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한국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을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여한이 없겠노라.
-순국 직전 동포들에게 남긴 의사의 마지막 유언
조국을 건지려고 생명을 바친 수많은 선연들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적인 민족정기의 발양자야말로 안중근의사다. 의사는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부 광석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순흥이고, 아명은 응칠(應七)이며, 천주교 세례명은 토마스(도마)이다. 의사의 집안은 대대로 해주에서 세거한 전형적인 향반(鄕班) 지주였다. 즉, 고려말 대유학자 안향(安珦)의 후예로 조부 안인수(安仁壽)는 진해현감, 부친 안태훈(安泰勳)은 소과에 합격한 진사로 수 천 석 지기의 대지주였던 것이다. 특히 부친인 안태훈은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해서(海西) 일대에서 문명을 날리고 있었는데, 의사는 바로 이 안진사와 그 부인 조(趙)씨 사이에 태어난 3남 1녀 가운데 장남이었다.
의사의 부친은 진사였으나 전통적인 유학에 머물러 있던 보수 유림은 아니었다. 그는 근대적 신문물의 수용의 필요성을 인식한 혁신 유림으로 개화적 사고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1884년 박영효(朴泳孝) 등 개화 세력이 근대 문물의 수용과 개혁 정책의 실행을 위해 도일 유학생을 선발할 때 그에 뽑히기도 하였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 해 12월 발생한 갑신정변의 실패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향하고 말았다.
의사의 집안은 갑신정변 직후 해주의 세거지를 떠나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그것은 부친이 개화당 인사들과 교류가 깊었던 관계로 수구파 정부의 탄압을 피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때문에 의사는 청계동에서 성장하면서 8세 때인 1886년부터 약 8∼9년 동안 조부의 훈도로 유교 경전 등 한학과 조선 역사를 배우며 민족 의식을 키웠다. 또한 부친의 영향으로 개화적 사고를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말타기와 활쏘기 등 무예를 연마하며 호연지기를 길렀고, 숙부와 포수꾼들로부터 사격술을 익혀 명사수로 이름을 날렸다. 그리하여 의사는 근대적 사고와 숭무적 기상을 지닌 민족 청년으로 성장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역사의 현장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발생하자 의사의 부친은 군대를 조직하여 반동학군 투쟁에 나섰다. 그것은 오래 전부터 개화파와 연계를 맺고 있던 의사의 부친이 개화 정책을 펴던 갑오 내각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의사도 16세의 나이로 부친이 조직한 군대에 참여하여 선봉장으로 활약하면서 처음으로 역사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때 의사의 부친은 동학군이 해주감영에서 빼앗은 5백 석 가량의 양곡을 회수하여 군량으로 사용한 적이 있었는데 이것이 후일 문제가 되어 큰 곤욕을 치르게 된다. 즉, 이러한 사실이 중앙 정부에 알려지자 당시 갑오 내각의 탁지부 대신 어윤중(魚允中)은 양곡 반환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미 양곡을 군량미로 다 사용한 의사의 부친은 명령을 이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개화파 동지인 김종한(金宗漢)의 도움을 받아 이를 무마함으로써 위기를 넘겼다.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개화파 정부가 전복되고 친미·친러 연립 내각이 성립되자 척족 세도가인 민영준(閔泳駿)이 다시 강력하게 양곡 반환 문제를 들고 나왔다. 이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의사의 부친은 인근 마렴에 있던 천주교당으로 수개월 동안 피신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의사의 부친은 프랑스인 빌렘(J. Wilhelem·洪錫九) 신부의 인도로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그리고 빌렘 신부 등 천주교 신부들의 도움으로 양곡 반환 문제가 해결되어 청계동으로 귀가한 부친은 1897년 1월 의사를 비롯한 일가족 30여 명을 천주교에 입교시켰다. 이에 따라 의사도 천주교에 입교하여 빌렘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고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부여받았다.
