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는 친구
항상 머물러 있으면서 언제나 함께한 목자입니다. 그는 색이 바래지 않고 푸르렀으며 탐스럽고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줍니다. 모든 슬픔과 괴로움, 어려움 등을 그에게 맡기고 우리를 위해 기도해 줍니다. 양들은 참 평화를 누립니다.
어느 날 우리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처음에는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해가 지난 지금에서야 저는 의탁하려고 용기를 내어 봅니다.
멀리 있는 웅장한 경치를 볼 때면 만물의 창조주를 생각하게 되었고, 그분의 영광을 찬미하게 됩니다.
어둡고 무서운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가더라도 목자에게 의지하면서 그와 함께했기에 하나도 두렵지 않습니다.
신뢰하고 믿음이 있는 사람은 죽음이 오더라도 영원히 살 게 됨을 조금씩 깨닫게 됩니다. 목자를 통하여 구체적인 그분을 만나 뵙게 됩니다.
양들은 기도합니다. “어떠한 세상 풍파 속에서도 보호하여 주소서.”
그는 어느 누구 하나가 죽음을 맞더라도 그를 위해 성호를 그어주고 성수도 뿌려 줍니다. 눈물 흘리면 그 눈물을 마음으로 닦아 줍니다. 기도 소리가 작을 땐 큰 소리로 같이 해줍니다.
그는 전혀 무례하지 않습니다. 사심도 없이 봉사합니다. 목자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가 평화를 비는 작은 ‘도구’가 되게 하소서.”
그릇된 길을 가고 있을 땐 조용히 침묵으로 깨우쳐 주고, 그래서 새로운 죄악은 피할 수 있게 됩니다. 양들은 그에게 숨어듭니다. 우리의 영혼 버리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영적 선물도 듬뿍 주고, 떠나는 그를 생각하면 어려움이 닥쳐와도 헤쳐 나갈 수 있는 용기도 생깁니다.
처음에는 갈구하는 ‘가난’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기도하는 방법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은 ‘가난한 사람’이란 의미가 조금씩 가슴을 따뜻하게 합니다. 자녀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은 직접 택하시고 우리는 마음으로 봉사할 수 있는 기회도 받습니다.
몸소 보여준 첫 본보기는 ‘겸손’입니다. 하지만 외적으로 침묵을 유지한다고 해서 스스로 ‘겸손’하다고 자부하진 못합니다. 안에서 치밀어 오르는 자만심·이기심이 항상 내적 침묵을 깨뜨리곤 하니까요.
내적으로 ‘오만’했던 저 자신, 목자를 통하여 용서받기를 원합니다.
한 봉사자가 통통배를 타고 ‘세어도’라는 작은 섬에 갑니다. 차를 타고 가면서 묵주기도도 하고 피조개도 잡으면서 그의 사랑을 오감으로 느낍니다.
저녁때는 쌍둥이 형을 위해 재래시장에서 ‘상어 회’를 구입합니다. 소박하고 따뜻한 형제애는 부모의 마을을 기쁘게 합니다.
이제는 이별할 시간입니다.
이별은 “서러운 눈물을 씻고 나가는 것”입니다.
슬플 때 하소연을 하면 받아주고 함께 떠나면 나도 행복해지는 그런 사람입니다. ‘행복’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나는 도저히 ‘영원’과 ‘무궁’을 깨닫지 못합니다. 이별을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아프기도 합니다.
임시 가건물, 기념사진을 찍으면 ‘풍천민물 장어’가 찍히는 보잘 것 없는 장소이지만 그 가 보여준 끊임없는 ‘관심’ 때문에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규빈이’부터 나이든 사람까지 함께했던 시간을 ‘행복’으로 간직합니다.
다가오는 가을이면 그곳에서의 생활이 3년이 됩니다. 생일 축하 행사도 못하고 정든 목장을 떠나는 그를 생각합니다.
길 잃고 방황할 때 늘 함께하리라 믿기에 우리는 굳건히 주어진 길을 성실하게 걸어 갈 것입니다.
이웃들을 위해 애원했던 모습을 추억하면서 주변의 영혼을 위해 기도합니다.
백철우 베드로
첫댓글 좋은친구가 계셨던 것 같습니다.....
이별을 받아 들이기도 하지만 아프기도 합니다.
늘 함께하리란 믿음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힘들겠지요...믿음이 아름답게 느겨집니다
잘 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