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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의 사찰과 문화유산 원문보기 글쓴이: 광나루
전남 화순 쌍봉사 written by 한국의 사찰과 문화유산 |
쌍봉사는... |
장흥의 보림사에서 다음 답사지인 화순의 쌍봉사로 향했습니다. 쌍봉사(雙峰寺)에는 철감선사탑과 탑비가 국보와 보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유형문화재 4점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쌍봉사는 신라 경문왕 때 도윤(道允)이 창건하고 자신의 도호(道號)를 따 쌍봉사라 하고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사자산문(獅子山門)의 기초를 닦았다. 그후 고려 시대인 1031년(문종 35) 혜조국사(慧照國師)가, 공민왕 때는 관찰사 김방(金倣)이 중건하였고, 임진왜란 때 폐사된 것을 1628년(인조 6년) 탑지(塔址) 위에 3층 대웅전을 중건한 것을 비롯, 1667년(현종 8)·1724년(경종 4)에 계속 중수하였다. -네이버 백과사전 - |
쌍봉사 주차장에 내리면 정면에 쌍봉사 경내로 들어가는 해탈문이 있으며, 주차장 좌측에는 부도군이, 오른쪽에는 연못이 있습니다. 계단을 올라서 해탈문 좌우를 둘러보니 사천왕상이라든지 뭐라도 있을 법도 한데 아무것도 없어서 해탈문 내부는 좀 썰렁합니다. 대신, 해탈문 사이로 보이는 3층 목탑의 쌍봉사 대웅전이 웅장한 모습으로 방문객을 맞아 줍니다. |
▲ 부도군(쌍봉사 주차장 좌측) |
▲ 해탈문 |
▲ 범종각(해탈문 좌측편) |
예전 쌍봉사 대웅전은 화재로... |
아쉽게도 쌍봉사 대웅전은 보물 163호로 지정되어 있었으나, 20여년 전(1984년)에 소실되어 문화재 지정이 해제되었고, 쌍봉사 대웅전이 보물이었었다는 표석만이 쌍봉사 입구의 부도군 속에 외롭게 서 있습니다. 다행히 1962년 해체 보수 공사를 할 때 작성한 정밀한 실측도가 있어서 1986년에 복원하였으며, 지금의 복원된 모습에서 옛 모습을 다소나마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쌍봉사 대웅전의 옛 사진을 인터넷에서 찾아서 아래에 소개합니다. 사진으로 비교해 보니 지금의 복원된 대웅전은 단청이 되어 있어서 화려하지만 옛 쌍봉사 대웅전의 모습만 흉내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전의 쌍봉사 대웅전 3층 석탑의 고풍스러운 자태가 멋있군요. 고고한 학이 한 마리 서 있는 듯 합니다. |
예전의 쌍봉사 대웅전 3층 목탑 모습 |
한국의 문화재란 사이트에 쌍봉사 대웅전이 소실될 당시의 이야기가 있어서 내용을 발췌 하였습니다.
"쌍봉사 대웅전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쌍봉사는 고려시대에 세웠던 절로 유명한데..이 절이 더 유명해진 것은 1984년입니다. 그 해에 이 절에서 불이 나게 되는데..대웅전 안에서 "사람 살려! 사람 살려!"라는 소리가 났다고 합니다. 이때 밖에 있던 한 농부가 뛰어 들어가 사람을 구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와서 보니 그것이 사람이 아니라 불상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건물은 탔지만 불상은 타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18년전의 얘기이니 전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가까운 얘기죠. (스님에게 직접 들은 얘기로는 농부가 불상인 줄 알고 꺼내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무게는 도저히 사람이 혼자서 들수 없는 무게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때 화재로 인해 나무로 만든 불상들(현재 명부전에 모셔져 있는 시왕상과 인왕상들)이 새카맣게 그을러졌는데 도색을 하기 위해서 인도에까지 알아봤지만 그 목불상에는 다시는 도색을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즉 그 나무가 백두산에서 구해진 나무이며 그 나무는 처음에만 도색을 할 수 있고 다시는 도색을 할 수 없는 것이라합니다. 그래서 쌍봉사 명부전에 가면 불에 그을린 나무 상들을 또한 만날 수 있습니다." |
▲ 복원된 쌍봉사 대웅전 전경 |
▲ 대웅전 내부 및 목조 삼존불상 |
▲ 쌍봉사 대웅전의 예전 보물 표석 |
쌍봉사 대웅전의 내부를 들여다 보면 화순 쌍봉사 대웅전 목조 삼존불상(전남 유형문화재 251호)이 있으며, 대웅전 내부는 상당히 좁습니다.
