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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두산의 사화와 전설
(1) 神市와 檀君
환웅천왕께서 '홍익인간'의 대원서(大願誓)를 이루시려고 천부인 3개를 가지시고 무리 3천을 거느리시고 태백산 신단수하에 내리셔서 신시(神市)의 영장(靈場)을 여셨다. 친히 수(壽)·명(命)·병(病)·선악(善惡) 무릇 인간 3백여사를 주장하시고 세상을 모두 교화 하셨다.
그 아드님께서 원시적 국가를 형성하시고 차차 만주와 반도 대부분을 개척하시며 덕치(德治)하셨다. 이 단군사화에 대하여 기록상 불충분한 이유로 말소 또는 부정하는 소위 오유억설이 동서고금에 많이 유행한 듯하나 그것은 사상 논란에 지나지 못하고 오랜 동안 우리의 굳은 신앙의 뿌리는 도저히 제거하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단군에 대한 백두산, 묘향산, 구월산 세 곳의 관계된 기록을 말하기는 심히 번란하거니와 끊어 말하면 이 역대만은 단군 중에 묘향산 또는 구월산에 도읍하신 단군도 계셨으리라고 생각함이 타당할 듯하며, 삼국유사와 동국여지승람, 고려사 지지(地誌)등을 앞장세워서 묘향산, 구월산이 단군의 성도(聖都)라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백두천평을 한번도 보지 못한 무용(無用)의 고집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옛적 동방의 강대국으로 고구려, 발해 등 제 왕국의 발상지가 다 이 백두산이었으며 우리의 지파인 금·청의 왕조도 또한 이 백두산이 발흥지지(勃興之地)로 된 것이다. 그러므로 미상불 건국에 관한 전설이 많기로는 다른 데에 유례가 드물 것이다.
(2) 고구려의 유화부인과 동명성왕의 설화
옛적에 천제께서 그 아들을 부여 고도에 내려보내어 임금이 되게하니 이가 곧 해모수라. 그가 하늘로서 내려올 제 오룡거(五龍車)를 탔으며 시종자 1백여인이 다 백학(白鶴)과 채운(彩雲)을 타고 위에 떴는데 풍류 소리가 구름 가운데를 움직이는지라. 웅심산(熊心山)에 머물다가 10여 일을 지나 내려왔는데 두상(頭上)에는 조우관을 쓰고 허리에는 용광검(龍光劍)을 매었으며 아침이면 정사를 보고 저녁이면 하늘로 올라가니 세상에서 이를 천왕랑(天王郞)이라 하였다. 북부여 서북편에 청하(淸河:지금 압록강?) 하백(河伯)이 있고 하백의 따님에 유화(柳花)·훤화(萱花)·위화(葦花) 셋이 있으니 모두 얼굴이 곱고 자태가 아름다웠다. 그들이 하루는 그 근처 못가에 나가 놀다가 해모수왕을 보고 즉시 수중으로 들어가려 하였다. 왕은 말채찍으로 땅을 그어 방을 만들고 자리를 베풀어 그 용자의 염려(艶麗)한 유화를 유치(誘致)하여 비를 삼으려 하니 하백이 처음에는 크게 노하여 사자(使者)를 보내 그 무례함을 힐책하더니 왕을 용궁에 맞아 앉히고 여러 가지 행한 이적이 분명 천제의 아드님인 줄 안 뒤에는 예를 갖추어 성혼하였다. 뒤에 왕은 유화부인을 버리고 홀로 용거에 몸을 붙여 하늘에 올라가거늘 하백은 그 장녀가 이미 임신된 고로 이것이 가문에 큰 욕을 끼친 것이라 생각하여 끄나풀로 그 주둥이를 매어 잡아 당기어 그 길이가 석 자나 늘어나게 하고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 귀양보내었다.
이때 동부여왕 김와(金蛙)가 고기잡는 이의 고함을 듣고 쇠그물로 잡아내게 하였더니 비로소 잡고 보니 한 여자아이, 세 번이나 그 늘어진 주둥이를 문질러내리니 그제야 말문을 연지라, 왕은 하느님의 자비(子妃)임을 알고 깊은 방 속에 가두어 두었더니 일광이 비치든지 하면 몸을 피하고 그러면 해그림자가 또 따라가 비치고 이러하여 애를 배었다. 신작(神雀) 4년 4월 어느날이다. 이 유화부인이 좌액(左腋) 밑으로 알 한 개를 낳았다. 왕이 기괴하여 개와 도야지에게 주니 먹지 않고 노상에 버리니 우마가 피하고 또 들에 버리니 금수가 와 덮어주며 기르고 비록 음침한 날이라도 한 광명이 그 알 위에 나타났다. 왕이 그 알을 다시 그 어미에게 보내어 따듯한 곳에 두었다니 한 옥동자가 그 알 속에서 나왔다. 울음소리가 웅장하며 골격이 비범하며 한 달도 못되어 말을 할 줄 알았다. 점차 장성함에 활을 잘 쏜다. 하여 이름을 주몽(姝蒙)리하고 하였다. 이 아이가 후일 왕국에 고구려 왕국을 건설한 시조 동명성왕이 된 것이다.
