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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의 음악 & 그의 여인들
1849년 10월 16일 프랑스 파리 플라스 방돔 광장의 어느 작은 방....
금발에 수려한 외모의 남자가 그의 친구들에게 둘러쌓여 침대에 누워 있었습니다.
백짓장보다 창백한 낯빛.......무거운 정적 가운데 폐병환자 특유의 숨넘어가는 신음소리만 들릴 뿐....
그의 이름은 프레데릭 쇼팽~
임종의 성찬 후에 그는 마지막으로 음악을 듣고 싶어 했습니다.
“그럼 당신의 소나타를......”그의 친구 프랑숌이 말했습니다.
“아니, 그보다 더욱 순수한 음악을......내 맥박이 멈추기 전에 내가 가장 존경하는
모짜르트의 곡을 쳐주시오.“ 이것이 쇼팽의 최후의 마지막 소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오전 2시경
“마토카! 모이아 비엔다 마토카!”( 어머니! 불쌍하신 나의 어머니!)
1849년 10월 17일 오전 2시
생전에 시인 하이네와 뮈세의 찬사를 받던 피아노의 시인의 부고~
모짜르트 다음으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가 쇼팽!
동시대 피아노의 파가니니
프란츠 리스트가 평생 부러워 하던 예술가로서의 3가지 덕목(타고난 우아함과 섬세함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창조성)을 지녔던 쇼팽!! 오로지 피아노만 연주할 수 있도록 설계된 듯한 몸, 타고난 낭만적 우울증. 폐병 환자 특유의 예민함. 미소년과 같은 용모로 당대 파리 사교계에서 여성들로부터 사랑받았던 쇼팽. 그야말로 그는 음악이든 외모든 예술가 자체였을 겁니다.^^
쇼팽에 대한 여러 기록과 증언들, 이 모두를 한큐에 얘기하긴 다소 무릴테고....
오늘은 쇼팽의 뮤즈, 즉 그의 음악 속 여성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20세 무렵의 쇼팽!!
그는 프랑스 파리 사교계의 총아였지만, 사랑은 그에게 기쁨보단 슬픔을 주곤 했지요. 그의 첫사랑의 초상을 들여다보자면 콘스탄티아 글라드코프스카를 들 수 있는데요.
그녀는 쇼팽과 같은 음악 학교에서 수학한 동기였어요. 그가 그녀와 친밀해질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지만,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 탓에 그는 그녀에게 말 한마디 제대로 붙여보지 못했습니다. 쇼팽이 그의 친구 티투스에게 쓴 편지의 일부를 보면......
-아마 내 불행의 원인이 되겠지만 이미 내 이상의 사람을 발견했네, 나는 그 사람을 성실하게 그리고 솔직히 존경하고 있어. 이미 반년이나 계속 되었어. 이상의 여인을 밤마다 꿈속에서도 그리면서 나는 아직 한마디도 말을 걸어보지 못하고 생각만하고 있어.-
그녀를 떠올리며 작곡한 곡이 바로 피아노 협주곡 2번 2악장 라르게토 입니다.
그가 파리에 체류하기 전 오스트리아 빈과 독일 뮌휀과 슈투트가르트에 머문적 이 있는데요. 슈투트가르트에서 쇼팽은 그의 고국 바르샤바가 러시아에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때 그의 첫 사랑 그리고 짝사랑이던 콘스탄티아를 생각하며 절망하여 쓴 일기를 보면......
-콘스탄티아는 어찌 되었을까. 그녀는 어디에 있을까. 러시아인들이 욕보이고 죽였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러시아인들이 납치해 갔을 것이다! 아아, 나의 생명이여! 나 역시 혼자 있는데, 나에게로 오라. 당신의 눈물을 닦아주고 상처를 치료해 주리라-
이때 작곡한 곡이 그 유명한 에튀드 작품번호 10의-12 혁명입니다.
1831년 9월 갓 스무 살이 넘는 나이로 쇼팽은 파리에 도착합니다.
