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녀들의 거문고 소리로 자라온 장수 봉덕리 느티나무
무진장이란 한없이 많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물산이 풍부하여 모든 것이 넉넉하고 푸짐하다는 느낌이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무진장 지역’이라 할 때는 무주와 진안 및 장수를 가리킨다. 덕유산의 서쪽 자락 일대이며 고속도로가 뚫리기 전에는 우리나라 오지의 대명사였다. 무진장의 남쪽 끝이 장수이고, 나무는 천천면 봉덕리에 자란다. 이 일대는 해발고도 350∼400m의 평지가 있으나 대부분 고도 500∼1,000m의 산지이다. 면 이름이 천천(天川)이 되었을 정도이다. 호남고속도로와 대전통영 고속도로를 가로로 잇는 익산장수 고속도로 진안IC에서 잠시면 찾아 갈 수 있다. |
나무는 대부분의 농촌이 그러하듯 띄엄띄엄 폐가가 섞여 있어서 쇠락해가는 마을의 뒤, 나지막한 언덕을 따라 몇 그루의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줄을 만들어 자라고 있다. 이 중 대장느티나무 한 그루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앞에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멋스런 안내판이 놓여있다. 느티나무 이외에도 미끈하게 뻗은 상수리나무와 수백 년이 된 것으로 추정되는 소나무 2그루도 함께 자란다. 북풍을 막아주고 마을을 포근히 감싸주는 전형적인 마을 숲을 이루고 있다. |
마을의 남서쪽에는 통칭 옥녀봉이라 부르는 제법 높은 봉우리가 있다. 꼭대기에는 한 아름이 훨씬 넘는 소나무 한 그루가 자란다. 부채꼴의 아름다운 수관에 줄기는 힘차게 곧게 뻗어 늠름한 장수를 대하는 듯하다. 잘 생긴 신랑감을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선녀들이 모를 리 없다. 밤이 되면 수십 명의 선녀들이 내려와 소나무 주위를 둘러싸고 나풀나풀 춤을 추었다고 한다. 무심한 소나무 신랑은 아무래도 사랑을 받아 드리지 않자 선녀들은 옥녀봉에서 가장 잘 내려다보이는 지금의 느티나무 밑으로 자리를 옮겼다. 으스름달밤에는 지금은 없어진 느티나무 옆 방죽에서 깨끗이 목욕하고 칠보단장을 하여 정말 ‘목석같은 마음’을 몸으로 녹여 보려 했다. 그러나 영영 눈길 한번 제대로 주지 않자 마을 뒷골에 모여 들어 베를 짜면서 마음의 상처를 달랬다. 틈틈이 쉴 때면 지금의 느티나무 능선 앞 쪽 간바위에 올라 앉아 거문고를 타고 노래를 부르며 옥녀봉을 쳐다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옥녀봉 소나무는 예나 지금이나 무심하게 그냥 서 있지만, 느티나무만은 아름다운 선녀들의 노래 소리에 힘차게 잘 자라 천연기념물이라는 영예를 누리고 있다. |
세월이 흘러 옥녀봉 아래의 간바위와 방직골을 좌우로 하여 마을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선녀들이 베를 짰다고 하여 처음 마을 이름은 방직골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옛날 선녀가 거문고를 탔다는 사실이 더 낭만적이라 생각한 탓인지 두드릴 고(鼓)와 거문고 금(琴)을 따서 지금은 고금(鼓琴)이라 부른다. 마을에 언제 형성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며 주로 청주 한(韓)씨가 모여 살았다고 한다. 나무는 땅위 약 1.5m까지 외줄기로 되어 있고 그 위부터 줄기가 갈라져 있다. 원 줄기는 안쪽이 비어있는 부분도 있으나 나무껍질은 깨끗하고 생육상태도 양호할 뿐만 아니라 수형도 매우 아름답다. 나무는 높이 18.0m, 가슴높이 둘레 6.1m이며, 가지 뻗음은 동서 20.7m, 남북 22.1m이다. 나이는 약 500년으로 짐작하고 있다. 봉덕리에서는 예로부터 음력 정월 초사흘 밤 유시 경 느티나무 아래에서 산신에게 마을의 수호와 번영을 비는 당산제를 지내 왔다. 잡귀와 병마를 쫓아 마을이 평안해지기를 비는 마을 제사로 오랫동안 이어졌다. 제물은 마을의 공동 답(800평)을 경작한 사람 집에서 마련하는데 주로 돼지머리, 주과(酒果), 포, 떡, 나물 등이다. 제사 당일에는 우물을 깨끗이 치우고 황토를 뿌려 주변을 정화한 다음 제수장만이 끝날 때까지 우물의 사용과 출입을 금하도록 금줄을 친다. 제사를 관장하는 제관, 축관과 제수를 장만하는 사람은 목욕재계, 외출금지, 버린 것 안 먹기 등의 금기를 철저히 지키도록 한 후 당산제를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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