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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여세주의 수필 포럼 원문보기 글쓴이: 지헌
장석규론
삶의 길, 회복의 시간과 도전의 공간
-장석규, 《소나무의 미소》(sun, 2017)
여세주
1.치밀한 관찰과 표현
장석규의 수필집 《소나무의 미소》는 쉽게 읽힌다. 문장의 의미를 파악하려고 애쓸 필요 없이 편안한 독서가 가능하다. 작가는 일상어로서의 생명을 상실해버린 낯선 고유어나 현학적인 한자어를 끌어들이지 않았다. 어쭙잖은 수사적 만용을 부린답시고 괜스레 언어를 혹사시키지도 않았다. 평범한 일상어를 활용하면서 문법적 정석에 충실한 문장을 구사했다. 독자는 언어의 의미를 추리할 필요도 없고 비유에 의한 의미론적 변용을 파악하는 데에 피곤하지 않아도 된다. 문장의 문법성이나 의미 표현의 직접성은 장석규의 수필작품들이 보여주는 특성이다. 이는 정확한 전달력과 직접적인 메시지 전달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작가의 수필 창작 관점을 반영한다. 그는 수필의 교술 장르적 성격을 분명히 이해하고 창작에 실현시키고 있는 것이다.
수필 쓰기에서 언어 운용 방식으로는 두 가지 주장이 팽팽히 맞서 있다. 한쪽에서는 경험을 객관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정확한 진술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문학적이기 위해서 비유적 표현을 최대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장석규는 전자의 입장에 가깝다. ‘설명하기’를 수필 쓰기의 기본적 진술 방식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수필은 본래 설명적 진술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상기해 볼 때, 장석규의 작품이 보여주는 문장 특성은 수필의 언어로서 매우 타당하다.
어느새 정상에 섰다. 서쪽으로는 쾌청한데 강릉 바다 쪽은 운무가 쳐 놓은 두꺼운 벽에 가로막혔다. 운무는 동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오르락내리락할 뿐 사라지지 않는다. 아무리 기다려도 여간해서 물러날 태세가 아니다. 운무의 심술을 어찌 말릴까.
나는 어려서부터 안개 낀 길을 걷는 걸 좋아했다. 이른 새벽, 바람도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을 때 강가에서 만나는 물안개, 아름아름 피어오르는 안개는 나를 하늘로 데려다 줄 우주열차처럼 보이곤 했다. 어쩌다 강가로 나가는 오솔길을 걷다보면 미지의 세계로 이어지고, 그 길을 쭉 따라가다 보면 신비의 세계로 들어갈 것 같았다.
-<안개 속에서>에서
장석규는 경험을 매우 세밀하게 서술하면서 대상에 대한 주관적 감정도 강하게 표현해 내고 있다. 그럼에도 어떤 사실이나 지식을 실증적으로 전달하려는 것도 아니고, 대상에 대한 서정 표현을 목적으로 삼은 것도 아니다. 작가의 이와 같은 언술 특징은 세계와 자아의 동일성을 추구하고 그러한 상황과 감정을 독자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해 준다. 치밀한 관찰력과 예민한 감수성을 바탕으로 경험 세계를 생생하게 표현함으로써, 독자와 미적 감동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2. 자연과 사물에서 읽어내는 삶의 길
글쓰기란 문장을 묶어 하나의 단락을 만들고 단락을 여러 개 이어가는 단순 행위가 아니다. 체험이나 지식을 통해 새롭게 생각한 바를 표현하는 행위가 글쓰기다. 언어 구사력이나 문장 표현력은 글쓰기 이전의 기초 능력이다. 참신한 생각을 끄집어내는 일이 글쓰기의 시작이고 핵심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뻔한 생각으로 글을 써 봐야 독자들을 감동시키거나 설득시킬 수 없다. 참신한 생각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말이다.
