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표면이란 무엇인가
철학·미학·미술론·사진미학·동시대예술론을 통한 종합적 고찰
표면(surface)은 어떤 사물의 가장 바깥쪽 면이다. 그러나 철학과 예술에서 표면은 단순한 겉껍질이나 내부를 가리는 포장지가 아니다. 표면은 존재가 외부와 접촉하고, 타인에게 보이며, 시간과 사건의 흔적을 받아들이는 장소이다.
피부는 몸의 표면이고, 벽은 건축의 표면이며, 캔버스는 회화의 표면이다. 인화지는 사진의 물질적 표면이고, 모니터는 디지털 이미지가 나타나는 발광 표면이다. 얼굴과 옷차림은 사회적 자아가 나타나는 표면이며, 인터페이스는 인간과 데이터가 만나는 기술적 표면이다.
가장 압축해서 말하면 다음과 같다.
표면이란 내부의 단순한 겉면이 아니라, 존재가 외부세계와 만나고 감각되며 의미를 획득하고 흔적을 남기는 접촉의 장이다.
[1] 표면·평면·외관·피부·경계의 차이
표면과 비슷한 개념들을 먼저 구분해야 한다.
표면(surface)은 어떤 물체가 외부와 접촉하는 면이다. 평평할 필요는 없다. 피부·바위·천·물결도 모두 표면을 가진다.
평면(plane)은 기하학적으로 평평한 면이다. 모든 평면은 표면이 될 수 있지만 모든 표면이 평면은 아니다.
외관(appearance)은 사물이 외부에 나타나는 모습이다. 표면은 물질적일 수 있지만 외관은 빛·색·거리·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지각적 모습이다.
피부(skin)는 살아 있는 몸의 표면이다. 피부는 몸을 보호하면서 열·압력·고통·쾌감을 감지하고 외부와 물질을 교환한다.
경계(boundary)는 안과 밖, 하나와 다른 하나를 구분하는 작동이다. 표면은 경계가 물질적으로 나타나는 대표적인 형태이지만 모든 경계가 눈에 보이는 표면을 갖는 것은 아니다.
인터페이스(interface)는 서로 다른 체계가 만나 정보를 주고받는 접촉면이다. 스마트폰 화면은 물리적 표면이면서 사용자와 데이터가 만나는 인터페이스이다.
흔적(trace)은 사건이 표면에 남긴 변화이다. 표면이 기록을 받아들이는 장이라면 흔적은 그 표면에 새겨진 시간의 결과이다.
[2] 표면은 존재의 끝인가, 존재가 시작되는 곳인가
일반적으로 표면은 사물의 내부가 끝나는 곳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표면은 사물의 끝인 동시에 사물이 외부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곳이다.
우리는 사물의 내부를 직접 보지 않는다. 색·질감·윤곽·온도·무게처럼 표면을 통해 나타나는 감각적 성질을 먼저 경험한다. 내부에 무엇이 있는지도 표면에 나타난 변화로 추론한다.
사과의 붉은색, 나무껍질의 거친 질감, 사람 얼굴의 표정, 건물 벽의 균열은 모두 표면에서 지각된다.
따라서 표면은 존재의 부차적인 포장지가 아니다. 존재가 다른 존재에게 감각될 수 있게 되는 최초의 장소이다.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가 경계를 어떤 것이 끝나는 곳이 아니라 존재하기 시작하는 곳이라고 설명했듯, 표면 역시 사물의 바깥쪽 끝이면서 사물이 세계 속에서 현존하기 시작하는 자리이다. (Martin Heidegger, 「Building Dwelling Thinking」)
[3] 서양철학은 왜 표면보다 깊이를 중요하게 여겼는가
서양철학에서는 오랫동안 표면과 깊이가 위계적으로 구분되었다.
표면은 외양·감각·가상·변화와 연결되었고, 깊이는 본질·진리·정신·원인과 연결되었다. 보이는 외관 뒤에 진정한 본질이 숨어 있다는 사고방식이다.
이 관점에서 표면은 쉽게 속이고 변하며, 깊이는 안정적이고 진실한 것으로 여겨졌다. 사람의 외모보다 마음이 중요하고, 현상보다 본질이 중요하며, 작품의 형식보다 그 안에 담긴 의미가 중요하다는 생각도 이러한 구조에 의존한다.
