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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간 : 2018.12.4 ~ 12. 12 (8박 9일)
2. 소요 비용 : 600만원(2인, 선물대 60만원 포함)
3. 일정 (이스라엘, 요르단)
출발: 2018년12월4일(화) 인천공항 14:35(KE0957편)-텔 아비브(19:55)(소요시간:12시간20분)
도착: 2018년12월11일(수)텔아비브21:55(KE0958편)-인천공항(12/12, 15:10)(10시간15분)
인천-텔 아비브-가이사리아-카나-나자렛-갈릴리-북부 릴리-벳산-마다바
-와디럼-페트라-암만-느보산-사해-예리코-예루살렘-텔 아비브-인천
성지 순례를 떠나며
찬미 예수님! 감사합니다. 우리는 6개월 동안 성지 순례를 가기 위해 7차에 걸쳐
서울 근교성지, 새남터 순교성지, 절두산 순교성지, 약현(서대문 순교성지), 강화
갑곶순교성지, 제주도 이시돌(금학)성당, 인천 송도성인성당에서 미사에 참례하고
고잔 평화의집에서 빨래봉사 등 성지 순례 준비를하며 성공적으로 안전하게 잘
다녀오도록 주님께 간절히 기도 드렸습니다.
미사도구, 의약품, 동계용 옷, 세면도구 등 각종 준비를 마치고 2018년12월4일
14;35분 대한항공 KE957편으로 이스라엘 텔아비브로 떠납니다.
2000년전에 오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이스라엘, 요르단으로 순례를 갑니다.
2002년1월에 10일간 "출애굽기 코스"를 다녀오고 두번째로 성지순례를 하는
영광을 가졌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신앙의 땅! 이스라엘과 요르단,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고 활동하신
땅! 공생활을 하시며 기적을 일으키신 장소, 산상설교성당, 오병이어 성당 등 성스러운
땅!, 그리고 죽으시고 묻히시고 부활하신 현장을 찾아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러
갑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고 사랑하신 고통의 땅! 예루살렘은 긴장감이 감도는 도시
수많은 나라가 짙 밟고 지나간도시 예루살렘!
거룩한 땅에서 기도하고 아름다운 사람과 함께 동행하며, 항상 즐거워하며 눈물을
흘리며 동행하는 순례객, 너무나 행복하고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동안 물심 양면으로 도와주신 모든분과 특히
CJ 항공 장정자사장님께 감사드립니다. 잘 다녀 오겠습니다.
4. 성지순례의 개요
2018년 12월 4일 14시 35분 KE0957편으로 인천공항을 출발, 이스라엘 향하는 성지순례단은 목사님 2분, 카톨릭 신자 7분,그 외의 교회의 장로님을 비롯해서 총 28 명이었다. 지나서 북쪽으로 가고 있다. 사해는 무용지해가 아니다. 이스라엘이 자랑하는 부의 보고, 각종 광물질과 약품원료가 추출될뿐 아니라 인근의 산소농도가 높아 좋은 휴양지, 화장품의 원료로도 사용된다. 쿰란은 성경을 발견한 곳이다. 양피두루마리에 기록된 구약사본이 최근 발견된 쿰란 동굴을 보았고, 유대 민족의 성지 마사다 요새는 3년에 걸친 로마군의 집요한 공격에 저항하던 유대인 전사와 가족 960명이 함락직전에 자결한 곳. “적의 노예가 되느니 명예롭게 죽자” 유대인의 근성을 나타낸 감동적인 고사다. 갈릴리 호수에서 선상 기도, 주님의 첫 번째 기적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가나 혼인 기념성당. 팔복산, 가파르나움, 산상 수훈 기념성당, 겟세마니 ,빵과 물고기의 기적성당(타브가), 베드로 회개 기념 성당, 성서의 지명과 인물과 사건을 증거하는 기념장소를 방문하고 있다.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를 중심으로 벌였던 복음의 중심지 가파르나움은 예수께서는 이곳에서 여러 가지 크고 작은 기적을 행하시고 활동하신 중요한 장소이다. 예수님 당시에는 제법 큰 마을로서 마을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주로 설교하셨다. 또한 복음 전파의 중심지였다. 그 설교는 생전 처음 듣는 놀라운 것들이어서 나날이 말씀 들으러 오는 사람이 증가하고 이곳에서 베드로의 장모를 치료하고 ,귀신들린 자에게 귀신을 몰아내고, 문둥병과 중풍 환자 모든 환자들을 낫게 하는 기적을 숱하게 보이셨던 곳이다.
주일에는 요르단강의 예수님 세례터에서 공소 예절를 드렸다. 하느님께서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아니면 엘리아 예언자가 탈진했을 때 갈릴리 호수 물에 빠진 베드로를 구해주시고 예루살렘, 베들레햄 순례 성지마다 교회 성당의 많은 신자들이 시간을 할애하여 순례하고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가신 길이 동대문 시장 같은 팔레스티나 상점과 또 성지마다 소매치기를 두려워 하는 우리, 종교의 전시장 순박한 성지를 보고자 하는데 철조망을 넘어 쇼핑의 조건으로 베들레햄을 방문하는 우리들. 밝은 팔레스티나 어린아이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게 된다. 촛불을 들고 어린 아이의 미사하는 모습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닌가. 종파 교리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말하고 싶다. 복음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사람들의 벽의 현실을 보게 된다. 에페소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벽을 헐려고(율법) 안식일을 지키고, 모자를 쓰고, 율법에 도전하려는 십자가를 지고 부활이 이방인의 벽을 허물면서 돌아가셨는데 여전히 높은 벽을 실감한다. 하느님의 살아있는 말씀 우리 자신에게 일생의 처음보는 합동미사이다. 형제요 자매 이것이 제일 소중한 성지순례이다.
가이드 선생의 말씀
① 사과 반쪽을 가지고 큰 쪽을 양보하면 자기 삶이 풍성해진다.
② 마음의 눈, 신앙의 눈으로 구름기둥을 따라 이동하고 어두울 때, 추울 때는 불기둥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영광을 얻는다.
③ 마음의 여유를 갖자.
1) 신앙 체험
마음을 열고, 마음으로 느끼고 신앙의 눈으로 느꼈다. 가파르나움, 예루살렘, 베들레헴, 홍해, 갈릴리 호수, 십자가의 길, 예수님 무덤, 황야의 체험, 황야 산상 미사, 갈릴리 호수 선상 미사, 또한 기쁨이 넘쳐 사는 보람을 느꼈다.
2) 예수님께 감사드리며 찬미한다.
전 세계인이 하느님의 자녀이다. 이슬람(알라)교, 기독교(천주교, 장로교), 유대교 등 세계 각처에서 순례자들이 성지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 와서 하느님께서 생활하시고 순례하신 길을 걸으며 신앙심을 두텁게 한다. 기독교인들과 교류하며 성가를 부르며, 성경말씀을 봉독하고 합동미사를 드렸다.
3) 마음을 비우자.
욕심을 버리고 어린 아이가 된 기분으로 신앙생활을 하자. 삶을 풍성하게 우리 가정의 가장으로서 가족의 평화 신앙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고통에 시달리고 가난한 사람을 위해 희생과 봉사를 할 수 있는 용기를 갖도록 많은 기도를 드려야 겠다. 매년 한 번 성지순례를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계획과 예산을 확보해야 겠다.
4) 성지 순례를 위한 기도문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가신 고통의 길!
순교자들이 생명을 내어놓고 걸어가신 신앙의 길을
마음 깊이 새기며 굳건한 신앙을 닮아가기 위해
이스라엘, 요르단 성지를 순례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계획한 대로 성지 순례 할 수 있도록
저희를 지켜주시고 이끌어 주소서
또한 우리로 하여금 순교자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진리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 갈 수 있는 용기와 건강을 주시고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참된 신앙인이 될 수 있도록
격려하여 주소서!
모든 순교자의 모범이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주의기도, 성모성, 영광송"
2018년6월19일 성지순례단 일동
5. 이스라엘
지중해의 동쪽 맨 끝 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 레바논, 동북쪽 시리아, 동쪽 요르단, 남서쪽에 시나이 사막을 갖고 있는 이집트, 그리고 서쪽에 위치한,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교차로에 위치한 이스라엘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의 유적이 남아있고 예로부터 동과서가 만나는 곳 이었으며 예언자들이 태어 낳고 예수 그리스도 가 탄생한곳으로 그분의 불멸의 가르침과 율법을 통하여 3대 일신교인 그리스도교, 유대교, 이슬람교가 일어난 인류가 선과 도덕에 눈뜨게 된 곳이다. 유대인들에게는 이곳이 경전의 땅이고 ,과거의 영광이 있는 땅이며 그리스도인들 에게는 예수가 태어나셨고 ,고난을 받으셨으며 ,그분의 거룩한 말씀을 듣고 그분의 기적을 목격했던 땅이고, 이슬람교도들에게는 예언자가 하늘에 올라간 승천의 땅인 것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오늘날까지 순례자들이 세계 각지로부터 이 역사와 믿음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어렸을 때부터 들어온 이곳을 직접 보기위해 온갖 고난과 위험, 많은 비용과 시간을 들여가며 찾아오고 있다.
믿음과 사랑의 이 땅은 또한 전쟁과 피와 고통의 땅이기도 하다. 고대로부터 오늘날 까지 전쟁과 테러가 끊일 날이 없어 이 성스러운 땅은 피로 물들어져 왔다.
세계 3대 종교의 성지답게 인간의 종교의 혼으로 이루어진땅 이기에, 인간사와 함께 흥망성쇄를 거듭해온 이스라엘, 우리는 하느님을 가슴에 그리며 성서의 무대인 여러 장소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찾아보며, 그 배경과 현장감을 나의 마음을 열고 신앙의 눈으로 , 마음으로, 느끼고 성서를 확인하고 , 나의 신앙을 확인하고, 세계사를 확인하기 위하여 이곳에 순례자로서 야훼의 체험을 경건한 마음으로 주님께 경배하고 기도드리며 함께 9일 동안 동행한 순례객과
함께 예수님의 은총을 받고 기쁨을 나누고 왔다.
*성 지 (THE HOLY LAND) :거룩한 땅
성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시고 생활 하시다가 십자가에 못 밖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땅인 파레스티나마을을 가르키는 용어로써 하느님이 인류사에 직접 관여하신 이스라엘 역사가 이루어진땅을 말한다. 나자렛, 베드레헴, 요단강, 가나, 필립보,가파르나움 , 가이사리아, 갈릴리호수, 타볼산, 여리고, 올리브산, 이외에 성인의 유적지나 순교사적지, 기적이 일어난곳 우리나라는 미리네, 천진암, 베론,새남터, 등이 있다.
*성지순례(PILGRIMAGE)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성스러운땅 즉 성지와 순례자들의 유해가 안치된 곳이거나 성인들의 유적지인 성역을 방문하여 경배를 드리는 신심행위를 성지순례라 한다.
신자들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지를 찾아 전례에 참석 기도하여 그 장소에 얽힌 종교적인 전승을 실존적으로 체험하고 신앙 공동체의 정체성과일체감을 확인한다.
*성지순례의 기원
구약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예루살렘을 향한 순례의 여정 이었으며 신약시대에 와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 승천 후 성모님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매일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가신 그 길을 찾아 가셨다고 한다. 이길이 십자가의 길로 가장 처절히 사랑과 눈물로 걸으시면서 아들이 마지막 걸은 길 위에 떨어진 땀방울과 냄새가 십자가상에서 흐린 핏방울의 흔적이라도 찾으려 했을 것이다.
*역사적 변천 과정
① 초기
콘스탄틴 대제(306-337) 와 그 어머니 성녀 헤레나(250-330)는 325-330년에 팔레스티나에서 예수의 무덤을 발견, 그 곳에 성묘 성당을 건축함으로 성지 순례가 활성화 됨. 그 후 예로니모 성인(337-420)에 의해서 이 지역들이 교회의 성지로 자리 잡게 된다. 6세기 이후 점차 많은 순교자들의피로 물들어진 로마 순례가 성행되었다가 8세기 이후부터는 성지순례는 신자들의 의무라고 할 정도로 관습화되었다.
② 종교개혁 이후
프랑스 대혁명이후 순례의 르네상스 시대가 전개되었으며 점차 성모님 발현지인 멕시코의 콰달루페, 프랑스의 루르드, 포르투갈의 파티마 등이 새로운 순례지로 신자들의 발길이 끊기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명칭
성서에서 말하는 가나안 땅
가나안 땅 (창세 16.3; 17.8; 민수 34,1-12)
약속의 땅 (창세17, 출애 6.4)
이스라엘 땅 (사무엘 상 13; 19)
유다 (역대 하 24.9)
팔레스티나 (창세 21, 출애 15.14)
오랜 방랑 끝에 약속의 땅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민족은 불모지를 개척하고, 황무지 사막에 새로운 마을을 세우고 기름진 농장, 푸른 숲, 첨단 산업 시설 등을 건설, 2000년 동안의 희망과 약속을 이루려 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주요 역사>
BC 1800 아브라함 가나안 이주
BC 1700 이스라엘 이집트 이주
BC (1300-1250) 람세스 건설 히브리인 부역
BC (1250-1230) 모세, 히브리인 출애굽, 시나이산
BC (1230-1220) 여호수아 요르단강 건너 가나안 정복, 12지파 세움
BC (1030-1010) 사울이 이스라엘 초대왕 등극
BC (1010-970) 2대왕 다윗왕으로 즉위
BC (965-922) 솔로몬이 즉위, 예루살렘 1차 성전 완성, 경배시작
BC (953-930) 이스라엘 왕국 분열
북: 이스라엘
남: 유다 (BC933)
BC 721 앗시리아 사르곤 2세에 의해 북이스라엘 멸망함
BC 586 시드키야 왕때 바빌론 느붓갓네살 왕이 예수살렘 성전 파괴했고 유다지파는 바빌론으로 끌려감
BC 539 페르시아의 고레스 바빌론 점령
BC 515 제 2차 성전 왕공(예수아 대제관 활약, 쯔루빠벨 총독)
BC 350 느헤미아, 에즈라, 역대기, 요나, 시편, 욥기, 말라기 등 완성
BC 332 알렉산더대왕이 팔레스티나 정복
BC 323 알렉산더 바빌론에서 병사 후 그리스 제국 양분(이집트-프틀레메오, 시리아-셀루코스)
BC (320-200) 프틀로메오 왕조 팔레스티나 지배
BC (200-142) 셀루코스 왕조 팔레스티나 지배
BC 63 로마 폼페이우스 장군 시리아 정복, 팔레스티나인 시리아 귀향
BC 43 헤로대 로마 도주 후 BC 37 로마군 지원으로 예수살렘 점령
BC 20 - AD 19 헤로대 성전 중축
BC 6 예수 탄생
AD 27 세례자 요한 활동, 예수님 공생활 시작
AD 30년 4월 7일 금요일 오후 해지기 전 예수님 처형, 부활, 승천
AD313 밀라노 칙령, 카토릭승인
AD 330 로마에서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천도
AD 326 헤레나 성녀 십자가 발견
AD 570 마호멧 출생
AD 614 페르시아 예루살렘 점령, 교회 파괴
AD 628 비잔틴 예루살렘 수복
AD 638 사라센 오마르 칼리프 예수살렘 점령
회교도가 팔레스티나를 정복
예수살렘을 그들의 3번째 성지로 만듬
AD 1009 파티마 칼리프 왕조의 하킴이 예수 부활교회, 그리스도교르 파괴, 기독교 박해
AD 1015 대지진으로 성전이 무너짐
AD 1095 예루살렘 탈환
AD (1096-1099) 1차 십자군 원정
AD (1147-1148) 2차 십자군 원정, 프랑스 루이 7세
AD (1189-1192) 3차 십자군 원정, 영국 리챠드 1세
AD 1244까지 십자군 예수살렘 통치, 몽고인 팔레스티나 침공
AD 1299 터키, 오스만 성립
AD 1517 오스만 이집트 점령, 루터 종교 개혁
AD 1798 나폴레옹 이집트, 팔레스티나 원정
AD 1854 성모 무염시태 교의
AD 1940 -30 히틀러의 박해 유태인 600만명 학살
AD 1947 이스라엘 공화국 세움
AD 1948 제1차 중동전쟁,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지역 80% 차지
AD 1956 제2차 중공전쟁, 이스라엘이 이집트, 시리아 요충지 점령
AD 1967 제3차 6일 전쟁, 시나이반도, 골란고원, 가자지구, 광활한 영토 점령
2018년 겨울 이스라엘, 요르단 성지 순례기 연재를 마치며
찬미 예수님! 감사합니다.