이후 의사는 빌렘 신부로부터 교리와 함께 불어를 배우며 천주교의 포교에 힘썼다. 의사는 전도 활동 중에 일반 민중들과 광범위하게 접하면서 그들의 교육 수준이 낮다는 것을 깨닫고 민중 계몽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의사는 민중 계몽에 종사할 인재들을 양성하기 위한 ‘대학교’ 설립을 계획하고, 상경하여 뮤텔(G. Mutel) 주교 등 외국인 신부들과 상의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한국인이 학문을 하게 되면 믿음이 좋지 않게 된다”는 이유로 반대함에 따라 대학교 설립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이 일로 의사는 외국인 신부들에 대한 불신을 갖고 배우던 불어를 중단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의사의 천주교에 대한 신념은 굳었고, 신도들에 대한 사랑은 깊었다. 인근 금광의 감리(監理)가 천주교를 심하게 비방하자 의사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를 찾아가 설득하기도 하였다. 또한 중앙 고위 관리에게 처와 재산을 겁탈당한 천주교 신도의 딱한 사정을 해결하기 위해 상경하여 권력층과 당당히 맞서 싸우기도 하였다. 즉 의사는 천주교를 전파하고, 그 교리인 박애주의를 실천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던 것이다.
한편 1904년 2월 러일전쟁 발발과 함께 민족적 위기감을 느낀 의사는 각 국의 역사에도 관심을 가지며, 신문 잡지 등의 탐독을 통하여 국제 정세에 대한 안목을 넓혀 갔다. 그리고 1905년 11월 ‘을사조약’ 체결로 망국의 상황이 도래하자 구국의 방책을 도모하기 위해 중국 상해로 건너갔다. 상해에서 의사는 산동(山東) 지방의 한인들을 모아 구국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천주교 관계자들을 통해 일제의 침략 실상을 널리 알리는 외교 방책으로 국권 회복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상해 지역의 한인 유력자들과 외국인 신부들의 비협조, 그리고 1906년 1월 부친의 별세로 말미암아 뜻을 펴지 못한 채 귀국하고 말았다.
이후 의사는 그 해 3월 청계동을 떠나 평안남도 진남포로 이사하면서 민족의 실력 양성을 위한 계몽 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서우학회’에 가입한 뒤 진남포에 삼흥(三興)학교와 돈의(敦義)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계몽 운동을 전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석탄을 채굴하여 판매하는 삼합의(三合義)라는 광산회사를 평양에서 설립하여 산업 진흥 운동에도 매진하였다. 1907년 2월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의사는 국채 보상 기성회 관서지부를 조직하여 부인의 금반지와 은반지, 비녀 등을 비롯하여 전 가족의 장신구를 모두 헌납하면서 이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국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해져 갔다. 일제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그 해 7월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곧 이어 ‘정미 7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대한제국 군대까지 해산시키며 한국을 식민지화하여 갔던 것이다. 이 같은 국망의 상황이 되자 의사는 상경하여 이동휘 등 신민회 인사들과 구국 대책을 협의하였고, 이 과정에서 국권 회복 운동 방략을 계몽 운동에서 독립 전쟁 전략으로 바꿔 갔던 것으로 이해된다.
의사는 1907년 북간도를 거쳐 노령 연해주로 망명하였다. 이는 국외에서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독립 전쟁 전략을 구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의사는 노령 일대의 한인촌을 유세하며 의병을 모집하고, 노령 한인사회의 지도적 인물이자 거부인 최재형(崔在亨)의 재정적 지원으로 1908년 봄 의병부대를 조직하였다. 흔히 이범윤(李範允) 의병부대로 알려진 것이 바로 의사가 중심이 되어 조직한 이 의병부대였다. 김두성(金斗星)이 총독, 간도 관리사를 역임한 이범윤이 총대장으로 추대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참모중장(參謀中將)이었던 의사가 이 의병부대를 이끌었다. 의병부대의 규모는 3백명 정도로 두만강 부근의 노령 연추(煙秋)를 근거지로 군사 훈련을 실시하면서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하였다.