그러나 표면을 거짓 외관으로만 규정하면 문제가 생긴다. 인간은 표면을 통하지 않고서는 어떤 깊이에도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표정·목소리·몸짓을 통하지 않고 타인의 내면을 알 수 없다. 증상을 통하지 않고 질병을 진단할 수 없으며, 문서·유물·사진 같은 표면적 흔적을 통하지 않고 과거를 이해할 수 없다.
깊이는 표면과 반대되는 독립적 실체라기보다 표면에 나타나는 차이와 흔적을 통해 추론되는 것이다.
[4] 표면과 현상은 같은 것인가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는 인간이 사물 자체를 직접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공간과 감각·지성의 형식을 통해 나타나는 현상(phenomenon)을 인식한다고 보았다.
이를 표면과 연결하면, 인간은 존재의 숨겨진 내부를 아무런 매개 없이 보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감각과 인식의 조건 안에서 나타나는 방식을 경험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상은 단순한 거짓 외관이 아니다. 인간에게 주어질 수 있는 현실의 방식이다.
표면을 본다는 것은 진실을 포기하고 겉모습만 보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존재가 우리에게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는지를 살피는 일이다.
사진도 마찬가지이다. 사진은 대상의 내면이나 본질을 직접 보여 주지 않는다. 대상이 특정한 시간·장소·빛·거리·렌즈·노출 안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보여 준다.
[5] 현상학에서 표면은 몸과 세계가 만나는 곳이다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는 지각을 외부의 정보를 내부 정신이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으로 보지 않았다. 몸은 이미 세계에 속해 있으며, 지각은 몸과 세계가 서로 얽히는 과정이다.
내가 손으로 사물을 만질 때 나는 사물을 느끼지만 내 손도 사물에 닿는다. 오른손으로 왼손을 만지면 오른손은 만지는 주체이면서 왼손에 의해 만져지는 대상이 된다.
표면은 주체와 객체가 단순히 마주 보는 선이 아니라 서로 접촉하고 역할을 교환하는 장소이다. 메를로퐁티의 ‘살(flesh)’과 ‘가역성(reversibility)’은 보는 자도 보이는 존재이며, 만지는 자도 만져지는 존재라는 상호 얽힘을 설명한다. (Maurice Merleau-Ponty의 지각·살·가역성)
따라서 피부는 몸을 세계로부터 완전히 차단하는 벽이 아니다. 세계가 몸 안으로 들어오고 몸이 세계에 반응하는 감각적 표면이다.
[6] 피부는 단순한 생물학적 외피가 아니다
피부는 몸의 가장 바깥쪽 경계이지만 완전히 닫혀 있지 않다. 피부는 외부 자극을 감지하고 체온을 조절하며 수분과 물질의 이동을 관리한다.
철학적·사회적으로 피부는 더 복잡한 의미를 갖는다.
피부에는 나이·질병·노동·상처·인종화·성별화의 흔적이 나타난다. 사회는 피부색·주름·흉터·문신을 통해 사람을 분류하고 정체성을 판단한다.
따라서 피부는 생물학적 표면이면서 사회적 의미가 기록되는 표면이다.
동시대 신체미술에서 피부는 정체성·고통·젠더·인종·상처·치유를 탐구하는 매체가 되었다. 피부는 타인과 접촉할 수 있게 하지만 원하지 않는 침투와 폭력에 노출시키기도 하는 위험한 경계이다. (Art Journal, 「Skins in Art in the Age of Global Instability」)
[7] 표면은 흔적을 받아들이는 장소이다
흔적은 대부분 어떤 표면 위에 남는다.
발자국은 흙의 표면에 남고, 흉터는 피부 표면에 남으며, 손때는 사물의 표면에 남는다. 사진은 빛이 감광면이나 센서에 작용하여 생긴 흔적이다.
표면이 없다면 흔적은 지속되기 어렵다. 표면은 외부의 힘을 받아들이면서 변화한다.
그러므로 표면은 수동적인 겉면이 아니다. 표면은 접촉·마찰·압력·빛·시간에 반응하는 기록 장치이다.
낡은 벽의 표면에는 비·바람·오염·보수·철거·주민의 생활이 겹쳐 있다. 오래 사용한 책상에는 손의 위치와 반복된 노동이 새겨져 있다. 얼굴에는 나이와 감정뿐 아니라 사회적 삶의 시간이 나타난다.
