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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희 연구, 김남식 지음, 도서출판 베다니, 2015
백영희 목사, ‘오직 성경’이라는 원리 속에서 사역하고 헌신하다
송광택 목사(한국교회독서문화연구회 대표)
저자 혜강 김남식 박사가 머리말에서 밝힌 바와 같이 “한 사람의 삶과 사상을 평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6쪽). 일반적으로 한국교회사에서 백영희는 ‘극보수적인 신앙공동체의 지도자’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그러나 보수적 신앙운동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 외에는 백영희에 대한 이해는 매우 제한적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본서는 지금까지 ‘미지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백영희에 대한 흥미진진하고도 학문적인 탐구이다. 저자는 ‘개인사적(個人史的) 측면과 교회사적(敎會史的) 측면을 아울러 포괄’하면서, 백영희의 저서와 그에 대한 연구물들을 바탕으로 하여 문제를 천착하였다. 따라서 저자는 집필 목적을 간단명료하게 밝히고 있다: “본서의 목적은 백영희에 대한 인물사적(人物史的) 연구를 통해 성경적 바른 신앙의 실체를 규명하고 이것이 목회 현장에 어떻게 구체화되는지를 탐구하는데 있다. 본서에서는 백영희에 대한 연구를 집중한다.”
어릴 때 고신 측에서 자란 저자는 백영희와 서부교회 사람들을 ‘백파’ 라고 불렀다. 그 의미도 모르는 채 어른들이 하는 말을 따라 했을 뿐이다. 그후 저자는 한국교회 보수신앙의 역사를 연구하면서 백영희에 대해 주목하고 자료를 수집했다. 이 책은 그 결과물이다.
저자는 먼저 ‘백영희 연구의 범위와 한계’를 언급하면서, 백영희 목사는 ‘학자도 아니고 교회 정치가도 아닌 순수한 목회자 그것도 성경에 몰입하는 목회자’였다고 서술한다. 백영희는 많은 기록을 남기지 않았고, 훗날 그의 후학들이 정리한 자료들이 핵심이 된다.
백영희는 부산 서부교회를 중심으로 목회하면서 일반 교회들과의 교류보다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폐쇄성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성경연구에 몰입하였고, 자신들을 드러내는 것을 피하였다. 하나님 제일주의를 추구하였기에 자신들의 주의와 주장을 대외적으로 발표하지 않고 총공회라는 공동체를 통해 유지하고 계승해 나갔다”(46-47쪽).
저자는 2부 ‘백영희 연구’에서 “한국교회사에서 백영희는 누구인가?”라고 묻는다. 앞서 언급한바와 같이 그는 극보수적인 신앙공동체의 지도자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백영희는 1910년 7월 29일 강남 거창군 주상면 도평리에서 아버지 백남칠과 어머니 장판임의 7남매중 2남으로 태어났다. 백영희는 9세 때(1918년)부터 서당에서 3년간 한문을 배웠고, 11세 때에 야학에서 2개월간 신학문을 배우다가 1920년 7월에 웅양공립보통학교 1학년에 입학한다. 그러나 5학년 2학기말에 가정의 경제적 사정으로 자퇴한다.
백영희는 1926년 즉 17세 때에 일본으로 건너가 3년간 탄광, 공장 등에서 노동자로 일하다가 1928년 11월에 귀국하여 개명리의 이경순과 결혼하였다. 1936년 6월에 부인 이경순이 농산교회에 첫 출석하였고, 백영희도 따라서 교회에 나가게 되면서 백영희가 복음을 접할 기회가 찾아왔다. 그는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1937년 1월 31일에 호주장로교 선교사 토마스 코트렐 목사(한국명 고도열, 高道悅)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백영희는 성경을 배우고 싶어 1938년 1월 18일 진주성경학교에 입학하여 예과와 본과 1학기를 공부하고 건강 때문에 공부를 중단하였다. 짧은 기간의 공부이지만 이곳에서 최상림 목사)의 가르침을 받았고, 권임함(Cunningham) 목사의 감화를 받았다.
백영희는 한 평생 목회자로서 헌신의 삶을 살았다. 그가 신앙생활을 시작하던 때는 신사참배 강요의 바람이 일어나기 시작한 시기였다. 그가 나가던 농산교회는 목회자부터 교인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그후 1939년에 개명교회를 개척하여 목회를 시작하였다. 이때 장년교인이 남녀 8명이었다. 개명교회는 백영희부터 주일학생까지 한 사람도 신사참배를 하지 않았다. 신사참배 강요의 어려움 속에서도 백영희를 중심으로한 개명교회는 신앙파수에 노력하였다. 1944년 1월 개명교회 교인 43명이 전염병에 걸렸으나 한 명도 죽지 않고 일제의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고 8.15 해방을 맞았다.