수필 쓰기에서도 그러하다. 풍부한 어휘 구사나 아름답고 정확한 문장 표현만으로는 충격적인 감동을 주지 못한다. 감동은 감정 표현의 독특함 또는 의미 발견의 기발함에서 비롯된다. 경험에서 얻어낸 정서나 의미의 독창성, 주제의 신선도가 감동을 주는 핵심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장석규는 대상에서 느낀 정서보다는 직관적 해석에서 얻은 의미를 펼쳐내는 데에 힘을 싣는다. 그가 대상에서 통찰해 내는 의미들이란 주로 삶에 대한 깨달음이다. 그의 수필집 《소나무의 미소》에는 자연에서 삶의 이치나 본질을 깨닫고 자기성찰에 이르는 작품들이 많다. <눈잣나무>, <소나무의 미소>, <안개 속에서>, <엘레지꽃, 그 발칙한 도발>, <팔봉산 그 소나무>, <나의 경계목, 음나무>, <갈대가 부르는 노래> 등이 자연물에서 삶을 통찰하고자 한 수필들이다.
작가는 ‘머리말’에서 손주를 잃은 아픔, 심연의 그리움과 안타까움을 풀어내지 못하는 고통의 늪에서 헤쳐 나오려고 숲과 나무를 찾아 길을 나섰다고 했다. 따라서 이번 수필집에 수록한 작품 가운데 상당수가 숲을 이야기하고 나무를 관찰하고 있다. 작가가 삶이 무엇인가를 묻고 대답하고 있는 것은 그런 고뇌의 흔적이라 할 만하다.
표제작 <소나무의 미소>에서는 광암터널 입구의 소나무와 주흘산의 소나무를 소재로 삼았다. 매연을 뒤집어 쓴 채 숯검정이가 되어 있는 광암터널 소나무에서 인간의 이기심을 읽어낸다. 주흘산 소나무들에서는 일제강점기 때 태평양전쟁에 사용할 보충 연료로 쓸 송진 채취 때문에 입은 상처를 주목한다. 갖은 시련과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끌어안고도 의연하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소나무에서 삶의 보편적 의미를 추적해 낸다. 상처 없는 삶은 없으며 세월이 그 시련과 고통을 치유해 줄 것이라는 의미가 그것이다. 시련을 당하고 상처를 입었지만 꿋꿋하게 살아가는 소나무에는 작가의 심경도 투사되어 있다. 소나무를 통해 영혼의 위안을 삼았다.
<안개 속에서>는 안개 자욱한 선자령 숲길을 걸으며 삶의 본질을 확인하는 작품이다. 안갯길처럼 앞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불확실한 것이 인생길이라고 지각한다. 그런가 하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설레는 마음으로 길을 떠나는 것”처럼 인생길도 그런 것이라는 역발상을 일궈낸다.
삶에 대한 사유는 <눈잣나무>에서 삶의 지혜를 찾는 데로 나아가기도 한다. 이 작품에서는 설악산 대청봉 산등성이에서 살아가는 눈잣나무의 생존 이치를 통해 삶의 지혜를 터득한다.
눈잣나무는 대대로 억겁의 세월을 지내는 동안 산등성이에 부는 매서운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다른 나무들이 바람에 쓰러지고 넘어지고, 부러지고, 그러다 죽고 마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낮추고, 숙이고, 아예 엎드리거나 눕는’ 것이야말로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터득했을 테다.
……(중략)……
좀처럼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 눈잣나무. 열악한 조건을 이겨내는 억척스러움과 불굴의 투지를 웅변하는 눈잣나무. 제 성질 이기지 못하고 목을 뻣뻣하게 들고 불쑥불쑥 나서기를 좋아하는 내게 온몸으로 얘기하고 있었다.
‘때로 몸을 낮출 줄 아는 것도 용기이고 지혜라는 걸 알아둬!’
-<눈잣나무>에서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고 때로는 몸을 낮출 줄 아는 지혜와 용기가 처신 방법일진대, 정작 화자는 그렇게 살아오지 못했다고 말한다. 대상을 치밀하게 관찰하는 과정에서 이와 같은 통찰이 가능하다.
<나의 경계목, 음나무>나 <엘레지꽃, 그 발칙한 도발>에서는 자기성찰에 머물러서 작품의 주제를 일반화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한 듯하다. 그러나 작품의 주제를 유연하게 이해한다면, 이들 작품도 삶의 지혜를 모색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삶의 길에 대한 모색은 사물을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노란 화살표>, <풍로와 부지깽이> 등에서는 자기성찰을 통해 독자들에게 삶의 교훈을 던진다. <벽난로 타령>에서는 육체적 존재로서의 한계를 깨닫기도 한다.
