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키이츠(John Keats 1795-1821)는 26세에 요절하였지만 4년간에 걸쳐 창작된 작품들은 많은 비평가들에게 호평을 받고 있다. 키이츠는 인간 구원을 기독교적 신앙에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인간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서 영혼을 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그는 세상의 모든 사물을 긍정적 내지 가변적인 것으로 보고 있기에 오늘의 기쁨은 내일의 슬픔이 될 수도 있고 행복해 질 수도 있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면서 마냥 비극이 닥치면 눈물만 흘리는 눈물의 계곡이 아니라, 영혼의 훈련을 위한 계곡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견해를 키이츠는 순간과 영원, 고통과 즐거움, 행복과 불행을 조화시킴으로써 인간 존재에 불가분의 요소를 해결하여 삶을 풍요롭게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 점에 대한 베이트(Walter Jackson Bate)의 견해는 적절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키이츠의 시가 초기에는 단순히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정과 감각을 바탕으로 한 구체적, 심미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쾌락과 즐거움으로 묘사하였고, 차츰 시간의 경과와 함께 시적 세계가 성숙되어지자 인간의 쾌락과 고통, 미와 추, 선과 악 그리고 이상과 현실의 갈등 문제를 그의 철학적 사상의 용광로 속에 집어넣어 무아의 예술세계로 승화시켰다"라고 했다(Bate, p.250)
키이츠는 미에 대해 남다른 지식과 열정을 갖고서 시종일관 미의 추구에 여념이 없었다. 그의 시 Endymion Book Ⅰ에서 아름다운 것은 영원한 기쁨이요, 그 사랑스러움은 불어나지, 결코 무로 돌아가지 않으리라(A Thing of Beauty is a joy forever; Its loveliness increases; It will never pass into nothing) 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워즈맨도 키이츠가 진리에 도달하는 상상력의 단계를 설명할 때, 키이츠는 자연의 감각미를 통해 예술의 매체인 상상력의 본질을 거쳐 인간의 영역 속으로 접근한다고 말하고 있다. (Earl R. Wasserman, p.120)
또한 키이츠는 동시대의 낭만파 시인들과 마찬가지로 현실의 고통 속에 사는 인간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그는 인간이 행과 불행, 기쁨과 슬픔 등의 상반(Dichotomy)된 요소 속에서 공존함을 숙지하고, 어떻게 하면 인간의 삶에서 고통을 덜어주고 구원해서 평안하게 살 수 없을까 고심해 왔던 것이다. 이러한 관심사는 곧 사물을 통해 포착한 미에서 인간 삶의 이원적 요소를 해소시킴으로써 좌절하지 않고 용기를 낼 수 있도록 힘을 북돋워 주는 것이 그가 바라는 최고의 목적이자 삶의 철학인 것이다. 키이츠는 자신의 짧은 생애 동안에 겪은 질병과 가난 그리고 동생들의 죽음, 자신이 이루지 못한 사랑 등을 많은 작품 속에 담고 있다. 그 중 정신적 극복을 통해 완성된 다섯 편의 위대한 작품 Odes - Ode to Psyche, Ode to Melancholy, Ode to a Grecian Urn, Ode to Nightingale, 그리고 Ode to Autumn -을 통해 시인 자신이 가졌던 '미'라는 관념이 어떠한 형태로 표출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것이 이 글의 중심과제이다. 또한 시인이 우리 인간의 삶 속에 고통과 절망을 미의 대상으로 승화시켜 인간의 유한성을 극복한 진실과 영원의 속성을 파악함으로써 시의 이해와 감상에 도움을 주는 것이 본 논문의 목적이다.
Ⅱ 미의 양상
키이츠 시를 면밀히 분석해보면, 초기에는 단순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 자신의 감정과 감각을 바탕으로 한 심미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쾌락과 즐거움만을 묘사하였다. 그러나 후기에 와서는 시가 차츰 무르익기 시작하면서 인간 내부의 갈등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 인간 삶 속에 필연적인 양면선 즉, 행과 불행, 아름다움과 추악함, 선과 악, 그리고 이상과 현실의 갈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던 것이다.
키이츠는 삶의 고통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감정과 감각을 통한 무한한 상상력 속에서 아름다움과 진리를 찾아내고자 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일체의 개인적인 자아를 버리고 오직 비 개인적인 무아의 경지에서 우주의 만물과의 일체감을 갖고 질서와 조화를 추구하여 아름다운 시의 세계를 이루어 내는 것이 곧 그의 시에 대한 핵심적 과제였던 것이다.
키이츠의 최상의 예술세계는 몇 가지 단계를 거쳐야 가능한 것이다. 첫 번째는 지적 언어를 통해서 감각적 이미지를 형성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감각적 이미지가 상상력을 기반으로 하여 지적 사고의 영역을 끌어들이거나 이끌어 나가는 것이다. 세 번째는 지적사고의 영역에서 인간의 정서를 통해 예술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다. 마지막 네 번째는 인간의 정서와 영혼의 세계에서 우주만물과 주관적 관념이 객관적 질서와 조화를 이루어 사랑과 진실, 아름다움이 곧 하나로 합쳐져 예술의 극치를 이루는 것이다. 이것이 곧 키이츠가 지향하던 예술세계, 진, 선, 미가 합쳐진 세계인 것이다.
키이츠의 '미' 발견은 사물에 대한 섬세한 감각(sensation)과 오관을 통해 사물을 감지하고 인식작용(cognition)으로 사물의 본질을 파악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그의 시에 있어서 진정한 삶의 가치는 아름다움을 발견하는데 있다. 시인에게 자연세계의 만물이 미에 대한 감각과 인상을 제공해 주곤 한다.
19세기 영국 낭만주의 시대 시인들에게 자연에 대한 철학 내지 인식은 일반적으로 워즈워드처럼 자연 만상이 영속한다는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으나, 키이츠는 자연 만상이 비 영속한다고 믿고 있었다. 즉, 워즈워드는 인간의 변화하는 분노, 오욕 같은 감정보다 자연의 부동의 형태를 더 우위에 두고는 그것을 애호, 찬양하고 있다. 이 부분은 키이츠의 조화의 견해(Conciliating vision)와 뚜렷한 대조를 보여주고 있다.
키이츠는 변화하는 것에서 비애를 느끼며, 변화의 경험이 그의 지성과 감성에 작용하는 양상의 형태가 다양하다고 보고 있다. 그러므로 키이츠가 추구하는 영원성은 그의 독특한 사고의 산문인 "구원의 체계"(A System of Salvation)를 이해함으로써 가능하다. 즉 인간의 지성이 세상의 고통과 악을 경험함으로써 좌절하지 않고 참고 견디며 그것을 극복할 만큼 강한 영혼으로 성장하였을 때에만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있으리라고 보는 것이다.
키이츠는 삼라만상에 존재하는 자연물상을 미의 대상으로 추구함으로써 영원불멸의 미를 노래하였으며 인간의 괴로움과 고통을 덜어 주고 인간을 고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삶의 차원을 높이고 긍정적 세계를 형성하고자 했던 것이다.
Ⅲ. Ode to Psyche and Ode to Melancholy
키이츠는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미를 추구해 나가고 있다. 예를 들면 자연을 통해 얻어질 수도 있고, 신화를 통해 또는 예술적인 작품을 보고 영원미를 추구할 수도 있다. 먼저 "After Dark Vapour"를 살펴보고, 그 다음으로 Ode to Psyche와 그 외 Five Odes를 중심으로 자연적 미를 심층 조사해 보고자 한다.