드디어 1908년 6월 의사는 의병부대를 이끌고 제1차 국내 진공 작전을 펼쳤다. 함경북도 경흥군 노면 상리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수비대를 급습한 것이다. 이 작전에서 의사의 의병부대는 치열한 교전 끝에 일본군 수명을 사살하면서 수비대의 진지를 완전히 소탕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함경도 일대에서 맹활약하고 있던 홍범도(洪範圖) 의병부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제2차 국내 진공 작전을 전개하였다. 함경북도 경흥 부근과 신아산 일대의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한 것이다. 이 전투에서 의사의 의병부대는 제1차 진공 작전과 마찬가지로 기습 공격을 통해 일본군을 여러 차례 격파하였다. 아울러 전투 중에 10여명의 일본군과 일본 상인들을 생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런데 의사는 이들 일본군 포로들을 석방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는 “사로잡힌 적병이라도 죽이는 법이 없으며, 또 어떤 곳에서 사로잡혔다 해도 뒷날 돌려 보내게 되어 있다.”고 하는 만국공법에 따른 것이었고, 또 의사가 믿고 있던 천주교의 박애주의의 소산이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의사는 의병부대원들의 불만과 오해를 사고, 또 포로의 석방으로 의병부대의 위치가 알려지면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대패하고 말았다.
이후 온갖 고초 끝에 의사는 몇몇 부대원들과 함께 연추의 본거지로 귀환하여 의병부대의 재조직을 모색하였다. 하지만 일본군 포로를 석방한 의병장에게 군자금을 대는 사람도 없었고, 그 부대를 지원하는 병사들도 없었기 때문에 의사는 심한 좌절감에 빠졌다. 그리하여 의사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면서 교포 신문인 『대동공보(大東共報)』의 기자, 대동학교의 학감, 한인민회(韓人民會)의 고문 등을 맡아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의사가 독립 전쟁 전략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의사는 1909년 1월 의병 재기를 도모하면서 동지 11명과 함께 단지(斷指) 동맹을 맺고 구국에 헌신할 것을 맹세한 것을 보아도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러던 중 1909년 9월 의사는 대동공보사에 들렀다가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만주를 시찰하러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의사는 한국 침략의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파괴자인 이토오가 이제 만주 침략의 첫 발을 내딛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를 묵과할 수는 없었다. 국권 회복을 위해서도, 동양 평화를 위해서도 그냥 보아 넘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의병참모중장으로 자신의 활동지역에 겁없이 쳐들어온 적장 이토오를 온전하게 되돌려 보낼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의사는 “여러 해 소원한 목적을 이루게되다니. 늙은 도둑이 내 손에서 끝나는구나”하며 남몰래 기뻐하였다. 그리고 지체 없이 이토오를 포살하기 위한 구체적인 준비 작업을 진행시켰다.
이때 큰 도움을 준 것이 대동공보사의 인사들이었다. 사장 겸 총무인 유진율(兪鎭律)은 거사 자금과 권총 3정을 내주었고, 기자인 이강(李剛)은 대동공보사 하얼빈 지국장에게 의사의 안내를 부탁하는 등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대동공보사 집금 회계원인 우덕순(禹德淳)은 의사와 뜻을 같이하기로 자원하였다. 이들의 지원 아래 의사는 이토오를 포살할 목적으로 10월 21일 우덕순(禹德淳)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하여 하얼빈으로 향하였다.
도중에 의사 일행은 포그라니치아에서 유동하(劉東夏)를 가담시키고 하얼빈에 도착한 뒤, 대동공보사 하얼빈 지국장 김형재(金衡在)의 소개로 조도선(曺道先)을 거사 준비에 합류시켰다. 그리하여 의사를 중심으로 이토오 포살 계획은 주도면밀하게 추진되었다. 처음 의사는 의거의 완벽한 성공을 위해 만주 동청철도의 출발지인 남장춘(南長春)과 관성자(寬城子), 그리고 도착지인 하얼빈과 채가구(蔡家溝) 등 4개 지점에서 거사를 실행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자금이 모자랐고, 또 실행 인물도 부족하여 부득이 도착지인 하얼빈과 채가구 두 곳에서 거사를 추진하였다.
