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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봉 시장 박노해
가리봉 시장
가리봉 시장에 밤이 깊으면
가게마다 내걸어 놓은 백열전등 불빛 아래
오가는 사람들의 상기된 얼굴마다
따스한 열기가 오른다
긴 노동 속에 갇혀 있던
우리는 자유로운 새가 되어
이리 기웃 저리 기웃 깔깔거리고
껀수 찾는 어깨들도 뿌리 뽑힌 전과자도
몸부벼 살아가는 술집여자들도
눈을 빛내며 열이 오른다
돈이 생기면 제일 먼저 가리봉 시장을 찾아
친한 친구랑 떡볶기 500원어치, 김밥 한 접시,
기분나면 살짜기 생맥주 한잔이면
스테이크 잡수시는 사장님 배만큼 든든하고
천오백원짜리 티샤쓰 색깔만 고우면
친구들은 환한 내 얼굴이 귀티난다고 한다
하루 14시간
손발이 퉁퉁 붓도록
유명브랜드 비싼 옷을 만들어도
고급 오디오 조립을 해도
우리 몫은 없어,
우리 손으로 만들고도 엄두도 못내
가리봉 시장으로 몰려와
하청공장에서 막 뽑아낸 싸구려 상품을
눈부시게 구경하며
이번 달엔 큰 맘 먹고 물색 원피스나
한 벌 사야겠다고 다짐을 한다
앞판 시다 명지는 이번 월급 타면
켄터키치킨 한 접시 먹으면 소원이 없겠다 하고
마무리 때리는 정이는 2,800원짜리
이쁜 샌달 하나 보아둔 게 있다며
잔업 없는 날 시장가자고 손을 꼽는다
가리봉 시장에 밤이 익으면,
피가 마르게 온 정성으로
만든 제품을
화려한 백화점으로,
물 건너 코큰 나라로 보내고 난
허기지고 지친
우리 공돌이 공순이들이
싸구려 상품을 샘나게 찍어 두며
300원어치 순대 한 접시로 허기를 달래고
이리 기웃 저리 기웃
구경만 하다가
허탈하게 귀가길로
발길을 돌린다
노동의 새벽, 풀빛, 1984
그리움 박노해
그리움&
공장 뜨락에
다사론 봄볕 내리면
휴일이라 생기 도는 아이들 얼굴 위로
개나리 꽃눈이 춤추며 난다
하늘하늘 그리움으로
노오란 작은 손
꽃바람 자락에 날려 보내도
더 그리워 그리워서
온몸 흔들다
한 방울 눈물로 떨어진다
바람 드세도
모락모락 아지랑이로 피어나
온 가슴을 적셔 오는 그리움이여
스물 다섯 청춘 위로
미싱 바늘처럼 꼭꼭 찍혀 오는
가난에 울며 떠나던
아프도록 그리운 사람아
노동의 새벽, 풀빛, 1984
노동의 새벽 박노해
노동의 새벽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아
이러다간 오래 못가지
이러다간 끝내 못가지
설은 세 그릇 짬밥으로
기름투성이 체력전을
전력을 다 짜내어 바둥치는
이 전쟁 같은 노동일을
오래 못가도
끝내 못가도
어쩔 수 없지
탈출할 수만 있다면,
진이 빠져, 허깨비 같은
스물 아홉의 내 운명을 날아 빠질 수만 있다면
아 그러나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지
죽음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
이 질긴 목숨을,
가난의 멍에를,
이 운명을 어쩔 수 없지
늘어쳐진 육신에
또다시 다가올 내일의 노동을 위하여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소주보다 독한 깡다구를 오기를
분노와 슬픔을 붓는다
어쩔 수 없는 이 절망의 벽을
기어코 깨뜨려 솟구칠
거치른 땀방울, 피눈물 속에
새근새근 숨쉬며 자라는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
우리들의 희망과 단결을 위해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줏잔을
돌리며 돌리며 붓는다
노동자의 햇새벽이
솟아오를 때까지
노동의 새벽, 풀빛, 1984
멈출 수 없지 박노해
멈출 수 없지
빨리 빨리
바삐 아침을 지어 먹고
만원버스 따라 뛰며
종종종 바쁘게 걸어
후다닥 작업복 갈아입고
