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앞 마을, 일송(一松)과 백하(白下)
▲ 반변천 너머 백운정에서 바라본 내앞 마을. 아래쪽의 내가 반변천이다.
지명은 마을의 생성과 역사, 지리적 특성 따위를 담고 있을 뿐 아니라, 한 지역의 공동체적 삶을 어우르고 있는 정서적 지리적 표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행정구역이 정비된 1914년 이후 사람들이 살아가는 마을이름에서 삶의 향기와 정겨움은 사라져 버렸다. 이 식민 관리들은 고유어로 이루어진 마을이나 지명을 '반듯하게' 한자로 바꾸었다. 애당초 한자 없이는 표기 자체가 어려운 문자를 쓰던 일제로서는 우리말 지명의 의미 따위를 고려할 여지는 없었을 것이다. (광복 후의 우리 관리인들 무어가 달랐을까만.)
▲ 큰종택 대문에 붙은 입춘방. < 납일월지광명 응천지지개합> 낯이 선 내용이다.
그래서 공주의 '한밭'이 반듯하게 '대전(大田)'이 된 것처럼 안동 임동의 무실은 수곡(水谷)이 되고, 임하의 내앞마을은 '천전리(川前里)'가 되었다. 의성 김씨 집성촌으로 한말과 근대사의 소용돌이를 겪어온 이 마을은 영양 일월산에서 발원하여 안동 남서쪽을 가르며 흐르는 반변천(半邊川)을 발밑에 두어 '내앞' 마을이다.
내앞 마을은 청계(靑溪) 김진(金璡)을 중시조로 모시는 의성김씨 내앞 종택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풍수에서 이르는 '달빛 아래 비단을 빨아 널어놓은 형국'의 마을이다. 이 집은, 청계의 다섯 아들이 모두 과거에 합격했다 하여 '오자등과택(五子登科宅)'이라 불리는데 조선조에 왕명을 받은 금부도사의 방문을 세 번이나 받은, 조선 선비의 기백과 의기가 서린 곳이다. 안동 지역에서 회자되었다는, '유가(儒家)에는 3년마다 금부도사가 드나들어야 하고, 갯밭에는 3년마다 강물이 드나들어야 한다'는 속담은 그런 선비 정신의 직접적 표현이다.
▲ 내앞의 의성 김씨 큰종택. 종택 오른편에는 귀봉종택이 있다.
이 종택은 굳이 당호를 붙이자면 청계의 장자인 김극일의 아호를 따 약봉(藥峯) 종택이 되어야 하지만, 내앞 사람들은 따로 당호를 붙이지 않고 '큰 종가'로만 부른다. 보통 명사를 고유 명사로 사용하고 있는 셈인데 이는 '소속된 씨족 집단 구성원 모두에게 확고한 정체성의 표지로 다가가 종족 단합의 상징물이 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16세기에 불타 없어졌던 것을 넷째 아들인 학봉(鶴峯) 김성일 선생이 재건했는데, 학봉이 북경을 다녀와 그곳 상류층 주택의 도본(圖本, 설계도)을 그려다 완성했기 때문에, 그 배치나 구조에 있어서 독특한 점이 많다 한다. 예컨대 '□'자형 안채와 '―'자형 사랑채가 행랑채와 기타 부속채로 연결되어 전체적으로 '巳'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든가, 안채는 다른 '□'자형 평면과 달리 안방이 외부 쪽에 놓이고 커다란 대청이 이중으로 된 점도 그렇다. 사랑채는 안채보다 오히려 깊숙이 별채보다 외진 곳에 배치되어 내객이 행랑채의 대문을 거치지 않고 곧장 사랑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다.
하회마을을 다녀온 이라면, 거기 있는 충효당이나 양진당 따위의 고택과는 전혀 다른 모습인 이 집의 구조가 낯설 수밖에 없다. 특히 안채의 이중 삼중의 높이로 이루어진 대청은 당대의 폐쇄적 신분제도의 일단을 보여주는 듯했는데 문득, 거기 고여 있는 것은 저 중세의 어둠은 아닐까 하고 나는 잠깐 생각했다.
▲ 큰종택의 대청. 높낮이가 2중 3중으로 되어 있다.
