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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성찬식을 제안한다
성찬식에 대한 이해에 따라 성찬식의 문화와 분위기도 달라진다.
우리가 생각해보면 성찬식 때 빵과 포도주를 실제 주님의 몸과 피가 변화된 성체로 받아들이는 가톨릭이 훨씬 더 심각하고 무거운 분위기가 연출되고 기념설을 받아들이는 개신교의 성찬식이 훨씬 자유롭고 기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될 것 같은데 현실은 정반대다. 미사 때 드리는 성찬식이 오히려 기쁜 찬양과 밝은 분위기에서 연출되고, 빵과 포도주에서 ‘의미’를 찾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개신교의 성찬식이 오히려 더욱 무겁고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다.
성체를 실제로 주님의 찢긴 몸과 흘린 피로 대하는 가톨릭 신자들이 더 슬퍼하며 엄숙한 분위기를 만들어낼 것 같은데 가톨릭 성찬식 분위기는 오히려 기쁨과 즐거움이 넘쳐나는 반면 개신교 성찬식에서는 너무나 숙연한 제사 분위기가 연출되는 이 역설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 가장 중요한 이유는 가톨릭 신자들이 기쁘게 성체를 받아 모실 수 있는 것은 자신의 현재 신앙의 모습과 상관 없이 빵과 포도주는 주님의 몸과 피로 변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은 그리스도의 신비다. 자기 믿음의 상태나 의지에 따라 성체의 변화가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기적’이기 때문에 가톨릭 신자들은 감사로 겸손하게 받아들이면 된다. 그래서 성찬식을 할 때 자신의 몸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신비가 번져나갈 것을 믿음으로 고백할 수 있는 은총의 시간임을 더욱 절실하게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개신교의 분위기는 다르다. 빵과 포도주에 의미를 부여해야 할 개신교 신자들은 자신의 현재 신앙의 상태에 따라 성찬식의 의미와 감격의 정도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개신교 신자들은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주는 ‘심오하고 큰’ 의미를 만나야 하고, 그 의미와의 만남은 바로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빵과 포도주 그 자체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아니기 때문에 같은 빵과 포도주를 받아들여도 각자의 믿음의 분량이나 간절함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는 의식이 저변에 깔려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개신교 신자들은 빵과 포도주가 여전히 한낱 빵과 포도주로 남겨질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삶에 변화를 주는 ‘거룩한 뜻 덩어리[意味體]’로 다가올 것인지가 바로 지금 자신과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 여하에 달려 있기에 성찬식이 진행되는 동안 거룩한 영으로 말미암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거룩한 사귐이 있는지 성찰하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참회할 모습을 찾기를 희망한다. 그러한 마음 자세로 성체를 받으면 자연히 진지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가톨릭 신자들이 신부 앞으로 나아가 성체를 받는 대신 개신교 신자들은 자리에 앉아 기도하면서 정적으로 받기 때문에 더욱 엄숙한 분위기에서 진행된다. 진지한 의미를 찾으려는 마음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신앙과 영혼을 되돌아보지 않고 성찬식을 대하는 것이 문제다. 그러나 자칫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는 성찬식에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신비와 하나님의 은총을 놓칠 위험이 있다.
가톨릭은 축제, 개신교는 제사?
