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방끈이 짧다. 희망을 걸거나 계획을 세울 근거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황금 같은 20 대 초반에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냈다. 야간 대학을 다니다 중퇴하고 허무와 절망 가운데 세월을 보내다가 탈출구로 신학교를 택했다. 그러니까 사명감 때문에 신학교를 간 것이 아니고 할 일이 없어서 신학교를 간 셈이다. 그나마도 한 학기를 다니고 더 이상 다닐 수가 없어서 휴학을 해야 했다. 돈 때문에 다니다 말다 하다가 고교 졸업 후 12년 만에 겨우 졸업을 했다.
신학교 3학년 때 부업으로 수원성결교회 청년회 담당 교육전도사를 했다. 집은 서울의 끝인 구파발, 발 바닥에 땀이 나게 전철 안에서 뛰어도 2시간 이상 반 이상 걸리는 거리였다. 부임한지 한 달이 됐는데 아이 출산 날짜에 외부 강사를 초청해서 부흥회를 하도록 이미 날짜가 잡혀 있었다. 부흥회가 늦게 끝나서 전철이 끊어져 집에 가지를 못해서 이튿날 새벽에 집에 갔다. 아내가 혼자서 택시를 타고 조산원에 가서 아기를 낳고는 돌아와서 누워 있었다. 방에 들어서자 아기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누워 있는 아내를 보니 눈물이 왈칵 솟아올랐다. 지금 생각하면 도대체 한 생명이 태어나는데 교회청년회 부흥회가 무슨 대수란 말인가? 그러나 그 때는 그게 아니었다. 누가 나에게 강요한 것도 아니고 담임 목사님에게 이야기하면 양해도 해 주었을 터이지만 내 자신이 그렇게 맹목적이었다.
내가 신학대학을 다니고 있을 때는 유신체제였기 때문에 학생회도 군사편제로 짜여진 학도호국단으로 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종합대학의 총학생회장은 사단장, 단과대학학생회장은 연대장이라고 호칭하고 간부들을 학교에서 임명했었다. 내가 다니고 있던 신학대학은 학생수가 200여명 밖에 안 되는 학교였기 때문에 학생회장을 중대장이라고 불렀다. 학도 호군단 중대장을 임명할 때였다. 호국단이 군대식 편제이기 때문에 대장은 통상적으로 어느 대학이나 군대를 갔다 온 사람이 맡는 것이 통례가 되어있었고 내 위의 학년의 중대장도 복학생이었다. 우리 학년에서는 군대를 갔다 온 사람이 나 혼자 밖에 없는데다가 나이도 내가 제일 많았고 학점도 간부가 되기에 지장이 없었다. 당연히 내가 호국단 중대장이 될 줄 알고 학생처장도 중대장을 해야 할 거라고 했는데 막상 신학기가 시작되자 군대도 갔다 오지 않은 가장 나이 어린 학생이 중대장으로 발표가 되었다. 30이나 된 애 아버지 늙은 학생의 입장에서 그까짓 중대장이 못된 것은 섭섭할 일도 아니다. 그러나 당시는 어렵게 학교를 다닐 때여서 중대장이 되면 면제받을 수 있었던 등록금을 면제 받지 못하게 된 것이 무지하게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순전히 돈 때문이었다.
학장의 입장에서는 나같이 반항끼가 있는 인물 보다 양순하고 말 잘 듣는 학생이 중대장이 되는 것이 편했을 것이다. 그것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는데 나를 정말 불쾌하게 만든 것은 나에게 훈련부장을 맡으라는 것이었다. 중대장이라면 몰라도 21,22살 짜리 애들하고 같이 호국단 간부활동을 하라는 것에 기분이 더러워서 못하겠다고 했더니 학생처장이 학장님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못하겠다고 버티니까 학생처장이 아무 일도 안 해도 좋으니 자기 얼굴을 보아서라도 학장의 뜻에 거부하지 말고 제발 가만히 있어달라는 것이다. 내가 자란 교회의 담임 목사였던 학생처장이 간절히 부탁을 하는데 차마 끝까지 거절 할 수가 없어 마지 못해 주저 앉기로 했다.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더욱 열 받는 일은 방학 기간에 호국단 중대장은 학생간부 수련차 대만으로 해외연수를 가는데 나는 훈련부장이기 때문에 새마을연수원으로 교육을 받으러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기가 차는 일이었지만 또 다시 순종하는 마음으로 새마을 연수원으로 교육을 받으러 갔다. 옳고 그름을 막론하고 권위에 대해선 일체의 거부를 하지 않고 오직 인내와 순종만 미덕으로 삼는 똥개 훈련이 잘 되어 있었던 때였다.
수원에 있는 새마을 교육원에 가보니 그때까지 내가 받았던 교육 중에서 최상의 교육시스템이 마련되어 있었다. 박정희가 ‘새마을’ 표가 붙은 것에는 무조건 돈을 아끼지 않고 지원해줄 때였기 때문에 연수원에서 진행되는 모든 것이 나무랄 데 없이 세련되고, 풍족하게 돌아 가고 있었다.
예를 들면 요즘 같은 복사기도 없던 30년 전에 2주간의 교육을 끝내는 수료식에 벌써 2주간의 모든 활동을 담은 앨범이 인쇄되어 나와 있을 정도였다. 나는 정문을 나오자 마자 쓰레기통에 버렸지만.