<노란 화살표>는 트레킹 코스의 길 안내판에 주목한 수필이다. 작가는 양평 물소리길에서 친절히 안내하는 청‧황색 화살표를 따라 걸으며, 스페인 산티아고에 이르는 순례길의 노란 화살표를 떠올린다. 야고보라는 한 성인을 찾아가는 순례자들에 의해 천 년에 걸쳐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890킬로미터의 길을 33일간이나 아무런 탈 없이 걸을 수 있었던 것은 노란 화살표 덕분이었다고 회고한다.
순례길 도보 여행의 경험을 떠올려 놓고서는 삶을 해명하는 사유들을 길게 펼쳐나간다. 삶의 본질, 지혜, 교훈 등, 경험에서 길어 올린 사유들이 풍요롭다. 길을 안내하는 노란 화살표를 놓쳤을 때의 황당함과 당혹감, 그러다가 그것을 발견했을 때의 안도와 기쁨을 경험하며 인생길은 롤러코스트를 타는 것과도 같고, 전인미답의 길에 오르는 여행과도 같다는 생각을 한다. 삶의 길에 직진 신호만 있는 것도 아니며,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때도 있다는 인식에 이르기도 한다. 인생길에는 안내하는 화살표가 없어서, 순간순간 밀려드는 두려움과 공포를 설렘과 기대로 극복하며 걷고 또 걸어서 목적지에 이르러야 한다는 지혜를 이끌어내기도 한다. 자신의 갈 길을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교훈을 곁들인다. 다른 이들을 위해 노란 화살표 하나 그려 넣을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는 대타적 존재로서의 바램도 덧붙인다. 사유의 범람이 오히려 글의 초점을 흐렸다는 지적은 흔쾌히 감내해야 한다.
<풍로와 부지깽이>에서도 대타적 존재로서의 자아를 확립하고자 한다. 누군가의 삶에 불길을 살리는 풍로와 부지깽이로 살고 싶어 하는 의지가 그것이다. 타인의 삶에 희망을 불어넣는 존재로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다. 삶은 온전히 자아의 의지대로 살 수 있는 것만이 아니다. 그게 현실이다. 현실이 의지와는 다른 선택을 강요할 때도 있다. 삶이 버거워 덜어내고 싶을 때도 있다.
<머위를 씹으며>에서는 초등학교 5학년 때를 회상한다. 어머니와 함께 이십 리 길을 버겁게 짊어지고 온 머윗대를 마지막 고갯마루에서 팽개쳐 버린 경험을 썼다. 작가는 여기에서 인생 고갯길을 오르면서 가끔은 소중하게 여기던 것들도 포기해야 할 때가 있다는 주제를 이끌어내었다. 소중한 것조차 포기하고 덜어내야 하는 숙명적인 것이 삶이다.
<벽난로 타령>에서는 삶의 본질에 대한 확인이기는 하나, 인생무상을 이야기한다. 타오르는 불길과 타고 남은 장작에 자아를 투사하여, 인생이란 한때 불길처럼 타오르다가 사그라지는 한 줌의 재 같은 존재라는 생각에 이른다. 허무적인 삶을 확인하는 것이다.