쓰왜앵―
열나게 하루를 돈다
긴 식사대열
식반을 받쳐 들고
국에 말아 훌 마시고
화장실 가서 찌익 오줌 누고 뭐 볼 틈도 없이
뻑뻑 담배 한 대 굽고
연장노동 들어가면
전쟁터처럼 정신 없이
굉음 속에 기계는 돌아가고
스피커 악악거리는
박자 빠른 디스코를
따라잡기엔 지쳐 버렸다
땀에 절어 맥풀린 얼굴들로
종종걸음 치며 공장문을 쏟아져 나와
인사조차 못나눈 채
검은 어둠 속으로 흩어지고
비탈진 골목길을 숨가쁘게 오르며
나는 때리면 돌아가는 팽이라고
거대한 탈수기에 넣어서 돌리면
돌릴수록 쥐어짜지는 빨래라고
하루, 일년, 죽을 때까지
정신 없이 따라 돌며
정신 없이 바뀌는 세상에
눈빛도 미소도 생각조차
속도 속에 빼앗겨 버렸어
전력을 다 짜내어 뛰어도
갈수록 멀어져만 가는
황새를 뱁새걸음으로,
공작새를 장닭으로,
승용차를 맨발로 따라 뛰며
죽기까지 손발을 멈출 수 없지
걷고 싶어도 주저앉고 싶어도
채찍보다 더 무서운
살아야 한다는 것,
노동자의 운명은
죽음이 아니라면 멈출 수 없지
오늘도 내일도
가면 갈수록 바쁘게 뛰어야 하는
갈수록 가진 것 없고 졸라매야 하는
고도로, 번영으로
급성장하는
우리는 복지국가 대한민국
뺑이치는
노동자
노동의 새벽, 풀빛, 1984
바겐세일 박노해
바겐세일
오늘도 공단거리 찾아 헤맨다마는
검붉은 노을이 서울 하늘 뒤덮을 때까지
찾아 헤맨다만은
없구나 없구나
스물 일곱 이 한 목숨
밥 벌 자리 하나 없구나
토큰 한 개 달랑, 포장마차 막소주잔에 가슴 적시고
뿌리 없는 웃음 흐르는 아스팔트 위를
반짝이는 조명불빛 사이로
허청 허청
실업자로 걷는구나
10년 걸려 목메인 기름밥에
나의 노동은 일당 4,000원
오색영롱한 쇼윈도엔 온통 바겐세일 나붙고
지하도 옷장수 500원짜리 쉰 목청이 잦아들고
내 손목 이끄는 밤꽃의 하이얀 미소도
50% 바겐세일이구나
에라 씨팔,
나도 바겐세일이다
3,500원도 좋고 3,000원도 좋으니 팔려가라
바겐세일로 바겐세일로
다만,
내 이 슬픔도 절망도 분노까지 함께 사야 돼!
노동의 새벽, 풀빛, 1984
바람이 돌더러 박노해
바람이 돌더러
모래 위에 심은 꽃은
화창한 봄날에도 피지 않는다
대나무가 웅성대는 것은
바람이 불기 때문이다
갈대가 두 손 쳐들며 아우성치는 것도
바람이 휘몰아치는 까닭이다
돌멩이가 굴러 돌사태를 일으키는 것은
바람에 굴러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함이다
대나무나 갈대나 돌멩이나
바람이 불기에 소리치는 것이다
우리는 조용히 살고 싶다
돌아오는 건 낙인 찍힌 해고와 배고픔
몽둥이에 철창신세뿐인 줄 빤히 알면서
소리치며 나설 자 누가 있겠느냐
그대들은 우리더러
노동문제를 일으킨다 하지만
우린 돌처럼 플처럼 조용히 살고 싶다
다만 모래밭의 메마른 뿌리를
기름진 땅을 향해 뻗어가야겠다
우리도 봄날엔 소박한 꽃과 향기를 피우고 싶다
우리로 하여금 소리치게 하고
돌사태를 일으키게 하는 것은
바람이 드세게 몰아쳐
더이상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노동의 새벽, 풀빛, 1984
밥을 찾아 박노해
밥을 찾아
이런 밥,
부잣집 개라면 안 먹일거야
기계라도 덜거덕 소리가 날거야
우리들은 식사를 거부하고
마지막 지점,
옥상으로 모였다
바람마저 자그맣게 열리어 타오르는
심장을 얼리려는 듯 차가워
기대인 어깨로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건 굶을 자유뿐이라고
낙엽 같은 웃음으로 배를 불렸다
거치른 얼굴들이 떨며
죽순처럼 일어설 때
구둣발소리 당당하게
번질한 얼굴들이 무겁게 내리눌러
두려운 눈과 눈 마주하며
먹구름짱 걷어낼 햇살처럼 떳떳한
우리를 확인했다
바위 같은 우리를 누가 흔들까
내 손가락 잡아먹은
톱니바퀴보다 더 힘껏 얽힌
밥 찾는 우리를 누가 가를까
사장님은 우릴 가족처럼 대한다더니
빼빼 말릴거냐!