(3) 청조발상에 관한 삼부녀(三夫女)의 전설
장태산 동쪽에 포고리산(布庫里山)이 있고 그 아래에 못이 있어 포륵호리(布勒蝴?)라 칭하는데 옛날 이곳에 은고륜, 정고륜, 불고륜 자매 세 천녀가 그 못에 내려와 목욕하다가 마침 한 신작( 鵲)이 주과(朱果) 하나를 물어다가 막내 불고륜의 옷에 떨어뜨린지라 막내가 그것을 보고 집어서 입에 넣으매 곧 삼키어져서 바로 뱃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목욕이 끝나매 하늘로 올라가려 한즉 막내만은 날라지지를 못한지라 두 형의 말이 "너는 주과를 먹어 아이를 배인 까닭으로 섭섭하나 몸을 푼 뒤에 돌아오라." 신신 부탁하고 둘이만 날아올라갔다. 막내 불고륜은 눈물을 머금은 채 떨어져 있다가 만삭이 되매 훌륭한 한 옥동자를 낳았으니 고고(呱呱)의 소리를 내면서 말도 하고 걸음도 걸으므로 하루는 전자(前者)의 내력을 말하고 이 물만 순류하여 내려가면 거기에 국토가 있으리라 하고 작은 배 한 척을 준 뒤에 그 천녀는 그만 하늘로 올라갔다.
이것이 이백여 년 간 중원에 군림한 청조(淸朝) 창업의 국조 누르하치(國祖누르하치)의 출생한 내력으로 그 건국신화가 이상하게도 고구려와 거의 같게 된 것은 우리에게 일종 흥미를 주게 된다.
(4) 천왕당과 백두산신
삼장서 농사동 가는 도중에 소홍단교(小紅湍橋)가 있으니 이 다리를 건너 좌일로(左一路)로 삼림을 헤치고 올라가면 석경이 절정에 닿은 곳에 수백 평 잔디벌이 수목 속에 둘려 있어 홍단각의 마루 넓은 집이 길을 눌려 놓여 있고 그 뒤로 일좌 천왕좌(天王座 : 小紅湍祠)가 일각문 반짝 솟은 깨끗한 단장 안에 호위되어 꼭대기에는 '천왕당' 3자의 흑판 백자의 현판이 뚜려하고 그 아래 따로 '존경당' 3자의 편액이 걸렸고 분합 쌍창 고요히 닫은 안기둥에는 '백두종기(白頭腫氣)' '홍단성사(小紅湍祠)'의 일대주련이요, 바깥기둥에는 '만고명산(萬古名山)' '일국조종(一國祖宗)'의 주련이 있으며, 묘우 안에는 일좌 영위가 서벽에 기대었고 앞에는 향로 향안이 있으므로 영위의 뚜껑을 곱게 들고보니 '대천왕영신지위(大天王靈 之位)' 일곱 자이다. 그 밖에 군수 현두영, 풍헌 한윤범 기타의 중수기(重修記)가 몇이 잇고 상(上 :純祖)자 21년 신사(辛巳)……부령군수 고승익이 특지를 받들어 영사에 치제(致祭)하고 묘우를 일신케 하였다는 기적문(記蹟文)이 있다. 사실(史實)에 의하면 천왕당은 거금 240년 전 숙종대와 10년 갑자(甲子)에 무산부 설치와 동시에 농사동 서남방 40리쯤 되는 대홍단(大紅湍)에 사당을 세워 천왕당이라 칭하여 단군을 봉사(奉祀)하다가 후 철종 9년 무오(1858)에 이 땅에 옮기게 된 것이다. 이후 해마다 황실에서 칙사를 파견 참배하든지 혹은 본지 군수를 대참(代參)케 하다가 나중에 와서 이것조차 폐하고 말았다.
그러나 지방 인사는 지금도 1년 1차씩(6월) 제전을 거행한다 하며 민간의 치성을 벗어난 신앙 초점이 되어 있다 한다. 무산으로부터 또는 혜산으로부터 성악(聖嶽)에 올라가는 연도에 다소 천왕당이 있으나 이것은 다 촌인 행객(村人行客)들의 위하는 사설 신사로되 오직 천왕당은 국가에서 관장하던 대영사(大靈祠)로 된 바이다.
그뿐 아니라 태종 원년(1401)에 동림돈(東林墩)에 사우를 세워 해마다 향폐(香幣)로써 두만강갑(頭만江岬)을 제하였고 영조 43년 정해(丁亥 : 1767) 추7월에 백두산은 아국 조종(我國祖宗)이요 북도(北道)는 '국조발상지지(國朝發祥之地)'라 하여 갑산부 80리 운룡 이북 망덕평에 각을 세워 백두산을 망사(望祀)하였다. 허항령은 무산·갑산의 군계라 이 영척(嶺脊) 복판에도 일좌 사우가 교림(喬林)을 등져 놓였으니 이 사우가 하시 하인의 청건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간소한 목제(木製)로 그 속에는 북벽(北壁)에 다가서 '천왕지위(天王之位)'를 봉안하였다.
