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 토니오와 그의 친구 한스 한젠(Hans Hansen)에 관한 이야기로 출발하는 이 작품의 첫장을 살펴보면 우선 둘 다 유복한 가정의 아들로서, 한스는 수영, 승마, 조각들을 좋아하 며, 좋은 체격에 잘 생긴 얼굴과 금발머리, 파란 눈을 그리고 토니오는 시를 쓰며 바이올린 을 키는, 남국적인 갈색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감상적인 소녀같은 소년으로 묘 사되어 있어 서로가 무척 대조적이다. 전형적인 독일이름인 한스에 비해 무척 이색적인 이 름을 가진 14살의 토니오는 우선 한스가 잘 생겼기 때문에 그리고 그 다음으로 모든 면에서 자신과 대립되기 때문에 그를 사랑한다."
한스와 산책을 하기로 약속한 토니오는 수업이 끝난후 교문 앞에서 한스를 기다린다. 그러 나 한스는 약속을 잊어버리고 다른 친구들과 다른 곳으로 가려다 토니오를 만난다. 토니오 는 심적으로 약간의 상처를 받지만, 이미 집으로 간줄 알았다는 등의 이유를 변명삼아 늘 어놓으면서 자신의 건망증을 후회하며 화해하려는 한스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풀어진다. 일단 화해를 거부할 의사가 전혀 없었던 토니오는 함께 바닷가의 둑을 따라 산책을 한다. 토니오는 여러 가지 상념에 사로잡힌다. 중요한 점은 토니오가 한스를 좋아한다는 것과 그 로 인해 많은 고민을 함으로써 '사랑이 절실한 쪽이 복종하게 되며 따라서 고통을 감내할 수밖에 없다'는 진리를 이미 터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산책중에 토니오는 자신이 읽은 쉴러(프리드리히 쉴러 Friedrich Schiller)의 작품 『돈 카를 로스』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며 한번 읽어보기를 권한다.
"하지만 왕이 왜 울었는지 잘 이해할 수 있어. 그리고 난 왕이 왕자와 후작을 합친 것보다 도 더 불쌍하게 여겨져. 그는 항상 그렇게 혼자이고 사랑도 받지 못해. 그가 이제야 한 사람 을 발견했다고 믿었는데 그 사람은 배반하고..."
크뢰거는 자신의 애정과 동경의 대상인 한스가 『돈 카를로스』를 읽음으로써 왕의 고독과 흡사한 자신의 마음을 이해해주기를 바라지만 한스는 돈 카를로스에 나오는 왕의 눈물 따위 에는 관심이 없다. 오히려 함께 승마수업을 받는 임머탈(Jimmerthal)과 승마에 관한 이야기 를 신나게 해대는 한스의 태도는 그의 마음을 우울하게 만들지만 산책이 끝난 뒤 한스의 집 앞에서 헤어질 때 돈 카를로스를 읽어보겠다고 한 한스의 말에 그는 다소 명랑한 기분이 되 어 집으로 돌아오지만 한스의 말을 전적으로 믿지는 않는다. 더구나 돈 카를로스의 눈물에 관해 진지하게 설명하고 있는 토니오의 얼굴을 옆에서 바라보던 한스가 갑자기 팔짱을 끼면 서 왕이 어떤 식으로 배반을 당하였는가를 물어오면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막 그 질문 에 답을 하려는 바로 그 순간에 하필이면 임머탈이 나타나 오붓한 둘만의 산책이 방해를 받 았다는 점에 대해서 몹시 마음이 상해 있었다.
한편으로는 한스의 우정과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마음속의 다른 한편으로는 또 이렇게 스스 로에게 확인한다. "행복이라는 것은 사랑받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메스꺼움이 혼합된 허영 심의 만족이다. 행복은 사랑하는 것이며 아마도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기만적인 작은 접근 의 포착일 것이다.