교차역으로 열차가 정차하는 전략적 요지인 채가구에서는 우덕순과 조도선이, 하얼빈에서는 자신이 거사를 결행하기로 하고 준비에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거사 지역 사이의 연락과 통역은 유동하가 담당하게 하였다. 그러던 중 유동하로부터 10월 25일이나 26일 아침에 이토오가 하얼빈에 도착할 것이라는 연락이 왔다. 이에 의사는 10월 24일 우덕순과 조도선을 채가구에 배치한 뒤 하얼빈으로 돌아와 이토오를 기다렸다. 그런데 채가구에서 우덕순과 조도선이 이토오를 포살하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것은 이들이 투숙한 역구내의 여인숙을 밖에서 러시아 경비병들이 잠가 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것은 의사의 거사 계획뿐이었다.
의사는 10월 26일 새벽 하얼빈역으로 나가 러시아 병사들의 경비망을 교묘히 뚫고 역구내 찻집에서 이토오의 도착을 기다렸다. 드디어 오전 9시 이토오가 탄 특별 열차가 하얼빈역에 도착하였다. 이토오는 환영나온 러시아의 재무대신 코코프초프와 열차 안에서 약 30분간 회담를 갖고, 9시 30분 경 코코프초프의 인도로 역구내에 도열한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였다. 그리고 다시 귀빈 열차 쪽으로 향하여 가기 시작하였다.
바로 이때 의장대의 후방에서 은인자중하고 있던 의사는 앞으로 뛰어나가며 브라우닝 권총으로 이토오에게 3발의 총탄을 명중시키자 이토오는 쓰러졌다. 이어서 의사는 가장 의젓해 보이는 일본인들을 향하여 3발의 총탄을 더 발사하였다. 이는 혹시 자신이 이토오를 오인했을 경우를 예상한 행동이었지, 그 수행원들을 처단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이 총격으로 이토오를 수행하던 비서관과 하얼빈 총영사, 만주 철도 이사 등 일본인 관리들이 총탄을 맞아 중경상을 입었다. 당시 러시아군에 의해 체포될 때 의사는 러시아말로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연호하였다고 한다.
의사의 총탄 세례를 받은 이토오는 열차로 옮겨져 응급처치를 받았으나 결국 절명하였다. 그리하여 한국 침략의 원흉이자 동양 평화의 파괴자인 이토오는 의사에 의해 단죄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이후 의사는 하얼빈의 일본영사관을 거쳐 여순에 있던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 송치되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에 이르기까지 6회에 걸쳐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 재판은 죽기를 각오한 의사조차도 “판사도 일본인, 검사도 일본인, 변호사도 일본인, 통역관도 일본인, 방청인도 일본인. 이야말로 벙어리 연설회냐 귀머거리 방청이냐. 이러한 때에 설명해서 무엇하랴”고 불만을 토로할 정도로 일본인들만에 의해 형식적으로 진행되었고, 그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2월 14일 공판에서 의사는 일제의 각본대로 사형을 언도 받았다.
“사형이 되거든 당당하게 죽음을 택해서 속히 하느님 앞으로”는 모친의 말에 따라 의사는 이후 공소도 포기한 채, 여순감옥에서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의 저술에만 심혈을 쏟았다. 『안응칠 역사』는 의사의 자서전이고, 『동양평화론』은 거사의 이유를 밝힌 것이었다. 재판이 공개되지 않는 상황에서 의사는 일본인들에게 거사의 이유를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구구하게 이유를 밝혀 목숨을 구걸한다는 인상을 주기도 싫었다. 그래서 의사는 공소를 포기한 뒤, 『동양평화론』을 저술하여 후세에 거사의 진정한 이유를 남기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마저 일제는 허락하지 않았다.