그 신탁의 뒤로는 정면 벽상에 신탱을 걸어 모대(帽帶)한 인물에 시녀가 파초선을 들었으나 모대가 흐려져서 잘 보이지 않고 오직 시녀가 본상을 들었으나 모대가 흐려져서 잘 보이지 않고 오직 시녀가 본상을 지었을 뿐이며 옆으로 '국사대천왕(國師大天王)'의 안이 있으니 홍단영사(紅湍靈祠)에 비하여 그 묘모(廟貌)와 내용이 적지 않게 틀리며 신탁 앞에 향안, 향로가 있어 순례자들의 향 피운 재와 향전(香錢)이 탁상에 깔려 있다. 여러 가지로 보아 이허향령 천왕당은 민간신앙의 전당으로만 되었던 것을 짐작하겠다. 또 무두봉 동편 신무장, 이곳은 4782척 되는 고지에 있는데(우리의 8월 11일 밤 노영하던 곳) 옛날 백두산신을 봉사(奉祀)하던 묘지라 한다. 이 천왕당과 묘지에서 과거와 장래를 묵상하던 우리의 심정은 과연 어떠하였을까, 독자 제위의 자유 해석에 맡길 뿐이다. ▲맨위로
2. 국경의 연혁
(1) 여러 민족의 흥망
백산흑수(白山黑水)와 요야한해(遼野澣海), 1만리 무대의 진역은 맥풍한우(貊風漢雨)와 안마활철(鞍馬滑轍), 반만년 희극에 유구 복잡한 기록을 가진 곳이다. 단군 치세 1천년 동안 아무 말썽 없이 지낸 모양이나 그 뒤 백두산을 중심으로 여러 민족이 일어나매 함경도와 간도 일대는 풍진이 끊일 날이 별로 없었다. 한무제 시에는 현도·진번의 2군이 되고 고구려가 일어나매 압록·두만 두 강 유역을 용이히 자기 판도 안에 넣게 되었다가 나당(羅唐) 연합의 침입을 당하매 그 유족(遺族) 대조영(大祚榮)이 망국의 눈물을 머금고 태백산 동북에 유민을 모아서 대진국(大震國)을 건설하였다가 서기 10세기경 요국(遼國)이 일어나매 만주는 다시 우리 역내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나 간도로 말하면 고려조에는 혹 불교 혹 떨어지면서 많이 여진인의 거지(居地)가 된 것을 이조에 와서 그 지역을 경략(經略)하다가 명치(明治) 42년(1909) '중국의 간도'로 결정되고 말았다.
(2) 윤관의 북정과 김종서의 북벌
발해의 국민이던 말갈족이 뒤에 여진이란 이름으로 시방 함흥 이북에 몰려살면서 고려의 피페한 틈을 타서 자주 변경에 근심을 짓는지라 거금 820년 전 예종 2년(1107)에 도원수 윤관이 17만대군으로 출정하여 여진을 변외로 물리치고 9성을 새로 쌓고 선춘령상(善春嶺山)에 비(碑)를 세워 각왈(刻曰) 고려지경(高麗之境)이라 하였으며, 이 공지에 남방 백성을 이주시켰다. 그후 이조에 태조대왕이 북경(北境)을 개척하매 강내(江內) 여진은 동화시켰으나 대강 월편에 있는 여진 곧 야인이 자주 습래하므로 그 경영은 대단 곤란하였다. 세종대왕께서는 만년대계를 세우사 남방 인민을 강제적으로 이주시키며 일방 김종서를 보내어 야인적 여진을 구축하고, 강내(江內)에 6진을 두어서 호인을 방어하며 하번 저지(河邊低地)에 일대 장성을 쌓아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번호(번호 : 歸化野人)의 동정을 감시케 하였다. 그 뒤 창조가 일어나매 세력 소치로 국경이 분명치 못한 채로 회령을 개시장으로 하여 춘추 2차의 교역을 행하였으며 간도 이 지대를 양국간의 한광지대(閑曠地帶)로 베풀었으나 유민(流民)의 금(禁)을 무릅쓰고 입거(入居)하는 자가 많아서 거북한 일이 생기거늘 숙종은 6진 중 부령을 폐하고 그 대신으로 무산을 가입하여 국경을 극도로 주시하던 중 38년(1712)에 양국 협정으로 정계비를 만들게 된 것이다.
(3) 정계비의 내력
백두산을 말함에 정계비를 내어놓을 수 없다. 송화강 원류인 토문강으로 내려가는 계곡을 건너 분수령상에 올라서면 2200여 미터의 고지 대짐나 펀펀한 실은 등으로서 풀과 이끼가 두터운 곳에 소위 국경을 표시한 듯 돌무더기가 10리 가량이나 군데군데 늘어놓고 평소에 기록상으로 보던 단갈(短碣)은 간 곳 없이(소화 6년 여름 매몰하였다)말뚝 한 개가 대신하여 서서 있다. 이 국경 문제는 한·청 양국 사이에 꽤 어수선한 쟁의로 학자와 외교관이 여러 10년 동안 머리를 앓던 일이니, 그 쟁의의 원인은 첫째 우리 최초 조상에게서부터 몰려내려오는 국토의식의 위에 있어 백두산은 국내의 진산(鎭山)으로 하는 전통 성, 줄 잡아도 백두산을 역내(域內)의 종산(宗山)으로 두고 그 범위의 있음이요, 둘째는 역사적 비타당 감계력(非妥當勘界力)에 대한 민중의 백두산 호지운동(護持運動)과 북방의식의 각성이라 하겠고, 셋째는 백두산이 조선인의 발상지이며 근거지일 뿐 아니라 이곳을 상자향(桑木辛鄕)으로 전하는 애친각라(愛親覺羅)보다 먼저 이씨(李氏)의 풍패지(豊沛地) 임을 생각하면 아무리 이조에서도 얼른 내어놓고 모르는 체할 리 없을 것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백두산령과 두만강신의 봉사(奉祀), 김종서의 북벌과 6진 설치, 빈호의 귀화와 이민의 이주 등 여러 가지 정책으로 경략하기에 노력한 것은 문적(文籍)에도 소연(昭然)한 바이다. 그런데 이 야인이 차차 자라서 만주의 주인으로 중원(中原)에 군린하면서 만주를 민족적 태반으로 위호하는 동시에 백두산을 그 선조의 발상지라 하여 금봉(禁封)하기에 이르러 피아간에 한참 승강이 되다가 필경 백두산을 중심으로 하여 압록·두만 두 강의 월편 약간의 동안에 일 중립지대를 베풀고 누구든지 도무지 거생(居生)함을 금방(禁防)하자는 무리한 약속이 늑성(勒成)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그렇게 하고 싶어도 경제적·역사적·신앙적·심리적으로 제 스스로 어찌하지 못할 양심이 있는바에 여기 대하여 최후까지의 저항이 없을래야 없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조선의 북경은 압록·두만 두 강이라 함이 적확한 빙거(憑據) 없기로는 매한 가지요, 청인의 독단에서 나온 것이지마는 서(西)의 압록 유역은 저의 위압과 아의 퇴영으로 인하여 어느 새엔지 고나습상 국경을 이루게 되었으나 두만강 유역은 전혀 사정이 다른 만큼 분규를 일으킬 이유가 박약한 것도 청인 자신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토욕에 열중한 청조는 위권(威權)을 자롱(恣弄)하여 그 독단적 소신을 시행함에 경위도 체면도 돌아보지 않았다.
