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이스탄불을 출발한 항공기는 어느새 아나톨리아 동남부의 메소포타미아 평원 위에서 서서히 하강하고 있었다. 메소포타미아!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을 끼고 발달한 고대 문명의 발상지. 바로 그곳의 시발점을 지나고 있다는 감동이 잠시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끝없이 펼쳐지는 평원과 구릉지역엔 언뜻언뜻 작은 오아시스를 연상케 하는 마을들이 흩어져 있고, 5월 초의 따뜻한 볕으로 농사를 준비하느라 부산한 농부들의 움직임도 가끔씩 눈에 띄었다.
산리우르파(보통 우르파라 불리기도 한다)에 도착한 후 먼저 찾은 곳은 골바시라는 지역으로, 기독교의 선지자인 아브라함이 태어난 곳으로 알려져 많은 기독교인들이 성지로 찾는 곳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아브라함은 이슬람교에서도 ‘이브라힘’이라는 중요한 선지자의 한 사람으로 숭앙을 받고 있어 많은 무슬림들이 성지순례를 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특히 이곳은 시리아의 국경과 인접해 있는 지역이라 그런지 터키의 다른 지역들에 비해 이슬람의 색채가 무척 강하며 보수적이고, 이란이나 시리아 등지에서 온 순례자 여인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는데, 이들은 머리 위로부터 검은색의 완벽한 차도르를 걸쳐서 두 눈 이외는 신체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사진 한 장 찍어도 괜찮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어보자 대답 대신 그 눈마저도 소매로 얼른 가려버린다. 카메라를 들이대면 방긋 웃어주는 터키 여인들과는 너무 차이가 난다. 정말 신기한 일이다. 터키를 여행하는 내내 카메라를 거부하는 터키인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거의 보지를 못 햇기 때문이다. 이토록 한 나라의 뿌리 깊은 문화는 것은 사람들의 의식을 변하게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시리아에서 왔다는 한 젊은 여성은 검은 차도르를 두르고서도 손에는 일제 캠코더로 열심히 가족들을 찍고 있었는데, 캠코더를 든 손목에는 여러 개의 금팔찌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역시 젊은 사람들은 좀 개방적이구나 생각하면서 바라보자 눈이 마주친 그녀가 생긋 웃어보였다.
이곳은 또한 양고기 케밥으로 유명한 곳인데, 매운 고춧가루를 곁들인 구운 양고기꼬치가 일품으로, 케밥 요리사로 우르파 출신이라면 터키에서도 으뜸으로 친다고 한다. 향신료가 많이 생산되는 지역이라서 그런지 톡 쏘는 강한 향들이 후각을 자극했다. 점심과 전통적인 터키식 커피한잔을 마친 후 길을 나섰다. 쌀쌀했던 아침과 달리 한 낮의 햇살은 따갑기 그지없었다.
우르파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구경거리의 또 하나는 바로 구시가의 바자르이다. 이곳은 오스만투르크시대, 그러니까 6백 여 년 전에 시장을 목적으로 지어진 육중한 석조 건물로 내부에는 양탄자와 양가죽, 비단, 금은세공, 그릇가게, 옷가게, 가구점 등 상점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는데, 일반적인 재래시장의 풍경과 달리 고색창연한 분위기와 독특한 소란스러움이 있는 재미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곳을 찾는 관광객은 그리 많지 않은지 안내하는 한국인가이드나 이스탄불에서 동행한 현지인 가이드나 전혀 알지 못해서 길을 지나가던 우르파의 현지인 아이에게 팁을 주고 안내를 부탁해서 겨우 구경하게 되었다. 시장으로 이어지는 좁은 골목에는 넓은 뜰에서 남자들만 모여앉아 차를 마시는 광경이 눈에 띄어 물어보니, 이곳은 남자들만 모여서 차를 마시는 일종의 남성전용 클럽인 셈이었다. 그러고 보니 터키에는, 특히 지방의 작은 도시나 마을을 지나노라면 이렇게 남자들만 모여 담소를 나누는 곳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여자들은 출입이 금지된다고 하는데, 우리 일행 중에 여성들이 있는데도 장난삼아 잠시 들어가 구경해도 되느냐고 했더니, 뜻밖에도 활짝 웃으며 어서 들어오라고 권했다. 차까지 갖다 주면서, 잘 통하지도 않는 말로 어디서 왔느냐, 예쁘다, 사진 한 장 찍어 달라 등 등 무척 수다스럽긴 했지만 정말 정이 철철 넘치는 사람들이었다. 정말이지 터키 사람들은 대부분 친절하고 따뜻하다. 지방일수록 더하다. 아무 집이나 무턱대고 들어가도 조건 없이 차 한잔 대접할줄 안다.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활짝 웃는다. 여행하는 내내 경험한 일이었다. 대접하는 차 한잔을 사양하지 못해 마시느라 시간보다 지체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우리도 옛날엔 정말 저랬을까...낮 모르는 이방인이 함부로 집에 들어와도 차 한잔을 대접했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내일 새벽에 넴루트의 정상으로 가기 위해 오늘은 카흐타에서 숙박해야 하므로 열심히 길을 달렷다. 도중에 아타투르크 댐을 잠시 구경했는데, 24기가와트의 전력을 생산한다는 이 댐은 규모로 보면 이집트의 아스완댐에 이어 세계 2위에 올라있다고 한다. 규모도 대단했지만 유프라테스의 강물은 정말 푸르고 맑구나 하는 부러움이 드는 것은 갑자기 웬일이람! 한강물의 탁하고 누런 빛깔을 보다가 지중해의 바다 빛깔과 같은 코발트빛의 강물을 보니까 그 생각이 먼저 든다. 강물이 어떻게 이런 색깔을 낸담....하지만 이 댐은 터키의 전력공급문제를 떠나 중동전체의 평화와 직결될 만큼 중요한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바로 유프라테스 강 자체 때문인데, 이 강은 터키 동부의 아르메니아 고원에서 발원해서 시리아를 거쳐 페르시아만으로 흘러들어가는 서아시아 최대의 강으로 길이는 2천 8백 키로미터. 문제는 터키에서 댐을 막아 수량을 조절하기 때문에 시리아로서는 답답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가뭄이 심해지면 터키에서도 모자라는 물을 시리아로 내려 보내줄지...생각만 해도 걱정스럽다. 자..이런 건 정치하는 사람들이 알아서 할 일이고.
