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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스투스 타카야마 우콘(Justus Takayama Ukon) : 1500년대의 위대한 일본 선교사
토니 비트버, S.J.
안소근 실비아 수녀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대전 가톨릭 대학교 교수) 옮김
유스투스 타카야마 우콘이 세상을 떠난 지 사백 년이 지났다. 일본에서 그는 순교자로서뿐만 아니라 그가 예수회의 선교를 만나 실천했던 위대한 신앙의 증인으로서도 기억되고 공경을 받는다. 그는 1500년대 일본의 가장 위대한 선교사였다. 그가 일본 민족의 전형적인 끈기, 열성, 충실성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살면서, 유배지에서 죽기까지 했던 자신의 삶의 증언으로 그리스도교의 토착화를 도왔기 때문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이미 사람들은 그를 성인처럼 이야기했다.
기초: 일본에 선포된 신앙
우콘의 신앙의 발전과 그 특징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교가 어떻게 일본에 도래했으며 일본인들에게 어떻게 보였는지 기억할 필요가 있다.
1549년 4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인도를 떠나 같은 회의 두 형제들과 또한 고아(Goa)의 예수회 학교에서 공부했던 세 명의 일본인 개종자들과 함께 일본으로 갔다. 그 개종자들은 교리를 배운 다음 세례받기를 청했고 매우 열심히 영신 수련을 했으며, 그들이 다른 이들에게 주님을 선포하기를 갈망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그들과 함께 일본의 복음화 활동을 시작했고, 1551년 11월 16일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이 예수회원은 1549년 8월 15일 일본에 도착하면서 이 백성이 얼마나 복음을 알기를 갈망하는지를 확인했고, 그 지역의 관습과 습관들을 접하고서는 일본인들이 드러내 보였던 높은 도덕적 영적 가치들을 더욱 존중하게 되었다. 이 가치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사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일본 백성의 근본적인 특징 한 가지는, 모든 일본인들은 다른 이들 앞에서 자신의 영예를 보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개인은 다른 가치들을 포기하고 상대화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 고행과 엄격한 생활도 하고자 한다. 이것은 좋은 사회 질서와 사람들 사이의 상호 존중을 보장해 주었다. 실상 일본인들 사이의 관계는 안정적이었으며, 예의를 지키는 존경심에 뿌리를 둔 깊은 충실함을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시대에, 귀족과 토지 소유주들에 대한 깊은 존경은(우콘은 이러한 사회 계층에 속했다) 소위 “주군”에 대한 봉사의 자세와 무조건적 충성을 촉진시켰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영예를 보존하기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바치고자 했고, 자살까지 했다. 복음을 받아들이기로 결단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타협 없이 온전히 섬겨야 할 그들의 참된 주군으로 인정하는 순간, 이 결단은 그들이 일상 생활에서 종속되어 있던 그 주군들과의 관계에서 심각한 긴장과 오해들을 일으켰다.
이러한 맥락에서, 일본에서 십자가형으로 박해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태도를 규정한 또 한 가지 요소를 언급해 두어야 한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 주님의 수난과 십자가는 그가 파리에서 성 이냐시오의 지도 하에 했던 영신 수련 때부터 매우 중요한 특징을 띠었지만, 선교지에서의 체험들로 인하여 더 큰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직접 폭력적 죽음을 겪지는 않았으나, 다른 이들이 불의와 학대를 당하는 것을 보면서도 그들을 위해 개입할 수 없는 입장에서 내적으로 순교의 고통을 겪었다. 그는 언제나 이 고통을 깊은 상처로 지녔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고아에 있는 동료들에게 쓴 편지에서 말한 바와 같이 순교의 갈망을 품고 인도를 떠났다. 우콘에게도 이 갈망은 매우 강했다. 그는 복음을 선포하는 데 있어서 순교자들이 중요함을 굳게 믿으며, 1549년 2월 2일 시모네 로드리게스(Simone Rodrigues)에게 보낸 편지에서 순교가 십자가의 예수님을 따르는 방법임을 열렬히 강조했다. 그러므로, 영신 수련과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영성으로 깊이 특징지어진 첫 예수회원들의 설교와 복음에 귀를 기울이는 일본인들의 정신 모두가 그리스도의 수난을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으로 알아보도록 하는 데에 기여한 것이다.
우콘의 “탁월한 은사”인 신앙
박해에 대한 유스투스 타카야마 우콘의 태도는, 그가 신앙과 자신의 삶을 방향지은 가치들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 우콘은 아직 어렸던 1563년에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아직 참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멀었다. 진정한 그리스도교 교육을 받지 못했던 그는 부모의 모범을 따라 살았으며, 그 시대의 사고 방식 곧 더 강한 이의 권리를 기초로 하는 무사 정신에 매여 있었다. 이러한 정신으로 그는 1573년에 와다 아기쿠 코레나가(Wada Aigiku Korenaga)와 결투를 했는데, 그는 이 때의 상처로 인하여 한 주일 후에 죽었다. 우콘 자신도 상처를 입었던 이 결투는 그에게 삶의 의미에 대해 성찰하게 했고 그의 삶의 전환점이 되었다.