토니오의 마음은 이렇듯 단순하지가 않다. 가끔씩 '머리를 옆으로 갸우뚱한 채 먼곳을 바라 보곤 하는 '약간 이국적이고 특이한'(etwas Ausländisches und Besonderes) 그는 홀로 명상 에 잠기기를 좋아하며 주위의 사람들과 원만한 사회생활을 하기에는 너무나 다치기 쉬운 센 시티브한 소년이라 어떻게 보면 '연약한 여인' 같은 '생활능력이 결여된 심미주의자로 해석 될 수 있다.
그는 자주 이렇게 생각한다. "왜 나는 이렇게 유별나고 무엇에나 갈등을 느끼며, 선생들과 원만하지도 못하며 다른 아이들과의 관계도 소원한가? 다른 애들을 봐라. 착한 학생들 그리 고 견실한 중도자들을. 그들은 선생님들을 우습게 여기지도 않으며, 시를 쓰지도 않으며 큰 소리로 입밖에 내놓을 수 있는 것만 생각한다. (....) 그런데 나는 어떤가, 이 모든 것이 앞 으로 나에게 어떻게 결말지워질 것인가?"
이렇게 1장에서는 한스에 대한 동성애로서의 우정이 2장에서는, 토니오의 첫사랑이자 짝사 랑이라고 할 수 있는 푸른 눈과 금발머리 잉에(Ingeborg Holm)와의 만남이 주를 이룬다. 16살이 된 토니오는 어느 날 밤 여러 다른 소녀들 가운데서 쾌활하게 웃으며 이야기하는 잉 에의 모습에 반해 2년전 한스를 볼 때 느끼던 감동 이상으로 강렬한 애정을 느낀다. 후스테 에데(Husteede) 영사부인의 살롱에서 가진 상류층 아이들을 위한 비공개 댄스 및 예절강습 시간에 토니오는 잉에에게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지만 잉에는 그에게 전혀 무관심이다. 반면 에 까많게 빛나는 눈의 막달레나(Magdalena Vermehren)는 춤을 출 때 잘 넘어지는 진지한 꿈많은 소녀로서 토니오가 시를 쓴다는 것을 알고 두 번이나 시를 보여주기를 청한다. 가끔씩 먼발치서 고개를 숙여 토니오를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은 안중에 없는 토니오는 줄곧 푸른 눈의 금발머리 잉에에게만 정신이 쏠려있다. 단지 잉에 곁에 있고 싶다는 생각에 열중 한 나머지 물리네(Moulinet) 춤을 추는 도중에 그만 정신을 잃고 소녀들 속으로 합류하는 실수를 함으로써 발레교사인 크나아크(Knaak)로부터 조롱을 당한다. 토니오의 짝사랑은 이 렇듯 고통스러운 수치로 끝을 맺지만 토니오는 스스로에게 충성스런 사랑을 고백한다."잉에! 맹세코 내가 살아있는 한 너에 대한 나의 사랑은 변치 않을 꺼야!"
이처럼 잉에에 대한 토니오의 각별한 애정은 오직 자신과 다른 유형, 즉 '푸른 눈과 금발'의 생동감이 넘치는 북구의 아리안 족의 美로 향해져 있다. 사랑하는 잉에에 대한 절실한 감정 은 잉에에게서 풍겨오는 향기(Duft)에 도취되어 마침내 슈토름(Theodor Storm)의 아름다운 시를 읊기에 이른다: "나는 잠들고 싶지만 너는 춤을 추어야 해." (.....)