오늘의 목적지 카흐타는 작은 시골 동네였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해서 저녁식사 때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있어 시장터로 나갔다. 작은 동네답게 잎담배를 파는 노점상들과 과일, 야채 파는 리어카, 잡다한 옷과 산발가게들이 있었는데, 재미나는 것은 이런 동네에 동양 사람들이 구경을 왔다는 게 신기했는지 사람들이 빼곡히 모여 물건 살 생각은 안하고 우리만 구경하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졸졸 따라다니며 하나같이 “What's your name?"을 연발한다. 이름을 가르쳐주고 ”네 이름은?“하고 물으면 자기 이름을 대면서 즐거워 야단이다. 고추와 땅콩을 파는 사나이는 하나씩 건네면서 먹어보라고 권한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오이보다도 훨씬 길다란 풋고추를 하나 입에 넣고 씹어보니 보기와는 달리 무척이나 연하고 아삭거리며 맛이 있었다. 고추가 맛이 있다고 느낀 건 생전 처음이었다. 우리 일행 모두가 그렇게 느꼈다. 우리 돈으로 오백원 어치를 사니 한 아름을 준다. 호텔에서 깨끗이 씻어 테이블에 놓고 현지음식이랑 같이 먹으니 너무 잘 어울리고 근사했을 뿐 아니라 가져가 고추장에 찍어 먹어보니 이건 앙드레김 표현대로 정말 ”판타스틱“ 그 자체였다. 이 때부터 10여 일간 여행하는 거의 내내 풋고추가 우리의 식탁을 따라다니게 되었다.
이튿날 새벽 두시에 일어난 일행은 정각 세시에 호텔을 나섰다. 엊저녁엔 비가 많이 와서 무척 걱정을 했었다. 날씨 때문에 일출을 보기는 다 글럿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비가 그치더라도 구름이 많으면 허사이기 때문이다. 넴루트 정상의 일출이 그렇게 장관이라던데....그런데 밖을 나서자 하늘에는 둥근 달과 별들이 우리들을 향해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게 아닌가.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어둠속의 가파른 산길을 커다란 보름달이 계곡의 윤곽을 보여주고 있었다. 미제 밴은 털털거리는 길을 잘도 달려 올라갔다. 5월 초에는 사실 넴루트의 정상에 일출을 보러 올라가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나보다. 눈도 안 녹았을 수도 있고...그래서 그런지 가이드북에는 6월 초부터 올라갈 수 있다고 적혀있고 지금은 올라가는 관광객도 거의 없다고 한다.
이윽고 차는 멈추고 아직 잠도 덜 깬 산장에서 차 한잔을 마시고는 정상에 있는 안티오쿠스 1세의 무덤까지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바람이 장난이 아니다. 매서운 강풍이 옷 속을 파고들었다. 몸을 숨길 곳이라곤 돌 제단 옆. 손이 곱아서 카메라 셔터가 잘 안 눌러진다. 삼각대가 바람에 휘청거려서 카메라를 받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잠시 후 해가 뜨면서 무덤 주위의 거대한 석상 조각들이 붉은 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면서 산 아래는 아데야만 평원의 거대한 파노라마가 서서히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타우루스 산맥의 남동쪽 능선 중 가장 높은 봉우리들 중 하나인 이 넴루트 산은 소아시아 반도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통틀어 아주 흥미로운 고고학적 유적지로 산 정상에 인공으로 50m 높이의 능을 쌓아 올렸기 때문에 해발 2,150m산이 되었는데, 사람의 머리통만한 잘 다듬은 돌이 능의 테두리를 둘러싸고 있으며, 주먹만한 돌들이 능 전체를 뒤덮고 있다. 이 능은 넓이가 1150㎡ 로서 하나의 거대한 돌무덤을 연상시키는데 그 속에 석관과 보물들이 들어있다고 한다.
이 거대한 유적은 콤마게네 왕조의 전성기 통치자 안티오쿠스 1세에 의해 BC 1세기에 건설되었는데, 겨우 100여 년 전에서야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능의 동. 서. 그리고 북쪽에는 잘 다듬은 돌들로 테라스가 만들어져 있고, 이들 중 동.서 양쪽에는 각각 7개의 거대한 신상의 좌상이 놓여져 있다. 이들 좌상은 콤마게네 인들의 주요 신과 안티오쿠스 1세 자신의 것인데 각 옥좌의 높이는 8-9m에 이른다. 이들 좌상의 머리부분은 모두 땅에 떨어져 있고 그 중 두개의 좌상은 쓰러져 있다. 2천 년 전에 이러한 거대한 건축을 이렇게 높은 곳에 조성해 놓을 수 있다는 것이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넴루트의 정상 구경을 하고 콤마게네 왕조의 다른 유적들을 보면서 하산...날씨는 그야말로 환상 그 자체였다. 맑고 쾌적한 기운이 폐부에 가득찼다. 멀리 유프라테스 강이 은빛 뱀처럼 꿈틀거렸다.
자, 그럼 또 떠나가야지...우리는 나그네니까. 다음 목적지는 시바스. 내일 보아즈칼레라 불리는 곳으로 가기 위해 하룻밤 머물 곳이다.