2018년 여름부터 6개월간 국내 순교성지 새남터, 절두산, 강화 갑곶 등을 다니며 순례팀원
들의 팀웍도 다지며 미사고 참례하고 맛집도 찾아다니며 식도락도 즐기며 성지 순례를 준비
하였습니다.
그리고 지난12월 4일 이스라엘 텔아비브에 도착하여 나자렛, 베들레헴, 갈릴래아 호수, 예루살렘을 순례하며 예수님이 태어나시고, 공생활하시며 기적을 일으키신 장소, 십자가 목받혀 돌아가시고 사흘후에 부활하신 역사적인 사건의 현장도 찾아다니며 묵상하고 감사의 기도
드리며 주님의 은총을 많이 받고 왔습니다.
또 이집트에서 40년간 모세 와 종사리하고 유대민족을 탈출한 "왕의 길" 요르단의 와디럼
사막, 느보산을 거쳐 가나안으로 들어 가셨던 길목, 와디럼 사막에서 하루를 탠트에서 자면
서 불기둥과 구름 기둥도 체험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성서를 통하여 알았던 말씀을
성지순례를 통하여 몸소 체험하고 기쁨을 맛 보았습니다.
2018년 6개월, 순례기를 35회에 걸쳐 쓰면서 1개월이 즐거웠고 그동안 저의 순례기를
탐독하시며 답글을 써 주신 불지방의 콕대장님을 비롯하여 모든분께 감사드립니다.
1). 예루살렘(JERUSALEM)
이름조차 아름다운 도시라는 뜻의 예루살렘은 도시 전체가 하나의 유적지이다. 지금까지 쉼 없이 발굴이 계속되고 있으며 어느 곳을 발굴하더라도 지하 층층마다 연대가 다른 유물과 유적이 출토되고 있다. 예루살렘은 해발 800m의 유대 산악지대에 발달한 도시로 약 인구 40만 명이 살고 있는 이스라엘의 수도이다. 고대 예루살렘 및 유다 왕국의 도읍지 이며 기원전 1000년경 다윗왕이 이 곳을 유대인의 도읍으로 정하고 그의 아들 솔로몬이 화려한 신전을 건설한 이래 유대인에게 있어서 빼 놓을 수 없는 도시가 되었다. 예루살렘은 그 곳에 사는 사람과 그 곳을 지나가는 사람 모두를 매료시킨다. 유다인 뿐만 아니라 이스람교도에 있어서도 기독교도에게 있어서도 성스럽고 그리운 도시이다. 그러한 연유로 이 곳을 자기네들만의 것으로 삼고자 다투어 왔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 또는 평화의 근원지라는 뜻을 지닌 이 도시는 히브리어로는 예루살라임, 희랍어로는 예로솔뤼마, 시리아어로는 우루살림이라고 불리며 이집트에서 발견된 텍스트에서는 우루살리뭄 또는 우루슐림우로 표기되어 있다.이슬람교도들은 예루살렘 도시를 메카나 메디나와 같은 성지로 여겨 엘쿠드스(성지라는 뜻)이라고 칭한다. 기구한 수천년 역사 속에 깊은 인맥을 오랫동안 계속 이어오고 있는 예루살렘은 유다인, 그리스도인, 회교인 모두가 귀중한 ‘성지’(느헤미아 11.1-2)로 여기고 있어 오늘도 수많은 인파의 발길이 그칠 줄 모른다.(이사 2.1-5; 60;1-22)
예루살렘 도시는 지중해 연안으로부터 약 52km 떨어진 지역 해발 720-800 고지에 위치한 곳으로 기흔샘을 제외하고는 샘물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아주 메마른 땅에 자리하고 있으며 서쪽은 힌놈 또는 개헌나 계곡이, 동쪽으로는 키드론 계곡이 위치하고 있다. 이 계곡들 사이에 티로포에옴이라고 칭하는 계곡이 있었는데 모두 뒤덮여져 오늘날엔 겨우 그 흔적밖에 찾아볼 수 없다. 힌놈 계곡과 티로포에옴 계속 사이에는 시온산과 갈바리아가, 티로포에옴 계곡과 기드론 계속 사이에는 오벨산과 모리아 산이 자리한다. 그리고 키드론 계곡 동쪽으로는 올리브산과 스코푸스산이 위치하고 있다.
예루살렘은 구도시와 신도시로 나누어 불려지고 있는데, 구도시는 3000년전 이래의 고대 도시 흔적 위에 서기 16년 오토만 제국의 슬레이만 대제에 의해 세워진 성벽내 도시로 유대인, 기독교인, 이슬람교, 아르메니아 지역으로 이루어진 지역으로 지칭하며 여기엔 성전산, 예수님 무덤 교회(주의 무덤 성당), 통곡의 벽, 최후만찬 기념 성전, 마리아 영면기념 성전(성모 영면 성당), 주기도문 기념 성당, 예수 승천 성당, 도미누스 플레밋 성당, 겟세마니 성당(만국교회), 베드로 회개 기념 성당, 성 안나 성당, 실로암 샘, 다윗왕의 무덤, 비아 돌로로사(십자가의 길), 갈바리아(해골산의 돌), 예수님의 무덤, 유대인 공동묘지 안토니아섬, 아르메니아 교회, 러시아 교회, 성벽, 엘악사 이슬람교 경당, 역사 박물관등이 있다.
신도시는 구도시 서편에 발달된 신시가지로 이스라엘 국회 의사당, 정부 관공서, 국립 박물관 등이 있는 지역이다.
하느님으로부터 유일신의 보루였던 예루살렘은 사상가들과 예언자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지상의 불의 법칙, 윤리적이고 우회적인 사당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이 곳에서 타오른 새로운 믿음의 불길로 우상숭배와 타락에 빠져있던 수많은 인간들은 정의의 지배와 신앙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다. 율법이 시온에서 나온것이며, 야훼의 말씀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유대인들에게는 이 곳은 화려했던 과거와 희망찬 미래의 터전이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가 지상 마지막 활동을 한 즉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다시 부활한 장소 인가 하면, 회교도인에게는 예언자 마호멧이 승천한 곳이다. 믿음과 평화의 도시이고 가장 성스러운 도시인 예루살렘은 또 한편으로는 폭력과 전쟁 그리고 유혈의 장소이기도 하다. 그 오랜 역사동안 이 곳 후손들은 칼에 의해 무참히 희생되어 갔다. 세계 어디에도 이 곳만큼 많은 전쟁이 있었던 도시는 찾아 볼수 없다. 예루살렘 시내와 그 주변을 걷는 다는 것은 곧 피의 바다 위를 걷는 것과 다름이 없다. 지금까지 이 도시는 50여 차례나 포위당했으며 36차례나 넘게 주인이 바뀌었고 10차례나 파괴되어 왔다.
이 도시가 언급되기 시작된 시기는 아브라함 시대로 평화를 의미하는 살렘으로 성경에 등장한다. 살렘왕 멜기세댁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였다.(창세 14.18) BC 10세기 다윗이 여부스로부터 예루살렘을 점령 수도로 삼았고, 계약의 궤를 도시 안으로 옮겨왔다.
(1)올리브산(Mt. of OLIVE) 830m,또는 감람산
올리브산은 키드른 계곡 건너편, 예루살렘동쪽에 위치해 있다. 스크푸스산 남쪽에 이어져있는 해발 830m의 정상에서 바라보는 예루살렘의 아름다운 전경, 아침에는 태양빛을 받은도시가 황금빛으로 빛나고 ,저녁에는 시온산 맞은편으로 가라앉은 태양이 붉게 타오르는 아름다움, 사해까지 펼쳐진 언덕들과 동쪽으로 보이는 모압산맥은 장관을 이룬다.
올리브산은 유대인과 그리스도교인들에게는 의미가 깊은 곳이다. 유대인 들에게는 이곳에서 예언자 하가이, 즈가리아, 말라기가 묻인곳으로, 그리스도교인 들에게는 예수님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의 현장으로 기억 되는 곳이다. 올리브산과 예루살렘은 상당히 인접해 있다. 사도행전1,12에 의하면“그 뒤 사도들은 그 올리브라고 하는 산을 떠나 안식일에 걸어도 괜찮을 거리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올리브산은 예루살렘에서 안식일에 걸을수 있는 거리라고 하니 대략 1km정도 떨어진 가벼운 산책거리쯤 되지 않았나 짐작이 간다. 예루살렘 시가지가 해발 720m정도 되고, 예루살렘시 동쪽에 위치한 이 올리브산은 100m정도 더 높다고 하니 해발820m 이상이 된다고 하겠다. 오늘날 이곳에는 많은 주택들이 즐비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산”이라는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올리브산은 한때 다윗왕이 압살롬의 소동으로 인해 피신해 지냈던곳(사무엘하15,30-32)이고
‘속죄의 날’에는 이곳에서 번제를 드리기도 했다.(민수19,1-10)
즈가리아와 에제키엘 예언자는 이곳 올리브산을 신현(神現) 의 장소로 언급하고 있다.(즈가14,4)
무엇보다도 이곳 올리브산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발자취를 두루깊게 남겨진 곳으로 그리스도인들 에게는 아주 중요시 되는 성지 이다. 예수께서 베다니아에게 머무르시는동안, 예루살렘 성전에 오고 가실때마다 올리브산 고갯길을 밟으셨다.(마르11,1-27), 한때는 예수께서 예루살렘 시가지를 내려다 보시며 눈물을 흘리시기 까지 하셨고(루가19,37:41-44), 예루살렘 성전을 내려다 보시고 세말에 대한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하신 곳 역시 이곳 올리브 산이다.(마르13,1-37), 또한 올리브 산 어느 언덕에서 밤을 지세우기 까지 하셨는데 (루가21,37), 이 언덕을 가르켜 게쎄마니 동산이라 부른다. 이는 히브리어 갇세마님(기름틀)의 희랍어식 발음이다. 이동산은 올리브 산 서편 하단부에 , 예루살렘 구시가지의 성벽 바로 맞은편으로 대략 40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예수께서 자주드나드셨던 곳으로 제자들에게는 두루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루가22,39: 요한18,1-2)
이곳은 또한 예수께서 죽음의 공포와 불안속에서 고뇌하시며 온갖 정성을 다해 성부께 기도 드린곳이요, 유다의 배신으로 인해서 유다 군사들에게 체포되신 곳이기도 하다.(마르14,26-50)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가셨던 곳 역시 올리브 산 어느 부분이다.(사도1,6-12), 이런 유서깊은 곳에 기념성당과 소성당이 자리하고 있어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곳이다.
올리브산 남서쪽, 좀더 정확히 말해서 예루살렘 성전 바로 건너 편에는 그리스도인들, 유다인들, 그리고 이슬람교도들의 공동묘지가 넓게 자리잡고 있다
(2)겟세마니 동산(The garden of GETHSEMANE)
겟세마니 동산은 성지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장소이다. 예루살렘 동쪽의 키드론 골짜기를 지나
약 3.2km지점에서 북에서 남으로 길게 뻗어 있으며 서쪽으로는예루살렘이 있고, 동쪽으로는 예리코와 요르단 계곡과 사해가 있다. 이산은 820m 정도의 높이 이다.
또한 오리브산이라고 부르는 이산은 글자 그대로 올리브나무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 산은 예수님과 많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제자들과 함께 설교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보고 눈물을 흘리셨으며
예수님께서 유다의 배반에의해 끌려 가시기 직전 이 곳에서 기도하셨고 골고타에서 돌아 오신후
부활하셔서 이 곳에서 많은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승천 하셨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2,000년 전의 모습과 같다. 키드론 계곡을 사이에 둔 맞은편 언덕에는 도시가 번창해 왔지만 이곳은 예수가 살았던 시대. 이후로 전혀 변화가 없이 그 모습을 유지해 왔으며 올리브 나무들도 그때의 것인 것 같다. 사도요한은 이곳을 키드론 개울 너머의 동산이라고 불렀으며 예수가 즐겨 찾아 기도 하신곳 이다. “예수께서는 늘 하시던대로 그 집을 떠나 올리브산으로 올라 가셨다.(루가22,39), 이곳에서 예수는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고난의 밤을 지낸 곳으로 다가올 운명에 대해 고뇌하면서도 모든 인류의 죄를 짊어지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힐 것을 결심한 곳 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일이 아니라면 이잔을 제게서 거두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루가24,42), 이 기도가 끝난 뒤 유다가 대사제들이 보낸 무리들과 함께 와서 그를 배신 하였다.(마태26,47-56: 마르14,43-50: 요한18,3-12: 루가22,47-50) 그러자 제자들은 예수를 버리고 도망갔다.”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라는 즈가리아의 예언이 실현 되었다. 이어 예수는 가아파의 집으로 끌려갔고 다음날 십자가에 못 박혔다. 겟세마니 동산에는 그 수령을 알수없을 정도로 오래된 여덟그루의 올리브 나무가 있다. 어떤 식물학자들은 이들의 나이가 3,000년 정도 되었다고 한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70년경 티투스황제가 예루살렘을 점령했을때 예루살렘 외곽의 모든나무를 잘라 버렸다고 한다. 이 나무들이 이 시기에 용케 살아 남았다면 예수시대의 바로 그 나무들일 것이다. ”이 올리브 나무는 죽지 않는다.“(플리니) 이 나무들은 지금도 열매를 맺고 있다.
