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카리나는 이태리어로 '작은 오리'라는 뜻이다. 악기의 모양이 오리와 닮아서 이름이 그렇게 붙여진 듯하다. 지금은 흙으로 빚어 만든 폐관 악기를 통칭해서 오카리나라고 한다. 오카리나의 투명하고 그윽한 소리는 듣는 이의 마음을 끝없는 미지의 세계로 이끌어 간다. 페루에서는 거리 악사의 애조를 띤 음성이 되고, 히말라야 고원에서는 목동의 피리가 되며, 바이칼 호수에서는 아침 햇살을 즐기는 새가 된다.
내가 오카리나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노무라 소지로가 연주한 "대 황하"를 듣고 나서다. 1986년, 일본 NHK-TV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대 황하'의 배경음악이 오카리나로 연주되면서 이 악기는 국내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오카리나 애호가들은 작곡자이자 연주자이며 匠人인 소지로가 만든 악기로 연주하고 싶어한다. 소지로는 "예술가는 고독하지 않으면 예술 혼이 훼손된다"는 신념에 따라 문명의 편리함을 뿌리치고 지금도 산속의 폐교에서 가족과 애견만 데리고 자기의 예술세계를 구현하고 있다.
오카리나의 소박하고 친숙한 소리는 흙의 풍요로움과 아늑함 때문일 것이다. 지상의 모든 생명체는 흙에서 태어나 흙의 보살핌을 받다가 흙으로 돌아간다. 흙에는 모든 생명체의 흔적이 녹아 있다. 그러기에 흙은 생명체의 영원한 품속과 같다. 흙속에는 수분이 배어들어 호흡할 수 있는 미세한 공간이 있다. 그래서 오카리나는 연주자의 숨을 통해 내뱉는 침을 흡수하여 소리가 잘 빠져나갈 수 있도록 저열에서 가공되는 것이다.
오카리나는 연주자가 보낸 마음에 따라 다른 울림을 보낸다. 부드럽게 속삭이면 나비가 날고, 애틋한 사연을 보내면 풀벌레 음성으로 가슴에 여운을 남긴다. 그러나 고함을 치거나 윽박지르면 겨울바람 소리만 들려준다. 입으로만 내는 기교의 소리는 아무리 아름답게 치장을 하여도 허공을 맴도는 공허한 소음에 지나지 않지만 가슴 밑바닥의 꾸밈없는 소리에는 만물이 미소지으며 화답한다.
오카리나의 제일 높은 음은 제 음정 내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다른 관악기와 마찬가지로 오카리나도 고음으로 갈수록 세게 불어야 하지만 가장 높은 음은 오히려 바로 밑의 음보다 조금 약하게 불어야 제 음정을 낼 수 있다. 작게 불면 소리가 나지 않고 기분에 들떠 너무 세게 불면 음이 뒤집혀 바람 소리만 난다. 이는 마치 질 높은 삶이라 해서 반드시 풍요한 물질이나 높은 지식이 필요하지 않는 것과 같다.
소리는 부딪히는 물체에 따라 다르다. 딱딱한 물체의 둔탁한 소리는 감정이 없고 날카로운 물체의 자지러지는 소리는 짜증스럽고 불안하다. 뜨거운 가슴끼리 부딪히는 소리야말로 벅찬 감동을 주는 아름답고 귀한 소리이다. 폐관 악기인 오카리나는 밀폐된 공간에서 수없이 부딪히고 돌아서 새로운 소리를 만들어 낸다. 몇 번이나 되돌아보는 자기 성찰의 소리는 잘 빚은 술처럼 깊은 향기가 배어 있으며 주변과 어울려 아름다운 화음이 된다.
굳이 오카리나의 결점을 말한다면 다른 악기에 비해 음역이 좁다는 것이다. 오카리나를 처음 배우려고 했을 때 몇 번이나 망설였다. 피아노는 52음이고, 하모니카는 24음이나 되는데 고작 13음 밖에 되지 않는 오카리나로는 연주에 한정이 따르지 않을까 해서다. 그러나 주어진 조건보다는 그렇게 주어진 환경에 의미를 부여하기로 생각을 바꾸었다. 음역이 좁아 오히려 빨리 숙달될 수 있는 장점도 있지 않은가.