검은 안개가 오랜 황량한 계절 동안
우리 들판을 압박한 후에 부드러운 남풍에서 태어난 하수가 와서
병든 하늘로부터 보기 흉한 모든 오점들을
깨끗이 씻어준다.
고통에서 풀려난 불안한 달은
오랫동안 잊어버렸던 권리로 5월의 감촉을 얻는다.
눈꺼풀은 스쳐 가는 서늘함과 함께 놀아난다
마치 장미꽃 잎이 여름 빗방울과 놀 듯이
아주 고요한 생각들이 우리 주위에 떠오른다.
싹이 트는 잎사귀, 고요히 익어 가는 열매
저녁 때 고요한 보릿단에 미소짓는 가을 햇살,
향긋한 삽포의 빰, 미소짓는 아기의 숨결
모래 시계 속에 천천히 떨어지는 모래
숲 속 흐르는 냇물, 시인의 죽음과 같은 것이
After dark vapours have oppress'd our plains
For a long dreary season, comes a day
Born of the gentle south, and clears away
From the sick heavens all unseemly strains,
The anxious month, relieved of as pains,
Takes as a long-lost right the feel of Mary;
The eyelids with the passing coolness day
Like rose leaves with the drip of summer rains.
The calmest thoughts come, round us; as of leaves
Budding-Fruit ripening in stillness-Autumn suns
Smiling at eve upon the quiet sheaves -
Sweet Sappho's cheek - a smiling infant's breath -
The gradual sand that though an hour - glass runs -
A woodland rivulet - a poet's breath. (Sonnet Ⅲ)
키이츠의 성장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언제나 지병으로 시달리며 살았기에 정신적으로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곳을 찾아 헤매다가 결국 조용한 자연의 품에 안기어 자연과 남모르게 대화를 나눔으로써 정신적 위안을 얻고자 했던 것이다. 키이츠는 선천적으로 자연의 황홀함이나 아름다움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듯 하다. 그의 시 "검은 안개"에서 본 것처럼, 싹이 트는 잎사귀, 고요히 익어 가는 열매, 저녁에 고요한 보릿단에 미소짓는 가을 햇살과 같은 표현은 시인의 감정과 그가 찾고자하는 바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한 편 키이츠의 Ode to Psyche는 그의 시적 역량을 정신적인 문제에 비춘 시이다. 이 정신적인 문제는 사랑의 고통에 따르는 실상의 문제와 일맥상통한다. 이러한 관점에 대해 매이해드는 Ode to Psyche를 인간의 사랑과 영혼의 융합이라는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다.(Mayhead, p. 87)
"Ode to Psyche"에 나타난 자연 묘사는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오 여신이여! 이 곡조 없는 시에 귀를 기울여다오.
달콤한 강압과 아름다운 추억이 짜낸,
그리고 너의 비밀이 너 자신의 매끈한 조개껍질 귓속까지
노래 들리게 허락해 다오!
나는 확실히 오늘 꿈을 꾸었노라, 아니면 내가 보았던 것일까.
잠깨어 눈 뜬 날개 달린 프시케를,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숲 속을 거닐었는데,
갑자기 깜짝 놀라 기절하여
두 아름다운 사람을 보았지.
깊숙한 풀 속에서 나란히 누워있는
거의 찾아내기 힘든 시냇물이 흐르는 곳
잎사귀와 떨리는 꽃들이 속삭이는 지붕아래서
O Goddess! hear these tuneless numbers, wrung
By sweet enforcement and remembrance dear,
And pardon that thy secrets should be sung
Even into thine own soft-conched ear;
Surely I dreamt to-day; or did I see
The winged Psyche with awaken'd eyes?
I wander'd in a forest thoghtlessly.
And, on the sudden fainting surprise
Saw two fair creatures couched side by side
In deepest grass, beneath the whisp'ring roof
Of leaves and trembled blossoms; where there ran
A brooklet; scarce espied;(Ode to Psyche, 1-12)
키이츠의 "Ode to Psyche"는 1819년 그가 쓴 Odes 가운데 가장 먼저 쓰여진 작품이다. 그는 이 시에 Cupid와 Psyche의 사랑을 주제로 한 희랍 신화를 통해 자신이 갈망했던 사랑과 영혼을 발견하게 되어 이것을 묘사했으며, 또한 그의 애인 패니 브원(Fanny Bawne)과의 관계를 이 신화에 비유함으로써 자신의 감정을 독특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시는 키이츠 자신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Psyche 여신에게 기원(invocation)하며 자신의 시를 마침으로써 시작이 된다.
이 시는 시인 자신의 정신적 문제에 비추어 시적 역량을 제어해 본 작품으로, 정신적인 문제란 사랑의 고통에 따르는 보상의 문제이기도 하다. 즉, 정신은 현세를 누리는 행복에 대한 고난의 보상이며, 모든 고통을 이겨낸 결과의 산물이 행복인 것이다.
먼저 이 시 속의 인물 Psyche에 대한 희랍신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Cupid는 왕녀인 Psyche를 사모하여 밥마다 그녀를 찾아가지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도한 그는 자신의 모습을 보려고 애쓰지도 말라고 그녀에게 당부한다. 그러던 어느 날 Psyche를 시기한 그녀의 언니들이 너의 애인이 뱀이기 때문에 마침내는 너를 잡아먹을 것이라는 말을 전하자 두려워진 Psyche는 그날 밤 램프에 불을 밝혀들고 잠자고 있는 그를 바라보다가 그의 미모에 감탄하여 흥분한 나머지 뜨거운 기름 방울을 그의 한쪽 어깨에 떨어뜨리고 만다. 자신을 믿지 않은 Psyche에게 화가 난 Cupid가 그녀를 떠나버리자 그녀는 고독과 회환에 사무치게 된다. 그 날 이후 그녀는 Cupid를 찾아 세상을 헤매다가 그의 어머니인 Venus에 의해 고통을 겪게된다. 그녀를 측은히 여긴 Jupiter가 마침내 그녀를 불멸의 존재인 여신으로 만들어 Cupid와 재결합하도록 도와준다.
시인은 이러한 희랍신화를 통하여 시련과 고통 뒤에 얻게 되는 사랑의 완성의 의미를 무엇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Psyche라는 인간과 Cupid라는 신의 결합은 감각과 사고의 결합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일 수도 있고, 감성이 지성을 단련시키는 동시에 상상력을 발휘하여 얻게 된 결과로 볼 수도 있다. 이런 맥락에서 Psyche의 무수한 고난과 역경은 단순히 사랑의 성취를 넘어선 인간 영혼의 승리를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시인 자신이 희랍신화를 원용한 것은 Cupid와 Psyche의 사랑에 담긴 이야기를 통해 자신이 찾으려했던 사랑과 영혼을 발견했고, 당시 사랑에 빠져있던 자신과 패니 브론과의 관계를 이 신화에 비유시킴으로써 자신의 감정을 시에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이 시에서 고통과 시련에서 벗어나서 자신이 평소에 염원했던 삶에 대한 확신과 열정 그리고 위안을 얻을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바로 '미'라는 신념을 나타내고 있다.
그의 시 "Ode to Melancholy"에서 인간의 삶 속에는 우울과 고통, 기쁨과 미가 함께 밀착 내지 공존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아니, 아니, 망각의 강으로 가지 말고,
독주를 얻으려고 단단히 뿌리 박힌 바고 꽃을 비틀지 말아라.