강희(康熙) 51년은 숙종왕 38년 임진(서기 1712년)이라, 강희제의 칙사인 오라총관 목극등이 장백산 일경을 청조 발상의 성지로 관유코자 함일새 그 존대 거오(倨傲)한 생각이 이미 독천적 행동에 나오려 하였거늘 조선의 감계사 박권과 함경감사 이선부 무리 귀골 두 사람은 중도에 돌아오고 군관, 역관 몇 사람이 따라가서 저들이 하자는 대로 청인의 단독으로 세유다시피 세워버린 것이 소위 정계비 그것이다.
그러나 이 역관 중에는 다행히 김경문(金經門)이라는 경골인(硬骨人) 이 있어서 목동에서 부단의 질책과 위협을 당하면서도 목숨을 내놓고 끝까지 항변하여 능히 국토 수백리를 보수하게 되었다 한다.
(4) 감계(勘界) 문제
한·청 국경 문제란 요컨대 간도 소속권 문제요, 간도 문제란 것은 두만강·토문강의 이동(異同) 문젱, 이 문제의 장본은 정계비문 중에 '동위토문(東爲土門)'이란 해석이었다. 청조에게 일찍 만주를 금봉지(禁封地)로 하여 만주족 이외의 거주를 금하고 더욱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두만강 유역을 공광(空曠)케 하여 아무도 입거하지 못하게 하였으나 인삼, 녹용, 모물(毛物)의 특산지요 농작의 적호지라 우리 이민(移民)이 뜻을 가지게 된 셈이다. 권력을 배경으로 한 산동 이민이 모든 억압 특히 귀화 강제가 그칠 새 없이 조선인에게 더하였다. 때는 임오(壬午)에 청 길림장군(吉林將軍) 명안(名安), 흠차대신(欽差大臣) 오대징(吳大徵)이 토문강 동북안 황지를 정식으로 개방하여 개간에 착수하려 하다가 해지(該地)에 다수 조선인이 거주 기간(起墾)함을 보고 저의 국민과 동근(同覲)하겠다 하는데 조선서는 차라리 쇄환(쇄한)하겠다고 주장하여 일이 거북하여지니 안착하던 거민들이 비로소 국경 관념이 환기되어 사람을 보내어 정계비를 사험하고 그 실정을 관부에게 보고하였다. 계미(癸未 : 1883)에 서북경략사 어윤중이 정원에 갔다가 월간민의 애소를 듣고 곧 종성인(鍾城人) 김우식과 반행(伴行)한 오원정으로 하여금 5,6 양월에 두 번 백두산을 답사케하여 정계비와 토문강원을 사득(査得)하고 무산부 향임(鄕任) 이종려와 출신 권홍조로 비문을 정간(定刊)케 한 후 간도가 당연 조선의 소유인 것과 두만강 월간민을 쇄환케 하려고 요구함이 전연 무리임을 역설하여 양국간의 국경 쟁의는 다시 폭발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을유(乙酉 : 1885)에 감계사 이중하(李重夏 : 당시 안변부사) 종사관 조창식이 청사(淸使) 덕옥(德玉). 가원계(賈元桂), 진영(秦瑛) 등과 회령부에 회동하여 담판을 개시하니 청인은 중구편의 빈약한 문서로써 확증이라 하고 우리는 실제가 제일임을 주장하여 마침내 적설을 밟고 한가지로 수원을 탐색하기로 하여 답험(踏驗)함에 미쳐 청인이 또한 의외의 감(感)을 가져서 어색(語塞)하여 이번은 답험뿐이라 하고 돌아갔다. 감계 담판은 정해(丁亥 : 1887), 무자(戊子 : 1888)에도 행하여 또한 이중하가 그 임에 당하였으나 다 성안을 얻지 못하고 이후 한참은 문제가 그만저만하다가 을미(乙未 : 1895) 이후 거민이 이 문제의 재기를 요청하여 마지 아니하고 정유(丁酉 : 1897)에 함북관찰사 조존우는 백두·토문·두만의 지형을 정사하여 양차 감계의 경위를 변설하였고 광무 4년(1900)에 아국(俄國)이 북청사건(北淸事件)을 타 간도를 점령하매 거민의 변통을 생각함이 더욱 간절하므로 광무 6년(1902)에 정부에서 이범윤을 파경하여 인민을 순무(巡撫)하게 하고 익년에 이범윤을 북변간도관리(北邊間島管理)에 임명하였다. 이범윤은 사포병(私砲兵)을 양성하고 조세를 징수하여 청관(淸官)과의 충돌이 부절하고 러·일 풍운이 일어나매 감계 쟁의가 중지되었다가 을사년(1905) 한일 보호조약 성립에 따라 조선 외교를 일본에 위임하게 되매 이국경 문제는 드디어 청·일간의 외교 문제로 되었다.