표면은 시간이 물질로 변환되는 장소이다.
[8] 표면과 깊이는 서로 반대되는가
표면과 깊이를 완전히 반대되는 것으로 보면 다음과 같은 이분법이 생긴다.
표면은 거짓이고 깊이는 진실이다.
표면은 형식이고 깊이는 내용이다.
표면은 감각이고 깊이는 사유이다.
표면은 장식이고 깊이는 구조이다.
표면은 외모이고 깊이는 내면이다.
그러나 실제로 표면과 깊이는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나무의 내부 상태는 껍질의 균열과 변색을 통해 나타난다. 사람의 감정은 표정과 몸짓에 나타나지만 그 표정이 감정의 완전한 복사본은 아니다. 건물의 구조적 문제는 벽의 균열로 나타나지만 모든 균열이 동일한 원인에서 생기는 것은 아니다.
표면은 깊이를 투명하게 보여 주지도 않고 완전히 감추지도 않는다. 표면은 깊이가 부분적이고 변형된 방식으로 나타나는 장소이다.
따라서 표면을 읽는다는 것은 겉모습만 소비하는 일이 아니라 표면에 나타난 징후와 흔적을 통해 보이지 않는 관계를 추론하는 일이다.
[9] 질 들뢰즈에게 표면은 접힘으로 만들어진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 내부와 외부를 완전히 분리된 두 영역으로 보지 않았다. 외부가 접히면 내부가 만들어지고, 내부는 다시 외부와 이어진다.
종이의 안쪽이 별개의 물질이 아니라 같은 종이의 접힘으로 만들어지듯, 인간의 내면도 외부의 언어·사회·권력·관계가 접혀 들어와 형성된다고 볼 수 있다.
들뢰즈의 주름 또는 접힘(fold)은 표면이 단순히 평평한 외피가 아니라 내부와 외부를 계속 만들어 내는 역동적 구조임을 보여 준다. (Gilles Deleuze의 접힘 개념)
이 관점에서 얼굴·피부·옷·건축의 벽·사진의 화면은 깊이를 가리는 표면이 아니다. 외부와 내부가 서로 전환되는 접힌 장소이다.
[10] 회화에서 표면은 무엇인가
회화의 표면은 캔버스·나무판·벽·종이와 그 위에 놓인 물감이 만나는 물질적 장이다.
전통적인 원근법 회화는 평평한 화면을 창문처럼 사용하였다. 실제 캔버스는 평평하지만 관객은 그 표면을 통과하여 그림 속 가상 공간을 본다고 느낀다.
이때 회화 표면은 가능한 한 보이지 않아야 한다. 붓질·캔버스 천·물감의 두께가 가려질수록 관객은 그림을 물질적 표면이 아니라 현실을 향해 열린 창문으로 경험한다.
그러나 근대 회화는 이 투명한 창문이라는 관념을 흔들었다.
인상주의는 붓질과 색채의 표면을 드러냈고, 후기인상주의와 입체주의는 원근법적 깊이를 해체하였다. 추상회화는 화면 뒤의 가상세계보다 캔버스 자체의 색·형태·물질성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근대 회화의 중요한 변화는 표면을 감추는 회화에서 표면을 스스로 드러내는 회화로 이동한 것이다.
[11] 클레멘트 그린버그와 회화의 평면성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는 모더니즘 회화가 자기 매체의 고유한 조건을 탐구해야 한다고 보았다.
회화가 조각·문학·연극과 구별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은 평평한 지지체, 그 지지체의 형태, 그 위에 놓인 색과 물감이다. 따라서 회화는 삼차원적 공간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것보다 자신의 평면성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린버그도 완전히 평평하고 아무런 환영이 없는 회화는 불가능하다고 인정하였다. 화면에 최초의 표시가 놓이는 순간 형상과 배경의 차이가 생기고 최소한의 공간적 환영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Clement Greenberg, 「Modernist Painting」)
그린버그에게 표면은 내용이 없는 단순한 바탕이 아니다. 회화가 회화일 수 있게 하는 매체적 조건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론은 회화를 지나치게 시각적·자율적 대상으로 한정하고 사회·역사·정치적 관계를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12] 알로이스 리글과 촉각적 표면
알로이스 리글(Alois Riegl)은 미술의 공간 표현을 촉각적 또는 햅틱한 방식과 광학적 방식으로 구분하였다.