또한 너의 창백한 이마에 입맞춰 마음의 상처를 입지 말아라.
프로스핀의 홍옥색 포도인 가만 송이로
너의 조목 열매의 염주로 하여금 또한 딱정벌레나
해골 나방이 슬퍼하는 프시케가 되지 말아라
또한 솜털 많은 올빼미가 네 슬픔의 비결에 동참자가 되지 않게 하여라.
왜냐하면 그림자가 그림자에게로 너무나 즐겁게 다가와서
영혼의 잠 깬 고뇌를 익사시킬 것이기에.
No, No, go not to Lethe, neither twist
Wolf's-bane, tight-rooted, for it's poisonous wine;
Nor suffer thy pale forhead to be kiss'd
By nightshade, rubygrape of proserpine;
Make not your sarary of yew-berries,
Not let the beetle, nor the death-moth be
Your mournful Pshcye, nor the downy owl
A parter in your Arrow's mysteries;
For shade to shade will come too drowsily,
And drown the wakeful anguish of the soul.
(Ode on Melancholy 1-10)
우울한 발작이 고개 숙인 온갖 꽃을 피우고
4월의 수의로 푸른 언덕을 감추는 눈물 솟는 구름처럼
하늘에서 갑자기 퍼부을 때
그 땐, 너의 슬픔을 표시하리라, 아침 장미에서
혹은 짠 모래 물결의 무지개에서
혹은 둥근 작약의 풍성함에서
혹은 그대의 연인이 숱한 성화를 내보인다면
그녀의 부드러운 손을 잡고, 그녀를 노호하게 하라.
그리고 깊디깊은 그녀의 비할 데 없는 눈을 삼켜라
But when the melancholy fit shall fall
sudden from heaven like a weeping cloud,
That fosters the green hill in an April shroud;
Then gult thy sorrow on a morning rose,
O on the rainbow of the salt sand-wave,
Or on the wealth of globed peonies;
Or if thy mistress some rich anger shows
Emprison her soft hand, and let her rave
And feed deep, deep upon her peerless eyes,(Ⅱ 1-10)
위의 시에서 키이츠는 우울의 발작을 소멸시키는 비를 내리는 구름과 고개 숙인 꽃들 그리고 소나기를 상징하는 4월의 수의의 이미지가 장례식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지만 마치 지쳐버린 꽃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신선한 새 생명을 가져다주는 듯한 효과를 나타낸다.
이러한 표현의 묘미는 T. S. Eliot의 "The Waste Land"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으며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April is the cruelest month, breeding
Lilacs out of the dead land, mixing
Memory and desire, stirring
Dull roots with spring rain. (The Waste Land, Ⅰ 1-4)
Eliot도 20세기가 물질 문명에 시들어 가는 정신문명이 봄비로 촉촉이 젖게 하며 새 생명을 부여해 줄 수 없을까 고심한 듯하다. 키이츠도 미와 함께 환희, 쾌락 등을 체험하는 동안에 그들이 곧 시간의 흐름과 함께 소멸되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시인은 인간 사회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공존하는 고통과 슬픔을 피하려 하지 않고 모든 것을 수용하거나 참괴함으로써, 결국 사물 속에 존재하는 미에서 삶의 위안과 기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키이츠의 미는 삶의 기쁨과 행복을 더해주고 있으며, 생에 대한 적극적인 사고를 하게끔 해 주는 구실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물 속에서 미를 발견하여 시로 옮겨 놓는 것이 시인의 의무이자 큼 기쁨이기도 한 것이다. 키이츠는 마지막 연에서 환희와 쾌락도 영속하는 것이 아니라고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그녀는 미와 함께 산다. 죽어야만 하는 미와 함께
그리고 작별할 때는 언제나 입에다 손을 대고 잇는 기쁨과 함께
꿀벌 입이 빨고 있는 동안에
독으로 변해지는 쓰라린 쾌락 가까이 에서
그렇다. 바로 그 환희의 신전에서 베일을 쓴
우울의 성단을 갖고 있다.
정열적인 혀로 기쁨의 포도를 그의 예민한 입천장에
터트릴 수 있는 사람을 제외하곤 그것을 볼 수가 없다.
그의 영혼은 그 힘의 슬픔을 맛 볼 것이고,
우울히 구름 낀 트로피 사이에 매달려 있게 된다.
she dwells with Beauty -Beauty that must die;
And joy; whose hand is ever at his lips
Aiding adieu; and aching pleasure nigh,
Turning to poison white the bee-mouth-sips;
though seen of none save him whose strenuous tongue
Can burst shall taste the sadness of her might,
And be among her cloudy trophies hung.(Ⅲ 1-10)
시인은 아름다움이나 환희, 기쁨은 모두 일시적 내지 순간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꿀벌의 입이 빨고 잇는 동안에 독으로 변해지는 쾌락 가까이 에서 언제나 기쁨은 왔다가 쉬이 가는 기쁨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움이나 쾌락은 맛보는 순간 독으로 변하며 고통과 슬픔을 느끼게 한다고 한다. 그래서 시인은 즐거움의 신전 속에서도 슬픔이 존재한다는 역설과 인간에게 위안과 즐거움을 주는 미도 순간적일 수밖에 없다는 매우 비극적인 묘사를 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키이츠가 이 시를 통해 보여준 역설을 비록 슬픔이 삶에 불가피한 것일지라도 그것이 인간에게 커다란 위안을 주는 선행조건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데 있다.
Ⅳ. Ode to a Grecian Urn and Others
이 시는 키이츠가 British Museum에서 본 희랍 항아리가 시의 소재가 되어 항아리 표면에 새겨진 그림을 시인의 상상력을 통해 형상화되어진 작품이다. 시인은 고대 희랍의 항아리에 새겨진 조각품에서 인간의 무한함을 절실히 느끼면서 상상의 날개를 타고 예술세계의 무한함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여기서 시인은 갈등과 모순의 현실세계를 벗어나 풍부한 상상력으로 인간 영혼의 세계에서 아름다움과 진리를 추구하는 영원세계를 묘사하고 있다.
이 Ode가 한 희랍 고병에 대한 상징적 행동이라 할지라도 그 본질적 주제는 지상과 천상, 빛과 암흑, 그리고 시간과 비시간적 영역의 합일 것이다. 또한 인간의 가변성 문제(사멸)와 불멸과의 본질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시인은 어떻게 하면 이러한 이원적 문제를 융합 내지 결합시켜 보다 더 좋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 곧 의무요 과제였던 것 같다.
이 시는 전시의 근원인 격렬한 대조의 계기를 제시한다. 즉 완전하고 불변하는 항아리와 그 항아리 표면에 조각된 동적인 행동과의 대조를 통해 전개해 나가고 있다.
이 시의 첫 stanza는 그리스 항아리의 표면에 그려진 그림의 묘사로부터 시작한다.
너 아직도 순결한 정숙의 신부여,
너 침묵과 느린 시간의 양자여,
우리들의 시보다 더 감미로운 꽃다운 이야기를
이처럼 표현할 수 있는 숲의 역사가여
템폐인가 혹은 아르카디아의 골짜기에 있는
신들 혹은 인간들, 혹 둘 다의
어떤 잎사귀로 가장자리 꾸며진 전설이
그대의 형체 주위에 떠도는가?
이들은 어떤 사람들, 어떤 신들인가?
어떤 처녀들이 수줍어하는 건가?
얼마나 미칠 듯한 추격인가?
도망치려고 얼마나 애쓰는가?