자전적 기록인 『안응칠 역사』를 끝내고, 의사는 『동양평화론』을 시작하면서 이것이 끝날 때까지 만이라도 사형 집행을 연기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일제는 이 작은 소망조차도 무시하고 사형을 집행하였고, 그에 따라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여순감옥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의사는 당초 『동양평화론』을 ①서(序) ②전감(前鑑) ③현상(現狀) ④복선(伏線) ⑤문답(問答)으로 구성하여 저술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집필 도중형 집행으로 말미암아 실제는 ‘서’와 ‘전감’의 일부만 남기게 되었다.
동양평화론』을 통해 거사의 이유를 새겨 보면 다음과 같다. 의사는 자신의 시대를 서양이 만들어 낸 생활방식인 약육강식의 시대로 이해하고, 그와 같은 생활방식에 따라 발생한 러일전쟁을 서양과 동양의 전쟁으로 인식하였다. 또한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한국 독립을 공고히 한다’고 하는 일왕의 러일전쟁의 선전포고문에 따라 청·한 두 나라 국민은 일본을 지원하여 일본의 승전을 도왔음을 거론하고 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일본은 패전하고 동양은 서양에 패하여 동양평화는 영구히 깨어졌을 것이라는 점을 환기시키면서, 이에 공헌한 청·한 두 나라 국민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청·한 두 나라 국민은 동양평화의 수호자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승전한 후 곧 약속을 파기하고, 을사조약으로 한국의 국권을 박탈하여 동양 평화를 파괴하였는데, 그 원흉이 이토오라고 보았다. 때문에 의사는 이토오가 한국의 국권을 박탈한 주범이고, 동양의 평화를 파괴한 원흉이므로 처단하였음을 천명하였다. 따라서 이토오의 처단은 사사로운 감정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한국 국권의 회복과 동양 평화의 회복을 위한 부득이한 조치임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의사가 생각한 동양 평화의 길은 어떤 것인가. 의사는 동양 평화의 길은, “첫째 일본이 우선 한국의 국권을 되돌려 주고, 둘째 만주와 청국에 대한 침략의 야욕을 버리는 것이며, 셋째 그런 다음 서로 ‘독립한’ 청국·한국·일본이 동맹하여 서양 세력을 방어하며, 서로 동맹하여 평화를 부르짖고, 서로 화합하여 개화와 진보로 나가서 구주 및 세계 각 국과 더불어 평화를 위해 진력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다시 말하면 한국의 독립과 일제의 침략 야욕 포기가 동양 평화의 선결 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져야 동양에 평화가 깃들며 서구와의 평화 공존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일제의 재판은 마침내 2월 14일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동지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등에게도 각각 징역이 언도되었다. 의사는 2천만 동포들에게 뼈에 사무치는 유언을 남긴뒤 새옷을 갈아 입고 여순감옥 현장에서 조용히 순국하시니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요. 향년은 32세라 비록 육신의 일생은 짧았으나 정신은 천추에 길이 빛날 것이다. 혈육은 준생, 현생 오누이와 손자 웅호를 끼쳤을 뿐이로되 민족 정기의 후계자는 만대에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의사가 순국한 뒤 세계사의 진행 상황을 보면 이는 참으로 빛나는 견해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제를 비롯한 국제사회는 의사의 이러한 충고를 무시했고, 그 결과는 지속적인 전쟁의 확대와 그로 인한 인류의 피해로 결판났을 뿐이었다. 이는 한국이나 일본, 동양이나 서구, 누구에게도 바람직하지 못한 역사의 전개였던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오늘날에도 의사의 사상은 새삼 되새겨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정부에서는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훈장 수여 내역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한 의사는 어려서부터 한학을 수학하고 숭무적 기상으로 무예를 연마한 문무겸전의 인물이었고, 개화 지식인이었던 근대적 사고와 천주교에 입교하여 박애주의를 가진 민족 지성이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망국의 위기가 도래하자 중국 상해로 건너가 산동지방의 한인동포들을 규합한 구국운동과 외국 선교사들의 지원을 얻어 국제사회에 일제의 침략을 널리 알리는 방식에 의한 국권회복운동을 모색하였다. 하지만 한인 유력자들과 외국 선교사들의 비협조, 그리고 부친의 별세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는 민족의 실력양성을 통한 국권 회복 운동 방략을 실천하였다. 평북 진남포에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계몽운동을 전개하고, 또 평양에 삼합의라는 광산회사를 세워 산업 진흥운동에도 힘썼다. 그리고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를 조직 국채보상운동에 정성을 쏟기도 하였다.
