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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7월 10일 수요일
[(녹)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호세아 예언자는, 이스라엘은 죗값을 치러야 하고 사마리아는 망하리라고 하며, 지금이 주님을 찾을 때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지금이 주님을 찾을 때다.>
▥ 호세아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10,1-3.7-8.12
1 이스라엘은 가지가 무성한 포도나무, 열매를 잘 맺는다.
그러나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들도 많이 만들고
땅이 좋아질수록 기념 기둥들도 좋게 만들었다.
2 그들의 마음이 거짓으로 가득하니 이제 죗값을 치러야 한다.
그분께서 그 제단들을 부수시고
그 기념 기둥들을 허물어 버리시리라.
3 이제 그들은 말하리라.
“우리가 주님을 경외하지 않아서 임금이 없지만
임금이 있다 한들 우리에게 무엇을 해 주리오?”
7 사마리아는 망하리라. 그 임금은 물 위에 뜬 나뭇가지 같으리라.
8 이스라엘의 죄악인 아웬의 산당들은 무너지고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그 제단들 위까지 올라가리라.
그때에 그들은 산들에게 “우리를 덮쳐 다오!”,
언덕들에게 “우리 위로 무너져 다오!” 하고 말하리라.
12 너희는 정의를 뿌리고 신의를 거두어들여라.
묵혀 둔 너희 땅을 갈아엎어라.
지금이 주님을 찾을 때다,
그가 와서 너희 위에 정의를 비처럼 내릴 때까지.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7
그때에 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2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3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4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5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6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7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을 첫자리에 두셨을까요? 그들이 하느님에게서 가장 멀리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하느님을 잘 알고 있고, 하느님께 익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이루어 주신 구원의 역사도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언자들을 통하여 선포된 하느님 말씀에도 익숙하였고, 회개하는 삶이 무엇인지도, 어떻게 하여야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살 수 있는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1,11)라는 요한 복음서의 말씀처럼, 이들은 누구보다도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예수님의 말씀이 여러분을 움직이나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여러분의 삶을 변화시키나요? 아니면 이미 하느님에 대해서, 또한 그분과 함께하는 삶에 대해서 잘 알고 있지만, 그분과 상관없이 사는 삶에 더 익숙하지는 않나요? 익숙하거나 매우 잘 안다고 해서, 반드시 그 사람과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비록 함께 있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아주 먼 관계일 수 있음을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습니다.
‘들음’이 사라진 관계를 하느님과 맺지 마십시오. 들음이 끊긴 삶은 아무리 가까운 관계라 할지라도 서로 멀어지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을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도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지금 자신이 그분에게서 멀리 있다고 느껴진다면 그분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삶부터 다시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아멘.(김재덕 베드로 신부)
오늘도 큰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예! 하고 외치며 주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께서 직접 이름을 한명 한명 호명하면서, 당신 가까이 부르시는 장면을 묵상해봅니다. 그분으로부터 선택받은 제자들 입장에서 얼마나 큰 기쁨이고 영예였겠습니까?
저희 사제나 수도자들도 비슷한 체험을 했습니다. 종신서원때, 사제수품식때, 신학교 학장 신부님이나 수도원 양성 책임자는 회중들 앞에서 저희의 이름을 크게 부릅니다. 잔뜩 긴장해있던 저희는 이름이 불려지면, 네 여기 있습니다! 하고 일어나 주교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이토록 부족하고 나약하며, 허물과 죄 투성이인 저를 당신 가까이 불러주신 하느님께 깊은 감사의 눈물을 흘리며 그분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 이름을 직접 불러주신다는 것, 얼마나 놀랍고도 은혜로운 일인지요. 오늘도 아무것도 아닌 나, 정말이지 보잘것없는 나, 내세울 것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나를 불러주신 그분께 백번 천번 감사드리면서, 또 다시 그분 앞으로 나아갑니다.