현재, 대웅전 안에 있는 목조 삼존불상이 화재 당시에 있었던 불상인지 궁금하여 쌍봉사에 전화로 확인을 해 보니 "지금 대웅전에 있는 목조 삼존불상은 새로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지방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해제 되었냐"고 물어보니 그렇지는 않다고 했습니다. 이야기 하자면 길 것 같아서 전화는 끊었습니다만, 소실 당시 대웅전에 있었던 목조 삼존불상은 보존을 위해서 다른 곳에 모셔 두고 현재의 삼존불을 새로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해 봅니다.
◈ 화순 쌍봉사 대웅전 목조 삼존불상은 화순 쌍봉사에 모셔져 있는 목조삼존불좌상으로서 앉은 모습의 석가 여래상을 중심으로 가섭존자와 아난존자가 양옆에 서있는 특이한 형식의 삼존불상이다. 불이 난 당시 다행 히도 목조삼존불좌상은 화를 입지 않았다. 가섭·아난존자와 함께 조선 숙종 20년(1694)에 만들어진 석가여 래좌상은 조성 수법이나 형식에 있어서 조선 후기 불상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
대웅전 뒤로는 일렬로 지장전과 극락전, 나한전이 있으며, 나한전 앞에는 호성전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찰 건물이 맞배지붕인데 호성전은 정자형 지붕으로 단청이 아주 화려합니다. 극락전을 제외하고는 삼십여년 이내로 모두 중창 불사를 한 것 같습니다.
지장전 안에는 화순 쌍봉사 지장전 지장보살상 일괄(전남 유형문화재 253호)이 있으며, 지장전 우측에 있는 쌍봉사 극락전(전남 문화재자료 66호) 안에는 화순 쌍봉사 극락전 목조 아미타여래좌상(전남 유형문화재 252호)가 있습니다. |
화순 쌍봉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보물 1726호) |
▲ 지장전 |
▲ 지장전 목조 지장보살상 |
▲ 나한전 |
지장전과 명부전 그리고 시왕전이 같은 곳인 것을 몰랐습니다. 유홍준 교수가 중앙일보에 연재한 국토박물관 순례의 쌍봉사 소개에서 "국가문화재로 아직 지정되지 않았지만 명부전에 모셔져 있는 목각 시왕상(十王像)은 조선후기 목조각의 대표작..." 이라는 글을 보고 쌍봉사에서 명부전을 본 적이 없는데, 이상하다 하고 한참을 자료를 찾다가 책을 보니 지장전을 명부전, 시왕전이라고도 하네요. 이렇게 무지하면서 소개한다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그 목각 시왕상이 3년 전에 화순 쌍봉사 지장전 지장보살상 일괄로 지정되었습니다. 유홍준 교수가 쓴 기사가 2004년 5월 6일자 연재기인 것을 보면 2001년 이전에 다녀오고 순례기를 쓴 것 같습니다. 내년에는 쌍봉사에 다시 가서 꼼꼼히 보아야 겠습니다. 아는 것도 없으면서 소개를 한다고 자료를 찾다 보니 그래도 조금씩은 알아가는 것 같습니다. |
▲ 쌍봉사 극락전 |
▲ 극락전 목조 아미타여래좌상 |
▲ 호성전 |
◈ 화순 쌍봉사 지장전 지장보살상 일괄은 쌍봉사 지장전에 모셔져 있는 지장보살을 비롯하여 시왕 및 그 권 속 등 모두 21구이다. 지장보살은 대좌에 앉은 모습이고 시왕은 의자에 앉아 있으며 나머지 상(像)들은 모 두 서 있다. 이 상들은 1667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기록에 의하여 그 조성연대가 확실한 귀중한 자료이다.
◈ 화순 쌍봉사 극락전 목조 아미타여래좌상은 쌍봉사 극락전에 모셔져 있는 앉은 모습의 아미타여래상이다. 원래는 양 옆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의 협시불과 함께 삼존의 형식을 갖추고 있었으나, 1989년 8월경 양 협시불을 도난당하여 이후에 새로 조성한 것이다. 이 불상은 숙종 20년(1694)에 만들어진 것으로 대웅전 에 모셔져 있는 목조삼존불상과 조각형식이 매우 흡사하다.