장석규는 자연과 사물에서 삶의 길을 재인식하는 수필을 많이 썼다. 장석규에게 수필 쓰기란 삶의 본질과 지혜를 찾아 나서는 여행이며, 그 과정에서 자아의 지향의지를 확립해 나가는 통로이다. 자연이나 사물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예리한 통찰력을 통해 삶의 존재적 본질을 짚어내는 작가의 직관적 해석은 감동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3. 삶의 회복을 위한 시간과 도전의 공간
장석규의 수필집에는 어린 시절이나 학창 시절의 경험을 떠올려 쓴 작품들이 많지 않다. 그런 점에서 남다르다. 그 시절의 경험들을 단순히 낭만적 추억이나 그리움의 대상으로 다루지 않은 것도 특별하다. 유년이나 학창 시절에 잠시 머문 작품들에서 열정, 강인함, 투지 등의 주제어들을 뽑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작품들은 참척의 아픔으로 인한 공허함에 기운을 불어넣는 대화의 시간처럼 보인다. 작가가 과거에 간직했던 그러한 정신을 반추하는 것은, 결여된 현재의 삶을 극복하려는 심리를 무의식적으로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백지시험>과 <버찌의 추억>은 육군사관학교 시절에 럭비 경기를 하다가 다쳐서 병원 신세를 졌으며, 그 바람에 백지 답안지를 제출했다가 추가시험을 치러야 했던 경험을 서술하고 있다. 우연찮게 맞닥뜨린 위기와 열패감이 화자를 어떤 일에나 열정을 쏟아 붓는 태도를 숙성시켰고 어떤 시련과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강인한 사람으로 변화되었다는 자부심을 드러내었다. 열정과 강인함을 바탕으로 인생의 백지답안지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던 시절을 돌이켜 생각하는 것은 그때의 열정과 강인함을 회복하고 싶어 하는 심리의 표출로 해석할 수 있다. 중학교 시절 60대의 매를 맞으면서까지 밴드부를 그만두려 했던 악착스러움을 떠올린 <꿈 꾀 깡>도 첼로를 배우면서 투지가 결여된 마음을 다잡으려는 심리를 표현한 작품이다.
지난날의 흥미로운 경험을 소재로 한 <청소하기를 좋아함>에서도 결여 의식이 문제되고 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인 여자 선생님의 관심을 끌려고 열심히 청소를 했는데 황당하게도 학년말 통지표에 ‘청소하기를 좋아함’이라는 평가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사관학교에서의 청소, 청와대 경비부대에 근무하던 시절에 산책로의 낙엽을 치우던 경험을 이야기한다. 이런 경험들을 호출해낸 것은 “집안 곳곳이 어질러져 있어도 스스로 청소를 해본 적이 별로 없”는 현재의 결여 의식을 극복하고자 하는 반성적 자기 성찰이다.
현실적 결여 극복을 위한 작품들은 이 이에도 여러 편 보인다. <다시 듣고 싶은 소리>에서는 어린 시절 시골집 뒤란에서 정화수 떠놓고 두 손 모아 빌곤 하던 어머니의 끊임없는 기도 소리를 다시 듣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작가 자신은 자식들에게 무슨 소리를 남기고 있는가를 되묻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작품 역시 결여 의식을 저변에 깔고 있다.
이와 같은 일군의 작품들은 살아오면서 상실한 것들을 회복하려는 심리적 의지를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과거에 작가 자신이 보여주었던 잠재력을 끌어내어 현재 자신이 처해 있는 삶의 안일함이나 무기력함을 극복하려는 심리작용이 과거와의 대화를 주선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한편, 장석규는 주어진 틀 속에서 익숙한 일에 안주하기보다 새롭게 도전하는 삶을 살고자 한다. 삭발의 경험을 쓴 <민머리>나 <민머리 일주일>은 이러한 주제의식을 담아 놓은 작품이다. 그리하여 전원생활을 다룬 작품들은 익숙해지는 것에 대한 거부 의식이나 새로운 도전 의식을 담고 있다.
<전원 낯설게 보기>는 익숙해지는 것에 대한 거부를, <내 물건은 뭐가 있지?>에서는 자기만의 정원을 만드는 창조 행위의 즐거움을, <전원살이통>이나 <모기와 평화협정을 맺어?>,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서는 그만한 대가를 치르면서라도 좋아하는 전원생활의 즐거움을 누리겠다는 도전의식이 드러나 있다. 그러한 생활철학이 마침내는 화자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수다쟁이다>는 자아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준 작품이다. 전원은 작가에게 삶의 회복을 통한 변화의 공간이다.