사실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이란 대 명제 앞에 때로 거추장스럽고 별 도움도 되지 않는 우리 인간들입니다. 그러나 과분하게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구상하는 위대한 사업에 별 효용가치도 없는 우리를 끌어들이십니다. 참으로 은혜로운 초대요 너무나 분에 넘치는 초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열두 제자들에게 있어 부르심 그 자체가 구원에로의 초대였습니다. 그분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하고 따라나서는 그 자체가 구원되는 길이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사업은 예수님을 통해 정점에 도달합니다. 용서하고 해방하며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참 모습이 예수님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그러우시고 겸손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구원사업 여정에 우리를 참여하라고 부르십니다. 우리 같은 소자본 주주들 당신이 구상하는 큰 사업에 별 도움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파트너가 되어줄 것을 바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인간 본성을 취하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신성하게 만드셨습니다. 필멸의 운명을 지닌 우리를 당신 나라의 영원한 생명의 문으로 인도하셨으며, 썩을 몸인 우리를 불변의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참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오랜 세월 우리 인간이 지니고 온 고통과 죽음을 말끔히 가져가지 않으셨습니다. 당신 스스로 고통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당신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통해 고통과 죽음을 대하는 올바른 방법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을 뚫고 나아가시면서 고통을 변화시키신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그 옛날 의기소침해있던 제자들을 부르셔서 당당한 당신 사업의 파트너로 부르셨듯이 오늘 우리도 부르십니다. 우리에게 죽음을 대면하도록 부르시고, 죽음의 두려움 앞에 나를 세우기 위해 부르시고, 부활에 대한 신뢰로 두려움을 넘어서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할 일이 뭐가 뭔지, 돌아가는 분위기 파악도 제대로 못하는 무책임한 제자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 그분의 삶 전체, 십자가 죽음 앞에 자신의 온 삶으로 응답하는 제자를 원하십니다.
구원은 과거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늘 새롭게 일어나야 하는 현실입니다. 부르시는 주님의 초대에 시시각각으로 응답하는 일, 고통과 두려움을 딛고 일상적으로 일어서는 일이 오늘 내 하루를 구원합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하느님의 구원과 해방, 사랑의 힘이 우리 안에 자리 잡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 힘으로 내가 변화되고 성장해야 합니다. 분열과 방황, 죄와 타락의 세력 앞에 담대히 맞서 오늘 내가 구원되는 하루가 되길 빕니다.
고해가 성사가 아니라 상담이 되어가는 이유.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 예수님께서 악한 영에 대한 권한과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게 할 힘을 주시고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누구에게는 주시고 누구에게는 주시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모든 죄를 용서할 권한을 가지고 파견 받는 제자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교회의 가장 큰 능력, 혹은 하늘 나라의 열쇠는 죄를 용서하는 권한입니다. 교회는 하느님 자녀를 탄생 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 자녀는 세례 때 하느님 자녀가 되었다는 믿음을 가지고 그리스도처럼 살려고 노력하는 이들입니다. 여기서 죄란 그리스도처럼 하지 못하는 게 죄입니다.
아기들의 죄는 무엇일까요? 아이가 때가 되었는데 말을 하지 못하고 걷지를 못한다면 그것이 죄입니다. 아이는 부모처럼 두 발로 걷고 말도 할 수 있다고 믿고 그렇게 노력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옹알이도 하고 넘어지기도 합니다.
걸음마를 시작 할 때 2천 번을 넘어진다고 합니다. 이때 부모의 역할은 왜 넘어졌느냐고 하며 상담해 주는 일이 아니라 양식을 주며 다시 한번 노력해 보라고 하는 역할입니다.
같은 죄를 지었더라도 2천 번씩 그냥 용서하고 보아주고 용기를 북돋아 주지 않으면 결국 이 세상에서 그 죄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이 역할을 하라고 당신 제자들을 파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같은 죄를 계속 짓느냐고 뭐라 하고 또 그러한 죄를 꼬치꼬치 캐물으며 고해하는 이를 지나치게 불편하게 하는 것은 더는 그러한 노력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어버리게 됩니다.
사제가 고해 성사 할 때 그냥 죄를 용서해 주지 않고 야단을 치거나 반복해서 짓는 죄에 대해 자신이 무언가 할 수 있다고 믿어 마치 상담가처럼 행동하는 이유는 자신 안에 죄를 용서할 권한이 있음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내 스스로 무언가 더 해야 한다고 여기는 것이고 이것이 신자도 힘들게 하고 사제 자신도 힘들게 만듭니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길은 나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음을 내가 믿는 것입니다. 이를 믿기 위해서는 외적인 표징을 자신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빈센트 반 고흐는 하루에도 몇 개씩의 그림을 그렸고 자신도 분명 그림을 잘 그릴 능력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 그림을 사 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을 잃게 되었고 결국 그림 그리는 의미를 잃고 자살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음을 믿는 표징은 악령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것을 보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하느님께서 주셨음을 보여주시기 위해 중풍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같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는 것을 보시고 죄를 용서하는 권한까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제는 마치 병을 고치는 능력이나 악령을 몰아내는 능력을 특정 사제에게만 주었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미국에서 한 아기의 머리에 입맞춤 했을 때 뇌종양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럼으로써 당신 안에 성령께서 함께하심을 봅니다. 그러니 다른 사제에게 고해성사를 하기도 하고 당신도 사제들에게 고해성사를 줄 때 경찰이 심문하듯이 물어보지 말라고 권하십니다. 그냥 용서해 주라는 것입니다.