(3)겟세마니 대성당(Chrch of ALLNATION)또는 만국교회
여러나라 민족들의 재정적인 보조로 1919년에 짓기 시작하여 1924년에 완성한 성전이다.
때문에 이 성전은 오늘날 "여러민족의 대성전" 이라 불리고 있다.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 속에 고뇌하셨던 예수님의 채취가 담긴곳이기도 하며 또한 "고뇌의
성전" 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375-395년에 데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건축된 교회 였으나, 614년 페르시아 침입시 파괴 되었으며 8세기에 대지진으로 또다시 파괴 되었다. 현재 교회는 1,924년 세워진 것으로 가능한 옛 모습을 재현코자 했기 때문에 4세기 종반의 바실리카 모양이나 비잔틴 시대의 모양과 벽의 자취가 그대로 남아있다. 한편 이성당은 세계 16개국에서 보내온 헌금으로 1,924년에 짓기 시작 하여 완성한 성전이다 .그래서 “만국교회”라 부르기도 한다.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날밤 , 최후의 만찬을 마치신후에 키드론 시내 건너편 “겟세마니라는 곳에 이르렀다.(마르14,32),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 속에 고뇌 하셨던 예수님의 체취가 담긴곳(마르14,32-42)이라고 하여 ‘고뇌의 성전’ 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성당을 찾아오는 순례자의 눈길을 끄는 것은 성전 안의 엄숙한 분위기와 제대앞에 놓인 바위이다. 이바위는 곧 예수님의 체취가 깊숙이 담긴 것으로서 그성흔을 말해 줄뿐 아니라, 아름다운 실내 장식과 자주빛창에 의해 여과되어 흐르는 흐릿한 조명은 기도와 명상의 분위기를, 고뇌 속에 온 정성을 다해 성부께 기도드리셨던 예수님의 모습(마태26,39: 마르14,35: 루가22,41)을 생각케 해주기 때문이다. 그다음에 눈에 띄는 것은 비잔틴 시대 성전의 바닥에 깔렸던 모자이크와 잔존해 있는 성전의 벽이다. 아주 아름답게 가꾸어진 성당정원에는 올리브나무가 상당히 많은 편인데, 그것들 중 여덟 그루는 예수님 생존시대부터 있었다고 한다.
(4)도미누스 플레빗 소성당(DOMINUS FLEVIT)
도미누스 프레빗이란 ‘주께서 눈물을 흘리셨다.’는 뜻인데 겟세마니 대성당에서 동쪽으로 대략 300m 정도 떨어진 거리에 위치한 프란치스코 수도회 소속 성당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해서, 이 성당은 올리브 산중턱에 위치해 있다. 예루살렘 성전을 위시하여 구 시가지를 한눈에 바라볼수 있어 아주 관망이 좋은 곳이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그 도시를 내려다 보시고 눈물을 흘리시며 한탄 하셨다. (루가19,41-44),
현재 소성당은 겟세마니 대성당을 설계한 건축가 안토니오 빼르롯치가 설계하여 1955년 이성당
자리에 다시 소성당을 지었다.
지붕을 눈물 모양으로 만들어 놓았다. 또한 예수님 당시의 장례풍습인 애도의 뜻으로 눈물을 넣었던 눈물단지 모양도 지붕에 조각 하였다.
이곳에서 바라보면 예루살렘성이 한눈에 들어 온다. 이 곳은 또한 예수님이 예리코로 부터 나자로가 살던 베다니아 마을 을 지나 벳파게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던 길목이기도 하다.
예수님께서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시던 성벽의 동문(황금문)이 키드론 계곡
건너 바로 정면이 보인다.
(5)주기도문 기념성당(The church of the PATER NOSTER)
교회 역사가인 에우세비우스의 기록에 의하면 "성녀 헤레나 가 이스라엘에 3개의 교회를
세웠는데 그 교회들은 가톨릭이 신비한 사건과 관련 있는 3개의 동굴을 중심으로 세운것
이다" 라고 전하고 있다.
하나는 베들레헴의 예수님 탄생동굴 위에 세워진 예수탄생기념성당, 두번째는 예수님의 무덤
위에 세워진 주님 무덤성당 그리고 마지막으로 올리브산의 동굴 위에 ㅅ워진 주님의 주 기도문 성당이다.
주기도문이 시작되는 라틴말을 따서 이름을 지은 교회로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치신 곳이며 에루살렘의 완전한 파괴를 예언하고, 재림과 세상의 종말을 예고했던 장소에 세워졌다(마태24,1-3:루가21,5-7) . 4세기에. 콘스탄티 대제가 예수님의 말씀을 기리기 위해 이곳 올리브산위에 처음으로 교회를 세웠으며, 614년 페르시아 침공시 파괴되고 12세기 십자군에 의해 다시 세워졌으나 다시 이슬람교도에 의해 파괴되었다. 현재의 성당은 1874년 프랑스에서 카토릭의 카르멜파 수녀들을 위한 수녀원과 같이 건립 한 것으로 수녀원 건물 벽에는 한국어를 포함 세계 82개 국어로 주기도문을 번역하여 새겨져 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가르쳐 주셨다.“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온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 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마태6,9-13:루가11,2-4)
(6)예수 승천 기념경당(The chapel of the ASCENSION)
올리브산 정상 즉 엘투르라고 칭하는 아랍인들의 마을이 있는곳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이슬람교에 속한 소경당으로 예수님이 부활하신지 40일 후에 예수님 승천의 장소로 알려져 있다. 383년 귀족출신 포이메니아가 비잔틴의 성당으로 세워졌으나, 614년 페르시아에 의해 파괴된후 676년에 재건 되었으며, 1,009년 하킴에 의해 또다시 파괴되었다. 1,152년 십자군에 의해 다시 팔각형의 경당을 재건 아드스딩 수도회가 사용하고 있던중, 1,198년 살라딘이 이슬람경당으로 개조, 현재 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이슬람교경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예수승천에 관해서는 루가복음사가 만이 전해주고 있다. “예수께서 그들을 베다니아 근처로 데리고 나가셔서 두손을 들어 축복 하시면서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 가셨다.(루가24,50-52: 사도1,1-12), 이 경당 안에는 예수께서 승천하실 때 남겨 놓고 가셨다는 예수님의 오른쪽 발자국이 찍힌 바윗돌이 잘 보관되어 있으나, 역사적인 신빙성은 전혀없고, 십자군 시대의 유물로 보고 있다. 670년경 이곳에 순례왔던 프랑스 주교 이르쿨프는 먼지위에 찍힌 예수님의 발자국이 예수수승천 성당안 중앙에 잘 보존되어 있다고 전한다. 회교도들은 놀랍게도 예언자 이샤(예수)의 승천을 경앙하고 있어 하나의 역사적인 사건의 기념으로서 보관하고 있다고 하겠다. 예수승천 축일때만 그리스도교인들은 이곳에서 예수승천기념 신심 예절을 거행할수 있게 되어 있다.
(7)베드로 회개 기념성당(ST PETERIN GALLICANTU)
시온산 키드론 계곡이 내려다 보이는언덕에 있는 이 성당은 1,931년 대제사장 가아파의 집 이었다고 전해지는 장소에 승천 수도회가 세운 것이다. 제자에 의해 배신당한 예수가 겟세마니 동산에 끌려와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아침 첫 공판을 받은 곳이 바로 이곳이다.(마태26,57-63,마르14,53-65,루가22,54-55,63-71: 요한18,12-14,19-24),
그리고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알고 사도 베드로가 통곡한 곳도 이곳이다. 승천 수도회가 이곳을 발굴해본 결과 이곳이 가아파의 집터임을 확증 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다".
그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가야바 대사제의 집에 끌려와서 첫번째 심문을 받는다.
베드로는 멀찍이 떨어져 뒤 딸아 갔다. 사람들이 안뜰 한가운데에 불을 피우고 앉아 있었는데
베드로가 그들 가운데 끼어 앉았다. 그런데 어떤 하녀가 불가에 앉은 베드로를 보고 그를
주의 깊게 살피면서 말하였다." 이이도 저사람과 함께 있어요". 그러자 베드로는 " 이여자야 나는 그 사람을 모르네"하고 부인하였다. 얼마뒤 다른사람이 베드로를 보고 "당신도 그들과
한패요"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사람아 나는 아닐세' 하였다. 한 시간이 지났을때에 또 다른 사람이 " 이이도 갈릴래아 사람이니까 저사람과 함께 있었던게 틀림없소" 하고
주장하였다. 베드로는 " 이사람아 나는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하고 말하였다.
그 가 이말을 하는 순간에 닭이 울었다, 그리고 주님께서 몸을 돌려 베드로를 바라 보셨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오늘 닭이 울기전에 너는 나를 세번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밖으로 나가 슬피 우셨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예언 말씀대로 그 자신이 나약
하였슴을 깨닫고 통곡한다."갈리칸투" 라는 라틴어로 "닭이 운다"라는 뜻이다.
돔모양의 지붕 꼭대기에는 베드로가 부인한 형상의 황금 수닭의 형상이 있는데 성경 말씀에
의거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지하층에는 예수님 당시 감옥으로 추정되는 감옥도 있다.
이 곳에는 거의 완벽하게 보존된 히브리 도량형과 맷돌, 토굴, 앞마당,종들의 거처, 비잔틴 교회의 잔재들이 발견 되었다. 또한 교회 왼편에 옛 계단이 발견 되었는데 ,이 길은 예수시대의 것으로 믿어진다. 이 길은 겟세마니에서 윗도시로 들어가는 지름길 이었기 때문에, 이길을 예수님께서 밟았을것이 분명하다. 예수시대에는 이곳은 예루살렘 성안에 있었다.
(8)예루살렘 대성전(TEMPLE MOUNT )
눈부신 황금색 빛나는 지붕에 팔각형으로 지어진 오늘의 이슬람교 대사원(쿠브베트 에스 삭흐라)과 엘 앜사 (EL AKSA)사원이 자리한 지역을 아랍인들은‘하람 에쉬 사리프’(숭고한 성역)라고 부른다. 바로 이 지역은 한때 예루살렘 대성전이 자리 했었다. 이 성역은 현 예루살렘 구시가지의 1/6에 해당하는 넓은 지역이다. 서쪽길이 490m, 동쪽길이 474m, 북쪽길이321m, 남쪽길이 283m, 나 되는 방대한 구역이다.
유대인들과 이슬람교도들의 전통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사악을 희생제물로 제사를 지내려 했다던 모리야산(창세22,1-22)이 바로 이성역 안에 위치했다고 한다.
다윗(기원전1,004-986)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왕국의 중심으로 만들었다.(사무하5,9)
예언자 가드에 의해 다윗은 야훼께 속죄 제사를 지내고자 제단을 세운적이 있었다.(사무하24,18-25)
오늘날 이슬람교 대사원 안에 넓다랗게 자리하고 있는 바위가 바로 그 제단 이었다고 한다. 그 바윗돌의 크기는 길이13.5m,폭10.8m ,높이1.8m가량 된다. 다윗은 또한 키럇여하림에 있던 “계약의궤”를 모세가 출애굽때 사막에서 만든것으로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야훼와 맺은 계약의 상징 이었고, 동시에 경신도구 였다. 모세의 십계판, 만나, 그리고 아론의 지팡이가 계약의궤 안에 안치 되었다고 한다. 모세가 만든 계약의궤는 여호수아가 “약속의땅” 가나안으로 이주할 때 가져와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옮길 때 까지 키럇여하림에 안치 되었던 것이다. 다윗의 치세 말엽 여부스인 아라우다가 타작마당으로 사용하던 황무지 산을 사들였다.(사무하24,18-25), 그리고 야훼의 제단을 세운뒤에 하느님께 성전을 지어 바치려고 했으나 이 계획은 그의 아들에 의해 이루어 졌다. 그의 아들 솔로몬은 웅장한 성전을 세우고 수입해온 나무와 구리, 금으로 화려하게 꾸몄다. 솔로몬은 야훼께서 거쳐하실집, 곧 성전을 지어야 했었다.(열왕6),
솔로몬 성전(B.C 964=957)
솔로몬이 7년 공사 끝에 완공한 이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은 B.C587년 느부갓에살이 예루살렘을 함락시킬 때 파괴 되었고, 성전내의 여러 보물들과 경신도구들은 바빌론으로 옮겨졌고, 전쟁에 진 유대인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가 유배생활을 했다.
즈르빠델 제2 성전(B.C 444=22)
50년이 지난 후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왔고, 즈르빠벨에 의해 비교적 작은 규모로 성전이 다시 세워졌다.(에즈5,1-6)
헤로데 성전
그 뒤 헤로데왕이 그가 저지렀던 과오를 희석 시키고 유대인의 환심을 얻기위한 일환으로 기원전 20년경에 파손된 성전을 모두 헐고 다시 새롭게 지었다. 수만명의 인부들이 동원된 엄청난 공사의 결과로 성전터에 두배나 넓어졌으며, 솔로몬 성전의 장엄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능가한 성전을 건설했다. 이공사는 B.C20년에 시작 A.D64년에야 비로소 준공을 보았으며, 헤로데가 만든 이성전은 예수가 직접 보셨던 성전이다. 이렇게 화려했던 성전도 유다전쟁(66-70)에 파괴 되었고 페허가 된 성전터에 135년 유대인이 두 번째 반란이 실패로 끝난 뒤 하드리아누스황제는 이 자리에 쥬피터 신전을 세워 하느님을 모독했다.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폐허가 된 성전터는 하느님께서 저주받은 곳으로 여겨졌다.(마르13,1-2), 그래서 이곳이 돌 무더기 뿐인 폐허가 되었다. 636년 이슬람교도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그들은 이 산의 돌무더기를 깨끗이 치웠다. 그리고 칼리프 오마르가 이곳을 예언자 마호멧이 날개달린 말을 타고 승천한 곳으로 정하고 이 곳에 이슬람교사원을 지었다.
691년에 옴마이드왕조의 칼리프 압드엘 말리크는 오마르가 세운 작은사원을 지금의 사원으로 개축 하였다. 알라신의 예언자 마호멧이 승천 했다는 바위가 있는 이슬람교 대사원은 메카에 있는 카바 ,메디나에 있는 예언자의 무덤과 함께 이슬람교도 들에게는 3대성지중에 하나이며 또한 회교 세계의 가장 아름다운 사원중에 하나이다. 지난 1,300년 동안 이슬람교 대사원은 수차례 보수 되었으나 그외형은 691년 이후 거의 변하지 않았다.