무슨 피리, 북들인가?
얼마나 미칠 듯한 황홀인가?
Thou still unravished bride of quietness,
Thou foster-child of silence and slow time,
Sylvan historian, who canst thus express.
A flowery tale more sweetly than our rhyme;
What leaf-fring'd legend haunds about thy shape
Of dieties or mortals, or of both
In Tempe or the dales of Arcady?
What men or gods are these?
What maidens loth?
What mad pursuit?
What struggle to escape?
What pipes and timbrels?
What wild ecstasy? (Ode on a Grecian Urn, 1-10)
키이츠는 갈망해왔던 삶과 피할 수 없이 다가오는 고통사이에 갈등을 잊기 위해 그리스 항아리를 통한 감정이입을 시도하고 있다. 특히 "정복되지 않는 신부"(unravished bride)로 의인화된 항아리는 비록 가변의 침묵과 느린 시간을 피할 수 없이 보내왔지만 아직도 신선하며 결백하고 흠 없이 존재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즉 오랜 세월을 지내왔지만 현실의 행동에는 영향을 받지 않았음을 암시하고 있다.
키이츠는 오랜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전원에 숨겨진 얘기를 재미있게 엮어 주는 사람, 즉 산림의 역사가(sylvan historian)로서 항아리의 표면 그림의 예술적 가치와 그 미의 영원성을 암시하고 있다. 이제 시인은 그 아름답고 섬세한 조각 속에 깃 들어 있는 전설의 영묘한 소리를 그르이 상상력을 통해 다음과 같이 느끼고 있다.
들리는 가락은 감미롭지만 들리자 않는 가락은 더욱 감미롭다.
그러니 부드러운 피리들아, 계속 불어라
육체의 귀에다 불지 말고, 더욱 정겹게 소리 없는 노래를
영혼에게 불어라.
나무 밑에 있는 아름다운 젊은이여, 그대의 노래가
그칠 수 없는 것이고, 저 나무들의 잎이 질 수 없으리라.
대담한 여인이여! 결코 그는 입맞출 없으리,
비록 목표 가까이 닿긴 해도
그러나 슬퍼하지 말아라.
비록 그대 행복 갖지 못해도
그녀는 시들지 않아 영원히 그대를 사랑할 것이며,
그녀는 아름다우리!
Heard melodies are sweet, but those unheard
Are sweeter; therefore, ye soft pipes, play on:
Not to the sensual ear, but, more endeared,
Pipe to the spirit ditties of no tone:
Fair youth, beneath the trees, thou canst not leave
Thy song, nor ever can those trees be bare;
Bold Lover, never, never canst thou kiss,
Though winning near the goal - yet, do not grieve;
She cannot fade, though thou hast not thy bliss,
Forever wilt thou love, and she be fair!(Ⅱ,1-10)
키이츠는 아무리 아름답고 감미로운 노래라 할지라도 그 노래를 부르는 자의 입에서 듣는 자의 귀에 전해지는 순간 사라져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실제로 듣지는 못하지만 조각품 속에 그려진 인물이 부르는 피리의 노래는 상상의 귓전에서 더욱 감미롭게 들리는 영원불멸의 노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가변적인 현실의 실제 음악은 소리와 함께 사라지지만 항아리에서 상상의 귓전에 밀려오는 감미로운 소리는 항상 들을 수 있으며, 이 소리는 부드럽고 고정 불변의 것이 된다. 또한 키이츠는 항아리에 새겨진 연인 등의 구애 행위를 통해서도 예술적 미의 영원성과 현실의 유한상을 대비시키고 있다. 이처럼 항아리에 묘사된 대담한 연인의 구애는 계속 될 것이며, 그의 애인은 언제까지나 사랑 받을 수는 없지만 영원히 아름다움을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영원한 아름다움을 지닌 애인은 항아리의 속성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현실세계에서는 아무리 미모의 연인이라도 세월이 흐르면 그 외적인 미는 차츰 퇴색, 소멸되어 간다. 이는 미라는 것이 순간적인 것이라는 의미를 시사하면서도 항아리에 새겨진 미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불멸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키이츠는 항아리에 그려진 피리 부는 연주자는 계속해서 푸르름과 새로움을 유지해야 할 것이고 또한 연인들의 젊음과 미는 영원불멸 할 것이며, 그들의 강렬한 사랑의 표현도 역사 속에서 시간의 변화에서 벗어나 소멸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아! 행복하고 행복한 가지들이여! 너의 잎새를 지게하지 못하고는
봄에 작별을 고할 수도 없으리라.
그리고 영원히 새로운 노래를 피리 부는
피로할 줄 모르는 연주자여!
보다 행복한 사랑이여, 보다 행복하고 행복한 사랑이여!
언제나 따사롭고, 변함없이 즐길 수 있고
영원히 허덕이는 영원한 젊음
몹시 슬픔에 잠기거나 쾌락으로 싫증난 가슴,
불타오르는 이마, 타오르는 혀를 남긴,
모든 살아있는 인간의 격정을 초월한 사랑이여!
Ah, happy, happy boughs! that cannot shed
Your leaves, nor ever bid the Spring adieu;
And happy melodist, unwearied,
Forever piping songs forever new;
More happy love! more happy, happy love!
Forever warm and still to be enjoyed,
Forever panting, and forever young;
All breathing human passion far above,
That leaves a heart high-sorrowful and cloyed,
A burning forehead, and a parching tongue.(Ⅲ 1-10)
키이츠는 항아리에 새겨진 그림에서 영원불멸의 정열과 미를 포착하여 위안과 행복을 느끼게 된다. 반면에 인간세계에는 서러움이 넘쳐흐르고, 쾌락으로 싫증난 가슴, 불타오르는 이마, 타오르는 혀는 현실세계에서의 삶이 무상함을 말하고 있지만, 감각적인 맛을 본 뒤에야 비애와 권태는 뒤따를 수 있는 것이다. 항아리에 새겨진 숨결은 인간의 정열을 능가하며, 연인의 사랑과 노래는 현실적인 감각의 맛을 즐길 수는 없지만 영원한 젊음, 미, 신선함을 가지고 있다고 키이츠는 강조한다. 이 같은 불변하는 예술의 미를 통해 위안과 기쁨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 시의 제 4 연은 상징의 확장으로 인해 함축적 이미지가 극치에 달했던 제 3연의 천상세계에서 오히려 현실세계로 되돌아오는 순환의 과정을 밟고 있다. 제 1, 2, 3연에서 볼 수 있었던 인간적인 열정과 욕망이 아닌 집단 생활과 종교의식 등 다른 모습을 비추면서 시인은 회의를 갖고 관조하고 있다. 희랍의 작은 마을 사람들이 신에게 제사 지내기 위해 마을을 떠났는데 항아리는 어느 마을의 어느 신의 제단인지를 밝히지 않고 있다.
제사 지내러 오는 이들은 누구인가?
어느 푸른 제단으로, 오, 신비로운 제사장이여,
그대는 하늘을 향해 우는 저 송아지를 데려갈 것인가,
비단 같은 허리를 화환으로 꾸미고서,
강이나 해변, 혹은 평화로운 성체가 있는
산 위에 어떤 작은 마을에 경건한 아침
사람들은 텅 비어 졌는가?
그리고 작은 마을이여, 네 거리들은 영원히 조용할 것이며,
어느 누구도 왜 네가 황폐하게 되었는지
말해주러 돌아올 수 없으리라.
Who are these coming to the sacrifice?
