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 재세시 스님 법답지 못하면 공양 끊었다
『유마경』을 읽으면서 우리가 느꼈던 문제 중 하나는 너무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를 살아가는 불자로서 『유마경』을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실천해갈 것인지 함께 고민해보는 시간이 되도록 강의를 진행할 계획입니다. 저는 재가불교운동의 현장에 몸담고 있으면서 ‘내가 하는 일이 올바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비춰 제대로 가고 있는가’ 하는 의구심입니다. 그런데 대중들과 함께 세 번쯤 『유마경』을 공부하면서 내가 하는 일이, 우리가 하는 일이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구나 하는 자신감을 얻게 됐습니다.
재가자들이 스님들에게 약간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만약 콤플렉스가 있다면 극복해야 합니다. 『유마경』은 그것을 극복하는 정도가 아니라 재가불자로 사는 일이 자랑스럽다는 느낌을 주는 경전입니다. 공부가 끝날 무렵에 이르러 이 시대를 살아가는 재가불자로서 부처님 가르침의 근본에 돌아가는 자세에 한걸음 다가가는 상황이 되길 바랍니다. 『유마경』은 어떤 경전일까요. 산스크리트어로 ‘비말라키르티(vimalakirti)’라고 하며, 이는 유마거사의 원래 범어 이름이기도 합니다. 한역하면 무구칭(無垢稱) 또는 정명(淨名)이고, 이를 음역하면 유마힐(維摩詰)이 됩니다. 그래서 유마거사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구마라집은 『유마힐소설경』으로 번역하고, 현장은 『설무구칭경』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현장 번역이 산스크리트어에 더 가깝고, 구마라집 번역은 압축적이어서 더 생동감이 있기도 합니다. 강의는 현장삼장역의 『설무구칭경』을 저본으로 해서 번역한 교재를 이용할 것입니다.
경전의 구성과 내용을 보면, 전체 13품으로 구성돼 있는데 이를 압축해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경전 내용의 무대는 바이샬리입니다. 유마힐이라는 거사가 있고, 그를 중심으로 진행됩니다. 유마거사가 중생들을 위해 마음을 낸 다음 거짓으로 병을 앓아 자리에 눕자, 부처님은 그 마음을 알아채고 제자들에게 문병을 보내려 합니다. 그런데 십대제자들 모두가 이번 문병이 단순히 문병으로 끝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사양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문수사리보살이 문병을 가게 됩니다. 그리하여 문수사리보살이 유마거사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문수사리보살이 방에 들어서고 조그만 방에 수천대중이 들어가는데도 방이 넉넉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보듯 어떠한 불교경전도 『유마경』처럼 드라마틱하고 재미있지는 않을 것이고, 현대의 희곡도 이러한 희곡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경전의 내용 중 절정은 둘이 아닌 진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여러 보살들이 이야기를 하던 중 문수사리가 “둘이 아닌 진리는 말로 할 수 없다”고 하자, 유마가 침묵으로 답변하는 장면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마일묵’입니다. 여기서 그렇게 침묵만 하고 있으면 유마거사가 바보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문수사리가 곧바로 “대단하시다”면서 띄워줍니다. 그 뒤로도 많은 이야기들이 오가는데 차례로 보도록 하겠습니다.
승단은 외호하되 개인 잘못은 비판 그리고 중간에 나온 이야기 중에 굉장히 충격적으로 읽었던 대목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아라한을 부처님과 동격으로 보는 시각이 강한데, 여기서는 가차 없이 아라한을 ‘성불 못할 썩은 종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통곡하는 부분이 나오기도 합니다. 가감 없이 소승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용서가 없습니다. 당시의 불교 문제를 조금도 용서 없이 가리지 않고 드러낸 경전입니다.
『유마경』이 드라마틱한 경전이라고 했는데, 무대가 꾸며진 이후 부처님의 근본정신에서 멀어진 불교를 대신해서 두드려 맞는 역할을 하는 이들이 바로 10대 제자를 비롯한 아라한입니다. 10대 제자가 대표로 혼나는 역할을 맡았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러나 『유마경』을 재가불자가 설한 경전이라고 해서 재가불자와 승단의 대립구조로 보는 것은 안 됩니다. 유마거사가 사리불을 야단치기도 하지만, 처음에 나오는 장면이 유마거사가 스님들의 발 아래 절하는 장면입니다. 스님들에 대한 존경과 예경은 한 치도 소홀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부처님 법의 근본정신이 어디에 있느냐에 있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었던 것입니다. 사부대중이라고 할 때의 승단, 스님들에 대해서는 절대 함부로 하지 않았습니다. 『유마경』이라는 무대는 이처럼 불교가 흘러오면서 부처님 근본정신에서 멀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이때 부처님의 근본정신에서 가장 멀어진 곳이 바로 기존의 승단입니다. 때문에 승단을 비판하지 않으면 부처님 정신을 드러내기 어려웠고, 승단의 대표로 부처님의 십대제자가 와서 질책을 받는 것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대승운동은 왜 일어났을까요. 부처님 재세시에는 재가자와 출가자가 늘 만났습니다. 부처님은 탁발하러 마을에 들어갔고, 마주치는 재가자들에게 삶의 바른길을 설명하고 축복도 내려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출가승단과 재가승단의 관계에 대해 착각하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스님들은 무조건 떠받들어야 한다는 생각인데, 그건 아닙니다. 불법승 삼보에서 말하는 승은 개별적인 스님이 아니라 출가수행공동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삼귀의를 하면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하는 것이 마치 개별 스님들에게 귀의한다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 재세시에만 해도 스님들이 법답지 않은 짓을 하면 재가자들이 공양을 끊었습니다. 그렇게 스님들은 엄한 비판의 대상이 됐습니다. 스님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엄한 비판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법답지 않은 일을 하면 공양을 끊을 정도로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출가승단을 훼방하면 안 됩니다. 부처님 재세시 가장 큰 사건은 파승가(破僧家)입니다. 데바닷다가 승단을 쪼개서 나갔는데, 이건 엄청난 사건이고 큰 악행입니다. 출가공동체를 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개별 스님들을 비판하는 것이 안 된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으로, 재가자보다 더 엄한 비판을 받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런데 승단이 그렇게 내려오다가 엄청난 권위를 갖게 됩니다. 왕과 부호들의 후원에 힘입어서 굉장히 큰 힘과 재산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재가자와 출가승단이 밀접하게 만나지 못하고, 스님들은 현실적인 삶을 이끌어주지 못한 채 전문적인 연구자가 됩니다. 그러면서 재가자들이 불교에서 소외되고, 자연스럽게 재가자는 한 단계 낮은 계급으로 스님들에게 공양하고 다음에 좋은 세상에 태어나 공부해서 성불한다는 식의 의식이 생겨납니다. 그렇게 재가자들이 삶을 행복하게 해주는 원리를 불교에서 얻지 못하면서 우리의 삶 자체를 바꾸는 불교에서 멀어지게 된 것입니다. 대승운동의 중심은 바로 재가불자. 그런가하면 출가승단은 굉장히 치밀하게 교리를 다루고 아비달마 불교를 만들어 내는데, 그것이 진리인가 아닌가는 의심을 해야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뗏목과 같다고 했음에도 아비달마 불교가 세밀하게 논으로 정리함으로써 뗏목이 아니라 그 자체가 법이고 불교인 것처럼 고정됐을 때 한편으론 타파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일반인들의 삶 자체를 행복하게 하는 불교가 아니라 대중들을 소외시키는 불교가 됐을 때 그것을 근본으로 돌이켜서 삶 자체를 바꾸고 삶을 이끌어 가는 불교가 되게 하자는 운동, 방편을 잊고 교판의 다툼을 타파하고 근본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바로 대승입니다.
그렇다면 그 대승의 중심에 누가 있었을까요. 불교사 연구자들은 진보적 스님과 깨어있는 재가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재가자 중에서 선구적 역할을 했던 분들이 보살로 칭해졌습니다. 따라서 보살의 원형은 재가자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불교가 일어나는 비판의 중심은 출가승단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출가승단이 바뀌어야 하기 때문에 새로운 불교운동에서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나려면 기존의 잘못된 양상이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그런 점에서 유마거사가 경전의 중심이 되어 출가승단을 비판했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거사가 십대제자를 야단치는 경전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대승운동 초창기에 재가불자 역할이 그만큼 컸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삶의 현장에서 ‘나’ 찾지 않는 건세상과 마음을 둘로 나눠 보는 것적극적 행동이 활발발한 삶 동력
『유마경』은 “어느 때 부처님이 바이샬리 성내 암라팔리 숲에서 큰 비구 8천인과 함께 계셨는데 모두 아라한 이었다.(…) 또 보살이 3만 2천명으로(…).”라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장자의 아들 보적이 500명의 젊은이들과 함께 일곱 가지 보배로 된 일산을 공양하자 부처님이 이를 합쳐서 하나의 일산을 만드니 일산이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덮었다. 이에 보적이 찬탄하고, 부처님 국토의 청정함을 얻는 것을 듣기를 청했다.(…)”는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우선 3만 2천의 보살이 함께 했다고 하는데 숫자에 얽매여 웬 보살이 이렇게 많을까 하고 의심하지 말고, 열린 마음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시대상을 반영해 경전을 편집한 것이라고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진정한 불자라면 정말 내가 부처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알게 됨으로써 이렇게 달라졌구나, 내가 이렇게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되었구나 하면서 부처님 가르침에 감사함을 느껴야 하고 그 때 비로소 흔들리지 않는 신심을 가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보살이 많은 이유는 출가자뿐만 아니라 재가불자들이 많이 모인데서 찾을 수 있겠습니다. 경전의 「불국품」에서 그 자리에 참석한 여러 보살들은 재가불자들의 독특한 장점을 형상화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또 천왕이나 신중들도 많이 모였는데 이는 인도 전통문화가 불교에 들어온 것으로 보면 됩니다. 한국불교에 칠성, 산신이 다 들어오듯이 당시 인도 전통문화가 불교에 들어온 것이고 부처님은 애써서 그것을 거부하지 않으셨습니다. ‘보적 일행이 오백 일산을 바치니까 부처님이 그것을 하나의 일산으로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온갖 세계의 모습이 장엄하게 보였습니다. 이것은 각각의 마음으로 바친 오백 일산을 하나로 모아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큰 일산 속에 모든 것이 드러난다는 것은 비유적으로 보여주는 것인데, 경전은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대목마다 감동이 다릅니다. 그래서 경전은 주체적으로 읽어야지 신비화해서는 안 됩니다. 신비화하는 것이 바로 불교의 적입니다. 또 대승경전에서 찬탄하는 내용이 많다고 했는데 찬탄하는 만큼 큰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진정을 담아 찬탄함으로써 찬탄의 대상을 나에게 옮겨오게 됩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도 있듯이, 찬탄하면서 큰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불국품」은 이어서 “또 보적아, 그대들은 알아야 한다. 무상보리심을 일으키는 그 터전이 바로 보살의 청정한 국토이니, 보살이 대보리를 증득할 때 처음으로 대승에 대한 마음을 일으킨 모든 중생이 그 나라에 와서 태어날 것이다.(…)선행을 부지런히 실천하는 그 터전이 바로 보살의 청정한 불국토이니,(…)”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유마경』을 읽을 때 그저 유마거사의 이야기이고 보살의 이야기로만 읽지 말고, 언제나 그 자리에 자기를 놓고 봐야 합니다. 내 국토, 내 중생국토가 어떠한가. 즉 내 주변 중생들은 어떤 인연으로 내 국토에 와서 태어났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봐야 합니다. 여러분 스스로 자기 주변에 어떤 중생들이 어떠한 모습으로 와서 살고 있는지 한번 보십시오. 자기가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바로 거기에 드러납니다. 일부에서 불교를 현실에서 보는 불교와 다른 방법으로 보려고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삶의 현장을 떠나 ‘나’ 찾기를 하는데, 저는 내 주변을 보면서 ‘나’를 찾으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내 중생국토에 어떤 사람들이 와서 살고 있는지 보면 됩니다.