쟁기질하는 소도 여물을 먹여야 일하는데
이 밥을 먹고 어찌 일해요!
중도반 3년 근무에
밤마다 피기침하는 영수가 울부짖고
당신네들 건강과잉은 우리가 곯은 육신이고
행복 어린 웃음은 일그러진 좌절과 슬픔이라고
누군가가 외칠 때
오! 당신들,
미끈한 혓바닥에 이젠 더 안 속아
경찰을 부른다 해도 이젠 더 못 참아
무식한 공돌이 공순이 기업 망친다
구속시킨다 해도
이제 더는 더는 물러설 수 없어
저들의 충견들이 몽둥이를 들 때
우리의 벗들은 피투성이가 되고
피빛이 가슴가슴 저며들어 비겁을 녹이고
눈망울에 불꽃이 튀어 솟아
열여섯 난 명이는 무섭다 울며
수수깡 같은 몸매를 내 야윈 품으로 안겨오고
표창장을 태우고 모범사원을 태우고
일어섰다
우뚝우뚝 일어선 우리,
밤을 지새며 노동하고 생산하는
하늘 우러러 떳떳힌 노동자의 자존으로
우리 밥 찾으러,
더는 물러설 수 없는 노동자의 걸음으로
두터운 벽을 박차고 나섰다
밥을 찾으러
우리 것 찾으러
당당하게 맞서 싸우며 울부짖는
오백의 함성이 공단하늘 메아리칠 때
양처럼 순한 표정으로 사정하는
저 숨겨진 발톱을,
저 웃음 뒤의 음모를 우리는 안다
마음까지 풍성한 밥을 놓고
자꾸만 흐르는 눈물
소줏잔을 돌리며
지금부터다!
굳게 잡은 손목으로
빛나는 눈동자 마주할 때
눈보라치는
꽁꽁 얼어붙은 땅 저편으로
다사로운 봄날은
무겁게 아프게 열리고 있었다
노동의 새벽, 풀빛, 1984
사랑 박노해
사랑&
사랑은
슬픔, 가슴 미어지는 비애
사랑은 분노, 철저한 증오
사랑은 통곡, 피투성이의 몸부림
사랑은 갈라섬,
일치를 향한 확연한 갈라섬
사랑은 고통, 참혹한 고통
사랑은 실천, 구체적인 실천
사랑은 노동, 지루하고 괴로운 노동자의 길
사랑은 자기를 해체하는 것,
우리가 되어 역사 속에 녹아들어 소생하는 것
사랑은 잔인한 것, 냉혹한 결단
사랑은 투쟁, 무자비한 투쟁
사랑은 회오리,
온 바다와 산과 들과 하늘이 들고 일어서
폭풍치고 번개치며 포효하여 피빛으로 새로이 나는 것
그리하여 마침내 사랑은
고요히 빛나는 바다
햇살 쏟아지는 파아란 하늘
이슬 머금은 푸른 대지 위에
생명 있는 모든 것들 하나이 되어
춤추며 노래하는 눈부신 새 날의
위대한 잉태
노동의 새벽, 풀빛, 1984
손 무덤 박노해
손 무덤
올 어린이날만은
안사람과 아들놈 손목 잡고
어린이 대공원에라도 가야겠다며
은하수를 빨며 웃던 정 형의
손목이 날아갔다
작업복을 입었다고
사장님 그라나다 승용차도
공장장님 스텔라도 태워 주지 않아
한참 피를 흘린 후에
타이탄 짐칸에 앉아 병원을 갔다
기계 사이에 끼어 아직 팔딱거리는 손을
기름 먹은 장갑 속에서 꺼내어
36년 한많은 노동자의 손을 보며 말을 잊는다
비닐봉지에 싼 손을 품에 넣고
봉천동 산동네 정형 집을 찾아
서글한 눈매의 그의 아내와 초롱한 아들놈을 보며
차마 손만은 꺼내 주질 못하였다
훤한 대낮에 산동네 구멍가게 주저앉아 쇠주병을 비우고
정형이 부탁한 산재관계 책을 찾아
종로의 크다는 책방을 둘러봐도
엠병할, 산데미 같은 책들 중에
노동자가 읽을 책은 두 눈 까뒤집어도 없고
화창한 봄날 오후의 종로거리엔
세련된 남녀들이 화사한 봄빛으로 흘러가고