사제가 악령을 내쫓고 병자를 고치는 시도를 계속해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사제 자신의 믿음도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이 능력은 마치 임금이 암행어사에게 주는 마패와 같습니다. 마패를 잃어버렸다면 암행어사는 어떻게 할까요? 자신이 임금으로부터 파견되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암행어사로서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신자들은 모든 사제에게 악령을 쫓아내고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주어졌음을 믿고 아프면 무조건 안수 받아야 합니다. 그러는 중에 반드시 성령께서 함께 하심을 서로가 느끼게 될 것이고 그러면 사제가 자기가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온전히 성령께 의지하게 될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7대 사목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코로나 어려운 시기에 함께하였던 26대 사목회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제가 이곳 댈러스에 온 지도 5개월이 되었습니다. 27대 사목회 회장단의 이름은 이렇습니다. “서 요셉, 박 에드워드, 김 다윗, 홍 고스마” 본당에는 회장단과 더불어 여러 분과가 있습니다. 전례, 구역, 친교, 선교, 새 신자, 청소년, 교육, 홍보, 정보기술, 여성, 사회 사목 분과가 있습니다. 세대별 모임도 있고, 주일학교와 한국학교 담당자도 있습니다. 사목회와 함께 종신 부제, 수도자, 성직자가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공동체를 위해서 봉사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27대 사목회가 해야 할 사명을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고 하셨습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겁니다.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 주는 겁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더러운 영’은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욕망을 따르려는 마음입니다. 아직 오지도 않은 근심 때문에 지금의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나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서 이웃의 의견을 무시하는 마음입니다. 변화와 혁신을 두려워하고 현실에 안주하려는 마음입니다. 해보지도 않고, 가보지도 않고 쉽게 포기하는 마음입니다. 이웃의 기쁨을 함께 기뻐해 주지 못하는 시기와 질투의 마음입니다. 나보다 못한 이를 도와주지 못하고, 무시하는 교만한 마음입니다. 어떻게 해야 더러운 영을 물리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그 길도 알려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의탁하는 겸손한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겸손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첫째가 되려는 사람을 꼴찌가 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잔치에 초대받으면 낮은 자리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희생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모든 걸 내려놓을 수 있는 가난한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기가 더 쉽다고 하셨습니다. 가난했던 라자로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영원한 생명을 시작하지만, 부자는 지옥에 있다는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재물과 하느님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재물을 하늘에 쌓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부자들이 가난한 이들에게 기꺼이 나눌 수 있다면 하늘에 재물을 쌓은 것이고, 그들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부자라서 하느님의 나라에 못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재물에 대한 욕심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기 때문에 못 들어가는 겁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시니 아쉬운 것이 없다는 믿음의 마음입니다. 엘리사벳도 마리아에게 이렇게 축복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여인 중에 복되나이다.” 예수님께서는 하혈하던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아!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제자들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겨 바다로 넣을 수 있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출발은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에서 시작합니다.
우리가 겸손한 마음을 지닌다면, 희생의 마음을 지닌다면, 가난한 마음을 지닌다면, 굳건한 믿음의 마음을 지닌다면 우리는 능히 악한 영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되어 병자와 허약한 이를 고쳐 줄 수 있습니다. 27대 사목회가 눈앞에 보이는 일을 해결하려고 하면 분명 갈등과 어려움이 있을 겁니다. 27대 사목회가 성과와 결실을 먼저 얻으려고 하면 시련과 고통이라는 장애물을 만날 것입니다. 27대 사목회가 더러운 영을 먼저 물리칠 수 있다면 겸손과 희생 그리고 가난과 믿음의 마음으로 무장한다면 하느님께서는 함께하실 겁니다. 주님! 27대 사목회를 축복해 주시고,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이 넘쳐나는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이 되게 하소서. “너희는 정의를 뿌리고 신의를 거두어들여라. 묵혀 둔 너희 땅을 갈아엎어라. 지금이 주님을 찾을 때다, 그가 와서 너희 위에 정의를 비처럼 내릴 때까지”
오늘의성인
성녀 베로니카 지울리아니(Veronica Giuliani)
신분 : 수녀원장, 신비가
활동지역 :
활동연도 : 1660-1727년
같은이름 : 베로니까, 베로니카, 율리아니
이탈리아 우르비노(Urbino)의 메르카텔로(Mercatello) 출신인 성녀 베로니카 지울리아니는 우르술라(Ursula)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는데, 어릴 때부터 신심생활에 매력을 느끼고 수도생활을 꿈꾸었다.