우리는 서로 서로의 국토에 들어가 사는 서로의 중생입니다. 여러분들의 국토에 제가 중생이고, 제 국토에서는 여러분이 중생입니다. 내가 살아온 자취가 내 국토에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내면의 또 다른 알맹이를 찾는 방식으로 불교를 이야기하는 것은 자칫 불교를 왜곡시킬 수 있습니다. 내 속에 뭔가 다른 것이 있는 것처럼 찾는 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불교는 근본적으로 ‘무아설(無我說)’입니다. 그러한 알맹이를 부정했을 때, 나는 내 국토로 갈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들이 나를 중심으로 내가 소유하고 있고 나의 부속물로 생각했던 것들, 사실은 이것이 ‘나’입니다. 그 속에 알맹이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하여 내 주인공이라고 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증명하지 못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증명되지도 경험되지도 않은 존재를 바탕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괴로움만 낳는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그런 방식으로 나 찾기를 하는 것은 불교답지 않습니다. 그런 존재에 대한 집착과 관념을 부정하고 나면 처음에는 나를 도둑맞은 것 같기도 할 수 있으나, 사실은 도둑맞은 것이 아니라 그동안 내가 홀대하고 개체화하고 소외시켰던 모든 것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활동하는 내가 있고 존재하는 내가 있을 뿐입니다. 있는 그대로가 나인 것이기에 그 속에 불견(不見)의 나가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나면 그때부터 더 활발발한 삶이 됩니다. ‘나’라는 것을 중심으로 전부 개체화했던 것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내 존재 속에 고갱이처럼 무엇인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살면 세상의 모든 것이 소외됩니다. 반대로 그것을 놓으면 세상 모든 것이 그만큼 내가 됩니다. 그러면서 삶 자체가 활발하게 전개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국토는 바로 여러분의 삶 자체입니다. 따라서 내 삶의 가까운 주변에서부터 깨달음을 구해나가야 합니다. 그동안은 보리를 구하고 중생교화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을텐데,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 바로 깨달음을 구하는 현장이어야 합니다.
‘보리를 구하지 못하고 어떻게 중생을 구하나’라고 생각하면 불교는 설 자리가 없어집니다. 바로 내가 이 중생들과 함께 주변 중생들을 모시고 가는 과정이 내 보리를 구하는 과정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모든 중생들을 부처님처럼 받들고 가는 과정이 바로 보살의 삶입니다. 보살정신의 근본이념은 우리의 보살행 속에서 깨달음을 구한다는 것입니다. 수레의 두 바퀴라고 하지만 이 둘이 일치하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앞서도 말했듯이 『유마경』 강의는 국토이야기를 할 때면 ‘내 국토는 어떠한가’, ‘유마거사와 같은 입장에 처한다면 나는 어떨까’라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 자리에 나를 놓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둘로 나눠서 그분들은 거룩한 분들이고 나는 중생이라고 생각하면 언제나 둘로 나눌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들 따로 나 따로라면 불교는 결국 두 쪽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중생이 곧 부처’라는 말을 수없이 듣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중생 모습 속에 들어 있는 부처입니다. 부처의 모습이 끊임없이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유마거사의 자리에 내가 서봐야 하고, 보살의 자리에 내가 서봐야 하는 것입니다. 불국토, 내 국토는 어떠한가를 보고 내 국토를 맑히는 내 입장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심정국토정(心淨國土淨)’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부처님이 이렇게 심정국토정을 설하고 나니 사리불은 “만약 보살들 마음이 청정해지는데 따라서 불국토가 청정해진다면, 우리 세존께서 보살 수행을 하실 때 얼마나 마음이 청정치 못했기에 이 불국토가 이토록 더러움으로 오염됐을까?”하는 의심을 갖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 세계는 나의 국토, 나의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세계는 관념으로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각기 다른 세계를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터무니없다고 할지 모르겠는데, 불교는 연기설이라고 했습니다. 연기는 상호 의존적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것도 절대적이지 않고 서로 의존적입니다. 내 앞에 드러나는 존재는 나와의 의존적인 관계에서 드러나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똑같은 사물을 대하면서도 서로 의미를 부여하는 바가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담장에 덩굴장미가 핀 것을 보고 시인은 아름답다고 할 것이고, 도둑은 저거 넘어가려면 긁히고 말 것인데 하는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유마거사가 설법하는 장면에자신 입장 대비하며 고민하고주체적 경전 읽을 때 참 불자
이처럼 나의 주관에는 어떤 관심과 욕망이 있습니다. 우리 욕계 중생들은 대개 욕심을 중심으로 세계를 엮고 욕망에 따라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중심으로 엮고 있고, 어떤 의미의 연관성 속에서 세계를 만들고 있는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우리가 보고 감각하는 세계는 객관적인가 하는 것도 의심스럽습니다. 인간은 대개 공업(共業)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비슷한 대상을 비슷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존재를 생각하면 바로 다르게 나타납니다.
개는 색맹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개가 보는 것은 우리가 보는 것과 다릅니다. 그 대신 개라는 중생류는 가청력이 좋아서 우리가 못 듣는 것까지 잘 듣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감각의 영역에 들어오는 것만을 보고 듣습니다. 그러니까 세계가 객관적 모습으로 있다는 것 자체가 그릇된 이야기입니다. 세계는 나의 감각 기관에 따라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한걸음 더 나가면 업에 따라 같은 사물을 전혀 반대로 여기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단적인 예로 아귀 중생은 물을 불로 본다고 합니다. 황당한 이야기 같지만, 사람이 싫어하는 구린내 나는 것을 파리는 좋아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객관적 세계가 있습니까. 연기설 입장에서 보면 언제나 세계는 나와 별개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나의 인식기관에 상대적으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공업에 의해서 기세간에서 함께 사는 중생들이 함께 짓는 업이 있고, 같은 기세간에 있어도 그 중생의 업에 따라 같은 것을 다르게 느끼게 됩니다. 이 세계 중생들은 이처럼 업과 의존적으로 있습니다. 그것이 기세관이고 의미로서의 세계가 있는 것인데, 그것도 또 하나의 세계입니다.
그렇다면 그 세계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그게 바로 나의 국토이고 불국토입니다. 그건 나의 업과 연관성 속에서 존재합니다. 내가 보는 세계는 나의 업과의 연관성 속에서 그렇게 드러나고, 나의 주관과의 관계성 속에서 그렇게 드러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깨끗하면 국토가 깨끗하고, 마음이 더러우면 국토가 더럽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과 내 인식주관, 내 주관과의 연관성 속에서 세계가 그렇게 드러난다는 이야기를 심정국토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심정국토정 때문에 마음병 걸린 불자가 많습니다. 세계가 아무리 더러워도 내 마음 잘 닦고 나면 국토는 깨끗해 질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불교를 믿으면서 세상의 모든 일을 마음에서 다 해결하려고 합니다. 세상으로 나가질 않습니다. 마음을 고치기 위해 마음만 잡고 있다면 그 마음은 세상과 둘로 보는 것입니다. 마음과 세상이 둘이 아닌데 왜 마음만 고친다고 합니까. 그렇다면 주변을 아름답게 하는 일이 내 마음을 아름답게 하는 일과 둘입니까, 하나입니까. 당연히 하나입니다. 그런데 왜 마음과 세상이 둘이 아니라고 하면서 다들 마음에서만 해결하려고 합니까. 불교가 마음 중심으로만 가면 전체성이 훼손됩니다. 마음을 고치기 위해서는 세상을 고치는데 나서야 합니다. 심정국토정은 ‘내가 어떤 의미연관성에서 세상을 엮어내고 있는가’, ‘나는 어떤 욕망과 관심으로 세계를 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불자들은 대개 모든 것을 마음에 갖다 놓으려고 하다 보니 세상일에 대처를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저 마음에 달린 것이다’ 하고 맙니다. 이것은 사실을 사실로 보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는 것입니다. ‘놓는다’는 것과 ‘포기’하는 것은 다릅니다. 사실을 사실 그대로 보면 됩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여기에 전생의 업을 끌어들이면서 포기하지 말고, 어떤 업을 지어서 이것을 바꿔나갈지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행동해 나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내 국토의 모습, 내가 느끼는 국토가 이렇다고 하면 그게 바로 내 마음의 투영입니다. 어떤 의미연관으로, 또는 어떤 업식과의 연관성 속에서 내 세계가 이렇게 드러나는가를 거꾸로 들여다봐야 합니다. “부처님이 발가락으로 누르시니 장엄한 세계가 드러났다”고 했는데, 우리가 위대한 인격을 만나면 이러한 체험이 가능합니다. 여러분도 가끔 위대한 인격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내 마음이 열리면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볼 수 있고, 한 순간일지라도 환희심이 나면서 전혀 다른 세계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대자대비한 마음에 동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큰 복 가운데 하나가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위대한 인격을 가진 스승을 만나면 잠시라도 그 세계에 동참할 수가 있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을 잊을 수는 있어도 끊임없이 그것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삶 자체가 달라질 것입니다.
「불국품」에 이어 「방편품」이 설해집니다. 「방편품」은 유마거사가 오묘한 방편의 힘으로 자기 몸에 병을 보이고, 병을 통해 몸의 무상함과 덧없음 그리고 집착할 바 없음을 말한 대목입니다. “마을의 모든 집회에 나가서도 늘 최고의 설법자로 존경받았으며,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나이든 사람과도 중년층과도 젊은이들과도 교류했지만 늘 법과의 조화 속에서 설법했다. 세간의 재물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세속의 이익에 대해 익힌 바가 있었다.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 저자에 나가 노닐었으며,(…) 욕망의 사악함을 보여주기 위해 음란한 곳에도 들어갔다. 술을 마셔도 정념정지를 잃지 않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유흥가에서 노닐었다.” “유마힐은 이같은 자유자재한 방편으로 몸에 병을 나타내었다. 그러자 국왕, 대신, 장자, 거사, 브라흐마나와 왕자들과 나머지 관속들 수천 명이 모두 가서 문병을 하였다. 유마힐은 그들이 도착하자 병을 이유로 널리 법을 설하였다.(…)” 여기에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당시는 계율이라는 방편, 승단 중심의 계율에 매여서 그것을 어기면 큰일 나는 불교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마를 찬탄하면서 술도 마시고 환락가도 갔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전혀 지장을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계에 대해서는 일자일구도 고칠 수 없다는 스님들 중심의 불교에 엄청난 폭탄이었습니다. 요즘에는 계율 지키는 스님이 별로 없어서 잘 지키는 스님이 유명해진다고 하는데, 스님들이 계율을 가볍게 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정비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마거사의 방편은 아주 중요한 대목입니다. 부처님은 “내 설법도 뗏목과 같다”고 했습니다. 고통의 바다를 건너게 해주기 위한 방편입니다. 그 자체가 고정불변의 진리가 아닙니다. 부처님 말씀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인 것입니다. 그러니 손가락에 매달려서는 진리를 찾을 수 없습니다. 때문에 방편이 가리키는 바가 무엇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대로 따른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방편설과 붙어 다니는 것이 대기설(對機說)입니다. 여기서 기(機)는 조건적인 것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에는 장소와 대중 등 조건이 있습니다. 즉 중생의 근기에 따라서 달랐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방편이 지향하는 것을 파악하고 우리 현실 속에서 보아야 합니다. 요즘들어 대승불교가 엉망이 되니까 초기불교를 갖다가 쓰자고 하는데, 부처님 말씀에서 일자일구도 고치지 않고 전해져 온 경전은 없습니다. 남방이건 북방이건 그 방편이 가르치는 진리를 고민하고, 우리의 처지에서 어떻게 이해하고 적용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부처님은 와서 보라고 했지 믿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어려운 점은 그 방편을 현실에서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유마거사의 입장에서 주체적으로 읽을 수 있는 대목은 불교가 대기설이라면 입장과 처지에 따라 다르게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온통 수행에 쏟아야 한다는 것은 모든 에너지를 수행에만 집중해야할 특수집단에게 한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출가승단 중심으로 흘러가면 그것만이 불교처럼 됩니다. 그렇게 되니 재가자들이 이생에서는 스님 공양하고 다음 생에나 수행자가 되어서 성불한다고 하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되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포기하면 영원히 포기는 것입니다. 업은 버릇입니다. 업을 지으면 다음에 이게 온다가 아니라, 내가 하는 순간에 그게 업이고 습관이 되는 것입니다. 내생에 성불하겠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그것이 업이 됩니다. 불교의 주체가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지금부터 내가 부처되는 길로 가야하고 그것을 통해 삶이 행복해지고 나날이 복돼야 하는 것입니다.
