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의 청색시대
평생동안 끊임없는 열정과 실험정신으로 미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온
입체파 화가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 그는 광기와 해체를 통해
평생동안 거의 모든 주제를 다루었고 할 수 있는 모든 양식을 실험하면서
현대 전위미술의 선구자가 되었다. 1900년 10월 오르세역에 손때 묻은 이젤과 팔레트를 들고 나타난 피카소, 그때의
작고 초라한 스페인 청년을 주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100년이 지나고
그는 프랑스 화단뿐 아니라 20세기 미술사를 이끌어온 세기의 거장으로 기억하고 있다.
금세기 최고의 예술가로 추앙받고 화가로서 보기드문 재산가, 공산주의자, 화려한 여성편력 등으로
불려지기도 한다. 이렇듯 무수한 신화에 둘러싸인 피카소,그는 과연 누구인가. 20세기 입체파 화가 피카소는 매우 신화적이고 전설적인 이력을 갖고 있다.
그는 8세에 이미 천재성을 세인들에게 인정받았으며, 40세엔 대단한 부자였으며
65세엔 화가로선 보기드물게 억만장자가 되었다. 그는 또한 광적인 사랑도 추구했고
다양한 장르에 걸쳐 재능을 보여 무려 50만점이나 되는 작품을 남겼다. 스페인에서 태어난 피카소가 파리에 도착한 것은 그의 나이 19세였다. 유난히 감수성이 뛰어났던 젊은 화가에게
파리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는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몽마르뜨에 자리를 잡았다.
19세기초 세기말의 혼돈은 새로운 예술을 추구한 화가들에게 보이는 것을 제대로 표현하려했던
사실주의나 인상주의 화풍은 이제 진부해져 갔다. 그 가운데
입체파화가 피카소의 등장은 예술사의 혁명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파리 클리시가 13번지에는 아직도 그가 머물렀던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다. 그는 파리 초기시절에
이 집을 청색방이라 이름붙여 스튜디오로 삼았고 오늘날 청색시대라 불리우는 무수한 작품들을 제작했다.
가난과 고독을 벗삼아 그림에만 몰두하던 무명시절
고국을 등지고 홀로 파리에 도착한 젊은 화가 피카소는 어떻게 살았을까.
자화상 Self-Portrait Paris, end of 1901. Oil on canvas. Musee Picasso, Paris.
카사게마스의 죽음 Death of Casagemas. 1901. Oil on wood. Musee Picasso
청색조가 작품 전체를 뒤덮고 있는 피카소의 작품에서 보여졌던 청색은 당시 비참했던 생활과 절망을 상징한다.
청색을 배경으로 서있는 <청년 피카소의 자화상 (1901)>. 그는 이미 인생의 고뇌를 다 알아버린 것일까?
푹꺼진볼, 덥수룩한 턱수염, 넋이 나간듯한 퀭한 두눈, 인생을 관조하는 듯한 자화상에서 피카소는 무척 나이 들어보인다. 1901년 친구 카를로스 카사게마스의 자살은 무척이나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강한 색채대비와
거친 붓질이 돋보이는 이 작품은 그 당시 피카소 내면의 슬픔을 격렬하게 담고있다. <늙은 기타리스트(1903)> 구성은 나중 큐비즘에서 볼 수 있는 단서로 보여지는 작품이다.
당시 청색시대 작품은 거의 현실적인 묘사를 보여주지만 피카소만의 고유한 시각은 점차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그에게 청색은 특별한 감정을 드러내는 색이었다.
늙은 기타리스트 The Old Guitarist, 1903/04 Oil on panel 122.9 x 82.6 cm Helen Birch Bartlett Memorial Collection,
인생 La Vie, 1903, The Cleveland Museum of Art
청색은 밤이며 바다의 색이며 하늘의 색이며
깊고도 차거우며 빈곤과 절망을 상징하는 색이었다. <인생(1903)>은 여러번의 습작을 거쳐 탄생한 작품이다. 청색시대 작품중 가장 대작인 이 작품은 매우 상징적이다.
사랑과 출산 이 모든 인생의 황금기가 실은 고통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파리시절 피카소는 카사게마스, 막스 쟈콥(시인 미술비평가) 엘리아르 등 평생 그를 후원해 주었던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다. 1904년 이후 피카소는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고 경제적으로도 조금씩 좋아졌다.
약간의 돈을 모은 피카소는 몽마르뜨 꼭대기에 있는 라비앙가 13번지에 자리를 잡았다.
이집은 피카소외 브라크, 후앙 그린, 모딜리아니 등 예술의 근거지가 되기도 했다.