그래서 결혼하라는 부친의 권유를 끝까지 물리치고 1677년에 치타디카스텔로(Citta di Castello)의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여 베로니카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녀는 이때부터 그리스도의 수난을 체험하기 시작하여 1697년에 오상을 받았다.
치타디카스텔로의 주교가 개인적으로 조사한 결과 그녀의 오상은 진실하다고 선언하였다.
그녀는 관상생활과 활동을 잘 조화시켰고 34년 동안이나 수련장직을 맡았으며, 1716년에는 원장으로 선출되어 죽을 때까지 책임을 다 하였다.
성녀 베로니카는 여러 가지 초자연적 은혜를 받은 18세기의 위대한 신비가로 유명하다.
그녀는 1804년 복자품에 올랐고, 1839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Gregorius XVI)에 의해 시성되었다.
매우 실리적인 신비가, 성녀 베로니카 쥴리아니(Veronica Giuliani, 1660-1727)
*얼마나 엄청나게 긴 일기를 썼는지!
베로니카 쥴리아니(Giuliani)는 몸에 예수님의 오상 성흔을 받은 신비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매우 실천적인 여인이었고 동시에 저술 활동이 정말 뛰어난 일기 작가였다. 220,000장에 달하는 그녀의 ‘일기’를 보면 그녀 자신의 관상생활과 신비신학에 대한 출중한 통찰력이 잘 드러난다. 이 때문에 그녀가 교회 학자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일기에서 그녀는 ‘하느님을 향한 여정’의 극적이고도 결렬한 체험을 직접적으로 알려준다. 그녀가 표명한 바, 그 글들은 '단순한 순종을 위하여 고행과 쑥스러움으로' 쓴 것이라는데, 실제로 수면 부족을 불사하고 밤이 깊도록 공들여 기나긴 글을 써 나갔다고 한다. 그 일기는 (초기 유년기에 대한 이야기를 포함한) 5개의 특정 소책자로 이루어져 있고, 1727년 3월 5일까지 이어져 있으며, 67년간의 성녀의 생애를 묘사하고 있다. 그녀에 의하면 그 날에 성모님께서 “마침표를 (찍을) 때다!”라고 일러주셨고, 그제서야 성녀는 펜을 영영 내려놓을 수 있었다고 한다.
*신앙생활이 독실한 행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우르술라
베로니카 성녀는 1660년 12월 27일, 메르카텔로 술 메타우로(Mercatello sul Metauro)에서 태어났고, 그 다음 날 ‘우르술라’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아버지 ‘프란치스코 쥴리아니’는 그 고장의 주둔군을 지휘하는 소위였다. 베로니카의 어머니 ‘베네딕타 만치니(Mancini)’는 일곱 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그들 중 두 명은 유아 때 사망했다. 쥴리아니 집안은 매일의 공동기도와 화합과 선행 실천으로 인한 독실한 신앙생활이 잘 드러난 가족이었다. 베로니카의 시성 운동 때, 한 증인은 ‘쥴리아니 집안에서, 그들은 성인의 전기를 매일 저녁에 낭독했다.’라고 주장했다.
*그녀의 어릴 적 놀이친구는 아기 예수님이었다
막내였던 우르술라는 네 명의 언니와 함께 신심이 깊은 가정환경에서 자라났다. 어릴 때부터 우르술라는 성화들 속의 아기 예수님과 대화하곤 했다. “사랑하는 예수님, 저는 온전히 당신의 것이며 당신께서는 제 것입니다.” 하고 말하자 아기 예수님께서는 “너는 온전히 나의 것이며 나는 네 것이다.”라고 대답하시곤 했다. 한 번은 아기 우르술라가 정원에서 꽃을 모을 때에 아기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나는 너의 참된 꽃이다.”라고 말씀하시고 사라지셨다. 우르술라는 아기 예수님을 찾으려고 집과 마당을 오랫동안 돌아다녔다.
1667년 4월 28일, 매우 경건하고 섬세하며 다정했던 우르술라의 어머니가 40대 초반의 나이에 세상을 떠남으로서 우르술라는 고아가 되어 버렸다. 어머니는 임종 직전 딸들을 불러 십자고상을 가리키며 예수님의 오상에 각각 딸들을 맡겨드렸다. 우르술라는 예수님의 옆구리에 있는 상처에 맡겨졌다. 그 후, 아버지가 파르마 공작의 세무 관리사로 고용되어 ‘피아첸자(Piacenza)’로 이사 다녀야 했을 때에도 딸들은 아버지를 따라 여전히 모범적인 그리스도교 생활을 했다. 훗날에 베로니카는 이 시절의 행복을 장난 가득한 어린 시절, 착한 주변 사람들과 성모님과 아기 예수님께 대한 깊은 신심으로 가득찬 시절로 그려냈다. 그리고 초창기 수도생활에 대한 매력과 수도성소에 대한 아버지의 짜증스럽고 끈질긴 반대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준다.