성찬식의 신비와 은총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것에 대한 믿음이 먼저 고백되어야 한다. 이 믿음을 토대로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예수가 성만찬을 감사의 기도로 시작했고 또 성만찬이 끝난 후에 제자들과 함께 기쁨의 찬양을 드리고 올리브산으로 올라갔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첫 성만찬은 감사와 기쁨의 축제로 마무리되었음을 깊이 새겨야 한다. 그래서 우리 또한 성찬식을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 변화된 존재로서 다시 한번 그리스도에 대한 감사와 축제, 기쁨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가톨릭 성찬식이 기쁨 속에서 자유롭고 부드럽게 진행되는 반면 개신교의 성찬식이 무겁게 진행되는 또 다른 이유는 가톨릭의 경우 성찬식이 매주 미사 때마다 행해지는 반면 개신교는 하나의 절기행사로 치러져서 그 횟수가 지극히 제한되기 때문이다. 가톨릭 신자들은 매주 성체를 받아 모시기 때문에 성찬식에 대해 특별히 긴장하지 않는다. 성찬식 없는 미사는 진정한 미사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성찬식은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순서다. 때로는 너무나 ‘자연스러워’ 사람에 따라서 그 거룩한 뜻이 동반되지 않는 형식적인 행위로 끝날 위험이 있지만, 이 ‘자연스러움’은 성찬식 전체적인 분위기를 감사와 기쁨의 분위기로 만들어내는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
그러나 개신교 성찬식은 하나의 절기 행사로 이해되면서 실행되고 있기 때문에 개신교 신자들이 일년에 성찬식에 참여하는 시간이 제한되어 있다. 횟수가 적기 때문에 그만큼 성찬식의 중요성이 강조될 수 있지만 반대로 성찬식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자연스러움보다는 성찬식 의미부여의 부담감이 더 클 수도 있다. 겨우 한 해에 몇 번 참석할 수 있는 성찬식에서 그동안 잊고 살았던 주님의 희생과 죽음의 의미를 한꺼번에 느끼고 체화시키려다보니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비장’(悲壯)한 분위기가 연출될 수밖에 없고, 또 그렇게 비장한 마음을 품지 않으면 성찬식을 신앙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성찬식에 참여하는 기회가 적다는 사실은 성찬식이 지닌 신앙의 의미가 반복되고 구체화되는 기회가 그만큼 적어진다는 것을 말해준다. 교회에서 성찬식을 거행하는 경우가 지극히 제한된 이유는 기념설이 낳은 결과이기도 하다. 기념이란 본래 많은 횟수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기념을 단기간 내에 반복하면 오히려 기념하고자 하는 사람이나 사건의 중요성이 약화되고 또 그런 상태로 진행하는 것이 오히려 우스운 일이 되고 만다. 개신교 성찬식의 횟수가 그렇게 적은 이유가 이런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드물게 성찬식을 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은 결코 이러한 이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종교의식(儀式)을 통해 의식에 담긴 신앙을 곱씹어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의식의 반복 속에서 더욱 그 의미를 심화시키고 발전해나갈 수 있기 때문에 의식의 진행 횟수는 매우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가능하면 성찬식도 많이 행하면 행할수록 좋다. 지금은 일반적으로 교회 규모나 상황에 따라 성찬식의 횟수를 정하는데, 그것보다는 성찬식을 정례화한 후 다른 환경이나 조건들을 교회에 맞추어 나가는 것이 성서적이다.
교회 규모나 여건으로 말미암아 성찬식의 횟수를 제한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목회하는 목사들조차 성찬식을 교인들과 함께 참여하는 것에만 그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가톨릭은 성찬식 없이 미사 자체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에 매번 미사 때마다 성찬식을 행하지만 개신교 목사가 성찬식을 매일 홀로 행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러나 개신교 목사들도 가톨릭 신부처럼 매일 혼자서 하나님을 예배할 때마다 성찬식을 행하는 새로운 성찬식 문화가 일어나야 한다. 이렇게 된다면 목회자의 영성은 물론 한국교회에 큰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의 성만찬은 예수의 공동체의 새로운 결집이며 동시에 부활을 통한 생명공동체의 시작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목사들은 매일의 성찬식을 통해 자신의 공동체를 향하신 예수의 마음을 되새길 수 있고, 나아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진실한 기쁨을 얻을 수 있으며, 주님의 피로 사신 교회공동체에 사랑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변화되어야 할 성찬식 이해