종택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는 귀봉종택은 청계의 차자 귀봉 김수일의 집이다. 역시 만만찮은 구조의 집인데, 얼추 훑어보아도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동선(動線)이 고려된 흔적은 전혀 없다. 그 뜰 아래 솟을대문을 내려다보면서 방문객들이 나눈 대화 한 토막. 요지를 따 정리하면 대충 이렇다. 불을 지른 건 40대 초반의 여교사다.
아이고, 양반으로 한 번 살아 보았으면 좋겠다.
양반으로 살아가기도 만만찮았을 터인데? 의무도 그렇고…….
의무? 양반에겐 의무가 별로 없지. 권리만 있고.
납세와 병역의 의무도 지지 않았지?
글을 읽어야 하고 벼슬길에 나아가야 하는 게 좀 스트레스였을까?
부엌에서 대궁밥을 먹고 찬물에 손을 학대 받아야 하는 종들에 비할까?
글 읽는 게 맞는 이들에게는 문제가 아니었겠지만, 공부라면 몸서리 치는 이들에게 글공부는…….
거기다 과거의 부담은 얼마고?
탁월한 시인이었던 허균조차도 아내로부터 '공부를 게을리 마셔요. 제 숙부인(淑夫人) 직함이 그만큼 늦어집니다.'라는 압력을 받았던데?
거기다 동생이 먼저 출사(出仕)하고 나면, 형은 아마 죽을 지경이었을걸?
대체로 먹물들의 논의는 그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결론 없이 대화를 막고 들른 곳은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의 생가다. 좀 전에 만났던 고가에 비하면 신식으로 지어진 집이다. 대문 안쪽에 세워진 안내문이 없다면 무심코 지나칠 평범한 가옥에 불과하다. 마당 한켠에 허술하게 서 있는 나무에 모과가 달려 있었는데, 그게 어쩐지 마음에 켕겨왔다. 일송은 이 땅의 근대사를 함께한 내앞의 대표적 독립지사이다.
▲ 일송 김동삼과 생가. 생가는 한 차례 증축한 것이라 한다.
흔히들 작곡자의 친일 논란으로 시끄러웠던 가곡 '선구자'의 주인공으로 알려진 일송의 전기적 삶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1907년 유인식(柳寅植)·김후병(金厚秉) 등과 함께 협동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개화 교육에 힘씀. 1911년 만주로 건너가 여러 동지들과 경학사를 조직하고 안동인 석주 이상룡과 함께 신흥강습소를 설립함. 1918년에는 서일·김좌진 등과 함께 39인이 민족 대표로서 연서한 무오독립선언서(戊午獨立宣言書)를 발표함. 1922년 민족 단일의 독립운동 단체인 통군부(統軍府)를 조직하고 교육부장에 임명되었고 통의부(統義府)가 조직되자 위원장에 임명되기도 함. 1931년 하얼빈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어 10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37년 옥중에서 순국함.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내앞 사람들의 의병과 독립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면 별도의 책 한 권이 나올 정도인데 역사학자 조동걸은 '안동(安東) 천전문중(川前門中)의 독립운동'이란 논문을 쓰기도 했다. 백하(白河) 김대락(金大洛, 1845∼1914)이 나라를 잃은 경술년(1910년) 66세의 노구를 이끌고 솔가하여 만주로 망명한 이래, 이에 감명 받은 내앞 사람 22가구 50여 명이 대거 만주로 건너갔다 한다.
일송은 1923년 상해에서 독립운동자 총회인 국민대표회가 열릴 때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대표로 참가하여 의장을 맡았는데, 당시 부의장은 도산 안창호였다. 그는 독립군 단체에 문제가 발생하면 이를 수습하는 회의마다 거의 의장을 맡다시피 할 정도로 존경을 받던 인물이었다. 그는 1937년, '조국에 끼친 바 없으나 죽은 뒤 유해나마 적 치하에 매장하지 말고 화장하여 강산에 뿌려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향년 60세. 평소 그를 존경하던 만해 한용운이 그 유해를 수습하여 성북동 심우장에서 화장한 후 유언대로 한강에 뿌렸다.
▲ 백하구려. 소파가 놓인 왼쪽 마루방에서 협동학교가 열렸다 한다.