To what green altar, O mysterious priest,
Lead'st thou that heifer lowing at the skies,
And all her silken flanks with garlands drest?
What little town by river or sea shore,
Or mountain-built with peaceful citadel,
Is emptied of this folk, this pious morn?
And little town, thy streets fore ever more
Will silent be; and not a soul to tell.
Why thou art desolate, can e'er return. (Ⅳ, 1-10)
이 시에서는 항아리에 나타나는 공허한 마을을 결코 돌아올 수 없는 과거로 상징하는데, 삶들은 숲의 역사가가 말해주는 영원한 과제로 보고 있다.
이 사람들이 가고 있는 도착지는 어딘지 모른다. 다만 가는 행렬만 계속될 뿐이다. 여기서 예술세계에 구현된 이 푸른 제단은 결코 도달하지 못할 미래의 세계를 상징한다. 다만 시인은 적막한 마을을 보여주며 우수에 잠긴 체 명상한다.
딕스테인은 키이츠와 같이 진리를 향해 조용하게 명상하며 관조하는 시인을 "시인은 항상 항아리의 관찰자요, 신화의 창조자요, 또한 명상을 할 때에는 선천적인 성실성을 보존한다"고 말하고 있다.(Morris Dickstein, p. 222)
또한 이점에 대해 부쉬도 키이츠의 명상을 "시에서 가장 아름다운 묘사이며, 최고의 성취"라고 격찬하고 있다.(Douglas Bush, p.140)
또한 키이츠는 상상 속에서 지금까지 위안과 기쁨이 되어 주었던 그리스 항아리를 현실에서 바라보게 된다. 그리하여 시인은 자신의 서글픔을 토로하게 되고, 동시에 항아리에 새겨진 연인들은 대리석에 불과함을 깨닫게 된다.
오, 오타카의 형상이여! 아름다운 자태여!
대리석에 남녀 모습과 숲의 나뭇가지와
짓밟힌 잡초를 온통 수놓은;
너 말없는 형상이여, 영원과 같이 생각이 미치지 못하게 하여
우리를 애타게 하는구나, 차가운 목가여!
가는 세월이 이 세대를 황폐하게 할 때
너는 우리의 슬픔이 아닌 다른 슬픔의 한복판에서
인간의 친구로 남아 이렇게 말하리라,
"미는 진리요, 진리는 '미'다 라고, 이것이 너희가 이 지상에서
아는 전부요, 알 필요 있는 전부이다.
O Attic shape! Fair attitude! with brede
Of marble men and maidens overwrought,
With forest branches and the trodden weed;
Thou, silent form, dost tease us out of thought
As doth eternity; Cold Pastoral!
When old age shall this generation waste,
Thou shalt remain, in midst of other woe
Than ours, a friend to man, to whom thou say'st,
"Beauty is truth, truth beauty," - that is all
Ye know on earth, and all ye need to know.(Ⅴ, 1-10)
키이츠는 지금까지 상상 속에서 위안과 기쁨을 주었던 그리스 항아리를 오, 오타카의 항아리여! 아름다운 자태여(O Attic shape! Fair attitude!)라고 외치면서 현실세계에 눈뜨게 된다. 그리고 시인의 차가운 목가라는 역설적인 표현을 통해 시의 분위기는 절정에 달하게 된다. 이 차가운 대리석에 새겨진 항아리의 그림은 어디까지나 예술품이면서 차가운 목가인 것이다. 그러므로 실제로 우리가 느낄 수는 없지만, 대리석의 그림은 영원 불변의 것으로 오히려 우리에게 따뜻함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키이츠는 그리스 항아리에게 흐르는 세월을 무의미하여 늙지 않고, 현실세계에서 언제나 위안과 기쁨을 주는 인간의 친구(A friend of Man 1:48)로서의 항아리로 존재한다고 보고 있다. 또한 키이츠는 이 항아리의 영원한 젊음, 신선함, 미 등이 변하지 않고 남아서, 그 항아리를 생각할 때마다 고통, 슬픔 등으로 가득 찬 현실세계를 직면하게 해 준다고 보았다. 이 점에 대해 샤프는 "예술은 인간의 삶과 기쁨이 무상하다는 데에서 찬조되는 것이며, 인간이 그 예술을 필요로 하는 것도 바로 이 무상함 때문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다.(Sharp, p.118) 이 말은 키이츠의 예술적 관조와 현실세계와의 관계를 적절히 지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브룩스도 "Ode to a Grecian Urn"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Ode 자체는 '아름다운 진리'라는 것을 항아리가 말하고 있지만 어느 정도 금언과도 같은 이 진술은 지혜의 파편이 인간적인 지식의 전말을 총괄한다는 더욱 금언적인 진술에서 절정을 이룸으로써 다른 송가들과 구분된다는 것이 더욱 눈여겨볼 일이다."라고 말했다 (Cleanth Brooks, p.151)
키이츠는 희랍 항아리에 그려진 오색창연한 아름다움을 흐트리지 않고 간직한 예술적 가치란 것은 영원한 현재의 진리임을 깨닫게 된다. 이 예술품 즉 희랍 항아리를 바로 인생의 한 모형의 이미지로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바로 시간의 초월로 인해 영원성을 갖게 됨이다. 따라서 멸하는 세계 속에서 영원한 것은 '미' 밖에 없다고 생각한 시인은 이것이 현세를 사는 인간에게 위안과 기쁨을 줄 수 있다고 보았다.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빈곤과 질병 등으로 괴로운 나날을 보내야 했던 키이츠는 "Ode to Nightingale'이라는 시의 날개를 타고 충동에 따라 현실적인 상상의 세계를 거쳐 공상에 이르러서는 현실을 망각하고, 몽상세계에서 욕망의 대상에 동화되어 결국에는 예술적 세계를 창조해 내기를 바라고 있었다.
내 마음 아리고 졸리어 마비가 내 감각마저 짓누른다.
마치 얼마 전 독 당근을 마셨거나 혹은 어떤 감각을 둔하게
하는 아편 찌꺼기를 마셔 망각의 강 쪽으로 침몰하는 것처럼,
그건 너의 신세가 부러워서가 아니라
네가 너무 행복하기 때문에
가벼운 날개를 가진 나무의 정령인
너는 푸른 너도밤나무 어느 선율의 장소에서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그늘에서
마음놓고 목청 높여 여름을 노래하기에.
My heart aches, and a drowsy numbness pains
My sense, as though of hemlock I had drunk,
Or emptied some dull opiate to the drains
One minute past, and Lethe-wards had sunk:
'Tis not through envy of thy happy lot,
But being too happy in thy happiness,---
That thou, light-winged Dryad of the trees,
In some melodious plot
Of beechen green, and shadows numberless,
Singest of summer in full-throated ease.
시인은 현실의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 이제 나이팅게일의 노래 소리를 듣는다. 이 노래 소리가 너무나도 아름답게 들려서 마치 독약이나 아편을 마신 것처럼 감각을 마비시키고 졸음이 오게 한다. 이 새의 노래를 시인이 듣고서 새를 부러워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행복을 부러워하게 한다.