슈토름의 『임멘제 Immensee』를 읽으면서 집에 머물러 있었어야 하는 것이 자신의 처지 라고 생각하는 토니오는 잉에를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다른 평범한 아이들처럼 쉽게 접근하 지는 못한다. 단지 잉에가 언젠가는 자신의 시에 감탄하여 자신을 좋아해주기를 바랄 뿐이 다. 사랑이 엄청난 고통과 굴욕과 억압을 가져오며 무언가를 침착하게 완수할 수 있는 능력 을 말살시킴에도 불구하고 토니오는 주저하거나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당시의 토니오에게는 살아서 숨쉬는 젊은 날의 따스한 '가슴'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정식으로 예술가의 정신이 확립되지도 않은 소년 토니오. 그의 한스와 잉에에대한 각별한 사랑이 보여주듯 자 기와 다른 유형을 그처럼 동경하면서도 실제로 그들과 같은 무리에 흡입되려는 시도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는 또 훗날 자신이 한때는 그렇게 애착을 갖고 가까이 하고 싶었던 한스 를 매일 보면서도 그를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사실로 인한 두려움과 슬픔이 조용히 내면에서 속삭이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을 뿐만아니라, 즉음을 각오하면서까지 무조건적으로 잉에를 사랑하리라고 맹서하였지만 세월이 지나면 이 세상에서 나름대로 자신의 의욕과 기운을 잉 에가 아닌 또 다른 희한한 일들을 위해 헌신할 것이라는 약간은 악의적인 조용한 목소리가 내면에서 속삭이고 있음을 그리고 그것이 증오스럽고 참담하다는 것도 잘 인식하고 있다.
이 소설의 3장에서는 토니오의 집안이 몰락해가는 과정으로 시작된다. 게다가 상당부분이 모노로그 형식으로 처리된 토니오의 '내면적인 인식의 변화'를 말해준다.
할머니가 사망한 후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가 경영하던 상회는 해산되고 어머니는 저 택을 처분한다. 일년 후 피아노와 만돌린을 연주하던 토니오의 어머니, 그 아름답고 정열적 인 어머니는 얼마 후 자신의 성향에 어울리는 이탈리아 이름을 가진 어느 음악대가와 재혼 을 하여 먼나라로 떠나버린다. 홀로 남은 토니오는 처음에는 마치 그동안 남모르게 애태우 던 동경과 마음의 고통이 이제는 아무것도 아닌 듯, 구속에서 '해방'이나 된 듯, 고향을 떠나 남쪽나라 대도시들을 다니며 여러 가지 체험을 한다. 그토록 갈구하며 스스로 소명감을 받 았다고 믿어왔던 '정신과 언어의 힘', 즉 예술가로서의 생활에 아낌없이 몸을 던진다. 그는 "건강하고 강력한 감정(을 소유한 자는)은 아무런 기호(Geschmack)를 가지지 못하므로 냉 철하고 선별적인 인간관계, 즉 일정한 인간적 빈곤화와 황폐화야말로 예술작품의 창조를 위한 전제조건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자신의 모태나 다를바 없는 시민정신으로부터 점점 멀어져가는 동안에 경험하게 된 엄청난 모험과 무절제한 생활은 '정신과 언어의 힘'에 대한 헌신이 남긴 코믹과 참담, 그리 고 '군중속을 걸어가는 군주'로 비유되는 예술가적 오만, 즉 인식의 교만이 가져다 준 고통 과 함께 점점 그의 건강을 악화시킨다. 진정한 예술가의 길이 얼마나 큰 인간적 고통을 수 반하는가를 새로운 차원에서 인식하게 된 토니오는 정신적 고뇌와 육체적으로 쇠약해지는 가운데서도 평범한 삶에 동참하지 않고 예술가인 자신에 머물고자 안간힘을 다한다. 그러 나 인간에 대한 시선이 날카로와 질수록 점점 더 고독해지며 인식의 고뇌를 피할 길이 없음 을 깨닫게 된다. 그러는 가운데 따뜻하던 그의 가슴은 점점 죽어간다. 비록 완전한 창조자가 되려면 자신을 죽여야 한다는 믿음의 결과, 해학과 지식이 춤만한 작품을 세상에 내놓음으 로써 환호와 갈채를 받고 시인(Dichter)으로서 어느 정도 성공은 거두지만 생과 예술의 본 질규정은 영원한 미해결의 장으로 남는다.
제 4장은 이 소설의 핵심이자 하이라이트이다. 작품의 거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이 장은 토 니오의 여자친구이자 예술가인 리자베타와의 문학예술에 대한 대화로서 주로 '예술과 삶'에 관련되는 토니오의 자기반성적 고해라고 할 수 있는 문학담론으로 유명한 부분이다. 원래 이 작품의 제목이 『토니오 크뢰거』 가 아니라 『문학 Literatur』이라는 타이틀로 출 간될 예정이었다는 이야기도 바로 이러한 점과 연관을 가진다.