영화에서 본 미국상가처럼
외국상표 찍힌 왼갖 좋은 것들이 휘황하여
작업화를 신은 내가
마치 탈출한 죄수처럼 쫄드만
고층 사우나빌딩 앞에 자가용이 즐비하고
고급 요정 살롱 앞에도 승용차가 가득하고
거대한 백화점이 넘쳐 흐르고
프로야구장엔 함성이 일고
노동자들이 칼처럼 곤두세워 좆 빠져라 일할 시간에
느긋하게 즐기는 년놈들이 왜이리 많은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선진조국의 종로거리를
나는 ET가 되어
얼나간 미친 놈처럼 헤매이다
일당 4,800원짜리 노동자로 돌아와
연장노동 도장을 찍는다
내 품속의 정 형 손은
싸늘히 식어 푸르뎅뎅하고
우리는 손을 소주에 씻어 들고
양지바른 공장 담벼락 밑에 묻는다
노동자의 피땀 위에서
번영의 조국을 향락하는 누런 착취의 손들을
일 안하고 놀고 먹는 하얀 손들을
묻는다
프레스로 싹둑싹둑 짓짤라
원한의 눈물로 묻는다
일하는 손들이
기쁨의 손짓으로 살아날 때까지
묻고 또 묻는다
노동의 새벽, 풀빛, 1984
시다의 꿈 박노해
시다의 꿈
긴 공장의 밤
시린 어깨 위로
피로가 한파처럼 몰려온다
드르륵 득득
미싱을 타고, 꿈결 같은 미싱을 타고
두 알의 타이밍으로 철야를 버티는
시다의 언 손으로
장미빛 꿈을 잘라
이룰 수 없는 헛된 꿈을 싹뚝 잘라
피 흐르는 가죽본을 미싱대에 올린다
끝도 없이 올린다
아직은 시다
미싱대에 오르고 싶다
미싱을 타고
장군처럼 당당한 얼굴로 미싱을 타고
언 몸뚱아리 감싸 줄
따스한 옷을 만들고 싶다
찢겨진 살림을 깁고 싶다
떨려 오는 온몸을 소름치며
가위질 망치질로 다짐질하는
아직은 시다,
미싱을 타고 미싱을 타고
갈라진 세상 모오든 것들을
하나로 연결하고 싶은
시다의 꿈으로
찬 바람 치는 공단거리를
허청이며 내달리는
왜소한 시다의 몸짓
파리한 이마 위으로
새벽별 빛나다
노동의 새벽, 풀빛, 1984
어머니 박노해
어머니&
남도의 허기진 오뉴월 뙤약볕 아래
호미를 쥐고 밭고랑을 기던 당신 품에서
말라붙은 젖을 빨며
당신 몸으로 갈 고기 한 점 쌀밥 한 술
연하고 기름진 것을 받아먹으며
거미처럼 제 어미 몸을 파먹으며 자랐습니다
독새풀죽 쑤어 먹고 어지럼 속에 커도
못배워 한많은 노동자로 몸부림쳐도
도둑질은 하지 않았습니다
일 안하고 놀고 먹지도 남을 괴롭히지도 않았습니다
나로 하여 이 세상에 단 하나
슬픔을 준 사람이 있다면
어머니 바로 당신입니다
당신의 오직 하나 소원이라면
가진 것 적어도 오손도손 평온한 가정이었지요
저는 열심히 일했고 떳떳하게 요구했고
양심대로 우리들의 새날을 위해 싸웠습니다
투쟁이 깊어 갈수록 우리에겐 풍파가 몰아쳤고
당신은 더 불안하고 체념 속에 주저앉아
다시 나를 붙들고 애원하며 원망합니다
어머니
환갑이 넘어서도 파출부살이를 하는
당신의 염원은 우리 모두의 꿈입니다
가난했기에 못배웠기에
수모와 천대와 노동에 시퍼런 한 맺혔기에
오손도손 평온한 가정에의 바램은
마땅한 우리 모두의 비원입니다
오! 어머니
당신 속엔 우리의 적이 있습니다
어머님의 염원을
오손도손 평온한 가정에의 바램을 잔혹하게 짓밟고 선 저들은
간교하게도 당신의 비원 속에
