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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216 (화)
- 신라의 불교와 선덕여왕 ③ : 선덕여왕 - 역사이야기 (4-3)
설날을 즐겁고 재미있게 보내셨겠지요?
당초 눈이 오실 것이라는 예보가 없었는데 갑자기 눈이 많이 와서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빨리 녹아서 좋았습니다.
드디어 “선덕여왕”까지 와서 마무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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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제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 : 재위 632~647 = 16년)
(1) 선덕여왕의 등극
(앞에서 말씀드렸던 내용을 잠시 다시 살펴봅니다.)
“선덕여왕”은 “진흥왕”의 큰아들로서 일찍 돌아간 “동륜태자”의 다시 큰아들인 “진평왕”의
큰딸인데 아버지의 이름은 석가모니부처님의 아버지와 그 이름이 같은 “백정반(白淨飯)”,
또는 “백정(白淨)”이고 어머니의 이름은 석가모니부처님의 어머니와 이름이 같은
“마야부인(摩耶夫人)”입니다.
그렇다면 “진평왕”과 “마야부인”은 석가모니부처님의 부모와 이름이 같으므로 당연히
그 사이에서는 석가모니불이 나와야하는데 석가불은 당시를 기준으로 이미 천여 년 전에
인도 가비라성에서 태어났던 과거불이니 당대의 신라에서는 “당래불(當來佛 = 미래에
마땅히 와야 할 부처님)”인 ”미륵불(彌勒佛)“이 태어나야만 하게 됩니다.
여기서 불교가 중국문화권으로 들어오며 여체(女體)로 인식하기 시작한 “미륵보살
(彌勒菩薩)”의 화신(化身)으로 “선덕여왕(善德女王)”이 출현하게 되었으리라고 보입니다.
선덕여왕은 아버지인 진평왕이 무려 54년간이나 왕위에 있었기 때문에 나이가
약 53세에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이때는 고구려, 백제와 서로 치열하게 다툼이
있던 시기라서 매우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이름은 “덕만(德曼)”이고 신하들이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황제의
호칭으로 호를 지어 올립니다.
* 신라왕의 재위기간이 오랜 순서를 보면 제1대 박혁거세거서간이 61년 이었고 다음이
진평왕의 54년이고 그 다음은 제16대 흘해이사금과 제17대 내물이사금의 47년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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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는 모계사회였나? ]
종래에는 신라가 모계사회 전통이 강하여 여왕이 출현했으리라고 주장해왔으나 이는 섬나라
일본이 섬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모계사회 전통이 있어 여왕이 있었던 것을 일제(日帝)
사학자들이 이를 그대로 우리역사연구에 적용해서 생긴 오류인데 우리는 이를 이제까지
아무 생각 없이 그대로 통설로 수용하였던 결과입니다.
모계사회는 아비가 자주 바뀌어서 아비를 알 수 없는 자식이 태어나는 환경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데 따라서 유목사회나 섬 지역에서 주로 형성된다고 연구결과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착생활이 불가피한 농경사회에서는 이런 모계사회가 형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먼저 생각해야만 합니다.
<삼국지 왜전(三國志 倭傳)>이라는 역사서에 의하면 일본에 여왕국이 있었다는 기사가 있고
또 왜나라 여왕 “비미호(卑彌呼)”가 위(魏)나라 천자인 명제(明帝)에게 조공을 바치자
여왕에게는 “친위왜왕(親魏倭王)” 그리고 그 신하들에게는 응분의 벼슬과 하사품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토록 일본은 국제사회에 그 존재가 알려질 때부터
여왕국 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라는 나라가 생긴 이래로 선덕여왕 때까지 여왕이 한 번도 없었고 왕태후의
섭정도 진흥왕 초기가 처음이니 따라서 신라를 모계사회라고 단정할 수 없으며 더욱이
그로 인해서 여왕이 나왔다는 것은 도무지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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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륵보살은 누구인가? ]
그럼 여기서 “미륵”은 누구인가를 또 짚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옛날 중인도의 “바라나국(波羅奈國)”에 한 재상이 있어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부처님과
같은 32상(三十二相)을 타고났으며 그 어머니는 아이를 가지고부터 마음이 자비롭게
바뀌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관상사(觀相士 )에게 물어보니 이름을 “미륵”이라고 지으라고
합니다. 여기서 “미륵”이란 ”자비, 사랑, 우정“의 뜻으로 그래서 나중에 ”미륵보살“을
”자씨보살(慈氏菩薩)“이라고도 부르게 됩니다.
“미륵”은 석가모니부처님의 제자가 되는데 “미륵”은 장차 석가모니부처님의 교화(敎化)가
끝난 다음에 이 사바세계에 다시 출현하여 교화(敎化)할 인연이 있으므로 “일생보처불(一生
補處佛 = 중생을 모두 이끌고 ‘대각=大覺’을 이루기 위하여 잠시 부처가 되는 것을 미루고
보살로 남아있는 분)”로 남게 됩니다. 그래서 석가모니부처님은 “미륵”에게 당신이
입으려고 하시던 ”금루직성가사(金縷織成袈裟 = 줄여서 ’금루가사‘ 라고도 함 = 금실로 짠
가사)“를 전해줍니다.
그리고 장차 지구상에 전륜성왕이 지배하는 세상이 오면 즉, 인간수명이 8만 4천세가 될 때
즉, 5억6천7백만 년 후에 다시 지구상에 태어나서(= 하생-下生한다고 합니다) 성불(成佛)
하고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삼회(三會 = 세 차례)의 설법을 하여 널리 중생을 제도(濟度)
하고 이 땅에 ”용화세계(龍華世界)“를 건설할 것이라는 것을 예언합니다.
* 이는 미륵보살이 사는 도솔천(兜率天)에서 천수(天壽)인 4천세를 채웠을 때인데 도솔천의
하루는 인간의 400년에 해당하므로 5억6천7백 만년이 됩니다.
➜ (4,000세 x 400년 x 360일 = 5억6천7백만 년)인데 일부 불교서적에서
56억7천만년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계산으로 봄.
(도솔천에서 “도 = 兜”의 우리나라 발음은 원래 “두”입니다.)
* 그래서 불교사찰에 가면 미륵보살을 모신 전각이름을 “미륵전(彌勒殿)” 또는
“용화전(龍華殿)” 또는 “자씨전(慈氏殿)”이라고 부릅니다.
* 그러나 “미륵사상”은 때때로 정치적인 이용 그리고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원인이 되는
사례를 보이는 경우가 있어서 백성들을 정신적으로 혼란케 하는 일이 종종 보이는데
그 대표적인 경우가 후삼국시대 “후고구려-마진(摩震)-태봉(泰封)”의 왕이었던
“궁예(弓裔 : 853?~918 : 재위 901~918 = 18년)”의 경우, 처음에는 법명을
“선종(善宗)”이라 하다가 나중에는 스스로 “미륵”을 자처한 사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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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미륵보살의 하생(下生)과 각국의 미륵보살 모시기
다시 “선덕여왕”으로 돌아와서, 미륵보살은 원래 남자인데 AD 3세기이후부터
조성되는 불상을 보면 주로 여성적 용모로 표시하는데 이는 우리가 전에 보았던
“미륵보살반가사유상(彌勒菩薩半跏思惟像)”에서도 그렇게 표현하는 것을
이미 살펴본 바 있습니다.
* 참고로 미륵보살을 불상으로 표현할 때에는 도솔천에 계실 때를 “상생(上生)”이라 하여
다리를 서로 교차시켜 앉는 “교각좌상(交脚坐像)”으로 표현하고 인간 세상에 내려오는
“하생(下生)”에서는 우리가 앞의 사진에서 보듯이 “반가상(半跏像)”, 또는 “반가사유상
(半跏思惟像)”으로 표현합니다.
삼국시대에는 서로 간에 전쟁이 많고 또 많은 사람들이 죽는 등의 사람들의 삶이
매우 어려운 처지에 있어서인지 미륵보살이 많이 조성되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국보 제78호와 국보 제83호의 “금동미륵반가상(金銅彌勒半跏像)”이 있고 또
국보 제84호인 “서산마애삼존불(瑞山磨崖三尊佛)“의 좌협시보살(左脇侍菩薩)인
”미륵보살사유반가상“ 등이 대표적입니다.