나와 너 차별상 여의고 나부터 변해야 참 불자
유마 거사는 방편으로 중생교화를 위해 술집도 가고 환락가도 갔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수행하는 장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더럽다고 하는 삶의 무대를 청정하게 하는 길을 걸어가는 것으로 연결하지 못하면 재가불교는 설 자리가 없습니다. 이 세계에 몸담고 있으나 푸른 꿈을 잃지 않는 중생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행복한 길이며 삶을 풍요롭고 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지혜를 우리 삶속에 옮겨올 때 행복해지고, 불퇴전의 삶을 살 수 있다는 믿음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수행한다는 것은 생멸문에서 진여문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이 두 세계는 다른 세계가 아니며, 차별 없이 나가는 것이 수행의 과정입니다. 진여문에 도달하는 순간 진여와 생멸 자체를 분별하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에 앉을 자리가 없고, 다시 생명의 세계로 나오게 됩니다. 업의세계로 나온 것인데 그 전에 지은 업과 돌아나온 업의 세계는 다릅니다. 그것을 원효 스님은 ‘부사의업(不思議業)’이라고 했습니다. 불교는 좋은 업 지어서 좋은 세상 가는 종교가 아닙니다. 불교의 업설은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입니다. 따라서 업은 행입니다. 때문에 이 세상을 소극적으로 살지 말고, 부사의업이라는 적극적 업을 짓는 존재여야 합니다. 차별에 매여서 갈등을 일으키고 자기 소유화하려고 할 때 짓는 업을 ‘윤회를 짓는 업’이라고 한다면, 차별 없음을 바탕으로 해서 짓는 업이 ‘진여업’이고 ‘부사의업’입니다.
그러면 그 틀을 우리 삶속에 옮겨올 수 있습니다. 갈등과 차별로 인한 업이 있는데, 가령 남자와 여자를 차별하기 이전에 사람이라고 하는 기본 한자리가 있습니다.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남’과 ‘여’에 비유할 때 진여의 자리입니다. 똑같이 사람인데 나는 남자의 역할을 하고 있고 당신은 여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입장에 선다면 진여의 입장에서 생멸을 나툰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틀을 받아들이면 부사의업 그 자체는 아니더라도 우리 생활 속에 옮겨올 수는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업 자체가 달라집니다. 차별상을 바탕으로 집착해서 지을 때의 업과 차별상을 넘어서서 짓는 업은 그만큼 달라지고 변합니다. 그때 개인이 변하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가 변하게 됩니다. 불교 경전은 대부분 스님들에게 전하는 가르침입니다. 그것을 그대로 재가자에게 적용하면 재가자들은 이중생활을 해야 하는 갈등 구조 속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사람들이 내 삶의 현장을 긍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전기를 갖지 못하면 내생에 극락세계로 간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최근 불교유신을 다시 생각하자는 주제로 열린 토론 자리에 참석해, 유신론도 유신해야 할 만큼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 시절 유신론을 그대로 적용해도 무방할 정도의 현실을 보면서 그동안 불자들이 무엇을 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뼈아프게 반성해야 합니다. 올바른 종교의 양상은 내가 변하는 것입니다. 내 주체가 변하는 것이 바른 종교이고, 바른 불자가 되려면 ‘부처님은 내가 어떤 불자가 되기를 바라실까’를 생각해 보면 됩니다. 『유마경』은 당시에서는 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술 마시고 환락가에 가는 유마를 찬탄하는 경전이 나왔다는 것은 폭탄과 다름없습니다. 유마거사는 방편을 통해 몸의 무상함, 덧없음, 집착할 것 없음을 말했는데, 여러분은 몸을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불교의 업설은 미래지향적
우리가 갖는 욕망의 근원이 바로 몸입니다. 새로운 세상으로 나갈 때 부딪치는 첫 번째가 몸입니다. 몸에 좋다고 하면 별별 것을 다 하지요. 또 화장을 할 때도 상당히 공을 들이지요. 그러면서도 마음을 치장하는 데는 공을 들이지 않습니다. 몸에 대한 부정을 하지 않으면, 몸을 기준으로 하는 생각을 버리지 않으면 마음에 신경 쓸 시간이 없습니다. 법회 때마다 사홍서원을 하면서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해 놓고는 과연 주변인들을 위해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습니까.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하고서는 내가 괴로워하는 일을 없애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습니까. 마찬가지로 불법을 배우는데도 시간을 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몸에는 참 많은 신경을 쓰고 살아 갑니다. 그러니까 유마거사가 몸에 병을 나타내서 몸의 덧없음을 이야기한 이유는 욕망의 근원인 몸의 부정을 나타내기 위한 방편인 것입니다.
그러면 몸은 그대로 부정되기만 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되살려져야 합니다. 몸은 그만큼 나에게 가까운 벗, 평생 함께해야 할 벗이자 동지입니다. 그러니 우선은 내 몸과 동료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스스로가 여러분의 벗입니까.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집착에 머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몸을 몸으로만 보지 말고, 내게 가장 가까운 친구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몸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가장 아끼는 벗이 잘못을 범할 때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해보고 내게도 똑같이 해야 합니다. 불교는 극단으로 나눠서 ‘좋다’ ‘나쁘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유마경』에서도 병을 통해 몸의 덧없음을 보여주지만 학대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불교의 중도론은 몸을 되살리는 것입니다.
『유마경』의 「제자품」으로 들어가면 사리불을 시작으로 목건련, 대가섭, 아나율, 수보리, 부루나, 마하가전연, 우바리, 라후라, 아난다 등 십대제자에게 차례로 문병을 가도록 당부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십대제자는 깨달은 사람의 설법을 들음으로써 깨달음의 길로 간다는 성문승 중에서도 대표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 모두가 유마거사를 감당하지 못하겠다며 사양을 합니다. 이 문병이 단순한 문병이 아니라 병을 매개로 한 큰 법석이 열릴 것임을 알고 있는 것이지요.
법석의 주인공으로 등장해 유마의 이야기를 끌어내고 응대해야 하는데 거기에 부담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모두 당시 화석화된 불교를 유신시켜야 할 대상으로 승단이 지목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해 스님은 유신의 첫걸음을 ‘깨 부시기’라고 했는데 파괴하지 않으면 유신이 불가능하지요. 그러니 당시 승단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는 부분을 유마가 치고 십대제자가 맞는 역할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왜 승단이 두들겨 맞는지 유심히 봐야 합니다.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이견착상(二見着相)’이라는 말로 압축할 수 있겠습니다. 이견착상은 둘이라는 견해에서 상에 집착한다는 말입니다. 둘로 나눠놓고 보는 견해, 거기에 바탕해서 수행하는 것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견착상에 빠지면 비불교 “그러자 세존께서는 유마힐의 생각을 아시고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유마힐을 찾아보고 문병하여라.’ 사리불이 말했다. ‘세존이시여, 저는 문병하는 일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언젠가 저는 큰 숲속 나무 아래서 좌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유마힐이 제가 좌선하는 곳에 와서 제 발에 절을 하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리불이여 앉는 것만이 꼭 좌선은 아닙니다. 무릇 좌선이란 삼계 어디에도 몸과 마음을 나타내지 않는 것을 좌선이라 합니다. 멸진정(滅盡定)에서 나오지 않으면서도 일상의 행동거지를 나타내는 것을 좌선이라 합니다. 성자의 깨달은 경지를 버리지 않으면서도 범부의 온갖 성품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을 좌선이라 합니다.(…) 생사를 버리지 않는데도 번뇌가 없고, 열반을 증득했더라도 그 열반에 머물지 않는 것을 좌선이라 합니다.”
『유마경』을 읽으면서 어려운 말이 많은데 같은 말을 갖고 내용만 바꿔서 비슷한 방법으로 비판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어렵지 않습니다. 둘이 아니라는 자리에 서서 둘의 역할을 하는 것이 부사의업이라고 말씀 드렸었는데, 이 틀에서 보면 이해 안 될 것이 없습니다. 여기서 유마거사가 말한 멸진정은 모든 번뇌가 사라진 자리입니다. 그 자리를 나오지 않고도 일상의 행동을 한다는 것이 바로 일상과 멸진정을 둘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참선할 때는 모든 행동을 멈추고 해야 한다고 알고 있는데, 참선은 멸진정의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일상을 나투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곧 행위와 선정이 둘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행주좌와어묵동정(行住坐臥語默動靜)이 모두 선이라고 알고 있으면서도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 수행을 할 수 있고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제시한 유일한 분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불교는 불교가 아니게 됩니다. 지금 한국에서 불교행세를 하는 곳들을 보면 부처님이 나올 이유가 없는 불교가 많습니다. 힌두교적 수행을 불교라고 우기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불교는 언제나 부처님이 나오신 이유에 있습니다.
정혜쌍수(定慧雙修) 지관겸수(止觀兼修), 즉 고요함과 깨어있음을 함께 닦는 데에 부처님께서 나오신 이유가 있습니다. 모든 수행을 거기에 비춰봐야 합니다. 화두를 들면 모든 잡념들이 사라지고 고요가 있는 것, 그래서 화두가 성성하게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화두가 아닙니다. 사경이던 염불이던 정혜쌍수라는 틀 속에 있어야 합니다.
마음을 끊임없이 계발해 언제나 또렷하게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일상의 생활을 유지하는 힘이 강해지면 부처되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생활 속에서 이뤄지지 않으면 수행력 까먹기가 됩니다. 따라서 모든 것을 차단하고 들어가 앉아야 하는 참선은 비판받아야 합니다. 우리 삶의 무대가 바로 불교수행의 장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유마거사의 이야기가 성립하지 않으면 함께 가는 불교가 될 수 없습니다. 유마거사가 사리불에게 한 이야기는 재가불자는 물론 불교전체에 통용되는 이야기입니다. 진여의 자리와 생멸의 자리를 둘로 나눠놓고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무르려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탕으로 일상생활을 일으켜 나가는 것이 불교입니다. 또한 그러한 마음을 잃지 않는 자세가 바로 선입니다.
자비없이 깨달음만 좇는 건 ‘깨달음 병’
우리의 일상생활을 포기하고 달려나가는 철학이나 종교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종교는 우리의 일상 속으로 내려와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거기에 매몰되지 않고 보다 높은 세계로 이끌어주는 측면이 함께 있는 조화와 균형을 취해야 합니다. 그런데 대승불교 출현 이전의 소승불교는 승단 중심으로만 운영돼 초세간적인, 그래서 일상을 포기하는 냄새가 너무 진하게 났습니다.
이에 반해 대승은 범과 성을 함께 돌아보며 세간사를 놓지 않았습니다. 일상적인 것을 살려서 그것을 열반으로 향하게 하는 구조, 이것이 『유마경』의 불이(不二)의 틀에서는 아주 소중합니다. 어떠한 대상이 나와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어떤 사람이 나를 나쁘게 말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나빠서가 아니라 내가 그 사람을 보는 눈이 그 사람에게 적용되어 그렇게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긍정의 눈으로 보면 나쁘게 보이던 사람도 착한 사람으로 볼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놈 나쁜 놈이라고 보는 순간 내가 그 존재 대상을 그만큼 규정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규정에 따라 나에게 반응해 옵니다. 그렇게 되면 또 내 반응이 증폭되고, 이렇게 끊임없이 둘이 되어서 갈등하는 구조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재가자들에게는 커다란 긍정의 눈, 열반을 지향하지만 세간사를 버리지 않는 눈이 필요합니다.