촉각적 시각(haptic vision)은 가까운 거리에서 윤곽·질감·표면의 물질성을 더듬듯 보는 방식이다. 광학적 시각(optical vision)은 거리를 두고 대상과 공간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방식이다. (Alois Riegl의 촉각적·광학적 지각)
표면을 촉각적으로 본다는 것은 반드시 손으로 만진다는 뜻이 아니다. 눈이 사물을 빠르게 식별하고 지배하기보다 거친 질감·입자·주름·색의 농담을 따라 천천히 이동하는 것이다.
사진에서도 선명한 원근과 명확한 형태는 관객을 이미지 속 공간으로 이끈다. 반면 입자·흐림·극단적인 클로즈업·거친 인화지는 눈이 화면의 표면을 만지듯 보게 한다.
[13] 촉각적 시각과 사진의 표면
로라 U. 마크스(Laura U. Marks)는 촉각적 시각성(haptic visuality)을 관객이 이미지 속 대상을 멀리서 명확하게 식별하기보다 이미지 표면의 질감과 접촉하는 듯한 보기로 설명하였다.
입자가 거칠거나 초점이 흐리고, 대상이 지나치게 가까이 있거나 부분적으로만 보이면 관객은 그것을 즉시 알아보지 못한다. 눈은 화면을 빠르게 통과하지 못하고 표면을 더듬는다. (Laura U. Marks의 촉각적 시각성)
이때 흐림과 입자는 기술적 실패로만 작동하지 않는다. 관객의 보는 속도를 늦추고 시각을 촉각·기억·신체 감각과 연결할 수 있다.
그러나 흐리거나 거친 사진이 자동으로 촉각적이거나 예술적인 것은 아니다. 그 형식이 작품의 대상·기억·신체·시간과 어떤 관계를 만드는지가 중요하다.
[14] 사진은 창문인가, 표면인가
사진에는 두 가지 상반된 관점이 존재한다.
첫 번째는 사진을 세계를 보여 주는 투명한 창문으로 보는 관점이다. 관객은 인화지나 화면을 의식하지 않고 사진 속 사람·풍경·사건을 본다.
두 번째는 사진을 빛·화학물질·종이·잉크·픽셀로 만들어진 불투명한 물질적 표면으로 보는 관점이다. 이 관점에서는 사진이 무엇을 보여 주는가뿐 아니라 어떤 재료와 기술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가 중요하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우리가 사진을 볼 때 사진이라는 물체보다 사진 속 대상을 보기 때문에 사진 자체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고 설명하였다. 사진의 지시대상과 사진 표면이 너무 밀착되어 있다는 것이다. (Roland Barthes, 『Camera Lucida』의 사진과 지시대상)
우리는 가족사진을 보면서 “이것은 종이 위의 은입자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이분은 아버지이다”라고 말한다. 사진의 물질적 표면을 통과해 대상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사진은 투명한 창문이 아니다. 종이의 질감·광택·크기·색조·손상·액자·설치 위치가 사진의 의미와 관객의 경험을 바꾼다.
사진은 세계를 보여 주는 이미지이면서 동시에 세계 속에 존재하는 물건이다.
[15] 사진 표면에는 두 종류의 깊이가 있다
사진에는 재현된 깊이와 물질적 깊이가 있다.
재현된 깊이는 원근법·초점·명암·크기 차이·중첩으로 만들어진 사진 속 공간이다. 관객은 평평한 사진에서 멀고 가까운 공간을 본다.
물질적 깊이는 인화지·유제·잉크·스크린·액자·유리·표면 손상처럼 사진이라는 물체가 가진 실제 두께와 구조이다.
전통적인 사진에서는 재현된 공간이 중요했기 때문에 물질적 표면은 가능한 한 감추어졌다. 그러나 동시대 사진에서는 종이를 접거나 찢고, 벽에 직접 인화하거나, 천·금속·유리 위에 출력하면서 사진의 물질성을 드러낸다.
사진이 무엇을 보여 주는지뿐 아니라 사진이 어떤 물체인지를 작품의 일부로 만드는 것이다.