* 치열한 전쟁이 계속되는 삼국시대에는 “현세구원적인 신앙”인 “미륵사상”이 크게 성행
했지만 통일신라 이후에는 “극락왕생(極樂往生)”을 바라는 “아미타신앙(阿彌陀信仰)”이
널리 전파되어 “아미타불”을 모시며 “나무아미타불”을 즐겨 외우고 또 그 협시보살인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많이 찾게 됩니다.
* 그리고 한편으로는 법신(法身)이 있는 석가모니불이나 아미타불 이외에도 법신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진리의 광명(光明)” 즉, “빛을 나타낸다.”는 이념적 본질을 불상으로
표현한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형상화하여 모시게 되는데 이후에는 이 부처님이
“화엄종”의 사찰에서 으뜸으로 모시는 부처님이 됩니다.
* 그렇지만 미륵을 모시는 사상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와 고려시대에도 계속되어
지금도 전국적으로 수많은 “미륵보살”을 볼 수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경기도
안성지방에는 무려 18기의 “미륵상”이 있어서 중부지방에서 특히 성행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 사찰에 남아있는 것 중 대표적인 것은 전북 김제 모악산(母岳山)의
“금산사(金山寺)”와 충북 보은 속리산(俗離山)의 “법주사(法住寺)” 등에서 확인되고
있습니다.
⇒ 부처님들 이름과 모습과 모시는 전각 그리고 옆에 협시하는 보살님들과 이에 따른
이야기들에 대하여는 다음에 다시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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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의 미륵보살 모시기 ]
(ㄱ) 태안반도와 예산 주변
백제는 특히 해양진출과 활동을 크게 도모하였는데 그래서 현재의 태안반도와 서산과
예산 주변의 가야산 일대의 내포평야(內浦平野)지대에 많은 불교유적, 특히 “미륵”에
대한 많은 유적을 남겨 놓는데 그것들은 앞에서 잠시 언급하였던 ”예산사면석불“과
”태안마애삼존불“ 그리고 ”서산마애삼존불‘입니다.
(ㄱ-1) 예산 사면석불(禮山 四面石佛 : 보물 제794호)
백제 제26대 성왕(聖王 : 재위 523~554) 5년인 서기 527년에 재위 시 백제의 국력을
크게 신장시키고 해상권을 장악했던 아버지인 제25대 무녕왕을 기리기 위하여 충남 예산군
봉산면 화전리에 세웠는데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사면석불” 또는 “사방불(四方佛)”이라고 부르는 이 불상은 4면에 모두 불상이 있는데
“동방-약사여래”, “서방-아미타여래”, “남방-석가여래” 그리고 “북방-미륵여래”의
4 부처님을 모셔서 그렇게 말하는데 여기서 “미륵여래”가 “무녕왕”을 나타낸 것으로
봅니다.
땅속에 묻혀 있다가 1983년에 발견된 이 불상은 높이가 약 3미터, 넓이는 넓은 쪽이
약 (110~120cm), 좁은 쪽이 약 (50~60)cm 정도의 크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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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2) 태안 마애삼존불(泰安 磨崖三尊佛 : 국보 제307호)
충남 태안군 태안읍 백화산(白華山) 정상에 있는데 당초 보물 제432호 이었으나 다음에
말씀드리는 국보 제84호인 “서산마애삼존불”에 비하여 시대도 앞서고 조각기법도 별로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여 2004. 08. 31일 국보로 바뀌었습니다.
백제 제27대 위덕왕(威德王 : 재위 554~598) 초에 불행한 죽음을 당한 아버지인
제26대 성왕을 위로하고 백성들의 울분을 달래기 위하여 조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통상 삼존불은 가운데에 주불이 서있고 양쪽에 협시하는 보살이 있는 “1여래-2보살”의
형태인데 이 삼존불은 독특하게도 양쪽에 키가 큰 두 분의 여래가 있고 가운데에 키가 작은
한분의 보살이 있는 “2여래-1보살”의 형태로서 이는 중국 하남성 낙양에 있는
“운강용문석굴(雲岡龍門石窟)”에서 그 형태를 따온 것으로 보입니다.
양쪽 주불의 높이가 약 2미터, 가운데 보살의 높이는 약 1.3미터입니다.
두 분의 여래는 아미타여래와 약사여래(구슬모양을 들고 있음)로 보고 한분의 보살은
관세음보살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당시 백제의 어려운 상황에서는 삼세불(三世佛)
개념이 더 중요하여 오히려 석가모니불과 미륵불로 보는 것이 훨씬 타당성 있다고
주장하는 학설이 더 수긍할 만합니다.
* 삼세불 : 과거의 연등불, 현세의 석가모니불, 미래의 미륵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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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3) 서산마애삼존불(瑞山磨崖三尊佛 : 국보 제84호)
충남 서산군 운산면 용현리에 있으며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이 마애삼존불은 위의
“태안마애삼존불”보다 훨씬 세련된 조각기법을 보여주고 있어서 제27대 위덕왕 말년이나
또는 왕이 돌아간 직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마애불은 “태안마애불”의 “양불협시(兩佛脇侍)”라는 불합리성을 개선하여 정통형태의
(1여래-2보살)의 형태를 보이고 있는데 세분의 웃는 모습이 너무나 밝고 환하여 보는
이들을 매료시켜서 앞에서 말씀드렸던 "백제의 미소“라고 부르며 사랑받고 있습니다.
가운데 부처님은 “석가모니불(손 모양을 ‘시무외 여원인-施無畏 與願印’ 이라고 함)”
이라고 보고 우협시 보살은 구슬을 받쳐 들고 있는데 “관세음보살”로 보며 좌협시보살은
“미륵보살반가사유좌상”으로 봅니다.
가운데 부처님은 약 2.8미터, 좌협시 보살은 약 1.7미터, 우협시 보살은 약 1.66미터의
높이입니다.
전에는 지붕을 씌워서 보호하였으나 오히려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하여 다시 걷어내어서
훨씬 보기가 좋은데 낮 12시쯤이 불상들의 미소가 가장 아름답다고 합니다.
* 이 “서산마애 삼존불”이 있는 근처에는 “예산사면석불”, “태안마애삼존불” 이외에도 바로
옆에는 통일신라 때 “화엄십찰(華嚴十刹)“ 중의 하나였던 ”보원사(普願寺)“ 터가 있고
동남쪽으로는 백제 멸망 후 최후의 항전을 하였던 “임존산성” 그리고 주변에는 아름다운
사찰로 잘 알려진 “개심사” 또 성곽의 모습이 잘 보존 되어 있으며 카톨릭 성지이기도 한
“해미읍성” 그리고 조계종 5대 총림중의 하나인 “수덕사”와 제가 존경하는 경허대사가
깨달음을 얻으신 “천장사” 그리고 “추사 김정희 고택“, “윤봉길의사 기념관”, “덕산온천”
등이 있으며 또한 조선시대 유명한 스님인 “무학대사”가 깨달음을 얻으신 “간월도”와
1868년 독일인 “오페르트”의 도굴사건으로 유명해진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묘”가 있어서 몇 번이고 가볼만 합니다.
또한 조금 떨어진 당진군 면천면에는 비록 성곽의 일부만 남아있기는 하지만 매우
잘 축조된 “면천읍성“이 있으며 또한 ”약사여래“가 멋있는 ”영탑사“가 있는데
여기서는 진달래꽃으로 만든 술인 ”면천 두견주“가 유명합니다.
- 현재모습
- 옛날 모습(195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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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익산 미륵사(彌勒寺) 창건
재위 45년 동안 백제의 위상을 크게 높이고 영토를 확장했던 제27대 위덕왕(威德王 : 재위
554~598)이 돌아가자 제28대 혜왕(惠王: 재위 598~599)이 뒤를 이었으나 1년 만에 돌아
가서 제29대 법왕(法王 : 재위 599~600)이 이어서 왕위에 오르나 역시 1년 만에 돌아가서
제30대 무왕(武王 : 580?~641, 재위 600~641)이 뒤를 잇게 됩니다.
“무왕”의 이름은 “장(璋)”인데 제29대 “법왕”의 아들로 보고 있으나 정식 왕비나 후궁의
소생이 아니고 당시 서울인 “부여” 남쪽 못가에서 살던 과부의 소생이라고 전해져 옵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 과부는 집 앞에 있는 연못의 용(龍)과 사귀어서 무왕을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옛날 설화에서는 임금을 종종 용으로 표현하니 법왕의 아들이라고 보는 것
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집안이 어려워서 우리가 지금도 먹는 “마(한자로는 서-薯)”를
캐어 파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하니 사람들이 “마동(=서동-薯童)”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서동은 신라 진평왕의 제3공주인 “선화공주(善花公主)”가 매우 아름다우며 또한
신라에서 “미륵선화”로 불린다는 말을 듣고 마를 가지고 신라 서울인 서라벌로 가서
골목마다의 뭇 아이들에게 마를 주어 친해져서 다음의 노래를 부르며 다니게 합니다.