1,099년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정복했을 때 이 사원은 ‘주의성전’으로 개조 되었다. 1,187년 십자군이 패하고 철수하자 88년동안 성전 꼭대기에 빛났던 십자가는 제거되고 그 자리에 이슬람교의 반달이 다시 올라졌다. 그 이후는 지금까지 이 이슬람교 대사원은 이슬람교 사원들 중에 가장 정교하고 인상적인 건축물로 손꼽히고 있다. 이 사원의 외형은 정팔각형으로 각변의 길이20m, 직경60m, 중앙돔 높이가 35m가 된다. 지붕은 합금된 알루미늄판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낮에는 눈이 부시게 빛난다.
이곳은 작은 충돌이 일어난다면 곧바로 중동전으로 연결된 만큼 이스람,유대인에겐 절대절명의 중요한 장소이다. 이스라엘 군인은 문까지만 지킬뿐이고 내부는 이스람 자치경찰에 의해 철저하게 통제되고 있다. 내부에는 마호멧의 밤의 여행을 기념한 알 아크사 모스크, 이사악을 번제 지내려 했던 바위이자 마호멧이 승천할 때 놓았던 성스러운 바위, 솔로몬의 성전 지정소, 마굿간, 메시아가 오실 때 까지 영원히 닫혀 있는 황금문, 예수께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시던 성전의 담벼락 등이 있다.
9)통곡의 벽(WESTEN WALL)또는 서쪽의 벽
일명 통곡의 벽이라고 하는 이 곳은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하고 성스럽게 여기는 곳이며 이 곳은 예루살렘 성전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서쪽의 벽 이라고 도 한다.
이 서쪽벽은 헤로데가 B.C 20년에 솔로몬 성전에 이어 세번째 성전을 세울때 건축 된 것이다.
유다인은 이곳을 신앙의 원천 이라고 믿는 중요한 장소이다. 비롯 그들은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지만 3,000년 전통을 가지고 있고 하느님이 선택한 백성이라는 긍지를 갖고 있다. 시온산에 남겨진 60m의벽, 웅장함을 뽑내던 헤로데의 성전을 향해“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너는 예언자를 죽이고 ..., 너희 성전은 하느님께 버림을 받아 황폐해지리라” (마태23,37-39: 루가13,34-35)라고 예언하시던 그 시절의 돌담(지하 17단과 지상7단)이 남아 있는 흔적이다. 70년 로마의 디도장군에게 멸족당한 이래 흐트러진 유대인에겐 이 한 뼘 남은 담에서 통곡하는 것마저 금지 되었고
1,878년만에 이스라엘을 재건하였으나 이곳이 요르단 땅이 되는 회한을 남겼다. 그러다가 1,967년 6월전쟁의 승리로 근 2,000년 만에 되찾은 벽에는 전세계의 유대인 수백만이 연중 찾아와 순례하고 이스라엘 민족이 정신적, 종교적 중심으로 경외의 장소이다. 이스라엘 군인의 삼엄한 소지품 검문을 통과하여 광장에 들어서면 곧 바로 황금빛 이스람 사원의 웅장한 건물 아래의 담벼락과 마주한다. 왼편은 남자들, 오른편은 여자들의 기도장이며, 이스라엘인 남자는 반드시 키파(작은모자)를 써 여호와 하느님을 경외하고 여자는 어깨와 무릅을 드러나지 않도록 가려야 한다.
(10)최후 만찬 기념성당(THE LAST SUPPER)
이곳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가진곳이다.(마태26,17-33: 마르14,12-16: 요한13,26-30: 루가22,7-13), 바로 이 장소에서 예수께서 부활한후 제자들 앞에 그 모습을 두 번 보였고(마태28,16-20: 마르16,14-18: 루가24,36-49: 요한20,19-22;23;24;29), 제자들이 성령을 받기도 했다.(사도2,1-4),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본거지가 시온산에 있었으며 그들은 1세기 무렵, 이곳에 성당을 세웠다. 이성당은 전쟁터에서 벗어난 지역인 관계로 70년과 135년에 일어났던 전쟁에서 살아 남을수 있었고, 비잔틴 시대에는 더욱 확장 되었다. 이교회가 초대교회라는 점이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온것이요, 야훼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온것이다.’라는 이사야 예언과 결부되어 “성스러운 시온” 교회로 불리워졌다.
시온산의 이름도 이 교회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614년 페르시아인들에 의해 파괴 되었고,12세기에 십자군에 의해 두 개의 교회가 연결된 형태로 재건되기도 하였다. 1,176년에 아래 경당이 다윗의 무덤이 자리했던 곳으로 확인 되었고, 1,333년 나폴리왕 로베르또와 왕비 산치아는 이집트 술탄 말렉 알 니시르 마호멧으로부터 매입하여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넘겨 수도원과 고딕식 건축양식의 기념 성전을 짓게 하였다. 이층으로된 이 기념성전을 ‘예수의 최후만찬 기념성당’이라고 불렀다. 지상층에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요한13,1-20)을 기억하는 경당,그리고 사도 토마(요한20,24-31)경당이 있었고, 윗층에는 최후만찬(마르14,12-26)기념경당과 성심강림(사도2,1-13)기념경당이 있었다. 그러나 이기념성전을, 1,552년에 터어키인들에 의해 그리스도교인들이 윗경당에서 쫒겨난 이후 이곳은 뾰족탑이 세워지고 회교도의 기도소리가 울려 퍼지는 회교사원으로 변모 되었다. 근 400여년동안이나 회교사원으로 사용하다가
1,948년에는 이스라엘 정부이 손에 넘어감으로써 그 운명은 또 달라졌다. 지상층에는 다윗무덤이 자리한 곳이라하여 유다인들은 자기네들의 시나고가와 탈무드 학교를 만들고 윗층에 있는 성심강림 기념경당을 폐쇄시켜 버렸다.
그러나 최후만찬 기념경당은 모든 종파를 초월하여 누구나 자유로이 출입할수 있도록 개방하고 있다. 하지만 이 건물 안에서는 어떠한 종교적행사는 법적으로 금해져 있다. 단지 성목요일과 성령강림 대축일에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의전례만 예외적으로 허용되고 있다.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는 강제로 빼았긴 기념성전과 수도원 건물을 되찾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해 봤으나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
그리하여 1,936년에는 기념성전터 바로 옆에 조그마한 부지를 매입하여 기념성전과 수도원 건물을 지었다. 이 건물이 오늘날 라틴 계통 그리스도인들의 최후만찬 기념성전으로 사용되고 있다.
최후만찬 기념성전과 마리아 영면 기념성전이 위치하고 있는 성역은 시온산의 핵심부분에 속하며, 그리스도교인들에는 초대교회에 공동체의 발상지로 아주 귀중한 성지라고 하겠다.
(11)십자가의 길(THE VIA DOLOROSA)
비아 돌로로사는 본시오 빌라도로 부터 판결을 받은후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가셨던
전통적인 길이다. 지금도 유다인들은 이길을 성역화 하지않고 그대로 두고 있다. 길은 좁고, 길 양쪽에는 가난한 아랍인들이 토산품을 파는 영세상이 즐비한 혼잡한 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올라가신 그길, 비아돌로로사 라틴어로 "슬픔의 길" 혹은 "고난의 길"을 뜻하는 비아 돌로로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까지 가신 길을 일컫는다.
이곳을 찾는 성지 순례자들은 예수님께서 로마총독 이었던 본시오 빌라도로부터 사형선고 판결을 받고난 뒤 채찍아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메고, 그가 못박힐 장소인 골고다언덕(갈바리아)까지 14번을 쓰러지거나 멈추었던길로 슬픔의 길인 장소이다.
오늘날 순례자들이 행하고 있는 십자가의 길은 1,294년 리칼두스신부님에 의해 처음으로 그 위치가 설정 되었다. 안토니아성(제1,2처)에서부터, 골고타(제10-14처)까지 그 사이에 일곱 개의 장소(제3-9처)를 적절하게 만들어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토록 했었다.
그후 1,540년경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에 의해 오늘날 ‘예수의 십자가의길’이 확정 되었다. 따라서, 오늘날 순례자들이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면서 행하는 ‘예수 십자가의길은 예수께서 직접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가셨던 바로 그 길이러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예수 수난의길을 소중히 여기고 기억하는 하나의 상징적인 길이라고 하겠다. (오늘날 행하고 있는 ’십자가의길‘중에서 복음에 근거를 둔 내용은 아래와 같다.
수난의 길에는 열네군데의 가슴 아픈 사연 있는 장소가 있다. 그 중 아홉 곳은 복음서에
나오고 다섯곳은 역사적으로 전해 오는 것이다.
처음 두군데는 안토니아 성에 있으며, 일곱군데는 이 길 위에 있고 나머지 다섯군데는
거룩한 무덤 성전안에 있다.
제1처:(마태27,22-26)-예수님의 사형언도
제2처:(요한19,16-17)-십자가를 지신장소
제3처:(루가23,26)- 첫 번째 넘어지심.
제5처(마태,27,32)----시몬이 십자가를 다시 짐
제8처:(루가23,28-31)-예루살렘의 여인을 위하여 말씀하심.
제10처:(요한19,23-24)-옷을 벗기우심.
제11처:(요한19,18)---십자가에 못 박히심
제12처:(마태27,45-50)---숨을 거두심.
이곳 수난의길에서는 매주 금요일 오후3시에 프란치스코 신부님들이 이끄는 십자가 행렬을 볼 수 있다.
(12) 예수의 무덤과 부활 기념 대성당(THE CHRUCH OF THE HOLY SEPULCHRE)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걸어 가셨던 바아돌로로사의 끝쪽 골고타에 예수님의 무덤이
위치 했던 곳에 오늘날 기념 대성전이 세워져 있다. 이곳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죽으시고 묻히신 곳이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흔적이 담긴곳이다. 그래서 이곳 기념성전을 “예수의무덤”또는“ 예수 부활 기념성당“ 이라고 부른다.
예수께서 묻히신 곳은 골고타 근처에 있는 정원의 새 무덤 이었다.(요한19,41-42), 그 무덤은 바윗돌을 깍아서 만든것으로서 무덤 입구에는 커다란 석문이 놓여져 있었다. 그 무덤의 주인은 당시 유다 최고회의의 한 의원인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었다. (마르15,43: 루가23,33), 그는 예수를 몰래 따르던 자였고(마태27,57:요한19,38), 자기 동료 니고데오와 함께(요한19,39), 예수의 시신을 무덤에 안치한 자였다.(마태27,58-60: 마르15,46: 요한19,38-40), 예수의 무덤은 커더란 석문으로 굳게 닿혀졌고, 경비병은 그 무덤을 지키고 있었다. (마태27,62-66),
그러나 안식일 다음날 무덤에 가서 봤더니 큰 이변이 일어났다. 굳게 닫혀진 석문은 열려 있었고 그 무덤 안은 텅 비어 있었을뿐만 아나라, 죽음에서 깨어나신 예수님을 만난 이들도 상당수에 달했다고 한다.(마르16,1-8: 마태28,1-10: 루가24‘1-12: 요한10,1-10), 예수님 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는 그 사실은 경비병들의 증언을 통해 대사제들과 원로들에 까지도 알려졌었다.(마태28,11-15). 성서에 의하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 당하신곳 해골(GOLGOTHA)이란 곳 이었다.”몸소 십자가를 지시고 성밖을 나가 히브리말로 골고타라는 곳으로 향하셨다. 골고다 라는 말은 해골산 이란 뜻이다.“(요한19,17)
골고타는 예수시대에는 성벽밖의 볼모지였고, 유대인의 처형장소 및 무덤지역으로, 주로 무덤들이 즐비해 있었다고 한다. 예수께서 못박히신 곳은 당시에는 성 밖이었으나 “예루살렘에서 가깝기 때문에 많은 유다인드이 와서 ...”(요한19,20), 예수님이 못박히고 묻히신지 11년후인 44년에 헤로데 아그리파왕이 새로 성벽을 세워 이 지역이 도시안에 위치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아홉 개의 커다란 가족 무덤을 발굴해 냈고, 그들중 여섯 개는 오늘도 볼수있다. 골고타는 대략 40m가량 높은 언덕이었으리라고 지형학자들은 추측한다.예루살렘이 해발 720m가량 되니 그 언덕의 높이는 해발 760m가량 된다고 하겠다. 이 언덕은 바윗돌로 메꾸어진 채석장으로서 마치 해골처럼 보였기 때문에 골고타란 명칭이 붙여지지 않았나 여겨진다.
지금은 골고타와 예수 무덤의 원래 모습이 사라진지 이미 오래되었고 다만 그 자리에 위치한 기념 성전만 볼수 있다. 기념 성전 주변에는 수많은 상가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성전이 위치한 지대는 서쪽지대에 비해서 상당히 낮기 때문에 과연 이곳에 골고타가 자리해 있었을까? 하고, 의문을 갖지 않을수 없다. 그렇지만 역사적 신빙성은 크다.
예수께서 인간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 당하신 그 골고타 언덕을 에워싸고 있는“ 예수의 무덤성당”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자 313년 최초로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드린, 동 로마제국의 콘스탄틴 대제의 어머니 헬레나왕비가 갈바리아와 무덤위에 처음으로 세워졌다.콘스탄티누스 시대의 이 웅장한 기념 성당은 624년에 페르시아인들에 의해 파괴 되었고 그 후 대 수도원장 모데스투스가 작은 규모로 재건 하였으나 1.009년에 칼리프 하킴에 의해 다시 파괴 되었다. 이 성전의 파괴가 십자군 원정에 주요 원인이 되었다. 1,048년 에 콘스탄티누스 모노마쿠스에 의해 성전이 재건 되었고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 1,149년에 현존하는 성전이 세워졌다.
이와같이 , 1,600여년간의 세월을 묵묵히, 숱한 고난과 복원을 거듭하면서 예루살렘의 흥망성쇄를 지켜봐 왔다. 교회내에는 골고다언덕,예수님의무덤을 비롯하여 성서의 구절과 결부된 숱한장소들, 헤렌나 왕비에게 바치는 성전, 십자가 파편을 찾아낸 물 저장고 등, 빠뜨릴수 없는 중요한 장소들이 가득차 있다
1852년 터키가 선포한 "현상유지"법에 의해 현재 기념성전 안에는 여섯 종파들이 운집해 살고 있다. 로마카토릭(프란치스코 수도회가 대표역활),희랍정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가 주로 특권과 우선권을 갖고있고, 시리아 정교회, 콥트 교회, 그리고 에디오피아 정교회는 사실상 더부살이를 하고 있는 셈이다. 여섯 종파들의 관계는 정치,종교적으로 서로 얽히고 설켜 있어 한마디로 말하기 어렵다. 1,757년에 법률상으로 확정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하나의 기념성전이 갈기갈기 찢어진 셈이 되었다.