피카소는 이 집에서 5년간 머물렀고 입체파 미술이라 불려지는 첫번째 작품
<아비뇽의 처녀들>을 이 집에서 완성했다.
아비뇽의 처녀들 1903 Les Demoiselles d'Avignon
가난하지만 창조에대한 열정이 넘쳐 흘렀던 무명화가 피카소는 이 무렵
그의 첫번째 여인 페르디낭드 올리비에를 만난다.
그녀는 피카소에게 건강한 아름다움으로 새로운 희망과 기쁨을 안겨주었다.
1905년경부터 피카소의 작품에서 청색시대의 엄숙함은 사라지고 장밋빛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앉아있는 광대(1905)>는 장미시대의 진정한 동반자가 된다.
피카소의 장미시대
1905년 피카소는 그가 사용했던 청색이 사라져가고 더 명료하고 가벼운 색이 등장한다. 화폭 여기저기엔 고무 수채화기법의 우유빛 색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가볍게 흔들리는듯한 이 독특한 윤곽과 선은 감미로운 수법으로 그려진 색채들로 채워 졌다.
앉아있는광대 Harlequin Sitting on a Red Couch. 1905. Chinese ink and watercolor on paper. Private collection.
원숭이와 함께 있는 곡예사의 가족 1905 Harlequin's Family with an Ape
피카소의 장미빛시대의 그림인 <곡예사의 가족(1905)>에서 보듯, 그는 당시 서커스 곡예에서 감흥을 받아
매일저녁 서커스를 보러 다녔고 서커스 단원들에게 매료되어 수많은 그림을 그린다. 피카소의 장미시대를 청색시대 처럼 주목하는 것은 장미색의 사용과 단색화 경향에서 그 이유를
찾을수 있다고 한다. 1906년 이 시기의 피카소는 눈에 보이는 대상에 인공적 가식없이 일종의 투박한 형태의
순수성만을 그려 나간 것을 볼수 있다. 새로운 조형화에 목말라 있던 피카소에게 1907년은 매우 중요한 해 였다.
이전까지의 작업을 완전히 버리고 입체주의라는 새로운 쟝르를 시도하고 개척했기 때문이다. 그해 여름 트로카데르 인류박물관의 방문은 그 계기를 만들어준 일대 사건이라 할수 있다. 피카소는
이곳에 전시되어 있는 원시 흑인의 조각품을 본 감회에서 뿜어 나오는 마술에 완전히 매료 되었다.
이보다 더 완벽한 예술 표현방법이 있을까, 이것은 눈에보이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즉, 형태에 구애받지 않고 사유를 구현했던 것이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심오한 인상의 해석을 회화로 표현 하고자 했던 피카소에게
흑인예술은 순수한 인상과 명확하고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로 존재했다.
아비뇽의 처녀들 습작 Sketch for The Demoiselles d'Avignon. 1907. Watercolor on paper. Museum of Art, Philadelphia
아비뇽의 처녀들Les Demoiselles d'Avignon. 1907. Oil on canvas. The Museum of Modern Arts
원시예술에서 영감을 얻은 피카소는 의욕적으로 새로운 실험을 시도한다. 이무렵 그의 작품은
이전의 청색시대나 장미시대의 작품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여준다. 피카소는 세잔의
그 유명한 대작 수욕도 시리즈 <목욕하는 여인들> 을 시작으로 수많은 습작을 그리게 된다.
마침내 1907년 여름이 끝날무렵 피카소는 바또 라브아르에서 세기의 역작 <아비뇽의 처녀들>을 완성한다. 백여 점의 뎃상을 통해 세상에 나온 <아비뇽의 처녀들>이 세상에 공개 되었을때
사람들의 반응은 경악과 충격 그 자체였다. 일반 대중들뿐아니라 당시의 예술가와 비평가들도 혹평을 가했다.
피카소의 절친한 친구 브라크 마저 그 작품을 비난했다. 이 작품은 오늘날 모든 현대미술의 시발점으로 평가받고 있다. 최초로 한 화가가
사실적인 모습과 단절된 새로운 회화세계 "입체주의" 즉 "큐비즘"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음양, 원근법에 상관없이 선과 해체된 평면을 그린 다섯 명의 나체여인. 이 작품은 당시 피카소가
리베리아 조각과, 프레스코 벽화, 오세아니아의 아프리카 예술에 깊은 영향을 받았음을 말해준다.
두인물이 있는 풍경Pablo Two Naked Figures. 1908. Oil on canvas.
