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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사람
보통 심성이 착하고 남을 배려하는 원만한 사람을 ‘법 없이도 살아갈 사람’이나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나도 마땅히 표현할 말이 없을 때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사람’이란 말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런 말을 사용한다는 것은 종교를 떠나서 그만큼 거부감이 적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두 말을 음미해보면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전자는 좋은 사람의 의미가 강하고, 후자는 바른 사람이라는 의미가 더 강하게 느껴집니다.
우리들은 대체적으로 상대방의 말을 경청해주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러다보니 어떤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옳고 그름에 관계없이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고 맞장구를 쳐주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술에 취해 녹음기를 틀 듯 한번 한 이야기를 하고 또 해도 마냥 들어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잘 참고 들어주는 사람은 술좌석에 자주 초대되며 좋은 사람으로 불립니다. 그러나 그는 법 없이도 살아갈 사람에 속할지 모르지만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사람은 아닐 것입니다.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사람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부처이고 이 부처는 ‘깨달음, 어진’이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무조건 자신을 누르고 겸손한 자세로 들어주는 경우만은 아닙니다.
내가 아는 한 의사 분은 정치이야기를 매우 싫어합니다. 사실 이분만이 아니라 내가 아는 많은 사람들이 정치이야기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내가 정치 이야기를 꺼내면 이내 손사래를 칩니다. 나는 정치권의 중심부에 갔다 왔기 때문에 정치와 정치권 주변의 많은 것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 관심을 가질만한 흥미로운 주제가 될까 생각하고 정치이야기를 꺼내면 내 말도 다 똑같은 정치인의 말처럼 치부해버리고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심지어는 내가 왜 그 좋다는 정치권에서 나와서 다시는 국회근처도 얼씬 거리지도 않는 이유조차도 들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정치에 대한 이런 혐오감은 정치인들이 이제까지 벌린 전 세계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참담한 행태들이 그렇게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사실은 나도 정치에 대해 많은 혐오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의사분과 대화를 하다보면 자신의 전공과 관련된 말이 나오면 눈이 말똥말똥해져 열심히 설명합니다. 그러나 듣는 나는 어느새 의학에 대한 밑천이 떨어져 이내 듣기만 하게 됩니다. 반대로 나도 내 전공과 관련된 공학 분야의 말이 나오면 날을 새며 즐겁게 이야기할 준비가 되어있지만 상대방도 잠시 관심을 가질 뿐 마찬가지로 흥미 없는 대화가 되어 버립니다. 그런데도 서로 자신들의 말을 일방적으로 들어만 주는 사람들을 원하고 또 그런 사람을 만나면 좋은 사람으로 치부합니다.
내가 아는 어느 대학의 A교수(자신의 이름을 밝히기 매우꺼리는 분)는 매우 겸손하고 온유합니다. 원래 천성적으로 그랬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언어나 행동에서 대학교수들로부터 느껴지는 권위적인 것을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는 십 수 년을 매일 자신의 많은 시간을 할여해서 어려운 사람들과 방황하는 사람들의 말동무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많은 사람의 길잡이가 되기도 했습니다. 자신을 적대시 하는 세력에게도 언제나 웃음으로 대합니다.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인데 어떻게 적대시하는 사람이 있을까 의아해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언제 어느 곳에서나 자신들보다 실력이 있고 인정을 받는 것에 배 아파하는 세력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도 그의 직장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를 시기 질투하는 세력들은 눈에 띄게 윗사람에게 아부하고, 불의한 방법으로 차지한 자신들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특히 평이 좋은 A교수를 자신들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얼굴 마담을 삼고 싶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사실과 다른 나쁜 말을 만들어 퍼트린다던가, 멀리서 출퇴근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첫 시간과 맨 마지막시간 강의만 배정하여 고통을 주었습니다. 교수학습에 필요한 기자재를 기묘한 방법(만약 이 사실을 말하면 재단과 갈등이 생길 수 있는)으로 사주지 않도록 한다든지 별의별 불이익을 다주어도 그냥 웃으면서 지나쳐 버리지만 뒤 돌아서서는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해주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다른 곳에 가서는 그들의 좋은 점만을 말합니다. 사실 그들의 좋은 점이라고 해야 거의 찾을 수 없을 정도지만 말입니다. 출세(대학에서 출세라고 한다면 총장이 되는 것이지만)할 수 있는 부도덕한 줄에 서지 않고 매사 자신을 억누르며 참는 그는 마음이 참 넉넉하고 여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사람’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마음의 부자’로 느껴집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었습니다. “내가 지금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려고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람의 환심을 사려하고 있습니까? 내가 아직도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하고 있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닙니다.” (갈 1: 10) 바울은 사람의 환심을 사기위해 사는 사람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은 될지언정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사람은 아니라는 뜻도 될 것입니다.
오늘 보도에 따르면 말레이시아에 수련회 갔던 24명의 청년들 중에서 한 여성이 물에 빠지자 건지려고 한 남자 2명이 익사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2명의 남자이름 중에서 한 청년의 이름이 ‘요한’이라는 것 때문에 그 기사의 댓글은 온통 기독교를 비하하는 ‘개독’이나 욕지거리를 하는 글로 도배되었습니다. 다른 아무런 이유는 없었습니다. 사실 이 두 청년은 내가 아는 사람들이고 좋은 청년들입니다. 이 청년들이 의로운 일을 했다가 목숨까지 잃었지만 단지 한 청년의 이름이 특정종교의 냄새가 난다고 난도질을 당하는 세태입니다. 이렇게 까지 된 데에는 나를 포함한 많은 크리스천들이 말과 행동이 다르게 삶으로써 세인들에게 신뢰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들의 극심한 이기심과 욕심으로 점철된 삶은 신뢰를 잃어버린 정도가 아니라 이렇게 경멸의 대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떤 분들은 대화의 장에서 종교이야기는 무조건 꺼내지 말라고 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정치와 종교이야기만 빼고 즐겁게 대화하자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좌석에 끼어보면 대화의 주제는 꼭 부동산 투기와 여자이야기가 주를 이룹니다. 자신도 아내와 딸이 있으면서도 말입니다.
모든 사람이 좋아한다고 진리와 의는 아닙니다. 또, 많은 사람이 좋아한다고 해서 법 없이도 살아갈 사람일 수 있을지언정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사람은 아닙니다.
이상한 말 같지만 기독교의 본질은 주안에서 부처님 가운데 토막같이 살아가야 한다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2010.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