사실 이제까지 나를 감동시킨 맑은 음색까지도 좁은 음역이라는 선입견으로 무시하고 비난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절제되고 압축된 음역이야말로 주어진 삶을 다듬고 가꾸는 것이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자기만의 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오카리나와 친해지고 싶어 아침저녁으로 오카라니에 내 마음을 실어 보았지만 정성이 부족한 탓인지 가족들의 잠만 설치게 하였을 뿐 오카리나는 좀처럼 본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가슴 밑바닥에서 솟아나는 진솔한 마음으로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치열하지 못한 思惟로 허공에 흩어지는 소리만 지껄인 자신을 돌아본다. 작은 결점이 크게 보여 친분에 금을 그었거나 너무 많은 것, 완벽함을 기대하다 실망과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 이 가을이 다 가기 전 전화라도 해야겠다. 처음으로 오카리나 소리에 반했던 그 마음으로 주변을 돌아보며 작지만 나만의 소박한 소리를 내고 싶다.
끼워보지 못한 은반지
꿈이었다. 집 앞에는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넒은 마당에는 할미꽃 제비꽃이 정원석 사이에서 소담스럽게 웃고 있었다.
꿈속의 집은 주변 풍경은 달랐지만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군에 입대하기 전까지 살았던 비산동 변두리 집이었다. 비가 오면 대야와 양푼을 있는 대로 동원해야 하는 방2칸 짜리 판잣집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어린 시절과 사춘기를 보냈다. 그런데 꿈에서 본 넓은 정원이 있는 집은 무엇일가? 그건 어릴 때부터 살고 싶어했던 집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시골의 전망 좋은 텃밭이나 집터를 보면 소유하고 싶어하지만 어렸을 적 제법 넉넉하게 자란 아내는 내 마음을 모르고 핀잔만 줄뿐이었다.
그 집에서 이사를 나올 때 두 번 다시는 이 동네에 얼씬거리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했고, 이곳에서 살았던 구차한 기억 모두를 지우고도 싶었다. 그러나 꿈속의 배경은 판에 박은 듯이 언제나 비산동 그 집이었다. 꿈은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욕망이 의식의 통제를 받지 않는 수면 상태에서 나타난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의 가슴 밑바닥에 있는 어떤 욕망이 그 집으로 자꾸만 데려가는 것일까?
어릴 때의 추억을 더듬으며 서문시장에서 옛날 살던 집까지 걸었다. 그 길은 젖먹이 동생들을 업고 하루에 두세 번씩 어머니에게 들르기 위해 다니던 길이었다. 남동생이 넷이나 되어 제대로 놀 수가 없어 동생이 없는 친구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세월의 뒤편으로 구멍가게와 만화방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어릴 때 불결하게 보였던 골목길의 헌 집들이 정겹고 편안하게 느껴졌다 . 그러나 우리집이 있었던 곳에는 빌라가 들어서 있어 추억 여행은 계속될 수 없었지만 골목길 곳곳에서 어머니의 체취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며칠 전 어머니의 추도예배가 있었다. 일흔이 다된 형님께서 예배를 인도하시다 그리움과 悔恨으로 그만 울먹이셨다. 어머니는 군에서 훈련받는 형님을 면회 가시면서 떡이 쉬어버릴까 밤새도록 기차간에서 떡을 부채질하셨다고 한다. 덕분에 딱딱해진 찰떡을 눈물로 목을 축여가며 먹었다고 하셨다 .
