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문학제5집 원고 (2013. 7. 14)
母川回歸(모천회귀)
김한석
어떤 노숙자에게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느닷없이 “길거리가 내 고향”이라 했다던가. 어떤 사람은 아예 고향이 없다고도 하고. 어쩌면 그들의 대답이 틀렸다고 할 수도 없을 것 같다. 세상이 워낙 변하다보니 고향의 개념도 크게 바뀌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40대의 한 젊은이는 아버지 고향은 전라도지만 내 고향은 서울이라고 단언하듯 말한다. 이렇듯 부모와 자식 간에도 고향이 갈라진지 오래다. 서울시민 가운데도 79%가 서울을 고향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니 더욱 할 말이 없다.
고향이 없다니 이 얼마나 서글픈가. 고향이 애매하거나 불분명한 사람들에게는 고향에 대한 애착이 희박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향수(鄕愁)가 어떤 것인지도 잘 모를 것이다. 나에겐 분명한 고향이 있고 언제든 회귀(回歸)할 곳이 있으니 참 행복하다. 새삼 고향의 품이 따뜻하게 느껴진다.
고향에선 추석이면 언제나 남강 백사장에서 소싸움이 벌어진다. 눈을 부릅뜬 소가 뒷다리로 모래를 파 등에 끼얹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같은 모래밭에서 장사씨름대회도 열리는데 나는 어릴 때부터 늘 씨름판이라면 빠지지 않고 구경했다.
진주의 씨름대회엔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장사들이 몰려들어 큰 판이 벌어진다. 출전한 장사들의 체격도 제각각이다. 키가 장대같이 큰 거인, 근육질의 가슴이 떡 벌어진 땅딸보, 임신이라도 한 듯 배가 불룩 나온 만삭남(?)들로 마치 장사들의 경연장을 방불케 한다. 이 기라성 같은 선수들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요기가 되었다.
우리 고장에는 ‘점배’라는 씨름장사가 있었다. 짚동만한 몸집, 소처럼 뚜벅뚜벅 걷는 걸음걸이도 구경거리라, 거리에 나다니면 “점배다!”하고 아이들이 뒤따랐다. 그는 진주씨름의 상징이요, 모를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했다.
주로 힘으로 밀어붙이는 씨름이 대세를 이룰 때라 몸집이 작은 선수가 키 큰 장사를 단숨에 ‘쿵’하고 바닥에 처박아버릴 때는 많은 박수가 쏟아져 나온다. 상대도 안 될 것 같은 거목을 으랏차차! 괴성을 지르며 쓰러뜨리는 기술씨름의 진수를 맛보며 구경꾼들의 통쾌감은 그 무엇에도 비길 수 없다.
결승전은 그야말로 손에 땀을 쥐게 하는데 아무런 연고가 없는 내마저 바짝 긴장되는 것은 무슨 연유에서일까. 기량 높은 씨름 기술의 묘미에 감탄해서일까, 어린 가슴에 벌써 향토 사랑이 싹트고 있었음일까.
점배 장사는 좀처럼 기술을 쓰지 않는다. 하기야 버티고만 있어도 능히 상대를 제압하는 카리스마가 있어 버티는 그 자체가 기술인지 모른다. 그러다가 상대방의 허술한 기미를 틈타 번개같이 다리를 걸어 땅바닥에 내동댕이친다. 그 큰 덩치 어디에서 그런 순발력이 생겨나는 것인지 신기하게 느껴졌다. 요즘말로 신기(神技)다. 씨름은 힘만을 겨루는 것이 아니라 강인한 정신력, 재치, 순발력의 싸움이기도 하다. 점배가 승리하자 장내는 박수와 환호로 남강 모래사장이 떠나갈 듯 요동친다. 덩실덩실 춤을 추는 사람도 있다. 향토출신이 우승한 기쁨을, 느낀 그대로 표출해 내는 순박한 감정들이다.
씨름이 끝나면 우승자에게 주어지는 황소와 우승자를 앞세운 행렬이 자연스레 형성된다. 백사장을 벗어나 진주철교를 건널 땐 철교 위가 사람들로 빽빽하게 들어찬다. 촉석루(矗石樓)와 의암(義岩)을 바라보며 삼장사와 논개의 영령 앞에 승전보를 고하기라도 하듯 꽹과리 치고 징을 울리며 개선장군처럼 시내로 들어선다. 나도 덩달아 친구들과 어울려 극성스럽게 우승자의 꽁무니를 따라 다녔다.
왜 그토록 씨름판이라면 지남철처럼 끌려 다녔을까. 별다른 놀이가 없었던 시기라 남자들에겐 씨름이 가장 손쉬운 운동이고 취미였다. 그래서 씨름이 일찍이 우리의 민속놀이로 발전했을 것이다. 초등학교시절의 내 별명이 ‘데부짱’(우리말로 뚱보)이었는데 다들 체격이 좋고 힘이 세어 씨름에 소질이 있다며 나를 추켜세웠다.
장대동 둑 밑에서 자주 동네아이들과 씨름하며 놀았다. 여러 명이 모이면 남강 백사장을 찾아 편을 갈라 승부를 겨루었다. 나는 백사장에만 오면 절로 신이 나고 힘이 솟아났다. 또래아이들과는 물론 상급생들과 붙어도 거의 져 본적이 없었으니 다들 나하고 대결하는 것을 꺼려했다. 나의 특기는 들배지기, 무릎치기, 안다리걸기 등 다양한 편이었다. 학교대항전 선수로도 출전하였으니 그만하면 꼬마장사 소리도 들을만하지 않은가.
이런 실력을 바탕으로 아예 씨름판으로 나섰다면 내 장래는 어떻게 되었을까. 점배 장사만큼 명성을 떨치진 못했다 하더라도 고향 진주를 빛낼 수는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장사(壯士)가 된 나를 혼자 상상해 보곤 한다.
이렇듯 고향에는 어린 시절의 아련한 추억이 서려 있다. 지금은 백사장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지만, 그 시절의 남강 금 모래밭이 눈에 어른거린다. 초등학교시절 그곳에서 뛰놀던 친구들 그리워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에 잠긴다.
먼 바다로 나갔다가 모천(母川)으로 회귀하는 연어만큼이나 나도 고향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마음 간절하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고향의 개념이 바뀌었듯이, 몸은 비록 객지에 남겨두었어도 마음만은 늘 고향산천을 헤매고 있다면 그것도 일종의 모천회귀(母川回歸)라 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첫댓글 고향사랑이 대단하십니다
남강 모래사장에 쏟아지던 눈부신 그 햇살
울창했던 대나무숲을 타고 흐르던 바람의 소리도 그립습니다
저도 씨름구경을 몇번 했습니다
점배
진주 씨름의 상징 이지요
우리문우 양동근님의 아버지입니다
귀한 인연입니다
시장님의 고향 그리는 마음
저도 동감입니다
목이 쉬도록 불러봅니다
진주 진주 진주 ...............
안병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