빚고하여 외할아버지 삭망전에 쓸 제물을 준비해 가지고 가는 길이었다. 그것도 신새벽에 집을 떠나서 샛 고개를 넘었고 슬그너미 재를 넘어서, 또 큰 내를 나룻배로 건넜다. 그리고 작은 내의 섶다리 건너서 그날의 저녁 나절이 훨씬 지나서야 겨우 외가댁에 도착 했었다.
그날 저녁에는 얼마나 고단 했었던지, 필자는 초저녁에 곤한 잠에 깊이 떨어졌다가 오줌이 마려워서 잠 깨어 밖에 있는 측간(화장실)을 가려고 문지방 아래로 낼 섰었다. 그때에 마당에는 아버지와 고모님과 외삼촌이 모여 앉아서 외 할아버지 삭망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계신것 같았다.
졸리운 눈을 비비며 그 마당의 가장자리 한 옆에 앉았다. 아마 밤 11시 정도는 됨직했었다. 밤 하늘 동녘은 새털 구름이 얇게 흩어져 있고 또 서쪽으로는 밝은 달이 떠 있었다. 그런데 그 달 주위에 둥그런 테를 두른 달 무리가 커다란 원을 그리고 있는 그 좌측 한 켠에 별 세이 약간 흐릿한 빛을 내고 있었다.
그 별들을 바라 보시던 고모님께서 저처럼 달무리가 지며는 비가 올 징조라고 하셨다. 아버지께서는 그 달무리 안에 별이 하나가 있으면 하루가 지나 비가 오고, 별 셋이면 삼일이 지나 그 날에 비가 꼭 온다고 그렇게 말씀을 하셨다.
그 예전에는 농업을 주업으로 하였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래서인지 음력의 24절기를 기초로 해서 그 절기를 따라 농사 일정을 잡고는 농사를 지으며 살았었다. 그리고 늘 하늘의 별 자리를 보며 천기를 아는듯이 그달 그날의 일기를 가늠 예상하며 살았던 그러한 시기였다.
우리 조상님들과 그리고 부모님을 비롯한 그 시대의 어르신들은 그 오랜 생활의 관습을 따라서 천기를 구별 가늠하며 살아왔었던 것이었는데 그러한 생활 철학이 실제 생활에 아주 잘 맞았던것 같았다.
요즘에는 과학적인 시스템과 국제기상 정보에 의하여 일기예보를 발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자연환경 오염등으로 인한 오존층 파괴가 원인이 되어 그 일기예보가 잘 맞지를 않아서 우리들 실 생활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는 경우가 가끔 있는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까 요즘도 기상청 관계자가 밤 하늘의 별 자리를 보는 경우가 많가고 하지 아니한가?
그날 밤에 먼 하늘의 달무리를 바라보며, 그 달무리 속에 별빛 셋이 있었던 그런 기억들 까맣게 잊은채 외할아버지의 삭망전을 지내고 하루를 묵은후에 외가집을 떠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길 떠난다고 했던것이 병약하신 외하머니께서 늘 앓으시던 제기(滯氣)가 도져서 또 하루를 더 묵은 후에야 귀가길에 나설 수 있었다.
내를 건너고 높은 재를 넘고 또 작은 고개를 넘었다. 그리고 좀 큰 내를 건너기 위해 거룻배를 타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 거룻배가 지금 강 건너에가 있어서 그 누구가 타고 이쪽으로 오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좀처럼 외딴 산골의 그 내를 건너오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렇게 냇가에서 서너시간을 지체하며 기다린 후에야 어느 노인 두 분이 거룻배를 타고 건너 오므로서 늦은 시간에 그 내를 무사히 건널수 있었다.
어느덧 해는 서산을 넘어가고 있었다. 이미 땅 거미가 지고 있었다.
아직도 집으로 돌아가기에는 먼 길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가는 길이 아쁜 우리 일행은 인적도 없는 초저녁의 어둔 밤길을 부지런히 걸었다. 하늘은 희미한 달빛이 있기는 했었지만 어느새 검은 구름속에 가리워져있었다.
집까지 한마장 정도 남겨 놓았을 즈음에 밤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졌다. 집까지 바람이 한 차례 매몰차게 불며 지나갔다. 그 빗방울이 차츰 굵은비로 변하고 그리고 억수로 퍼부었다.