[16] 사진의 표면은 빛을 받은 흔적이다
사진 표면은 이미지를 담는 빈 그릇이 아니다. 빛이 물질이나 센서에 작용하여 변화가 발생한 장소이다.
포토그램(photogram)은 물체를 감광지 위에 직접 올려놓고 빛을 비춰 만든다. 렌즈를 통해 대상을 재현하는 일반 사진과 달리 물체·빛·감광면의 직접적인 관계가 전면에 드러난다. (Victoria and Albert Museum, 카메라 없는 사진과 포토그램)
포토그램에서 사진 표면은 이미지를 받는 수동적 바탕이 아니다. 물체와 빛이 만나 사건을 일으키는 장소이다.
일반 사진 역시 대상의 빛이 표면에 도달한 결과이지만 관객은 그 물질적 과정을 잊고 재현된 장면을 본다. 포토그램은 우리가 잊고 있던 사진 표면의 물질성과 접촉성을 다시 드러낸다.
[17] 빌렘 플루서와 의미 있는 표면
빌렘 플루서(Vilém Flusser)는 이미지를 ‘의미 있는 표면(significant surface)’으로 설명하였다. 이미지는 공간과 시간의 차원을 평면 위에 압축한다.
문자는 일정한 방향을 따라 선형적으로 읽지만 이미지는 표면을 훑어보며 읽는다. 시선은 이미지의 한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이동하고 다시 되돌아오면서 요소들의 관계를 구성한다. (Vilém Flusser, 「Line and Surface」)
사진 표면은 현실을 그대로 펼쳐 놓은 것이 아니다. 렌즈·카메라 프로그램·노출·센서·색 처리라는 추상적 개념이 표면 위에서 이미지로 변환된 것이다.
따라서 사진을 표면적으로 본다는 말은 반드시 얕게 본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사진의 표면을 세밀하게 훑으면서 요소들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해독하는 적극적인 읽기일 수 있다.
[18] 표면과 장식은 같은가
표면은 흔히 장식과 연결된다. 벽지·문양·색채·화장·옷·건축 외장은 구조 위에 덧붙인 부차적 요소로 여겨졌다.
그러나 고트프리트 젬퍼(Gottfried Semper)는 건축의 기원을 벽의 구조보다 직조와 피복에서 찾았다. 벽을 덮는 표면과 장식은 건축 구조에 나중에 붙은 불필요한 요소가 아니라 공간을 구획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근본적 요소라는 것이다. (Gottfried Semper의 피복·직조·건축 표면 이론)
건물의 외피는 내부 구조를 감싸는 포장지에 그치지 않는다. 건물의 공적 얼굴을 만들고, 내부와 외부의 관계를 조절하며, 계급·권위·문화적 정체성을 표현한다.
장식도 구조와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다. 장식은 표면을 통해 사회적 의미를 조직한다.
[19] 사회적 표면으로서의 얼굴과 옷
사람의 얼굴·옷·말투·자세는 타인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사회적 표면이다.
사회는 사람의 표면을 읽어 성별·직업·계급·나이·건강·국적을 추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판단은 정확한 본질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학습된 시각적 코드를 적용하는 것이다.
초상사진은 인물의 얼굴과 몸을 보여 주지만 그 사람의 전체 인격과 삶을 보여 주지는 않는다. 사진가는 표정·조명·배경·옷·포즈를 통해 인물의 사회적 표면을 구성한다.
따라서 얼굴을 찍는 것은 내면을 직접 촬영하는 일이 아니다. 인물이 카메라와 사진가와 사회적 관습 앞에서 자신을 어떻게 표면화하는지를 촬영하는 일이다.
표면은 정체성을 감추는 가면일 수 있지만 정체성을 수행하고 만들어 내는 수단이기도 하다.
[20] 상품과 소비사회에서 표면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상품의 포장·광고·브랜드·쇼윈도·SNS 이미지는 사물의 사용가치보다 보이는 모습을 강조한다. 소비자는 상품의 물질적 기능뿐 아니라 상품 표면에 부착된 이미지와 사회적 의미를 구매한다.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은 포스트모던 문화의 특징으로 새로운 평면성과 깊이 없음(depthlessness)을 지적하였다.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경계가 약해지고 역사적 깊이보다 이미지·스타일·복제·강렬한 표면 효과가 지배한다는 것이다. (Fredric Jameson, 「Postmodernism, or the Cultural Logic of Late Capitalism」)
그러나 ‘깊이 없음’은 작품에 의미가 전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의미가 숨겨진 내면에 있다는 전통적 사고가 약화되고, 이미지의 배열·복제·유통·상호 참조가 표면에서 작동한다는 뜻에 가깝다.