굴종과 이기주의와 탐욕과 안일의 독사로 도사리며
간악한 적의 가장 집요하고 공고한 혓바닥으로
우리의 가장 약한 인륜을 파고들며 유혹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 단 한 사람
어머니의 가슴에 못을 박습니다
어머님의 간절한 소원을 위하여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의 비원을 위하여
짓눌리고 빼앗긴 행복을 되찾기 위해
오늘 우리는 불효자가 되어
저 참혹한 싸움터로 울며울며
당신 곁을 떠나갑니다
어머님의 피눈물과 원한을 품고서
기필코 사랑과 효성으로 돌려드리고야 말
우리들의 소중한 평화를 쟁취하고자
피투성이 싸움 속에서
승리의 깃발을 드높이 펄럭이며 빛나는 얼굴로 돌아와
큰절 올리는 그날까지
어머님 우리는 천하의 불효자입니다
당신 속에 도사린 적의 혓바닥을
냉혹하게 적대적으로 끊어 버리는
진실로 어머니를 사랑하옵는
천하의 몹쓸 불효자 되어
피눈물을 뿌리며 싸움터로 나아갑니다
어머니
어머니
노동의 새벽, 풀빛, 1984
얼마짜리지 박노해
얼마짜리지
말더듬이 염색공 사촌형은
10년 퇴직금을 중동취업 브로커에게 털리고 나서
자살을 했다
돈 100만 원이면
아파 누우신 우리 엄마 병원에 가고
스물 아홉 노처녀 누나 꽃가말 탄다
돈 천만 원이면
내가 10년을 꼬박 벌어야 한다
1억원은 두 번 태어나 발버둥쳐도 엄두도 나지 않는
강 건너 산 너머 무지개이다
나의 인생은 일당 4,000 원짜리
그대의 인생은 얼마
우리 사장님은 하룻밤 술값이 100만 원이래는데
강아지 하루 식대가 5,000 원이래는데
3천억을 쥐고 흔든 여장부도 있다는데
염색공 사촌형은 120만 원에 자살을 하고
열 여섯 우리 동생 공장을 가고
오 오
우리의 인생 우리의 사랑 우리의 생명은
얼마 얼마?
노동의 새벽, 풀빛, 1984
이불을 꿰매면서 박노해
이불을 꿰매면서
이불홑청을 꿰매면서
속옷 빨래를 하면서
나는 부끄러움의 가슴을 친다
똑같이 공장에서 돌아와 자정이 넘도록
설겆이에 방청소에 고추장단지 뚜껑까지
마무리하는 아내에게
나는 그저 밥 달라 물 달라 옷 달라 시켰었다
동료들과 노조일을 하고부터
거만하고 전제적인 기업주의 짓거리가
대접받는 남편의 이름으로
아내에게 자행되고 있음을 아프게 직시한다
명령하는 남자, 순종하는 여자라고
세상이 가르쳐 준 대로
아내를 야금야금 갉아먹으면서
나는 성실한 모범근로자였었다
노조를 만들면서
저들의 칭찬과 모범표창이
고양이 꼬리에 매단 방울소리임을,
근로자를 가족처럼 사랑하는 보살핌이
허울 좋은 솜사탕임을 똑똑히 깨달았다
편리한 이론과 절대적 권위와 상식으로 포장된
몸서리치는 이윤추구처럼
나 역시 아내를 착취하고
가정의 독재자가 되었었다
투쟁이 깊어 갈수록 실천 속에서
나는 저들의 찌꺼기를 배설해 낸다
노동자는 이윤 낳는 기계가 아닌 것처럼
아내는 나의 몸종이 아니고
평등하게 사랑하는 친구이며 부부라는 것을
우리의 모든 관계는 신뢰와 존중과
민주주의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잔업 끝내고 돌아올 아내를 기다리며