---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시집가서 밤마다 마동 서방을 안고 잔다네.” ---
이 노래가 임금에게 들어가니 크게 노하여 선화공주를 귀양 보내는데 마동이 길 가운데에서
절하며 모시고 가겠다고 하여 함께 가다가 몰래 관계를 맺고 같이 사는데 마침 왕이 죽자
마동이 왕위에 나가게 됩니다.
위의 노래가 “서동요”이고 이 이야기는 모두 아시니까 더 이상의 자세한 이야기는
여기서 그만둡니다.
* 서동요(薯童謠) : 우리나라 향가(鄕歌) 중 가장 오래된 노래인데 우리말의 발음을 한자를
빌려 표기하였는데 이런 표기를 통상 “향찰(鄕札)”이라고 합니다.
- “향찰” 이외에 한자를 빌려 우리말을 표현하는 것에는 또 “이두(吏頭 또는 吏讀)”
그리고 “구결(口訣)“이 있는데 이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합니다.
⇒ 선화공주주은(善化公主主隱)
타밀지가량치고(他密只嫁良置古)
서동방을(薯童房乙)
야의묘을포견거여(夜矣卯乙抱遣去如)
⇒ 선화 공주니믄(선화공주님은)
남 그즈지 얼어 두고(남 몰래 시집가서)
마동 방을(마동 서방을)
바매 몰 안고 가요(밤에 몰래 안고 가요)
왕위서열에서는 한참 먼 거리에 있었을 무왕이 왕에 오르게 된 사유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였다고 하며 또한 타고난 잘생긴 모습과 용기, 모험심등을 갖추고 있었으며
그러나 무엇보다도 “선화공주”를 “미륵선화”로 인식하고 신라에서 빼앗아 온 공로가 가장
크다고 할 것인데 이 사건으로 그는 백제의 “국민적 영웅”이 되었는데 그 이전에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 신라 진지왕 시절 “흥륜사” 승려인 “진자대사(眞慈大師)”가 미륵부처님께 발원하며
미륵이 신라에 태어나도록 하여 나라를 크게 발전시키기를 기원하니 꿈속에서 백제에
가면 네가 원하는 바가 있으리라는 말씀이 있어서 백제의 “웅천(熊川 - 지금의 공주 =
백제 이전 도읍지)“에 있는 수원사(水源寺)라는 절에 가서 잘생긴 미소년을 데리고
옵니다. 그리하여 이름을 “미시(未尸)”라고 하는 이 소년을 왕에게 보이고 곧 국선(國仙)
으로 삼았는데 “미시” 즉 “미시랑(未尸郞)”은 한동안 주위사람들을 잘 교화하고 잘
이끌더니 7년 만에 홀연히 사라졌는데 이때가 신라에서는 진평왕 등극 바로 이후이며 곧
“선덕여왕”이 되는 “덕만”이 태어나는 때인데(580년?) 이는 곧 신라에 ”미륵“이 하생
(下生)한 것으로 보아서 백제는 ”미륵“을 신라에 도둑맞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무왕이 “선화공주”를 데려온 것은 곧 빼앗긴 “미륵”을 되찾아 왔다고 보는 것인데
어느 날 무왕과 왕비인 “선화”가 익산지역에 있는 “용화산(龍華山) 사자사(獅子寺)”로
신통력이 뛰어난 지명법사(知命法師)를 찾아가는 도중에 용화산 아래 큰 연못가에 이르니
연못 속에서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나타나셔서 가기를 멈추고 크게 예배하고
지명대사에게 요청하여 하룻밤 만에 산을 무너뜨려 못을 메우고 “미륵사”를 짓게 됩니다.
그리고 미륵의 “삼회 설법(三會 說法)”을 의미하는 ”3개의 탑과 3개의 금당“을 세우니
곧 “삼탑삼금당(三塔三金堂)”의 미륵사가 창건되는 것입니다.
⇒ 그런데 미륵사지 서쪽의 석탑을 보수하기 위하여 해체하여 조사하는 도중에 지난 2009.
01. 14일 그 속에서 “금제사리호(金製舍利壺)”와 “사리봉안기(舍利奉安記)” 등 683점의
유물이 나와서 관계자들과 전 국민의 환호성을 받았었는데 여기서의 기록에는
“선화왕비”의 이름이 나오지 않아 학자들 간에 논란이 많은데 “백제와 신라 사이의
미륵을 서로 모시려는 의도“ 까지 따질 필요는 없는 것이라고 보입니다.
--- 미륵사지 석탑 - 해체하기 전 (국보 제11호)
당초 9층탑이었으나 6층까지만 남아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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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ㄷ) 국보 제7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金銅彌勒菩薩半跏像)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높이 83.2cm의 이 작품을 왜 백제의 것으로 보는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는 여기서는
생략하는데 보살님의 머리에 쓴 것은 “보관(寶冠)”으로 국보 제83호와 다른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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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의 미륵보살 모시기 ]
백제의 “마동“이 ”선화공주(善花公主)“를 유인하여 왕비로 삼고 ”미륵사“를
창건하며 신라에서 “미륵선화(彌勒仙花)”를 빼앗아 왔다고 선전하고 잇달아 신라의
국경을 침범하여 땅을 빼앗아 가자 신라인들은 당혹감과 실망감과 분노로 치를
떨게 되는데 그 이전에 “선화공주”의 불미스러운 소문을 침소봉대하여 귀양을
보내자고 주장하였던 반 진골(反 眞骨) 보수 세력들은 난감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진골세력들이 보수 세력의 힘을 약화시키는 전화위복의 기회가 됩니다.
또한 신라사회에서는 하루빨리 “미륵선화”를 출현시키기 위하여 “덕만공주”를
“미륵선화”로 선포하고 국력과 민심을 결집하기위하여 “미륵상”을 조성하기
시작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과
“국보 제199호 신선사 마애불상군” 그리고 “보물 제997호 봉화 북지리
석조미륵보살반가상” 등인데 아래에서 다시 소개합니다.
(ㄱ)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金銅彌勒菩薩半跏像)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지난번 “부처님 10대 제자” 편에서도 소개하였던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
반가상(金銅彌勒菩薩半跏像)“은 그 아름답고 생동감 넘치는 신상(神像)의 모습이
당시 신라사회의 순수한 신앙심이 온 사회를 하나로 뭉치게 하여 털끝만큼도
의심하지 않아야 하는 염원이 모여져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서 백제의
”국보 제78호“에 대응하는 작품으로서 우리문화유산 속에서도 가장 으뜸중의
하나로 치고 있습니다.
또한 이 “금동미륵보살반가상”은 당시 신라 최초의 여왕이며 미륵보살이
하생(下生)하신 “미륵선화”인 “선덕여왕”을 나타낸다고 보고 있는데 보살님이
머리에 쓰신 관을 통상 “삼산관(三山冠)”이라 부르며 국보 제78호의
“보관(寶冠)”과 구분합니다.
높이는 93.5cm으로 “국보 제78호” 보다 약간 큽니다.
*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국보 제78호”와 “국보 제83호”의 “금동미륵보살반가상”을
교대로 전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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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국보 제1호 “목조보관미륵보살반가상(木造寶冠彌勒菩薩半跏像) : 높이 83.3cm
지난번 “부처님 10대 제자와 전등 33세 조사” 편에서도 소개해 드렸었는데 위의 우리
국보 제83호와 아주 비슷한 모양의 일본 국보 제1호로서 “교또(京都)”의 “고류지(광륭사
-廣隆寺)”에 있는 “목조보관미륵보살반가상(木造寶冠彌勒菩薩半跏像)”에 대하여 독일의
유명한 실존주의 철학자인 ”칼 야스퍼스(Karl Theodor Jaspers : 1883~1969)“가
1945년 일본에 와서 이 불상을 보고 쓴 ”패전(敗戰)의 피안(彼岸)에 남긴 것들“이라는
글에 있는 내용을 다시 소개해 드립니다.