동시대 이미지에서 비평은 표면 뒤에 감춰진 유일한 본질을 찾는 일보다, 표면들이 어떻게 복제되고 연결되고 소비되는지를 분석하는 일이 된다.
[21] 디지털 화면은 표면인가, 창문인가, 인터페이스인가
스마트폰과 컴퓨터 화면은 세 가지 성격을 동시에 가진다.
첫째, 유리·금속·발광소자로 이루어진 물질적 표면이다.
둘째, 사진·영상·가상공간을 보여 주는 창문이다.
셋째, 사용자가 만지고 선택하며 데이터를 조작하는 인터페이스이다.
레프 마노비치(Lev Manovich)는 새로운 미디어가 회화·사진·영화의 직사각형 프레임을 이어받으면서 인터페이스·데이터베이스·소프트웨어라는 새로운 형식을 발전시켰다고 분석하였다. (Lev Manovich, 『The Language of New Media』)
종이사진의 표면은 대체로 하나의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담는다. 디지털 화면의 표면은 수없이 많은 이미지가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가변적 표면이다.
따라서 디지털 이미지의 실제 구조는 화면에 보이는 픽셀만이 아니다. 코드·알고리즘·서버·데이터베이스·사용자 기록이 화면 뒤에서 작동한다.
화면은 깊이를 없앤 표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 기술적·경제적 구조를 감추는 표면이다.
[22] 히토 슈타이얼과 이동하는 이미지의 표면
히토 슈타이얼(Hito Steyerl)은 ‘빈곤한 이미지(poor image)’를 압축·복제·다운로드·재편집되면서 인터넷을 이동하는 저해상도 이미지로 설명하였다.
이러한 이미지의 표면에는 화질 저하·노이즈·픽셀 깨짐·자막·워터마크가 나타난다. 이것은 단순한 기술적 결함이 아니라 이미지가 어떤 유통 과정을 거쳤는지를 보여 주는 흔적이다. (Hito Steyerl, 「In Defense of the Poor Image」)
고해상도 이미지의 매끈한 표면은 제작과 유통 과정을 감출 수 있다. 반대로 손상된 이미지 표면은 복제·검열·불법 공유·접근성·플랫폼 경제의 흔적을 드러낸다.
디지털 표면의 품질은 순수한 미학 문제가 아니라 이미지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과 그것을 소유하고 유통하는 권력의 문제이다.
[23] 표면은 정치적으로 중립적인가
표면은 정치적으로 중립적이지 않다.
도시는 깨끗한 거리·새 외벽·조경·간판 정비를 통해 특정한 이미지를 만든다. 그러나 그 매끈한 표면 뒤에는 청소노동·감시·노점 철거·빈곤의 은폐·재개발이 존재할 수 있다.
도시의 표면을 관리한다는 것은 무엇을 보이게 하고 무엇을 지울지 결정하는 일이다.
낙서는 누구에게는 훼손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존재와 저항의 흔적이다. 노숙인의 물건은 행정기관에는 제거해야 할 도시의 오염으로 보일 수 있지만 당사자에게는 생존의 공간이다.
표면의 정돈은 질서를 만들지만 동시에 사회적 갈등과 차이를 보이지 않게 만들 수 있다.
따라서 동시대예술은 매끈한 표면을 단순히 찬양하기보다 그 표면이 무엇을 감추고 어떤 노동과 권력에 의해 유지되는지를 질문한다.
[24] 표면을 다룬다고 피상적인 작업인가
표면적이라는 말은 흔히 생각이 얕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예술에서 표면을 다루는 것과 피상적인 작업은 다르다.
피상적인 작업은 대상의 외관만 반복하고, 그 외관을 만든 시간·물질·사회적 관계를 질문하지 않는 작업이다.
표면을 깊이 있게 다루는 작업은 표면에 무엇이 나타나고 무엇이 감춰졌으며, 누가 그 표면을 만들고 관리하고 훼손했는지를 탐구한다.