시바스는 주위에 그리 볼 것은 많지 않지만 한 눈에 깊은 역사를 지닌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셀주크양식의 고색창연한 모스크와 구시가의 광장. 그리고 마치 독일 어디의 고성가도를 지나면서 볼 수 있을법한 고풍스런 집들과 거리가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제일 좋다는 호텔에 묵었는데, 수십 년 전에 지어진 건물이라 그런지 방은 휑하면서 썰렁하고 방음은 물론 난방도 안돼는, 한마디로 그다지 좋지 못했다. 하지만 호텔 외벽의 모자이크는 가히 예술적이라 할 정도로 아름답고 이채로웠으며 호텔 꼭대기의 식당 겸 라운지가 흥미로웠다. 식사하는 내내 터키 전통음악을 연주하고 노래하는데, 연주가 끝난 뒤 약간의 팁으로 성의를 표하자 우리만 쳐다보며 흥겹게 계속하는 것이었다. 터키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악기로 연주하는데, 선율이 너무 곱고 애잔해서 그저 듣고만 있어도 눈물이 나올 것만 같은 아름다운 곡이다. 포르투갈의 애절한 음악 ‘파두’가 연상되었다.. 와인을 곁들인 이곳의 식사는 인상적이었는데, 이곳 역시 셀주크의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이슬람 도시라서 술을 파는 곳은 이 호텔 밖에는 없었다.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웨이터가 와인 한 병이랑 안주를 가져오는 것이었다. 이거 서비스냐고 물어보니까 그게 아니고 저 쪽 테이블에 않은 은행가가 우리에게 보내주는 것이라고 한다. 놀라서 그쪽을 쳐다보니 인심 좋게 생긴 퉁퉁한 신사가 웃으면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참...이 사람들 진짜 인심도 좋다. 대표로 테이블에 다가가 인사를 청하니 명함을 건네주는데 앙카라의 어느 은행의 부행장이라고 적혀있다. 한국에서 왔다고 밝히자 오랜 친구 보듯 잡은 손을 놓지 않고 계속 터키말로 뭐라 이야기 하는데 그저 애가 할 수 있는 답이라곤 “오케이, 땡큐” 밖에는 없었다. 라운지는 문을 닫았고 잠이 안 오는 것 같아 포도주 한 병을 사려했으나 세븐일레븐같은 편의점은 눈을 씻고 봐도 없고 몇 군데 늦게까지 문을 연 가게나 식당에서도 알코홀 종류는 일체 없었다. 이렇듯 아직도 터키의 몇몇 지방은 이슬람의 색채가 무척 두텁게 깔린 곳이 많다. 또 하루가 저물었다.
아침 7시. 이른 아침에 호텔을 나섰다. 한 두 방울씩 떨어지던 빗방울이 시간을 더해가면서 굵은 빗줄기로 바뀌고, 급기야 와이퍼가 쉴 새 없이 움직여야 할 정도로 퍼붓기 시작했다. 답답한 일이었다. 오늘 일정은 기원 전 페르시아제국 이전의 막강한 제국이었던 히타이트제국의 수도 보아즈칼레를 돌아보고 다시 남쪽의 카파도키아로 이동하는 것인데, 이렇게 빗속에서 어떻게 구경을 해야 할지 마냥 갑갑하기만 하였다. 차창 밖으로는 우르파에 보았던 종려나무 대신 길다랗게 솟아있는 포플러 숲이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터키 동남부에서 시작하여 중부로 이동하면서 기후와 환경이 달라져가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미국 뉴욕에 있는 유엔 총회장에 들어가면 오른쪽 벽에 히타이트와 이집트 사이의 평화 조약문이 전시되어 있는데, 설형문자로 쓰여진 이 조약문은 인류 역사상 평화 조약문으로서는 인류사상 최초의 것이라는 것이 고고학자들에 의해 증명된 것은 지금부터 불과 100여년 밖에 되지 않는다. 원래 기마술과 전차의 나라로 알려진 히타이트족은 세계사에서는 하나의 전설에 불과한 민족이었는데, 20세기 초 이집트의 파라오와 히타이트족의 왕 사이에 체결된 평화 조약문이 발견된 후부터 이들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활기를 띠게 된 것이다. 이들은 기원전 2천년 경 지금 가는 보아즈칼레를 중심으로 정착한 인도 유럽어를 사용하는 민족이었고, 아나톨리아 지방 정복을 통해 자신들의 제국을 확장해 나갔다. 카파도키아의 화려한 고대 지하 도시를 건설했던 사람들 역시 이들이라는 추측이 있다. 이곳에서 히타이트인들의 고대 유적이 발견되고, 이곳에 묻혀 있던 점토판 문서의 해독 결과 당시에 상당한 과학 문명이 발달하였음이 확인되었다. 또한 이들은 당시 세계 최강을 자랑했던 바빌로니아를 멸망시켰을 정도로 강성하였으며 오리엔트를 주름잡던 이집트의 파라오 람세스 2세와 싸워 그 군대를 크게 무찌르기도 했다.
이들은 전차와 역사상 처음으로 철을 성공적으로 무기로 이용한 민족이었다. 그들은 한때 시리아에 있던 여러 소국을 멸망시키고, 수도에 견고한 성벽을 쌓는 등 히타이트 왕국을 큰 제국으로 발전시키기도 했다. 그러던 제국은 기원전 1200년께 갑자기 해양민족들의 침입을 받아 멸망한다.
하투샤를 거쳐 보아즈칼레에 도착하자 거짓말처럼 비가 멎고 하늘이 활짝 개었다. 파란 하늘이 군데군데 뭉게구름을 피우며 일행을 맞았다. 걱정은 기우가 되고 말았다. 넓은 구릉 위에 자리한 히타이트의 유적들 중 남은 것은 주춧돌과 견고하게 축조한 성곽, 궁궐터와 신전 터, 그리고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몇 개의 부조가 고작이어서 막강했던 제국의 면모를 추슬러보기엔 고도의 상상력이 필요할 지경이었지만 박식한 안내인 덕택에 나름대로 뜻 깊은 방문이 되었다. 유적 바로 옆에는 작은 마을이 있었는데, 이곳 아낙네들이 머리엔 수건을 쓰고 몸뻬를 입고는 밭에서 나물을 캐고 있는 모습이 우리네 농촌의 아낙들을 보는 것 같아 정겨웠다.
카파도키아로 가는 길은 광활한 농토와 가끔씩 눈에 띄는 양떼무리, 방풍림으로 심어 놓은 포플러의 숲, 그리고 시골 마을들이었다. 도중에 잠시 들른 어느 마을에서는 일행을 보려고 동네사람들이 모두 나온 것 같았다. 웃고 포즈를 취하기도 하고 차 한잔을 권하는 이들의 해맑은 웃음들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해가 길어서인지 카파도키아에 도착해서도 해가 있었다. 저녁 8시가 넘었는데도...