앞서 다룬 가톨릭과 개신교의 성찬식에 따른 문화적 차이점을 살펴보면 성찬식이 지닌 ‘형식’의 변화보다 먼저 성찬식에 대한 ‘이해’의 변화가 더욱 절실하게 느껴진다. 우선 가톨릭 성찬식에 개신교 신자들이 참여할 수 없도록 교회법을 정한 것은 화체설 신앙과 모순된다. 가톨릭 외에 다른 신앙인들이 가톨릭 성찬식에 참여하지 못하는 문제는 가톨릭이 개신교의 세례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근원적인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태도에는 가톨릭 교회가 개신교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가 아니라 하나의 ‘신앙하는 무리’ 정도로 여기는 신학과 신앙의 오만(傲慢)이 그 배경에 깔려 있다. (가톨릭 교황청 신앙교리성(장관 요셉 라칭거 추기경)은 지난 2000년 9월 5일에 <주님이신 예수님>(Dominus Jesus, 2000, 8, 6 교황인준)이라는 문헌을 발표했다. 이 문헌의 자세한 제목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구원적 유일성과 보편성에 관한 선언’(Declaration on the Unicity and Salvific Universality of Jesus Christ and the Church)인데, 이 선언에서 가톨릭은 개신교를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라 하나의 신앙인들의 무리들로 폄하해서 개신교 교회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참으로 자신들이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이미 가톨릭 교회나 사제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참으로 받아먹는 사람 속에서 사시면서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진심으로 화체설을 믿는다면 가톨릭 영세를 받고 안 받고의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먹는 사람들의 마음 자세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체 그 자체에 변화의 힘과 신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체에 대한 깊은 이해는 없을지라도 진지하게 받아들이려는 사람에게 성체를 건네는 것은 화체설을 믿는 사제의 당연한 의무다. 그럼에도 가톨릭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개신교 신학생 몇 명이 가톨릭 미사를 체험하기 위해 성당 미사에 참석했다. 그들은 가톨릭에서 영세를 받은 사람 외에는 성찬식에 참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제단으로 걸어가 성체를 받아먹었다. 가톨릭 교인은 아니었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찬식에 참여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학생들 중에 한 명이 신부로부터 성체를 받을 때 한 손을 내밀어 받아먹었다. 성체를 준 신부도 처음에는 알아차리지 못하다가 한 손으로 받아먹는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이상하다고 느끼는 순간 돌아서서 가는 그 신학생을 불렀다. 그러자 그 신학생은 못 들은 척하며 성당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신부 앞에서 거룩한 성체를 한 손으로 받아먹는 모습은 가톨릭에서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다. 이 에피소드 속에 신부의 부르는 소리, 허둥지둥 걸어가는 그 신학생의 모습에서 성찬식의 의미는 찾아볼 수 없다.
개신교의 경우에는 세례 여부에 따라 성찬식에서 빵과 포도주를 받아먹을 수 있기 때문에 가톨릭과는 달리 세례를 받는 연령이 너무 높아서 일반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나이에 성찬식에 처음 참여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성찬식에 꼭 그렇게 나이가 중요하게 작용해야 할까? 오히려 어렸을 때부터 성찬식이라는 거룩한 종교적 예식에 참여한다면 이를 통해 아이들의 신앙이 더욱 성숙할 수 있지 않을까?
