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만나♡
"고난이 복입니다".
(벧전43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신학대학 교수님이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8:34) 하신 말씀을 학생들에게 수업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학생이 손을 들더니, 교수님! 요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그런 말씀을 하시면 교인들이 싫어해요. 다 도망갑니다.
그냥 축복과 위로의 말씀을 전하셔야 합니다.
그 학생은, 한국교회의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한국교회 성도들은 축복, 성장, 복지, 행복에 물들어 예수님을 따르는 자로서 겪어야 하는 고난의 개념을 기피하게 된 현실을 잘 보여준다고 보입니다.
사실 1970, 80년대에 한국교회가 폭발적인 성장을 경험한 원인이 여럿 있지만, 그중 하나가 바로 이런 메시지들 때문이었습니다.
한국 사회가 굉장히 어려운 시기에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 라는 말씀은 파워가 있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정말 복을 받나 보다,’ 하며 많은 사람이 교회로 몰려들었고, 실제 주님의 은혜로 삶이 변화되며 물질적으로도 번영을 누리게 되었던 사람들이 많습니다.
1970년대 한강의 기적에 편승되어 경제가 성장하고, 사회도 발전하고 교회도 거기에 맞물려 많은 성장을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1990년대 들어 교회가 정체되기 시작했습니다. 사회가 너무 잘살게 되니까 ‘예수 믿으면 복 받아요.’ 라고 하면 ‘예수 안 믿어도 복 받아요.’ 라고 대답하며 나오지 않습니다. 사실 이전에 말한 복은 세상의 복을 말한 것이고, 예수 믿으면 영생을 얻는 그것이 당연히 최고의 복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물질과 건강과 성공 등의 복을 기대하면서, 예수 믿으며 교회에 나왔고 실제로도 많은 경우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발전하다 보니까, 교회에 안 다녀도 부자가 되고 주식을 잘하면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가 통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지금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교회가 완전히 쇠퇴기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 고난도 겪어야 합니다.’ 라는 메시지를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인기가 없습니다.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는 훈련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연합을 원하십니다.
내 자아를 죽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뜻(생각 감정 의지)을 착상시키는 훈련을 하는 것이 신앙 훈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은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바울도 여러 차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도 강조했던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딤후3:12).예수님도 친히 많은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라면, 예수의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의 길은 고난과 죽음이었습니다.
그런데 번영과 성공, 축복만 생각한다면 맞지 않는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자들이 자기로 인해 많은 고난을 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으셨습니다.(마5:1-12).
제자들에게는 드러내놓고 고난을 요구하셨습니다(막8:34, 마16:24).
성경에는 예수를 주로 고백한 그리스도인들이 여러 모양으로 당하는 고난과 박해에 대한 기록으로 가득합니다. 베드로 전서는 다섯 장으로 구성된 짧은 말씀인데, 읽으면 읽을수록 보화가 들어 있는 것을 느낍니다.
그 안에는 보석 같은 복음의 진리들이 반짝이고 있습니다. 베드로 전서의 주제는 바로 그리스도인의 고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천여 년 전인 주후 60년대 오늘날의 터키에 해당하는 소아시아 북부지역에서는 ‘흩어진 나그네, 하나님 아버지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1:1-2)이 고난과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겪은 고난은 본질상 무고히 당한 고난이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나그네와 거류민으로서 당하는 고난이 있다고 계속 권면해 왔습니다.
이런 권면으로 고난에 대한 교훈을 주면서, 고난의 필연성과 그리스도인이 고난을 맞이하는 자세를 이야기 했습니다.(4:12-13절)
그리스도인의 고난의 본질(14-16절),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과 그리스도인이 고난을 대하는 기본적인 자세(17-19절)를 이야기합니다.
1. 고난을 맞이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편안한 꽃길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에게 없는 특별한 고난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1)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12-13절)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연단의 한 수단으로 시험이 오게 되어 있답니다. 우리는 시험을 통해 연단을 받습니다. 그러니 시험이 올 때 이상한 일을 당하는 것처럼 놀라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상히 여기지 말라’ 는 ‘놀라지 말라‘로 번역하는 편이 더 낫습니다.
시험을 당할 때, 뭔가 이상한 일을 대하는 것처럼 심리적으로 강한 반응을 보이지 말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5:20).
그것을 잘 깨달은 사도요한도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고 했습니다.(요일3:13)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고난을 겪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특히 통계에 의하면 대학생, 청년 중에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청년 인구의 3-4%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이전에는 기독교 인구가 20%라고 했는데 실질적으로 요즘에는 15% 될까 말까 하고, 청년들은 3-4%밖에 안 된다는 합니다.
그래서 대학생 선교단체들이 많이 줄어들었답니다.
2) 이것이 오히려 기회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동안 박해나 고난을 별로 못 느꼈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쇠퇴해서 사회에 박해당하는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코로나 때에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많은 불이익을 당하였습니다.
핍박을 받는 것도 있지만, 따돌리고 교류를 안 하려고 하는 게 박해입니다.
그러니까 진짜 예수 믿는 사람들은 기뻐할 만한 상황입니다. 오히려 더욱 ‘세상의 소금과 빛’ 의 역할을 더 잘할 수 있는 기회라는 겁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실제로 겪는 현실입니다.
3) 연단은 인내를 낳습니다.
본문의 표현처럼 ‘불 시험’ 입니다.(12절)
고통스럽고 호된 시련이라는 뜻입니다.
고난이라는 것은 고통스럽습니다.
결코 유쾌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맞이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어울리는 자세는 오히려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고난이 오면 마구 좋다고 하라는 말이 아니라, 정확히 말하면 ‘주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라는 것입니다.(빌4:4)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에 버금가는 일입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 믿는다고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에서 오는 여러 박해를 통해 고난에 참여하게 되는 겁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 이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뿐만 아니라, 그분의 죽음에서도 그분과 연합하는 사람들 입니다.
이상히 여기지 말고. 기회를잡아 인내하여 믿음의 진보 이룹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