60년대에 대학을 다니던 나로서는 10년만에 학생들과 어울리는 것이었다. 대부분이 학교당국이 믿을만한 학생들만 뽑아서 간부를 맡겼기 때문에 체제비판적이거나 반항적인 학생들은 별로 없었다. 성향이 그렇기 때문에 수동적이고 무기력하며 냉소주의에 젖어 있었다. 지방대학에서 온 학생들의 의식수준은 더욱 한심했다.
사건이라면 당시 어용경제학자로 유명했던 연세대학교의 한기만이라는 교수라는 작자가 ‘3공의 경제치적’에 대해서 강연을 하는 시간에 고대생 한 명이 벌떡 일어서더니 “씹할 놈들 웃기는 소리 하지마. 누구를 놀리는 거야 뭐야”하고 소리를 지른 사건이 발생한 것이었다. 아마도 경제에 나같이 무지한 사람의 귀에도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들리는 부분이 있던데 경제를 전공하고 의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거부 반응을 느낄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고대생의 발작적 거부 반응을 이해를 하면서도 그 학생에게 혹시 어떤 불이익이 오지나 않을까 염려하는 분위기였다. 분위기가 갑자기 어색해졌지만 연수원 교수들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계속 교육을 하는 동안 여러 가지 경험을 했기 때문에 무난하게 수습을 했다. 연수원에서는 토론의 자유가 얼마든지 보장되어 있으니까 차근차근 토론을 하자며 발작을 일으킨 학생을 진정시켰다.
방마다 먼저 거쳐간 수료생들이 쓴 수료 소감문이라는 것을 비치해 놓고서 나중에 오는 사람들이 읽어 보도록 해 놓았기에 한번 흩어보았다. 서울법대 학생회 간부 학생이 쓴 글이 있기에 유심히 보았다..
“이제까지 과에서 일 년에 한두 명씩 공부하다가 정신이 이상해져서 학업을 그만두는 동료가 생길 때 마다 안됐다는 생각 보다는 ‘아, 경쟁자가 하나 줄어 들었구나’하고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이곳에 와서 교육을 받는 동안 그 동안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어서 돌아간다.”
대강 이런 내용이었다. 세상에, 후회하고 반성할 것도 수준이 있지 서울법대 학생회 간부라는 사람의 의식수준이 새마을 교육 받고 바뀔 정도였다는 것이 충격이 아닐 수가 없었다. 비록 반성을 한다고 했지만 법대 3학년생이 될 때까지 이런 정도의 생각을 했던 사람이 반성을 하면 얼마나 했겠나 싶었다. 그 정도의 윤리적 감각을 가진 사람들이 사법고시에 패스를 해서 판, 검사가 되는 것이었다.
이처럼 사연 많은 나의 가방끈이 하마터면 다시 이어져 길어질 뻔 했었다. 호주로 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 시내에서 차를 주차시키기 위해서 뱅뱅 돌다가 우연히 골목에 있는 시드니의 단 하나 밖에 없는 유니테리언 교회를 발견했다. 한국에는 없어 교회사책에서 보았던 교회가 있기에 신기하게 생각해서 그 다음 주일날 다시 갔다.
그 후 여러 해 나가면서 내가 하고 있던 일로 교회 장소를 사용하기도 하고 영주권을 얻는 일에도 여러모로 도움을 받기도 했다. 당시 나는 유학생 센터를 하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나를 따라서 여러 명의 유학생들이 그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130 년 동안 한 사람의 동양인도 없던 교회에 한국 사람들이 들어와서 호주인들은 처음으로 영어를 못하는 사람들과 교제하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유니테리언 교회는 어떤 신조나 교리도 주장하지 않기 때문에 교회마다 색깔이 완전히 달라서 흥미가 있었다. 예를 들면 내가 방문 했던 교회 중에 마이야미 교회는 예수, 석가, 무하마드, 힌두교의 신의 걸게 그림을 크게 걸어 놓았고 하와이 교회는 고급 예술가들의 사롱 같은 분위기였고 캐나다의 몬트리얼 교회는 활발한 YMCA같은 분위기였고 시드니 교회는 휴머니스트 클럽 같은 분위기였다. 특히 하와이의 호놀룰루 유니테리언 교회는 오버마를 키운 외할아버지와 할머니, 어머니가 다녀서 어린 시절 오버마도 다니던 교회였다고 해서 인상이 깊었다.
유니테리언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서 내가 목사라는 것을 알고 설교를 해달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몇 달에 한 번씩 영어로 어렵게 겨우 겨우 설교를 하게 되었는데 교회 운영위원회에서 유니테리언 목사가 될 의사가 있으면 장학금을 대줄 터이니 하버드 대학(원래 하버드 대학은 유니테리언이 세운 학교이다.)에 가서 공부를 해보라고 정식으로 문서로 제안을 해왔다.
나이 50에 생각지도 않게 찾아온 기회가 기쁘기는 했지만 현실적으로 당장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처지에서 유학을 간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호주 백인들이 갓 이민을 온 한국인의 상황을 이해할 리가 없기 때문에 어떻게 이야기 할까를 고심하다가 "유감스럽게도 내 영어 실력이 하버드에 가서 공부를 할 정도가 되지 못한다."고 정중하게 사양을 했다. .
실제로 영어 문제는 사실이기도 했다. 다시 한 번 돈 때문에 가방끈은 다시 이어지지 못했지만 마음의 가방끈은 항상 놓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