불교는 정신적인 두뇌 회로구조를 바꾸는 것이고, 그것을 바꾸지 못하면 영원히 고통의 증폭이 있을 뿐입니다. 십대제자가 유마거사에게 두들겨 맞는 대목을 보면 범과 성, 출세간과 세간, 생사와 열반 이런 것들을 모두 둘로 보기 때문입니다. 불이의 눈은 금 긋기를 허문 것입니다. 내가 긍정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긍정적으로 나에게 규정이 되고 또 그렇게 반응이 옵니다. 커다란 긍정이 전제가 되느냐 부정이 전제가 되느냐에 따라 세상은 180도 달라집니다. 세상이 객관적이라는 믿음은 불교에 입문하면서부터 버려야 합니다. 세계는 나와의 상호의존 관계에서 그렇게 드러날 뿐입니다. 그것을 객관적이라고 믿으면서 번뇌가 시작됩니다. 그때는 어떠한 재료를 집어넣어도 나쁜 것만 나오게 됩니다. 유마거사는 출가자에게 ‘당신에게 공양한 사람이 천상에 난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출가자의 그 생각은 큰 망상이라는 것입니다. 출가자와 재가자를 둘로 나누는 상, 그것을 깨지 않으면, 즉 그런 상을 갖고 있는 한 공양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이 유마거사의 가르침입니다. 오늘날의 스님들은 안 그렇습니까. 요즘 스님들은 스님에 대해 불리한 이야기만 나와도 발끈해서 공격을 합니다. 스님들이 자신들을 특권계층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일상적 삶에서 보리 구해야 그러면 『유마경』은 불이라고 하면서 스님들을 왜 그렇게 무섭게 비판할까요. 그것은 사이비(似而非)이기 때문입니다. 불교라고 표방하면서 엉뚱한 짓 하는 것을 용서하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불교라고 하면서 이상한 짓을 하게 되면 근본에 문제가 생기게 되기 때문에 엄하게 비판하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불교 내에서 부처님이 지향한 바를 올바르게 회복하자는 것이 『유마경』의 대승입니다.
우리가 흔히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말하면서 보리를 구한 이후에 중생교화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둘로 나누어 보는 것입니다.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일상적 삶에서 보리를 구해야 합니다. 사리불이 조용한 곳에서 참선을 하다가 유마에게 한방 맞은 것은 시끄러운 것과 조용한 것을 나누어 보았기 때문입니다. 시끄럽다고 생각하는 그 마음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 마음이 시끄러운데 어디 가서 조용한 것을 찾는가 하는 것이지요. 「제자품」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보살품」에서도 그와 비슷한 이야기가 이어지고 이제 「문수사리문질품」으로 넘어가면 유마거사가 문수사리보살이 온다는 것을 알고 병실을 비우고 홀로 앉습니다. 문수사리보살이 의례적인 인사를 마치고 ‘병이 왜 생겼는가’를 묻습니다. 이때 유마거사가 “중생이 아프기 때문에 나도 아프다”고 합니다. 인구에 회자되는 “중생이 아프기에 보살도 아프다”는 말입니다. 느낌이 오십니까. 중생이 아픈데 왜 내가 아프다고 했을까. 이때 유마가 동체대비를 말하면서 “장자가 자기의 외아들이 아프면 자기도 아픈 것과 같다”고 합니다. 자식이 아프면 나도 아프다. 바로 그것입니다. 자식이 아파서 부모가 아픈 것이나, 중생이 아파서 보살이 아픈 것이나 같은 차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기에 장애가 생겨서 한계가 있습니다. 바로 내 자식만 있는 것입니다. 아집, 아상, 아소, 자아를 중심으로 해서 자아에 엮인 것만 한정해서 봅니다. 그것은 애견입니다. 대비는 대비인데 애견에 묶인 대비이고 자비입니다. 그렇다면 애견대비와 보살의 자비는 뿌리가 둘일까요. 마음이 따로 있을까요. 아닙니다. 둘로 보면 안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근본 회로구조가 잘못돼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나라는 존재가 나를 넘어서는 것은 남이 아파할 때 같이 아파하고 남이 좋아할 때 같이 좋아할 수 있을 때 입니다. 나라는 자아관념을 중심으로 해서 자비가 발현되기 때문에 장애도 드러나고 번뇌도 드러나고 괴로움이라는 결과도 창출되지만, 근원적 사랑의 마음 자체가 보살의 사랑과 다르지 않습니다. 출발은 같은 뿌리에서 나왔는데 자아관념이라는 회로를 통해 나오면서 비뚤어진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을 뿐입니다. 가장 비뚤어진 구조를 낳게 하는 것이 자아관념입니다. 나를 중심으로 해서 세상을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그런 구조를 통과했다면 그 마음은 왜곡되고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나의 자식에 대한 마음에서 나의 보살됨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대로 발현되도록 회로를 고쳐나가야 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긍정적 시각으로 보면 번뇌의 모든 상을 되돌려서 보살의 마음으로 회향시킬 수 있습니다. 저것을 없애야 할 것, 나쁜 것이라고 하는 순간 적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일상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한번 금을 긋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그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작업이 불교를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못하면 불교를 아무리 믿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불이를 바탕으로 하는 구조를 심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보살이 아픈 원인은 보살의 대비심에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개인의 병은 개인으로만 생기는 것이 아니고 해결도 개인으로만 할 수 없습니다. 같은 물이라도 뱀이 마시면 독이 되고, 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는데 그것은 회로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집을 중심으로 회로를 작동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오게 됩니다. 여기서 불교적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진여회로가 나오는 것입니다. 부사의업이라는 회로구조를 갖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우리가 마음에 둘이 아님을 바탕으로 해서 일으키는 업을 짓는 구조를 스스로 몸에 익히는가 아닌가의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부처와 보살들은 진여구조를 가지고 있는 반면, 우리는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물을 마시고 독을 양산하는 구조를 바꿔서 온전하게 그 자신이 계속 세상을 바꿔나가는 원동력이 되는 구조를 가져야 하고, 이것이 곧 깨달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교적 해탈은 깨달아서 냉랭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손등과 손바닥이 있는 것처럼 깨달음의 이면이 바로 자비입니다. 생명이라는 모든 존재에 근본적으로 있는 것이 사랑과 자비입니다. 그것이 깨달음을 통해서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깨달음을 얻는 순간에 한량없는 자비가 충만해집니다. 자비의 완성이 지혜의 완성이기 때문에 깨달은 분들은 그 순간에 바로 충만한 자비와 하나가 됩니다. 제한되지 않은 자비, 이것이 바로 불교적 깨달음 입니다. 그래서 중생이 아프면 보살이 아픈 것입니다.
자식 생각한 마음서 보살됨 찾길 그런데 한국불교에는 자비와 지혜의 종교에서 하나가 빠져 있습니다. 깨달음만 강조되어 깨달음 병에 걸린 사람이 많습니다. 목석같은 깨달음만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흔히 법력이니 도력이니 하고 말하는데, 수행자는 자비심과 지혜의 눈이 얼마나 드러나는가에 따라 달리 보여지는 것입니다. 법력과 도력을 찾으며 신통력 욕심을 내는 것은 재물 욕심과 근원구조가 같습니다. 그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문수사리보살은 또 유마거사에게 ‘어떤 방에 누워있고, 누가 병 수발을 드는가’를 묻습니다. 그러자 유마거사는 ‘세상이 공(空)하기 때문에 방이 비었고, 외도와 마구니들까지 모두 내 시종’이라고 합니다. 유마거사는 여기서 내편과 네 편으로 가르는 것을 지적하고, 외도와 마구니가 다 내 시종이라고 합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스스로 ‘나의 삶은 친한 자와 나를 돕는 자를 어디서 뽑아내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문수사리보살은 이어 ‘아픈 보살은 어떻게 위로해야 하는가’를 묻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아픈 이들은 어떻게 위로해야 할까’를 물어야 합니다. 주변에서 보면 아프고 난 이후 한 단계 성장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 더욱 움츠러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장을 도와주는 방향으로 위로를 해야 하고, 나 스스로도 그렇게 달래야 합니다. 아프면서 오히려 더욱 대범해지고 그러면서도 몸을 넘어서는 관점을 갖고 건전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몸의 덧없음을 알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고, 또한 버리지 않도록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유마거사가 하는 말을 나에게 적용하면 됩니다. 그러니까 나라는 것이 근본적인 병이니 그것을 고치지 않는 한 언제나 우리는 병 속에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중생이 앓고 있는 병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묻고, 나와 나의 것이라는 데서 벗어나는 것이 「문수사리문질품」의 결론입니다. 그 구조를 혁파해서 정상적인 구조로 되돌리는 것이 바로 나의 병을 치료하는 것이요, 남의 병을 위로하는 길이고, 또한 내 병을 조복 받는 길이며 남의 병을 낫게 해 주는 길입니다.
선입견 벗으려는 태도로 사는 게 불자의 삶
『유마경』은 출가중심주의 또는 초세간주의에 의해서 철저하게 소외됐던 우리의 일상적 삶을 복권시키고 있습니다. 소외되고 버려졌던 삶의 세계를 복권시키는 것이기에 이것을 ‘복권의 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성(空性)을 관찰하기를 즐기면서도 온갖 공덕을 구하니, 이를 보살행이라 합니다. 무작(無作)의 영역에 노닐기를 즐기면서도 늘 모든 선근이 끊이지 않는 영역을 지어가니, 이를 보살행이라고 합니다. 온갖 법이 생멸상(生滅相)이 없다는 것을 관찰하기를 즐기면서도 상호로써 그 몸을 장엄하고 갖가지 불사를 성취하니, 이를 보살행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유마경』의 대승불교 선언입니다. 우리 삶의 세계를 다시 복권시키는 이 선언을 정확하게 읽어야 합니다. 그 이전까지 출가중심의 불교에서 얼마나 우리들 삶의 세계를 덧없는 것으로 말하고, 싫어해야 하는 것으로 말했습니까. 이것을 바꾼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여성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생멸상 나타내기를 꺼리지 않는 것입니다. 언제나 생멸상 속에서 진여성을 지켜나가고, 진여성을 바탕으로 해서 생멸의 세계를 일으켜 나가는 모습들이 나옵니다. 다시 말해 출세간적 정신을 바탕으로 세간사를 끊임없이 일으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상구보리 하화중생에 얽매여서 위로 보리를 구하고 아래에서 중생을 제도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은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을 둘로 나누는 것입니다. 깨달음도 구하지 못하고 어떻게 중생을 제도하느냐는 생각이 결국은 두 쪽이 나는 원인입니다. 그래서 이제 거꾸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구보리 상화중생’하자는 말입니다. 우리들 삶에서 보리를 구하고 중생과 함께 가자는 것이지요. 보리를 구하여 그것으로 중생을 교화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한평생 보리만 구하다가 끝이 납니다. 따라서 우리 삶의 장이 수행의 장이 되지 않으면 이런 불교는 이원적인 종교가 되기에 딱 좋습니다. 그렇다면 유마거사가 말한 대승불교 정신이 한국불교에 얼마나 드러나고 있는지 한번 봅시다. 여러분은 삶을 얼마나 불교적으로 이끌어 가고 있습니까. 삶과 불교가 둘이 아니라고 했는데, 여전히 불자 대부분은 삶과 불교가 둘입니다. 수행자들은 또 어떻습니까. 수행병에 걸려서 모조리 다 걷어치우고 수행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깨닫지 못한 문에서 무엇을 지어나가면 다 잘못될지 모르기 때문에 깨닫기 전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렇게 깨달은 것과 깨닫지 않은 것을 두 쪽으로 구분해놓고 있습니다. 그렇게 나눠놓으면 절대로 깨달을 수 없습니다.