-- “나는 지금까지 철학자로서 인간존재의 최고로 완성된 모습을 표현한 여러 형태의
신상(神像)들을 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조각들에는 어딘지 인간적인 감정의
자취가 남아있어 절대자만이 보여주는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이 미륵상에서 인간존재의 가장 정화되고, 가장원만하고, 가장 영원한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나는 철학자로 살아오면서 이 불상만큼 인간실존의 진실로 평화로운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 그런데 우리나라 불교역사가들에 따르면 이 반가상은 신라 제26대 진평왕 44년(622년)
당시 49세의 나이로 돌아간 일본의 “성덕태자(聖德太子 : 574~622)”를 기리기 위하여
진평왕 45년(623년) 신라에서 조성하여 보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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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국보 제199호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斷石山 神仙寺 磨崖佛像群)
경북 경주시 건천읍 송선리의 단석산(斷石山 - 827미터) 중턱에 있는“신선사“라는
절의 뒤에는 바위에 낮은 돋을새김으로 조성한 “국보 제 199호 마애불상군”이
있는데 아주 흥미롭습니다.
이 산은 “김유신장군(595~673)”이 15세(609년) 때 용화랑(龍華郞)이 되어
수행 중에 하늘에서 보검(寶劍 = 천검-天劍)을 얻어 바위를 내리친 흔적이 있다는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여기는 “ㄷ”자 모양의 암벽이 빙 둘러 있어서 마치 석실(石室)을 이룬 형태인데
사방으로 3분의 부처와 4분의 보살과 2분의 공양상(供養像)과 1분의 스님,
총 10분의 조각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중에 북쪽면의 바위를 보면 맨 오른쪽에는 “삼산관(三山冠)”을 쓰고 있는
“미륵반가상(높이 110cm)"이 있고 그 왼쪽에는 “2불1보살(오른쪽부터 각각
105cm, 102cm, 116cm)”이 서있는 자세로 있는데 이 부처와 보살이 각기 왼손을
들어 맨 오른쪽의 “미륵보살”을 가리키며 무엇을 인정하거나 또는 누구를 인도해
가는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이분들은 각각 순서대로 석가모니불, 문수보살,
연등불로 보며 이 분들이 미륵의 하생을 확인하는 모습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마애불상군의 조성 시기는 김유신장군이 젊어서 수련하던 곳이라고 하는 점을
감안하여 진흥왕 37년(576년)부터 진평왕 31년(609년)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 시기는 “덕만공주“가 ”원화“ 즉 ”선화“가 되어 있을 때와
같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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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ㄷ) 경주 송화산 석조미륵보살반가상 :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경주시 충효동 송화산(松花山)에 있는 김유신장군묘를 지키는 재실(齋室)인
“금산재(金山齋)”에 전래되어 오다가 1930년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온 것인데
현재 남아있는 기준으로 높이 125cm의 “경주 송화산 석조미륵보살반가상”으로
비록 지금은 머리와 두 팔이 잘려나갔으나 몸통은 거의 온전하게 남아 있는데
그 양식이 “국보 제83호”와 거의 동일한 양식이지만 기술적으로는 정교하지
못한 점을 들어 이는 “국보 제83호” 보다는 앞서는 것으로 보는데 이것이 바로
“국보 제83호”가 신라에서 조성되었다는 증거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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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 보물 제997호 봉화 북지리 석조미륵보살반가상 - 경북대학교박물관 소장 (대구)
1965년 11월 26일 경북 봉화군(奉化郡) 물야면(物野面) 북지리(北枝里) 구산동
(龜山洞)에서 “신라 오악(五岳) 조사단”에 의하여 발견되었는데 1966년 6월에
경북대학교가 이 지역의 발굴조사를 담당하여 그 대학 박물관으로 옮겼습니다.
이 반가상은 허리 윗부분이 모두 잘려나갔는데도 현재 남아있는 부분의 높이가
160cm 나 되어서 세계 최대 규모의 반가상으로 추정되며 남은 부분을 근거로
하여 복원한 높이를 계산해 본 결과 약 250cm 정도가 되어서 엄청만 크기였음이
틀림없습니다.
이는 국보 제83호와는 불상의 재료가 “금동(金銅)”과 “화강암(花崗巖)”이라는 것과
높이가 83.3cm과 약 250cm이라는 것만 다르고 모습은 거의 똑 같다고 하며
두 불상의 조성시기가 거의 같다고 추정하고 있는데 돌로 이렇게 아름답게
만든 정성이 너무 굉장하다고 말하고들 있습니다.
이는 당시 김유신장군보다 조금 위의 서열인 “김술종(金述宗)”이 삭주(朔州-현재의
춘천지방) 도독사(都督使)일 때 태어난 아들 “김죽지(金竹旨)”를 위해 조성했다고
전해져옵니다.
* “김술종(金述宗)”은 진덕여왕 시절 6인의 화백회의에서 세 번째 서열로서 당시 김유신
장군의 마지막 여섯 번째 서열보다 조금 위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그의 아들인 “김죽지
(金竹旨)”는 이후 김유신장군의 부장(副將)으로서 도살성 전투 등에서 백제군을 크게
물리치는 등 삼국통일을 이루는데 많은 공을 세우고 제29대 태종무열왕, 제30대 문무왕,
제31대 신문왕, 제32대 효소왕 때 까지 살았는데 <삼국유사>에 “죽지랑(竹旨郞)” 편으로
기록될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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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진골(眞骨)과 성골(聖骨)
신라는 원래 시조이래로 “화백(和白)” 제도에 의하여 귀족들이 모여서
“박(朴), 석(昔), 김(金)”의 3성(姓) 중에서 왕을 선출하여 왔는데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진흥왕은 절대왕권을 수립하기 위하여 이를 무시하려고 합니다.
즉, 진흥왕은 자기의 재위 시에 동북쪽으로는 함경남도 이원 마운령과 함흥
황초령에 이르고 서북쪽으로는 서울 북한산에 이르며 서남쪽으로는 경남 창녕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장악하여 신라 건국 이래로 가장 위대한 업적을 이루고는
그 자손들만이 왕위에 나갈 수 있는 제도를 만들기 위하여 자신은 “석가족
(釋迦族)”과 같은 특수한 혈통을 타고난 “진골(眞骨)”이며 또 “신족(神族)”임을
표방하기 위하여 스스로를 “진골”을 일으킨 ”진흥(眞興)“이라고 이름 짓게 됩니다.
그리고는 이러한 “진골”의 출현을 합리화하고 그 지지기반을 마련하기 위하여
“미륵선화” 제도를 만들고 또한 “원화(源花)”와 ”화랑(花郞)“ 제도를 창설하여
이를 양성하게 됩니다.
그러나 절대군주였던 진흥왕이 돌아가자 보수적인 옛 왕족들과 귀족들의 반발이
매우 거세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이 바로 “진지왕”의 폐위라고 보이는데
그렇지만 아직도 영흥사에서 비구니로 주석하고 있던 진흥왕비 사도부인 박씨가
건재하고 있어서 보수 세력의 저항은 한계에 부딪쳐 진평왕이 등극하게 되는데
그렇지만 앞날을 위하여 “진골”중에서 “미륵선화”가 출현할 것을 기대하는데
마침 “덕만”이 있어 그를 “미륵선화”로 모시며 임금으로 나가게 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상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의 보완적인 설명이고 이렇게 하여 신라에는 진흥왕이
꿈꾸었던 미륵세계가 구현되는 순간이었지만 반진골계 귀족들과 왕족들의 반발이
여전히 거세었습니다. 그러나 이 당시 중국에서는 천하를 통일하였던 “수(隋 :
581~618)”가 멸망하고 “당(唐 : 618~907)”이 새로 등장하는 등 국제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고 또한 백제와 고구려의 공세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던
위기상황이어서 다른 선택이 없었고 또한 민심을 결속시키기 위하여 할 수 없이
받아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 그동안에 고구려는 제26대 영양왕(嬰陽王) 23년(612년 = 신라 진평왕 34년)의
“수(隋)나라 양제(煬帝)”의 침공을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이 “살수대첩(薩水大捷)”으로
물리치고 고구려 제28대 마지막임금 보장왕(寶藏王) 4년(645년 = 신라 선덕여왕 14년)의
“당(唐)나라 태종(太宗)”을 “안시성(安市城) 전투”에서 크게 이기며 물리치는 등의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덕만”을 ‘원화“로 모시며 성장한 화랑들, 특히 ”김유신(金庾信 :
595~673)“이 이미 30대 후반의 나이로 사실상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왕위계승에서는 유리할 수도 있었던 진지왕의 아들이고 진평왕의 사촌아우이며
또 천명공주의 남편인 “용수(龍樹)”가 왕위를 포기한 것도 크게 작용하였을 것으로
봅니다.