빵과 과일이 있는 정물화Bread and Fruit Dish on a Table. 1909. Oil on canvas. Kunstmuseum Basel, Basel
이후 큐비즘은 풍경화와 인물화 정물화 등에도 접목 시켜나간다. <두 인물이 있는 풍경(1908)>을 보면 풍경속의 두 인물이 배경속에 완벽하게 융합되어 있다거나,
작품에서 경치나 인물은 모두 단순화하고 기하학적인 양감으로 처리되고 있다. 입체주의에 대한 대중의 적대감에도 불구하고 피카소의 명성은 높아만갔다. 입체주의는 사물의 외관뿐 아니라 면 뒷면등 다른 사물과의 관계나 인지할수 있는 모든 관심을 둔다.
피카소는 이 모든것을 표현하기 위해 해체를 선택했다. 세잔느식 큐비즘이라 불리는 것으로 시작되는 큐비즘(입체주의)은 분석적 큐비즘, 종합적 큐비즘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무렵 (1911년-30세) 그의 곁에는 그의 두번째 여인인 아름답고 청순한 여인 에바(마르셀 유베르) 가 있었다.
1912년 봄 피카소는 남 프랑스 아비뇽 근처에 집을 얻어 은밀한 사랑을 불태운다.
큐비즘의 집(Synthetic Cubism)
기타 Guitar. 1913. Charcoal, pencil, ink and pastel paper. The Museum of Modern Arts
>
등나무가 있는 정물화 Chair Caning 1912 The Museum of Modern Arts
마졸리 1914
1912년 피카소가 머무는 곳 근처에 브라크 부부가 집을 얻어 합류 했다. 이들은
입체주의가 미학적, 추상적인 것으로 소수인에게 국한된 양식에 두려움을 느꼈다고 하는데, 이제 그들은
작품에 실제 사물을 부착하기 시작했다. <등나무가 있는 정물화 (1912)> 는 그 시기 작품의 한 예가 되겠다.
피카소는 노끈과 비닐 장판 조각등을 이용한 최초의 꼴라쥬 작품을 보여주었다. 종이 오려붙이기
파피에 꼴레와 꼴라쥬 사용은 피카소의 작품에 사라졌던 깊이와 색채감을 회복시켜 주었다. 피카소는 초기의 세잔식 큐비즘과 분석적 큐비즘에 이어 종합적 큐비즘으로 발전했다.
이 시기의 피카소는 입체주의 발전사에서 가장 풍요로운 성과를 거두게 된다.
종합적 큐비즘시대의 가장 대표되는 작품인 <마졸리(1914)> 가 있으며, <기타>는 연인 에바에 대한
사랑의 노래를 그렸던 그림이라고 한다. 피카소의 꼴라쥬 사용은 이렇게 확대되고 개척되어 나갔다.
이무렵 사용한 기본재료는 나무, 마분지, 종이 끈, 압핀, 얇은 천 등을 들 수 있다.
입체주의를 벗어난 피카소-새로운 고전주의
다방면에 재주를 보였던 피카소는 회화만 추구한 것이 아니었다. 뮤지컬을 비롯한
폭넓은 쟝르에 관심을 가졌다, 1914년 독.불 전쟁이 끝나고 피카소는 무대미술에도 관심을 가졌다.
파리의 샤틀레 극장은 피카소가 최초로 무대미술과 의상을 맡았던 곳이다.
해변을 달리는 여인 1921' Women running on the beach
댄서 Three Dancers. 1925. Oil on canvas. Tate Gallery, London
전쟁이 터지고 결핵을 앓던 에바가 죽자 의기소침 했던 피카소에게 우연히 장 콕토의 제의로
발레 "퍼레이드"의 무대의상을 맡게 된다. 바로크풍의 건축물과 조각품들,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에 깊이 매료된 피카소는
새로운 활력을 얻게 되었으며, 특히 발레단의 무용수였던 올가와의 만남은 그의 창작욕을 더욱 북돋웠다고 한다. 1918년 피카소는 러시아 종교성당에서 디아글래프 무용 단원이었던 올가와 결혼식을 올렸다. 이제 피카소는 자신이 추구하던 입체주의를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하게된다. 신화로 가득찬
'퍼레이드' 의 무대예술에서 양식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해변을 달리는 여인 (1921)> 이란 고무수채화를 보면,
해변을 달리는 두 여인은 거인같은 육중한 몸매지만 발레리나 처럼 가볍게 달린다. 피카소는 로마에 머무는 동안
마제국 시대의 조각품이 지닌 장엄함과 고귀함, 그리고 인체를 보는 시각에 변화를 가져 왔던 것이다. <팬 플롯(1923)>도 이 시기의 주목하는 작품 중 하나이다. 이 작품은 라파엘로나
앵그르의 의 작품에서 보여주는 육체의 부드러움을 담고 있다.