아내는 어느새 수다쟁이로 변한 남편을 향해서 이젠 말 좀 줄이라고 노골적으로 경고를 보내온다. 그러면서도 아주 싫지는 않은 기색이다. 남을 비방하거나 부정적인 이야기는 안 하는 데다가 마냥 굳어졌던 얼굴이 이제는 조금씩 풀어져서 부드러워 보인다고 인정해 주기도 한다. 나도 가끔씩 거울 앞에 서서 내 얼굴을 볼 때마다 표정이 많이 부드러워진 걸 느낀다. ‘내 얼굴이 펴진 건 내가 수다쟁이가 된 덕분일거야!’하고 자위하면 기분도 좋아진다.
-<나는 수다쟁이다>에서
장석규는 참척의 아픔이나 안타까움을 직접 드러내는 작품들은 쓰지 않았다. 고통에 침잠하는 작가의 쓰라린 가슴을 작품에서 차마 풀어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심경이 작품에 한두 올씩 흩어져 있음을 볼 수 있으며, 고통의 늪에서 걸어 나올 수 있는 힘을 회복하여 변화된 모습으로 삶을 펼쳐가려는 도전을 읽어낼 수 있다. 유년기나 청년기라는 시간과 전원생활의 공간에서 창작된 수필이 그것을 말해 준다.
4.다양한 구성 전략을 위하여
문학작품은 유기적 통일성을 지녀야 한다는 생각은 신비평 이후 지금까지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유기적 통일성이란 작품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함께 작동하는 유기체적 전체로서의 양상을 말한다. 하나의 작품이 유기적 통일성을 지닌다는 것은, 모든 요소들이 함께 작동함으로써 작품의 주제 또는 하나의 전체로서의 작품이 갖는 의미를 확립시킨다는 말이다.
문학작품은 유기적인 통일성을 갖춘 하나의 구조를 갖추어야 한다. 그런데 수필은 이와 같은 문학작품의 존재 원리를 도외시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붓 가는 대로 쓰는 것이 수필이라는 오해가 불식된 지 오래되었으나, 창작 현장에서는 아직도 그 미망에서 완전히 헤어나지 못한 탓이다. 수필도 문학이라면, 모든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작동하여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구조를 갖추어야 한다. 부분의 총합과 전체는 다르다는 점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부분들이 한데 어울려 작동하면서 새로운 그 무엇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수필 창작에서 구성을 중시하는 것은 전체성을 문학작품의 원리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장석규의 수필 작품들은 대부분 연쇄적 구성을 취하고 있다. 연쇄적 구성이란 앞뒤에 놓이는 부분들을 사슬처럼 연결하는 구성 방법이다. 이런 구성에서는 선후관계의 탄탄한 개연성을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 부분의 순서를 바꾸거나 어느 부분을 빼고 보태면 작품의 전체적 질서가 허물어질 수 있다. 장석규의 수필세계에서 향후에는 다양한 구성 전략을 기대해도 좋을 성싶다. 그는 수필가로서의 필요충분조건인 관찰력과 해석력을 두루 갖춘 작가이기 때문이다.
여세주
문학평론가, (전)경주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교수. 현 《수필미학》 발행인.
노란 화살표
장석규
봄기운이 물씬한 3월, 양평 ‘물소리길’을 걸었다. 양평군에서 제주 올레길을 개척한 사람들을 초빙해 만든 길이다. 양수역에서 출발해 마을 샛길로 걷다가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긴 시냇물을 따라 걷기고 하고, 산호리 푹신한 낙엽길을 걷기도 했다. 아침이여선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새소리가 더욱 싱그럽다.
물소리 길을 알려주는 크고 작은 안내판이 갈림길마다 서 있다. 마을길을 걷다가 산길로 접어드는 곳에는 앞으로 펼쳐질 구간의 정보를 제공하는 지도판도 세워져 있어 그동안 걸어온 거리와 앞으로 남은 거리를 알려줬다. 길가 나뭇가지에는 삼색 끈이 배달려 ‘이쪽으로 오세요’라고 손짓하듯 나풀거렸다. 길바닥에도 방향을 가르쳐주는 화살표가 그려져 있다. 진행 방향은 청색. 반대 방향에는 황색 화살표였다. 청색 화살표만 따라가다 보면 목적지가 나오리라. 곳곳의 친절한 배려로 길 잃을 염려는 없어보였다.