새벽에 일어나 열기구를 타기 위해 호텔을 나섰다. 열기구는 예전에 아프리카 케냐에서 타 본적이 있었는데, 그곳에선 공중에서 동물들의 이동하는 모습과 끝없이 펼쳐진 초원과 멀리 킬리만자로가 보였는데 이곳에선 무엇이 보일지 자못 궁금했다. 우리가 탄 기구는 공간이 넷으로 나뉘어져 한 공간에 다섯 명씩 타는 바람에 무척 불편했다. 공중에 올라가서 내려다 본 카파도키아의 파노라마는 정말 근사했다.
수백만 년 전에 원래 화산에 의해 이루어졌던 카파도키아의 지형은 세월의 흐름과 비바람에 의한 침식 작용으로 오늘날과 같은 특이한 형태의 바위와 계곡들로 이루어진 대자연의 작품이 되어버렸다. 처음 화산이 일어나기 전에는 강도가 약한 사암으로 되어 있었는데, 화산에 의해 강도가 강한 검은 용암이 뒤덮여 졌던 것이 오랜 세월의 풍화작용으로 깎이고 다듬어져 전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특수한 경치를 이 카파도키아에 선사한 것이다. 경치도 경치려니와 조금만 파들어 가면 쉽게 공간을 만들 수 있고, 만들어진 공간의 벽이 공기를 접하게 되면 돌처럼 견고해지는 석회암의 특수한 성질 때문에 그 옛날 사람들이 동국을 곳곳에 파서 살았고 그 살았던 곳들이 마치 비둘기 집처럼 보였다. 경치구경은 좋았는데 열기구를 올리고 내리기위해 조종사가 개스 불을 켤 때마다 뒤통수가 얼마나 뜨겁던지 나중에는 정신이 혼미할 정도였다. 열기구를 탈 때는 반드시 방염 모자를 준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아침을 먹고는 문자 그대로 기암괴석이 즐비한 파샤바 계곡과 데브렌트 계곡, 그리고 히타인들에의해 조성되기 시작했다는 지하도시, 그리고 괴레메의 야외박물관들을 하루 종일 돌아보았다.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하고 낮에는 무척이나 뜨거운 전형적인 사막기후를 띄고 있는 이 지역은 한 낮에는 눈 뜨기 어려울 정도로 강한 햇빛과 지열 때문에 여행이 고통스럽지만 저녁만 되면 무척 선선해진다. 아바노스라는 마을은 도자기로 유명한데, 이곳 도자기는 문양이 무척 정교하고 아름다워 1백 달러가 넘는 거금을 투자해 벽에 걸어 놓을만한 것으로 하나 장만했다. 집 거실에 걸어놓고 보니 잘 샀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 봐도 근사하다.
호텔로 돌아오는 도중에 카파도키아에서는 가장 크다는 재래시장이 있어 잠시 들렀다. 시장은 언제나 사람냄새가 나서 좋다. 대개의 재래시장이 그렇듯 터키의 시장도 무척이나 서민적이지만 활기차고 분주하다. 이곳에서도 풋고추를 넉넉한 부대 하나를 샀다. 이번 여행에서는 맛있는 풋고추를 실컷 먹어보리라. 농산물 값은 무척 싼 것 같았다. 우리나라에선 감자 한 개에 천원이 넘었던가? 이곳에선 한 자루에 우리돈 3천원 밖에 안하니....그런데 이곳도 농산물 외에 다른 생필품은 중국산이 많이 들어와 활개를 치고 있었다. 심지어 전통 빵으로 밀가루를 반죽해서 얇게 펴는데 사용하는 둥근 나무막대도 모두 중국산이 수입되고 신발, 그릇, 전자제품도 모두 중국제. 오히려 터키 상품을 찾기가 더 어려웠다.
안탈리야의 아침은 너무나 쾌적했다. 절벽에 자리 잡은 호텔의 위치적인 장점도 있었겠지만 탁트인 지중해의 코발트색 바다와 이슬을 머금은 듯한 맑은 햇살, 멀리 보이는 타우루스 산맥의 아직도 녹지 않은 눈을 머금은 봉우리들, 가슴 깊이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 카파도키아의 삭막함과는 전혀 다른, 풍요로움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커피 한잔을 해변가의 호텔식당에서 들고 나와 절벽의 오솔길을 거닐면서 생각했다. 어제 하루 종일 카파도키아에서 달려 온 보람이 있었다. 그래. 이곳에 온 것도 잘한 선택이었지만 이곳에서 이틀 밤을 자기로 한 것은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 산다는 것이 이런 맛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딱히 꼬집을 순 없지만 아름다운 풍광과 맛있는 음식과 커피 한잔과 담배 한대를 피우는 이 순간이 무척 소중하고 행복하게 느껴졌다.
기원전 1세기 페르가몬의 왕 아탈루스는 신하들에게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을 발견할 것을 명하고 오랜 기간에 걸쳐 발견된 이곳을 왕은 이 곳을 Attaleia라 이름 지었다. 그 후 로마인들이 페르가몬 왕국을 지배하게 되고 AD 13세기에 로마의 황제 하드리안이 이 곳을 다녀가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셀주크 투르크가 1207년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아달랴(Adalya)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려지다가 지금의 안탈리야로 바뀌게 된 것이라고 한다.
먼저 페르게의 유적을 방문했다. 성경에는 버가로 표기된 페르게는 안탈리야에서 동쪽으로 16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이 도시는 성벽을 쌓지 않았으므로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쉽게 정복되었고 그 후 셀레시드 왕조 때 처음으로 요새를 구축하여 번성하였는데, 그 시대에 세워졌던 파수 탑들이 오늘날에는 거의 원래의 높이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극장, 경기장, 목욕탕 등 기둥이 줄을 이은 거리가 남아있다. 이 중 경기장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잘 보존된 경기장 중의 하나이며, 이 경기장 바깥쪽으로 면하고 있는 30개의 방 들 중 20개는 상점으로 사용되었고, 벽에 새겨진 글자는 그들의 거래품목과 상점의 주인이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 페르게는 유명한 수학학자 아폴로니우스(Appollonius 250-220 BC)와 철학자 바루스(Varus AD 2C)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아침 일찍이라 우리가 가장 먼저 도착해서 조용한 가운에 유적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 진한 빨간색의 야생 양귀비들이 햇빛에 반짝이며 하늘거린다.