비단결 같은 금발, 개성있고 귀족적인 오똑한 코, 세련된 기품......한마디로 그는 로멘티시즘이 지향하는 댄디 였습니다. 당연히 사교계 모든 여성의 주목 1순위였고 모든 남성들의 롤모델이 되었습니다. 쇼팽이 주로 애용한 아이보리색 가죽 장갑은 파리 샤교계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핫 아이템으로 떠올랐구요. 파리에서 델핀느 포토츠카 부인과의 얼마간의 사랑 뒤에 그가 만난 여인은 바로 마리아 보진스카 였습니다. 사실 보진스카 일가는 쇼팽 가족과 친분이 두텁던 폴란드 망명귀족 가문이었습니다. 보진스카 가의 형제들은 모두 쇼팽의 친구였는데요. “오빠!” “오빠!”하며 쇼팽을 쫓아다녔던 귀여운 마리아! 그가 드레스덴에서 그녀와 재회했을 때, 그녀는 이미 19세의 아름답고 교양있는 숙녀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시절 쇼팽은 그녀의 피아노 선생으로 그녀를 레슨 할 때가 가장 행복했습니다. 그녀의 잘못된 운지법을 고쳐 주기위해 그 보드라운 손이 잠시 스칠 때는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사랑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쇼팽이 드레스덴을 출발하던 날, 한 송이의 장미꽃을 쇼팽에게 주며 이별을 슬퍼하는 마리아에게 쇼팽은 너무나 애처로우면서도 간절한 왈츠를 바쳤습니다. 이 왈츠 초고에는 ‘마리아 양을 위하여.’라는 헌사가 적혀 있었는데 이 왈츠는 그의 사후에 친구 폰타나를 통해 출판되게 됩니다.
쇼팽의 작품과 예술에 가장 절대적 영향을 미친 여성은 바로 당시 파리 샤교계를 주름잡던 페미니스트 여성작가 조르주 상드였습니다. (원래 그녀의 이름은 오로라 뒤팡, 조르주 상드는 필명임) 여기서 그녀의 남성편력을 밝히자면, 그녀의 아들 모리스와 딸 솔랑주의 가정교사를 제외하고는 그녀의 이상형은 언제나 금발의 미소년형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쇼팽과 만나기 이전에 그녀는 당대 유명한 시인 알프레드 뮈세의 연인이었는데, 알프레도 뮈세도 쇼팽처럼 금발의 깨끗한 이미지의 신사였습니다. 아무튼 쇼팽이 그의 동료 피아니스트이자 당대 최고의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이며 희대의 바람둥이였던 프란츠 리스트의 연인 마리 다구 백작부인의 살롱에서 마담 상드와 처음 만났을 때, 그의 첫 인상은 이랬습니다.
“저 자......아니 저 여자가 마담 상드인가? 왜 저렇게 꼴불견이지? 숙녀면서 이브닝드레스 대신 정장 바지에 프록코트 그리고 실크햇이라니......게다가 담배까지 피고 있군. 뭐 저런 여자가 다 있어.”
보수적이고 극히 귀족적인 취향을 지닌 그였기에 다소 과격한 진보주의자였던 조르주상드의 이미지는 엄청난 충격과 경멸 자체습니다. 하지만 마담상드에겐 그녀 특유의 매력이 있었습니다. 어떠한 주제가 나와도 토론 가능한 예술적 지식과 견해!
그녀는 타고난 재담가였습니다. 그래서인지
대개는 거의가 남자 쪽에서 그녀에게 열을 올렸습니다. 그녀의 연인이 되었다가 폐기처분되는 남자들이 수두룩했지만 그럴 때마다 그녀는 그 어떠한 죄책감도 가지지 않았습니다. 처음엔 상드에 대해서 강한 반감을 품었던 쇼팽이었지만 계속되는 그녀의 열렬한 구애에 그의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직도 젊고 어린애처럼 항상 슬픔에 잠겨 있는 귀여운 천사인 쇼팽에게서 그녀는 예전에 알지 못했던 행복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과 딸에게 베풀던 그 모성애를 쇼팽에게 주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 조르주 상드에 대한 쇼팽의 마음을 1837년 10월의 일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여인과 세 번 만났다.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동안 눈 속까지 깊이 뚫어 보는 것이 었다. 다뉴브의 전설이 담긴 슬픈 음악이었다. 나는 그녀와 함께 다뉴브의 전설의 나라에서 춤을 추었다. 내 눈은 그녀의 깊고 기묘한 눈이 속삭이는 것을 보았다. 피아노로 다가와서 불타는 눈동자가 나를 둘러쌌다. 우리들 둘레의 불꽃, 나는 넋을 빼앗겨 버렸다. 그리고 두 번 다시 만났다. 그녀는 나를 사랑하고 있다. 오로라, 참으로 아름다운 이름이다.-
파리 사교계를 화려함과 세련됨의 장소로만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그 당시 사교계는 그 이전 시대의 루이 14세 ~16세 치하의 베르샤이유 궁전에서보다 입단속을 잘 해야 할 정도로 남녀 간의 로맨스에 대한 가십은 삽시간에 퍼지곤 했습니다. 신중한 쇼팽은 마담 상드와 스페인 마요르카 섬으로 떠날 채비를 했습니다. 마요르카 발데모사 수도원으로.......