(3-1) 진골과 성골에 대한 “최치원”의 글
그런데 여기서 신라 후기의 대문장가인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이 지은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聖住寺郎慧和尙白月葆光塔碑)”에 있는 내용을 잠시
들쳐봅니다.
*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聖住寺郎慧和尙白月葆光塔碑)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에 있는데 “국보 제8호”로서 최치원이 문장을 짓고
그의 사촌동생인 최인곤(崔仁滾)이 글씨를 새겼으며 태종무열왕의 8세손이 되는
무염(無染) 낭혜화상의 업적을 기록했는데 전체높이 4.55m, 비석의 높이 2.52m,
넓이 1.5m로 신라시대 탑비 중 최대의 것입니다.
* 비의 내용 중에 “성(聖)이라고 해야 하는데 진골(眞骨)이라 한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 왈성이왈진골(曰聖而曰眞骨) -
이는 “중국식으로 하면 ‘성(聖)’이라고 표현해야 하는데 신라 식으로 ‘진골’이라고
표현했다“라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 즉, “최치원”이 글을 지으면서 중국식으로 표현하면 “성골”이라 표현하겠는데
신라에서는 “진골”이라 부르니 그렇게 한다는 뜻입니다.
- 이것을 후에 "김부식-삼국사기“와 ”일연-삼국유사“에서 어떻게 해석했는지
신라에는 “성골”과 “진골”이 있었다라고 이상하게 기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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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진골과 성골에 관한 중국 측 기록 관찰
중국 당나라 “영호징(令狐澄)”이 쓴 <신라기(新羅記)>에는 다음의 글이 있습니다.
* 기국왕족 위지 제1골, 여귀족 제2골 (其國王族 謂之 第一骨, 餘貴族 第二骨)
⇒ 그 나라 왕족은 제1골이라 부르고 나머지 귀족은 제2골이라 부른다.
- 그런데 이것을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다음과 같이 옮겨 적는데 좀 이상합니다.
⇒ 나라사람들이 일컫기를 시조 “혁거세”로부터 “진덕”에 이르기까지 28왕을 “성골”이라
하고 “무열왕”으로부터 끝 왕에 이르기까지를 “진골”이라 일컫는다고 한다.
당나라 영호징도 <신라기>에서 이르기를 그 나라 왕족은 제1골이라 부르고 나머지
귀족은 제2골이라 부른다고 했다.
(國人謂 自始祖赫居世 至眞德 二十八王 謂之聖骨, 自武烈王 至末王 謂之眞骨.
唐令狐澄 新羅記曰 其國王族 謂之 第一骨, 餘貴族 第二骨)
⇒ 이상 두 가지 사례는 무슨 말이냐 하면 신라에는 원래부터 “성골”과 “진골‘의
구분이 없었는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성골”이란 말을 잘못 만들어
전해져서 우리가 지금까지 그렇게 잘못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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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황룡사 구층탑
선덕여왕이 미륵의 자격으로 왕위에 오르자 백제 무왕은 이에 맞대응이라도 하듯이
자신과 선덕여왕의 막내아우인 선화공주 사이에서 낳은 “의자(義慈)”를 태자로
책봉하여 “백제미륵”을 확고히 하려합니다.
이에 선덕여왕은 미륵이 신라에 출현하였다는 것을 국제적으로 공인받기 위하여
선덕여왕 3년(634년) 연호를 “인평(仁平)”이라고 바꾸고 당나라에 여왕의 책봉을
청하여 다음해인 선덕여왕 4년(635년) “주국낙랑군공신라왕(柱國樂浪郡公新羅王)”
이라는 책봉을 받습니다.
선덕여왕은 즉위 후에 즉시 “분황사(芬皇寺 : 634년)”와 “영묘사(靈廟寺 : 635년)”
의 두 절을 지어 진평왕의 추복사찰로 삼고 황룡사에서 “백고좌(百高座 : 100인의
고승을 초빙하여 설법하게 하는 불교의식)”을 베푸는 등 신라를 명실상부한 미륵불
국토를 만드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선덕여왕 5년(636년)에는 진골출신
승려인 “자장(慈藏 : 590~658)”을 당나라로 보내서 신라에서 미륵이 출현한 것을
인정받고 오게 합니다.
“자장”은 당나라에 도착하자마자 제자들을 거느리고 “문수보살(文殊菩薩)”의
“상주처(常住處)“라고 하는 ”청량산(淸凉山) = 오대산(五臺山)“을 찾아갑니다.
여기서 “자장”은 “문수보살”의 소상(塑像) 앞에서 기도하고 감응을 얻어 꿈속에서
”마정수기(摩頂授記 : 이마를 쓰다듬으며 앞날의 일을 미리 말해주는 것)“을 받고
석가세존의 “금란가사”와 “사리” 등을 전해 받습니다.
그리고 “문수보살”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 너의 국왕은 천축(天竺)의 찰리(刹利 : 크샤트리아) 종성(種姓)에 속하는 왕으로 미리
부처님의 수기(授記)를 받았다. 그러니 특별한 인연이 있으므로 동이(東夷)와 업을
같이하는 족속들과는 같지 않다. 그러나 너희나라는 산천이 높고 험해서 사람의 성품이
거칠고 삐뚤어져 있으므로 사견(邪見)을 많이 믿어서 때로 천신(天神)이 재앙을 내리기도
한다. 그런데 좋은 법문을 많이들은 비구(比丘)가 나라 안에 있다면 이로써 군신(君臣)이
편안하고 만백성이 평화로우리라. -
“자장”은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북대(北臺)”에서 내려와 “태화지(太和池)”라는
못가에 당도하니 한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자장”에게 왜 왔느냐를 묻고 이에
나라의 어려움을 말하니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 지금 당신네 나라는 여자를 왕으로 삼아서 덕은 있으나 위엄이 없다. 그러므로
이웃나라가 침략을 꾀하는 것이니 마땅히 속히 본국으로 귀국하라.
황룡사의 호법룡(護法龍 : 불법을 보호하는 용)은 나의 맏아들이다. 범천왕(梵天王 = 범왕
-梵王 = 제석천-帝釋天 : 부처님을 좌우에서 모시는 신)의 명령을 받고 와서 이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으로 돌아가서 절 안에 “구층탑”을 이룩하면 이웃나라가 항복하고
“9한(九韓)”이 조공을 바치러 와서 왕국이 영원히 평안하리라. 탑을 세운 뒤에 팔관회
(八關會 : 국가차원의 종교의식으로 주로 호국-護國의 내용이 들어있음)을 베풀고 죄인을
사면하면 외적이 해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나를 위해 나라의 남쪽에 절 한 채를 짓고
내 복을 빌어주면 나 역시 덕으로 이를 갚겠다. -
그래서 자장은 귀국하는데 이때 자장이 가지고 온 것은 “금란가사(金襴袈裟 :
부처님이 입으시던 붉은 비단에 금점 박은 가사)” 한 벌과 “부처님 진신사리(眞身
舍利 : 부처님의 머리뼈, 어금니, 사리 100알)“이었는데 그 사리를 세 몫으로
나누어서 한 몫은 “황룡사“에, 다른 한 몫은 ”태화사탑“에 나머지 한 몫은
“금란가사”와 더불어 통도사 계단(戒壇)에 모시게 되었습니다.
- 그래서 지금도 통도사를 “불보사찰(佛寶寺刹)”이라고 부릅니다.
이리하여 선덕여왕은 “자장(통상 자장율사-慈藏律師-라고 부르지요)”를 크게 기뻐
맞으며 곧장 황룡사 구층탑을 세우려고 하는데 신라에는 마땅한 기술자(장인-匠人)가
없어서 많은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 백제에 가서 “아비지(阿非知)”를 청해 와서
탑을 이루게 됩니다.
- 여기서 “아비(阿非)”라는 말은 당시 “결혼한 성인 남자의 일반적인 호칭“이고
“지(知)”는 “존칭”으로 ”아비지“란 ”백제의 남자 분“이라는 뜻이라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이렇게 하여 선덕여왕 14년(645년) 3월에 시작된 건축은 그 이듬해인 선덕여왕
15년(646년) 결국 황룡사 구층탑이 완성되는데 “찰주기(刹柱記)”에 의하면
철반(鐵盤) 이상의 높이가 42척, 이하의 높이가 183척으로 총 225척인데
대략 80미터라고 합니다. 그 중 9층까지의 목탑(木塔) 부분만 약 56미터라고 하니
엄청난 규모라고 하겠는데 황룡사는 고려 고종 25년(1238년)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게 됩니다.