현재 갈바리아 정상에는 두 개의 경당이 있다. 이중 한 경당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린 곳으로 추정 되는 곳이며 희랍 정교회가 관리 하고 있다. 다른 경당은 예수의 옷이 벗겨지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현장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로마 카토릭이 소유 하고 있다..천주교에서는 처형된 장소보다 묻히신 장소를 중요시 한다. 그 이유는 죽으셨다가 부활 하셨으므로 부활신앙을 믿기 때문이다.
(13) 마가의 다락방(최후 만찬의 배경)
마가의 다락방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전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
(최후의 만찬)을 가졌던 곳이며 동시에 부활하신후 오순절에 성령으로 나타나신 역사적인
곳이다. 예수님이 돌아가신후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끈임없이 기도를 올렸다.
나중에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서 예배를 드리던 사람까지도 발길을 조금씩 이 곳으로 옮겨
함께 기도를 드리던 중 마침내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나타나신 곳이다.
예수님의 재림이 화려한 성전이 아니라 작은 다락방에서 초라한 개개인의 기도를 들으시고
함께하신 장소! 예수님께서는 예루 살렘성에 계실때 마가의 집에 머물곤 하셨던 것 같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고 마지막 만찬을 나누던 바로 그 곳이 마가의 다락방이었다.
예수님의 안전을 보장 받기에 마가의 집 만큼 안전한 곳이 없었을 것이다. 두려움을 물리치고 120명이나 되는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에게 자기의 집 이층을 내어 주고 오순절이 되기까지 함께 기도하였으니 말 입니다.
4세기 부터 기독교인 들이 시온산에 있는 마가의 다락방을 순례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 당시에도 마가의 다락방은 회당으로 사용되었는데 기독교인들의 회당이었을 것으로 추측
할 수 있다.
1009년 유대인, 그리스도교인들의 교회이자 회당이 이슬람의 모스크로 바뀌었다. 다시 십자군시대에 시리아정교회와 가톨릭교회가 16세기 까지 이 곳을 관리 하였다.
오스만 튀르크제국 시대에 이르러 다시 모스크가 되었고 현재 모스크의 흔적이 마가의 다락방에 고스란이 남아 있다.
(14) 성 안나 성당
십자군이 예루살렘에서 철수 했을때 그들이 세운 성당은 30개가 넘었다. 그 중에서도 지금 까지 잘 보존되어 당시 교회들의 훌륭한 건축구조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성 안나성당은
성모 마리아가 탄생한 곳에 세워졌다.
성모 마리아의 부모인 요하킴과 안나의 집이 이 곳에 있었으며 성모 마리아의부모님을 기념
하여 건설된 것이다.
비잔틴시대인 400년경 최초로 세워졌으며 614년 페르시아군에 의해파괴 되었다가 이 후
몇차례 재건설과 침략이 반복 되었고 현재의 모습은 1140년 십자군시대 발트윈1세 왕비에 의해 1100년 로마네스크양식으로 건축 된것이다.
십자군이 패망후 살라딘이 이 성당을 이슬람교 신학교로개조하였고 1856년 크리미안 전쟁이 끝난후 술탄 압둘 마지드는 이곳을 전쟁때 도와준 댓가로 나폴레옹3세에게 선물 하였다.
그 후 성당은 복원되고 아프리카에서 포교하는 백의 신부님들이 소유하게 되었다.
2).베들레헴(BETHLEHEM)
베들레헴은 고대 메소포다미아 지방과 이집트를 잇는 중간 지역으로 예루살렘 남쪽 8km에 위치한 해발 780m되는 언덕위 아랍도시 이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장소로 워낙 유명 하기 때문에 수많은 순례객이 찾는곳이며 성탄절때는 세계에서 모여든 순례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이다. 베들레햄은 AD330년 콘스탄틴황제에 의해 세워진후 십자군시대를 거쳐 현재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 또한 이곳에는 이스라엘의 두 번째 임금 다윗 (BC1010-970)이 태어나서 목동으로 자란곳, 그리고 사무엘이 어린 다윗을 왕으로 선정 했다는 전설 (사무엘상 16:1-13)
“내가 너를 베들레헴에 사는 이새라는 사람에게로 보낸다. 그의 아들 가운데서 내가 왕으로 세울 사람을 하나 보아 두었다.
예수탄생성당은 작은마을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웅장하다. 1500여년전 비잔틴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세웠을 때의 모습 그대로다. 좁은 입구로 들어서면 어두컴컴한 그리스정교회식 성당이 나타난다.
그 제단 밑이 예수가 탄생한곳 온통 시꺼멓게 그을린 동굴이다. 목동들이 말이나 양떼와 함께 생활하며 겨울을 나던 마굿간이다. 예수가 태어난 자리엔 은으로 만든 “베들레헴의별”이 새겨져 있다. 10평 가깝게 꽤 널찍한 동굴 여기저기에서 나직한 기도소리와 카메라 셔터 소리가 뒤섞여 울린다.
요즘 이스라엘과 파레스티나에의 폭탄테러 분쟁으로 순례지의 순례객이 거의없다.
우리 순례객30명외에 러시아 ,나이지리아 .리투아니아등 얼마 안되는 순례객으로 어디를가나 한가하게 자세히 성지를 볼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베들레헴에 예수탄생성당(유스티니아누스)은 그리스, 아르메니아,가톨릭, 3개교단으로 나누어져 관리하고 있다. 성탄절 전야미사를 지내는곳은 가톨릭에서 예루살렘 주재 라틴계 가톨릭 총대주교님이 매년 기념미사를 집전하며 전 세계 텔레비젼에 방영 되고 있다.
(1)목자들의 들판 기념성당
베들레헴 동쪽 약 3km 떨어진 곳에 있는 벳 사후마을 에는목자들의 들판이 있고 거기에서
천사가 목동들에게 주님의 탄생을 알렸다.(루가2, 10-11)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의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수많은 하늘 군대가 목자들에게 나타
나 예수님의 탄생을 알린곳에 정확한 장소를 복음서에는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전승에 따르면
베들레헴 동쪽 3km 정도 떨어진 아주 소박하고 아담한 오늘날 벳사후 마을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라 추정한다.
교회사에서는 에우세비우스(265-340)는 베들레헴에서 1000보 정도 떨어진 곳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지금도 복동들이 양을 치고 있으며 목동들이 추위를 피했던 동굴이다.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수도회)는 목자들이 밤을 세우며 지냈던 몇개의 동굴 위에 세워진
4-6세기경 비잔틴수도원을 1951-52년에 거쳐 발굴하였다.
목자들의 들판에는 목자들이 지냈다고 여겨지는 두개의 자연 동굴에 경당을 만들어 미사를
봉헌 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1954년 캐나다의 지원을 받아 베두인족의 천막과 같은
모양의 새 기념성당을 지었다.
천정은 구멍을 뚫어 놓아 마치 별빛이 비치는 형상을 설계하였다.
(2)에인 케렘(EIN KAREM)
올리브 나무들과 포도나무 밭으로 둘러싸인 언덕들 사이에 자리한 그림같은 아인 카림 마을은
예루살렘 구시가에서 부터 서쪽으로 약 8KM 떨어진 작고 조용한 마을 로 세례자 요한이 태어 난 곳이다. 또한 마리아가 요한의 모친이자 그 녀의 사촌인 엘리사벳을 방문한 곳이기도 하다.(루가1, 36-46) 그러나 성경에는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만났던 곳과 세례자 요한이 태어
난 곳의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단지 "길을 떠나 유다고을을 서둘러 갔다"라고 되어있다.
이 마을에 살았던 즈카리야가 성전의 제사장이었기 때문에 예루살렘과 가까웠을 것이다.
몇몇 지역이 거론 되어왔는데 고고학적 자료와 전해오는 기록에 의해 아인 카렘이 바로 이곳임이 확증되었다. 성 루카가 서술한데로 연못이있는 이 매력적인 마을 은 예로부터 사람들의 많은 사랑을 받아 왔음에 틀림이 없다.
"포도밭의 샘" 이라는 의미를 지닌 에인케렘(히브리어) 또 아인 카림(아랍어)은 고고학자에 따르면 이곳은 청동기시대(B.C 2150-1900) 부터 인적이 있었던 곳으로 에수님시대에는 사람들이 마을을 형성하여 살고 있었다고 한다.
5세기때 즈카리야 집 한부분이었다고 생각되는 동굴과 요한이 태어났다고 하는 장소 위에
요한 세례자 탄생기념성당이 이름을 한 성당이 세워졌으나 파괴 되엇고 십자군에 의해 재건
되었으나 그들이 떠난후 또 다시 파괴 되었다,현재 교회는 1885년 프란치스코회에 의해 세워
졌다. 또 한 성당은 2층으로 된 성모 방문 기념성당이 있다.
(3)성모 방문 기념 성당
2층으로 된 이 성당은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였을 당시 임신중이던 엘리사벳이 살던
집터 위에 세워졌다고 한다.
이 성당은 5세기경 세워졌으나 여러번 파괴 되고 복구되었다.
1938년 -55년 완성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의해 2층 성당이 세어졌으며 이성당 맞은편 담벽에는 마리아가 하느님을 찬미하며 불렀다는 "마니피캇"의 내용이 세계 각국어로 쓰여진 41개국어로 된 판이 부착되어 있다. 이 가운데 우리나라 판도 있다.
성전 입구 정면에는 마리아가 친척 에리사벳을 찾아 여행하는 모습의 모자이크로 잘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지하 성당에는 가브리엘 대천사가 즈카리야에게 요한의 탄생을 알리는 내용
그리고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상봉 장면, 헤로데 군사들이 베들레헴에서 어린이를 붙잡아 가는 모습도 있다.
(4)세례자 요한 탄생기념 성당
세례자요한 기념성당은 요한 부모님 즈카르야와 엘리자벳은 늙은 나이 였기때문에 아기를
가질수 없었는데 하느님의 성령으로 아기를 가질수 있었다. 마리아는 이소식을 천사를 통
하여 듣고 늙은 나이로 임신한 엘리사벳을 도와 주기 위해 나자렛에서 130K떨어진 유다지방
한 고을 방문하였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기념하는 현 성당은 17세기경 세워져 1885년 보수및 개축되었다. 프란치스코 소속 고고학자 살레르신부님은 1945년 이 곳 성전 주위를 발굴하여 비잔틴시대와 십
자군시대의 성전터를 찾아냈다. 그리하여 구전으로 막연하게 전해져오던 세례자 요한 기념
성전터를 재입증한 셈이 되었다.성전 안에는 세례자 요한이 탄생한 곳이라고 전해지는 동굴이 하나 있다. 베들레헴에 있는 예수님 탄생동굴과 아주 흡사한 모습으로 꾸며져 있다.
3) 텔 아비브-욥바(TEL AVIV-YAFO)
(1)시몬의 집
텔 아비브 올드 시티에 위치한 시몬의 집에서 베드로가 환시를 본 것이다. 베드로가 이방인에게세례를 주고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 했다는 일화가 있는 장소이며 사도행전 9.43에
"베드로는 한동안 야포에서 시몬 이라는 무두장이 집에서 머물렀다"
무두장이는 짐승가죽으로 상품을 만드는 사람으로 피색장이라고 한다. 이런 종류의 직업은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성읍을 떠나 해변에 집을 가지고 있었다.
베드로는 직업의 신분 차별을 초월하여 이집 옥상에서 이방인도 복음을 받아 들여진다는
깊은 이상을 보았다.
(2)욥바(JAFFA)
욥바는 텔아비브 남쪽에 있으며예루살렘으로 부터 북서쪽65km 떨어진 지중해 연안의 항구도시이다. 이곳은 3600년전 부터 긴 역사를 가진 도시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초기 이집트와 앗시리아인들의 문서에 기록 되어 있다. 욥바는 히브리어로 야포, 영어로는 자파스 구약성경에는 욥바이다.
"요나는 야훼의 눈밖에 벗어나 다른 신으로 길을 떠나 욥바로 내려갔다(요나1,3)
이곳은 고대로 부터 이지역의 중요한 항구였다. 이곳을 통해 솔로몬의 성전을 신축할때 그리고 쭈루바엘 성전을 다시 지을때 사용한 레바논의 백향목도 들어 왔다.
사도 베드로가 유일한 여제자 죽은 다비타를 살리고(사도9,16) 하느님이 사도 베드로에게
나타나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하라고 일러준 곳이 이곳이다. 오늘날 이곳은 화랑과 보석상
그리고 보석 가공소로 붐비는 예술의 중심가로 변신 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항구도시 욥바라는 이름은 아름답다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다.
지중해의 휴양도시, 종교적 색채보다 활기찬 항구 분위기를 느낀다.
노아의 아들 야벳이 건설했다고 전해오는 욥바는 요나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버리고
다른신으로 도망 가려고 이곳에서 배를 탓다가 혼이 난 곳이기도 하다.
(3)베드로 환시 기념성당
베드로 사도가 욥바에 있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서 머무른 어느날 사람들이 음식을 만드는
동안 베드로는 정오 쯤 기도하러 옥상에 올라갔을 때 무아경에 빠졌다.(사도 10,..)
하느님께서는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새로운 교회에 받아드려야 함을 환시중에
보여 주셨다.
베드로는 그가 경험한 시현을 기독교를 비 유대인들과 이교도 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느님의 허락으로 해석하였다.
이것이 역사적인 전환점이 되어서 기독교는 유대교의 밀교로 간주되어 이방인에게 전파
되기 시작하여 세계 종교로 진화하는 전기를 마련하였다.
사도 베드로는 이 곳에서 코로넬리우스라고 하는 가이사리아에 있는 이탈리아부대 백인
대장이 보낸 심부름꾼을 받아드린후 그들을 따라 가이사리아에 가서 코로넬리우스에게
성령의 세례를 배풀었다. 이로써 코로넬리우스는 이방인으로써 그리스도로 개종한 첫번째
신자가 되었고 이렇듯 베드로가 본 환시를 기념하여 지은 성당이 베드로 환시 기념성당이다.
이 성당은 십자군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 지어졌다. 욥바는 십자군과 이슬람군에 모두 전략
적 중심지였다. 그러기 때문에 뺏고 뺏기는 과정을 수없이 거쳐왔다. 베드로가 환상을 본 자리에 카토릭 초대교황인 베드로를 위하여 로마를 향해 지어 1894년에 완공하였다.
4) 지중해의 카이사리아 유적지(CAESAREA)
카이사리아는 하이파에서 남쪽으로 약37km 정도 떨어진곳에 위치한 해변가에 세워진 도시
이다. 헤로데가 B.C22-10년경 만든도시이며 당대 건축가들과 조각가들을 동원 12년가에 걸쳐 완공된 계획도시이다.
로마의 아우구스투스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 주기 위해 가이사의 이름을 따서 카이사리아
라고 이름을 지은 것에서 유래되었다. 사도 바오로가 최후 변론을 한 곳으로 수감된 장소이기도 하고, 백부장 고넬료에게 세례를 준 장소로도 유명하다.