지장전과 극락전의 내부는 사진 촬영을 못하여 지장보살상과 아미타여래좌상의 사진은 문화재청에서 가져왔습니다. |
철감선사탑으로 가는 길은... |
쌍봉사 철감선사탑과 탑비가 있는 곳은 지장전 좌측의 대나무 숲이 있는 길로 돌아서 올라가게 됩니다. 빽빽하게 들어선 대나무 숲은 대단히 멋집니다. 대나무 숲을 지나 계단을 조금 오르면 쌍봉사 철감선사탑과 탑비(아래 사진)가 보입니다. |
쌍봉사 철감선사탑 및 탑비 |
국보 57호 쌍봉사 철감선사탑 |
철감선사탑과 탑비는 대각선으로 10여 미터의 사이를 두고 있습니다. 철책 앞으로 다가서서 사진을 찍으려는 순간 "삑~"하는 소리에 깜짝 놀랐습니다. 철감선사탑과 탑비의 철책 네 귀퉁이에 경보 장치를 달아 놓았더군요.
도난과 훼손 방지를 위해서 설치해 놓았겠지만, 관람하는데는 조금 방해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경보음이 시도때도 없이 "삑~삑~" 거립니다. 주차장 밖에까지 소리가 크게 들립니다. 철책 안으로 얼굴을 들이 밀고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살펴 볼 수 없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
▲ 철감선사탑의 탑신부 |
▲ 철감선사탑의 기단부 |
철감선사탑 지붕돌의 한쪽 처마가 일부 훼손된 것 이외에는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으며, 각 기단과 각 면에 조각들은 정교하게 새겨져 있어서 역시, 국보급 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
쌍봉사에 세워져 있는 철감선사의 부도이다. 철감선사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로, 28세 때 중국 당나라로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였다. 문성왕 9년(847) 범일국사와 함께 돌아와 풍악산에 머무르면서 도를 닦았으며, 경문왕대에 이 곳 화순지역의 아름다운 산수에 이끌려 절을 짓게 되는데, ‘쌍봉’인 그의 호를 따서 ‘쌍봉사’라 이름하였다. 경문왕 8년(868) 71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니, 왕은 ‘철감’이라는 시호를 내리어 탑과 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탑은 전체가 8각으로 이루어진 일반적인 모습이며, 대부분 잘 남아 있으나 아쉽게도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없어진 상태이다. 탑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기단은 밑돌·가운데돌·윗돌의 세 부분으로 갖추어져 있으며, 특히 밑돌과 윗돌의 장식이 눈에 띄게 화려하다. 2단으로 마련된 밑돌은 마치 여덟마리의 사자가 구름위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저마다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으면서도 시선은 앞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어 흥미롭다. 윗돌 역시 2단으로 두어 아래에는 연꽃무늬를 두르고, 윗단에는 불교의 낙원에 산다는 극락조인 가릉빈가(伽陵頻迦)가 악기를 타는 모습을 도드라지게 새겨두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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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가 모셔진 탑신은 몸돌의 여덟 모서리마다 둥근 기둥모양을 새기고, 각 면마다 문짝모양, 사천왕상, 비천상 등을 아름답게 조각해 두었다. 지붕돌에는 특히 최고조에 달한 조각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어서, 낙수면에는 기왓골이 깊게 패여 있고, 각 기와의 끝에는 막새기와가 표현되어 있으며, 처마에는 서까래까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탑을 만든 시기는 선사가 입적한 해인 통일신라 경문왕 8년(868) 즈음일 것으로 추정된다. 조각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다듬은 석공의 정성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작품으로, 당시에 만들어진 부도 가운데 최대의 걸작품이라 할 수 있다. |
.보물 170호 쌍봉사 철감선사탑비 |
철감선사탑비의 비몸은 없으며, 귀부에 이수가 얹혀져 있습니다. 귀부나 이수의 조각들이 정교하고 화려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다른 곳의 탑비와 다른 특징은 귀부의 발가락은 주로 4개인데, 이 곳 귀부의 발가락은 3개입니다. 그러다보니 발가락이 뭉뚱합니다.
그 뭉뚱한 오른쪽 앞발을 살짝 들어 올린 모습이 찾는 이를 반기는 듯 합니다. 또한, 이수의 위에는 뿔 같은 것이 중앙과 우측에 하나씩 달려 있으며, 좌측에도 있었으나 훼손되어 없어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
▲ 철감선사탑비의 귀부(오른쪽 앞발을 살짝 들고...) |
▲ 철감선사탑비의 이수 |
쌍봉사에 있는 철감선사 도윤의 탑비이다. 비는 비몸돌이 없어진 채 거북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아 있다. 네모난 바닥돌 위의 거북은 용의 머리를 하고 여의주를 문 채 엎드려 있는 모습으로, 특히 오른쪽 앞발을 살짝 올리고 있어 흥미롭다. 머릿돌은 용조각을 생략한 채 구름무늬만으로 채우고 있다. 통일신라 경문왕 8년(868)에 세워진 비로, 전체적인 조각수법이 뛰어나며 특히 격렬한 거북받침돌의 조각들은 매우 훌륭한 경지에 이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