*아버지의 맹렬한 반대를 극복하고 카푸친 글라라회에 입회하다
아버지 프란치스코 쥴리아니는 네 명의 큰 딸들에게는 수도원 입회를 기꺼이 동의했지만, 누구보다도 소중히 여겼던 막내딸 우르술라의 입회는 절대 허락하지 않으려고 했다. 아버지는 영특한 우르술라를 너무나 사랑했기에 결혼시킨 뒤 늘 자신 곁에 두고 싶어 했다. 하지만 우르술라는 9살 때 벌써 카푸친 글라라회 수녀가 되기로 결정한 상태였고, 마음을 바꿀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딸의 확고한 의지에 결국 아버지는 한 발 물러서야 했고, 1677년 10월 28일, 17살이 채 되지 않은 우르술라는 ‘치타 디 카스텔로(Città di Castello)’의 카푸친 글라라회 수도원에서 수녀복을 입게 되었다.
그곳에서 우르슬라는 ‘베로니카’라는 의미심장한 수도명을 받게 되는데, 베로니카라는 이름은 ‘참된 형상(vera icona)’이라는 뜻이다. 카푸친 글라라회 수련자가 된 베로니카 자매는 처음부터 망설임 없이 열정을 다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님의 충실한 모방이 되기로 결심했다.
*수도원의 ‘막내둥이’
수도원에서 가장 어렸던 베로니카 자매는 ‘아기’ 또는 ‘막내둥이’를 뜻하는 ‘la Bambina(라 밤비나)’라는 별명으로 알려졌는데, 별명답게 늘 생기 넘치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입회 할 때부터 그녀는 특유의 천진함과 습관으로 다져진 기도생활, 한없는 열정과 진지함으로 다져져 있었는데 그로 인해 영적으로 매우 풍요로운 상태였다. 어릴 때부터 접해 온 성인들의 모범을 자신의 생활 전형으로 삼았고, 그 어떤 장애가 와도 수도생활의 완덕에 이르려는 결정을 결코 양보하지 않았다. 베로니카 자매는 애초부터 영웅다운 거룩함에 이르기로 결심했고, 성인들이 앞서 걸어간 길을 (성인들의 훈련소가 되었던 이 수도원에서) 관상기도와 고행과 보속으로 굳건히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수도생활을 한 지 20년이 지나는 동안에도 그녀는 성공할 초심을 잊지 않았고, 어떠한 난관이나 오해에도 굴하지 않았다. 수도원의 삶이란 단조로운 일상의 연속이지만, 베로니카 자매는 하느님께 이르는 그녀만의 독특한 길로 부지런히 발을 디뎌 나갔고, 놀랍고도 특별한 여러 이정표에 이르렀다.
*그녀의 신비스러운 십자가의 길을 따른 이정표들
1678년 11월 1일 종신서약을 하고, 1681년 4월 4일에는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그녀의 머리에 당신 가시관을 씌워 주셨다. 1688년부터 1691년까지는 수련장의 의무를 수행했고, 1693년 12월 12일부터는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1694년부터 1698년까지 수련장의 의무를 다시 한 번 수행했고, 성 금요일이었던 1697년 4월 5일에는 오상 성흔을 받았다. (오상에 당황한 베로니카는 주님께 간청기도를 올렸고, 손과 발에서는 출혈이 멈추었다. 그때가 1700년이었다. 하지만 옆구리에서는 피가 주기적으로 죽을 때까지 흘러 내렸다.) 그녀는 1697년에 교황청 검사성성(현 신앙교리성)의 재판에서 고소를 당했고, 그로 인해 2년 후 투표권과 당선권을 박탈당했다.
이 날짜들과 사건들은 베로니카 자매의 신비스러운 내면생활의 흐름을 잘 암시해주고 있다. 자신의 내면에서 진행되는 그 신비한 현상들에 대해 그녀의 많은 동료 수녀들은 수도자다운 신뢰심과 감탄으로 반응했지만, 또 한 편으로는 또 다른 수녀들의 부정적인 반응 때문에 베로니카는 결국 자신의 ‘가여운 인간성’을 폐를 끼쳤을 온갖 궁핍과 굴욕과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그녀가 남으로부터 받아야 했던 고통들과 자기 스스로 가했던 그 고통들은 상당히 가혹한 것이었다. 사실 현대인들은 이러한 행동에 대해 잘 이해를 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 과도한 극기의 단계를 넘어선 후에야 비로소 베로니카 자매 자기 자신도 그 극심한 행동을 ‘사랑이 나로 하여금 하게 했던 그 미친 짓들’로 비난하게 되었다. 1697년 오상을 받았을 때부터 이 ‘미친 짓들’은 점차 줄어들었고 1699년에는 마침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때서야 그녀는 ‘자기 자신을 더욱 더 정화시키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해 주신 일, 그것을 몸소 목격하고 알게 되었던 그 고통과 고뇌’에 만족하게 되었다.