헤로데왕이 B.C 20년수중에 시멘트를 방파제로 사용 인공부두를 설치하여 만든도시로, 원형극장, 십자군 성곽, 성곽주변의 해자, 상수도시설, 대중 목욕탕, 해수탕, 빌라도총독 궁전,
헤로데왕 궁전, 궁전 목욕탕, 전차경기장, 주택등, 시내의 모자이크 많은 유적들이 아랍 침공
으로 크게 파손 되었다. 예수님을 재판했던 본디오 빌라도도 이곳에 살았다.
화려한 궁전들과, 공공건물, 시장, 신전, 원형경기장등, 카이사리아는 638년부터 이스람교의
지배에 들어 갔다가 1102년 십자군에이해 탈환, 1252년 프랑스 루이9세는 이도시에 성벽을
싸았으며 뚝을 쌓아 올리고 해자를 둘렀다. 1291년 이집트에 바이네르스에 의해 완전 파괴
되어 이것이 카이사리아의 종말 이었다.
이 도시는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해변의 모래 언덕에 파묻혔다. 1956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고고학자들은 이 곳 카이사리아를 발굴하기 시작했다. 화려했던 이 도시의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중 중요한 유물로는 로마시대때 만든 반원형 극장, 루이 9세에 의해 만들어진 성벽은 폭이 9m 되는 해자와 이 해자로 부터9-14m높이 까지 올라가는 경사진 뚝으로 이루어졌다.
날씨도 화창하고 지중해의 서늘한 바람을 쏘이며 즐겁게 카이사리아 유적지를 순례하였다.
5) 필립보의 카이사리아(CAESAREA PHILIPP)(BANIAS)
카이사리아의 필립보는 이스라엘 북동쪽 끝, 요르단에인접하였고,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22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이성읍을 파네아스라고 하는데 이곳에서 숭배된 판(PAN)의 이름을 따른 것이라고 한다.
로마황제 가이사와 자기이름인" 필립" 을 합하여 " 가이사리아 필립보" 라 불렀으며 베드로가
"주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시다"라고 고백한(마태 16,13-19) 곳으로도 알려졌다.
지금의 이름 바니아스는 희랍의 신인 판의 신전이 이곳에 있었기 때문에 희랍어 "파네아스"
라고 하는 말이 변음 된 것이다. 이곳은 헤로데왕의 의해 아름다운 도시로 꾸며졌으며 그의 아들 필립에 의해 카이사리아로 명명되었다.
바니아스는 웅대한 암벽과 펑펑 쏫아지는 동굴안에 지하수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텔단(TEL DAN) 에서 동쪽으로 10km 위치한 바니아스는 요르단 강의 3대 수원인, 단, 바니아스, 스닐중 의 하나이다. 이 곳은 "나호르 헤르몬" 또는 헬르몬강이라고 불리는데 요르단강으로 흐르는 원천 가운데 두번째로 큰 원천이다. 맑고 깨끗한 물이 넘쳐 흐르는 폭포수는 이 곳을 찾아오는 이들의 더위를 말끔히 씻어주어 시원스럽게 맞이 해준다.
이근처 지방에서 여러 기적을 행하시고 제자들에게 사랑을 쏟으셨던 예수님을 떠 올릴수 있는 이곳은 성경에서 필립보의 카이사리아로 표현된다.
기원전 2150-1200년 사이 가나안 시대에는 이곳의 자연 동굴에 신전을 꾸미고 자기들의
자연신인 바알신을 섬겼다. 자연신을 예배하는 성소의 역활을 했기에 이곳에는 여러개의
동굴과 암벽에그려진 여러가지 상징 들이 남아 있다.
기원전 332-63년 헬레니즘 시대에 그리스인은 들은 바알신 대신에 자신들의 목양신인 판
(PAN)신을 이곳에서 섬겼다. 그래서 이 곳을 판신의 이름을 본따서 "파네아스" 라고 불렀다.
오늘날에는 이 곳을 "바니아스" 라고 부른다.
그후 기원전 20년경에 로마황제 아우구스투스를 헤르몬산 남쪽에 있는 이 일대를 헤로데왕에게 선사하였고 헤로데왕은 감사의 뜻으로 동굴 옆에 신전을 세워 로마에게 바쳤다.
기원전 4년에 헤로데왕이 죽고 왕국이 아들에게 분배될때 지금의 바니아스 지역은 필립보의영토에 속하게 되었다.
헤로데와 클레오파트라사이에 태어난 필립보는 기원전 4년부터 기원후 34년까지 갈릴레아 북쪽지방의 영주였다. 기원전2년 필립보는 이 도시를 확장하여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황제
에게 기증한다는 뜻으로 "카이사리아" 라고 불렀다. 그러나 지중해변에 헤로데왕이 건설한 로마 총독 주둔도시 카이사리아와 구분하여 자신의 이름을 덧 붙여 "필립보의 카이사리아"라고 했다.
허물어진 신전에는 아직도 신전을 세울 당시의 흔적을 보여주는 돌들이 흩어져 있으며 유적을
통해 카이사리아도시와 아크리빠2세가 이곳을 지배할 당시 궁전의 모습도 조금 엿볼 수 있다. 아그리빠 2세(기원후 53-94)는 이 도시를 더욱 넓혀 네로황제에게 충성하는 뜻으로 " 필립보의 카이사리아 네로"라고 개명하기도 했다. 유다인들에 대한 로마인들의 박해가 심할 무렵 유대교의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북부 갈리레아지방으로 피신하였기 때문이다.
6) 텔 단(TEL DAN)
단은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북쪽 경계도시로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국가 경계에 있으며 단 지파가 정착한 이후 단 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단 지파는 원래 아얄론 평야를 중심으로 한 쉐펠라와 지중해 연안지역을 분배 받았지만(여호 19, 40-46) 이미 그곳에 정착해 있던 불레셋민족
에 밀려 세력을 확장하지 못하고 북쪽으로 이동하여 가나안 전통도시였던 라이스를 정복한
도시 이름을 자신들의 지파 의 이름을 따 "단" 이라고 개명하였다.
성경에서 단은 남북왕국이 분열된후 여로보암에 의해 금송아지를 숭배하던 장소로 부각되어
있다. 또 북 이스라엘의 바아사왕시대에는 시리아의 베하닷왕이 단을 침공하여 파괴 시키기
도 하였다.(1 열왕 15,12) 현재 겉으로 들어난 단의 유적 대부분은 여로보암이후 이스라엘 시대에 건설딘 것이다. 대표적인 것으로 웅장한 규모의 성문과 성벽그리고 제단터 장소를 들수 있다.
헬몬산에서 내려온 물줄기가 강을 이루며 텔단까지 흘러오고 있다.여기서 흐르는 물은
이스라엘의 대부분도시로 공급되며 요단강으로 흘러간다.
7) 갈릴리아호수(THE SEA OF GALILEE)
믿음의 땅 이스라엘에서는 갈릴리호수는 자연 경관이 가장 수려한 곳으로 전세계 관광객들이 빠짐없이 찾는 성지중의 성지이다. 땅을 가르고 물을 솟구쳐 사막의 목마른 인간에게도 고루 내리신 창조주 하느님의 은혜 갈릴리! 이름 모를 풀과 나무들로 둘러쌓인 잔잔한 호수 ,그주위에 평화롭게 산재한 어촌마을 호수일대를 덮고있는 온화하고 상쾌한 공기, 이와같이 갈릴리호수 일대는 단순한 종교적 가치만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북단 헬몬산에서 발원한 북요르단 강물이 흘러들어 형성된 내륙 호수인 갈릴리는 이나라 식수와 농업용수의 70% 가까이 공급하는 “젖줄”이다.
남북길이 21km, 동서로 폭이 14km, 전체둘레 52km, 바다수면보다 212m, 이상 낮고 ,수심이 50m가 되는 호수이다. 연중 거의 비가 내리지않는 갈릴리호수 주변은 3000년전부터 전략적 요충으로 쉴세없이 전쟁터가 되었던 곳이다. 예수님의 행적과 관련 갈릴리 북쪽 호수일대가 성지 들이다. 요르단강 서쪽4km 지점에 위치한 가파르나움도 그 대표적인 고대도시의 유적중에 하나이다. 예수 복음 전파의 중심지로 연일 세계 각지역에서 모여든 순례자,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는 이곳엔 4세기경에 세워진 유대교회당, 베드로의집, 유적위에 세워진 베드로 교회가 유명하다.
우리 성지 순례팀은 저녁 늦은 시간에 유람선에 탑승, 선상기도를 하며 주님께 찬미의 노래를 부르고 다함께 애국가를 힘차게 부르며 주님의 복음 말씀을 묵상하며 기쁘고 가족과 함께 즐거운 여가를 즐겼다. 주님! 감사 합니다. 날씨가 궂은데도 기분이 상쾌하고 즐겁기만 하였다.
가파르나움 바로 옆에는 프란치스코 수도회 교회가 위치한 탑가지역과 만난다. 이른바 “빵5개와 물고기2마리로 5000명의 식사를 해결한 기적(五餅二魚)을 형상화한 모자이크 바닥이 새겨진 기념성당, 또 호수위로 125m 작은언덕에 세워진 주 예수께서 갈릴리호수에서 부는 맞바람을 이용하여 군중에게 온화한 목소리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신 산상수훈의 현장 "참 행복 선언 성당", 이밖에도 갈릴리호수 일대는20세기초 이스라엘 재건의 원동력이된 키브츠(공동체농장)들이 많이 자리한 지역으로 이곳에서 쉬어가는것도 큰 즐거움이다..
예수님 시대는 모든 교통의 중심지로 교통이 편리하고 땅이 기름 졌으며 아름다운 경치와 온천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사람이 거주했었고 또한 많은 사건의 현장이 되기도 하였다.
이 호수 주변에는 9개의 도시가 있다. 예수님의 성서에 기록한 대부분 활동과 가르침 그리고 기적을 이곳에서 행하였다. 베드로,안드레아,요한과 그밖에 제자들을 부른곳도 이곳 호수가에서 였고(마태4.18-20)예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걸어 가시다가 베드로라는 시몬과 안드레아 형제가 그물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하시자.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풍랑을 잠재우고(마태8,23-27) 예수께서 배에 오르시자 제자들도 따라 올랐다. 그때 마침 바다에 거센 풍랑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뒤덮이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곁에 가서 예수를 깨우며 “주님 살려 주십시오, 우리가 죽게 되었읍니다.”하고 부르짖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그렇게도 믿음이 없느냐? 왜 그렇게 겁이 많으냐? 하시며 일어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자 사방이 아주 고요해졌다.”
호수 위를 걸으시고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치신곳(마태 15,29-30) “예수께서 그곳을 떠나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서 산에 올라가 앉으셨다,그러자 많은군중이 절름발이와 소경과 곰배팔이와 벙어리와 그 밖에 많은 병자를 예수의 발 앞에 데려다 놓았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다 고쳐 주셨다.”
8).마사다((MASSADA)
엔게디 남쪽 16km지점,사해의 서해안으로 부터 약4km 되는 유대광야에 마사다 암반요새가 우뚝 솟아있다.
길이800m,넓이200m, 높이가 사해 해면에서 600m이고 깊은 협곡으로 둘러 싸여있어 이 성벽에서 아래로 약100m까지는 깍아 놓은 듯이 절벽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천혜의 절벽 요새가 되어있다.
순례객은 먼저 이 요새의 역사적 전승 내용을 영화로 감상한후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간다.
마사다는 히스몬가의 통치자에 의해BC142-63에 건축 되었고 BC66년까지 그의 후손들이 관리 하였다. 이 요새의 내부에는 창고들과 병영,병기고,빛물을 저장하는 저수지와 왕궁의 각종 편의시설들이 있었다.
그후 AD70년에 로마군의 티투스장군에 의해 파레스티나 전 지역을 함락 당하고 예루살렘이 초토화 되었을 때 유대인 지도자 엘리아잘 벤 야이루가 이끄는 유대인 열성당원들 약960명이 이 마사다 요새로 피신하여 로마군에 저항하면서 민족적 항쟁을 3년동안 하다가 AD73년에 960명의 남자와 여자들이 끝내 로마군에 포로가 되기 보다는 죽음을 택한곳으로, 로마군에 항복 하지않고 집단 자결을 하였다. 그중에 두여자와 다섯 아이들이 숨어서 살아 남았기 때문에 그들의 최후를 알았다. 이 비극적인 전설같은 실상은 오늘날 전승 승화되어 이스라엘의 불멸의 성지가 되었다. 현재 이곳은 이스라엘 장병들의 선서식장으로 활용 되고 있다.
9).사 해(THE DEAD SEA )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약35km 떨어진 곳에 사해가 있다.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갖인 바다로 수면 높이가 지구 평균 수면보다 400m 아래에 있으며 ,염분 함유량이 보통 바다물의 7배가 짜서 쓴맛이 난다. 사해는 요르단강 남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길이 80km,넓이 17km,수면이 해저 400m, 수중 고형 물질이 25%,비중이 1.17로 수영을 하지 않아도 물에 뜬다. 젊은 목사부부, 신혼부부는 날씨가 쌀쌀한데도 사해 바다에서 수영을 했다. 나도 양말을 벗고 들어가니 바다물이 아주 부드럽고 맛은 쓰다.
사해바다물은 피부병에 좋다고 하며 인체에 유익한 각종 광물질이 다량으로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자연 건강 치료를 위하여 전세계인 찿아오고 있다. 사해 주변에는 많은 온천장과 함께 휴양 리조트들이 많이 있다.
이곳에는 어떤 생물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죽은바다", 즉 사해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또 선입견으로 지저분하게 생각하지만 막상 와서보니 물이 너무 깨끗하고 바닷물이 새파랗고 아름답다. 사해는 연중 기온 변화가 별로 없어 고온이 계속 되는 곳으로 낮기온이 40도C가 보통이다.