이불홑청을 꿰매면서
아픈 각성의 바늘을 찌른다
노동의 새벽, 풀빛, 1984
장벽 박노해
장벽
내가 길들여진 노동자였을 때
저임금의 응달 속을 장시간 노동에 지쳐
캄캄한 장벽을 운명으로 알고 살아왔었다
내가 눈을 떴을 때
높고 두터운 장벽 사이로
한 줄기 빛이 내렸다
내가 외쳤을 때
내 입은 봉해졌고
메아리쳐 온 허망한 상처뿐이었다
내가 뛰어가 부딪쳤을 때
장벽은 끄떡도 하지 않았고
동료들은 차갑게 피를 닦아 주었다
내가 속삭이며,
긴 세월을 절뚝이며 속삭여
동료들과 함께 얽혀들어
맨몸으로 수없이 벽을 쳤을 때
피에 젖은 장벽은 금이 가기 시작했다
우리가 함마로 구멍을 뚫고
긴긴 밤을 숨죽이며 다이나마이트를 터뜨렸을 때
콰르르르 거대한 장벽은 무너지고
너와 나 사이 가슴 속의 장벽도
무너져 내렸다
우리가 환히 열린 언덕으로 뛰어갔을 때
캄캄한 장벽 밑마다
쿵쿵 까부수는 소리
에워싸며 구멍 뚫는 소리
참혹한 비명소리
우리들은 또다시 전열을 추스리며
수없이 불어난 동지들과
탄탄한 연대 위에서
마땅히 누려야 할
우리들의 평등한 푸르른 대지를 향해
너는 함마
나는 다이나마이트
살덩이로 불꽃으로 불도쟈로
갈수록 무겁고 힘찬, 치밀하고 확실한
노동자의 전진을 내어딛는다
우리들의 숙명인
저임금과 장시간노동이 사라질 때까지
억압과 착취와 분단의 장벽이
사라질 때까지
노동의 새벽, 풀빛, 1984
지문을 부른다 박노해
지문을 부른다
진눈깨비 속을
웅크려 헤쳐 나가며 작업시간에
가끔 이렇게 일보러 나오면
참말 좋겠다고 웃음 나누며
우리는 동회로 들어선다
초라한 스물 아홉 사내의
사진 껍질을 벗기며
가리봉동 공단에 묻힌 지가
어언 육년, 세월은 밤낮으로 흘러
뜻도 없이 죽음처럼 노동 속에 흘러
한번쯤은 똑같은 국민임을 확인하며
주민등록 경신을 한다
평생토록 죄진 적 없이
이 손으로 우리 식구 먹여 살리고
수출품을 생산해 온
검고 투박한 자랑스런 손을 들어
지문을 찍는다
아
없어, 선명하게
없어,
노동 속에 문드러져
너와 나 사람마다 다르다는
지문이 나오지를 않아
없어, 정 형도 이 형도 문 형도
사라져 버렸어
임석경찰은 화를 내도
긴 노동 속에
물 건너간 수출품 속에 묻혀
지문도, 청춘도, 존재마저
사라져 버렸나봐
몇 번이고 찍어 보다
끝내 지문이 나오지 않는 화공약품 공장
아가씨들은 끝내 울음이 북받치고
줄지어 나오는, 지문 나오지 않는 사람들끼리
우리는 존재조차 없어
강도질해도 흔적도 남지 않을거라며
정 형이 농지껄여도
더이상 아무도 웃지 않는다
지문 없는 우리들은
얼어붙은 침묵으로
똑같은 국민임을 되뇌이며
파편으로 내리꽂히는 진눈깨비 속을 헤쳐
공단 속으로 묻혀져 간다
선명하게 되살아날
지문을 부르며
노동자의 푸르른 생명을 부르며
되살아날
너와 나의 존재
노동자의 새봄을
부르며 부르며
진눈깨비 속으로,
타오르는 갈망으로 간다
노동의 새벽, 풀빛, 1984
통박 박노해
통박
어느 놈이 커피 한잔 산다 할 때는
뭔가 바라는 게 있다는 걸 안다
고상하신 양반이
부드러운 미소로 내등을 두드릴 땐
내게 무얼 원하는지 안다
별스런 대우와 칭찬에
허릴 굽신이며 감격해도
저들이 내게 무얼 노리는지 안다