페르게의 방문을 끝내고 다시 아스펜도스로 이동했다. 안탈리야의 동쪽 45km 지점에 위치한 이곳은 로마시대에 해군기지로 사용되었던 도시이다. 기원전 5세기에는 시데와 더불어 은 동전을 주조할 권리를 가진 유일한 도시였다, 이곳에서 2세기에 세워진 1만5천석의 우아한 원형극장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이 지방 출신의 젊은 건축가 제논(Xenon)에 의해 건축되었는데, 그의 완벽한 음향효과를 창출해내는 방식은 현재까지도 알아내지 못했는데, 이를테면 극장 윗부분의 오케스트라 석에서 동전 하나를 떨어트리면 모든 객석에서 그 소리를 똑같이 명백하게 들을 수 있다. 반원형의 객석 가장 윗부분에는 아치의 회랑을 만들어 무대에서 나는 어떤 작은 소리도 놓치지 않고 객석 가장 뒤까지 전달되도록, 그리고 음향이 입체적으로 반향되어 돌아오도록 완벽하게 설계되었다. 셀주크투르크가 13세기에 이 극장을 숙소로 사용했을 때 북쪽 날개부분을 전형적인 이슬람식 아치로 보강했다. 극장 뒤로는 아크로폴리스, 아고라(시장터), 가장 잘 보존된 로마시대의 수로가 남아있다. 극장에서 그냥 구경만하다 나오기가 너무 아쉬워서 한곡(?) 뽑았다. 파바로티의‘무정한 마음’을 시작했는데, 중간에 가사를 잊어버려 쑥스럽게 중단했다. 그래도 외국 관광객들이 박수를 치며 ‘덕택에 이 극장의 음향효과가 완벽하다는 것을 실감했다’면서 한마디씩 하고 지나갔다. 역시 서양인들은 칭찬에 인색하지 않다.
안탈리야로 돌아오기 전에 로마시대의 수로 부근 마을에서 잔치가 벌어지는 것이 보여 잠시 방문해 보기로 했다. 다름 아닌 결혼식 피로연이었는데, 신기한 것은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따로 모여서 파티를 즐기는 것이다. 음악을 연주하는 악사도 따로 있다. 아무튼 소박한 농가의 결혼잔치였지만 이웃과 친척들이 함께 정겨움을 나누는 따뜻하고 유쾌한 잔치처럼 보였다. 우리가 다가가자 차와 과일을 의자와 함께 권하며 같이 춤을 추자고 손을 잡아 이끈다.
저녁에는 우리가 묵는 호텔에서도 결혼식 피로연이 있었다. 낮에 본 결혼식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터키에서도 제법 잘 사는 부잣집 결혼식이 틀림없었다. 웨딩드레스를 곱게 차려입은 신부와 턱시도를 입은 신랑이 하객들 사이로 돌아가면서 축하를 받는데, 재미있는 것은 우리처럼 축의금을 따로 받는 것이 아니라 하객들이 신랑이나 신부의 가슴에 돈을 핀으로 달아주거나, 반지, 팔찌나 목걸이 또는 시계를 채워주거나 돈 봉투를 신랑의 안주머니에 넣어주는 것이다. 당연히 나중에는 목걸이나 팔찌가 여러 개가 목이나 팔목에 걸려있게 된다. 하객들과의 개별적인 인사가 다 끝나면 파티의상으로 다시 갈아입고 춤을 추면서 어울려 노는 것으로 피로연이 끝나게 된다. 이렇게 귀금속을 채워주는 풍습은 터키에서나 볼 수 있는 재미있는 전통으로 우리보다는 훨씬 끈끈한 유대감을 갖게 하는 것 같아 보기가 좋았다.
안탈리야에서 파묵칼레까지는 5시간이 걸려 정오가 다 되어서야 파묵칼레 언덕의 입구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 백색의 언덕에는 매우 특이한 온천수가 위로부터 흘러내리고 있는데, 유황온천수에 석회성분이 듬뿍 베어있는 온천수에 의해 수천 년 동안 석회성분이 퇴적에 퇴적을 거듭하여 거대한 석회 붕을 형성하게 되었고 층층이 테라스 모양의 순백색 천연 욕조를 만들어 놓아 특이한 광경을 연출한다. 이 파묵칼레는 '솜의 성'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마치 하얀 솜으로 지어진 거대한 성을 연상하여 이렇게 부르게 된 모양이다. 이곳에는 특유의 자연환경과 함께 고대로부터 발전해온 하나의 폴리스가 있는데 이름하여 히에라폴리스. 히에라폴리스는 헬라어로 '신전의 도시'라는 의미로서 최초로 이 지역에 도시를 건설한 군주인 페르가몬 왕국의 유메네스왕이 페르가몬의 창건자 텔레포스의 아내 히에라를 기념하기 위해 이 도시를 히에라폴리스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폴리스들을 방문해보면 대부분 남아있는 유적들은 아크로폴리스의 대리석 기둥들과 도로, 공회당, 그리고 야외 극장이 고작인데 이곳에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볼거리가 두 가지 더 있었는데, 하나는 거대한 목욕탕이고 다른 하나는 공동묘지다. 이곳의 대중 목욕탕은 여러 칸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온천물에 몸을 담글 수 있도록 된 공중 탕과 스팀으로 사우나를 할 수 있는 방, 그리고 노예로 하여금 때를 밀게 했던 방 등이 있었다. 당시에는 비누나 때타월이 없었으므로 때를 밀 때는 석회 가루를 재와 섞어 사용했다고 한다. 이미 수 천년 전부터 요즈음도 찾아보기 어려운 완벽한 시설의 대욕장이 있었다는 것이 놀라울뿐...