*현명한 수련장
베로니카 자매는 이 교훈을 젊은 후배 자매들에게 반드시 물려주고픈 황금률 원칙으로 삼았는데, 그 이유는 ‘보속 행위에 대한 그들의 갈망을 완화시키기’ 위함이었다. 수련자들을 지도하는 34년 동안 베로니카 자매는 수련자들에게 신비 영성에 관한 책을 읽지 못하게 했는데, 이것은 신비주의에 대한 베로니카의 조심성과 현명함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마리아와 마르타의 몫
베로니카 자매의 천성은 마르타의 몫보다는 마리아의 몫에 더 부합하는 편이었다. (루카 10: 38-42 참조) 수도원에서의 첫 몇 년 동안에는 관상과 묵상에 몰두함으로써 완덕에 대한 자신의 갈망을 충족시켰다. 사소한 손일이나 변변치 못한 봉사들에 대한 거부감 또한 그녀의 그러한 경향에 더욱 이바지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손일은 일종의 극기였고, 때문에 극도의 거부감을 일으켰다. 그것은 관상하고 고행하는 일보다 더 유익하고 이타적인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1690년 후반에는 생각이 바뀜).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로니카 자매는 관상이 인생의 핵심적 윤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해 자주 의문을 품었으며, 급기야는 관상생활과 활동생활 중에 어느 쪽이 영적으로 더 나은가에 대해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되었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선행을 하기 위해서 너는 세속에 머무를 수도 있었고 그리했으면 다른 이들에게 더 유익할 수도 있었다.”라고 말 한 적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수도원에 머무르면서도 더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다는 결론에도 이르게 되었는데, 하느님 안에 숨은 생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이 일은 기도로써, 또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로써 어디서든 이루어져야 합니다. 독방으로 물러남으로써가 아니라 공동체 한 가운데에 있음으로써 내가 예수님과 은둔할 수 있도록 연습해야 합니다. … 하느님께서 나에게서 요구하고 계신 일은 활동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 같습니다.” 베로니카 자매는 하느님을 찾고 흠숭하는 데에 가장 효율적인 방법 101가지 관심사들 중에서 그분을 진심으로 찾아뵙는 실제적인 통찰력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 스스로도 죽을 때까지 그 실제적인 경험 법칙을 따랐고, 동료 자매들에게도 확신 있게 그것을 가르쳐주었다.
*수도원의 시설을 확장시켰던 원장수녀님
1716년 3월 7일, 감사성성은 베로니카 자매에게 취했던 징계 조치를 취소했다. 베로니카 자매는 당선권과 투표권을 다시 가지게 되었고 수도원 내의 선거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 몇 주 후에 자매들은 베로니카 자매를 수도원장으로 선출했고, 그녀는 ‘어머니 아빠티사’가 되었다. 베로니카 어머니는 죽었을 때까지 이 의무를 이행했다. ‘아빠티사’로 지낸 14년간의 기간은 하느님의 복을 가득 받은 해였고, 기적의 빛들로 휩싸였던 때였다. 순교자적인 사랑의 고통(옆구리 성흔)으로 매우 고생스러운 나날을 보낸 거룩한 신비가이면서도 매우 현실적이었던 성녀인 베로니카 자매는 이 시기에 좁은 수도원을 확장시키고 상당히 번거로운 상수도 시설을 개선시키게 되었다.
*사랑이신 분께서 당신을 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다!
1727년 6월 6일, 그 고통은 더욱 격심해졌다. 30일 동안 베로니카 자매는 몸과 마음과 영의 세단계의 연옥을 통과해야 했다. 시성자료에서도 읽을 수 있듯이, 그 때에 그녀는 수련자들과 젊은 자매들을 병상으로 불러 말했다. "나는 사랑을 발견했습니다. 사랑이신 분께서는 당신을 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습니다! 바로 이 사랑이 내 고통의 원인이십니다. 다른 이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주세요! 다른 모든 이들에게도 알려주세요!" 그런 다음 말씀의 육화를 찬미하는 성가를 들려주라고 부탁했다. 노래를 듣는 동안 성녀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여러분들 중에 이 사랑에 울지 않을 사람은 누구신가요?”라며 외쳤다. 1727년 7월 9일 새벽, 치타 디 카스텔라의 카푸친 글라라회 수도원, 아빠티사인 베로니카 쥴리아니 어머니는 고해사제에게 마지막 순종을 보인 뒤, 고요하게 숨을 거두었다.