1907년에 일제에 의해 광무황제가 강제 퇴위되고, 정미7조약이 체결되면서 군대가 해산 당하는 등 조국의 운명은 더욱 위태해져 갔다. 국망의 위기가 점증되어 가자 국권 회복 운동 방략을 독립전쟁전략으로 바꿔갔다.
이의 실행을 위해 노령 연해주로 망명하여 최재형의 재정 지원으로 의병부대를 조직하였다. 흔히 이범윤 의병부대로 알려진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 의병부대를 이끌고 두 차례에 걸친 국내 진공작전을 수행하여 큰 전과를 올렸지만, 제2차 작전 중 만국공법에 따라 일본군 포로를 석방했다가 의병부대가 붕괴되는 등 어려움에 겪었다.
그러던 중 자신의 활동 지역에 국권 강탈의 원흉이자 동양 평화의 파괴자인 이토오 히로부미가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의 포살 계획을 추진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반경, 주도면밀한 준비 끝에 하얼빈 역에서 이토오를 처단함으로써 민족의 독립의지를 선양하고, 제국주의자들에게 경종을 울렸다.
이후 일제의 여순법정에서 사형을 받고, 1910년 3월 26일 형 집행으로 순국하기까지 『동양평화론』을 저술하여 의거의 진정한 이유를 후세에 남겼다. 정부에서는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한다.
주요 공적
·1907 사립학교를 건립, 민족교육 실시
·1908 연해주에서 의진 결성, 의군중장으로 국내 진공
·1909 단지 동맹 결성, 의열 투쟁, 침략원흉 伊藤博文 처단
·1910 옥중에서 『동양평화론』 저술 중, 사형 순국
안중근의사 법정 최후 진술
나는 검찰관의 논고를 듣고 나서 검찰관이 나를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하얼빈에서 검찰관이 올해로 다섯 살 난 나의 아이에게 내 사진을 보여주며 ‘이 사람이 네 아버지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대답했다고 말했는데, 그 아이는 내가 고국을 떠날 때 두 살이었는데 그 후 만난 적도 없는 나의 얼굴을 알고 있을 까닭이 없다. 이 일로만 미루어 봐도 검찰관의 심문이 얼마나 엉성한지, 또 얼마나 사실과 다른지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이번 거사는 개인적으로 한 것이 아니고 한일 관계와 관련해서 결행한 것이다. 그런데 사건 심리에 있어서 재판장을 비롯하여 변호인과 통역까지 일본인만으로 구성하고 있다.
나는 한국에서 변호인이 와 있으니 이 사람에게 변호를 허가하는 것이 지당하다고 생각한다. 또 변론 등도 그 요지만을 통역해서 들려주기 때문에 나는 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사람이 봐도 이 재판을 편파적이라는 비방을 면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검찰관이나 변호인의 변론을 들어 보면, 모두 이토가 통감으로서 시행한 시정 방침은 완전무결한 것이며 내가 오해하고 있다고 하지만, 이는 부당하다. 나는 오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토가 통감으로서 시행한 시정방침의 대요를 말하겠다.
