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 인간
정 성 천
지금이 디지털 시대라 아날로그 시대에 교육받고 자란 우리 노년들에게는 불편함과 어색함이 생활 곳곳에 지뢰밭처럼 묻혀 있다. 더욱이 코로나 사태가 비대면 접촉을 불러와 커피 한 잔을 주문하는 데도 만만찮은 인내심과 머리 굴림으로 디지털 화면과 씨름을 해야만 가능하다. 하지만 때때로 머리가 띵할 정도의 놀라움으로 지루하기 쉬운 일상생활에 충격적인 신선함을 던져 주기도 한다. 어저께 고교동기생 100여 명이 소통하는 단톡방에 동영상 하나가 올라왔다. 지난 설에 TV n에서 방영한 프로그램이라고 하는데 나는 처음으로 접하는지라 큰 놀라움과 함께 많은 생각들 속에 잠기게 하는 동영상이었다.
지금은 방영하지 않으나 한때 큰 인기를 끌며 장수 프로그램으로 이름을 날리던 MBC 일일연속극‘전원일기’의 출연 배우들이 그때의 분장을 한 채 누군가를 기다리는 장면으로 동영상은 시작된다. 그들이 기다리며 쳐다보는 전면의 커다란 화면에 이윽고 누군가가 터벅터벅 걸어 나온다. 바라보고 있는 배우들의 자그마한 탄성과 술렁임 속에 등장한 인물은 ‘응삼’이라고 전원일기에서 순박한 농촌 노총각역을 맡아 웃음과 재미를 선사하던 故 ‘박윤배’ 배우였다. 그는 2020년 73세의 나이로 폐섬유 종을 앓다가 죽고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화면상으로 인사도 건네고 내가 누구인지 알아보겠느냐? 라는 ‘일용’ 어머니역을 맡았던 ‘김수미’ 배우의 물음에 특유의 사투리로 대답도 하며 웃는 모습이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특히 나중에 등장한 실존의 딸 ‘박혜미’와 나누는 대화에서는 참석한 모든 배우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진실의 모습 그 자체였다.
물론 어조나 어감과 미세한 표정에서는 아직 실존 인물과 다른 어색함이 묻어 나온다. 하지만 이는 AI를 활용한 딥 러닝 프로쎄씽 기술의 발전으로 얼마든지 해결될 수 있는 시간상의 문제일 뿐 가상과 현실을 확연히 나눌 수 있는 경계가 앞으로 없어진다는 미래학자들의 주장이다. 우리는 우리의 인식 범위가 디지털 화면의 영상으로 무한히 확대되고 있는 세상을 살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어디까지가 실제이고 어디까지가 가상인지 그리고 어디까지 우리가 믿고 따라야 할지 혼란스러워 헤매는 시대가 바로 코앞에 다가온 느낌이다.
그래도 영상이 아닌 현실 생활에서는 만질 수 있고 직접 느낄 수 있는 실제가 눈 앞에 펼쳐지고 있다는 확신이 아직은 지배적인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하지만 미래에도 과연 그럴까? 지금은 디지털 영상으로만 가상의 현실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지만 앞으로 기술발전이 극에 다다르면 누가 로봇 인간이고 누가 실제 인간인지 그리고 이 상황이 실제인지 가상인지 구분하기가 힘들어지는 시기가 도래할 것이다. 그런 시대가 되면 우리는 무얼 믿고 어떻게 살아야만 행복하게 잘 사는 일이 될까? 가상 인간 ‘응삼’이의 동영상을 보고 머리가 띵할 정도의 충격을 느낀 후 두 가지의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불교에서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우리의 현실도 진짜가 아니고 분별이 만들어 내는 꿈과 같은 가상세계로 보고 있다. 그래서 현실은 고통이고 그 고통을 여위고 생과 사를 초월하는 진짜 면목으로 깨어나는 ‘깨달음’을 얻어 영원한 행복에 드는 것이 불교가 지향하는 목표이다. 분별로 이룬 극대함의 결과가 바로 우리 인류가 성취하고 있는 과학 기술의 발전이 아니겠는가?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우리는 지금보다 향상된 육체적인 편안함과 더 많은 물질적인 풍요함을 누리겠으나 가상에 가상을 덧칠한 세상을 앞으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분별과 망상의 두께가 더 두꺼워지고 그만큼 우리는 더 많은 고통을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 또한 그것에서 벗어나기가 점점 더 힘이 드는 세상을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세상을 인간답고 행복하게 잘 살기 위해서 마음공부가 지금보다 더 필수적인 시대가 다가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상에 가상을 덧칠한 세상을 살아도 그것에 걸려 넘어져 고통받지 않고 굳건히 버틸 수 있는 고요하고도 청정한 본마음을 찾는 일이 갈수록 더 중요해지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점점 더 시간이 갈수록 세계 전역에서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온갖 명상 방법들이 유행처럼 번진다는 사실도 이와는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또 하나의 생각은 이 세상에서는 인간 사이의 관계가 인간 개체의 실존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것이었다. 가상 인간 ‘응삼’이와의 대화 장면에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눈물을 훔치는 살아 있는 배우들을 보고 이 세상에서는 존재의 유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존재 간의 관계가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현대 과학의 최첨단 학문인 양자역학에 따르면 모든 물질을 쪼개고 쪼개어 마지막 궁극에 달하면 존재하는 극소 미립자는 없고 미립자처럼 보이는 어떤 것들 사이의 관계인 파동만이 실재하는 존재로 감지된다고 한다. 이것은 분별의 가상세계가 아닌 진실의 세계에서는 ‘업(業)’을 짓는 자도 없고 업을 받는 자도 없으나 그 둘의 관계에서 일어난 행위인 업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불교의 교리와 닮아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내가 있다.” 너와 나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너와 나 사이에 일어나는 관계가 더 중요한 의미성을 갖는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매 순간 인간관계를 맺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기술이 만들어 낸 가상 인간 ‘응삼’이의 말 한마디에 걸려 울고 웃는 살아 있는 배우들의 표상을 그저 담담히 바라보는 나의 눈을 느낀다. 현실도 이와 같지 않을까? 나의 분별이 만들어 내는 현실을 진실로 여겨 호(好), 불호(不好)로 구별하는 분별의 눈이 아닌 그저 떨어져 담담히 바라보기만 하는 나의 눈을 개발할 수는 없을까? 그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반야의 눈’이며 그렇게 알아차리는 것이 ‘무분별지(無分別知)’이고 그런 눈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삶이 바로 ‘깨달은 자’의 삶일 것일 진데 나는 언제쯤 그런 눈을 갖게 될 것인가?
이것 또한 역시 내 분별을 가지고 지어내는 내 탐욕과 망상의 일종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