다시 독일로 돌아온 토니오는 뮌헨에 살고 있는 여류화가 리자베타 이봐노브나(Lisaweta Iwanowna)의 아뜰리에를 방문한다. 토니오는 문체, 형식 그리고 표현에 대한 재능이 있는 사람, 즉 예술가는 인간적인 것에 대 해서는 우월한 위치에 있어야 하며 인간적인 것에 직접 관여하지 않으면서 인간적인 것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고통이 따르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며, 인간적 인 것과 예술가를 분리시키는 문학을 천직이 아닌 일종의 '저주(Fluch)'라 여긴다. 예술가가 인간적인 것을 시민적인 감정으로 '느끼기' 시작하면 이미 예술가의 생명은 끝장이기 때문에 하찮은 공상이나 감정으로 심란하게 만드는 '봄(Frühlging)'에는 일하기가 힘들며, 만일 이러 한 느낌을 가져도 좋다고 여기는 창조자는 엉터리 작가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리자베타에게 '자연은 비창조적인 계절'이라고 불만을 토로하는가 하면, '신은 봄을 저주한다(Gott verdammme den Fr hling!)'면서 '봄'의 아로마(Frühlingsarom)를 피해 속세를 떠난 시인이자 노벨리스트(Novellist 단편소설가)인 아달베르트(Adalbert)를 찬 양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토니오는 예술가에게 부여된 고귀한 재능에 대해서는 여전히 깊 은 의혹을 품고 있으며 전과범이면서 노벨레를 쓰는 은행가를 예로 들어 '예술가란 재능은 있지만 어딘가 품행이 방정치 못한, 예술정신과 인간적인 모습이 상치되는 무리', 극단적으 로는 '범죄자' 또는 '사기꾼'이라고 규정한다.
따라서 그는 예술가란, 작품을 통해 인간성이 앙양되며 따뜻한 가슴으로 감격과 흥분을 느 끼고 나아가서 예술적 창조까지도 시도하는 애호가 내지 문사(딜레탄트 Dilettant)와는 본질 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그는 사물의 본질이나 이면을 간파했을 때 느낄 수 있는 메스꺼운 '인식의 구토(Erkenntnisekel)를 강조하면서, '문학적 정신'을 '가장 숭고한 인간정 신의 현현'으로 그리고 '문학하는 사람'을 '완벽한 인간', '성자'로까지 칭송기에 이른다. 마치 햄릿같은 토니오의 심정을 수녀처럼 잘 헤아리는 리자베타는 그러나 애정어린 충고로 토니 오를 경고함으로써 대화를 이끌어 간다.
'세련된 것', '악마적인 것', '극단적인 것' 까지 깊이 파악하고 있는 토니오는,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봄의 순수한 자연성과 봄의 압도적인 젊음'에 대해서 부끄럽게 느끼기도 한다. 봄에 관여하지 않으면서 봄을 말하는, 다시 말해 '생에 대한 참여없이 생을 표현하는 문학적 작업은 토니오에게 고통과 저주로 다가온다'. 그는 가끔 죽음에 임박할 정도로 지쳐있음을 느낀다.
이처럼 한편으로는 '세련된 것', '악마적인 것', '극단적인 것'에 대한 이해와 또 다른 한편으 로는 스며드는 '봄의 순수한 자연성과 압도적인 생동감'에 대한 동경과 수치심으로 인해 깊 은 회의에 빠져드는 토니오는 이제 모든 진실에 대한 권태, 무관심 또는 냉담성도 분명하 게 거부한다. 극단에서 극단으로 달리는 주인공 토니오가 이러한 이로니적 중간자적 자세를 취하며 고뇌하는 문학가로서의 회의에서 스스로를 '허영심이 강한 사기꾼'으로 표현하며 자 책하기에 이른다. 결국 토니오는 자신이 '생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시인함으로써 쇼펜하우어 (Arthur Schopenhauer)의 죽음을 갈망하는 '의지(Wille)'에서 니체(Friedrich Nietzsche)적 '생의 긍정적 의지(Wille zum Leben)'로의 전환점을 보이기 시작한다. 예술과 생의 중간에서 갈등하는 토니오의 시민적 삶에 대한 에로틱한 이로니적 고백은 이제 '길잃은 시민'이라는 리자베타의 정의("Sie sind ein Bürger auf Irrwegen, Tonio Kröger, ein verirrter Bürger.")로서 해결이 되는 듯이 보인다.