이곳은 보통 목욕탕이 아니라 온천물을 이용한 질병의 치료를 위해 찾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주로 피부병 치료를 위해 찾아오는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심각한 정신질환과 심지어는 임포텐스의 치료를 위해 터키 전역은 물론 그리스나 로마, 혹은 중동 지방으로부터도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어 며칠이나 몇 년을 이곳에 묵으며 치료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치료를 마치고 돌아갔지만 중병을 앓던 사람들은 이곳에서 사망하게 되었고 그 숫자도 나날이 늘어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아크로폴리스와 멀리 떨어져 있던 공동묘지가 늘어나는 사망자의 숫자를 감당하지 못하고 확장되면서 나중에는 아크로폴리스와 달라붙게 되었다.
이 공동묘지는 '네크로폴리스'라 불렸는데 이것은 '죽은 자의 도시'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곳에는 지금도 수많은 크고 작은 석관(石棺)들이 넓은 지역에 걸쳐 지진으로 인해 뚜껑이 열리거나 파손된 채 널브러져 있는데, 이 석관들은 그저 해안 가의 돌로 만든 것으로부터 그리스나 로마의 고급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것들이 있어 당시의 빈부의 차이를 엿볼 수도 있다. 이 석관들이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 후 6세기에 걸쳐 있었던 것으로 보아 예나 지금이나 빈부의 차이는 무덤에서까지도 그 차이를 보인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이곳의 야외극장 역시 수용인원이 1만 5천명이었으며, 공기를 넣은 토기로 객석의 꼭대기 부분을 장식함으로서 무대에서의 소리가 박력 있게 반항될 수 있도록 음향시설을 갖추는 등 이곳을 찾는 시민들의 여흥을 위한 시설물을 보면서 당시의 이곳 히에라폴리스가 얼마나 온천 휴양지로서 각광을 받았는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저녁식사 후에 호텔온천에서 목욕을 하면서 그 옛날 화려했던 히에라폴리스의 영광을 잠시 상상해본다...
오늘은 아침 일찍 서둘러 6시 반이라는 이른 시각에 호텔을 출발했다. 갈 곳이 멀기 때문이다. 서북쪽으로 올라가다 사데의 유적을 방문한 후 더 북쪽에 위치한 페르가몬왕국의 유적을 답사한 다음, 에게해를 따라 다시 내려와 이즈밀을 거쳐 쿠샤다스라는 해변의 도시에서 숙박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말 장거리 여행이고 바쁜 일정이다. 하지만 여정도 후반기에 접어들었고, 하나라도 더 봐야겠다는 욕심도 있고해서 기꺼이 일찍 호텔을 나서게 된 것이다. 사데까지 가는 길목은 끝없이 포도밭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 콘야에서 안탈리야까지 오는 길은 살구밭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드넓은 터키의 평원에는 부러울 정도로 여러 가지 농작물이 대규모로 재배되고 있었다. 심지어 합법적으로 양귀비를 재배하는 지역도 있었다. 이곳엔 양귀비가 5월에 피는구나....전에 라오스를 여행할 때는 양귀비가 1월에 피었었는데...
페르가몬 왕국의 본거지인 베르가마에서 처음으로 간 곳은 아스클레피온이라는 기원전의 의과대학, 또는 일종의 치료센터였다. 이곳에는 하드리안 황제시대 만들어진 양쪽에 기둥이 늘어선 화려한 대리석 도로가 있는데, 환자들은 아스클레피온에 들어오면 우선 맨발로 이 길의 대리석 바닥을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걸어 들어온다. 이 과정이 벌써 치료의 시작이다. 죽음의 신인 하데스로부터 멀어지고 건강의 신인 아스클레피우스신에게 가까이 간다는 믿음 때문에 안도감을 갖게 된다. 그리고는 정원 한 가운데서 흘러나오는 샘물로 목욕을 하는데 지금도 흐르고 있는 이 물의 성분을 조사한 결과 치료에 도움이 되는 방사능 성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음이 판명되었다고 한다. 목욕이 끝나면 환자는 지하터널을 통해 치료실로 들어가는데 80m 길이의 이 지하터널은 매우 조용하고 어두우며, 샘물에서 물이 지하터널의 입구 계단을 따라 흘러들어 오면서 작은 소리를 냄으로써 신비로운 분위기가 연출된다. 또한 터널의 천정에 나있는 작은 구멍을 통해 의사들이 작은 소리로 환자들에게 속삭이며 생의 의욕을 불어 넣어주었다고 한다. 당시 이곳에 온 환자들은 1백퍼센트 완치되어 퇴원했다고 하는데 재미있는 것은 치려할 수 없는 환자는 아예 받지 않았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미국 의학 협회와 같은 의학 관련 마크를 보면 뱀이 막대를 휘감고 올라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뱀은 치료의 신 아스클레피우스를 상징하는 것으로 바로 이곳에서 유래된 것이다. 입구에 들어서 대리석 길이 끝나는 곳에는 아스클레피우스, 즉 뱀의 형상이 부조 되어있다.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도 이곳에서 출생했다고 한다.
꽤나 높고 가파른 산 위에 있는 페르가몬의 아크로폴리스를 방문한 후 에게해의 도시 쿠샤다스로 돌아온 것은 저녁 7시가 넘어서였다. 참, 베르가마에서는 석류 엑기스를 몇 병 샀었다. 그러고 보니 이란 못지않게 터키에도 석류를 많이 재배한다.
이튿날, 에게해에서 가장 유명한 유적지 에페스로 향했다. 그 전에 먼저 사도 요한과 함께 피신했다는 성모마리아의 집, 지금은 작은 예배당으로 일년 내내 수많은 순례자로 붐비는 곳인데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너무 평화롭고 조용했다. 역시 조금만 일찍 서둘러 호텔을 나서면 이렇게 쾌적하게 여행을 즐길 수 있다니까.