불교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깨닫지 못한 속에 깨달음이 있어야 하는 사고가 바탕이 되어야 깨달음이 오는 것이지, 깨달음의 세계와 깨닫지 못한 세계를 둘로 나눠 놓으면 우리가 거기를 어떻게 건너갈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그곳으로 가서 살 것이기 때문에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우리 삶에서 불교가 나를 이끌어야 합니다. 유마거사의 설법에 의해 많은 대중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고 큰 지혜를 맛보는 것으로 「문수사리문질품」이 끝나고, 그 다음에 이제 「부사의품」으로 들어갑니다. 사리불이 유마거사의 방에 들어와서는 어디에 앉을까를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유마거사가 ‘앉을 자리를 구하러 왔는가, 법을 구하러 왔는가’를 묻습니다. 그러면서 자리를 마련해 수많은 대중이 앉도록 하고는 불가사의한 해탈의 세계를 이야기 합니다. 이 이야기를 한마디로 압축하면 겨자씨 속에 수미산이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법을 구하는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유마경』에서는 『반야심경』에서 압축적으로 말한 내용을 풀어서 이야기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승은 부처님 정신 회복하자는 운동 “사리불이여, 법을 구하는 자들은 오온을 구하지 않으며 십팔계를 구하지 않으며…”하는 대목은, 『반야심경』에서 “오온개공…,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계 내지무의식계…”와 다른 각도에서 말했을 뿐 같은 내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고통을 알기를 구하지 않고, 고통의 원인을 끊기를 구하지 않고, 고통의 소멸을 성취하기를 구하지 않고, 고통이 소멸하는 길을 닦는 것을 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법에는 쓸데없는 논쟁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가 고통을 알고, 그 고통의 원인을 끊고 고통의 소멸을 성취하고 고통을 소멸하는 길을 닦는다고 말한다면 이는 희론이지 법을 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하는 대목은, 『반야심경』의 “무고집멸도”에 대한 부연설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법을 구하는 자들은 생에서 구하지도 않고 멸에서 구하지도 않습니다.…”하는 대목은, “불생불멸 불구부정”에 상응하는 것으로 보면 됩니다.
『반야심경』에서 ‘없다’고 한 것을, 여기서는 ‘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법을 구하고 싶다면 어떤 법도 구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반야심경』의 ‘앎도 없고 얻음도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반야심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하는 것은, 이것을 보면서 이해하면 됩니다. 『반야심경』을 너무 어렵게 읽으려고 하는데, 『반야심경』은 법집에 대한 부정입니다. 법집을 깨뜨리고 반야에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법집을 깨뜨리라고 하는 것은 소승에서 말한 법의 체계에 대한 부정입니다. 그리고 ‘공’은 선입견이 없음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선입견 없는 마음에 드러나는 세계의 모습을 공이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법을 부정할까요. 경전은 부처님이 중생들의 근기에 맞게 설한 대기설입니다. 그것을 일률적으로 체계화하고 정리하면서 몇 가지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무상, 무아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윤회의 주체는 누구인가’ 등의 물음인데, 그것을 체계화 하다 보니 희한한 학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현상세계가 있고 진리의 세계가 따로 있게 됩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법을 규명하기 위해 부파불교가 매진을 하게 되고, 엄청난 논서들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그게 다 진리라고 하면 왜 그렇게 많은 부파가 나와야 합니까. 그것은 모두 다 진리가 아니라고 하는 것과 통하는 것은 아닐까요. 부처님은 ‘방편’이라고 했습니다. 방편이라고 한 것을 그대로 진리라고 하면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서 어긋나게 됩니다. ‘법’이라는 색안경으로 세상을 보는 순간 세상의 실상을 왜곡하게 됩니다. 『반야심경』에서 ‘없다’는 것은 바로 법집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유마경』에서도 법집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반야는 초능력적 지혜가 아니라, 선입견을 벗어버린 그 마음의 눈에 드러나는 지혜입니다. 개념적이고 이론적인 틀로 세상을 재단하려는 것을 깨고 마음에 드러나는 지혜가 바로 반야입니다.
‘나’ 중심으로 대상화하면 괴로울 뿐 『유마경』에서 ‘법을 구하려고도 하지 말아야 한다. 법이라는 것이 그대로 진리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붙잡으려고 하는 순간 영원히 그대는 법을 구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한 것은 바로 마음의 선입견을 없애라고 한 『반야심경』의 근본정신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불교는 안주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따라서 안주하기를 구하는 마음을 돌아봐야 합니다. 끊임없이 근본을 돌아보고 선입견을 벗으려는 태도로 살아가는 것이 불자입니다. 깨달음이나 완성된 존재가 되는 것은 지혜와 자비가 완전할 때입니다. 우리는 지혜에 너무 치우쳐 있는데, 모든 중생에 대한 온전한 사랑으로 완성된 것이 완전한 깨달음입니다. 즉 지혜의 완성이자 자비의 완성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깨달은 존재는 충만한 자비와 온전한 지혜를 함께 갖춘 존재여야 합니다. 근본 종지에 맞는가 하는 것을 돌아보는 것, 여기까지가 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앞에서 좁은 방에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수미산이 겨자씨에 들어간다는 말을 했습니다. 불가사의한 일인데, 불가사의란 생각할 수도 따질 수도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해탈을 불가사의 해탈이라고 합니다. 그동안 부사의업을 말했는데, 불가사의한 업과 해탈은 같은 틀 속에서 말할 수 있겠습니다. 진여의 본성은 차별을 무너뜨리는 것이고, 그러한 진여를 바탕으로 업을 지을 때 부사의 업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해탈은 무엇일까요. 진여문은 겨자씨보다 더 작아서 풀 한포기 가꿀 땅이 없고, 송곳조차 꽂을 자리가 없습니다. 불가사의 한 해탈은 그것을 바탕으로 한 해탈을 말합니다. 절대 진여의 세계에서 보면 모든 수미산이 겨자씨에 들어갑니다. 여기서 법석이 마련된 유마거사의 방은 둘이 아닌 법문에 도달하는 방이고, 진여의 방입니다. 진여청정의 방이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들어가고도 넉넉할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진여성을 바탕으로 하면 수미산을 겨자씨에 넣는 소식에 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보는 세계가 객관적인 세계가 아니라, 어떠한 세계를 창출하고 어떠한 삶을 사느냐에 따라 수미산을 겨자씨에 넣을 수 있습니다. 불교의 정신은 늘 깨어있음입니다. 부처님 수행법의 특징은 그 이전의 요가적 삼매수행과는 다릅니다. 지관겸수(止觀兼修)입니다. 삼매와 깨어있음이 함께 있는 수행입니다. 십리 밖 바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완전히 깨어 있음을 유지하는 수행이 불교수행입니다. 관념과, 대상화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수미산이 겨자씨에 들어가는 소식이 있습니다. 생활 속에서도 그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괴롭다, 괴롭지 않다는 것도 나를 중심으로 대상화 객관화 할 때 괴로운 것입니다. 따라서 차별상에 매달려서 행위하던 것을, 차별상을 떠난 진여를 바탕으로 행위한다는 마음으로 행위하다 보면 부사의 해탈을 바탕으로 한 부사의업을 짓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중생은 이름일뿐 고정된 실체가 없어
오늘은 중생을 이야기 한 「관중생품」입니다. 중생은 생을 가진 존재들을 말합니다. 문수사리보살의 물음에 의해서 ‘중생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데서 시작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중생은 없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중생이라고 부를 존재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비유가 재미있습니다. “문수사리여, 가령 지혜로운 사람은 중생을 물속의 달을 보듯 하고, 거울 속의 상을 보듯 하고, 신기루를 보듯 하고,(…) 물거품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것처럼 보고, 다섯 번째 대(五大)를 보듯 하고, 여섯 번째 온(六蘊)을 보듯 하고, 일곱 번째 근(七根)을 보듯 하고, 열세번째 처(十三處)를 보듯 하고, 열아홉번째 계(十九界)를 보듯 하고, 무색계(無色界)에서 온갖 색깔의 영상을 보듯 하고, 썩은 종자에서 싹을 틔우는 듯이 보고, 거북털로 옷을 만든 것처럼 보고, 요절한 사람이 온갖 욕망의 쾌락을 누리는 것처럼 보고…”
이런 식으로 비유가 되어 있습니다. 중생이라는 것은 그 실상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참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데서 시작합니다. 고정된 것으로의 중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서 출발합니다. 이름이 중생일 뿐입니다. 따라서 중생을 떼어 놓고 고정된 실체로 생각해 둘로 나누어 보면 안됩니다. 번뇌와 보리가 둘이 아니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번뇌가 참으로 있는 것이라면 번뇌를 없앨 수 없습니다. 번뇌는 참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번뇌도 거울속의 그림자요 물속의 달일 뿐입니다. 중생도 중생과 부처를 나누어 놓고 이쪽은 부처 이쪽은 중생이라고 하면 중생을 없앨 길이 없게 됩니다. 중생이 부처라고 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부처이면서 한편으로는 중생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쓰면 중생이고 저렇게 마음을 쓰면 부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견(知見)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선(禪) 수행이나 어떤 것을 하더라도 올바른 지견이 있어야 합니다.
불교를 믿으면서 정지견(正知見)을 갖고 믿느냐, 그렇지 않고 믿느냐 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정지견을 갖고 있지 않으면 복을 짓는다는 것이 악업이 됩니다. 정지견이 있으면 방편을 올바로 선택할 수 있는데, 없으면 거꾸로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수행할 때도 중생과 부처를 딱 둘로 나눠놓고 수행하면 수행이 안됩니다. 어떤 것을 둘로 나누는 방식으로 수행하면 거꾸로 가게 되고 병이 듭니다. 『유마경』에서는 불이(不二)라는 것이 정지견입니다. 불이의 입장에 서야 비로소 번뇌도 없앨 수 있고 중생상도 벗을 수가 있는 것이지, 그것을 인정하고 나서는 벗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라는 정지견에 서야만 수행을 할 수 있고,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입장에서 그런 마음으로 더 자비심을 일으키는 느낌이, 곧 부모가 자식 사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부모가 자식을 사랑할 때는 내 자식이라는 애착이 개입됩니다. 그것만 빼면 바로 부모의 자식 사랑이 보살의 사랑과 다르지 않게 됩니다.보살의 사랑은 사무량심(四無量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경전의 내용을 보면 이렇습니다.
“문수사리가 말했다. ‘보살이 크나큰 연민을 닦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유마힐이 말했다. ‘여지껏 이룩하고 쌓아온 선근을 전부 포기하여 중생에게 베풀어 주는데 전혀 인색함이 없는 것, 이것을 보살이 크나큰 연민을 닦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 문수사리가 말했다. ‘보살이 크나큰 기쁨을 닦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유마힐이 말했다. ‘중생에게 이익이 되는 일을 늘 기쁘게 하면서 전혀 후회가 없는 것, 이것을 보살이 크나큰 기쁨을 닦는다고 말합니다.’ / 문수사리가 말했다. ‘보살이 크나큰 포기를 닦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유마힐이 답했다. ‘평등하게 이익을 주면서도 과보를 바라지 않는 것, 이것을 보살이 크나큰 포기를 닦는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내용과 가장 비슷한 사랑이 바로 부모의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중생과 보살의 관계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와 같아서 내가 한다는 상도 없이 하는 것이 바로 보살의 사랑이고 자비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자식 사랑은 내 자식이라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을 무너뜨리면 보살의 사랑이 부모의 자식사랑과 같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완전한 실현은 대승불교의 핵심 주제이기도 합니다. 내가 자식 사랑하는 마음이 보살의 사랑과 다르지 않아야 합니다. 이렇게 변해가는 관점 자체가 중요하고, 이것이 곧 정지견입니다.