10).쿰 란(QUMRAN)
사해의 서북 연안에서 1.3km 떨어진곳에 있는 쿰란은 1,947년부터 유명해 지기 시작했다. 1,947년 5월 사해의 서쪽지역에서 길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헤매던 한 베두인 양치기 소년이 이시대의 최대 발견인 그 유명한 사해 두루마리를 발견했다. 모하메드 에디브라는 이 아랍 양치기는 잃어버린 양을 찾던중 사해의 서쪽 해안 절벽지대의 동굴속에 무심코 돌을 던졌다. 그러자 무엇인가 깨지는 소리에 놀란 이 양치기는 이 동굴에 마귀가 살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무서워서 도망쳐 버렸다. 다음날 그의 사촌과 같이 다시 동굴에 들어갔다. 이굴안은 길이 8.5m, 넓이 3m의 큰굴 로써 양치기는 그안에서 8개의 항아리를 발견 했는데 그중 몇 개는 뚜껑이 덮여 있었다. 이것을 바같으로 가져와 금이 들어있기를 기대하고 열어 보았으나 그들이 이해 할 수 없는 글자가 쓰여진 가죽 뭉치만 있는 것을 보고 실망해 버렸다. 그안에는 총 7개의 두루마리가 들어 있었는데 양치기 두소년은 그것을 팔기위해 베두인족장과 함께 베드레헴으로 갔다. 그리고 골동품상 칼릴칸도라 하는 시리아인에게 두루마리 세 개를 팔았다. 모하메드와 족장은 돈을 더 받을 욕심에 몇 군데를 더 기웃거렸다. 아주 귀한 것 이라고 우기는 족장의 말에 골동품상은 그길로 이스라엘의 성 마르코 수도원 사무엘 대주교를 찾아 갔다. 한동안 두루마리를 살펴보던 대주교는 할 말을 잊은채 어쩔줄을 몰라했다. 그의 눈은 뭐라 말할수 없는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대주교는 두루마리에 씌어진글은 히브리글 일것이라는 말과 함쎄 5파운드에 사겠다고 했다.
사무엘은 이 두루마리가 어쩌면 구약성서 원본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구약은 유대인들의 가장 성스러운 경전이다. 이것은 야훼 하느님이 당신께서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약속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야훼의 계시를 담고 있다.
이 쿰란 주위의 동굴들에서 기원전 2세기경의 히브리어 성서사본과 성서의 주석서들이 발견, 여기서 발견된 성서들을 “사해사본” 또는 쿰란사본 이라고 한다. 쿰란 주변 11개의 동굴에서 발견된 사해사본 가운데 두루마리 형태로 잘 보존 되어 있는 것이 불과 10개 뿐이며 나머지는 수없이 많은 조각으로 발굴 되었다. 이들중 1/4은 구약사본이며 나머지는 구약주석, 신학서,쿰란 공동체의 규율집들로써 대부분 양피가죽이나 파피루스 위에 고대 히브리어로 적어 놓은 것 들이다. 이들중 가장 유명한 것은 가로,세로 0.3mx 7.2m인 이사야의 두루마리이다. 이후 요르단왕국 암만 박물관장 하성교수와 성소 연구소장 프랑스 드보신부(R. DEVAUX)와 많은 베두인 사람들은 두루마리의 높은 가치를 알고 사해 서쪽지역을 뒤지기 시작했다. 드보신부는 무하마드와 아메드,그리고 그곳 베두인들을 데리고 먼저 두루마리가 발견 되었던 동굴근처를 수색하였다.
1,952년 이지역에서 30개나 넘는 동굴을 찾아내고 그안에서 900개가 넘는 두루마리를 발견 하였으며 쿰란에서 90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곳 4호 동굴에서 가장많은 필사본이 발견 되었다. 그중에는 파피루스에 쓰여진 두루마리 이외에 구리에 쓰여진것도 두 개 있었다. 또 바위아래 깊은 땅속에는 옛도시의 흔적과 두겹으로된 성벽, 그안에는 저수지와 급수시설,공동묘지등도 발견 되었다. 이곳이 요세프스를 비롯한 고대의 역사가들이 언급하고 있는 유대교의 한 종파인 엣세네집단의 수도원 였다. 기원전 200년부터 기원후 70년까지 쿰란공동체(엣세네파)라는 유대교도의 일파가 이곳에서 공동생활을 하던 수도원터로 사용한 흔적이 여러곳에서 발견 되었다.. 이교단은 금욕적인 종교단체로 유대교의 전통과 관습을 중시하는 생활을 하였다.
“사해두루마리”는 그뒤로 엘리자 수케닉박사의 아들이자 1.963년에 마사다 요새를 찾아낸 야딘(YADIN)교수가 사무엘 대주교의 두루마리를 25만$에 사들여 모두를 이스라엘 정부에 기증 했다. 지금은 이사본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이스라엘 국립박물관내의 사해사본 보관소에 전시되어 있다.
11).예리고(JERICO)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성곽도시 예리고는 예루살렘(해발760m)에서 동쪽 40km,사해 북동쪽 13km지점, 유다광야에 자리잡고 있으며 아름다운 오아시스의 도시이다. 이곳은 예로부터 비옥하고 기름진땅으로 오렌지, 바나나, 키가 10여m가 넘는 종려나무들이 많아 “종려나무의 도시(” 신명기34,3 )라 일컬어 지던곳이다.
지금부터 약 3,000년전 모세를 따라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 ) 40년 광야생활을 청산하고,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의 지휘아래 약속의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첫발을 디덨던 도시이다. 물이 귀한 사막 한가운데 물이 솟아 나오는 술탄을 비롯하여 여러개의 샘을 가지고 있어 주변 풀 한포기 없는 황량한 유다광야와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는 아름다운 도시로 천연적으로 사람이 거주하며 살기에는 최적의 장소이며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길목이기도 하다. 이곳은 요르단 계곡 (해발 -225m)에 위치하고 있어 여름에는 매우 덥고 건조 하지만 겨울에는 매우 온화한 날씨를 가지고 있어 각종 꽃들의 향기가 진동한다. 또한 고고학적으로 볼 때 땅이 기름진 이곳은 기원전 7,000-10,000년전 문명의 요람지 였으며 지금까지 발견된 도시중 세계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도시로 추정된다.
헤로데왕은 이러한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이도시에 자신의 별장을 두고 오랫동안 머물러 지냈으며 그의 삶도 여기서 끝을 맺었다.
예리고는 현 시가지 중심부에서 서쪽으로 2km쯤 가면 툴률아부엘 알라이크 사적지가 킬드하천 북쪽과 남쪽에 자리 잡고 있다. 일찍이 하소모니아 왕가에서는 하천 북쪽언덕에 별장을 지었다. 그러나 헤로데왕(기원전37-4년 재위)은 기원전 35년 하스모니아왕가를 제거하고 별장을 차지하여 개조하고 그옆에 엄청난 이중궁전을 건설했다..킬드하천 북쪽과 남쪽에 각각 궁전을 지은 까닭에 이중 궁전 이라고 한다. 헤로데는 여기서 기원전 4년에 사망했다. 그후 그는 남쪽에 320m 정도되는 경마장과 반원형 야외극장을 만들어 3,000여명의 군중이 경마구경을 하도록 했다. 헤로데의 또 한가지 사적은 헤로데궁전(툴률아부엘 알바이크)남서쪽에 키프로스 요새가 있다. 헤로데는 기원전 37년 정권을 쟁취하자마자 이요새를 튼튼히 하고 자기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키프로스”로 명명했다. 그는 항상 모반을 염려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유사시를 위해 곳곳에 요새를 건설해 두었다.
발굴작업 결과 신석기 시대에 속하는 성, 성벽, 둥근망대를 이곳에는 시대별로 쌓여진 지층들이 고스란이 보존 되어 있는곳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로 밝혀 졌다.
1,952-1,958년 영국의 여류 고고학자 캐서린 캐년에 의해 발굴된 자료를 근거로 볼 때 기원전 8,000년전 중석기 시대부터의 유적이 발견된 곳으로 , 수많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이도시의 잔해가 쌓여 높이가 약24m,넓이가 약12,000평이나 되는“TELL”(이야기)이란 언덕을 구축했다.
예리고의 역사기록은 기원전13세기경 이스라엘민족이 약속된땅에 도착함으로써 시작된다. 이곳은 여호수아가 요르단강을 건넌후 처음으로 이스라엘 민족에 의해 정복된 도시이다.(여호 6), 예리고는 가나안 점령의 교두보 였다. 여호수아는 예리고성을 불태워 함락시킨후 후세에 이곳을 재건할 사람들에대해 저주를 내렸다.“이성을 짓겠다고 나서는 자는 야훼께서 저주를 받으리라.맞아들을 죽이지않고는 기초를 놓지못하고 막내아들을 죽이지 않고는 성문을 달지못하리라.(여호6,26), 몇세대가 지난후 베델사람 히엘이 예리고를 재건 하려 했을 때 이 여호수아의 저주가 그에게 내려졌다.(열왕기상 16,34),이후 예언자 엘리사는 주민들의 간청에 의하여 샘터에 가서 소금 한줌을 뿌리며 말하였다.”야훼꼐서 말씀 하신다. 내가 이물을 정하게 하리라“(열왕기하2,21), 예리고의 푸른 오아시스의 생명수인 이샘은 역사를 통하여 자주 등장하고 있으며 엘리사의 이름을 따서 ”엘리사의 샘“이라고 불렀다.
이샘은 옛예리고에서 길건너편에 있으며 당시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로 이용 되었기 때문에 과월절에 예루살렘으로 떠나곤 했던 예수가 여러차례 머물렀을것으로 추측된다. 예로부터 이도시는 순례자들의 통로로써 물과 음식을 얻기에 적절한곳 이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 가시기도하고 하였으며 ,반대로 예리고에서부터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시기도 하였다. 이길 사이는 유대광야가 놓여있는 일반적으로 위험한길 이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 하셨다.”어떤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 사람이 가진 것을 모조리 빼았고 마구 두둘겨서 반쯤 죽여 놓고 갔다.“(루가10,30)
예리고 서편 유다광야는 예수께서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후(마태 31,1-17),요르단강에서 멀지않은 이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다.(마르코,1,12-13), 예수가 우리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인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의 손에 넘어가 사형선고를 받을 것이다. 그리고 이방인들의 손에 넘겨져 조롱과 채찍질을 당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게 될것이다.(마태,20,17-19) 라고 말한곳도 이곳 이었다고 추정 할 수 있다.
예리고에서 예수가 거지 소경을 눈뜨게 했고(루가18,35-420,(마르코10,41-52), 또 키가 작은 세관장 자케오가 예수를 보기위해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 있는 것을 보고 예수가 “자케오 얼른 내려 오시오 오늘 내가 당싱의 집에 머물러야 하겠읍니다.(루가19,1-10)라고 말한곳도 이곳이다. 예리고에는 과거 유대인과 사나고그인이 산 흔적들은 있으나 현재는 요르단 국적을 지닌 아랍인들이 살고 있는 도시이며 팔레스타인의 정치중심지 이다.
(1)유혹의 산(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신 곳)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가득차 요르단강에서 돌아 오셨다.그리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사십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그동안 아무것도 잡수지 않아 그 기간이
끝났을때에는 시장 하셨다. 그런데 악마가 그분께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 이라면 돌 더러
빵이 되라고 해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고 성경에 기록 되어 있다.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높은 곳으로 데리고 가서
한 순간에 세계의 모든나라를 보여주며 그분께 말하였다."내가 저나라들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당신에게 주겠소. 내가받은 것이니 내가 원하는 이에게 주는 것이오. 당신이 내
앞에 경배하면 모두 당신 차지가 될 것이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 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 분만을 섬겨라."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그분께 말
하였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에서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천사들에게 너를 보호하라고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다칠세라 그들의 손으로 너를 바쳐주리라".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마라" 하신 말씀이 성경에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악마는 모든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그분에게서 물러갔다. (루가
4,1-13)(마태4, 1-11)
(2) 자캐오 나무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시어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 마침 거기에 자캐오 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관장이고 부자였다. 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인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
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 무화과 나무로 올
라가 그곳을 지나가는 에수님을 보려는 것 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거기에 이르러 위를 처다
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 내가 너의 집에 머물러야 겠다.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 들였다. 자케오는 일어서서 주님께 말 하였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오늘 이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비록 이 나무가 비록 2000년전 돌무화가 나무는 아니지만 예수님께서 자케오야!
이름을 부르시며 내려오너라 하신 말씀을 묵상하며 상용아! 춘식아! 광웅아! 우리를
부르시는 음성을 들으며 주님의 은총을 많이 받았다.
(3) 예리코의 착한 목자 성당
착하신 목자성당은 예수님께서 예리코에서 행하신 기적 바르티메오 라는 소경을 눈 뜨게
하는 기적을 보여주신것(마르 10,46-52)과 자캐오라는 세관장 집에 머무르신 사실을 기념
하기 위해 세운 성당으로 지금은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운영하고 있다.
12).요르단강(THE RIVER JORDAN)
이스라엘에서 가장 길고 큰강으로 대협곡의 시작인 헬몬산 남쪽 기슭으로 부터 훌라계곡을
따라 갈릴레아호수로 이어지는, 상 요르단강과 갈리레아 호수 남쪽하구를 통과하는 요르단
골짜기를 따라 사해에 이르는 하부 요르단강으로 나누어진다.
이강의 길이는 약260km , 북쪽의 해발900m로 부터 해발 400m의 사해로 이어지는 경사지를
따라 흐르고 있다.
요르단강은 동쪽의 사막과 약속의 땅을 나누는 강으로 사철 눈이 녹지않는 헤르몬산(814m)에서 발원하여 갈릴래아 호수를 거쳐 사해에 이르고 있다. 이강은 가장 낮은 계곡을 흐르는 강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이계곡은 수만년전에 지각이 무너져 밀고 들어감으로 형성된 것이라고 한다. 헤르몬산 아래에서 시작하여 사해로 흘러 들어가는 요르단강은 특이한 물줄기를 형성하고 있다.
갈릴래아 호수에서부터 사해까지의 계곡을 ‘엘 그호르’(가라 앉은 지역)라고 부르는데 그 길이가 단지 105km밖에 되지 않지만 꼬불꼬불 돌아 흐르기 때문에 총길이는 260km나 된다.또 강의 평균폭이 30m나 되었으나 현재의 강폭은 8-15m로 비교적 좁은편이다. 고대 요르단강은 매우 크고 자주 범람 하기도 하였다. 특히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행렬이 요르단강을 건느던때의 기록 가운데“그 궤를 멘 사람들이 요르단강에 이르렀다. 마침 추수절이 되어 둑에까지 물이 넘쳐 흐르는데 ...” (여호3,15) 하여 요르단강이 우기(10월-3월)에는 항상 큰 강으로 변하곤한 모습을 짐작할수 있다,
현재는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수자원인 갈릴래아의 하구에 수문을 장치하여 요르단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물을 통제하기 때문에 요르단강의 모습은 볼품없게 변하여 순례자들에게 실망을 준다.
그러나 팔레스티나에서는 가장 크고 긴 강이다. 이강은 헤르몬산 네곳에서 지하수가 솟아 요르단강이 형성되어,사해로 흘러 들어 가기 때문에 엘 우르단(내려오는강)이라는 뜻을 가져 요르단 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강물의 원천 네곳은,나흐르 바니야스, 엘레단, 바라그히트, 하스바니 인데 ,니흐르라는 말은 ‘시냇물,개울,수로’라는 뜻이다.
오늘날도 이곳 근처에는 푸른 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으며 ,시냇물이 곳곳에 흐르고 있어 피서 하기에는 아주 적절한 곳이다. 요르단강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 야르덴, 아랍사람들은 엘 우르단 이라고 부른다. 요르단강에는 세 개의 호수가 있다. 상류에 위치한 호수가 훌레호수다. 이 호수의 이름은 오늘날 지도상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30년전 이스라엘사람이 이 호수를 개간하여 농터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부터 16km가량 떨어진 호수가 그 유명한 갈릴래아 호수이다.