에페스, 또는 에페수스는 기원전 13세기경 히타이트의 비문에 Apasas 라고 불렸던 도시. 하지만 역사에 자주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은 리디아왕국의 크로수스왕이 기원전 560년 에 처음으로 이 도시를 침략하면서이다. 그 후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기 시작하면서 페르시아와 그리스사이의 각축장으로 변해 때로는 파괴되고, 때로는 융성하면서 영고성쇠를 거듭했다. 즉,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의 유명한 델로스동맹이나, 그리이스의 도시국가와 페르시아간의 펠레폰네소스전쟁도 당시 에페스가 위치한 지중해 연안을 중심으로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용돌이 속의 에페스도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으로 평온을 되찾고 융성하기 시작했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에는 그의 장군 중에 한 사람이었던 리시마쿠스가 이곳을 지배하면서 피온산 기슭에 새로운 도시의 건설을 명하게 되는데,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유적은 바로 이 시대 때부터의 유적이다. 그 후 로마가 지배하면서 아시아의 수도를 페르가몬에서 이 에페스로 옮기고 도시를 아름답게 꾸며 나갔다. 안토니우스가 그의 정적 옥타비아누스와 대치하던 중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이곳에 머물기도 했다. 이곳에는 당시의 학교, 체육관, 목욕탕을 비롯해서 지금도 거의 완벽한 모습으로 남아있는 도서관의 전면, 터키에서는 가장 크다는 야외 원형극장을 비롯해 심지어는 성인 전용장소까지 있었다는 흔적을 볼 수 있다.
에페스의 유적을 방문하고는 사도 요한의 교회와 고대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아르테미스 신전터를 본 후 이즈밀로 달려 국내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피곤함과 졸음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이스탄불에 도착한 일행은 구시가지의 그랜드바자르에서 자유시간을 가진 뒤 호텔에 투숙했다. 이번 여정의 마지막 종점인 동시에 시발점이었던 이스탄불. 동서양의 교차점으로 그리스, 로마는 물론 비잔틴과 아랍문화가 공존하는 영광과 영욕의 도시다. 내일과 모레까지 이틀동안 많은 것을 보게될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쉽사리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스탄불은 '이슬람의 도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AD 4세기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 이곳으로 수도를 옮겨 자신의 이름을 따 '콘스탄티노플'이라 칭하고 동로마제국의 수도로서 천년을 이어오다가 14세기 오스만투르크의 술탄 메흐메트 2세에게 정복당한 후 수도로 결정되면서 이스탄불이라 명명하게 되었다. 이스탄불은 고대의 미케네인에 의해 세워졌던 비잔티움이라는 아크로폴리스가 건설됨으로서 역사에 등장하게 되었으며, 이후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제왕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가 페르시아가 멸망하자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식민지가 되었고 기원전 330년경에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의 지배도 받게 된다. 이스탄불은 한마디로 기원전의 헬레니즘 문화에서 시작되어 로마의 문화에 이슬람의 문화가 덧씌워지며 발전과 변화를 거듭한 불가사의한 문화의 전개를 보여주는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오늘 이스탄불의 첫 방문코스는 블루모스크. 실내 장식에 푸른색의 타일을 사용하였다 하여 블루모스크라고 불리는 이 이슬람 사원은 술탄 아흐멧 1세가 당시 유럽 최대의 건축물이었던 소피아성당과 버금가는 모스크를 짓기 위해 건축하였으며, 술탄들은 종교적인 중요한 선언 시에 이 모스크를 이용하였고, 종교휴일의 축제를 가졌으며, 메카로의 성지순례 출발점이 되었다.
블루모스크 맞은편에 위치한 성 소피아 대성당은 비잔틴 문화의 최고 건축물로 기록되고 있는데, 아야 소피아(Aya Sophia)라는 현지어로 불리는 이 성당은 현재 소피아 박물관으로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돔 양식의 건축물은 소피아 성당이 최초였으며, 이후 이스탄불의 주요 사원은 모두 소피아 사원 양식을 모방하게 된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소피아 성당은 중앙에 있는 황금으로 덮어 찬란하게 빛나는 황제의 문과, 금으로 된 천장의 화려한 모자이크, 중앙 돔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 창문으로 햇살이 스며들면 더욱 찬란하게 미소 짓는 예수의 얼굴 모자이크, 그리고 정교한 코린트식으로 장식된 측면 원형의 기둥과, 황금의 제기가 있는 화려한 성당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재 박물관으로 되어 있는 소피아 대성당은 건축의 웅장함이 주는 장중함 뿐, 내부는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것은 제4차 십자군 전쟁 때 이스탄불에 입성한 십자군 대장 단도로가 성당 안에 있는 집기를 모두 약탈하고, 여인을 불러 주연을 즐기는 등, 소피아 사원을 쑥대밭으로 만드는가 하면, 황제의 문에 있는 금도 모두 벗겨 냈다. 이후 오스만튀르크의 정복 왕 술탄 메흐메트가 소피아 성당에 왔을 때 그는 소피아 성당의 화려함에 무릎을 꿇고 무릎으로 기어 제단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후 소피아 성당은 이슬람의 모스크로 개조되어, 4개의 날개를 가진 천국을 지키는 천사가 8면을 지키고, 성스러운 마리아가 탄생 예수를 안고 있는 찬란한 모자이크도, 천장 가운데 있는 예수의 성스러운 모자이크도 모두 회칠로 인해 사라지게 된다. 477년 간 회교 사원으로 쓰이던 성 소피아 사원은 아타투르크가 박물관으로 지정한 이후 오늘에 이르렀고, 현재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예전의 모습을 찾기 위한 발굴 작업을 몇 년째 계속하고 있었다.
소피아 성당을 본 다음 우리는 지하 궁전이라는 별명을 지닌 지하 저장고로 향했다. 훼손되지 않고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로마 시대의 유일한 유적은 바로 이 지하 물 저장고뿐인데, 코린트와 이오니아식 원형 기둥이 일렬로 도열해 있는 지하 물 저장고의 규모는 무려 가로 70미터, 세로 1백40미터. 8미터 높이의 3백36개의 대리석 기둥이 벽돌로 만든 둥근 천장을 받치고 있다. 이 지하 물 저장고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06년부터 337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건설하였고,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현재와 같은 규모로 증축하였던 것. 석회수가 나는 이스탄불의 물을 식수로 사용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식수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북쪽으로 20여 킬로미터 떨어진 베오그라드 숲에서 물을 끌어다 철마다 바꾸어 저장한 것이다. 전체 물 저장 규모는 7만 톤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1985년 대대적인 수리와 보수 공사를 마친 후 1987년 9월 9일부터 일반인에게 공개되고 있다. 션 코네리 주연의 영화 중에서 ‘007 위기일발(From Russia with Love)’의 몇 장면은 이 곳에서 촬영되었다. 오스만투르크가 이스탄불을 점령한 후에도 그들은 무려 60년 동안이나 지하 물 저장고의 비밀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수많은 지진으로 성벽과 주요 건물들이 파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로마의 건축술에 대한 경외감을 느끼게 하였다.