대화가 끝나고 잠시 침묵이 이어진 뒤 토니오는 결단을 내린 듯 일어나서 모자와 지팡이를 손에 쥐고는 리자베타에게 감사의 뜻을 표한뒤에 '이젠 안심하고 집으로 갈 수 있겠다'고 한 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여태까지 그처럼 확고한 신념으로 매달려 왔던 예술가로서의 길 이 평범한 시민세계로 향한 자신의 동경과 애정을 넘어서지 못한 한계로 해석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리자베타에게 마음속의 모든 것을 다 고해한 후 자신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그 녀의 아뜰리에를 떠나지만 마음 속 깊숙히 남아있는 '정신의 우위'는 '생의 우위' 앞에서 설 자리를 잃은 패배자의 가벼운 자책이나 고해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문학을 마치 "生에 대한 부드러운 복수", 다시 말해서 "정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 푸른 눈과 금발의 건강하고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부드러운 복수" 처럼 표현한 토니오의 고백은 바로 고뇌와 동경이 혼합된 "스스로에 대한 동정(Selbstmitleid)"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해석의 가능성은, 한편으로는 전적인 '삶의 부정' 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천재, 특히 예술가는 희귀한 존재이기 때문에 고독한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다" 고 한 쇼펜하우어의 예 술가 문제와 다른 한편으로는 니체의 '긍정적 삶'이라는 두 거인의 영향사이에서 "극히 개인 적이면서도 정말로 희한한 합일점(eine sehr persönliche und eigentlich recht seltsame Synthese)"을 모색하려는 토마스 만의 고뇌에서 그리고 한때 오스카 와일더와 같은 유미주 의에 심취했던 만 자신의 '데카당스' 적 영향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5, 6, 7, 8장: 가을로 접어들자 토니오는 동해(Ostsee)를 다시 보러가기 위해서 리자베타와 작별한다. 토니오는 출발점으로 되돌아가 예술과 시민성은 대립할 수밖에 없다고 여기는 예 술가로서의 자신을 처음부터 다시 정리해 보기로 한다. 지금까지 그가 겪고 있는 갈등을 줄 일수 있는 도움을 구할 마음으로 함렛의 고향이기도 한 덴마크로 떠난다. 떠나기에 앞서 토니오는 13년 만에 처음으로 도중에 고향에 들린다. 모든 것이 사소하고 보잘것없이 보이 고 어는 누구도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 옛날 고향집은 대중도서관이 되어버렸고...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하다. 여관에 들른 토니오는, 여러번의 사기행각과 그외의 죄목으로 뮌헨경찰 의 추적을 받아 덴마크로 도피중인 범인으로 오해를 받아 신분을 밝혀야만 하는 난처한 상 황에 이른다. 주거부정의 사기꾼도 아니요 '녹색마차를 타고 다니는 집시'도 아닌 그야말로 그 옛날 존경과 명망을 한몸에 받던 영사 크뢰거의 아들 토니오가 이제는 아무런 변명도 못 한 채 자신의 가방 속에 갖고 있던 교정원고 스크랩 북에 나와있는 자신의 이름으로 신분을 증명받는 기묘한 신세가 된다. 게다가 경찰이 펼쳐본 원고내용이 다행이도 잘 쓰여진 부분 이었다는 사실에 다소 안도하는 그의 모습은 연민을 느끼게 한다. 그는 고향을 떠나 다시 배를 타고 북유럽여행길에 오른다. 밤이 깊어지자 '무서운 폭풍우'가 밀려온다. 그 폭풍우 사 이에서 마치 자신이 '예술가'와 '시민' 사이를 오락가락하듯이 방수외투를 입고, 두건을 쓰고, 머리에는 카멜라를 맨 사나이가 양다리를 크게 벌리고 간신히 중심을 잡으면서 갑판 위를 오락가락 하는 것을 본다. 