저자에 따르면 “백영희의 신앙 형성과 헌신에는 거창교회 주남선 목사의 영향이 컸다.” 백영희는 1950년 6월 2일에 고려신학교에 입학하고, 1952년 7월 27일 부산 서부교회에 부임함으로써 그의 새로운 사역의 장이 펼쳐졌다.
저자는 백영희의 ‘사상’을 다루면서 말하기를, “그는 신학자가 아니었고, 많이 공부한 사람도 아니어서 체계적인 사상이 정리되지 못하였다”고 했다. 후일 그의 제자들이 그의 사상을 정리하여 세상에 소개하였다.
백영희의 사상을 한 마디로 규정하면 ‘성경주의’ 이다. 그의 사상은 그의 <목회 설교록>을 중심으로 고찰할 수 있다.
백영희에 의하면 성경은 하나님께서 기록하신 말이다. “성경을 대할 때는 그 한 말씀 앞에 엎드려 하명을 기다리되, 성경은 명령하고 우리는 순종해야 한다.” 그는 성경책을 대하는 자세와 태도를 극히 조심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자신의 신앙이 어리면 성경 ‘책’까지도 조심해서 대하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이다.
또한 성경 번역에 있어 자세와 태도를 극히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성경은 진리로서 권위성을 가지므로 번역하면서 첫째 조심할 것은 정확성이다. 또 한 가지 조심할 것은 뜻이 같다면 그 표현을 성경이 가지는 권위성을 생각해서 여러 가지 표현 중에서 가장 권위 있는 표현을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번 확정된 번역은 전반적인 오류가 발견되지 않는 한 일부 오류 때문에 성경 전체를 재번역하는 일은 피하는 것이 유익하다.” 약간의 세월이 지나면 첫 번역이 서툴렀다 해도 성경 표현은 성경 전체에 의하여 그 의미가 새로 형성되므로 문제가 해결된다고 했다.
백영희에 의하면 성경 해석은 성경과 성령이 최종 권위이다. “성경은 인간세계를 완전히 초월한 권위를 가진다. 따라서 성경 해석은 이 세상과 인간이 자기를 기준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이 세상과 인간은 말씀이 없는 데에서 만들었고 그것들은 말씀 아래에 있다.” 성경 해석은 성경과 성경 안에 역사하는 성령으로만 해석하는 것이 옳다. 즉, 성경은 자기 속의 성령의 감화와 감동으로만 깨닫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연구를 두고 성경의 권위성에서 생각할 것은 성경연구는 성경과 성령으로만 연구하는 깃이 필요하다.”
성경은 그 기록이 구원목적이다. 그리고 성경의 정확성은 성령이 최종 담보 확정 짓는다. “성경의 정확성은 싱경을 읽을 때 믿는 사람에게 성령이 역사하여 하나님이 기록하신 하나님의 맏씀이라는 것을 알려 주신다.” 성령이 읽는 사람 마음속에 증거하는 이 증거야말로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증거이면서 가장 확실한 증거라는 것이다. 성경의 기록이 참이냐는 증명은 그 성경을 읽을 때 그 성경이 말한 것이 사실로 나타나기 때문에 증명까지 되는 것이다.
백영희에 의하면 성경의 보편성이란 “믿는 사람이라면 어느 시대나 어느 민족이나 어느 환경에 있다 해도 자기 신앙양심을 써서 노력하면 누구든지 성경을 바로 깨닫고 또 다 깨달을 수 있도록 성경을 기록할 때 그렇게 되어지게 했다는 뜻이다.” 성경은 누구나 아는 대로 실행해보면 깨닫게 되는데,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서로가 출생과 성장의 형편이 제각각 다 다르지만 하나님께서 성경을 우리에게 주실 때 그런 인간적 제한과 차이에 따라 지장을 받지 않도록 조절해 놓으셨다. “성경은 비록 그 본질과 내용이 하나님의 권위에서 시작되는 것이지만, 그 마지막 표현은 우리에게 평범한 인간 언어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특이한 것은 백영희 목사가 “성경해석에서 원어를 강조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한 점이다. “말씀은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성경 원어를 바로 알아 성경을 바로 깨달을 수 있다는 주장이 현 교계에는 너무 지나치게 과장되고 인식되어 있다. 주로 신학의 직업 문제와 연관이 많고 또 전문가들이 자기 존재를 지나치게 과시하려는 것도 그 이유나 배경이다.”