우리들이 일어설 때
노사협조를 되뇌이며 물러서는
저 인자한 웃음 뒤의 음모와 칼날을
우리는 안다
유식하고 높은 양반들만이 지혜로운 것은 아니다
일찌기 세상바닥 뒹굴며
눈치밥을 익히며 헤아릴 수 없는 배신과 패배 속에
세상 살아가는 통박이 생기드만
세상엔 빡빡 기는 놈들 위에서
신선처럼 너울너울 나는 놈 따로 있어
날개 없이 기름바닥 기는 우리야
움츠리며 통박을 굴리며 살아가지만
통박이 구르다 보면
통박끼리 구르고 합쳐지다 보면
거대한 통박이 된다고
좆도 배운 것 없어도
돈날개 칼날개 달고 설치는 놈들이 무엇인지
이놈의 세상이 어찌된 세상인지
누구를 위한 세상인지
우리들 거대한 통박으로 안다
쓰라린 눈물과 억압과 패배 속에서
거대한 통박으로 구르고 부딪치고 합치면서
우리들의 통박은
점점 날카롭고 명확하게
가다듬어지는 것이다
우리들의 통박이 거대한 통박으로,
하나의 통박으로 뭉쳐지면서
노동하는 우리들의 새날을 향하여
이놈의 세상을 굴려갈 것이다
노동의 새벽, 풀빛, 1984
포장마차 박노해
포장마차
모래에 싹이 텄나
사장님이 애를 뱄나
이 좋은 토요일 잔업이 없단다
이태리타올로 기름 낀 손을 닦고서
작업복 갈아입고 담배 한 대 붙여 물면
두둥실 풍선처럼 마음이 들떠
누구라 할 것 없이 한잔 꺾자며
공장 뒷담 포장마차 커튼을 연다
쇠주파 막걸리파 편을 가르다
다수결 두꺼비로 통일을 보고
첫딸 본 김형 추켜 꼼장어 굽고
새신랑 정형 얼러대어
정력에 좋다고 해삼 한 접시
자격증 시험 붙어 호봉 올라간
문형이 기분 조오타고 족발 두 개 사고
길게 놓인 안주발에 절로 술이 익는다
새벽에 안서는 놈은 빚도 주지 말랬는데
잔업에 곯다 보니 요게 새벽까지 기척도 안해
일주일째 아내 고것 곰팡이 슬겠다고
킬킬거리고, 이제 신혼 한달째인
정형 새신부 토실한 히프 모양이 첫아들 날 상이라며
좌우삼삼 일심구천 김형 5단계 노하우 전수에
헤 벌리는 놈, 심각한 놈, 키득대는 놈,
한 잔 두 잔 술잔이 돌아올 때마다
우리는 녹아들어 하나가 되어
송형은 문형에게 감정풀이 화해주를 청하고
서씨는 전기과 박형과 찜찜했던 오해를 털어놓고
노씨는 왕년에 광빨나던 시절 타령이 시작되고
장단맞추는 김형, 만주에서 개장수하며 독립운동하던
뻥까는 야화가 기세를 올리면 부산 자갈치 공형,
야야 치라 치라 벌써 백번째다 마
내 한 곡 뽑제, 니 박수 안 치나
두만강을 노저어 오륙도 돌아
개나리처녀 미워미워
울고 넘는 박달재로 발길을 돌려
젓가락 두들기며 주전자뚜껑 드럼에도
어깨 우쭐, 방뎅이 들썩,
쿵다라 닥닥 조코 좆커
영자야 안주 한 사라 더 주라 잉
2차 가자 집에 가자 고고장 가자는 걸
알뜰꾼 신씨가 눌러 앉히고 한 병 두 병 더할수록
거나하게 취기가 올라
좆같은 노무과장, 상무새끼, 쪽발이 사장놈,
노사협의회 놈들 때려 엎자고
꼭 닫아둔 울화통들이 터져 나온다
문형은 간신자식들 먼저 깨야 한다며
벌겋게 달아 오르고
정형은 단계적으로 구내식당부터
시정하자고 나직이 속삭인다
상고 나와 기름쟁이 된 회계 담당 김형은
외상장부 넘겨 가며
계산을 한다
냉수 한 사발 돌려 마시고
자욱한 연기 속 포장마차 나서면
어깨를 끼고 비틀비틀