광대로 분장한 폴 Paulo, Picasso's Son, as Harlequin. 1924. Oil on canvas. Musee Picasso
. 올가의 초상Portrait of Olga in the Armchair. 1917. Oil on canvas. Musee Picasso
1921년 2월 피카소에게 아들 파올로가 태어났다. <광대로 분장한 폴(1924)> 은 올가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파울로를 모델로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을 끝으로 그의 고전주의 시기는
막을 내린다 .마흔이 넘은 피카소는 점점 유명해졌고 점차 거부가 되었다.
첫댓글 황귀자님이 건네주신 자료를 조금 정리해서 올렸습니다. 우리 님들이 피카소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귀한 자료를 찾아오신 황귀자님께 박수를 ~~~~
서툰 솜씨로 퍼 온 것을 여혜당선생님이 한 줄 한 줄 정성들여 깔끔하게 정리를 하셨으니 피카소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여혜당선생님이 애를 많이 쓰셨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차마고도'며 '피카소' 같은 좋은 작품을 업어오시는 선생님의 공로를 어찌 가볍다 하겠습니까. 에세이스트의 모든 식구들을 위하여 세심한 곳까지 마음을 써 주시는, 어여쁜 선생님을 만난 것이 우리 모두에게 큰 축복입니다.
황귀자님 대단하시네요. 피카소 명화집에서 더러 봐왔을뿐, 여혜당님과 황샘 덕분에 이곳에서 피카소 그림의 이해와 피카소를 많이 알게됐네요. 명화집이 장식장에 전집으로 꼿혀있답니다.
황귀자 선생님의 자료에 여혜당의 편집은 또 하나의 작품이네요. 한 천재의 탄생은 세기의 사건이지요. 나의 회화에 대한 이해가 십대 후반 금성판 세계명화전집을 보면서 얻은 것에 아직도 거의 의존하고 있는데 이번에 큰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피고 되고 살이 된다는 말이 이럴 때 쓰는 말이군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여혜당도 에세이스트 카페에 여행기를 올리며 이런저런 공부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보람을 느낍니다.
한권의 자서전을 본듯 합니다. 두분의 공로가 무척 컸군요. 피카소에 대해 새롭게 조명되면서 깊이있게 알게 된것 같습니다. 그 많은 여인들을 사랑했다기보다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한 피카소를 이해 할것도 같습니다. 좋은 그림, 글 감사합니다.
송미란님, 감사합니다. 엄밀히 따져보면 피카소뿐 아니라 우리 모두 자신을 더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하죠. 일례로 사진속 사람중 자신을 가장 먼저 찾아보잖아요?
이런 휼륭한 작품을 구경 시켜 주셔서 감사 합니다. 여혜당 선생님 . 대가들의 작품은 큰 기운이 있습니다. 글과 그림이 쌍둥이 같은 존재지요. 고맙습니다.
글과 그림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시는 임선영님 감사합니다.
멋진 작품과 설명...잘 감상했습니다. 대단한 정성에 늘 감탄합니다.
슬쩍보고 나가지않고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대단한 정성에 감사. 피카소에 대해 많이 알게됐습니다.
처음에 밝혔듯이 황귀자님이 눈에 번쩍띄는 작품을 찾아오셨는데, 문장이나 구성에 미흡한 구석이 보이더군요. 30분 정도면 깔끔하게 정리될 줄 알고 수정작업에 들어갔는데, 에고고고...두어 시간을 붙잡고 씨름을 했답니다. 쫌 눈이 아팠지만 신나는 작업이었어요.
여혜당 선생님의 열정은 누구도 흉내낼 수 없을 것입니다. 선생님, 학생 때 공부도 엄청 잘 하셨지요? ㅎㅎㅎ 서울대는 그냥 가나? 제가 어리석은 질문을 했네요. 선생님이 계셔서 행복합니다. 이런 공부를 할 수 있어서 더욱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공부요? 말도 마세요. 지금도 시험지 앞에 놓고 쩔쩔매는 꿈을 꾸곤 한답니다. 정리하는 것 하나는 둘째가라면 서럽지만..ㅎㅎㅎ...
피카소의 청색시대를 좀 더 알게 되어 기쁩니다. 여혜당 선생님의 저력에 감탄을 금치 못합니다. 황귀자 샘의 저인망 자료 수집 능력에 거듭 놀랍습니다. 감사합니다.
백로님 처음 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