외가를 떠나올 때 비 올것에 아무런 준비가 없었던 부모님과 갓난애기 그리고 필자는 고스란히 그 많은 비를 맞으며 늦은 시간 삼경이 거의 다 되어 갈 무렵녘에야 겨우 집에 도착했었다. 그때 갓난애기 순희는 감기로 인해 어머니께 많은 고생을 하시었다.
그 후로 필자가 성장하면서 밤하늘의 달무리를 볼 때마다 꼭 별이 그 달무리 테두리 안에 있는가 없는가를 살폈다. 또 비가 오는것이 맞는가 안 맞는가 하는 것을 지켜 보면서 살았다. 그런데 일기 예보와는 상관관계가 없이 달무리 지는 것과 상관해서 실제로 비 오는것이 확률적으로 더 많았던 것이 사실이었다.
필자가 일선 행정기관의 공무원으로 군청에서 경리계 차석으로 봉직 할 때의 일이었다. 그때가 1980년 그해 여름 8월 어느날이었다. 당시에 이곳 군으로 전입되는 군수님의 이삿집을 실어오게 되었다. 아침일찍 춘천까지 갔다오기 위해서 아버님께 인사를 드렸었다.
'아버님, 오늘 춘천을 다녀 오겠습니다'
'그래, 길조심, 차 조심해서 잘 다녀오너라'
'네, 아버님,
그리고 문 밖을 막 나서려는데 아버님께서 다시 불러 세우셨다.
'애, 아범아 오늘 비가 올탠데 비 단속을 잘해야 하느니라, 알겠느냐?'
'네, 아버님 그런데 오늘 아침 하늘도 맑고, 또 일기예보도 날씨가 좋다고 했습니다.'
'아니다, 꼭 비가 온다. 엇그저께 밤하늘의 무리를 보니 그 달무리 안에 별이 하나가 분명히 있었느니라, 어서 여러말 말고 그렇게 준비를 해야 한다. 알았느냐?'
'네, 아버님, 꼭 그렇게 비 단속을 할 수 있는 비닐을 끊어 가지고 갔다오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준비하고 잘 다녀 오너라.'
'네.....'
그러나 막상 아버님께는 그렇게 준비하겠노라고 하고 그 알을 물러 나왔지만 헛 수고를 하는 것만 같았다. 운전 기사도 이처럼 맑은 하늘에 무슨 비가 오겠냐고 한사코 반대를 했었다. 그렇지만 단 한번도 아버님의 말씀을 거역한적이 없었던 필자가 어거지로 차 2대 분량의 비닐을 사 가지고 춘천으로 향했었다.
춘천에서 미리 준비해 갔었던 비닐로 이삿짐을 싸고 잘 실었다. 그 자리에 전송하기 위해 나와 있었던 많은 분들이 비닐 치는것을 보고는 모두가 의아심으로 못마땅해 했었다.
다만 군수님과 그의 사모님은 필자의 고집을 그냥 바라보고 계시다가 먼지도 많이 나는데 비닐을 싸고 덮는것이 얼마나 현명한 일이냐고하면서 되려 칭찬을 하셨다.
아니나 다를까? 춘천을 출발해서 홍천의 북방면을 지날 무렵부터 그처럼 청명하던 하늘은 검은 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홍천읍내 와동 지역을 지나고 있을때에는 굵은 빗 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것이 어느새 억수로 쏟아지는 비가되어 그 날은 궂은비가 많이 내렸었다.
요즈음도 가끔 밤 하늘을 바라 볼 때마다 달무리가 있는가 없는가를 찾아보게 된다. 그리고 혹시 그 달무리 테두리 안에 ㅂㄹ이 몇 개가 있는 것인지....
둥그런 달무리는 이 세상을 떠나가신 울 부모님 얼굴 같은 그리움이 아닌지, 하는 생각이면 나도 몰래 어느개 눈물이 지는 것 같다.
********************************************************************************************************
自 有 之 精
한용운
사람의 어진 본성(本性)에서 우러나는 네 가지의 마음씨를 자유지정(自有之精)이라 하고 다른 말로는 사단(四端)이라고도 한다.