경전에서는 또 천녀가 유마힐의 방에 있다가 꽃을 뿌립니다. 이 꽃이 보살의 몸에는 안 붙는데 스님들의 가사에만 달라붙습니다. 그래서 사리불이 떼려고 하니까, 천녀가 왜 떼려고 하느냐고 묻습니다. 이에 사리불이 ‘법답지 않아서’라고 답하자, 천녀는 ‘법답다, 법답지 않다는 것은 당신의 분별에서 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대목에서는 그냥 ‘법답다, 아니다’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계율을 생각해야 합니다. 계율로만 보면 스님들은 꽃 한 송이, 장신구 하나도 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사리불이 꽃을 떼려고 한 것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하지만 천녀는 그게 법답다 아니다 하는 것 자체가 법집이라고 지적한 것입니다. 사리불은 ‘법답지 않다’는 말로 율에 대한 집착을 보였습니다. 계율도 방편이라는 입장이 아니라 절대로 깨지면 안 된다는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불자 5계도 지켜지기 어려운 게 현실입니다. 술 마시지 말라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오계를 주면서 명목상 주는 것이니 그건 빼고 나머지는 지키라고 한다면 그 자체로 계율의 권위가 깨지게 됩니다. 그렇게 하면 나머지는 지켜지겠습니까. 그래서 지금이라도 바꿨으면 좋겠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사리불이 천녀에게 ‘당신은 왜 남자 몸을 받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천녀에게 당하다 보니 일종의 반격이었지요. 그러니까 천녀가 사리불을 여자로 바꿔놓고는 ‘여신을 받은 것도 당신이 남신으로 바뀐 것과 같이 환(幻)일 뿐’이라고 합니다. 남녀가 환일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유마경』을 보면 불교는 철저하게 남녀평등의 입장에 있습니다. 부처님 정신에 비춰보면 남녀불평등이 어디에 있습니까. 모두가 부처이고, 다 환일뿐이고 역할일 뿐입니다. 중생이 부처이고 번뇌가 보리라고 했듯 ‘불이’의 시각으로 봐야 합니다. 왜 사리불이 천녀에게 혼나고 있습니까. 불교는 둘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둘이라는 데 빠져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그 다음에 「불도품」에 들어가면 감격할만한 대목이 나옵니다.
지금 있는 출세간 아니면 성불 못해 문수사리보살이 “보살이 어떻게 하면 모든 불법을 따르는 길을 성취하는 것입니까” 하고 물으니까, 유마거사가 “보살이 길 아닌 길을 따를 때 불법을 성취하는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길 아닌 길이 무엇입니까. 유마거사는 “보살들은 오무간업을 다시 행하더라도 원한이나 증오, 성내는 마음을 내지 않으며, 지옥으로 다시 들어가더라도 모든 번뇌의 오염을 벗어나며, 아수라의 길로 다시 들어가더라도 일체의 오만과 교만과 자만을 벗어나며…”라고 합니다. 이게 무엇입니까. 진여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자세들이 강조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무시하고 들어앉으려고 하면 안 됩니다. 거기에 빠쳐 허우적거려서도 안 되고, 거기에 들어앉으면 그게 또 하나의 벽이고 집착입니다. 그 세계와 이 세계가 둘이 아님을 엮어주는 것이 『유마경』의 선언입니다. 『유마경』에서는 지금 이곳을 떠나서는 성불의 길이 없다고 합니다. “성문이나 독각의 종성처럼 이미 무위를 보아서 바른 성품에 들어가 생을 벗어난 자는 끝내 일체지심을 일으킬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온갖 번뇌가 작용하는 낮고 습한 진흙 속에서라야 비로소 일체지심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런 곳에서 불법이 생장하기 때문입니다.” 또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생사윤회를 일으키는 온갖 번뇌의 종성이 바로 여래의 종성임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이건 그냥 세속에 있으면서도 출세간의 마음을 잃지 말라는 정도가 아니라, 거기가 아니면 성불할 곳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성문승식으로 금을 그어놓고 그 세계를 떠나서 안주하는 사람, 진여문 테두리를 갖고 앉은 사람은 성불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유마경』에서는 세속화되고 경직된 불교의 모습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다른 세계를 구성하고 들어간 사람들은 불종자를 끊는 것이어서, 모든 일체지심을 일으킬 수 없고 온 중생을 함께 데리고 가기를 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썩은 종자라고 합니다. 지금 여기서 깨닫지 않으면 길이 없다는 말입니다. 연꽃이 진흙이 아니면 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진흙에 물들지 않고 정도가 아니라, 진흙이 아니면 연꽃이 필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 오탁악세가 아니면 성불할 곳이 없습니다. 일체지심을 일으켜서 그 자리에서 성불해야 합니다. 이 세상 속에서 성불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속세를 떠나는 것의 이면에는 비겁함, 두려움이 있습니다. 올바른 출세간에 있으면 두려움이나 겁내는 게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당당한 불자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진리의 밥 귀로 들어가 입으로 나오니 향취 없어
유마경의 정수는 不二 법문유마일묵은 경전의 화룡점정
전 시간에 ‘길이 아닌 길’을 이야기 했습니다. ‘유마경’에서는 진흙이 아니면 연꽃이 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더럽지만 물들지 않는다가 아니라 거기가 아니면 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중에 아라한들은 성불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라한들이 탄식하는 대목이 나오기도 합니다.
이제 유마거사가 문수사리를 비롯한 보살들에게 묻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이 모두 불이법문인데, 이것을 당신들은 어떻게 들었습니까’ 하고 말이죠. 첫 물음에 아무도 답을 하지 않으니, 유마거사가 문수보살에게 ‘왜 말을 하지 않느냐’고 다그치게 됩니다. 그러니까 문수사리가 보살들에게 한마디씩 할 것을 권하고 보살들로부터 많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거기에는 불법 뿐만아니라 분별을 넘어서서 분별이 없는 곳에 들어가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문수사리가 “그대들은 그래도 둘이 아니라는 말을 세우고 있다. 지금까지 한 말을 들어보면 둘이 아닌 문을 말로 설정하고 있는데, 그 분별도 떨쳐야 불이법문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서 유마거사를 돌아보는데, 유마거사는 말없이 침묵을 합니다. 이것이 ‘유마일묵’ 입니다. 그렇게 유마거사가 침묵하자, 곧바로 문수사리가 “정말로 여실하게 몸으로 드러내 보이셨다”고 찬탄을 하는 것으로 ‘불이법문품’은 끝이 납니다.
이 대목을 보면 ‘유마경’을 지은 분이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유마거사의 장광설이 얼마나 대단했습니까. 그런데 보살들에게 말을 시켜놓고는 수많은 말을 하고 나니 당신은 스스로 침묵을 지킵니다. 또한 여기서 문수사리의 역할은 또 얼마나 절묘합니까. 문수사리가 없어서 유마거사가 침묵을 하는데 아무런 말도 없으면 그 자체가 얼마나 머쓱한 상황이 되겠습니까. 유마의 일묵을 문수사리가 치켜세웠기 때문에 그 의미가 살아난 것입니다. 이 ‘유마경’의 정수는 불이(不二)이고, 바로 이 대목이 화룡점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유마거사에게 시비를 한 번 걸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침묵도 하나의 표현 아닌가. 불이라고 하면 말 있음과 말 없음도 떠나야 하는데 왜 말을 안 하는 것으로 표현을 해야 하는가’하고 말입니다. 요즘 불교를 자꾸 말 없음의 종교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말을 해야 할 때는 하는 것이 옳습니다. 불이도 말 있음과 없음을 넘어서 있어야 불이가 됩니다. 진리는 무조건 말 없는 경지라고 강조하는 것 또한 하나의 집착입니다.
선사들은 ‘개구즉착(開口卽錯)’이라고 합니다. ‘입을 열면 곧 착’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입을 안 열면 맞는 것입니까. 이것 역시 마찬가지로 ‘착’입니다. 입을 열고 열지 않고를 둘로 보는 입장에 있어서 집착인 것입니다. 하도 말이 많아 ‘개구즉착’이라고 할 수 있으나, 입을 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분별하고 입을 열지 않았다면 그것도 착이 됩니다. 이 대목은 하나의 전개로 봐야 합니다. 정말로 말이 떨어진, 분별이 떨어진 것을 그 모습으로 보여주는 정점에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지, 그 침묵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할 말이 없고 무식해서 침묵하는 것은 금일 수 없습니다. 말을 하되 말에 머무름이 없을 때 수천마디의 말을 해도 말하지 않은 것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둘이 아닌 자리를 여의지 않고서 말이 나왔기 때문에 있음과 없음을 떠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침묵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유마경’ 전체에서 침묵의 의미를 파악해야 합니다.불이의 내용을 보면 아주 많은 것들이 담겨 있습니다. 세간과 출세간, 승과 속, 더러움과 깨끗함 그런 것들이 다 분별로서 그것을 넘어서서 둘이 아닌 것으로 깨달음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불이법문을 듣는 것까지는 좋은데 어디에 써먹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자칫 분별을 넘어선다고 하니 거기에 매달려 또 병이 걸리게 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차별하지 않고 시비를 넘어서야 할 것 같고, 적당히 넘어가는 병이 생기는 것입니다. 집착 속에 한 가지 입장의 분별에 들어앉아서 문제이지, 집착이 떠난 자리에 가면 오히려 더 명료하게 보여야 합니다.
남녀라는 분별이 있어서 남자와 여자라는 상속에 들어가 있으면 남자의 역할과 여자의 역할이나 모습이 잘 안보이고, 파도라는 입장에 서면 물이라는 것을 모르고 너의 파도와 내 파도로 나누게 됩니다. 하지만 물이라는 입장에 서게 되면 모든 파도들이 다 용인되면서도 오히려 분별 속에 들어앉았을 때 보지 못한 것들이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털끝만큼도 어길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엄밀해 지는 것이 세상일입니다. 그 분별없음이라는 것에 있어야 가장 엄밀해 지고, 엄밀하게 세상사를 건설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불자라면 오히려 더 정확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둘을 억지로 하나로 만드는 것은 오히려 다른 하나를 더 만들어서 차별을 뭉개는 것이 됩니다. 둘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둘을 뭉개고 차별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둔 채로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차별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차별 있음을 차별 없음의 눈으로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정지견(正知見)입니다. 정지견이 바로 서지 않으면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정지견이 서지 않으면 수행을 해도 거꾸로, 기도를 해도 거꾸로 가게 됩니다.
부처님과 나를 둘로 보면 안 된다고 했는데, 이미 내가 없으니까 구한다는 마음을 먹으면 안 됩니다. 없앤다고 자기를 분별해버리면, 또 내가 없어서 저것을 구한다는 생각을 하면 벌써 둘이 됩니다. 내가 없는 존재로 규정된 것입니다. 부처님은 다 주시는 분입니다. 기도는 이미 받은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부처님과 나를 둘로 보고 매일 부처님께 매달리는 종교가 아닙니다. 이것이 불이의 기도이고, 참선도 마찬가지입니다.
불법을 몸으로 소화시켜서털구멍마다 향기를 풍겨야
나는 깨닫지 못한 중생이라고 해서 둘로 나누면 절대로 깨닫지 못합니다. 정지견이 바로서서 그 정지견을 바탕으로 수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불이는 둘을 두면서도 둘이 아닌, 둘 자체에 집착하지 않고 매몰되지 않는 입장입니다. 둘을 뭉개는 것은 불이가 아니라 셋이 되는 것이고, 둘 밖에 또 하나를 세우는 것이 됩니다. 불교는 절대로 아득한 불이의 세계에 빠지게 하지 않습니다. 고통의 원인과 거기에 닿는 이유가 있고, 언제나 적실하게 우리의 괴로움을 해결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향적불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여기서도 역시 못난이 역할을 하는 문수사리가 역할에 충실합니다. “밥은 언제 주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유마거사가 그 생각을 읽고 향적여래가 계신 중향세계에 화신을 보내서 밥을 빌어옵니다. 이때 그 세계의 보살들까지 이 법석을 구경하고자 함께 오게 됩니다. 그런데 문수사리는 “밥이 조금밖에 없는데 저 밥으로 다같이 나눠먹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지요. 하지만 그 밥은 다같이 먹고도 남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우리가 밥만 먹고 사는 것은 아닌데, 그러면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내가 정말 인간답게 당당한 존재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러한 힘을 주는 음식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갖고 ‘향적불품’을 읽어야 합니다.