연인과의 사랑의 도피! 하지만 그 누가 말해주었던가요!
확실히 사랑의 도피건만 발데모사에서의 삶은 라마르틴느의 시 호수(le lac)처럼 아름답기는커녕 끔찍했습니다. 특히나 병약한 쇼팽에게 있어서는......
음식물과 생활필수품도 구하기 힘들었고, 그가 사랑하던 플레이옐 콘서트용 피아노를 마요르카로 선뜻 운반하겠다는 자는 아무도 없었고요. 그는 결국 조율 상태도 제대로 되지 않은 업라이트형 피아노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쇼팽과 조르주상드의 발데모사의 삶에 대한 증언을 살펴보십시다. 아래는 마담 상드의 ‘나의 생애’에 적힌 글을 인용합니다.
-비가 쏟아져 마차 지붕에 넘쳤다. 3마일을 되돌아오는 데 6시간이 걸렸다. 우리는 홍수의 한가운데 있었다. 신발도 벗어 버리고, 마부는 달아나고, 너무나도 무서운 어두운 밤길의 위험을 무릅쓰고 달렸다. 우리들은 환자가 걱정할 것을 생각하며 마음을 재촉했다. 그는 정말로 생생하게 앉아 조용한 절망 속에서 눈물을 머금은 채 기막힌 자작의 전주곡을 치고 있었다. 우리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는 갑자기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치며 일어섰다. 그리고 흐트러진 얼굴과 기묘한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아아~~난 당신이 죽은 줄 알았습니다.”
<이하 중략>
바로 그날 밤의 전주곡은 빗소리에 넘친 것이었고, 그 음이 사원의 지붕에서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였다 할지라도 그의 작곡은 그의 환상의 음악 속에서 그의 가슴 위로 떨어지는 눈물로 바뀐 빗방울 이었던 것이다.
1839년 5월 20일 쇼팽은 조르주 상드의 별장이 있는 노앙으로 갑니다. 마담 상드는 이 때만해도 쇼팽을 뜨겁게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박한 전원의 삶이 쇼팽의 병든 몸을 치유해 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상드는 쇼팽을 “내 아이”라고 불렀고, 쇼팽은 상드를 “나의 주인” 혹은 “이 집의 주인”이라 불렀습니다. 이 노앙에서는 쇼팽 외에도 당대 유럽 전역의 지성인들과 예술가들의 휴식처인 아지트인 셈이었는데 소설가 발자크, 또 한명의 소설과 뒤마피스, 쇼팽의 절친이자 상드의 아들 모리스의 스승이었던 외젠 들라크루아, 라만네 승정, 철학자 피에르 레로우, 가끔은 동료 음악가, 프란츠 리스트와 펠릭스 멘델스존이 들르곤 했습니다. 노앙에서의 삶을 그린 영화가 있지요.
La note bleue (쇼팽의 푸른노트, 폴란드 피아니스트 자누스 올레니작~쇼팽역, 소피 마르소~조르주 상드의 딸 솔랑주)
쇼팽의 음악과 삶에 절대적 영향을 미쳤던 여성 소설가 조르주 상드와의 10년간의 사랑.
그러나 이 사랑도 결국 파국으로 끝나고 말지요.
쇼팽이 델핀느 포토츠카 부인에게 보낸 아래의 편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상드 부인과 나와의 애정은 1년도 계속되지 않았습니다. 우린 잘 알고 있지요. 마요르카 섬에서 우리 사이가 이미 끝났다는 것을
우린 스스로를 속인 채 9년을 같이 보냈던 겁니다.-
아무튼 그가 다시 파리로 돌아왔을 무렵은 1839년 10월이었고 흔히 학계에선 1840년이 쇼팽 음악의 절정기라고 하는데 마담상드와의 애정적 관계에는 이미 금이 간게 확실하지만 어쨌든 아직은 상드의 보호 아래 있었습니다. 그 시절 쇼팽의 레슨모습을 1839년부터 1841년 사이에 그에게서 지도를 받던 마드무아젤 프리데리케 뮐러 양의 회상을 통해 살펴봅니다.
-나는 일요일 오후 1시쯤에 쇼팽의 집에서 피아노를 쳤다. 보통 4시나 5시 쯤에 수업이 끝났는데, 수업 후에는 쇼팽은 자작곡을 연주하곤 했다. 얼마나 아름답던지......