정미(丁未 : 1907) 8월 23일로부터 통감부의 출장소를 간도 용정촌에 설치하고, 한국 내부(內部)로서 파견한 관리와 일본 헌병경관들이 협력하여 새 행정을 시작하며 일방 감계상에 필요한 조사와 연구를 힘써서 한국의 영토란 전제하에 모든 시설을 행하며 청국에서도 여기 격독되어 새로 길림변공서(吉林邊共署)를 두고 다수 군대와 관리를 보내어 서로 대항케 하여 국경문제는 더욱 분규를 더하게 되었다. 그리하다가 무신(戊申 : 1908)에 남만 철도의 안봉선을 개축함에 제하여 청·일간 분의가 나매 간도 문제는 그만 희생되어 이듬해 9월 4일 청일협약이 체결되고 통감부 간도 출장소로 철폐되었다.
총독부 지질조사소 산성불이여(山城不二여) 씨는 「암석의 백두산」이란 논문 1절에 '정계비는 너무 바보스런 위치를 선택한 것이다. 이렇다면 결국은 산도 천지도 전부 중국의 것이다. 다만 학술에는 국경이 없다' 하였고 또 이학박사 화전웅치(和田雄治)씨는 그 「백두산의 기상」이란 논문 1절에 '그런데 이번에 실기를 답사하는데 석을수(石乙水)의 위치가 몹시 불명하고 동아동문회(東亞同文會) 보고 속의 지도에 의하면 홍토수(紅土水)는 증산(甑山)과 북증산(北甑山)의 중간을 흘러 간도산업조사서(間島産業調査書)에 의하면 이 물은 허항봉(虛項峰) 소백산(小白山) 사이를 흐르는 것처럼 기록하고 있다. 그렇지만 신무성·무두봉(神武城 無頭蜂) 사이를 지나는 한 계곡이 있어 흐르는 물은 윤택하여서 도문강(圖們江) 수원(水源)인 것 같았다. 그는 이와같이 위치가 불명한 석을수로서 국경을 삼는 것은 장래에 있어서 문제를 야기할 것이 명백하다'고 하였다.
3. 백두산에 관한 문헌 약초(略抄)
(1) 백두산은 고래로 동서 여러 민족의 흥상(興祥)의 영역(領域)이다.
대정(大正)십여 년 장백산신(長白山神)을 봉하고 나라를 일으킨 영응(靈應)스런 왕을 위하여 곧 그 산 북쪽에 묘우(廟宇)를 짓고 명창간(明昌間)에 다시 개천(開天)을 위하여 홍성제(弘聖帝)를 책봉하니 금사 때의 성세가 장백산에서 발상하였다.(淸太祖實錄) 하늘이 황조 청국을 창조하시어 대동(大東)에서 발상하니 산을 장백이라 하고 강을 혼동이라 하였고 지극히 높아 천연의 요새로다. 복이 성하고 신령을 심은 듯 산의 바탕은 나부낌이 있어 문빗장으로 드날리고 세 천녀가 내려와서 목욕하여 신작(神鵲)이 물어 온 과실을 삼키고 아이를 배니 성명(姓名)을 주고 어머니는 드디어 공(空)을 무릅쓰니 물을 긷는 사람 있어 다른 징조가 있음을 의아스럽게 보며 손을 맞잡고 돌아가지 않으니 미루어 주국(主國)을 삼는다. 삼성이 난을 정하니 악다성의 빌미로 호를 만주라 세워 개기함 종이다. 원나라의 까마귀가 상나라에 이르니 제무(帝武)와 주가(周家) 성(聖)은 반드시 아뢸 바가 있으며 이(異)와 소(搔)는 같은 품격이다.(청나라 건륭제의 시靑乾隆帝詩)
환웅이 무리 삼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 아래 내리니 이를 신시(神市)라 한다.(三國遺事) 정해년 가을 칠월 좌의정 한익모가 말하되 "백두산은 곧 우리나라의 조종산이고 또 국조의 발상지가 된다."