그러나 어렸을 때는 어머니의 억척스럽고 팍팍한 생활의 모습이 싫었다. 초등학교 입학식 때도 참석할 수 없을 정도로 어머니는 언제나 집안일과 경제 생활에 바쁘셔서 다소곳하게 함께 다녀본 기억이 없다. 그러나 우리들이 아플 때는 약간의 어리광으로 평소 어머니에 대한 따뜻함의 갈증을 해소 할 수 있었다. 어떤 때는 어머니의 관심을 내게 매어두고 싶어서 어머니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좀 더 오래 아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이세상 모든 불효자가 그렇듯이 세월이 지날수록 어머니가 그리워지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저지른 불효는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가장 큰 불효는 월남 지원이었다. 입대하는 날 형님께서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월남은 가지 말라고 하셨지만 그 당시 내 좁은 소견으로는 형제가 일곱이나 되니 나 하나쯤은 설령 잘못되더라도 부모님께서 슬픔이 덜 하실 것 같았다. 교육 중에도 식구들이 알면 파월이 취소될 것 같아 일체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교육을 끝내고 떠날 무렵 지금 떠나면 부모 형제와 마지막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집에 전보를 쳤다.
백마부대 용사를 태운 기차는 새벽녘에 대구역에 도착했다. 부둥켜안고 울고 웃는 사람들 때문에 역내가 소란스러웠지만 우리 식구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정말 혼자가 되었다는 생각에 부산까지 가는 동안 내내 마음이 무거웠고 선실 안에서도 울적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출항을 얼마 남겨 두고 옆 전우가 어쩌면 마지막 고국 땅이 될지도 모르니 나가 보자고 해서 갑판으로 나왔다. 군악대의 연주와 환송하는 여학생들이 열심히 태극기를 흔들고 있는 것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전 우중에 누군가가 내 이름의 현수막이 보인다고 소리치는 것이 아닌가. 설마 하며 그 쪽으로 내려다보니 어머니께서 현수막을 흔들며 나를 찾고 있었다. 그 순간 내 가슴속에서는 뜨거운 것이 왈칵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전보가 늦게 도착하여 대구역에 도착하니 기차는 이미 떠나 전쟁터에 가는 자식에게 은반지라도 지니게 하기 위하여 택시를 전세 내어 오셨다고 한다. 자식에게 던진 반지가 갑판 위에까지 닿지 못하고 바다에 빠져 안타까워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나는 연신 쏟아지는 눈물을 손으로 훔치면서 다짐했다. 꼭 살아서 부모님을 다시 뵙겠다고, 부모님 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불효는 없을 것이라고
입대하는 날 "월남으로 차출될 것 같으면 바로 연락하면 가지 않도록 힘쓰겠다"고 한 형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 다음 달이면 귀국한다는 편지를 받고 기뻐하는 누님을 남겨두고 자형은 하얀 보자기에 싸여 귀국했다. 서른도 되기 전에 혼자된 딸의 모습을 볼 때마다 어머니는 깊은 한숨을 쉬었고 가슴에는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 악몽이 아들에게까지 닥칠까봐 귀국할 때까지 노심초사 하셨을 것이다.
어머니가 세상을 따나시기 얼마 전 철들고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어머니 품에 안겼다. 내 자식들에게 당부의 말씀을 하시고 나를 안고 무엇이 그리 후회스러우신지 연신 내 이름을 부르시면 미안하다고 하시며 우셨다. 병이 깊어 뼈만 앙상했지만 그 가슴은 한없이 따듯하고 포근했다. 다시는 어머니 품에 안길 수 없다는 생각과 불효를 사죄하는 마음으로 어린애처럼 울었다.
내가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은 어머니의 강직한 성품과 보살핌의 덕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들을 사랑한 만큼 엄하셨던 것이다. 요즈음에도 '어머니 은혜' 노래를 부르면 어머니의 마음이 뼈마디 속으로 파고들어 나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거린다.
끼워보지 못한 은반지는 지금도 내 가슴에 꽉 끼여있다. 이 세상에서는 마당 한 평 없는 판잣집에서 고생하셨지만 하늘나라에서는 꿈속에서 본 집처럼 꽃과 나비들이 있는 넒은 정원에서 나를 바라보시며 웃고 계시리라.
첫댓글 수고하셨네요. 신춘문예 당선작이라 역시 다르군요. 즐거운 성탄되세요
잘 읽었습니다. 감동이 진합니다. 나는 언제 이런 글을 써 보나.......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