우콘은 프란치스코 카브랄(Francisco Cabral) 신부가 1574년에 타카추키에서 했던 그리스도교 교리 강의들에 깊이 매료되었으며, 이렇게 하여 복음의 메시지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 후에,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한 주님의 희생 제사를 인식하게 되면서 깊은 회심을 겪었다. 이것이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선교사가 되고 일본에서 가장 주요한 복음의 촉진자가 되게 했던 첫 번째 회심이었다. 그의 신앙은, 봉건 영주 아라키 무라시제(Araki Murashige)가 다른 봉건 영주 오다 노부나가(Oda Nobunaga)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시련을 맞게 되었다. 우콘은 두 영주 가운데 누구에게 복종할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 딜레마에 처하게 되었다. 그는 아라키에 대한 충성을 보여주기 위하여 자신의 자매와 큰아들을 그에게 인질로 주었으나, 오다는 그에게 타카추키의 성을 열어주지 않는다면 성당들을 파괴하고 선교사 신부들을 십자가에 못박겠다고 위협했다. 우콘은 결정을 하기 전에 물러나 기도했고, 무사로서 생각할 수 없는 일을 행했다. 그는 전투에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한 피해를 줄이고 문제를 평화롭게 해결하도록 노력했다. 그는 무장을 하지 않은 채 오다에게 가서, 자신을 방어하기를 포기하고 하느님의 손에 온전히 자신을 내맡겼던 것이다.
자신이 처해 있는 딜레마에 대한 인식과 그가 체험했던 무력감은, 그에게 하느님에 대한 더 큰 신뢰를 갖게 했고 자신의 지위, 명예, 그리고 삶 자체까지도 포기할 수 있게 했다. 그는 영웅과 같이 죽기까지 싸우곤 하던 인간에서 다른 이들을 위해 자신을 바치고자 하는 인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사랑할 수 있는 인간으로 변화되었다.
이 두 번째 회심에 힘입어, 유스투스 타카야마 우콘은 자신의 말과 외적인 행동으로써 뿐만 아니라 삶의 행실로써도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선교사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자신이 열두 살 때에 세례를 받은 이름인 ‘유스투스, 의인’이라는 이름을 영예롭게 했다. 이러한 그의 증언 때문에 이교인들은 그리스도교를 “타카야마의 법”이라고 불렀다.
사랑의 최고 증거인 박해
1587년 7월, 히데요시 쇼군(군대 지휘관)에 의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히데요시는 밤이 될 때 갑자기 우콘을 유배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 때에 유스투스 타카야마 우콘은, 내적으로는 아직도 자신이 무사라고 느끼고 있었기에 자신의 의지와 인간적 힘과 능력에 집착하면서도 위대한 신앙의 증거를 보였다. 그가 유배를 가게 되었다는 통보를 받은 후에 지배자들 앞에서 보여 준 태도는, 그가 얼마나 확신에 차 있었는지를 드러내 준다. 이러한 그의 태도 때문에 일부 친구들은 그를 매우 걱정했고, 히데요시에게 대답할 때 너무 단호한 어조를 보이지 말라고 설득하려 하기도 했다. 우콘은 이에 대하여, 하느님의 일들에서는 단호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우콘이 그리스도인이기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히데요시에게 역설하며 보여 주었던 그의 신앙은 그에게 내적인 힘과 영적 위로를 주었고,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으로 순교자로 죽고자 했다. 그는 머리카락을 자름으로써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자 하는 태도를 보여 주었다. 그 문화에서 머리카락을 자른다는 것은 내적인 슬픔의 표지였고, 일본인들은 장례 또는 추방 때에 머리를 자르곤 했었다.
한편 우콘의 부하들은, 그가 유배를 가게 된다면 그들도 같은 행동을 하고 그의 운명을 함께하고자 한다는 것을 선언하였다. 이것은 그에게 박해자들, 특히 히데요시에게 굳세게 맞서기 위한 격려가 되었다. 하느님은 그에게 순교에 대한 갈망을 길러 주시고 또한 그가 유배, 사회적 지위의 상실, 재산의 상실을 달리 바라보도록 도와 주심으로써 그에게 순교를 준비하게 하셨다.