* 위에서 “9한(九韓)”이 조공을 받치러 온다고 하여 9층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층-일본(日本), 2층-중화(中華), 3층-오월(吳越), 4층-탁라(托羅), 5층-응유(鷹遊),
6층-말갈(靺鞨), 7층-거란(契丹), 8층-여진(女眞), 9층-예맥(濊貊)인데 물론 이로써
주위국가가 모두 복속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국민적 결속과 국가의 비전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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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백제 의자왕의 대야성(大耶城) 점령과 김춘추의 맹세
한편 백제의 제30대 무왕(武王 : 580?~641, 재위 600~641 = 42년)이 돌아가고
그의 맏아들이며 태자인 “의자(義慈) : 600?~661? : 재위 641~660 = 20년)”가
왕위에 올라 제31대 마지막 왕이 됩니다. 의자왕은 어릴 때부터 매우 총명하였고
또 아우들과 우애도 좋고 사려가 깊어서 “해동증자(海東曾子)”라는 호칭도 받을
정도였으며 왕위 초기에는 스스로 또는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의 40여 성을
빼앗는 등 훌륭한 정치를 했는데 말년에 정신이 흐트러져서 나라를 망하게
만듭니다.
* 여기서 “의자왕(義慈王)”의 “의자”는 시호가 아니라 “휘(諱) = 이름”인데 마지막
왕이었으니 뒤에 시호를 올리는 절차가 있을 수 없었겠지요.
그런데 그 중에서도 신라로서 가장 뼈아픈 패배는 “대야성(大耶城)”을 빼앗기는
일입니다. “대야성”은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지방인데 당시에는 신라와 백제의
최전선으로 매우 큰 고을이었으며 군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삼국통일 이후에는 지리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중요도가 없어지니까
지금은 작은 고을이 되었지요.
의자왕은 동 2년(642년 = 선덕여왕 11년) 장군 “윤충(允忠)” 등을 보내어
대야성을 빼앗는데 이는 6년 후 진덕여왕 2년(648년) 당나라 군사 20여만 명의
지원을 받아 다시 빼앗게 됩니다.
* 이 때 드라마에 나왔던 “계백(階伯)장군”이 같이 왔다는 역사기록은 없습니다.
당시 대야성에는 “김품석(金品釋)”이 성주로 있었는데 여색(女色)을 탐하는
성품으로 자신의 부하인 “검일(黔日)”의 부인을 취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검일”은 이에 백제군과 내통하여 성문을 열어주게 됩니다.
결국 “품석”은 부인인 “고타소(古陀炤)”와 함께 온가족이 잡혀서 죽게 되는데
이때의 싸움에서는 신라의 “사지(舍知)” 벼슬에 있었던 “죽죽(竹竹)”이 자신의 이름
그대로 훌륭하게 싸우다 전사하게 되어 후에 길이 이름을 남기게 됩니다.
* “검일(黔日)”은 후에 대야성을 다시 빼앗은 후에 “능지처참(陵遲處斬)“을 당하는데
이는 우리 역사의 기록에 나오는 첫 ”능지처참“이라고 하네요.
그런데 “고타소”는 “김춘추”의 맏딸로서 엄청 사랑하는 딸이었는데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고는 시체조차 찾을 수도 없게 됩니다.
이 소식을 들은 “김춘추”는 하루 종일 기둥에 기대서서 눈 한번 깜짝하지도 않고
사람이 지나가도 모를 정도로 정신이 나갔다가 깨어나서는 “아!!! 대장부라면 어찌
백제를 삼키지 않겠는가.” 하고 부르짖었다고 합니다.
사실 따져보면 의자왕은 김춘추의 이종사촌형이 되는 셈인데 아무리 국가 간의
전쟁이라 하나 항복한 5촌 조카딸의 가족들 목을 베어 “사비성”으로 보내고 몸은
옥중에 묻었다고 하니 그 비참함과 배신감이 극에 달했겠지요.
위에서 말씀드린 진덕여왕 2년(648년) 김유신장군은 “옥문곡(玉門谷)” 전투에서
크게 이기고 백제장수 8인을 사로잡은 다음에 이들 포로와 품석일가의 시체를
교환합니다. 또 뒤에 태종무열왕 8년(660) 백제가 망하는 시기에 무열왕의
맏아들인 “법민(法敏) - 후에 제30대 문무왕(文武王)”이 의자왕의 아들이며 태자인
“부여융(夫餘隆)”을 사로잡고는 “예전에 너의 아비가 나의 누이를 억울하게 죽여
옥중에 묻은 일이 있다. 그 일은 나로 하여금 20년 동안 마음이 아프고 골치를
앓게 하였는데 오늘 너의 목숨이 나의 손안에 있구나.“ 이에 ”부여융“은 땅에
엎드려 말이 없었다.
* 김춘추는 일찍이 “미실”과 “설원랑” 사이의 아들인 “보종전군(寶宗殿君)”의 딸인
“보라궁주 설씨(寶羅宮主 薛氏)”와 결혼하여 정궁(正宮)으로 맞는데 그 사이에 낳은
맏딸이 “고타소”이며 “보라궁주”는 김춘추가 “문희”와 다시 결혼한 얼마 후에 둘째를
낳다가 산후병으로 죽습니다.
- 그런데 일설에 의하면 이 때 낳은 아이가 아들로서 중국 구화산(九華山) 화성사
(化城寺)에 등신불(等身佛)로 남아 모심을 받으며 “지장왕보살(地藏王菩薩)”로
추앙받고 있는 “김교각(金喬覺)”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 그런데 김춘추는 후에 김유신장군의 둘째 여동생, 즉 김서현(金舒玄)의 둘째딸인
“문희(文姬-후에 문명왕후-文明王后)”와 다시 결혼하여 문무왕이 되는 법민((法敏),
삼국통일에서 장군으로 또 외교가로 큰 이름을 떨치는 인문(仁問), 문왕(文王),·
노차(老且 : 노단-老旦이라는 말도 있음), 지경(智鏡), 개원(愷元) 등의 여섯 아들을
두었습니다.
“문명왕후”는 <삼국유사〉에서는 “훈제부인(訓帝夫人)”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 그런데 “문희”가 언니인 “보희(寶姬)”로부터 꿈을 사는 이야기는 유명하지요?
⇒ 소변보는 꿈이었지요? = 몽사매매(夢事賣買)
# “문희”는 처음에는 첩으로 들어갔다가 “보라궁주”가 죽은 후에 정궁(正宮)이 됩니다.
# 김춘추는 위의 두 정궁이외에도 “문희”의 언니인 “보희(寶姬)”를 첩으로 맞아 “지원
(知元)“과 ”개지문(皆知文)“의 두 아들을, 네 번째로 ”용태(龍泰)“를 첩으로 맞아 ”인태
(仁泰)“라는 한 아들을, 그리고 다섯 번째로 “용보(龍寶)”를 첩으로 맞아 “차득(車得 -
‘거득’이라고도 읽음)”과 “마득(馬得)”이라는 두 아들을 얻습니다.
# 즉, 김춘추는 두 명의 정궁에게서 여섯 아들을 두고 세 명의 첩에게서 다섯 아들을
두어 모두 11명의 아들을 두는데 위에서 언급한 “보라궁주”의 두 번째 아이가
아들이라면 총 12명의 이들이 있는 셈입니다.
* 그리고 <무열왕-문명왕후> 사이에서의 둘째딸인 “요석공주(瑤石公主)”는
“원효대사(元曉大師)”와의 사이에서 ”신라십현(新羅十賢)“의 하나이며 또한 ”신라3문장
(新羅三文章)“의 하나인 ”설총(薛聰)“을 낳습니다.
- 신라3문장 : 설총(薛聰), 강수(强首), 최치원(崔致遠)
* 또한 <무열왕-문명왕후> 사이에서의 셋째 딸인 “지소(智炤)”는 태종무열왕 2년(655년)
10월에 “김유신장군”과 결혼하는데 이 때 김유신의 나이는 61세였습니다.