1905년의 5개조 보호 조약에 대한 것이다. 이 조약은 황제를 비롯하여 한국국민 모두가 보호를 희망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토는 한국 상하의 신민과 황제의 희망으로 조약을 체결한다고 말하며 일진회(一進會)를 사주하여 그들을 운동원으로 만들고, 황제의 옥새와 총리대신의 부서가 없는데도 각 대신을 돈으로 속여 조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이토의 정책에 대해 당시 뜻있는 사람들은 크게 분개하여 유생 등은 황제에게 상주(上奏)하고 이토에게 건의했다. 러일전쟁에 대한 일본 천황의 선전조칙에는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고 한국의 독립을 공고히 한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인민들은 신뢰하며 일본과 더불어 동양에 설 것을 희망하고 있었지만, 이토의 정책은 이와 반대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래서 가장 먼저 최익현이 그 방책을 냈다가 송병준에 의해 잡혀서 쓰시마에서 구금돼 있던 중 사망했다.
그래서 제2의 의병이 일어났다. 그 후에도 방책을 냈지만 이토의 시정방침이 변경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황제의 밀사로 이상설이 헤이그의 평화회의에 가서 호소하기를, 5개조의 조약은 이토가 병력으로 체결한 것이니 만국공법에 따라 처분해 달라고 했다. 그러나 당시 그 회의에 물의가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은 성사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토는 한밤중에 칼을 뽑아 들고 황제를 협박해서 7개조의 조약을 체결시켜 황제를 폐위시켰고, 일본으로 사죄사를 보내게 되었다.
이런 상태였기 때문에 경성 부근의 상하 인민들은 분개하여 그 중에 활복한 사람도 있었지만, 인민과 군인들은 손에 닿는 대로 무기를 들고 일본 군대와 싸워 ‘경성의 변’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 후 십수만의 의병이 일어났기 때문에 태황제께서 조칙을 내리셨는데, 나라의 위급존망에 즈음하여 수수방관하는 것은 국민된 자로서의 도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국민들은 점점 격분하여 오늘날까지 일본군과 싸우고 있으며 아직도 수습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십만 이상의 한국민이 학살됐다. 그들 모두 국사에 힘쓰다가 죽었다면 본래 생각대로 된 것이지만, 모두 이토 때문에 학살된 것으로, 심한 사람은 머리를 노끈으로 꿰뚫는 등 사회를 위협하며 잔학무도하게 죽였다.
이 때문에 장교도 적지 않게 전사했다. 이토의 정책이 이와 같이 한 명을 죽이면 열명, 열 명을 죽이면 백 명의 의병이 일어나는 상황이 되어, 시정방침을 개선하지 않으면 한국의 보호는 안 되는 동시에 한일간의 전쟁은 영원히 끊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토 그는 영웅이 아니다. 간웅(奸雄)으로 간사한 꾀가 뛰어나기 때문에 그 간사로 꾀한 ‘한국의 개명은 날로 달로 나아가고 있다’고 신문에 싣게 했다. 또 일본 천황과 일본정부에 ‘한국은 원만히 다스려 날로 달로 진보하고 있다’고 속이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동포는 모두 그의 죄악을 미워하고 그를 죽이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삶을 즐기고 싶어하지 않는 자가 없으며 죽음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한국민은 수십 년 동안 도탄의 괴로움에 울고 있기 때문에 평화를 희망함은 일본국민보다도 한층 깊은 것이다. 게다가 나는 지금까지 일본의 군인, 상인, 도덕가, 기타 여러 계급의 사람과 만난 이야기는, 내가 한국에 수비대로 와 있는 군인에게 ‘이같이 해외에 와 있는데 본국에 부모처자가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러니 분명히 꿈속에서도 그들의 일은 잊혀지지 않아 괴로울 것이다.’ 