따라서 깊이는 표면 뒤에 숨어 있는 비밀스러운 본질의 양을 뜻하지 않는다. 하나의 표면이 다른 시간·사물·신체·제도와 맺는 관계를 얼마나 정밀하게 탐구했는지를 뜻한다.
표면을 자세히 본다는 것은 얕게 보는 일이 아니다. 제대로 본 표면은 하나의 역사이다.
[25] 추상사진에서 표면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추상사진은 대상의 이름과 공간적 깊이를 약화시키고 선·색·질감·명암·입자를 전면화한다.
벽의 벗겨진 페인트, 물 위의 반사, 유리의 얼룩, 피부의 일부, 금속의 녹을 가까이 촬영하면 대상의 정체보다 표면의 시각적 관계가 먼저 나타난다.
이때 표면은 대상을 감추는 장치가 아니라 대상을 다른 방식으로 보이게 하는 장치이다.
그러나 대상을 알아보기 어렵게 찍었다고 모두 추상사진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단순한 확대나 절단을 넘어 표면의 형식이 어떤 감각과 사유를 만드는지가 중요하다.
추상사진에서 표면은 다음과 같이 작동할 수 있다.
대상의 이름을 지연시킨다.
원근법적 깊이를 약화시킨다.
질감과 색채를 독립적인 사건으로 만든다.
눈이 화면을 촉각적으로 더듬게 한다.
사물의 기능보다 물질적 존재를 드러낸다.
[26] 표면사진은 무엇을 찍는 사진인가
표면사진은 벽이나 피부처럼 표면을 가진 대상을 촬영하는 사진만을 뜻하지 않는다. 표면이 의미를 생산하고 흔적을 받아들이며 내부와 외부를 조절하는 방식을 탐구하는 작업이다.
다음과 같은 주제가 가능하다.
1. 도시가 낡은 흔적을 지우고 새 표면을 만드는 과정
2. 아파트 외벽과 내부 생활 사이의 차이
3. 사람의 얼굴·피부·옷에 새겨진 시간과 사회적 규범
4. 병원에서 몸의 표면을 검사하고 분류하는 시선
5. 유리창·거울·스마트폰 화면에 중첩되는 현실과 이미지
6. 오래 사용한 사물의 마모와 손때
7. 페인트·광고·간판이 도시의 역사를 덮어 가는 과정
8. 인화지를 접고 찢고 긁어 사진을 이미지가 아닌 물체로 만드는 작업
9. 저해상도·압축·픽셀 오류에 나타나는 이미지 유통의 흔적
10. 깨끗하게 관리된 표면과 그 관리를 수행하는 보이지 않는 노동
표면사진의 핵심은 예쁜 질감을 수집하는 것이 아니다. 표면이 어떤 관계와 시간을 드러내고 감추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27] 표면을 사진으로 작업하는 방법
1. 어떤 표면을 다루는지 구체화한다.
물질의 표면인지, 신체의 표면인지, 도시의 표면인지, 사회적 외관인지, 디지털 화면인지 구분한다.
2. 표면을 만든 힘을 조사한다.
마찰·노동·노화·질병·보수·재개발·화장·검열·알고리즘 등 무엇이 그 표면을 만들었는지를 확인한다.
3. 전체와 세부를 함께 촬영한다.
극단적인 클로즈업만 계속되면 장소와 사회적 맥락이 사라질 수 있다. 표면의 질감, 표면이 속한 사물, 주변 공간을 함께 구성하는 것이 좋다.
4. 빛의 방향을 통제한다.
정면광은 색과 평면성을 강조하고, 측면광은 요철·상처·주름을 드러낸다. 반사광은 표면 위에 다른 공간을 중첩한다.
5. 초점과 심도를 개념적으로 사용한다.
전체 표면을 선명하게 보여 줄 것인지, 일부만 드러내어 지각을 흔들 것인지 결정한다.
6. 표면이 변화하는 과정을 기록한다.
같은 장소를 반복 촬영하면 표면은 고정된 사물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생성되고 소멸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7. 출력 재료를 작업과 연결한다.
낡은 벽의 사진을 지나치게 매끈한 아크릴 표면으로 제작할 것인지, 거친 종이·천·금속에 출력할 것인지는 작품의 의미를 바꾼다.
8. 사진의 물질적 표면도 작품에 포함한다.