여기서의 음식은 바로 진리의 음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이렇게 또 다른 세계를 말할 때는 어찌 이리도 세계가 많은지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 생각할 것은 없고, 다만 우리가 사는 세계 역시도 동일한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면 됩니다. 흔히 우리들이 현재 의식하고 있는 것은 전체의 의식에 비해 빙산의 일각이라고 합니다. 나머지는 잠재돼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무시하고 살아갑니다. 평상시 멀쩡하다가도 술을 마시면 주사가 나오는 사람은 그 잠재의식 속에 있던 것이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을 하는 것인데, 수행을 하는 사람의 의식은 확장되고 잠재의식 속에 있던 것을 떠올려 해소하게 됩니다.
꼭 수행이 아니더라도 그러한 과정을 거쳐 잠재의식을 없애고 소멸해 갈 때 완성된 인격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완성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꿈 역시도 내 마음에 갈등과 부조화를 일으켰던 요소들을 해소해가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수행을 해서 완전한 인격을 갖는다는 것은 의식의 통일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경전에서처럼 불보살이 어떤 세계라도 갈 수 있다는 것은 ‘자기’라는 이 몸을 벗어나서 모든 의식의 바닥까지 꿰뚫어본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자체에 수억의 세계가 있고, 보살의 세계는 생각하는 만큼 있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유마거사는 그 중 중향세계에서 밥을 빌어온 것이고, 그것은 바로 진리의 밥입니다. 때문에 이 밥은 수십억명이 나눠먹어도 줄어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밥을 먹은 사람들은 털구멍마다 향기가 나고 몸이 편안해집니다. 여러분도 진리의 밥을 먹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우리의 털구멍마다에서는 향취가 나지 않을까요.
중국의 순자는 “소인의 배움은 귀로 들어가면 바로 입으로 나온다. 귀와 입 사이는 세치에 지나지 않으니 어찌 그 몸을 아름답게 할 수 있겠는가”라는 말을 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주신 진리의 밥이 ‘유마경’에서 말하는 향적여래의 밥만큼 못하겠습니까. 그런데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리의 밥을 먹는 우리는 여래의 밥을 다 먹었으면서도 귀로 들어가서 입으로 나오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몸을 아름답게 하지 못하고 불법의 향취가 나지 않는 것입니다. 진리의 밥을 차분하게 몸으로 소화시켜서 털구멍마다 향기가 풍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중생의 고통 어루만질 참 불사 필요한 시대
크고 화려함만 좇는 요즘 불사는중생 외면한 비불사이자 반불사
오늘은 ‘보살행품’과 ‘아촉불품’입니다. 이제 무대가 부처님 회상으로 옮겨집니다. 유마거사가 주인공인데 마지막으로 부처님께 증명을 받는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제 마무리가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향적여래의 음식의 정체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이 음식을 먹은 이들은 번뇌가 해소돼야 음식이 소화된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진리의 음식이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가르침을 받았더라도 그것을 소화해서 내 것으로 하지 못하면 그것은 소화가 안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음식이 소화된다는 것은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소화됐다고 할 수 있는데, 우리는 소화가 안되어 정신의 위장에 그대로 쌓여있는 모습입니다.
여기서 진리의 음식을 먹고 소화가 되면 향내가 없어집니다. 따라서 불자가 불자인 티를 내고 다니는 것은 소화가 안됐다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완전히 자기화가 되면 자기표현이 나오지 그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나의 냄새가 나게 되지요.
부처님 가르침을 제대로 소화하면 자기 것이 됩니다. 불교에는 ‘장부가 스스로 하늘을 찌르는 기개가 있으니, 여래가 행한 것을 따라서 행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는 불교가 부처님을 무조건적인 절대자로 모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래가 행한 것을 따라하지 말라고 했을 정도로 자유로운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정말로 자기화 된 그 냄새가 나야 합니다.
그러면서 ‘향적여래의 음식으로 불사를 짓습니까’ 하는 말이 나옵니다. 여래는 국토의 중생에 맞춰서 온갖 다양한 불사를 짓는다는 말이 나옵니다. 거기에는 보리수 불사도 있습니다. 그리고 여래 색신으로 짓는 불사, 갖가지 의복으로 짓는 불사, 온갖 음식으로 짓는 불사가 나오는데 그 이유가 중생은 방편으로 조복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올바른 방편을 써서 중생을 조복시키는 것이 불사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중생들이 어떻게 고통을 받고 있는지, 그 조건에 맞는 올바른 방편을 찾아주는 것이 바로 불사입니다.
이 말에 비춰보면 이 시대의 불사는 비불사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절 짓기, 기왓장 올리기, 불상 조성, 개금불사 이런 것들 말입니다. 시대에 맞지 않습니다. 예전에 불상을 조성하던 것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크기를 경쟁하며 온갖 불상을 조성하는데 그게 중생에게 감화를 줄까요. 요즘 그런 큰 불상 조성이 의미가 있을까, 화려하게 절 짓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를 생각하면 이것은 비불사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단지 ‘불사가 아니다’라는 정도에서 끝나지 않고 진짜 불사를 방해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시대의 중생 고통을 어루만지는 진정한 불사가 방해를 받습니다. 그래서 반(反)불사가 됩니다. 올바른 일을 하는 사람은 기개가 생깁니다. 이 시대에 맞는 일을 했다고 생각하면 기상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지금은 기상이 달라지고 삶의 태도가 달라지는 불사가 없습니다. 선망부모에서 가족까지 읊는 불사만 하니까 위안은 받아도 기상이 달라질 수가 없습니다. 이대로는 안 됩니다.
인재양성도 필요하고, 병원도 필요하고, 수없이 많은 영역이 있습니다. 통일 불사, 환경 불사에 앞장서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러면 거기에 참여하는 대중들의 인식이 달라집니다. 또 마음과 기상이 달라지고 자연스럽게 복도 따라오게 됩니다. 그렇게 기상이 달라지면 호법신장이 달라집니다. 주변에 모이는 사람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의식이 바뀌질 않습니다. 스님들은 대중의 탓을 하는데, 스님들이 말하면 바뀌게 됩니다. 편한 것만 찾으니 문제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물든 불자들이 또 스님들을 끌고 갑니다. 과연 그게 복 받을 일입니까. 불사를 제대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성문과 보살의 차이에 대해서 나오는데 그것도 중요합니다. 성문이 원래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닌데, ‘유마경’에서는 성문승을 두드려 패는 대표로 내세웠습니다.
그 시대의 잘못된 불교 모습을 대변하는 것으로 성문을 세운 것입니다. 성문은 아무리 기를 써도 보살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자기 가족과 자기 안위를 위한 불사를 하는 의식세계에 있는 사람과, 적어도 자기의 이웃과 중생과 사회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과는 서 있는 자리가 다른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성문이 두드려 맞는 것은 자기의 해탈만을 목표로 했기 때문입니다. 열린 의식으로 사는 사람과 자기의식에만 갇혀 사는 사람은 차원이 다르다는 말인데, 낮은 레벨에서는 기껏해야 보살의 레벨에서 내딛는 한 걸음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대승의 마음을 내면 그 전에 갈등하던 것들이 해소됩니다. 예전에 백봉 김기추 선생님은 ‘대승의 범부가 될지언정 소승의 성과를 탐하지 말라’고 했는데, 대승의 마음이라는 것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유마경’을 읽다보면 대승의 마음이 무엇인지 이해가 됩니다. 그러면서 다시 부처님이 중향세계의 중생들에게 ‘보살은 유위를 다해서도 안 되고 마찬가지로 무위에 머물러서도 안 된다’고 부촉을 내립니다.
공중에서 부처님 찾으면 위험부처님의 삶을 정확히 알아야
‘유위를 다해서도 안 된다’는 것은 크나큰 사랑의 마음을 버리지 않고, 중생을 성숙시키는데 한시도 게으르지 않고, 짐짓 생사를 받더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모든 불국토를 장엄하기를 즐기고, 번뇌의 적을 영원히 무찌르기 위해 방편을 통해 반야의 칼과 몽둥이를 갈고 닦고, 대비의 마음을 버리지 않는 것, 그러니까 유위 그 행을 버리지 않고 해나가는 것입니다. 불사하고 장엄하고 정진하고 노력하는 것이 다 유위의 영역입니다. 그것을 비우지 않고 계속 진행해 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한 측면으로 ‘무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공을 행하더라도 그 공을 증명하기를 즐기지 않고 안으로 ‘나’가 없음을 관찰하면서도 끝내 자신을 저버리지 않고, 행이 없음을 보면서도 중생들을 성숙시키는 일을 행하고, 번뇌 없음을 보면서도 끊임없이 생사에 유전하는 것, 그러니까 보살은 본래의 염원을 성취시키는 일이지만 근본입장에서 보면 그것이 이룬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없다고 하는 일을 끊임없이 하는 것이 바로 집착이 없는 보살의 대원력에 바탕한 행위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고, 중향세계의 보살들이 여기에 크게 감명을 받고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어떠한 세계도 부처님이 중생을 성숙시키기 위한 방편이지 더럽고 깨끗한 세계가 따로 없다는 것이 ‘유마경’의 본래 뜻입니다. 때문에 중향세계의 보살들이 석가모니부처님의 가르침에 크게 감명을 받으면서 이 대목이 끝이 납니다.
그 다음에 ‘아촉불품’ 입니다. 여래의 몸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주제가 나옵니다. 여기서는 ‘나는 부처님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물음이 있어야 합니다. 때문에 적어도 불자라면 부처님일대기를 제대로 읽어봐야 합니다. 어떤 시대를 어떻게 살다 가셨는지, 그 시대에 그 몸으로 그렇게 사셨다는 것에 미루어서 어떤 것을 가르치려고 하신 분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역사 속 부처님을 이해해야 역사를 넘어선 부처님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공중에서 부처님을 찾으려고 하면 위험합니다. 우리는 부처님을 통해서 진리를 접한 것입니다. ‘유마경’에서는 색신을 넘어선 부처님의 모습을 형용한 것입니다. ‘여래의 몸은 모든 것을 넘어선 존재이며 어떤 것으로도 규정될 수 없는 존재이다. 모든 것을 성취했으며 모든 장애를 벗어난 존재이다’ 정도로 요약하면 됩니다.
완성형이기 때문에 이것은 절대 구체적인 말로 형용이 안 됩니다. 부정적인 말로 형용돼야 합니다. 규정성이 되면 한정이 되기 때문에 늘 ‘아니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열반을 형용하면 ‘고통이 없다’, ‘번뇌가 없다’고 하니까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데 최고의 긍정입니다. ‘가장 행복한 것’, ‘완전히 진리와 하나된 것’으로 표현할 수도 있는데 그것도 위험합니다. 행복하다고 하면 그게 무엇인지 또 헛갈립니다.
그렇게 긍정적인 표현을 쓸 때 위험요소를 없애기 위해 부정적인 표현을 쓰는 것으로, 가장 완전한 것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몸도 그렇게 밖에 표현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처님의 몸짓은 어떨까요. 생멸문이 바로 부처님 몸짓입니다. 차별 속에 드러나는 묘용으로써 부처님 몸짓은 드러납니다. 우리 생멸의 세계가 부처님의 몸짓입니다.
