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란 우리 모두가 견뎌야 하는 희극이다.
나는 내가 지옥에 있다고 믿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책 <지옥에서 보낸 한 철>에서 "랭보"
극강의 활발함을 언제든 일어서는 용기를 불운을 박차고 튀어 오르는 그때 그 시절의 쾌활함과 상냥함을 집 나간 신념을 뜨거운 열정의 결정체를.. 잃어버린 모든 것들을 다시 찾아오고 싶다. 인간의 용기가 낼 수 있는 위대한 힘을 도난당했다.
비관은 무조건 나쁜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하지! 비관이 재앙을 막고 우울의 시궁창에서 피어난 허브의 향이 얼마나 고매한 것인지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 이끼 낀 산성의 돌을 기억하는 나무들, 너무 이른 죽음과 늦은 죽음의 결과는 언제나 같다. 죽은 이들의 이름을 머리 풀고 불러보는 억새풀의 절규들!
비관의 역사는 언제든 삶의 정점의 진한 맛을 알고 있다. 모든 것들을 다 이루고 무너져 내렸을 때 진짜 비관이 찾아온다. 비트겐 슈타인의 삐뚤어진 사랑과, 천재 시인 랭보의 도발적인 여름과 잘려나간 오른쪽 다리를, 에드가 엘런 포의 절망과 우수가 몰고 오는 음습하고도 기묘한 죽음의 밤을 역사는 바꾸지 못했다. 위대한 무녀도 그들의 운명을 메치기 하지 못했을 것이다. 슬픔이 만들어낸 시들의 현란함을 사랑한다. 산산이 부서진 정의와 거꾸로 타들어가는 인과응보들..
시인과 소설가의 삶을 정상으로 주야장천 끌어올린 것은 끝을 모르고 갱도까지 추락하는 비관이었다. 유진 오닐의 눈물겨운 삶과 허락받지 못한 유언, 언제든 죽음의 출발선상에 선 아름다운 버지니아 울프, 비관이란 화두를 잡고 우려낸 염세주의의 교주 쇼펜 하우어... 세상을 바꾼 이들은 비관의 소시오패스와 사이코패스를 교집합으로 가진 반사회적 경향자들이었다. 왜 무조건 낙관이어야 하는 것인가?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어야 하는 것일까? 그렇게 살아온 삶이 나를 배신한다면 뭐라 말할 것인가?
낙관주의를 환영하지! 내 비극의 서사시를 언젠가 기록의 서말에 고백할 것이다. 잿더미에 올라서서 다 시작할 수 있었던 나름 숭고했던 배짱을 죄와 악을 복수와 정의를 다시 내리는 결정의 밤이다. 난 언제나 헤맸지만 이젠 아니다.
쉰이 넘어서야 겨우 술을 배웠습니다. 이제 나는 당신의 술 동무, 동지입니다. 아니 동행, 동병상련이어도 좋습니다. 당신의 시간에 내가 조금이라도 속하기를 기대해 봅니다. 페르시아가 이란으로 바뀌어도 헬리콥터만 한 잠자리가 하늘을 가득 메우고 향유고래가 풀 베개를 베고 잠드는 한낮이어도 좋습니다. 당신이 나를 이해해 주기를 그리고 받아 주기를 기다려 봅니다.
형법과 민법을 그리고 파리 혁명 1789와 나폴레옹법전을 설명하는 당신과 장자의 꿈을 설명하려는 나는 우리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오늘 또 힘든 하루를 버티고 대간한 하루를 대단하게 견디었습니다. 내 피 묻은 손수건을 당신이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진 않았습니다. 당신의 냉철함과 나의 어리숙함이 선을 긋는 밤입니다. 문해력이 떨어져서 미안합니다. 정의(definition)를 정의(Justice)라고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주어진 귀한 알약을 술과 들이킴으로 하루를 정리하는 시간입니다. 나의 절대적 우울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내게 남겨진 시간, 처절하게 망가지려고 합니다. 그것 또한 잘 살아온 삶의 보상일지도 모릅니다. 검붉은 피 냄새가 진동하는 그런 밤입니다. 내일이면 난 또한 명의 지인을 잃을지도 모릅니다.
나를 치유의 글, 이 글을 읽는 내내, 당신도 행복하길 바라봅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공부가 되는 새벽, 진정한 학문이란 삶에 관한 바른 이해이다.
극강의 쾌활함을 잃어버린 내 자아를 찾아서! 코로나 372번 참회하는 마음으로(?) 승정원 기록처럼 올립니다. 나를 위한 피의 고백서! 삶에서 못다 한 말들, 그리고 그 누구도 예견하지 못했던 지나간 시대의 비극인 <코로나 일지>. 한번 피해자는 영원한 피해자입니다. 누군가는 기록하고 기억해야 할 <상실의 아픔>을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좋은 이웃이 있어서 감사합니다. 너무나 망해 버린 삶, 누군가에겐 희망이길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