점심을 먹는 동안 먹구름이 갑자기 몰려들더니 난데없이 소나기를 퍼붓기 시작했지만 식사가 끝나자 비도 그쳤다. 정말 날씨에 관한 한 이번여행은 행운이 항상 우리와 같이 하는 것 같았다. 오후에는 이집트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이집트바자르를 구경하고는 정기선으로 보스포루스해협을 1시간가량 유람하였다. 유럽과 아시아의 분기점이 되는 이 해협에는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두 개의 다리와 그 옆에 웅장하게 서있는 베이레르베이 성, 카다피도 교육을 받았었다는 군사학교, 아름다운 별장들, 고기 잡는 작은 배들...그리고 멀리 톱카피궁전의 측면을 돌아 '황금의 뿔'이라는 의미의 골든 혼이 보이고, 커다란 지중해 유람선 두 척이 정박한 항구도 눈에 들어왔다. 이스탄불은, 특히 노을이 지는 이스탄불의 광경은 이 해협에서 바라보면 참 장관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니 내일 저녁이면 이번 여행도 끝이구나 생각이 들자 피곤하더라도 그냥 잘 수가 없어 이스탄불의 명동이라는 탁심거리로 나왔더니, 크고 작은 선술집과 유명 브랜드의 상점들, 과일가게, 꽃가게들이 즐비한 화려한 거리가 나타났다. 일행들과 선술집에서 생맥주 한잔 하고나니 여행의 묵은 피로가 한번에 싹 가신다. 터키는 아직 EU 국가에 가입이 안 되었고, 그래서 그런지 미국달러도 잘 쓰이고 제값을 쳐주기도 한다. 바로 이웃한 그리스부터는 달러는 무시당하기 일쑤고 환율도 무지 낮은데...유럽과 달리 물가도 싼 편이라 생맥주 한잔에 우리 돈 3-4천원 정도면 즐길 수 있다. 물론 이웃 유럽의 나라에서는 한 잔에 1만원 이하로는 마시기 어렵다. 시원한 밤공기를 마시며 두세잔 마시자 터키가 사랑스러워 지기 시작한다.
마지막 날이다. 오늘 아침엔 ‘위스크다라’라는 지역을 배타고 건너갔다. 귀에 익은 터키민요에 등장하는 바로 그곳이다. 오래된 모스크 하나정도 밖에 그다지 볼 건 없었지만 그래도 보스포루스해협을 다시 건너면서 이스탄불 사람들의 분주한 일상을 잠시 구경할 수 있었다. 우리에겐 관광지지만 그 속에서 사는 서민들에게는 그저 일상의 단편일 뿐이겠지 하는 생각이 잠시 스친다.
오늘은 저녁 비행기 시간에 맞춰야 하기 때문에 마음이 약간 급해졌다. 서둘러 이어진 방문지는 돌마바흐체 궁전. 돌마바흐체는 "채워진 정원" 이란 뜻이다. 이 궁전은 보스포루스해협에 연하여 1843-1856년 사이에 술탄 압둘 메짓트 1세가 르네상스 스타일로 건축기사 발리안의 계획에 따라 지었다. 1923년 왕정이 종식되고 터키 공화국이 되자 대통령 궁은 앙카라로 옮겨가고 이 궁전은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현존하고 있는 터키의 고대 궁전 중에서 가장 화려한 이 궁전은 285개의 방과 43개의 홀로 되어 있으며, 금 14톤과 은 40톤을 사용하여 이 궁전의 건축 경비는 당시 500만 금화가 들었다 한다. 수많은 카펫트, 크리스탈 촛대, 그림들 특히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2세가 선물한 4.5톤의 무게에 750개의 촛대가 있는 회색 빛 나는 세계 최대의 샨들리아가 압권이다.
마지막으로 간 곳은 슐레이마니에 모스크. 이스탄불의 멋진 사진들을 보면 대개 블루모스크보다도 슐레이만 사원이 등장하는 것이 많다. 그만큼 거대한 돔과 4개의 날카로운 첨탑을 지닌 이 모스크가 이스탄불에서 두 번째로 크지만 외형이 가장 아름답고 뛰어난 모스크이다. 이 사원은 오스만제국의 10번째 술탄으로 30년간 통치한 슐레마니 1세가 헝가리에서 승리한 후 돌아와 당대의 위대한 건축가 시난에게 가장 거대한 모스크를 짓도록 명령함으로서 탄생하게 되는데, 술탄은 이 모스크의 개관을 시난이 직접 하는 영광을 안겨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13일 여정의 터키여행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여행자로서는 긴 일정일지 몰라도 우리나라보다 몇 배나 큰, 그리고 장구한 역사와 다양한 문화를 지닌 터키를 단 며칠 안에 제대로 느끼고 보았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짧은 기간을 여행하면서 기억에 가장 남는 것은 역사의 흔적이나 고대의 거대한 유적들이라기보다는 이동 중간 중간에 잠시 방문했던 시골의 마을과 담배밭에서 일하던 아낙들의 넉넉한 웃음, 양치는 목동들의 그을린 얼굴, 어느 초등학교에서 만난 천진하고 예쁜 아이들의 눈동자, 차를 내밀던 농가의 여주인, 하나 먹어보라고 권하던 고추 파는 아저씨의 너털웃음들이었고...그러한 사람냄새가 나를, 아니 우리 일행을 다시 한번 터키로 가보고 싶도록 만들고 있다 |
첫댓글 우리가 방문할 우르파<URFA>에서 부터 넴루트다이 산의 모습등 자세히 여행기를 오슨날개님이 써주신것을 <터키길라잡이>에서 스크랩해 왔습니다. 참고해 주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