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호산(天護山) 개태사(開泰寺)
충남 논산시 연산면 계백로 2614-11 (천호리)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
창건 및 연혁
개태사는 근래에 들어와 수차례 발굴 조사되었다. 현재 개태사와 처음 창건 당시의 개태사는 위치가 약간 다르다. 현 개태사는 구 개태사지 아래 들판 한가운데에 있다. 개태사지는 현재의 개태사로부터 북쪽으로 약 300m 떨어진 곳에 있다. 개태사지는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개태사는 고려 태조 왕건이 일리천 전투에서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삼한 통일 기념과 전몰 장병을 위문을 지은 절이다. 태조 19년(936년)부터 짓기 시작해 4년 만인 23년(940년) 완성하였다.
개태(開泰)라는 절 이름은 '전란의 시대를 끝내고 평화의 시대(泰)를 열었다(開)'는 뜻이다. 절이 완성된 뒤 절 뒤쪽의 산은 천호산(天護山)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940년 12월 낙성 기념 법회에서 태조 왕건 자신이 직접 발원문을 지었다.
개태사는 고려 왕조 내내 왕실의 존숭을 받았고, 태조 왕건의 어진이 절에 모셔져 있었다. 고려 후기의 문인 이규보는 1199년 당시 동경(경주)과 명주(강릉) 일대에서 일어난 농민봉기를 진압하기에 앞서 개태사를 찾아 태조의 어진 앞에서 반란 진압을 기원하는 글을 올렸다. 공민왕 때에는 강화도로 수도 천도 여부를 개태사에 대신을 보내서 점을 치도록 했다. 불길한 점괘가 나와 천도 계획은 중지되었다. 1383년(우왕 9)에는 왜구 천여 명이 내륙으로 들어와 개태사를 거쳐 계룡산에 자리하였다. 창왕 즉위년에는 개태사에 침범해 노략질하기도 하였다.
개태사는 고려 말기까지 거찰의 규모를 유지하며 지역의 거점 사찰로서 기능하였다. 그러나 고려말 왜구의 약탈과 방화로 급격히 쇠퇴하였고,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와 폐사되었다.
1934년 김광영 비구니스님은 터만 남아있던 개태사에 전각을 세우고 절을 중건하였다. 스님이 43세일 때, 관음보살이 꿈에 나타나 삼존불이 묻혀 있던 곳을 알려주었다. 그 뒤 불상을 찾아내고 지금의 위치에 봉안하고 절을 중건하였다.
성보문화재
현존하는 건축물로는 대웅보전, 극락대보전, 삼성각, 어진전, 신종루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석조여래삼존상(보물), 오층석탑(충남 문화재자료 제274호), 철확(쇠솥, 충남 민속문화재 제1호) 등이 있고, 개태사지에서는 석조공양보살상과 석조(石槽)(충남 문화재자료 제275호) 등이 수습되었다.
석조여래삼존입상은 극락대보전에 모시고 있다. 개태사의 건립과 동시에 조성되어 940년(태조 23)에 완공되었다. 본존 불상은 약 4.15m의 크기, 좌협시 보살입상은 약 3.5m, 우협시 보살입상은 약 3.21m이다.
오층석탑은 개태사지에서 옮겨왔다. 원래는 오층석탑 앞에 석조공양보살상이 탑전 공양보살상의 형태로 짝을 이루고 있었다. 현재 석조공양보살상은 개태사지 부근 용화사 법당에 모시고 있다.
철확은 직경 289cm, 둘레 910cm, 높이 96㎝, 두께 3cm이다. 한꺼번에 500여 명이 먹을 수 있는 밥을 지었다는 논산의 명물이다. 이 개태사 가마솥에는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전해지는 이야기
논산에서 살던 사람이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물어보는 말이 있다. 그것은 ‘연산 가마솥’과 ‘강경 미내다리’, ‘관촉사 은진미륵’을 보았느냐는 것이다. ‘연산 가마솥’은 개태사 가마솥이다. ‘강경의 미내다리’는 조선 영조 7년(1731)에 놓은 것으로 논산군 채운면에 있어 ‘채운다리’다.
1935년에 시라이(白井)라는 일본인이 이 솥을 탐내서 일본으로 훔쳐 가려고 부산항까지 가져갔다. 그런데 솥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기 시작하였다. 급기야 솥이 사흘 밤낮을 큰 소리로 슬피 울기 시작하였다. 겁에 질린 인부들이 시라이를 말렸다. 그러나 말을 듣지 않고 솥을 화물선에 실으려던 시라이는 벼락을 맞아 죽었다.
그해 4월에 경성에서 열린 조선산업박람회에 개태사 가마솥을 전시하였다. 전시가 끝난 뒤에는 문화재로서 경성박물관(지금의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국적인 가뭄으로 모든 농작물이 말라 죽어갔다. 괴산군 주민들은 개태사 가마솥을 다른 곳으로 옮겼기 때문이니 가마솥을 원래 위치에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태사 가마솥 기차로 연산역까지 가져오자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그 해는 풍년이 들었다.
해방 후에는 연산공원에 옮겨 놓았다. 그러던 1981년 6월 충남문화재위원회는 이 가마솥을 옛 절터로 옮겨도 좋다고 승인하였다. 연산리 주민대표와 신도대표의 원칙 합의하에 1981년 8월 22일 솥은 개태사로 돌아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