<김유신-지소부인> 사이에서는 “이찬 삼광(伊湌 三光)”, “소판 원술(蘇判 元述)”,
“해간 원정(海干 元貞)”, “대아찬 장이(大阿湌 長耳)”, “대아찬 원망(大阿湌 元望)” 등의
다섯 아들과 딸 넷을 낳습니다.
- 그런데 둘째 아들인 “원술(=원술랑-元述郞)”은 유명하지요?
⇒ 예전에 “국극(國劇)”의 소재로 많이 쓰였습니다.
- 그런데 그 이전에 김유신은 612년 18세 때 “미실과 세종전군”의 아들이며 제11세
풍월주인 ”하종(夏宗)“의 딸인 ”영모(令毛)“와 결혼하여 딸 넷을 두었고 곧 이어서
”하종“의 또 다른 딸인 “유모(瑜毛)”를 첩으로 하여 서자(庶子)인 “군승(軍勝) - 또는
郡承”이란 아들도 두었다고 합니다.
- 김유신장군은 그 외에도 다른 여인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어쨌든 굉장합니다.
⇒ 그러니까 김춘추와 김유신은 둘 다 “미실”의 손녀사위이며 또 ”처남-매부“ 사이인데
또다시 춘추는 유신의 장인이 되고 여동생은 유신의 장모가 되니 참으로 복잡합니다.
(6) 선덕여왕의 지기삼사(知幾三事)
선덕여왕은 <삼국사기>에서 “관인명민(寬仁明敏)”하다고 했고 명석한 지혜와
판단력과 뛰어난 예지력을 가졌다고 전해 오는데 “선덕여왕이 미리 세 가지 일을
알다”라고 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옵니다.
(6-1) 첫 번째 일화
당나라 태종이 붉은색과 자주색과 흰색으로 그린 모란 그림과 그 씨를 보낸 일이 있었는데
"이것은 보기에는 아름다우나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이다" 하면서 뜰에 심도록 하였다.
싹이 자라 꽃이 피고 질 때를 기다렸더니 과연 그 말과 같이 향기가 없었다.
신하들이 이상하게 여겨 왕에게 "어떻게 꽃이 향기가 없음을 알았습니까?" 하고 물으니
왕이 미소를 지으며 "꽃을 그렸는데 나비가 없으니 향기가 없는 것이 아니겠소.
이것은 당나라 태종이 내가 배우자가 없음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하니 신하들이
그의 뛰어난 판단력에 감탄하였다.
(6-2) 두 번째 일화
선덕여왕 5년(636년)어느 날 영묘사(靈廟寺) 앞 옥문지(玉門池)에 겨울인데도 개구리들이
모여 3, 4일간 울어대고 있었다.
사람들은 구경거리가 생겼다 하여 여기저기서 모여들어 구경하고 있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선덕여왕은 급히 장군 “각간 알천(角干 閼川)”, “각간 필탄(角干 弼呑)”
등을 불러 정예 군사 2천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나가서 “여근곡(女根谷)”이라는 곳에 가면
반드시 적병이 있을 것이니 처리하라고 명하였다.
“알천” 등이 명령을 받들어 가보니 과연 “부산(富山)”이라는 곳 아래에 “여근곡(女根谷)”이
있었고 거기에는 백제군사 500명이 잠복하고 있어 모두 죽여 버렸다.
그리고 백제 장군 “우소(亏召)”가 남산 고개 위에 숨어 있음을 발견하고 포위하여 활을
쏘아 죽이고는 또한 뒤에 따라오던 백제군 1,200명까지 모두 죽이는 대승을 거두었다.
후에 신하들이 선덕여왕에게 미리 알게 된 연유를 묻자, "개구리의 성난 모양은 병사를
상징하고 옥문(玉門)이란 여근(女根 = 陰門을 통상적으로 이르는 말)이요, 여자는
음(陰)인데 그 색은 희고(=백제-百濟), 흰 것은 서쪽이므로 서쪽에 군사의 움직임이 있음을
알았고, 남근(男根)은 여근(女根)에 들어가기만 하면 반드시 죽게 마련이므로 쉽게
물리칠 수 있음을 알았다." 하고 설명을 하니 신하들이 왕의 성스럽고 슬기로움에
탄복하였다.
--- 여근곡(女根谷) :
경상북도 경주시 건천읍(乾川邑)의 오봉산(五峰山 : 685미터) 아래에 있는데
경부고속도로 서울에서 경주 쪽으로 가다가 “건천 IC" 바로 전에 오른 쪽으로
보입니다.
(6-3) 세 번째 일화
선덕여왕이 건강하게 국사를 돌보며 아무데도 아프지도 않았을 때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에 죽을 것이니 내가 죽거든 ‘도리천(忉利天)’에
장사지내도록 하라.“고 하였다. 신하들이 그곳을 알지 못하여 도리천이 어디냐고 물으니
낭산(狼山) 남쪽이다 하였는데 과연 선덕여왕이 자신이 예언한 그 날에 죽으니 그 유언에
따라 낭산 남쪽에 장례하였다. 그런데 그 후 10여년 뒤인 “문무왕 19년(679년)”에
능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우는데 불경에서 이르기를 “사천왕천(四天王川)” 위에
“도리천(忉利天)”이 있다고 했으니 이에 왕이 신령스러웠던 것을 알았다.
--- 사천왕사(四天王寺) :
삼국통일 후 문무왕이 당나라와의 싸움에서 이기기를 기원하며 세웠는데 지금은 터만
남아있으며 "사적(史蹟) 제8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터는 남북의
길이 105미터, 동서의 길이 73미터로 꽤 큰데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습니다.
(7) 선덕여왕의 죽음
위에서 반복하여 말씀드렸지만 선덕여왕은 “미륵선화”인 “원화”로서 왕위에 올라
어려운 나라를 잘 이끌면서 동 2년(633) “첨성대(瞻星臺)”를 세우고 동 3년(634)
“분황사(芬皇寺)”를 세우며 또 동 15년(646년) “황룡사 9층탑”을 완공하는 등
주위의 백제와 고구려를 물리치려고 노력하였는데 동 14년(645년) 당태종이
고구려와의 안시성 싸움에서 대패하게 되자 신라는 크게 낭패하게 됩니다.
즉, 황룡사9층탑을 세운 의미가 불확실하게 되어 국민적 결속력이 급속하게 무너질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이에 선덕여왕은 보수계열의 반진골(反眞骨) 세력을
회유하고 단속하기 위하여 동 15년(646년) 11월에 반진골 세력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석(昔)씨” 계열의 수장인 “이찬 비담(伊湌 毗曇)”을 수상 자리인
“상대등(上大等)“으로 발탁하게 됩니다.
그러나 “비담”은 동 16년(647년) 정월 초에 “염종(廉宗)“ 등 보수 계열과 반진골
세력을 이끌고 “명활산성(明活山城)”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여왕이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하니 이를 바꿔야한다.”라는 명분을 내세웁니다.
처음에는 이들의 세력이 매우 강해서 왕성이 위급했으나 김유신장군의 탁월한
기지와 지휘력으로 동 정월 17일 이들을 일망타진하고 “비담”과 “염종” 등의
일당은 9족이 멸족 당하게 됩니다.
* 명활산성(明活山城) : 경주 보문단지 근처로서 “사적 제47호”인데 성의 주위둘레가
약 6km입니다.
그러나 선덕여왕은 “여왕을 갈아치워야 한다.” 라는 구호와 별이 떨어지는
흉조(凶兆)가 겹치자 몸이 급속히 약화되어 동 정월 8일 약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에 김춘추 부자, 김유신, 김알천 등 왕실 측근의 진골세력들은 크게 당황하게
되는데 왕을 낭산(狼山)아래에 장례를 하는 것은 신라에 하생하였던 미륵보살의
화신은 그 역할을 끝낸 뒤에 수미산(須彌山) 위에 있는 도리천(忉利天)으로
올라가고 또 다른 미륵보살의 화신인 “승만(勝曼 = 진덕여왕-眞德女王)”이 이를
계승하여 나라를 이끌어간다는 내용의 후계구도를 마련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이 위에서 말씀드렸던 "지기삼사(知幾三事)”의 세 번째 이야기가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8) 선덕여왕을 마치면서
후일 비록 김부식(金富軾 : 1075~1151)이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여성이
임금이 되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말했지만 선덕여왕의 뒤를
또다시 여성인 진덕여왕이 왕위를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망하기는커녕
진덕여왕 사후 불과 10여년 후에 삼국을 통일하는 기염을 토합니다.