백영희에 의하면, “성경은 평범한 사람이 자기에게 주신 형편과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고 또 양심을 쓰면 자기에게 필요한 구원도리를 깨닫는 일에 모자람이 없다는 것이 성경의 보편성이다.”
‘보편성’이라는 말은 평범한 사람이라도 상관이 없다는 말이지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나태와 무지 자체가 성경을 깨닫는데 도움이 된다는 뜻은 아니다. “평범한 사람이라도 그 주어진 환경에서 자기 충성을 다하고 양심을 쓴다면, 자기 신앙에 필요한 깨달음에는 부족함이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성경의 보편성에서 우리는 소망을 가지되 그 대신 있는 힘을 다해 성경을 깨닫기 위해 노력하여,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먼저 산 제물로 바쳐져야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된다. 실행해야 할 결심과 각오가 필요하다는 것을 동시에 기억해야 한다(롬 12:1-2).” 성경의 보편성은 평범하지만 충성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백영희는 ‘성경의 충족성’도 강조했다. “성경 기록은 우리 구원에 필요한 내용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기록했으니 이를 성경의 충족성이라고 한다. 어느 시대를 살든 또 어느 형편을 만났든 성경은 모든 사람의 모든 형편에 대하여 그가 만난 그 현실에서 그가 어떻게 깨닫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모두 기록하고 있다. 동시에 성경은 각 내용이 겉으로는 각각 별개 내용을 가르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성경 어느 말씀이라도 그 말씀은 모든 성도의 모든 현실에 모든 문제를 전부 해결하는 충족성을 가지고 있다.”
백영희는 “성경만 알면 다른 인간 지식은 전혀 필요 없다”고 가르쳤다. “다른 지식은 있으면 좋고 없으면 그만이다. 다른 지식을 가지되 만일 잘못 가지게 되면 그 해독은 그 사람의 평생을 다 망쳐버린다. 따라서 지식을 바로 가지면 좋으나 그것이 어려우므로 성경의 충족성으로 만족하는 것이 좋고, 꼭 필요하여 세상 지식을 가질 때에는 성경의 충족성을 잘 깨달아 성경 지식을 보좌하고 심부름하는 지식으로만 가지도록 조심해야 한다.”
백영희의 교회론은 ‘개교회주의’이다. “백영희 신앙노선에 의하여 1960년대부터 나타난 교회체제를 공회체제라고 한다. 공식명칭으로 사용할 때는 ‘총공회’ 체제라고 하는데 그 운영 원칙은 성경 법을 실제 현실 교회의 정치기준으로 삼고, 정치형태는 개교회주의를 근본으로 하고 있다.”
공회체제에는 3대 원칙이 있는 데, 그것은 ① 성경법 유일주의, ② 개교회 신앙자유주의( 전원일치의 결의제도), 그리고 ③ 교권배제주의다. 이것은 “성경만으로 교회운영의 법을 삼고 그 외 각 교단이나 교파가 헌법이나 여러 가지 형태로 가지고 있는 각종 명문법 규정들을 하나의 참고로만 삼지 ‘법’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이다.”
교권배제주의는 바꾸어 말하면 ‘인간 권위의 배제원칙’이다. “성경권위만 교회의 유일한 궈위로 확정짓는다면, 자동적으로 교회는 교회체제에서 고정적인 직책이나 권한을 부여하는 일을 삼가야 한다. 예를 들어 목회자나 총회장이라는 자리에 항상 주어지는 권리나 권한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또 직책에 관계없이 어느 한 개인에 대하여 항상 그에게 주어지는 권리나 권위를 인정해서는 안 된다.”
저자에 따르면, 백영희는 한국교회 안에서 성경적 신앙운동을 전개하였다. 사역에 있어서 백영희는 헌신자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 제일주의가 체질화되었다.
목회의 경우, 백영희는 “1939년 고향인 거창 개명리에서 장년 남녀 8명을 놓고 무보수 목회를 시작하여 1989년 8월 27일 순교하기까지 만 50년을 목회 하였다. 그러므로 목회는 그의 전생애를 통한 헌신의 징표였다.”