2년 전, 나는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다. 처음 걷는 그 길의 방향을 알려준 것은 노란 화살표였다. 내가 걸어가야 할 길. 내가 목표로 하는 산티아고까지는 그 표지만 믿고 따라가면 되었다. 길눈이 어둡다 해도, 방향감각이 무디다 해도 화살표만 찾으면 되었다. 어떤 때는 숨은 그림 찾듯이 하다가 길을 헤매기도 하였다. 하지만 내가 못 찾아서 그랬을 뿐, 길바닥에도, 나무에도, 담벼락에도, 전봇대에도 화살표는 어김없이 있었다. 그것은 순례자들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주었다. 890km 그 긴 거리를 33일 동안 아무런 탈 없이 순례를 마칠 수 있었던 것도 노란 화살표 덕분이었다.
산티아고에 이르는 순례길은 야고보라는 한 성인을 찾아 그의 신앙심을 기리는 사람들에 의해서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진 길이다. 천년을 두고 이어져온 길이니 거기에 서린 역사와 종교적 의미는 참으로 웅숭깊다. 순례를 마친 지금까지도 유난히 인상 깊게 남은 것은 길을 안내해 준 노란 화살표였다.
왜 하필 노란 화살표였을까? 주의와 주목이 필요한 곳에 등장하는 색이 노랑이다. 검정 아스팔트의 정중앙을 가른 노란 줄의 힘은 ‘넘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이고, 어린이를 태우는 차량이 노란색인 것은 보호하려는 의미다, 특히. 동양에서는 노랑을 깨달은 자의 색으로 보지 않았던가. 이곳 물소리길의 황색 화살표도 눈에 띄기 운 색깔이기도 하지만, 노랑에 가까운 상징정이 있기 때문이리라.
살갗을 태울 것처럼 따가운 태양빛을 받으며 온종일 걷고 걸어도 저 멀리 지평선뿐인 메세타에서 노란 화살표를 놓쳤을 때 밀려들던 황당함, 태백준령 같이 높고 깊은 산길을 홀로 나섰다가 갈림길에서 노란 화살표를 찾지 못했을 때에 느끼던 송연함과 당혹함, 어두운 새벽길에서 흔히 벌어지던 일이었다. 그러다 어느 집처럼 처마 밑에 숨은 그림처럼 그려져 있던 노란 화살표를 발견했을 때 느끼던 안도와 기쁨, 인생의 롤러코스트가 이렇지 않을까 싶었다.
살아간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전입미답前人未踏의 길에 오르는 여행이 아닐까. 이 세상 누구도 가보지 않은 나만의 길. 길을 개척하면서 가는 사람이든, 남이 낸 길을 따라가는 사람이든 그 사람의 처지에서는 처음으로 가는 길일 수밖에 없다.
인생도 연습으로 한번 살아볼 수 없을까? 연습을 해서 무대에 올리는 연극처럼…. 인생의 초행길, 수많은 갈림길을 만날 때마다 화살표가 나타나 ‘나 여기 있소, 이리로 오시오’하고 알려주면 또한 얼마나 좋을까. 이미 이긴 월드컵 축구경기를 녹화 방송으로 보듯 느긋한 마음으로 즐길 수 있을 것 아닌가.
그러나 삶의 길에 푸른 신호등만 켜지는 전능한 화살표는 없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인생길이 얼마나 무미건조할까. 내가 가야할 곳은 나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내 자신이 정한 길이지만, 뜻하지 않은 뱡향으로 흘러간 때도 있으리라. 그럴 때마다 가기 싫다고, 힘들다고, 주저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멀고 험해도 돌이켜 걸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순간순간 밀려드는 두려움과 공포는 설렘과 기대로 극복하며 걷고 또 걸어서 목적지에 이르러야 한다.
이제 내 갈 길을 스스로 정하고, 담대하게 그 길을 찾아나서는 용기가 나를 이끄는, 그런 인생길을 걷고 싶다, 누군가 그려놓은 화살표만 따라다니기보다 나도 한 번쯤 다른 이들을 위해 노란 화살표 하나 그려 넣을 수 있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