1587년 박해 때의 우콘의 태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또 한 가지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그것은 자신이 받았던 사랑과 연대에 대한 우콘의 감사였다. 분명 그의 감사는 진실했고, 이것은 그가 그리스도교적 친교와 신앙 안에서의 위로와 격려의 필요를 느끼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표지이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이 필요를 깊이 인정하고 고백하는 정도에 이르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계속해서 다른 이들에게 의지하지 않는 태도를 간직했고, 오직 자신의 능력만을 믿었다. 진심으로 이웃을 돕고자 했으면서도, 도움을 받는 것은 아직 배워야 했다. 자신의 무력함과 자신의 필요를 체험할 때까지는, 그에게서 하느님에 대한 진정한 신뢰가 자라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히데요시의 명령과 그의 추방이 있은 후에 우콘은 사회적 지위와 재산의 상실을 받아들이고 가난하고 검소한 삶을 살게 되었고, 소도시마 섬에 숨어 살아야 하는 것도 받아들였다. 이러한 극적인 상황 속에서도 그는 다른 이들을 위로하고 예수 그리스도께 충실하고자 하는 그들의 결심을 격려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유배의 단죄와 이 세상을 버리기로 한 우콘의 결단은 그와 다른 이들의 관계도 변화시켰다. 그는 “순례자”, 곧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도우심을 청하는 사람이 되었으며 전에 그에게 종속되었던 이들에게 동료가 되었다. 가난의 체험은 그에게 자신이 하느님과 다른 이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것을 받았는지를 깨닫게 했고, 그 안에서 감사가 자라나게 했다. 첫 번째 큰 박해 때에 그가 배웠던 것은 그가 회복된 후에도 그의 태도를 특징지었다. 그는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다른 이들이 주는 것을 받아들여 그것을 다시 다른 이들을 위하여 사용되게 할 수 있었다.
예수회 선교사 신부들과 깊은 관계를 가지며 많은 이들을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회심시키는 일에 협력하면서, 신앙에 대한 그의 인식과 경험은 더 깊어졌다. 실상, 히데요시가 예수회 신부들을 죽일 것을 명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이를 마치 하느님께서 그 자신의 순교를 “일으키려고” 생각하신 것과 같이 하느님께서 그에게 은총을 주고자 하시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우콘은 “능동적 순교”를 꿈꾸며 영웅적 죽음을 갈망했고,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받아 십자가에서 죽기를 갈망했다. 분명 그는 자신의 삶을 바치고자 했지만, 그때에는 아직 더 분명하게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 요구될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다.
순교의 은총
1614년에 고국에서 추방되고 마닐라로 힘든 유배의 길을 떠나게 되는 것은 우콘에게 하나의 은총이었다. 그를 신앙에서 진보하게 하고 영적 인간으로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증인으로서 더욱 성숙하게 했기 때문이다. 온갖 고통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의 마지막 해는 그가 일본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공경받고 요하네스 라우레스(Johannes Laures) 신부가 정의했던 바와 같이 진정한 순교자로 변모하는 데에서 결정적이었다.
우콘의 영적 성장 과정을 기술하면서, 베드로 모레혼(Pedro Morejon) 신부는 그가 마주했던 세 번의 신앙의 시련을 말한다. 다른 이들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고자 했던 굳은 결심은 소위 첫 번째 신앙의 시련이었던, 아라키가 오다 노부나가를 거슬러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도 이미 있었다. 모레혼은 우콘이 그 때에 “무죄한 이들을 대신하여 죽으려 했다”고 말하며, 오다 노부나가가 그를 불렀지만 우콘은 자신은 그를 섬기러 온 것이 아니라 예수회 신부들과 함께 죽거나 유배를 가기 위하여 왔다고 대답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때에도 이미 하느님은 그를 시험하여, 다른 이들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치고자 하는 자세에서 진보하게 하고자 하셨다.
히데요시가 추방을 명했을 때 – 이것이 두 번째 신앙의 시련이었다 – 우콘은 기쁘게 이를 받아들였다. 그는 영신 수련과 총고해로 순교를 준비하기 위하여 예수회 신부들을 찾았고, 주님은 다시 그가 남쪽 지방에 유배가 살았던 26년 동안 그의 증언이 “복음의 씨앗”이 되도록 섭리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자 하는 마음은 조앙 나이토(Joãn Naitō)와 그의 아들 토메(Tomé) 같은 그의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있었다. 추방과 유배는 하나의 순교이다. 모레혼 신부가 말하듯이 그것이 “연장된 순교”의 한 형태일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못받는 이들의 손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이 자신을 내어 주신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무력함에 더 깊이 참여하게 하기 때문이다. 추방과 유배로 하느님은 자신의 목숨을 바치고자 하는 우콘의 갈망을 들어 주셨지만, 그가 상상한 것과는 다른 방식이었다. 추방과 유배로 – 그리고 이것이 세 번째 신앙의 시련이다 – 우콘에 대한 하느님의 교육은 계속되고 완성되었다. 그는 생명도 죽음도 자신의 손 안에 있지 않고 하느님의 손 안에 있으며, 온전히 그분께 자신을 의탁해야 함을 깨닫게 되었다.