어느 날 아침 쇼팽은 ‘프렐류드14번’와 바흐의 ‘전주곡’을 악보 없이 쳤다. 내가 감탄의 소리를 지르자 그는, “칭찬은 일러.” 하면서 그 특유의 수줍음과 슬픈 웃음을 띠며 이어서 연주하곤 했다.
마담 상드와의 관계에선 지지부진한 면이 없잖아 있었지만 1841년부터 1845년까지 매년 여름마다 쇼팽은 조르주 상드의 노앙 저택에서 지내곤 했습니다. 그러나 1846년 상드는 작품 ‘루크레치아 프로리아니’을 연재하면서 쇼팽과의 관계 청산에 들어갑니다. 소설 내용인 즉 조르주 상드를 상징하는 루크레치아 프로리아니란 여배우가 로스왈드 공작과 로맨스를 하는데 (로스왈드 공작은 쇼팽을 상징함)공작이 끝없는 질투심과 치졸한 사나이란 겁니다.
상드는 어느날 밤 들라크루아 앞에서 이 소설에 대해서 낭독했는데 그때의 화가 들라크루아의 심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마담 상드가 그 작품을 낭독할 때 나는 몹시 괴로웠다. 사형집행인과(마담 상드) 그 희생자를 (쇼팽)보는 것 같이.......그러나 상드의 침착했고 쇼팽은 그녀를 극구 칭찬했다. 쇼팽의 그런 모습이 안쓰러울 정도였다.-
우리는 쇼팽의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4명의 여인을 만나봤습니다.
콘스탄티아 글라드코프프스카, 델핀느 포토츠카, 마리아 보진스카, 그리고 조르주상드
그들과의 러브 스토리가 해피엔딩은 아니었지만 쇼팽의 음악과 그들은 뗄레야 뗄 수 없겠지요. 구구절절한 사랑, 그러나 결국엔 체념으로 그치는 처절한 서글픔 그리고 슬픔의 승화.......그래서 일까요?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악이 바로 쇼팽의 음악이 아닌가 싶어요.......한국의 ‘한’의 정서와 가장 비슷하니까요........
끝으로 쇼팽의 천재성을 한마디로 잘 표현한 동료 음악가 로베르트 슈만의 1835년 10월 16일자 음악 신문을 실어드립니다.
-쇼팽의 연주 스타일은 그의 작곡과 같은 듯하다. 즉 절대유일의 것이다.
특히 그의 la ci darem la mano variation (모짜르트의 오페라 돈조반니 중 체를리나와 돈조반니의 2중창 라 치 다렘 라 마노-거기가면 우리 손잡고-을 쇼팽이 편곡한 곡, 흔히 라치다렘 변주곡이라고 함)은 정말이지 뛰어나다. 여러분이여~ 모자를 벗어라. 그는 천재다. 나는 이 천재에게 이 큰 희망에게 그리고 이 거장에게 머리를 조아린다.-
오늘밤도 쇼팽의 센티멘털한 작품을 연주하는 모든 이들에게
한때 그의 연인이던 마담 상드의 다정다감한 응원을 들려주고 싶습니다.
"용기를 내세요. 빌로드와 같은 손인데..."
무대 공포증이 심했던 쇼팽은 생전 정말 큰 맘 먹고 딱 30번 대중 앞에서 연주회를 열었다는데 (보통은 살롱에서 지인과 친구들 앞에서 연주했고요.) 그때 가장 많이 연주하던 작품이 피아노 협주곡 1번 e단조래요. 이 곡을 80년 쇼팽 콩쿠르 우승자 당 타이 손의 연주로 들려드릴게요.^^
정말 눈물나게 만드는 피아니스트입니다. 1970년대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제대로 된 피아노로 연습도 못하고 종이에 피아노 건반을 그려서 연습했다하네요. 1980년 심사위원들이 우승자 선정을 놓고 둘로 갈리웠어요.......당 타이 손을 우승자로 할 것인가? 아니면 러시아 피아니스트 이보 포고렐리치로 할 것인가? 마르타 아르헤리치는 이보 포고렐리치를 밀었고 다수의 심사위원은 당 타이 손을 지지했지요.......당 타이 손의 열정과 의지에 냉혹한 뮤즈마저 감동 받았나봐요. 후진국 출신 피아니스트 당 타이 손이 우승했습니다. 이튿날 그가 하루 만에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자신의 위치에 스스로 놀라고 있을 때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축하의 전화를 보내주었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당신의 쇼팽의 바카롤르(뱃노래)는 정말 금세기 최고였습니다." 유투브에 그 동영상이 있어요. 근데 다음 카페로는 공유가 안되네요. 대신에 중년 신사 당 타이 손의 쇼팽 피협 1번을 들려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