조하(朝賀)를 받들어 유척기가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여러 산은 모두 백두산에서 발맥(發脈)하고 산의 근방에 또 곧 대(臺)를 열하여 발상지 운운하며 상이 이에 따라 전체를 명하니 경도신 갑산부 팔십리 영룡보 북족 망덕평에 땅을 골라 각을 세우고 백두산을 바라보며 제사 지냈다.(영조실록英祖實錄)
우리 한국에 있어서는 백두산은 한 나라의 모든 산의 조종(조종)이 된다.(大韓彊城考)
백두산은 동북 제산의 조종이다.(대한강역고大韓彊城考)
광무 7년에 비로소 오약을 정하니 백두산으로써 북악(북악)을 삼고 사중(사중)에 제사지내다.(大韓彊城考)
(2) 백두산의 고래 명칭
동쪽 끝의 푸른 바다 속에 산이 있으니 이름을 불함(불함)이라 하는데 숙신국(숙신국)에 있다.(山母經)
나라의 남쪽에 도태산이 있는데 위나라 말로는 태백이라 하고 범·표범·곰·이리가 있는데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사람이 산에 올라 땀이 반죽이 도어 산길을 가는 자는 모두 물건을 담아가지 않을 수 없다.(후위서물길전)
말갈국은 옛 숙신 땅이다. 그 나라에는 백산 끝에 장백산이 있는데 금나라가 일어난 곳이다.(括地志)
동쪽으로 바라보이는 큰 산을 금나라 사람들은 이것을 신라산이라 하였고 그 산속에서 인삼과 백부자가 산출된다고 했다.(行程綠)
장백산…대개 흰옷 입고 관음을 믿으며 산다. 그 산 속의 금수는 모두 희다. 감히 차마 더러우면 그 사이에 들어가지 못한다. 뱀과 살무사의 피해를 입게 되기 때문이다.(葉隆禮 遼志)
그 북쪽에 있는 것으로는 흔동강, 장백산이 있는데 흔동강은 또한 흑룡강이라 부른다. 이른바 백산과 흑수가 이것이다.(金史世紀)
장백산을 스승은 가이민상견아림(歌爾民商堅阿林)이라고 한다. 가이민은 장백산(長白山)의 장이고, 상견은 장백산의 백(白)이다.(盛京誌)
광종(光宗) 십년에 압록강 밖의 여진을 쫓아 백두산 밖에 살다.(高麗史)
개마대산(蓋馬大山)으로 백두산(白頭山)을 삼으니 진실로 갬(개마)의 첫소리로써 보(寶)와 해(奚)와 같고 동국의 성읍에 백을 일러 해라 하고, 마를 일러 마니라 하고 두를 일러 역시 마니라 하니 대개 마해양니이고 해마니는 백두다.(대한강역고)
백두산은 즉 장백산이다.(大東與地 )
(3) 백두산의 지형
백두산은 머리는 서북에서 일어나 곧은 아래의 동쪽나라에 이르러 우뚝 선 그 높이는 몇 천인( )인지 알 수 없고 산의 꼭대기에 못이 있으며 사람의 쥐독과 같다. 둘레 이삼(2,3)십리이고 물빛이 검푸른지 검은지 헤아리지 못하고 4월에도 얼음과 눈이 쌓이어 바라보아도 아득하며 하나의 은빛 바다다. 산의 형세는 멀리 있는 엎어놓은 흰 독 및 꼭대기에 오른 것 같고 네 둘레는 약간 도도록하며 웅덩이가 아니고 벌어진 독과 같으며 주둥이는 위로 바라졌고 겉은 희고 안은 붉으며 네 벽이 겉으로 섰고 호련(瑚璉)같은 붉은 찰흙은 그 북쪽 수척(水尺)으로 꺾이어 물이 넘쳐나와 폭포가 되니 즉 흑룡강의 근원이다. 산등성이를 따라 삼사십리쯤 내려가면 비로소 압록강의 근원이다.(북여요선 중 해좌지도설)
고려에 마채수가 있는데 말갈의 백산에서 출원(출원)한다. 빛이 집오리의 대가리 같아 압록강이라 부른다.(당서)
곤륜산의 한 가지가 큰 사막의 남쪽으로 가서 동쪽으로 무려산을 고치어 이로부터 크게 끊어 요동평야가 되고 평야를 건너 일어나니 백두산이 되었는데 즉 산해의 험난한 곳을 불함산(不咸山)이라 한다.(팔역지)
올라가 산상(산상)을 살펴보니 산기슭 한 곳이 사방의 주위가 밀림의 떨기 그 속에 동산이 평평하고 초목이 나지 않은 것이 보이고 수풀을 십리쯤 나가 나무가 열을 지어 향그러운데 노랑 꽃이 어지럽게 우거졌고 산에는 반쯤 구름이 드리우고 안개는 무리져서 우러러 힐긋 볼 수 없다. 여러 대신이 꿇어앉아서 사뢸 뜻을 다 마친 듯 구름과 안개의 조목이 확연하고 산형이 요연하여 지름길이 있어 오를 수 있는데 그 반은 돌이 있고 섬돌의 대는 탄평하여 지름길이 있어 오를 수 있는 데 그 반은 돌이 있고 섬돌의 대는 탄평하여 사방의 산 꼭대기를 바라 볼 수 있게 원형을 지어 있으며 눈이 쌓이어 희게 된 산을 오르려 다섯 봉우리의 재를 돌아 만일 마을의 남쪽 한 봉우리가 약간 문증이 못과 같지 않다면 그윽히 조사하여 오십장쯤 떨어진 주위 사십여 리 가량 산의 네 둘레에 많은 샘이 급히 흘러 대면 삼대강의 발원한 곳이 근원이다.(---중략--- ) 멀리 바라보면 산정이 높은 when를 흰 독으로 덮은 것 같다.「청나라《일동지》중 오목눌의 기행에 대체로 백산은 우뚝하여 대동의 교악을 삼으니 정북쪽은 흰 바위의 상각(上角)에 있고 그 남쪽은 오리쯤에 병사암(兵使岩)이 있으며 그 남쪽 십여 리는 도범이 측지라 하고 그 서쪽으로 수십리를 돌면 마천우(摩天隅)라 하며 북쪽으로 수십리를 돌면 작은 목(項)이라 한다. 또 동북 수십리에 충암이 일어나 흰 바위와 맞서고 가운데에 큰 못이 있으며 금귀 모양으로 북쪽에 넘쳐 흐르는 것을 천상수(天上水)라 하며 병사암(兵使巖) 앞의 일지록에서 정동쪽으로 십리쯤 떨어져서 숨은 맥이 남으로 향하여 분수령이 되니 즉 정계비가 선 곳이다.(北輿要選)
