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리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득점 기록을 남긴 사나이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역사상 가장 많은 골을 기록한 인물은 누구일까? 답을 고르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은 퀴즈다. 리오넬 메시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경이로운 기록 행진 속에 라리가 역대 최다골 득점자의 이름이 종종 스쳐갔지만, 이 이름을 주목한 사람들은 아마 많지 않을 것이다. 별로 궁금해하지 않는 것 같으니 뜸들이지 않고 정답을 말씀 드리겠다. 통산 277경기에 출전해 251골을 기록한 텔모 사라(Telmo Zarra)가 그 주인공이다.
사라는 1940년부터 1955년 사이 프로 선수로 활약했다. 그의 기록은 단순히 오래 뛰었기 때문에 달성한 것이 아니다. 경기당 득점률도 0.91골로 ‘추격자’ 메시(7위, 245경기 215골, 경기당 0.88골) 보다 높다. 물론 지금과 같은 기세라면 메시가 1년 뒤에는 사라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사라의 기록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 전에 그의 이야기를 준비했다.
라리가 레전드 첫 시간에 소개했던 비운의 골잡이 피치치는 사실 라리가 무대에서 뛰어본 경력이 없다. 그는 라리가가 정식 출범한 1929년을 앞두고 사망했다. 득점왕 트로피에 피치치의 이름이 새겨졌지만 정작 피치치는 그 트로피를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피치치 트로피와 가장 많은 인연을 가진 인물이 사라다. 사라는 통산 6회 피치치 수상(2003년 역대 최고 골잡이에게 수여한 골든 피치치를 포함하면 7회)으로 이 부문에서도 최고 기록을 갖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사라 역시 피치치와 마찬가지로 아틀레틱 클럽 빌바오의 레전드라는 점이다. 라리가 역사를 주름 잡아온 것은 레알마드리드와 FC바르셀로나지만, 골잡이 영역에 있어서 전설적인 이름을 남긴 것은 바스크 민족이다. 사라의 이름 역시 라리가 시상식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스페인 스포츠지 ‘마르카’는 2006년 2월 23일 사라가 유명을 달리하자 2005/2006시즌부터 스페인 국적 선수 중 최고 득점을 기록한 인물에게 자체 시상식을 통해 ‘사라 트로피(Trofeo Zarra)’를 수여하기 시작했다.
겁쟁이 사라, 촌철살인의 골잡이 되다
사라는 전형적인 문전의 골 사냥꾼이었다. 독일 출신으로 경이로운 득점 기록을 남긴 공격수 게르트 뮐러와 마찬가지로 문전에서의 간결하고 치명적인 마무리 기술을 통해 수 많은 득점을 적립했다. 사라는 당시엔 장신이었던 180cm의 키로 탁월한 헤딩 능력을 자랑했다. 당시 사라를 향핸 세간의 찬사 중 유명했던 표현은 “윈스턴 처칠 이후 유럽에서 가장 위대한 머리”다. 물론 스페인의 자랑인 사라가 ‘뻥축구의 달인’이었던 것은 아니다. 탁월한 위치 선정과 두 다리를 이용한 슈팅 정확도도 탁월했다.
사라는 생전에 자신의 스타일이 마무리에 집중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했다. 당시 축구는 몸싸움과 태클에 대한 제약이 심하지 않았고, 심판 판정 기준도 엄격하지 않아 폭력에 가까운 수비가 난무했다. 사라는 “난 드리블을 좋아했지만 당시 축구에서 중앙 공격수가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서 드리블을 시도하는 것은 자살행위였다”고 회고했다.
사라는 1921년 1월 20일 바스크 지역의 아수아 기차역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페드로는 당시 아수아 기차역의 역장이었다. 10남매의 일원으로 태어난 사라는 어린 시절 형제들과 함께 거리에서 축구를 즐겨 했다. 온종일 축구에 빠져 살았다. 그의 두 형도 축구 선수가 됐는데, 부친 페드로는 이를 못마땅해했다.
집안에선 엄한 아버지의 반대에 시달렸고, 집밖에선 터프한 수비수의 위협에 고전했다. 사라는 당시 자신이 경기장에서 ‘겁쟁이 텔미토(작은 텔모라는 뜻의 애칭)’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고백했다. “낯을 가렸고 부끄럼도 많이 타는 성격이었다. 수비가 너무 거칠다보니 꽤 신중하게 플레이했고 공 근처에도 가지 않으려 했던 적도 있다.”