그 다음에 아난이 ‘저 훌륭한 분이 어디서 왔을까’를 묻습니다. 이 물음에 유마거사가 ‘삶과 죽음이 어디 있느냐’고 대꾸하자, 이때 부처님께서 ‘유마거사는 묘희세계에서 이 세상으로 왔다’고 합니다. 유마거사는 근본원론을 갖고 말하는데, 부처님은 그것을 눌러놓고 ‘묘희세계에서 왔는데, 그 세계의 부처님은 무동불’이라고 합니다. 이 무동불이 아촉불입니다. 그러니까 유마거사가 그 세계를 이쪽으로 옮겨옵니다. 중향세계와 마찬가지로 두 세계가 전혀 장애가 없습니다. 무동부처님의 세계, 즉 움직임이 없는 세계가 옮겨져 온 것입니다. 이게 일종의 ‘유마경’의 선지입니다. 움직이지 않는다는 부처님의 세계를 움직여 온 것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전부 묘희세계에서 왔다고 읽는 것입니다. 묘희는 오묘하게 기쁜 세계입니다. 유마거사는 큰 발원으로 오셨고, 우리는 어쩌다가 인연에 끌려서 왔습니다. 여기서 무동부처와 묘희의 세계는 중생의 뿌리입니다. 오묘한 환희의 세계입니다. 중생의 본래 자리가 오묘한 환희의 세계인 것이고, 우리가 ‘왔다’ ‘갔다’를 떠난 무동의 세계를 바탕으로 여기에 온 것이지 다른 곳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내 한 몸이 경전을 쓰는 붓 될때 진정한 법공양
불자는 스스로를 관세음보살님의천수천안 가운데 하나로 자부해야
이제 마지막으로 ‘유마경’의 뛰어난 공덕을 찬탄하면서 이것을 잘 옹호해서 후세에 전하라는 부처님의 부촉이 이어집니다. ‘아촉불품’ 마지막에 “진리를 이해하고 믿어서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무상정등정각의 수기를 받은 것이다”라는 표현이 있는데요. 경전에서 말하는 부사의법문, 진리, 불이법문을 믿고 이해하고 지키고 기쁜 마음을 내는 것이야말로 수기를 받은 것입니다. 이는 모든 중생들에게 수기를 내리는 대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가르침을 받아 지니고 실천함으로써 부처가 되리라 하는 수기를 받은 것이지요. 따라서 여러분도 이 대목에서 무상정등정각의 수기를 받은 것이 됩니다.
우리는 보통 부처임을 너무 멀리 두는 병이 있는데, 오늘보다 더 멋있는 내일, 오늘보다 더 행복한 내일, 오늘의 나보다 더 멋있어지는 내일의 나, 그 길이 바로 부처되는 길입니다. 그 궁극에 부처님이 있습니다.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꾸준히 지향해 가는 길, 그 완성이 부처되는 길입니다. 그리고 이 마음을 내는 것이 바로 수기를 받는 것입니다. 인간이 가는 길은 향상일로여야 하고, 향상일로를 가리라는 마음을 내는 것이 대승의 마음을 내는 것이며 그 마음을 내는 순간 여러분은 수기를 받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신감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 길을 뚜벅뚜벅 간다는 것이 가장 위대한 신통이고, 거기에는 장애가 붙지 않습니다. 내가 직접 부처님께 수기를 받는다는 느낌으로 이 대목을 읽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수기를 받은 우리들이 부처님이 수기를 내린 이 경전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바로 거기서 법공양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나로 하여금 부처가 되게 하는 법을 모든 이들과 함께 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법공양입니다. 진리를 담은 경전이 있고, 가르침이 있고, 설해지는 곳이 바로 부처님 계신 곳입니다. 모든 경전에서 이 이야기를 하는데, 이것을 그냥 수식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이 세상은 오욕락의 세계이기 때문에 직접적인 즐거움과 쾌락을 주어서 사람을 불러 모으기에 더 쉽습니다. 그러나 그 참 진리를 추구하는 자리, 즉 진리가 이야기되는 자리, 경전이 있는 자리가 부처님 계신 곳입니다. 그러면 신장들이 옹위하게 됩니다. 같은 기운에 응해서 오는 분들이 바로 일종의 호법신중입니다.
우리는 우리 속에 불성이 언제나 움터 나오는 존재입니다. 거기에 진실한 마음을 기울인다면 그래도 크게 틀리지 않은 길을 선택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이 우리 중생인 것입니다. 깨달음을 추구하고 완전함을 추구하는 것은 우리를 나아가게 하는 큰 힘이어야 합니다. 나를 불퇴전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 응원군이어야 하는데, 지금 불교는 깨달음이 사람을 주눅들게 하고 있습니다. 온전한 깨달음을 향한 끊임없는 열정으로 나아가게끔 하는 그 완전성은 나를 끌고 나가는 힘이어야 하는데 그것이 나를 주눅들게 하는 힘으로 작용하게 될 때 이걸 깨달음 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그러한 깨달음 병에 물들어서는 안 됩니다. “깨닫기 전에 내가 어떻게 움직이는가”라고 생각하면 영원히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가 완전한 깨달음을 추구하면서도 행동은 하지 않는 이 두 가지 양상을 극복하지 않으면 진정으로 건강한 불교가 설 수 없습니다. 이것도 역시 ‘유마경’의 틀 속에서 하는 말입니다. 인간에게 100%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가 이해한 것을 바탕으로 세상과 부딪쳐봐야 하고, 그 불완전성이 드러나면 그것을 고쳐나가는 것입니다.
‘유마경’에서 왜 아라한은 성불할 수 없는 썩은 종자라고 했을까요. 이 세상과 해탈계를 둘로 나눠놓고 해탈이라는 세계에 들어가서 머물렀기 때문에 그들은 부처가 되지 못한다고 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100이라는 영역을 설정해놓고 거기에 도달하기 전에는 안한다고 하는 것은 부처의 종자를 썩게 하는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불심 속 거기에 부처님이 오셨으리라 믿고 그 마음으로 ‘유마경’을 읽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장 뛰어난 가르침을 함께 나누는 일이야말로 가장 수승한 공덕입니다. 따라서 재물공양은 법공양의 공덕에 미칠 수 없습니다. 재물은 유루의 공양이고 법공양은 무루의 공양이기 때문에 차원 자체가 다릅니다. 2차원을 아무리 겹친다고 3차원이 되지 않습니다. 유루와 무루의 차원이 다르고 비교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서로 진리를 나누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일이고 진리의 벗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과정입니다. ‘100년 동안 탐한 재물은 하루아침의 티끌이요, 하루 닦은 마음은 천년의 보배’라는 게송도 있습니다. 그러니 법공양이 최고라고 하는 것입니다.
경전의 부촉은 우리에게 하는 것가르침 널리 펴는건 불제자 의무
법보시를 강조하는 것은 재보시는 법보시를 하면 따라오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건강한 상식 위에서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무너지지 않습니다. 법을 전하는 것은 소중하지만 옛날 방식과는 달라야 합니다. 지금은 오히려 행동으로 전하고 실천으로 전하는 것이 더 소중한 시대입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상을 담지 않은 재보시는 곧 법보시가 됩니다. 법보시 역시 어떤 형태에 구애되면 안됩니다. 경전의 가르침이 나와함께 될 때 법보시의 출발이 됩니다. 그 경전 가르침이 내 몸짓으로 나오는 것이 법보시입니다.
사실은 재보시부터 하는 것이 쉽고, 내 주머니에서 한 푼 내봐야 내 탐욕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습니다. 거리낌 없이 내놓는 그 마음에서 희열이 일어날 때 법보시가 체화되는 것입니다. 경전의 유포도 예전에는 사경을 방법으로 했지만, 지금은 몸으로 해야 합니다. 내가 법을 체화하지 않고 어떻게 법보시가 되겠습니까. 내 한 몸이 경전을 쓰는 붓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천수경을 보면서 내가 관세음보살의 천수 가운데 하나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보는 것과 같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관세음보살의 천개의 손과 눈 가운데 하나로 자부해야 합니다. 그래야 행복이 보장된 삶이 됩니다. 그래서 법보시도 관념이 달라져야 하고, 법보시가 몸으로 나타나는 시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경이 내 것이 되어 경의 몸짓으로 나와야 재보시도 법보시도 올바르게 됩니다. 그러나 한 번에 전체를 다 하려고 하면 아예 못하게 됩니다. 조금씩 가는 길이 중요하고, 그러면 삶이 환해지고 밝아지고 건강해지는 씨앗을 심는 것이 됩니다. ‘공양품’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불세계는 같은 불자들을 늘려가는 것으로 건설해야 합니다. 같은 가르침을 추구하고 올바른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 속에 산다는 것만큼 행복한 것이 없습니다.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밝고 행복한 존재들이 살도록 하는 것은 불법을 함께 하는 이들을 늘려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올바로 믿는 것이기 때문에 불세계를 건설하는 출발점이고, 법보시는 그 필수가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촉루품’입니다. 이것은 부촉한다는 뜻입니다. 진리로서의 부처님은 오고 감이 없으나, 육신을 다하신 부처님이 가시면서 그 뒤를 부탁하는 것입니다. 대표로 아난다와 미륵불에게 부촉하지만 불제자들에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부촉은 경전에서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그것을 후세에 전해서 끊임없이 믿고 따르게 하는 것으로, 부처님의 종자를 전하는 길입니다. 정말로 소중한 일이기 때문에 경전의 끝에는 언제나 부촉이 나오게 됩니다. 우리 불제자들에게 하는 것이니, 무겁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여러분이 바로 아난이고 미륵이라고 생각하고, 우리가 부촉을 받았다는 마음으로 이 가르침을 널리 전해야 합니다.
완악함을 버리고 진리의 길에 동참해서 가르침을 함께 하는 이들을 늘려가고 그들을 호지하고 옹호해서 불법의 세계를 넓혀야 합니다. 불자들이 늘 부족한 것 중 하나가 공동체의식입니다. 불법승 삼보에서 승은 작은 의미에서 출가승단이지만, 넓게 보면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 사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말합니다. 바로 이 승의 확장이 불세계 건설인 것입니다. 이러한 의식을 갖지 않으면 불법이 퍼질 수 없습니다. 그러니 여기서 불법을 추구해야 한다는 믿음을 바로 세울 때 우리가 부처님 수기를 받은 것입니다.
불법은 큰 바탕, 옳고 그름을 넘어서는 큰 대도라는 바탕에서 털끝만큼도 어그러지지 않는 옳음을 세울 수 있는 자리입니다. 부처님이 큰 부촉을 했으니, 여러분은 전 장에서 수기도 받은 만큼 성불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부촉을 너무 무겁게 읽지 마시기 바랍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오늘보다 더 멋진 내일, 오늘보다 더 행복한 나, 오늘보다 더 완전에 가까워진 나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내 삶의 모습에 부처님을 겹쳐놓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법은 영원히 가까이 하기에 너무나 먼 당신이 됩니다.
부처님의 마지막 부촉은 “행복한 존재가 되라. 모든 존재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좋은 세상을 만들어 나가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함께 하고 씨앗이 움틀 수 있는 조그만 출발이 되었기를 기원합니다.
성태용 교수는 서울대학교 총불교학생회장, 한국고등교육재단 한학자양성 장학생, 유가철학 및 고전연구를 전공했으며 건국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현재 (사)우리는선우 이사장을 역임하고 있으며, EBS에서 ‘주역과 21세기’ 강의를 진행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오늘에 풀어보는 동양사상』, 『주역과 21세기』, 『마음바구니에 담긴 행복』등이 있고, 「다산의 인성론」외 다수의 논문을 집필했다. |
출처: Buddha Village 원문보기 글쓴이: 定行
첫댓글 유마경은 아직 읽어 보지 못한 경전인데 이렇게 읽을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유마경도 꼭 읽어 보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나무~관세음보살....
유마소설경이라고 책이 집에 있는데 아직 읽지 못해서 맘이 그랬는데 여기서 읽고 집에 책으로 다시 읽으면 이해가 훨씬 빠르겠다요..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