백두산 못 밖으로부터 남쪽으로 향하여 학을 넘어(土門溝叡) 유령(長山領)을 넘어 백여 리의 땅에서 두만강 본원(본원)이 시발하여 홍토산수와 홍단수와 합하여서 점점 커지고 무산 삼하면으로 들어가 북은 을강구에 받고 남은 서두수에서 받으며 무산읍과 회령을 지나 종성의 동건(今潼關境)에 이르니 이상은 옛날 어운강이라 일컬었다. 혹은 말하되 이후강에서 또 분계강과 마나니 이하 옛날 두만강이라 하였다.(북여요선)
두 도랍고하(圖拉庫는 만주어로 龍의 뜻)는 모두 근원이 장백산 꼭대기에서 나온다. 압록강의 근원 북쪽이 정당하다. 서쪽에 있는 것을 안파도랍고(삼도백하)라 하고 동쪽에 있는 것을 아제격도랍고(四道白河)라 하며 국어 안파(安巴)는 크다는 것이고 아제격(阿濟格)은 작다는 것이며 도랍고는 폭포(瀑布)이고 격단(激湍)이 분주히 곧장 천발 밑으로 쏟아지니 족히 용이라는 이름이 있을 만하다.( 吉林通志 )
중연(仲淵)이 그의 관례(官隷)를 꾸짖어 말하기를, 물에 들어가기를 독촉하니 가의 얕고 깊은 데를 따라 오는데 임금이 이를 저지하여 말하기를, 만일 익사자가 있으면 어찌 하려는가? 중연이 듣지 않고 독촉하여 물에 들어가게 하였다. 물가 언덕의 동쪽으로부터 섬의 서쪽에 이르니 물이 겨우 무릎을 돌았다. 임금이 들어 크게 기뻐하며 뛰어 견여(肩與)에 오르고 명서가 다음에 중연이 또 다음에 섬에 이르니 임금이 말하기를 섬과 못(三池淵없 또는 七星湖)
에 정한 이름이 있겠는가? 상태(尙泰)가 말하기를 없습니다. 이에 삼지(三池)의 이름에 중은 상원(上元)이고 우는 중원(中元)이고 좌는 하원(下元)입니다. 섬은 지추라 하는데 대체로 침봉(枕峰)으로부터 백두(白頭) 육십여 리에 이르러 동북의 산하에 주로 삼고 오히려 산극의 방위를 흔천의 추라한다.(서명응의 보만집 권7 유백두산기)
큰 못의 물은 즉 영영(靈英)의 원기가 모여 있는 곳으로 물문의 북쪽이 결해 있어 경멱으로 유주(流注)하고 네 귀의 큰 산맥이 모두 저를 위해 있으며 산등은 작은 기슭으로 이어 도니 바야흐로 우리를 위해 있으며 저들은 그들 오로지 얻고 우리는 그의 한편만 얻으니 대체로 완안씨 이래로부터 흑수와 백산의 사이에 발자국을 일으키지 않음이 없었나니 중국의 주군이 바뀔제 이랬던가?(北塞紀略 白頭山考)
큰 못의 물이 북으로 흘러 흔동강이 되니 지금 이름은 송화강(松花강江)이다. 즉 옛의 속말수다. 위서(魏書) 물길전(勿吉傳)에 큰 물이 있으니 물이 가라앉았다 떴다 하기 삼리 남짓이라. 이름을 속말수가 이것이다. 강에는 동서의 두 근원이 있는데 동의 근원은 장백산 꼭대기의 못에서 나와서 격단 분주(激湍奔注)해 친 발 폭포가 되니 속에서 용이라 불렀다. 두 갈래로 나뉘어 흐르니 동쪽의 것은 큰 용이라 하고 서쪽의 것은 작은 용이라 부르니 수십리를 가다가 만나 흐르니 그 동쪽에는 또 낭목낭고하(娘木娘庫河)가 있다.(북새기략)
백두산의 원맥(元脈)이 동남쪽으로 사십리를 달려 연지봉이 되고, 또 나뉘어 열어 소백산을 삼으며 또 서남으로 향하며 침봉을 삼고 봉의 남쪽으로부터 평평한 땅 삼십여 리가 떨어진 곳에 허항령을 삼으며 남쪽으로 향하여 옆으로 떨어진 사맥이 인하여 네 고을을 만드니 첫째는 임연수천이라 하고 둘째는 자개수천이라 하며 세째는 비비수천이라 하고 네째는 검천이라 하며 각 고을의 물이 남쪽으로 흘러 압록강에 드니 비로소 이에 사람이 없는 경지다. 또 보다(寶多)에서 산을 만나 맥이 떨어지니 남쪽은 오씨동이라 했다.(同上)
큰 못(火口湖) 아래 미쳐 십여 리가 못되는 곳에 연지봉이 있고 그 밑에 소백천이 있는데 형상이 베개와 같아 본뜬 이름이다.(同上) 장파(長坡)으로부터 분수령에 이르러 지세(地勢)편편하여 천평(天坪)이라 이르고 천평 위에서 몸소 높은 산과 큰 메봉우리를 보니 모두 무릎 밑에 있고 분수령에서 절정에 있으며 또 직상(直上) 팔·구리이고 그 높이 또한 이와 같으니 천지의 내 땅에 있는 것은 수백리를 헤아릴 수 없으며 또 두만강·토문강의 북 압록강의 물결 서쪽 혼동의 좌우의 땅은 천평이 아님이 없고 천평은 백산이 아님이 없으며 그 넓이 또 이와 같다. 왕왕 큰 못의 천평에 살표하여(四面臨望燦燦)성숙(星宿)의 나열(羅列)과 같았다.(同上)