특히 그의 주일학교 사역은 특별하다. 어느 비오는 날 백영희 목사는 비를 맞으며 끊임없이 밀려드는 학생들을 지켜보며 이렇게 기도했다고 한다. “주여! 이 8천 명이 넘는 하나님의 양떼, 이 무리들이 어디서 왔습니까?”
서부교회 주일학교 반사들은 토요일마다 자기반 학생들의 집으로 찾아가서 지난주 배운 것을 확인하고 주변에 함께 교회에 나올 학생들을 찾아 전도했다. 반사들은 오직 전도로만 자기 반을 만들었는데 특이한 것은 아이들을 유치반이나 학년 별로 구분하지 않고 한반에 통합시켜 시청각교재 없이 ‘공과’로만 성경을 가르쳤다.(110쪽)
백영희는 반사를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직책으로 여기고 직접 챙겼다. 또한 주일학교 공과를 직접 작성하여 교육하였다.
선물도 주지 않는데도 학생들이 주일마다 밀려들었다. 특별히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주변에서 뿐만 아니라 많은 학생들이 주변의 교회를 두고 버스를 타고 왔다. 심지어 버스로 1시간 이상 걸려서 오는 아이들도 상당수 있었다(112쪽).
“일본, 영국, 미국에서도 소식을 듣고 참관하러 오는 이들이 줄을 이었다. 그들은 서부교회의 모습을 보고 초대교회의 모습을 눈앞에서 보는 것 같다며 감격스러워했다. 오직 신앙에만 집중되어 세상에 물들지 않은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고 돌아갔다.”(114쪽)
백영희의 신앙운동의 특성 가운데 하나가 산상연합사경회이다. 1957년 이래로 삼봉산에서 개최되어 오던 집회 장소를 1967년에 40리 정도 아래에 위치한 도평 장생골로 옮겼다. 삼봉산은 거리가 너무 멀고 협소하여 집회 진행에 어려운 점이 많았다. 삼봉산 집회 장소에서는 군인들이 사용하는 야전 천막 막사 한 개로 예배당을 만들었다(115쪽).
“1967년 장생골 집회에서는 수백 명 정도였던 참석자가 향후 20년 동안 발전을 거듭하여 1980년에 들어서면서 1만 명으로 급증하게 되자 또 집회 장소가 좁고 불편하다 하여 또 다시 더 좋은 상소를 찾기 위해 전국 곳곳을 살펴보았으나 장생골처럼 좋은 곳을 찾을 수 없었다”(116쪽).
백영희의 설교는 성경중심이었다. 이것을 녹취하여 목회설교록으로 간행하였는데 매권 500-600 페이지 분량으로 총 182권이 간행되었다. 이것은 기독교 역사에 유례가 없는 특이한 것으로서 문서를 통한 복음전도의 가능성을 제시하였다(116쪽).
“백영희의 사역 가운데 목회자 양성반은 특이한 형태의 신학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고신과 단절한 후 개교회주의로 나아갔으며 이 교회들을 이끌 목회자 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117쪽).
저자에 의하면, 백영희 사역의 영향은 여러 가지로 규명할 수 있으나 총공회의 조직과 인재 양성에 집약될 수 있다.
1966년 5월 26일 목요일 부산 서부교회에서 제1회 공의회가 개최되었다. 당시 공회 회의록을 통해 공회를 가장 잘 파악할 수 있다. 당시 공회는 일반 교회의 최소 사례를 참고하여 출발했으며 매사 성경으로 바른 길을 찾아 고쳐나갔다.
인재 양성에 있어서 백영희는 1968년 기도 중에 이미 교역자 양성에 대해 가르침을 받고 마음속으로 계속 기도로 준비 중이었다. “공회의 출발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목회자를 가르칠 수 있는 교수를 기르기 위하여 먼저 공회 내부에 실력을 갖춘 몇몇을 미국 정통 신학교에서 중요한 과목을 배워오도록 했다”(130쪽).
그러면 백영희 목사의 ‘신앙노선’의 성격에 관해 저자는 어떻게 평가하는가? “백영희는 원래 신앙 시작부터 인간적 도움보다는 성경과 성령의 인도를 따랐던 인물이다. 굳이 인간적 모습에서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인물을 든다면 두말 할 것 없이 주남선이다. 주남선의 신앙 계열이며 주남선의 신앙을 그대로 잇는 수제자라고 표현한다면 정확한 표현이다”(143쪽).