키이츠의 친구 찰스 브라운에 의하면 이 시는 Hampstead에 있는 자신의 집 정원에서 두 세 시간만에 쓰여진 것이라고 한다. 1819년 봄, 나이팅게일 한 마리가 내 집 근처에 둥지를 틀었다. 키이츠는 평온함을 느꼈고 새의 노랫소리에 즐거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식사를 하다 말고 오얏나무 밑에 있는 잔디밭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두 세 시간 앉았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 때 그의 손에는 종이 몇 장이 쥐어져 있었는데 이것은 그가 책이 아닌 다른 곳에 조용히 목마름을 토해 놓은 것이었다.(Cedric Watts, p.127)
결국 키이츠는 자신이 고통에 찬 현실세계를 벗어나려고 갈망하다가, 새의 기쁨에 넘치는 노랫소리를 듣고 행복에 겨워 상상 속으로 도취되어 간다. 그는 이 노랫소리에 강렬한 기쁨을 느끼고 이것이 더욱 커져 가슴마저 아파 오는 감각은 독을 마신 듯 졸리운 마비 상태에까지 이른다. Pettet에 의하면 키이츠의 모든 시 가운데 가장 풍성하게 표현한 시(the most richly representative of all Keats's poems)라고 할 정도의 평가를 받을 만한 시라고 한다. (E.C.Pettet, p.251)
제 2연에서는 나이팅게일의 노래에 본능적으로 이끌려 새의 행복에 동참하고자 술의 힘을 빌려 만취해 보기도 한다. 이처럼 자신을 망각하고 보이지 않는 세계로 새와 함께 사라지기를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That I might drink, /And I leave the world unseen;/ And with thee fade away into the forest dim./)
이처럼 시인이 나이팅게일의 세계로 들어가려는 시도는 마음의 불안정 상태를 아무도 보이지 않는 숲 속으로 들어가 이 세상의 고통과 괴로움을 잊고 싶어하는 마음이 앞섰기 때문에 이루어졌다. 키이츠는 계속해서 시의 날개를 타고서 시의 세계에 빠져들어 황홀경에 도달함으로써 불멸의 세계에서 아름다움과 위안을 찾고자 했던 것이다.
나는 볼 수 없다. 무슨 꽃이 내 발 밑에 있는지.
또한 어떤 싱그러운 향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지.
하지만 향기로운 어둠 속에서 상상해 본다.
-------------- 중략 -----------------
그리고 5월 중순의 맏아들인
이슬로 가득한 포도주, 여름 저녁 날벌레들이
모여드는 곳, 피어나는 사향 장미를
I cannot see what flowers are at my feet,
Nor what soft incense hangs upon the boughs,
But, in embalmed darkness, guess each sweet
-------------- 중략 -----------------
And mid-May's eldest child,
The coming musk-rose, full of dewy wine,
The murmurous haunt of flies on summer eves.
(Ode to Nightingale, Ⅴ,1-10)
시인은 숲 속에서 나이팅게일과 함께 자연에 동화되어 어둠 속에서도 계속 비현실적인 세계를 묘사하고 있다. 이처럼 시적 상상력의 세계에 도취되어 있던 시인은 1연에서 불현듯 황홀경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욕망의 대상과 함께 평온한 상태에 치닫는다. 이때 나이팅게일은 불멸의 새로 남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내 고요한 숨결을 대기에 날려 달라고,
한밤중에 아무 고통 없이 숨을 거두는 것이
네가 이 영혼을 이렇게 황홀히 밖으로 내 쏟는 동안에도
나는 계속 노래하리라. 하지만 나는 듣지 못하리,
너의 드높은 진혼곡 속에서 나는 한 줌의 흙이 되리라.
To take into the air my quiet breath;
Now more than ever seems it rich to die,
To cease upon the midnight with no pain,
While thou art pouring forth thy soul abroad
In such an ecstasy!
Still wouldst thou sing, and I have ears in vain---
To thy high requiem become a sod.(Ⅵ, 4-10)
여기서 죽음은 절정의 순간뿐만 아니라 어떤 대상과의 결합을 영속화시키는 수단을 의미한다. 즉 나이팅게일이 황홀경의 순간에 영혼을 내 쏟듯이 울고 있는 동안에 바라는 것은 고통의 극복과 강렬한 기쁨을 영속적으로 간직하는 것이다.
시인은 나이팅게일에게 "그대는 계속 노래하지만 나는 듣지 못하리, 너의 드높은 진혼곡 속에서 한줌 흙이 되리라"라고 말한다. 여기서 시인과 나이팅게일은 완전히 분리되어져 죽음이 새의 노래와 같은 황홀함이라고 생각했던 시인은 이제 죽음이 모든 것과의 이별임을 깨닫게 된다. 시인은 죽음이란 인식을 통해 인간의 유한성을 자각하게 되며, 반면 나이팅게일은 완전히 불멸의 새로 인식되어진다.
나는 죽음을 위해 태어나지도 않았다. 영원 불멸의 새여!
어떤 굶주림도 너를 마구 짓밟지 못한다.
이 덧없는 밤에 내가 듣는 이 노래를
옛날의 제왕도 광대도 들었다.
아마도 루트가 향수에 젖어 가슴 쓰려지고
낯선 나라의 밀밭 사이오 눈물 젖어 서 있을 때,
그녀의 슬픈 가슴에 흘러 오솔길 따라 가던 노래,
험한 바다 물거품 위에 열려 있는 마술의 창문
자주 요술 걸었던 그 노래이어라.
Thou wast not born for death, immortal Bird!
No hungry generations tread thee down;
The voice I hear this passing night was heard
In ancient days by emperor and clown:
Perhaps the self-same song that found a path
Through the sad heart of Ruth, when, sick for home,
She stood in tears amid the alien corn;
The same that oft-times hath
Charmed magic casements, opening on the foam
Of perilous seas, in faery lands forlorn.(Ⅶ, 1-10)
키이츠는 자신을 고통스런 현실세계로부터 벗어나 행복과 아름다움으로 가득 찬 상상의 세계를 체험하게 해 주었던 나이팅게일의 노래가 고대의 황제와 광대 뿐 아니라 Ruth에게도 위안과 기쁨의 노래였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나이팅게일의 노래는 인간이 살 수 없는 쓸쓸한 요정의 나라에서도 위안과 기쁨의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그러나 시인은 '쓸쓸한'이라는 말을 통해 그가 상상의 세계에서 점차 현실세계로 돌아오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키이츠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나이팅게일의 노래를 통해 미의 불멸성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 Trilling도 "먼 옛날의 나이팅게일 노래에 기쁨과 위안을 얻었던 사람들이 등장하여 나이팅게일의 영원성과 현실 세계의 무상함을 포괄적으로 대조시키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Lionel Trilling, p.85)
다음은 나이팅게일의 노래가 점차 사라지자 시인은 꿈에서 깨어난 듯한 착각을 일으키며 그것이 환상인지 아니면 깨어 있던 꿈인지를 또한 음악은 사라졌는데 나는 깨어 있는가, 아니면 잠자는가? 하고 반문한다.
잘 가거라, 잘 가거라! 너의 구슬픈 노랫가락은 시들어 간다.
가까운 목장 옆을 지나 잔잔한 시냇물 너머
언덕 위로, 그리고 지금은 깊이 묻혀 있다
다른 골짜기 숲 속 깊숙이
그것이 환상이었던가 아니면 깨어 있는 꿈이었던가?
사라졌네 음악은; 나는 깨었는가, 아니면 잠자는가?
Adieu! the fancy cannot cheat so well
As she is famed to do, deceiving elf.
Adieu! adieu! thy plaintive anthem fades
Past the near meadows, over the still stream,
Up the hill-side; and now 'tis buried deep
In the next valley-glades:
Was it a vision, or a waking dream?