물이 남쳐나와 흑룡강의 근원이 되었고 동쪽에 돌사자가 있는데 빛깔은 노랗고 꼬리처럼 수염이 움직이려하니 중국인은 이를 망천후라 일컬었다.(문헌비고)
연지봉의 형상은 뾰족하며 빛깔은 붉다. 그러므로 두체(杜 )의 떨기로 가리어지고 붉은 것은 토석(土石)빛이 아니다. (동국명산기)
(4) 백두산의 화산 활동
선조 삼십년(서기 1597년) 8월 26일 관상감 관원이 와서 말한 바는 땅이 움직이는데 남쪽에서 서쪽으로 향해서였다.(선조실록 권91)
10월 기미(기미)일의 함경도 관찰사 송언신의 서장(書狀)에 지난 8월 26일 진시 삼수군경(三水郡境)의 지진은 잠시 그쳤다가 27일 미시에 또 지진이 일어나 성 근처의 각처가 무너졌고 군을 넘은 가장자리에서는 증암(甑巖)이 반조각 무너져 내리며 이 바위 밑 삼수도(三水洞) 가운데의 내는 빛깔이 흰빛으로 변하였으며, 28일에 다시 문득 황인(黃仁)이 외보(外堡)를 가로막으니 동은 5리쯤 떨어졌고 붉은 빛의 흙물이 용솟음쳐 나왔고 8월 26일 진시 내지 소농보의 가를 북쪽으로 넘어 얻은 것은 귀와 같이 깎아지른 듯한 절벽으로 사람의 발자국이 닿지 않은 곳이 있었다. 재차 포를 놓은 소리가 있어 우러러 본 즉 연기가 하늘은 찔렀다. 크기 두어 아름의 돌에서 연기가 나와 꺾이어 큰 산의 뒤를 날아지나가는데 가는 곳을 몰랐다. 27일 유시의 지진으로 이 절벽이 다시 꺾이어 떨어졌고 같은 날 해시, 자시에도 지진이 있었다.(선조실록 권93)
현종 9년 4월 신묘(서기 1668년) 함경도 경성부에 잿비가 왔고 부령에 같은 날 잿비가 왔다.( 현종실록 권14)
숙종 29년 4월 신축(서기 1702년) 함경도 부령부 이 달 14일 오시 천지 자연은 어둑한데 때로 혹은 누르고 붉으며 연기와 불꽃이 같이 있으니 누린내가 방에 가득하고 만약 홍로(洪爐) 가운데 있다면 사람은 무거운 열애 견디지 못할 것이다. 사경 뒤 꺼지고 아침에 이르른 즉 모든 들에 화산재 비가 오나 흡사 분합(蛤) 각자(者)와 같았다. 그러나 경성부에 같은 달 같은 날 약간 늦은 뒤 연기와 안개가 홀연히 서북땅으로부터는 누린내가 나고 습인(人)의 옷이 있었다.(숙종실록 권36)
(5) 기타 참고 자료
고산자의 대동여지도(철종 신유:1861년의 초인본과 고종갑자 재인본)
고산자 김정호 선생은 우리에게 정확한 지도가 없음을 크게 탄식하여 노자의 여비없이 도보 단장으로 춘풍추우 십여성상 8도를 세번 돌아다니고 백두산을 여덟번 답사하여 만고 지보(至寶)인 대동여지도를 재판 인쇄하였다.
금사본기(金史本紀) 제1,「소조(昭祖)가 뛰어 씩씩하게 푸른영 백산에 이르렀다.」
중보 문헌비고 권2「옛날 세종조에 있어서 역관 윤사웅과 최천구와 이무림을 강화부의
마니산·갑산부의 백두산·제주목의 한라산에 나누어 보내어 북극의 고도를 측정하여 관상(觀象) 감일(監日)한 것을 실고 그 측정한 바, 높이와 도수를 적었으나 전해지지 않는다.」
남이 장군의 시 '백두산의 돌은 칼을 갈아 없애고, 두만강의 물은 말에 먹이어 없애련다. 남아가 스무 살이 되어도 나라를 평정지 못한다면, 뒷날 누가 대장부라 일컫겠는가?'
이계손 시「당년의 외로운 화살엔 뜻이 멀리 높고, 목문관의 천 이랑은 임과 이별한 시름이요. 원하노니 바야흐로 삼척으로 몸을 막는 칼이니, 모든 산을 자르고 내 백두산에 의지할지라.」
퇴어 김진상의 시
그 일「산 머리 중간을 찍어 사위의 벽을 내고 모인 봉우리 가파른 암석 어지러히 많네. 깊이는 천 발 둘레는 백 리, 아래에는 넓고 깊은 큰 담수(潭水)가 있네. 그 이 처음 보니 눈이 휘둥그러지고 또 기괴함에 절규하고, 동해의 삼신산이 모두 아래질 형상일걸세. 위대하도다. 조화의 공이 이와 같음이오. 알지 못하게라 곤륜산은 무엇에 닮았을까?」
미국 박물관 동물부 조수 R.O. andrenes씨의 「백두산 동물채집」
소등(小藤) 박사「장백산 음초왕(陰草王)의 황금국(黃金國)」원 임시토지조사국감독관
송전(松田)씨의 「장백유초(長白遊草)」백두산식물조사보고서(대정7년 총독부 출판)
문교의 조선(대정 15년 백두산 답사기념호)
H. E. M. James 저(저) 「장백산」
「白頭山근참기」(최남선)
「백두산등척기」(안재홍)
(출처 : '백두산의 역사적 고찰' - 네이버 지식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