내앞마을 가장 안쪽에, 구한말과 일제 초에 국민계몽과 광복운동에 몸 바친 백하 김대락 선생의 고택 '백하구려(舊廬)'가 있다. 사람 천 석, 글 천 석, 밥 천 석을 했다는 이 도사댁(都事宅: 금부도사)은 1907년, 사랑채를 확장하여 이 지역 최초의 근대식 학교인 협동학교가 열렸던 곳이다. 당시 협동학교의 교사로 쓰던 건물은 광복운동 군자금 마련을 위하여 처분되어 사라졌지만 지금도 건물이 서 있던 축대와 초석 일부가 사랑채 앞에 남아 있다. 백하는 나라를 빼앗긴 경술년 엄동설한에 만삭의 손부와 손녀를 데리고 서간도로 망명했다. 식민지에서 증손자들이 태어나면 자동적으로 일본신민이 되는데 그는 이를 참을 수 없는 치욕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협동학교는 당시 안동지방의 애국계몽 운동에서 중추적 위치에 있던 학교로서 고루한 안동 유림을 계몽하는 역할을 담당하였고 후에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투사들의 산실이기도 했다. 생부와 스승으로부터 의절과 파문을 감수해야 했던 설립자 동산(東山)) 유인식(柳寅植)을 비롯,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일송 김동삼 등이 그들이다. 협동학교는 일제에 의한 탄압은 물론, 지역 유림의 배척을 받았고, 종내는 예천지역의 의병의 습격으로 세 사람이 살해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 백하구려. 김대락 사후에 금상기(琴相基)가 쓴 현액(縣額).
김대락에게는 세 명의 누이가 있었는데, 이들 중 맏이는 석주 이상룡에게 출가하였고, 막내는 기암 이중업에게 출가,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의 며느리가 되었다. 이이가 바로 안동에서 여성으로는 유일하게 건국훈장을 받은 여성 독립운동가 김락(金洛) 여사이다.
그이는 의병장 시아버지와 그를 따르던 시숙부와 남편을 모셨고, 나라를 잃자마자 단식 끝에 순국한 시아버지의 임종을 지켰고, 만주로 망명하는 친정 오라버니(김대락)와 조카들, 그리고 큰형부 이상룡과 언니를 눈물로 이별해야 했다. 3.1운동 때에는 그 자신이 예안시위에 참가했다가 수비대에 잡혀 두 눈을 잃은 뒤, 11년 동안 통한의 세월을 보내며 두 번이나 자결을 시도했던 여인이다.
그 자신(애족장)을 포함, 시아버지 이만도(독립장), 남편 이중업(애족장), 아들 이동흠(애족장) 등 3대에 걸쳐 8명이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친가를 포함하면 훈장과 표창 등 위훈을 추서 받은 독립 지사가 무려 26명에 이른다 한다. 독립운동사가 안동대 김희곤 교수는 그에게 '민족의 딸이요, 아내이며, 어머니'라는 헌사를 바쳤다.
퇴계 이황의 학통을 계승한 이 성리학의 고장이 골수까지 밴 보수의 구각을 깨고 혁신 유림으로 거듭 나는 저간의 과정은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경술년에 나라가 그 명운을 다했을 때, "500년 선비를 키운 나라에서 나라가 망하는 날에 죽는 사람이 하나 없다면 어찌 통탄할 노릇이 아니겠냐"며 치사량의 아편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벼슬을 살지 않은 포의의 매천(梅泉) 황현(黃玹)이었다.
▲ 마을 입구. 오른편의 옛 천전국민학교 자리에 안동독립운동기념관 들어섰다.
죽음으로 스스로의 삶과 정체성을 확인하기는 쉽지 않은 일인데, 그렇게 죽음을 선택한 이들이 이 고장에는 무려 10분이다(전국 60여 명). 성리학의 관념 속에 침잠해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나 망명지에서의 풍찬노숙이나 어렵고 힘든 선택일 터이지만, 이 고장은 전국 시군(평균 30명) 가운데 가장 많은 282명의 독립유공자를 낳았다. 내앞 마을을 떠나면서, 새삼 옷깃을 여미는 것은 이 명당 길지의 마을이 한갓진 반촌(班村)이 아니라 현대사의 곡절을 온몸으로 견뎌 온 이 땅의 역사 자체라는 깨우침 때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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