스페인 내전, 사라를 명문클럽 아틀레틱으로
하지만 역사가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면서 청년기와 장년기에 있는 선수들이 전쟁에 휩쓸렸다. 바스크 지역 최고의 명문팀 아틀레틱 클럽 빌바오는 어린 선수들을 중심으로 미래에 대한 대비에 나섰다. 사라는 그 중 한 명으로 낙점됐다. 비스카야 지역 대표팀에 선발되어 출전한 바스크 지역 교류전에서 7골을 몰아치며 탁월한 득점력을 과시해 눈에 든 것이다.
지역의 2부리그 클럽 에란디에서 프로 경력을 시작한 사라는 1940년 명문클럽 아틀레틱에 입단했다. 1940/1941시즌 라리가에 참가한 사라는 9월 29일 발렌시아와의 경기를 통해 데뷔했고, 이 경기에서 홀로 2골을 기록하며 2-2 무승부를 이끌었다. 경기 시작 17분 만에 득점한 사라는 더 이상 수줍은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전설의 시작이었다.
데뷔시즌에 총 8경기에서 6골을 기록한 사라는 1941/1942시즌에 주전 자리를 꿰차고 20경기에서 15골을 기록했다. 코파델레이 8경기에서 11골을 보태며 스페인 최고의 공격수로 인정 받았다. 1942/1943시즌에는 라리가 17전 17득점, 코파델레이 8전 8득점으로 경기당 1골 기록을 세우며 라리가와 코파델레이 더블 우승을 이끌었다.
이후 아틀레틱은 1944년과 1945년까지 코파델레이 3연속 우승을 차지했고, 사라는 세 시즌 모두 코파델레이 득점왕을 차지했다. 1950년과 1955년에도 아틀레틱에 코파델레이 우승을 선사한 사라는 라리가 뿐 아니라 코파델레이 대회에서도 역대 최다 득점 기록(81골)을 보유하고 있다.
사라는 1944/1945시즌부터 1946/1947시즌까지 3년 연속 라리가 득점왕을 차지하며 20골, 24골, 33골을 기록했다. 1950/1951시즌에는 30경기에서 38골을 몰아쳐 2010/2011시즌에 레알마드리드 공격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40골로 득점왕에 오르기 전까지 라리가 한 시즌 최다득점 기록도 보유하고 있었다. 경기당 득점률 1.26골 기록은 아직 깨지지 않았다.
사라는 아틀레틱 클럽에서 통산 351경기에 나서 333골을 기록한 클럽 역사상 최고의 골잡이다.
물론 이 모든 성과가 사라 혼자 만의 힘으로 이룬 것은 아니다. 오른쪽 윙 이리온도, 오른쪽 미드필더 베난시오, 왼족 미드필더 파니소, 왼쪽 윙 가인사가 사라와 함께 5각 편대를 이루며 빌바오의 막강 공격을 구성했다. 1940년대 스페인 축구를 점령한 오형제는 도합 848골을 합작하며 빌바오 역사상 두 번째로 위대한 공격진으로 불렸다.
사라는 스페인 대표팀의 영웅이기도 했다. 내전이 종식된 1945년 처음으로 스페인 대표팀에 선발되어 20차레 A매치에 출전해 20골을 넣었다. 사라는 스페인 대표팀의 일원으로 1950년 브라질 월드컵에 참가했고, 미국, 칠레, 잉글랜드와의 조별리그 3경기에서 모두 득점해 3연승을 이끌었다. 특히 ‘축구종가’ 잉글랜드와의 최종전에서 1-0 승리로 이어진 결승골은 세기의 대결로 불렸던 경기의 대미를 장식한 것은 물론 스페인의 사상 첫 월드컵 4강 진출을 이룬 위대한 골로 평가 받았다. 스페인 대표팀이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우승하기 전까지 최고의 성적으로 남았다.