Fled is that music:---do I wake or sleep?(Ⅷ, 5-10)
위의 시에서 시인은 애매 모호한 태도를 보이기도 하지만 최소한 깨어 있는 꿈(a waking dream)은 이 시의 전체적인 순환을 가장 함축성 있게 보여 주고 있다. 시인은 현실과 환상의 세계에서 나이팅게일의 노래를 불멸의 상징물로 이끌어 냄으로써 변화와 쇠퇴를 초월하는 영원성을 위한 여백을 남겨놓고 있다. 마지막으로 "To Autumn"은 키이츠가 London으로부터 Winchester로 온지 얼마 안된 9월에 쓰여진 시로 그의 Ode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Bloom도 "To Autumn"은 키이츠의 언어로 된 단시 중 그 정교함과 아름다움이 이처럼 완벽에 가까운 시가 없었다"고 격찬하였다. (Herold Bloom(1971), p.422) 또한 Mayhead도 "To Autumn"을 키이츠의 최상의 승리라고 격찬하였다.(Robin Mayhead(1967), p.95) 이것은 세 stanza로 구성된 비교적 짧은 시로 키이츠 자신이 이 시를 쓸 당시 거의 매일 식사 전에 혼자 산보했다고 한다. 한달 전 만해도 키이츠가 산보 다니던 길에서 누렇게 익어가던 밀밭이 이젠 추수가 끝나버려 텅 빈 들판을 거닐다가 평화로운 마을 전경 속에서 자신의 심경이 동요되어 이 시를 쓰게되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첫 stanza에는 풍요와 성숙, 고요의 촉감적 이미지를 잘 조화시켜 가을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해내고 있다.
안개와 무르익은 결실의 계절
성숙하는 태양의 정다운 친구여;
태양과 공모하여 초가집 처마를 휘감은 포도 덩굴에
열매로 짐 지우고 축복하고;
이끼 낀 시골집 나무를 사과들로 휘어지게 하고
모든 과일들을 속속 익게 하고
늦게 피는 꽃들은 꿀벌을 위해 더욱 더 피게 하여
꿀벌들이 따뜻한 날이 끝날 수 없다고 생각할 때까지,
여름이 끈적끈적한 벌집들을 넘쳐흐르게 하기에,
Season of mists and mellow fruitfulness,
Close bosom-friend of the maturing sun;
Conspiring with him how to load and bless
With fruit the vines that round the thatch-eves run;
To bend with apples the moss’d cottage-trees,
And fill all fruit with ripeness to the core;
To swell the gourd, and plump the hazel shells
With a sweet kernel; to set budding more,
And still more, later flowers for the bees,
Until they think warm days will never cease,
For Summer has o’er-brimm’d their clammy cells.
(To Autumn, 1-11)
키이츠는 이 시에서 자연의 끊임없는 변화에는 본질적으로 변화하지 않는 영원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여기서 영원성이란 인간 내지 자연 만물의 생명,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죽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죽음은 곧 새로운 삶을 의미하는 영원의 순환으로 이어진다. 즉 키이츠는 만물의 생성과 소멸이 우주의 리듬으로 보고 인간의 유한성을 긍정적으로 극복하고자 한 것이다. 이 점에 대해 월도프도 "상상력과 자연의 내적 비전, 외적 현실의 통합의 과정을 가장 잘 나타낸 작품"이라고 호평하고 있다.(Waldoff, p.159)
제 2연에서는 고요하고 풍요로운 가을 경치에 영원한 생명을 부여해 주고 있다. 여성화되어진 늦가을은 창고 안에서나 창고 바닥에 무심히 앉아 있고, 머리카락 흩날리며 이랑 사이에 깊이 잠들기도 한다. 또한 사이더 압착기에서 나오는 마지막 즙을 끈기 있게 바라보기도 한다. 이것은 생명의 순환이 이제 종말에 치닫고 있음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누가 너의 수확물 속에서 너를 자주 보지 못했던가?
때로는 찾는 사람을 집밖에서 다 보았으리.
곡물 창고에 태평스럽게 앉아
이삭 날리는 바람에 머리카락 부드럽게 흩날리는 너를;
아니면 낫이 다음 벨 줄과 뒤엉킨 꽃들을
아껴두는 동안 양귀비 꽃 향기에 졸음이 와
반쯤 벤 이랑에서 깊이 잡든 너는,
무거운 머리를 개울 너머로 향하고 있다.
혹은 사과 압착기 옆에서 참을성 있는 표정을
마지막 방울을 몇 시간 동안 바라보고 있다.
Who hath not seen thee oft amid thy store?
Sometimes whoever seeks abroad may find
Thee sitting careless on a granary floor,
Thy hair soft-lifted by the winnowing wind;
Or on a half-reap’d furrow sound asleep,
Drows’d with the fume of poppies, while thy hook
Spares the next swath and all its twined flowers:
And sometimes like a gleaner thou dost keep
Steady thy laden head across a brook;
Or by a cyder-press, with patient look,
Thou watchest the last oozings hours by hours.(Ⅱ, 1-11)
이처럼 가을은 성장과 결실을 모두 마친 평화로움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동시에 추수하는 사람은 마지막 즙의 이미지에서 볼 수 있듯이 죽음으로 한 발작 더 다가선다. 결국 추수란 이미지는 곡물창고에서 나타나는 생명의 이미지와 마지막 즙에서의 죽음의 이미지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의 품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결실을 맺으면 가을이란 추수꾼이 그 순환을 마무리 짓게 된다. 이제 가을에서 겨울로의 변화에서는 조용한 움직임과 졸음을 느끼게 된다. 즉 가을은 추수하는 자인 동시에 생명의 보전자이며 나아가 죽음과 삶을 모두 함축하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제 3연은 겨울로의 문턱에 선 가을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삶과 죽음의 노래이자 정지와 흐름, 여과 겨울의 노래이기도하다. 여기서 키이츠는 시간의 경과에 따라 생성, 소멸 거대한 유기적 변화를 주고 있다. 이는 계절적 변화뿐만 아니라 인생의 변화를 모두 수용하는 것이다. 특히 스쳐 가는 계절과 덧없는 인간 삶이 병행을 이루어 춥고 황량한 계절인 겨울은 신선한 봄에게 자리를 내어 주게 될 것임을 예상하게 한다.
봄 노래는 어디에 있는가! 어디에 있는가?
생각치 마라 봄 노래를, 너는 너의 노래를 갖고 있으니,
줄무늬 구름이 조용히 사라져 가는 날을 꽃 피우고
그루터기 들판을 장미 빛으로 물들이며,
그때 슬프게 합창하던 작은 악다귀들이
강가 버드나무 사이에서 슬픈 노래를 부른다.
Where are the songs of Spring? Ay, where are they?
Think not of them, thou hast thy music too,?