라고 위로했더니, 그 군인은 ‘본군 일이 견디기 어렵지만 어쩔 수는 없다’라며 울며 말했다. 그래서 나는 ‘그러면 동양이 평화롭고 한일간에 아무 이 없기만 하면 수비대로 올 필요가 없을 것이 아니냐?’ 라고 물으니, ‘그렇다. 개인적으로는 싸움을 좋아하지 않지만 필요가 있으면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수비대로 온 이상 쉽사리 귀국할 수 없겠다’라고 했더니, 그 군인은 ‘일본에는 간신이 있어서 평화를 어지럽게 하기 때문에 우리들도 마음에 없는 이런 곳에 와 있다는 것이다. 이토 따위를 혼자서는 죽일 수 없지만 죽이고 싶은 생각이다.’라고 울면서 이야기했다. 그리고 농부와의 이야기는, 그 농부가 한국에 왔다는 당시에 만나서 한 이야기이다. 그가 말하기를 ‘한국은 농업에 적합하고 수확도 많다고 해서 왔는데, 도처에서 의병이 일어나 안심하고 일을 할 수가 없다. 또 본국으로 돌아가려고 해도 이전에는 일본도 좋았지만 지금은 전쟁 때문에 그 재원을 얻는 데 급급하여 농민들에게 세금을 많이 부과하기 때문에 농업은 하기 힘들 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에 있자니 이와 같아 우리들은 몸 둘 곳이 없다’라고 한탄하며 호소했다. 다음으로 상인과의 이야기를 말하겠다. 한국은 일본 제작품의 수요가 많다고 듣고 왔는데 앞의 농부의 이야기와 같이 도처에 의병이 있고 교통이 두절되어 살 수가 없다며, 이토를 없애지 않으면 상업도 할 수 없으니 자기 한 사람의 힘으로 되는 일이라면 죽이고는 싶지만, 어떻든 평화로워 지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도덕가의 이야기라는 것은 예수교 전도사의 이야기이다. 나는 먼저 그 자에게 말을 걸어 ‘이렇게 무고한 사람을 학살하는 일본인이 전도가 되겠는가?’라고 물으니, 그가 ‘도덕에는 나와 남의 구별이 없다. 학살하는 사람은 참으로 불쌍한 자이다. 천제의 힘으로 개선시키는 수밖에 없으니, 그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말했다. 이 사람들의 이야기에 의해서도 일본인이 동양의 평화를 희망하고 있는 동시에 얼마나 간신 이토를 미워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일본인에게도 이런데 하물며 한국인에게는 친척이나 친구를 죽인 이토를 미워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
내가 이토를 죽인 이유는 이토가 있으면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게 하고 한일간이 멀어지기 때문에 한국의 의병 중장의 자격으로 죄인을 처단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일 양국이 더 친밀해지고, 또 평화롭게 다스려지면 나아가서 오대주에도 모범이 돼 줄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결코 나는 오해하고 죽인 것은 아니다. 나의 목적을 달성할 기회를 얻기 위해 한 것이다. 따라서 이제라도 이토가 그 시정방침을 그르치고 있었다는 것을 일본 천황이 들었다면 반드시 나를 가상히 여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이후 일본 천황의 뜻에 따라 한국에 대한 시정방침을 개선한다면 한일간의 평화는 만세에 유지될 것이다. 나는 그것을 희망하고 있다. 변호인의 말에 의하면, 광무3년에 체결된 조약에 의해 한국민은 청국 내에서 치외법권을 가지니 본 건은 한국의 형법대전에 의해 다스려져야 할 것이며, 한국형법에 의하면 처벌할 규정이 없다고 했는데, 이는 부당하며 어리석은 논리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인간은 모두 법에 따라 생활하고 있는데, 현실적으로 사람을 죽인 자가 벌을 받지 않고 살아 남을 도리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법에 의해 처벌돼야 하는가의 문제가 남아 있는데, 이에 대해 나는 한국의 의병이며 지금은 적군의 포로가 돼 있으니 당연히 만국공법에 의해 처리돼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