*그 어머니에 그 딸!
5개월 후, 성덕에 대한 베로니카 자매의 명성 때문에 교구장이었던 ‘알렉산델 피란치스코 코데보(Codebò)’ 주교는 교구 내 시성운동을 착수했다. 그리하여 1804년에 시복식이 거행되었고, 35년 후 1839년 5월 25일, 그레고리오 14세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치타 디 카스텔로 카푸친 글라라회 수도원에 안치되어 있는 성녀 베로니카의 시신은 부패하지 않은 채로 보존되어 있다. 놀랍게도 성녀 베로니카의 직계 후계자 아빠티사였던 플로리다 ‘체르볼리(Cervoli)’ 자매도 영웅적으로 거룩한 생활로 인해 시성을 기다리는 복녀가 되었다. 영적으로 말하자면, 모전여전(母傳女傳)인 샘이다.
“저의 하느님, 죄인들의 구원 외에는 당신께 청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나이다. 그 모든 죄인들을, 그들을 모두 다 당신께 되돌아가게 하소서. 당신과 죄인들 사이에 중제자로 저를 세워주소서. 온갖 고뇌가 와도 될 것이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을 것이니이다. 사랑이신 분께서는 극복하셨고, 사랑이신 분 당신 자신께서 극복되어 계시나이다. 왜냐하면 영혼은 그분께서 자체 안에 계심을 형언할 수 없는 양식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이옵니다.”
- 성녀 베로니카 줄리아니
성 안토니오 페체르스키(Anthony Pechersky)
신분 : 은수자
활동지역 : 러시아(Russia)
활동연도 : 983-1073년
같은이름 : 안또니오, 안또니우스, 안소니, 안토니우스, 앤서니, 앤소니, 앤터니
오늘날 우크라이나(Ukraina)의 체르니고프(Chernigov) 부근 루베크(Lubech)에서 태어난 성 안토니우스 페체르스키(Antonius Pechersky, 또는 안토니오 페체르스키)는 젊은 시절 초기 이집트의 수도자들이 했던 것처럼 살기 위해 은수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생활을 위한 교육이 절실함을 깨닫고 그리스의 아토스 산(Mount Athos)으로 갔다. 그는 여기서 바다 절벽 위에 세워진 에스피그메노우(Esphigmenou) 수도원과 관련을 맺고 은수자가 되었다. 그는 여기서 몇 년을 살다가 수도원장으로부터 고향으로 돌아가서 은수생활을 하는 수도원을 세우라는 명을 받고 다시 러시아로 돌아왔다.
러시아로 돌아온 성 안토니우스는 자신이 아토스 산에서 경험했던 것과 같은 평화롭고 고독한 생활방식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키예프(Kiev)의 드네프르(Dnieper) 강 언저리의 동굴 안에 자신의 은둔소를 세웠다. 그의 지혜와 성덕은 은수 생활을 갈망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쳐 얼마 지나지 않아 키예프의 동굴들(키예프-페체르스카야-다우라)은 빈곳이 없을 정도로 대성황을 이루었다.
그는 가난한 사람이든 부자든, 농노이든 자유인이든 상관없이 좋은 지향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받아들였다. 이렇게 해서 러시아인을 위하여 러시아인이 세운 첫 번째 러시아 수도원이 세워졌던 것이다.
샤슬라프(Syaslav) 공주는 성 안토니우스에게 동굴 부근의 땅을 주었고 그는 그곳에 수도원과 성당을 세웠다. 그러나 귀족들의 논쟁에 의해 그는 그곳을 떠나 체르니고프에 또 다른 수도원도 세웠다. 그러나 결국에는 키예프의 페체르스카야 라우라의 자기 동굴로 다시 돌아와서 여생을 수덕하며 엄격하게 살다가 선종하였다.
그는 성 테오도시우스 페체르스키(Theodosius Pechersky)와 더불어 러시아 수도생활의 아버지로 추앙을 받고 있다. 그는 동굴의 성 안토니우스라고도 불린다.