배를 타고 마닐라로 떠나기 전 아홉 달 동안, 우콘은 계속 폭력에 의한 죽음으로서의 순교에 대한 희망을 간직했다. 그는 자신이 일본을 떠나기 전에 죽임을 당하리라고 믿었고, 매우 평온하게 죽음을 기다렸다. 그는 황제를 섬기고자 했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에 관련된 것에서는 그에게 순종하려 하지 않았다. 마닐라를 향한 항해와 유배는 하느님께서 그에게 능동적인 순교의 갈망과 수동적으로 천천히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 사이의 차이를 깨닫게 하시는 시간이었다. 우콘은, 하느님께서 그에게 목숨을 바칠 것을 요구하시지만 한 순간의 죽음이 아니라 유배라는 연장된 순교의 형태로 이를 요구하심을 개달았다.
마카오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회 신부들과 함께 마닐라로 가기로 결정함으로써, 우콘은 그들에 대한 깊은 존경을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들의 영적 지도를 필요로 함을 보여 주었다. 그는 자주 예수회에서 제시하던 영신 수련과 묵상들을 하기를 청했다.
우콘의 겸손은, 마닐라에 도착한 후 그에게 영예가 주어졌을 때에도 드러났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는 존경의 표현들에 감사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부당하기에 그 존경이 부담스럽고 짐스럽다고 말했다.
우콘은 겸손하여, 모든 사건을 자신의 공로로 마땅히 받을 것으로 여기지 않고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으로 알아보고 받아들였다. 삶의 마지막까지 그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목숨을 바치고자 하는 갈망을 충실히 간직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순교자가 되기를 원했고, 참으로 그러한 순교자였다.
발레리오 데 레데스마(Valerio de Ledesma) 신부가 전하듯이 우콘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리고 첫 순교자 스테파노처럼 자신의 영혼을 주님께 드리며 삶을 마쳤다. “그는 여러 차례 입과 마음으로 예수님과 마리아의 지극히 거룩한 이름을 불렀다. 그는 63세였고, 그리스도인이 된 지 50년이 되었다. 그동안 그는 자신이 한번 약속했던 법을 지키는 데에서 변함이 없었다. 만일 변함이 있었다면 그것은 선에서 더 큰 선으로 변화하고 매일 신심에서 성장하며 또한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그리고 자신의 거룩한 법을 고백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자 하는 갈망에서 성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오늘의 교회와 사회를 위한 모범이며 전구자인 우콘
우콘은 처음에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하나의 “법”으로서 살았지만 – 그래서 신앙을 일본 문화와 전통에 반대되는 것으로 볼 수 있었지만 – 곧 그리스도교가 사랑의 체험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느님의 손 안에 든 도구가 되기 위하여 하느님의 사랑에 의하여 변모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소명이다.
우콘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어떤 문화에도 대립되지 않으며 오히려 모든 문화를 심화하고 완성으로 이끌 수 있는 사랑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리스도교는 어떤 문화가 자신을 절대화하려 하거나 어떤 세속 권위가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려 할 때에만 문화를 문제삼는다. 우콘은, 모든 것에서 최고 권위이신 하느님께 순종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럼으로써 그는 자신의 주인들에게 온전한 충성을 보이면서도 내적으로는 자유로웠다.
1614년의 박해는 전반적이었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향했다. 그 박해를 피하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버리는 것이었다. 우콘은 일본의 신생 그리스도교 교회에서 그가 지니고 있던 중요한 역할 때문에 1587년부터 이미 박해자들의 특별한 주목을 받고 있었다. 그가 보여준 확고한 믿음은 그들에게 도전이 되었고, 그가 신앙을 버리게 하려는 시도들은 많았으며 점점 더 강해졌다.
우콘이 유배지인 마닐라에서 세상을 떠난 것은 처음 보기에는 자연사로 보일 수 있고, 그래서 순교로서의 가치를 의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하느님의 종이 겪은 유배와 수고, 그리고 점차로 그를 약하게 만들었던 모든 고생을 더 깊이 평가한다면, 그의 죽음이 박해의 고통과 어려움들 때문임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실상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문헌들에서는 그 죽음이 유배 동안에 겪은 고통들로 인한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그의 유배와 죽음에 대해 말하는 오래된 문헌들 외에도, 우콘이 처음부터 거룩한 사람으로서 공경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교 신앙을 결코 부인하려 하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로 공경을 받았다는 사실이 있다.
그의 신앙의 증언은 설득력이 있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의 삶이 많은 이들을 복음으로 이끌었듯이, 그의 순교의 피는 계속해서 “그리스도인의 씨앗”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