이는 곧 인(仁)에서 우러나는 측은지심(惻隱知心), 의(義)에서 우러나는 수오지심(羞惡知心), 예(禮)에서 우러나는 사양지심(辭讓知心), 지(知)에서 우러나는 시비지심(是非知心)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측은지심이란 뜻은 남의 어려운 사정 형편을 불쌍히 여겨서 어짢아 하는 마음인 것이요, 수오지심은 불의(不義)를 부끄러워 하고 불선(不善)을 미워하는 마음이며, 사양지심은 사양할 줄 아는 마음, 그리고 시비지슴은 시비를 가릴줄 아는 마음을 일컫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
과연 나(我)라고 하는 인생의 존재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그의 쓰심에 합당한 그런 그릇이 될 수 있는가? 창조주의 마음에 꼭 함한자인가? 정말로 다른 사람들이 나를 하나님의 몸된 교회에 세우신 신실한 직분자라고 그러한 평가를 하고 있는가? 내가 하나님과 교회 앞에서 아주 귀하게 쓰이고 있는 금 그릇인가? 은 그릇인가? 그도 아니라면 깨어진 질 그릇인가?
모든 사람들은 자비로우신 하나님 앞과 교회앞에 그리고 이웃들로부터 선한 청지기의 직분자로 그런 평가를 받아야 한다. 우선은 자기의 같은 가족 형제 자매들이 주안에서 서로 좋은 평가를 하고 도 그러한 평가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얼굴을 이미로 선택할 수 있는 그런 자유가 없다. 다만 하나님의 형상대로 그리고 허락하시는대로 부모님으로부터 귀한 선물처럼 받은 것이 곧 얼굴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한 본성(本性)과는 달리 사람의 얼굴같이 요물스럽고 흉물수러운 면면도 없는것 같다.
죄가 편만한 이 땅위에 많은 죄과를 지고사는 인과때문인지(?) 아주 요물스럽게 보이는 마치 고양이 같은 얼굴, 원숭이 같은 얼굴, 독사같은 얼굴, 시어미 같은 표정의 얼굴등이 있는가 하면 선한 양 같은 얼굴, 친정어머니 같은 표정의 얼굴등 그 안에 담겨져 있는 마음의 거울인 얼굴들이 각양 각색인 것이다.
잠연 15:13에 이르기를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리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현인들이 일찍부터 '얼굴은 마음의 거울'이라고 했었다.
그러므로 인해서 사람은 신(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 보은하는 마음, 남을 이롭게 하는 마음, 남의 처지를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으러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가야 옳은 것이다.
다라서 좋은 마음은 저금통이요, 아주 좋은 호감을 얻는 표정은 성공의 계약이며, 또 아름다운 얼굴은 추천장인 동시에 좋은 평가를 얻을 수 있는 신용장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일본의 유명한 의학서적에 이른 논문이 실려있는 것이다. 그 내용인 즐 인간의 얼굴을 이루는 근육이 모두 80개라고 한다. 그 중에 좋은 마음의 표정은 17개, 나쁜 마음의 표정은 43개, 그리고 나머지 20개의 근육은 보조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같은 마음 표정의 얼굴근육 분석은 사람이 그 스스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기의 마음 관리, 표정관리를 잘 할 수 가 없다는 뜻이다. 인산 그 자체가 태생부터의 죄의 문제와 또 선한 쪽으로 보다는 악한 면면이 너무 많아서 자기 책임적인 표정관리를 잘 할수가 없는 것이다.
오직 오랫동안 지기 인격 수양과 그리고 날마다 쉬임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를 힘 입는 역사속에서 극복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의 얼굴 표정을 보면서 부족하고 모자라는 점이 어떤것이고 무엇인지 깨달으며, 그것을 인격적인 수양을 쌓으면서 날마다 새롭게 마음의 거울에 비춰 보정해야만 하는 것디ㅏ.
지금 이 순간 내가 있다는 존재 의식이 중요하다, 이 세상의 그 모든것들이 나의 존재로 인해서 새로운 출발점이 될 수 있는 것이됴, 또한 끝도 욀 수 있는 것이다. 이로부터 나와 우주세계, 나와 하나님의 세계는 그 존재화 가치, 그리고 진정한 삶의 그 의미가 매우 크다고 할 것이다.
사람은 항상 주변을 잘 돌아보며, 그 많은 이웃들이 나를 도와주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깊이 인식을 하고 깨달아야 한다. 보통 사람들은 남이 나를 도와준다고 그런 생각보다는 내가 남을 도와주는 사람이요, 남을 위해 희생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고 여긴다. 가족들을 위해 크고 작은 일들을 하며, 국가와 사회를 위해 세금을 내고, 또 귀찮은 반상회 같은데도 나간다고 생각을 한다.