성녀 루피나 (Rufina)
활동년도 : +257년
신분 : 동정, 순교자
지역 :
같은 이름 : 루비나
성녀 세쿤다 (Secunda)
활동년도 : +257년
신분 : 동정, 순교자
지역 :
같은 이름 : 세군다, 세꾼다, 쎄꾼다
성녀 루피나와 성녀 세쿤다(Secunda)는 로마 원로원 의원인 아스테리우스(Asterius)의 딸로서 자매지간이다. 이들은 아르멘타리우스(Armentarius)와 베리누스(Verinus)라는 그리스도인과 각기 결혼하기로 약속하였는데, 돌연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가 시작되자 이들 두 남자는 자신들의 재산이 빼앗길 것을 두려워하여 배교자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들 자매들은 그들과 같이 배교자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그들 몰래 로마(Roma)를 빠져나와 도망쳤지만 이내 그 도시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발각되고 말았다.
그들은 집정관 유니우스 도나투스 앞에 끌려갔다. 갖은 형벌과 위협을 다 받았지만 조금도 흔들리지 않자, 먼저 성녀 루피나에게 모진 매를 때리도록 명하였다. 이때 성녀 세쿤다는 이렇게 항의하였다.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그리스도는 하느님이시라고 고백했는데, 왜 언니만 때리느냐?” 그래서 그들은 각기 다른 형태의 고문을 받은 후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 후 플라우틸라(Flautila)라는 어느 미신자가 그들의 시신을 거두어 로마 근교 코르넬리아 가도 근처에 안장하였다. 그곳은 그들이 안장되기 전까지는 '실바 니그로'(silva nigro) 즉 검은 숲이라 불렸는데 그 후에는 '실바 칸디다'(silva candida) 즉 흰 숲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 후 이 순교 성인들의 유해는 1154년 교황 아나스타시우스 4세(Anastasius IV)에 의해 라테라노(Laterano) 대성전의 세례소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성녀 아멜베르가 (Amelberga)
활동년도 : +690년
신분 : 과부
지역 : 모뵈주(Maubeuge)
같은 이름 : 아말리아, 아말베르가, 아말부르가,
벨기에 브라반트(Brabant) 태생인 성녀 아멜베르가는 불과 13세의 나이에 비트겔(Witger) 백작에게 시집을 가서 세 자녀를 낳았는데, 이들이 곧 성녀 구둘라(Gudula, 1월 8일), 성녀 라이넬디스(Reineldis, 7월 16일) 그리고 캉브레(Cambrai)의 주교 성 에메베르투스(Emebertus, 1월 15일)이다. 남편 비트겔이 로베스(Lobbes)에서 베네딕토회 수도자가 되자 그녀 역시 모뵈주의 수도원에서 같은 규율을 지키는 수녀가 되어 서약을 하였다. 그녀는 여생을 매우 엄격하게 지내다가 남편이 운명한 후 그녀 역시 사망하여 남편 옆에 묻혔다. 그녀는 아말부르가(Amalburga), 아말베르가(Amalberga), 아말리아(Amalia), 아멜리아(Amelia) 등으로도 불린다.
복자 엠마누엘 루이스 (Emmanuel Ruiz)
활동년도 : +1860년
신분 : 수도원장, 순교자
지역 :
같은 이름 : 에마뉘엘, 임마누엘
크림 전쟁(Crimean War) 후 파리(Paris)의 의회는 터키에 대하여 오토만 황제의 어떤 개혁, 즉 터키 내의 소수집단인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올바른 대우를 요구하였고, 1856년에는 술탄이 칙령을 내려 제국 내의 모든 신하들은 인종과 종교 차별을 두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의 자유가 확대되고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던 중, 1860년에 어느 청년 그리스도인과 힌두교인 사이의 논쟁이 화근이 되어 대학살이 시작되었다.
그 해 5월 30일과 6월 26일 사이에 레바논(Lebanon) 전역에서 6천 명 이상의 신자들이 살해되었다. 잘레에서는 5명의 예수회원이 목 졸려 죽었고, 다일 알-카말에서는 동방 가톨릭의 마론 교회(Maronite) 수도원의 원장이 산 채로 가죽을 벗기는 만행 끝에 순교하였고 그곳의 수도자 20명은 도끼에 맞아 죽었다.
7월 9일에는 이 불길이 다마스쿠스(Damascus)로 옮겨 붙었다. 그 당시 에스파냐 태생의 엠마누엘 루이스는 다마스쿠스 작은 형제회의 원장이었는데 모압인들의 급습을 받고 성당으로 피신하였으나 곧 체포되었다. 이때 그는 “나는 그리스도인이고 또 그리스도인으로서 죽는다.”고 말하고 제대 앞에서 도끼에 맞아 순교하였다. 이때 다른 7명의 수도자와 평소 수도원을 적극 후원하던 세 명의 평신도가 함께 순교하였다. 이들은 1926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서 엠마누엘 루이스와 동료 순교자들로 복자품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