부상으로 마무리된 아쉬운 황혼기
스페인은 브라질, 우루과이, 스웨덴이 치른 4강 리그에서 침묵했다. 브라질전 1-6 참패 과정에서 무득점에 그쳤고 스웨덴전에 한 골을 넣었으나 1-3 패배를 막지 못했다. 사라는 이듬해 스위스와의 친선전에서 홀로 4골을 몰아치며 6-3 대승을 이끌었는데, 그 해 벨기에, 스웨덴과의 두 차례 경기에 더 나선 뒤 대표팀에서 물러났다. 1951년 11월 아틀레티코마드리드와의 경기에서 골키퍼와 충돌하며 다리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1951/1952시즌에 5경기에 나서 3골을 넣은 뒤 부상으로 시즌을 마감한 사라는 1952/1953시즌에 기적적으로 회복해 라리가와 코파델레이 36경기에서 30골을 몰아치며 부활을 알렸으나 거기까지였다. 부상 후유증으로 1953/1954시즌 5경기 출전, 1954/1955시즌 6경기 출전에 그치며 아틀레틱 클럽을 떠났고, 이후 지역의 군소 클럽 이다우추와 바라칼도에서 2년을 더 활동한 뒤 현역에서 은퇴했다.
역대 사라상 수상자
1부리그
2005/2006시즌 다비드 비야 (발렌시아) 25골
2006/2007시즌 다비드 비야 (발렌시아) 16골
2007/2008시즌 다니 구이사 (마요르카) 27골
2008/2009시즌 다비드 비야 (발렌시아) 28골
2009/2010시즌 다비드 비야 (발렌시아) 21골
2010/2011시즌 알바로 네그레도 (세비야) 20골
2011/2012시즌 페르난도 요렌테 (아틀리틱 클럽)/ 로베르토 솔다도 (발렌시아) 17골
2012/2013시즌 알바로 네그레도 (세비야) 25골
다비드 비야가 4회 수상으로 압도적인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FC바르셀로나로 이적한 뒤에 득점력이 떨어지며 수상을 놓쳤다. 아틀레티코마드리드로 이적한 2013/2014시즌 탈환 가능성이 높다. 최근 3시즌에 사라상을 경합한 네그레도와 솔다도, 요렌테가 모두 해외로 떠났다. 네그레도는 맨체스터시티, 솔다도는 토트넘홋스퍼, 요렌테는 유벤투스에 새 둥지를 틀었다.
2부리그
2005/2006시즌 호세 후안 루케 (무르시아)/ 로베르토 솔다도 (레알마드리드 카스티야) 19골
2006/2007시즌 마르코스 마르케스 (라스 팔마스) 21골
2007/2008시즌 요르디 (헤레스) 20골
2008/2009시즌 니노 (테네리페) 29골
2009/2010시즌 호르헤 몰리나 (엘체) 26골
2010/2011시즌 조나탄 소리아노 (바르셀로나 B) 32골
2011/2012시즌 이아고 아스파스 (셀타비고) 23골
2012/2013시즌 헤세 로드리게스 (레알마드리드 카스티야) 22골
2부리그 사라상은 성공 보증 수표다. 호르헤 몰리나와 이아고 아스파스는 이후 1부리그에서도 맹활약했다. 스페인의 호날두로 불리는 헤세는 스페인 청소년 대표팀의 핵심 선수로 2013/2014시즌 레알마드리드 1군에서도 기회를 얻을 것으로 보인다. 솔다도는 1부와 2부 사라상을 모두 수상한 유일한 인물이다.
사라의 후계자는?
아틀레틱 빌바오의 프랜차이즈 스타 페르난도 요렌테는 피치치와 사라의 뒤를 이을 바스크의 영웅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2011/2012시즌 코파델레이와 유로파리그에서의 활약은 강렬했고, 그해 라리가에서도 사라상을 받으며 전성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유벤투스 이적 선언으로 2012/2013시즌 홈팬들의 비난을 받았고, 2013년 여름 자유이적으로 팀을 떠나 배신자로 불리고 있다. 현재 아틀레틱 선수단에서 기대를 받고 있는 선수는 팜플로나 태생으로 아틀레틱 유스 시스템에서 성장한 20세 공격수 이케르 무니아인이다. 169cm의 단신이지만 현란한 기술과 스피드를 갖춰 빌바오의 메시로 불린다. 10대의 어린 나이에 주전 자리를 꿰찼으나 지난 4시즌 동안 174경기에서 22골을 넣는데 그쳤다. 사라의 뒤를 잇기 위해선 훨씬 더 많은 골이 필요하다.
글=한준 (풋볼리스트 기자, 축구해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