긁기·접기·겹치기·투과·절단·박음질·재인화는 사진을 단순한 이미지에서 물질적 사건으로 전환한다.
[28] 표면 담론에서 피해야 할 오류
첫째, 표면은 얕고 깊이는 진실하다고 단정하는 오류이다.
우리는 표면을 통하지 않고 깊이에 접근할 수 없다.
둘째, 표면이 내면을 그대로 보여 준다고 믿는 오류이다.
표정·피부·건물의 균열은 내부 상태의 징후이지만 하나의 원인으로 곧바로 환원할 수 없다.
셋째, 모든 거친 질감을 시간과 기억의 흔적으로 미화하는 오류이다.
질감의 원인과 역사적 맥락이 제시되지 않으면 장식적 형식에 머문다.
넷째, 매끈한 표면은 거짓이고 거친 표면은 진실하다고 보는 오류이다.
거친 표면도 연출될 수 있고, 매끈한 표면도 특정한 노동·기술·정치의 진실을 드러낼 수 있다.
다섯째, 사진의 내용만 보고 사진의 물질적 표면을 무시하는 오류이다.
같은 이미지도 작은 휴대전화 화면, 책, 대형 인화, 빛나는 광고판에서 서로 다른 작품이 된다.
여섯째, 표면을 장식과 동일시하는 오류이다.
표면은 장식이 놓이는 자리이지만 구조·감각·정체성·권력이 작동하는 매체이기도 하다.
[29] 경계·흔적·표면의 관계
경계·흔적·표면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지만 다른 개념이다.
경계는 무엇과 무엇을 나눈다.
표면은 그 경계가 감각되고 접촉되는 물질적 장소이다.
흔적은 접촉과 사건이 표면에 남긴 변화이다.
피부는 몸의 표면이다. 피부는 몸과 외부를 나누는 경계이며, 흉터는 그 경계에 남은 사건의 흔적이다.
벽은 건축의 표면이다. 벽은 안과 밖을 나누는 경계이며, 균열·낙서·변색은 시간과 사용이 남긴 흔적이다.
사진의 인화지나 화면은 이미지의 표면이다. 프레임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나누는 경계이며, 사진영상은 한때 카메라 앞에 존재했던 빛의 흔적이다.
이를 하나의 문장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경계가 차이를 만들고, 표면이 그 차이를 감각할 수 있게 하며, 흔적은 그 표면에서 일어난 시간과 사건을 증언한다.
[30] 종합 결론
표면은 사물의 가장 바깥쪽 면이지만 단순한 겉껍질이 아니다.
철학적으로 표면은 존재가 감각세계에 나타나는 장소이다.
현상학적으로 표면은 몸과 세계가 서로 접촉하는 장이다.
신체론에서 피부는 자아를 보호하면서 타인과 연결하는 감각적 경계이다.
미학적으로 표면은 색·질감·빛·형태가 나타나는 감각의 장이다.
회화에서 표면은 재현된 깊이를 떠받치는 평면이자 물감과 지지체의 물질적 장소이다.
사진에서 표면은 이미지를 보여 주는 창문이면서 빛의 흔적을 담은 물질적 사물이다.
사회적으로 표면은 얼굴·옷·건축·도시를 통해 정체성과 질서를 구성한다.
정치적으로 표면은 무엇을 보이게 하고 무엇을 가릴 것인지를 결정한다.
디지털 환경에서 표면은 인간과 데이터가 만나는 화면이자 인터페이스이다.
동시대예술에서 표면은 깊이의 반대가 아니라 물질·시간·권력·기억이 만나는 작업의 현장이다.
따라서 표면과 본질을 단순히 반대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본질이 표면 뒤에 완성된 상태로 숨어 있고 예술가가 그것을 꺼내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깊이라고 부르는 것은 표면의 흔적과 변화와 관계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구성된다.
좋은 표면사진은 벽·피부·물결의 질감을 아름답게 보여 주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누가 그 표면을 만들고, 무엇이 그것을 만졌으며, 어떤 시간이 그 위를 지나갔고, 무엇이 덮이거나 지워졌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결국 표면은 깊이를 가리는 막이 아니다.
표면은 존재가 세계에 모습을 드러내는 최초의 장소이며, 경계가 몸을 얻고 흔적이 시간을 기록하는 감각적 장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