저자는 제3부 ‘백영희의 신학사상 연구’에서 백영희의 구원론을 심도있게 다룬다. 백영희에 따르면 구원은 집을 짓는 것 같이 점진적으로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집을 지을 때 먼저 터를 닦고 그 위에 집을 짓는 것같이 구원에도 터가 있고 집이 있는 것이다.”
백영희는 ‘기본구원’과 ‘건설구원’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기본 구원은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받는 것이다.” 기본구원은 하나님의 예정을 따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전적 은혜로 선물로 받은 것이다. 건설 구원은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따라 예수님의 공로에 의하여 모든 사람이 개별적으로 받는 것이다(160쪽).
“그리스도의 중보의 대속으로 의롭게 되는 칭의는 공통적인 기본 구원이지만 신앙과 행위를 따라 이루는 성화는 사람마다 다른 건설 구원이 되는 것이다. 영, 혼, 몸의 본체는 공통적으로 구원을 받는 기본 구원이지만 영, 혼, 몸의 기능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는 건설 구원이 된다. 생명은 누구나 공통적으로 기본 구원으로 받지만 생명이 생활하는 영생의 모습은 다 각각 다를 수밖에 없는 건설 구원에 속한다. 천국은 공통적으로 받는 기본 구원이지만 천국에서의 영광은 각각 다르므로 건설 구원에 속한다. 선택은 신자가 받는 기본 구원이지만 자유는 각각 다르므로 건설구원에 속한다.”(160-161쪽) 백영희는 1950년대부터 기본 구원과 건설 구원을 구분하여 가르쳤다.
저자에 의하면 “백영희가 기본 구원의 완전과 건설 구원의 안전을 주장한 것은 구원의 영생과 완전을 잘 파악한 것이 라고 할 수 있다. 기본 구원은 하나님이 완성하신 것이고 건설 구원은 믿음의 분량만큼만 완전한 것이다.”(172쪽)
백영희는 목회 초기 전도사 시절에 많은 비판을 들었다고 고백한다. “백 조사 저거는 안하무인이다. 유아독존이다. 한국 엘리야다. 저만 의인이다. 독선주의다. 뭐 별명이 많이 붙었어요. 그랬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때 철이 없어서 그런 소리를 들을 만치 선배들에게 근심을 끼쳤어.” 이 말에서 목회 초기 전도사 시절에 그가 어떠한 역할을 하였으며 어떠한 성격이었으며 어떠한 비난을 받았는가를 엿볼 수 있다.
물론 긍정적인 평가도 있었다. 어떤 사람이 신현균 목사에게 가서 영에 대하여 질문을 하니 “나는 잘 모르는데 저 부산에 가면 서부교회 백영희 목사가 잘 아니 그분에게 가서 물어 보시오”라고 대답을 해서 찾아오는 사람도 있을 만큼 “신령한 사람”, “경건한 사람”, “성경의 사람”, “기도의 사람”, “은혜의 사람”, “진리의 사람”, “불덩어리” 같은 별명도 가지고 있었다.
저자에 의하면 “백영희의 신학사상은 특이한 언어 표현으로 인해 일부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고 또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의 사상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져 지금은 문제를 삼는 사람이 없는 실정이다.”(230쪽)
백영희의 사상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은 백영희의 신앙적 특성 즉, 하나님 제일주의에서 오는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자세와 그를 계승한 총공회 구성원들의 지기 집중적 자세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백영희의 신학사상을 요약하면 첫째, 하나님 중심주의이다. 이것은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신봉하는 자세였다. 둘째, 성경제일주의이다. 이것은 백영희 신학의 근간이며 목회의 원리였다. 백영희는 천만인이 좋다고 해도 성경이 ‘아니오’하면 성경의 원리를 따랐다. 셋째, 교회사명주의이다. 그는 교회를 조직이나 정치기구로 보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도의 공동체로 보아 각 교회의 특성을 강조하여 이른바 개교회주의 원리를 제시하였다. 이것이 백영희 교회론의 특성이다.
백영희의 신학사상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 정리되고 체계화되어졌다. 저자는 그의 사상에 대한 종합적 연구가 무엇보다 필요하며 계승과 보완의 원리를 살려나가야 한다고 조언한다. 끝으로 저자는 “백영희는 ‘오직 성경’이라는 원리 속에서 사역하고 헌신하였다”라고 백영희 목사를 높이 평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