만약에 내게 가정이 없었다면 사랑하는 남편 아내가 없었다면, 그리고 부모 형제, 자녀들깢도 없었다면 그 자신의 삶이 얼마나 허망 스럽고 비극적이었을까?
세상을 살다보면 크고 작은 일 , 궂은 일, 슬픈일들을 많이 겪을때가 있다. 그럴때마다 새삼스럽게도 도움을 청할 손이 극히 적다는데 놀랄때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가족, 진.인척이 그렇게 소중하고 진구가, 동료가, 교우가, 그리고 웃들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한 그루의 작은 과일나무를 정성껏 가꾸득이 물을 주고 거름을 주며 가지치기등을 꾸준히 잘 해야 한다. 하나의 소중한 작품처럼 소품을 만들기 위해서 사람은 지극 정성으로 삶을 구려 나야야 한다.
작은 마음 씀씀이로 하는 전화 한 통화의 위로의 인사, 양말 한컬레, 넥타이 한개의 산물 등등, 그리 대수롭지 않은것 같지만 받는 사람은 오래도록 기억하며 감사한 마음을 결코 잊지 않는다.
이 세상에는 완벽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 모두는 하나님의 예지의 정해진 시간속에서 무엇인가를 꼭 해야 하는 그 어떤 깨임을 하고 있지 아니한가? 남의 단점 보다는 장점에 칭친의 촛점을 맞추다 보면 그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고, 인간 관계를 성숙 시키게 한다. 상대에게 심리적인 힘과 용기를 주게 되므로 실제의 자기 능력을 크게 향상 시킬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의 마음속에는 언제 어디서나 '당신이 좋아야 내가 좋고, 당신이 좋으면 내가 좋은 것이다.'라는 칭찬의 바른 개념을 담아두고 살아야만 행복의 근원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마음의 넓은 여유로움, 넉넉한 마음의 포용력, 한없는 관용과 아량으로 남을 대하는것, 이런것은 오랜 세월동안 마음의 수양을 쌓는데서만 얻어지는 덕성(德性)인 것이다.
마음에서 마음의 평화를, 헌신과 봉사속에서 일의 만족도를 자족하는 생활에서 가정의 평화를, 나 자신의 마음 씀씀에서 남의 유익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외부에서 얻어지는 행복은 행운이요, 헌신과 봉사속에서 일으 만족도를 자족하는 생활에서 가정의 평화를 나 자신의 마음 씀씀에서 남의 유익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외부에서 얻어지는 행복은 행운이요, 자기의 내부로 부터 만들어지는 행복은 축복인 것이다. 행복은 항상 지배해야하고 불행은 얹나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행복이란 것은 얻는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해야 옳은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조에 잇어서 너무나도 우월하고 경이로운 존재인 것이다. 예를 들자면 한사람의 몸속 혈액은 하루에 1억 6천 8백 마일을 달린다. 이를 Km로 환산하면 2억 7천만 km인 것이다. 또한 하루동안 2만 3천 4백번 정도의 숨을 쉰다.
그러나 인간의 참된 가치와 존재는 오직 하나님과 동행하는데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만약 하나님 뜻대로 합한 자라면 넘치는 사랑과 은혜, 그리고 언약의 하나님 나라의 상속이 예비된 것이 아닌가?
소위, 사람의 관상이라고 하는 것은 골상에서 나오고, 그 골상은 그 사람의 심상(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시림은 모름지기 늘 고상하고 우아스러워야 한다. 이 모든것은 궁극적으로 주는 마음, 베플고 나누는 마음에서 출발이 되어야 한다. 오직 사람다운 사람은 순리에 잘 따르는 사람이요, 가장 작은 일도 성실하게 구체적으로 잘 성사시키는 사람인 것이다.
오늘 내가 존재 하므로 내가 건강 하므로 이같은 자리에 나올 수 있지 아니한가? 내가 남에게 값없이 줄 수 있는 마음의 친찬을 최소의 비용으로 그리고 최선의 선물로 한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이 세상 그 모든 사람들이 다 나를 도와주는 사람들인데 그들에게서 나의 존재 이유와 값어치, 그리고 평가를 받으며 살아 간다는 사실 그 앞에서 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의 인격체는 인, 의, 예, 지(仁, 義, 禮, 知)를 두루 갖춘 사람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