선덕여왕은 황룡사 9층탑을 세우는 등 민심을 결집하려고 노력했고 또 신라가
중심국가가 되는 앞날의 비전을 제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가 발탁하고 중용한
김춘추와 김유신을 비롯한 신세력이 선덕여왕 시대를 거쳐 진덕여왕 시대에는
명실상부한 신라의 신주류세력이 되어서 신라는 삼국통일의 터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전시(戰時)에 전선(前線)에 나아갈 수 없었던 여왕이 이러한 핸디캡을 극복하고
나라가 나아갈 비전의 제시와 적극적인 인재등용으로 삼국통일의 기초를 세운
“선덕여왕”은 진정 훌륭하고 성공한 여왕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 선덕여왕릉 : 사적 제1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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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 “신라의 불교와 선덕여왕” 편을 모두 마치는데 책 한권을 썼습니다.
물론 여기저기서 자료를 모았는데 무척 힘들었지만 평소 하려고 하였던 일을
하게 되어서 오히려 즐겁습니다.
그렇지만 “선덕여왕”을 마지막으로 하여 끝나게 되면 무언가 너무나 허전한데
그것은 그의 뒤를 잇는 “진덕여왕(眞德女王)”과 “태종무열왕 김춘추(太宗武烈王
金春秋)”와 “김유신장군(金庾信將軍)”을 “선덕여왕”과 함께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되는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기회가 있으면 나중에 다시
올리기로 하고 아래에서는 간략하게 정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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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덕여왕(眞德女王) : 생애 : ?~654 (약 68세), 재위 : 647~654 (8년)
“진평왕”의 둘째 아우인 “국반(國飯)”의 딸로서 왕위에 오를 당시 약 60세로 추정됩니다.
타고난 자태가 풍만하고 아름다웠으며 키가 7척(약 175cm)이나 되고 손이 무릎아래까지
내려왔다고 하는데 이는 부처나 전륜성왕이 타고나는 32상(三十二相) 중의 하나이니
진덕여왕도 일찍이 “미륵보살의 화신”인 “원화”로 뽑혔던 것으로 보입니다.
나라가 아주 어려운 처지에 있었던 당시에 진덕여왕은 “김알천(金閼川)”을 “상대등”으로
하여 국정을 돌보다가 재위 8년 만에 돌아갑니다.
* 태종무열왕 김춘추(太宗武烈王 金春秋) :
- 생애 :진평왕 24년(602년) ~ 태종무열왕 8년(661년) --- 60세
- 재위 : 654~661 (8년)
- 신라가 여성화된 “미륵보살”로서 불국토를 표방하며 나아갔으나 나라의 어려움이
계속 이어지자 신라에서는 남성상의 “미륵불”을 조성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경주 남산에서 출토되어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고 있는 “삼화령 미륵불삼존상
(三花嶺 彌勒佛三尊像)-선덕여왕 13년-644년 조성”으로 봅니다.
이는 곧 남자왕의 출현을 뜻한다고 추측합니다.
김춘추는 “진지왕”의 맏아들인 “용수(龍樹)”의 또 맏아들인데 “용수(龍樹)”는
미륵보살이 하생하여 성불하는 “용화수(龍華樹)”와 같은 의미이며 또한 “용수보살
(龍樹菩薩)”은 대승불교에서 ”공(空)의 논리를 체계화하신 제2의 부처님“이라고 부르며
받드는 보살이니 왕이 되기에는 꼭 맞는 사람입니다.
당나라 기록에 의하면 그의 용모는 매우 뛰어나게 잘 생겨서 “용의 모습이요, 하늘에
뜬 해와 같은 얼굴(용봉지자, 천일지표 - 龍鳳之姿, 天日之表)“라고 극찬을 받을 만큼
잘생겨서 당태종이 한눈에 반했다고 하는데 거기에 말까지 잘해서 외교의 능력이
뛰어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에 밀려서 왕위에 오를 때에는 이미 53세로 꿈에도 원하던
백제를 멸망시키나 삼국통일을 보지는 못하고 죽습니다.
- 진평왕이 54년간이나 왕위에 있어서 다음의 “선덕여왕”이 약 53세에 왕위에 오르고
“진덕여왕”은 약 60세 그리고 “태종무열왕” 역시 53세에 왕위에 올라 모두 늦은
나이에 왕이 되는데 이는 다음의 “문무왕(626~681 : 56세, 재위 661~681 : 21년)”이
36세에 왕위에 올라서 늙은 왕의 등극은 끝이 납니다.
--- 삼화령 미륵불삼존상(三花嶺 彌勒佛三尊像) :
본존높이 160cm, 좌협시보살 높이 100cm, 우협시보살 높이 98.5cm
* 김유신장군(金庾信將軍) : 진평왕 17년(595년) ~ 문무왕 13년(673년) --- 79세
금관가야 “김수로왕”의 12대손이 되는 김유신장군은 “진평왕-선덕여왕-진덕여왕-
태종무열왕-문무왕“의 다섯 임금을 섬겼는데 이들이 모두 왕이 되는 것은 김유신장군이
막강한 군사권을 가지고 뒷받침을 해주지 않았으면 거의 불가능했던 당시의 상황을
감안해 보면 장군은 만고의 충신이라고 하겠습니다.
삼국통일의 과정에서 그의 공적이 워낙 컸으므로 뒤에 문무왕은 그에게 “태대각간
(太大角干)”이라는 종전의 17관등 위의 특별 관직인 “대각간(大角干)” 보다 관등을
하나 더 만들어 종전에 없었던 벼슬을 새로 만들어주며 묘도 왕릉에 못지않은 규모로
세우는데 죽은 후에는 제42대 흥덕왕(興德王) 때인 835년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존됩니다.
- 그래서 “김유신장군묘”를 “흥무왕릉”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 김유신장군묘 : 사적 제2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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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가 있으면 한참 뒤에 나머지 이야기를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출근 하자말자, 명절날 쉬긴 하신거얘요? 정말 샘의 열정에 가슴 깊이 감사드립니다. 잘 보았습니다.
잘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설날 전에 대충 마무리했다가 오늘아침에 일부 교정을 보아서 올렸지요. 이 테마는 한참 전부터 왠지 꼭 다루어 보고 싶었고 또 여기에 올리고 싶었는데 하고 나니 제가 이리저리 알고 있던 것도 정리가 되어서 좋습니다. 그런데 회원님들이 너무 지루하고 관심이 없으실까 하고 걱정일 뿐입니다. 앞으로는 당분간 이렇게 긴 글을 쓰기가 쉽지 않을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열을 내어 조사하고 쓰느라고...ㅎㅎ
오우 마이 갓! 잇츠 투 롱! 워터케 이렇게 긴 글을 탈고하셨는지??? 정말 존경해 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 갠적으로 만화가로도 유명한 이 원복교수를 좋아 하는데 그 분이 집필하신 만화에서 불교에 대해 쬐끔 배웠는데 미륵보살이 후세에 다시 오신다는 얘기를 듣고 불교도 기독교와 비슷한 개념이 있다는걸 처음 알았습니다. 사실 전 그런 교리를 별로 않 좋아라 하는데 교리가 그러면 꼭 사이비쉐이들이 내가 그사람이라고 사기를 치는 통에 불쌍한 중생들 여럿 훅 갑니다만 궁예아찌가 이미 오래 전에 써먹으셨군요.ㅋㅋ 5억6천7백만년 후라면 태양도 상태가 안좋을 것 같은데 그때쯤 오셔서 지구를 구해주신다면 스토리가 딱 맞네요.
잘 읽어 주시니 제가 고맙지요. "신라의 불교와 선덕여왕"을 한번 써 보자고 마음 먹은지는 한참되는데 가볍게 시작했다가 자꾸만 사족을 붙여가며 분량이 늘어나는 바람에 좀 고생했습니다. 선덕여왕만 말하려니 그 앞의 사실들이 중요해서 (1)편, (2)편, (3)편을 만들게 되었는데 다 쓰고나니 최소한도 진덕여왕, 태종무열왕, 문무왕 그리고 삼국통일까지는 써야 이야기가 마무리가 되는데...하고 고민을 많이 했지만 지쳐버렸습니다. 자료정리하기가 쉽지 않고 또 써 나가다가는 또다른 의문점이 있어서 다른 자료를 살펴보아야 하는 일이 자꾸만 생기니까요. 책 한권을 썼지요. 앞으로는 좀 가벼운 테마를 정해야하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