폭풍우를 바라보며 토니오는 가슴 가득 어떤 환희의 외침이 밀려 오는 것을 느끼고 그것을 시로 옮기려 하지만 실패한다. 그것은 그에게도 이젠 따뜻한 마음 이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덴마크에 상륙한 토니오는 휴양지 알스가르트 (Aalsgaard)에서 나날을 보낸다. 조용하던 이곳에 어느날 갑자기 헬싱키에서 사교무도회에 참관하러 온 사람들로 붐비고 무도회가 열린다. 우연히 토니오는 어느 호텔의 무도회에서 한스와 잉에를 다시 만난다. (이 부분이 이탈릭체로 쓰여진 걸로 봐서 실제적인 만남이라기 보다는 전형적인 만남의 묘사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는 유리벽으로 차단된 어두컴컴한 장소에서 그들의 활기찬 삶을 부러운 마음으로 관찰한 다. 토니오는 갑자기 유년시절에 느꼈던 금발과 그 옛날의 행복을 다시 느끼게 된다. 그의 마음이 이제는 따뜻함을 그리워하게 된 것이다.
부모와 친구들이 모수 떠나간 상황에서 홀로 외지에 머무르는 토니오에게 어느 순간 가슴에 밀려오는 아름답고 행복했던 유년시절의 회상은 그리움과 서글픔이 뒤섞인 울적한 심정으로 우울해지게 만든다. 파티에 참석은 하였으나 행동에 있어서는 여전히 옛날과 크게 달라지지 못한 토니오는 이날도 다른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한다.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는 자신 에게 그 옛날 바램처럼 잉에가 다가와주길 바라지만 역시 잉에는 오지않는다. 모든 상황이 예전과 다름없다는 생각을 하고 견딜수 없는 회한과 향수로 인해 흐느껴 운다. 이러한 기이 한 만남에서 구체화되는 인물묘사에서도 그 옛날의 한스와 잉에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어 현실적인 만남이라기 보다는 환상적인 만남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제 9 장: 여행을 마친 토니오가 리자베타에게 편지를 보낸다. 이 편지는 지금까지의 모든 상 념들을 정리하는 뜻의 고해로서, 정신의 절대적 우위를 전제로 한 '시민 예술가'의 내면적 성찰을 통한 두 개의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편지형식[편지형식은 괴테의 『젊은 베르 터의 슬픔』에서 처럼 어떤 의미에서 고백을 위해서는 가장 적절한 형식으로 이해될 수 있 다]으로 서술하고 있다: "나는 두 개의 세계사이에 서있습니다. 그러나 두 세계의 어는 곳에 서도 고향처럼 편안히 쉴 수는 없는 세계입니다. 그래서 다소 살기가 힘들다는 생각도 가지 게 됩니다."
'이 세상에는 평범이라는 것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쾌락에 대한 동경보다도 더 감미로운 느낌을 주는 것은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내게는 깊고 천부적인 예술정신을 운명적으로 가지 고 태어났다는 것'을 역설하며, '자부심이 강하고 냉철한 예술가들'에게 찬사를 보내지만 근 본적으로 토니오는 그들을 부러워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여태까지 이룩한 것이 아무것도 아니며 앞으로 '더 나은 것'을 쓸것이라는 약속을 한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고백한다:"그러나 내가 가장 깊고 은근하게 사랑하는 것은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사람들, 밝고 생동감이 넘치는 사람들, 행복하고 사랑스런 평범한 사 람들이랍니다. 그 속에는 동경이 있으며, 우울한 질투도 있으며, 약간의 경멸과 아주 수줍 은 성스러운 순결이 내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