일렬횡대로 서 담벽에 오줌 깔기고
씨팔, 내일도 휴일특근 나온다며
리어카장수 떨이쳐 딸기 천원어치씩
옆 주머니에 꿰차고
작별의 손 흔들며 잔업 없는 오늘만은
두둥실 토요일 밤을 흥얼거리며
아내가 기다리는 집을 향한다
노동의 새벽, 풀빛, 1984
하늘 박노해
하늘&
우리 세 식구의 밥줄을 쥐고 있는 사장님은
나의 하늘이다
프레스에 찍힌 손을 부여안고
병원으로 갔을 때
손을 붙일 수도 병신을 만들 수도 있는 의사 선생님은
나의 하늘이다
두달째 임금이 막히고
노조를 결성하다 경찰서에 끌려가
세상에 죄 한번 짓지 않은 우리를
감옥소에 집어넌다는 경찰관님은
항시 두려운 하늘이다
죄인을 만들 수도 살릴 수도 있는 판검사님은
무서운 하늘이다
관청에 앉아서 흥하게도 망하게도 할 수 있는
관리들은
겁나는 하늘이다
높은 사람, 힘 있는 사람, 돈 많은 사람은
모두 하늘처럼 뵌다
아니, 우리의 생을 관장하는
검은 하늘이시다
나는 어디에서
누구에게 하늘이 되나
대대(代代)로 바닥으로만 살아온 힘 없는 내가
그 사람에게만은
이제 막 아장 걸음마 시작하는
미치게 예쁜 우리 아가에게만은
흔들리는 작은 하늘이것지
아 우리도 하늘이 되고 싶다
짓누르는 먹구름 하늘이 아닌
서로를 받쳐 주는
우리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푸른 하늘이 되는
그런 세상이고 싶다
노동의 새벽, 풀빛, 1984
한강 박노해
한강
한강이 가슴을 연다
여윈 어미의 가슴처럼
주름진 강심(江心)이 소리 없이 열려 흐른다
얼어붙은 겨울 속으로
숨죽이며 흐느낌으로 흐르던
눈물 강물
봄은 멀은데
멍든 가슴, 지치인 노동에
탄식하며 탄식하며 쓰러져
몰아치는 찬 바람에
다시 아귀찬 이를 물며 일어서 흐르는
사랑이여 모진 생명이여
강물은 흐르고
더러움과 오욕에 뒤섞여
거칠은 한강은 흐르고
살얼음을 뒤척이며
어두운 겨울 속으로
봄을 부르며
봄을 부르며
소리 없이 열려 흐르는
눈물이여 강물이여
노동의 새벽, 풀빛, 1984
허깨비 박노해
허깨비
내일 아침 신문에
국회가 해산되었다 해도
우린 놀라지 않는다
노총이 없어졌다 해도
우린 더이상 슬퍼하지 않는다
밥 찾는 몸부림에 철퇴를 내리는
사법부의 판결에도 우린 더 이상 애통해하지 않는다
먹물들이 개소릴 해도
중놈, 신부, 목사란 놈들이 씨나락을 까도
언론이 물구나무 서도
우린 분노하지 않는다
우리들의 애절한 사랑,
떨리는 소망과 비원을 배신한
저 달콤한 포장을, 허깨비를
우린 더이상 기대하지도 믿지도 않는다
그대들이 어쩔 수 없이 비춰 준 것들에
우린 만족하지 않겠다
죽음 같은 노동과 삶이,
핏발 선 싸움이 준
이 뼈저린 각성으로
마땅히 찾아야 할 우리 것을
더이상 버려 두지 않겠다
살기 좋은 이 강산은 그대들의 땅
우린 더이상,
허깨비에 홀리지 않는다
노동하는 우리들의 땅
우리들의 내일
우리들의 꿈으로
온 세상 하나되어 손에 손 잡는
벅찬 새날을 위하여
우리는 우릴 가로막는
저 달콤한 허깨비를
부수며 나갈 것이다
노동의 새벽, 풀빛, 1984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