함부로 주님의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면 그것은 사전 교육과 성찬식 분위기를 통해서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성찬식을 받기에 어린아이들보다 사실 어른들이 더 ‘죄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 현실이 아닌가? 그 어떤 이유로도 주님의 성찬에서 아이들을 배제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영세를 어렸을 때 받아 성찬식에 참여하는 가톨릭의 아이들을 보면서, 그리고 외국 개신교 교회에서 아이들과 함께 성찬식에 참여하는 것을 보면 이와 같은 관행이 결코 잘못된 전통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종교예식을 통해 말로 전달할 수 없는 신앙교육이 이뤄진다는 사실을 안다면 더욱이 성찬식이 어린아이들을 위한 중요한 신앙교육의 장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 감수성이 예민하고 영성이 맑은 어린아이들에게는 주님의 몸과 피의 의미가 영혼에 더욱 강렬하게 맺힐 수 있다. 가톨릭 신자들에게 어렸을 때 첫 영성체를 받아먹은 감격을 평생 잊을 수 없다는 고백을 자주 듣는다. 이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개신교도 하루 빨리 세례 연령을 낮추거나 아니면 어린아이의 경우는 세례인증 여부에 상관없이 주님의 식탁에 참여하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이웃종교인을 위한 성찬식
한국에서 종교 간의 만남과 대화를 위한 모임을 하다보면 이웃종교의 의식에 함께 동참하는 경우가 많다. 종교에 대한 이해를 깊이 하는 데 종교의식에 참여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이웃종교의 의식에 참여하는 경우 종종 성찬식 참여가 문제가 되곤 하는데, 그리스도교처럼 특정 의식에 참여하는 것을 막는 종교가 없기 때문이다. 어떤 종교도 다른 종교인들이 자발적으로 원한다면 결코 참여를 배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톨릭 미사에 참여할 경우에 그리스도교 외의 이웃종교인들은 물론이거니와 개신교인들 또한 미사의 중심인 성찬식을 그저 바라보아야만 한다. 다른 종교인들은 가톨릭 신자들만의 ‘잔캄를 바라보면서 의식 참여의 의미가 축소됨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올바른 성찬식의 모습일까? 앞에서 언급했지만 화체설을 수용한다면 이웃종교인들에게 성체를 더욱 권해야 옳은 것이 아닌가? 성체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이시고 또 그분 스스로 이웃종교인들의 몸과 삶 속에서 역사하실 분이시다. 또 그것을 분명 원하실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비가 이웃종교인들 속에 번져가지 못할 이유가 없다. 개신교인들에게조차 주지 않은 성체를 이웃종교인들에게 나눠준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지만 어떤 신학적 입장이나 교회법으로 논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리스도 앞에서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기념설의 입장에서 보면 기독교인이나 세례인증 여부 운운하는 생각을 떨쳐버린다면 가톨릭보다 훨씬 더 자유롭게 이웃종교인들을 성찬식에 참여시킬 수 있다. 기념하는데 무슨 인종과 종교, 나이를 따질 수 있겠는가? 거기에 참여하는 자들이 기념하고자 하는 그 내용의 의의를 알고 또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기념일에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
성찬식은 이웃종교인들에게 낯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의미를 직접 되씹어보게 할 수 있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다. 이때 성찬식은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의 가르침의 도(道)를 전하는 전도(傳道)의 방편이기도 하다. 만약 그들이 이 예식에 참여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조금이라도 더 깊이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선교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2003년 6월 29일, 강원도 인제에 있는 한 가톨릭 수도회 소속 재가복지센터에서 40여 명의 5개 종교 이웃종교 청년들이 가톨릭 미사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 수도회가 폐교된 학교를 임대하여 복지센터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운동장 한 부분에 제단을 준비하여 함께 미사를 드렸다.
미사 중에 성찬식 시간이 되었다. 나는 미리 준비한 예복에 붉은 단(스톨)을 내리고 제단 앞에 섰다. 가톨릭 성찬식에 이웃종교인들이 참여할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알았기에 사전에 신부님과 상의하여 목사의 권위(?)로 개신교 교회법에 어긋나지만 이웃종교인들도 함께 참여하는 성찬식을 준비했다. 신부님은 가톨릭 신자에게만 배찬하고 나는 모든 이웃종교인들에게 배찬하기로 계획했다.
내 오른쪽에 젊은 스님이 포도주 잔을 들고 섰고 내 오른편에는 원불교 여자 교무가 빵을 들고 섰다. 나는 내 앞으로 오는 이웃종교인들에게 교무가 들고 있는 빵을 떼어 스님이 들고 있는 포도주에 적셔 그들의 입에 넣어주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입니다”라고 고백하면서, 비록 다른 종교인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전해지기를 희망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진지했고 나름대로 그 의미를 느끼려는 마음이 역력히 보였다. 나도 목사임직 이후 처음으로 이웃종교인들과 주님의 몸과 피를 나눴고, 그들 또한 처음으로 그리스도교 성찬식에 참여한 것이다. 미사를 마치고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오늘 여러 종교인들과 함께 드린 이와 같은 성찬식은 아마도 여러분 생애에 처음이자 마지막 성찬식이 될 것입니다.”
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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