While barred clouds bloom the soft-dying day,
And touch the stubble plains with rosy hue;
Then in a wailful choir the small gnats mourn
Among the river sallows, (Ⅲ, 1-6)
여기서 생과 사, 성장과 쇠퇴, 출발과 머무름, 그리고 여름과 겨울의 음악이기도 한 가을의 노래를 듣게 된다. 추수 광경을 조용한 정지 상태의 아름다움으로 묘사함으로써 가을의 충만함을 영원토록 보존되기를 갈망하고 있다. 이 시의 첫째, 둘째 연에서 성장과 정지를 시각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마지막 연에서는 지나간 성장과 결실의 계절에 대한 최상의 분위기를 출발과 쇠퇴의 청각적 이미지를 나타내고 있다. 키이츠의 이 노래들은 인간 삶에 아주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풍성한 가을에 나타난 하루살이 떼, 양, 여치, 방울새, 제비 등은 이제 가을 하늘의 풍성함에 떠나 만남을 약속이라도 하듯이 서로 말을 주고받는다. 이 모두가 변화를 순환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필연적인 자연의 질서로 인식하고 다음에 다가올 미래의 삶을 인정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시인은 "To Autumn"에서 사라짐이 곧 영원한 죽음을 알리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고 사멸의 음악 속에서 삶을 직시하게 된다. 키이츠는 자신의 시적 사고를 통해 자연의 객관적 조화 속에 놓인 인간 삶을 순순히 수용하고 있다. 즉 시인은 자신의 상상력을 통해 외적 사물에서 느낄 수 있었던 영원한 미를 인간 삶에 적용시킴으로써 보다 안이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를 갈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Ⅴ. 결 론
키이츠는 짧은 일생 동안에 자신이 경험한 내적 갈등과 외적 고통에 의해 이 세상을 회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형이상학적 사살이나 종교가 인간 세계의 문제점들을 해결 해 줄 수는 없다고 판단하고, 어떻게 하면 고독으로 가득 찬 인간 세상에 희망과 용기를 줄 것인가를 고심하였다. 그 결과 키이츠는 상상력을 통해 사물 속의 미를 발견하여 이것을 시속에 담음으로써 인간에게 위안과 기쁨을 전해 줄 수 있다고 결론 내리게 되었다. 이것은 시를 창조해 내는 과정에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몽상 세계로 비상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시 창작이 현실을 이탈하여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키이츠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느 것 하나도 변하지 않는 것이 없고 모두 변화하거나 사멸하여 본래 상태를 지속시키지 못한다는 자연적 진리를 깨닫게 된다. 즉 불교에서 인간이 생로병사의 과정을 겪는 것과 같은 법칙이다. 그래서 시인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만물이 유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시를 통해 영원한 아름다움을 뵤사, 강조하고자 한다. 이는 시인이 영원한 미라는 것을 주제로 선택하여 자신은 잠시 살아가다가 죽지만 자신이 발견한 미는 영원히 아름다움으로 남아 있기를 기원하고 있는 것이다. 즉 현실에 주어진 모든 것은 시간 앞에서 영원히 계속 될 수 없고 다만 '미'만이 영원히 이어질 수 있으며 이 '미'는 진리와 동일시되어지고 있다.
시인은 "Ode to Psyche"에서 과거 신화적 세계에 존재하는 Psyche의 사람을 포착하여 고통에 따른 보상 문제를 체계화시킨다. 여기서는 현재의 온갖 고통과 역경을 감내한 연후에 오는 행복감이 더욱 값지고 보람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 인생의 참된 의미를 조명해 주기도 한다. 또한 "To Autumn"에서 시인은 인생 무상과 앞으로 전개될 '멸'을 엄숙히 받아들여 대자연의 질서로 영속화 되어가고 있다. 그는 가을의 음악에서 겨울의 죽음과 봄의 탄생과 같은 대우주의 조화, 순환을 들을 수 있다. 이러한 자연을 수용하는 자세에서 대자연의 순환법칙의 당위성을 재확인하기도 한다.
시인은 "Ode to a Grecian Urn"에서 현재의 진리뿐만 아니라 예술의 무한성을 깨닫게 된다. 즉 항아리 표면에 그려진 그림의 예술성이 영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미' 밖에 없음을 진리로 인정하고, 현실에서 벗어나 모든 괴로움을 털어 버리고자 한다. 또한 키이츠는 "Ode to Melancholy"에서 자연의 미와 감각미를 강렬하게 느끼게 되는데 이는 우울증 치료를 위한 수단으로 자연을 이용하였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 시에서 잠깬 영혼의 훈련, 즉 속세의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기 위한 여러 가지 마음의 훈련을 통해서 현실을 영광되게 하는 생명의 시로 삶을 재확인하도록 하며 보다 나는 삶의 발판이 되도록 해 준다. 그리하여 슬픔과 기쁨이 서로 통하도록 하며, 인생의 역경이 삶의 한 부분임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Ode to Nightingale'에서 시인은 자연물을 통해 상상의 날개를 펼쳐 무한한 인간 영혼의 세계로 몰입해 들어간다. 즉 현실의 고통과 자아의식으로부터 도피하려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지만 이는 다시 현실과 환상의 침잠 속에서 새의 노래를 불멸의 상징으로 드러나게 한다. 여기서 진정한 미는 변화와 쇠퇴를 초월한 인간의 마음을 위로하는 벗임을 말하고자 한다. 결과적으로 키이츠의 Five Odes는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오직 사물을 통한 상상력에 의해 포착되는 불변의 미를 영속적으로 승화시키는데 그 초점이 놓인다. 시인은 이 미를 생의 원리이며 목적으로 여기고 추구하면서 마치 새로운 종교처럼 신봉했다. 이처럼 키이츠는 이 시를 매개체로 삼아 인간에게 미를 전달함으로써 고통스럽고 무상한 현실에서의 삶에 위안과 기쁨, 행복을 안겨 주고 삶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갖도록 해 주고자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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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roughout his short lifetime, Keats had a sceptical view of this world due to his mental conflict with reality. He didn't think metaphysical thoughts or religious ideas could solve all of life's problems. He thought over how he could give hope and courage to a life filled with loneliness. He came to the conclusion that he could do so by showing how, with imagination, we can find beauty in all things. He had a great ability to express this in his poems. He realized the natural law of things that nothing can remain unchained and everything will eventually perish. Beauty is transient. We ourselves are subject to this law, and will inevitably experience the life cycle. As told in Buddhism, we will eventually get old, get sick, and die. He emphasized immortality in the mortal world by discovering immortal beauty. According to Keats, nothing can be everlasting, but beauty will remain forever; he identified truth with beauty. He had systemized the problems of compensation resulting from pain since he understood the Psyche's love which existed in the past mythical world. Here we can notice that his poems illuminate the true value of life, for they contain the meaning of life, that happiness after difficulty is much more rewarding.
In "Ode to a Grecian Urn," he came to realize the limitless nature of art and the truth of the present. That is, he saw the truth in the picture painted on the Urn. Only the beauty depicted in this picture could be everlasting through the limitless nature of the art form. The sense of art is a desire to be freed from reality. In "Ode to Melancholy," he shows that we come to forget happiness, beauty, and pleasure as we feel the beauty of nature and beauty of sense for the treatment of melancholy. He intends his poems to be a stepping stone to a good life as he re-identifies life with the poems of life to make reality glorious. Through his works he shows various mental practices to overcome the pain and hardship in the present. Therefore, through his sorrow and happiness, he comes to acknowledge and accept that hardship is just a natural part of
life.
In "Ode to a Nightingale," through nature, he gets absorbed in the world of endless human soul on the wings of imagination. That is, he has a strong tendency to escape from the ruthless pain and self-consciousness of reality, but leads the birds' song to the symbol of immortality in the tranquility of reality and illusion. Accordingly, he puts emphasis on the fact that true beauty is a true friend to console the human mind beyond the change and declination. In conclusion, the main point of the five Odes is that while human beings are living in the present, the immortal beauty taken from the imagination is the only thing that represents life as immortality. He believes this kind of beauty to be the principle of life or the goal. Keats gives human being consolation, pleasure, and an escape from reality by delivering the truth, beauty. In addition, he wants to give life mean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