이 호수는 길이 21km,폭이 13km나 되는 아주 방대한 호수다. 그래서 갈릴래아 바다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갈릴래아 호수에서 105km가량 떨어진 곳에 사해가 위치해 있다. 사해는 요르단강 물의 종착지 이다. 길이가 85km이고 가장 넓은 폭이 18km나 된다.
요르단강은 구약시대 뿐만 아니라, 신약시대에도 성스럽게 여겨졌다.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두르고, 양식으로 메뚜기와 들꿀을 먹는..” 이렇게 요한이 나타나, 요르단 강변에서 설교를 하고 세례를 주고 있었다. “그 때에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유다 각 지방과 요르단강 부근의 사람들이 다 요르단강으로 요한을 찾아 가서 자기죄를 고백하여 세례를 받았다.”(마태3,5-6),그때 예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갈릴래아로부터 요르단강으로 찾아 오셨다.“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시자 홀연히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성령이 비들기 모양으로 당신 위에 내려 오시는 것을 보았다. 그때 하늘에서 소리가 울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3,16-17, 마르1,9-11, 루가3,21)이와 같이 요르단강은 새로운 복음의 시작을 알린 곳이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곳으로 알려진 사해 북쪽 예리고 가까운 곳의 요르단강에는 현재 알렌비(ALLENBY BRIDGE)가 있어 이스라엘과 요르단을 오가는 국경통과소가 있다.
오늘날은 요르단강을 경계로 하여 동서로 이스라엘과 요르단 두나라가 갈라져 있다. 특히 갈릴레아호수와 사해 사이를 잇는 요르단 강변은 군사지역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도 들어 갈수 없고 먼 발치에서 내려단 볼 수 밖에 없다.
예리고에서 8km 떨어진 곳으로 예루살렘과 암만을 잇는 아주 중요한 교통로이다. 1967년6일
전쟁 이후 부터 이스라엘군들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출입이 삼엄하게 통제되어 있다.
예수가 세례를 받은곳은 예리고에서 동쪽으로 약 8km 떨어진 곳이라 전해지고 있다. 예수께서 이강에서 셰례를 받았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성스러운 강이 되었으며, 예로부터 그리스도교인들이 경건한 마음과 믿음으로 이 강물에서 몸을 앃었다. 수많은 순례자들이 요르단강에 와서 하얀 가운을 걸치고 목욕을 한 뒤 이옷을 그들의 수의로 사용하기 위해 집으로 가지고 가기도 한다. 예수가 세례를 받은 장소 근처에서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민족이 이 강을 건너 침입해 들어갔다. ”야훼의 계약궤를 멘 사제들이 요르단강 한복판 마른 땅에 서 있는 동안 온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건너 결국 온 겨레가 다 요르단강을 건넜다“(여호3,17),또한 예언자 엘리야가 불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 간곳도 이 근처이다. ”난데없이 불말이 불수레를 끌고 그들 사이로 나타난는 것이었다. 동시에 두 사람 사이는 떨어지면서 엘리야는 회오리바람 속에 휩싸여 하늘로 올라 갔다.(열왕하2,11),
그리고 아람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이 이 강에서 몸을 씻어 문둥병을‘ 고친곳도 이곳이다.“나아만은 하느님의 사람이 일러 준대로 요르단강으로 내려가서 일곱번 강물에 들어가 몸을 씻었다. 그러자 새살이 돋아 그의 몸은 마치 어린아이 몸처럼 깨끗해졌다.”요르단강은 구약성서에 180번,신약에서 15번 언급되고 있는 성지이다.
13) .가파르나움(CAPERNAUM)
예수님께서 갈릴리아 호수를 중심으로 벌였던 복음의 중심지 가파르나움은 예수님께서 이곳에서 여러가지 크고 작은 기적을 행하시고 활동하셨던 중요한 장소이다.
예수님 당시에는 제법 큰 마을로서 마을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주로 설교하시고
복음을 전파한 중심지였다.
그 설교는 생전 처음 듣는 놀라운 것들이어서 나날이 말씀을 들으러 오는 사람이 늘어났다.
가파르나움은 요르단강 상류에서 갈릴래아 호수로 흘러 들어가는 지점에서 서쪽으로 4km 떨어진 위치에 있는 고대 중요 상업도시 였다. 이곳은 성서 이전부터 아코(ACRE)에서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목이라 병영과 관청이 있었다. 당시 이곳은 다마스커스에서 비단과 향료를 가져오고 게네사렛지방의 과일을 가져가는 상인들로 붐볏다. 그래서 군인,상인과 이방인을 포함한 여행자들의 왕래가 많은 길목이라 선교적 차원에서 중요한 위치였다.
나자렛이 예수의 고향이라면 가파르나움은 예수의 활동 주거지로 제2의 고향으로 삼았던 곳이다. 그후 가파르나움에서 20개월동안 그의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복음을 전했고, 많은 기적을 통해 그의 사랑과 전능을 보여 주었다. 가파르나움에는 베드로의 집이 있었는데 예수는 이곳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다.
가파르나움은 “예수의 도시”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호수를 건너 자기 동네로 돌아오시자”(마태9,1) 또는 “예수의 집이 있는곳” “며칠 뒤에 예수께서는 다시 가파르나움으로 가셨다. 예수께서 집에 계시다는 말이 퍼지자”(마르2,1) 제자들이 모여 들었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자주 만났던던 곳이다 .따라서 갈릴래아 지방에서 활동한 예수를 보도하는 복음서에는 이곳이 매우 자주 언급된다. 하지만 구약성서나 그리스도교 이전에 문헌에는 이곳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가파르나움 이란 명칭에 대하여는 여러 학설이 있지만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 설에 의하면,그명칭은 경계지역,또는 제한구역이란 뜻을 지닌 히브리어 ‘케파르 테쿠민’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한다. 이에 반해 두 번째 설은 ‘나훔의 마을’ 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케파르 나훔’(Kfar nahum)에서 연유한 것 이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나훔은 인명을 가르킨다고 보고 있다. 특히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이 “고통에 잠긴곳이 어찌 캄캄하지 않으랴? 전에는 즈불룬 땅과 납달리 땅을 천대하셨으나 장차 바다로 가는길 , 요르단강 건너편 외국인들의 지역을 귀하게 여기실 날이 오리라. 어둠속을 헤매는 백성이 큰 빛을 볼 것입니다. 캄캄한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쳐 올 것입니다.(”이사8,23, 9,1) 가파르나움 이곳에서 이루어졌다고 여긴다.
이곳에서 예수는 무엇보다도 어부출신의 그의 제자들 시몬 베드로, 안드레아,야고보,요한을 사람 잡는 어부로 부르셨으며(마태4,18-22,,루가5,1-11, 마르1,16-20, 요한1,35-42)그리고 가파르나움은 다른 어느 도시 보다도 예수의 기적이 가장 많이 행하여 졌으며,비유로 많은 것을 가르치셨다
1).악령들린 사람을 고쳐주시고(마르1,21-28, 루가4,31-37),
2) 열병으로 누워잇던 시몬 베드로의 장모치유(마태8,14-17,마르1,29-31, 루가4,38-41),
3) 중풍환자의 치유(마태9,1-8,마르2,1-12,루가5,17-20),
4) 나병환자의 치유(마태8,1-4,마르1, 40-45,루가5,12-16)
5) 죽었던 야이로의 딸 소생의 기적 (마태9,18-26,마르5,21-43, 루가8,40-56),
6) ”벙어리를 고치셨으며(마태9,32-34,),
7) “오그라든 손을 펴게 하셨다”(마태12,9-14,마르3,1-6,루가6,6-11)
8) ,어느 고관의 아들 치유(요한4,46-53),
9) 백인대장의 종의 치유(마태8,5-13,루가7,1-10,요한4,43-54) 등등
예수시대의 이스라엘은 헤로데왕의 아들 안티파스가 통치하고 있었다. 이곳은 로마의 식민지에 불과 했지만 예수는 이곳에서 “새로운 가르침”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설교,,기적을 행하여 당시 율법학자들과 비교 될 수 없는 예수의 놀라운 권유와 가르침에 많은 사람들이 감탄 했던것이다.“예수의 일행은 가파르나움으로 갔다. 안식일에 예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 가르침을 듣고 놀랐다. 그 가르치는 것이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가르침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마르1,21-22,루가4,31-37)
예수의 제자들이 “라삐, 묵고 계시는 데가 어딘지 알고 싶습니다.”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선생님이라는 뜻이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와서 보라고 하시자 그들은 따라가서 예수께서 계시는 곳을 보고 그 날은 거기에서 예수와 함께 지냈다. 때는 네시쯤이었다.(요한1,38-39,마태4,18-20,마르1,16-18,루가5,1-11), 예수의 놀라운 가르침 특히 “생명의 빵”에 관한 예수의 놀라운 가르침,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 하셨다.“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응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이것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빵 이다.. 이 빵은 너희의 조상들이 먹고도 결국 죽어 간 그런 빵이 아니다,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6,22-59)
그에게 온 수많은 사람들을 낫게했다(마태8,16-17,9,36-38) 그러나 이런 여러일을 행하였던 예수는 꾸짖기 시작했다. “너 가파르나움아 ,하늘에라도 오를성 싶으냐?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다. 사실 네 가운데서 행한 기적들을 소돔에서 행했더라면 그는 오늘까지 남아 있었을 것이다. 실상 너희에게 이르거니와 심판날에 소돔땅이 너보다 더 수월할 것이다.(마태11,23-24), 결국 은혜를 모르는 가파르나움은 예수의 예언대로 되었다.
가파르나움은 예수의 메시지“회개하라”라는 말씀을 받아 들이지 않은 대표적인 도시로서 심판날에 소돔보다 더 무거운 벌을 받게 될 것을 선언 하기도 하였다, 예수의 사역지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가파르나움,코라진,베싸이다등의 도시는 비잔틴시대 이후 더 이상 도시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 하였다. 가파르나움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은 적중하여 이미 그도시는 파괴되어 잊혀진지 오래 되었으나, 1,838년 미국 탐험가 에드워드 로빈슨이 이도시를 처음으로 확인한후 여러 차레 발굴을 통하여 알려지기 시작했다. 현재 까지 남아있는 회당은 그 기초만이 예수 당시의 것이며 석회석으로 이층 구조로 남아있는 건물은 4-5세기의 것이다. 이도시는 6세기무렵 지진으로 인하여 도시 전체가 파괴 되었지만 다시 복구되어 10세기경까지 번영을 누렸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또 6세기에는 베드로의 생가터 위에 교회가 세워졌다. 그러나 638년 아랍의 침략으로부터 보호받은 교회는 746년 또 지진으로 인하여 파괴 되었다.
가파르나움은 1,905년 독일의 고고학자에 의해 발굴되어서 가파르나움 옛회당을 발견하게 되었고, 1,926년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의해 마무리 되었다. 이들의 발견중에서 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이지역에 있었던 회당의 유물들이다. 최근에는 베드로의 집터위에 5세기경에 세워졌던 유적 들을 발굴 하였다. 그러나 현재도 거의 폐허 상태로 당시의 건물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1).빵과 물고기의 기적 기념성당(TABGHA)
400년대 건축된 이 유적은 1930대초 독일 고고학자들에의해 갈릴레아 호수 북서쪽에 있는
타브가에서 발굴되었다. 아랍인들이 파괴한 후 일천년이상 땅속에 묻혀 있던 교회의 일부가
발견된것이다. 당시 바닥에서 바구니 모양의 모자이크가 발견 되었는데 그 가운데 부분에
다섯개의 빵과 물고기 두마리가 장식되어 있었다.
타브가(희랍어 HEPTAPEGAI)-“7개의 샘물” 이란 의미를 지닌 희랍어 “헤프타 페곤 ”을 아랍어로 옮긴 “아인엣 타브가”라고 부른다. 오늘날 “타브가”라고 칭하는곳은 갈릴래아 호수의 서북쪽연안, 곧 가파르나움에서 남쪽으로 3km 떨어진 지역이다 .옛날에는 이지역에 실제로 일곱 개의 샘물이 있었다고 한다.
네 복음서에 모두 언급하고 있는 유일한 기적 가운데 현장에 세워진 기념교회로 이곳 타브가에는 예수께서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이 넘는 군중을 배불리 먹이셨다는 사실.(마태14,13-21,마르6,30-44,루가9,10-17,요한6,1-14)을 기리는 기념성전이 자리잡고 있다.
350년경에 처음으로 이곳에 기념성전이 들어 섰으나 419년 지진으로 파손 되었다. 그후 성전을 보수 되었으나 551년에 있었던 대지진으로 다시 파괴되었으며 ,614년 페르샤군과 637년 회교도 침입으로 인해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리고 페허로 1,300여년동안 방치 되었다가 1,911년에 기념성전터를 발견했고 1,932년에는 독일의 고고학자 A.E 마더와 A.M쉬나이더에 의해서 비잔틴 시대의 성전에 있던 모자이크등 여러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이곳에서 발굴된 모자이크는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발굴된 것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화려하고 아주 셈세하게 만들어진 모자이크의 일부가 기념성전 안에 잘 보관되어 있다. 특히 제단 앞에 놓여진 모자이크 즉 빵을 담은 바구니 양쪽에 물고기가 새겨져 있는 모자이크는 그야말로 일품이다. 또 성당 바닥에는 호수지역의 새,물고기, 짐승,꽃들을 묘사한 아름다운 모자이크도 있다. 이 기념성당은 1,982년에 비잔틴 양식으로 지어진 것인데 오늘날 이 성지의 관리는 독일계 베네딛도 회원들이 관리하고 있다.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마르6,30-44)
사도들이 돌아와서 자기들이 한일과 가르친 것을 예수계 낱낱이 보고 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함께 좀 쉬자.”고 말씀 하셨다. 찾아오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들은 음식을 먹을 겨를 조차 없었던 것이다.
예수일행은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을 찾아 떠났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일행이 떠나는 것을 보고 그들이 예수의 일행이라는 것을 알고는 여러 동네에서 모두 달려나와 육로로 해서 그 들을 앞질러 그 곳에 갔다.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 군중이 많이 모여 있는 것을 보시고 목자없는 양과 같은 그들을 측은이 여기시어 여러 가지로 가르쳐 주셨다.
어느덧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니 군중들을 헤쳐 제각기 음식을 사먹도록 농가나 근처 마을로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자 제자들은 “그러면 저희가 가서 빵을 이백 데라니온 어치나 사다가 먹이라는 말씀 입니까/”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지금 가지고 있는 빵이 몇 개나 되는가 가서 알아 보아라” 하셨다. 그들이 알아보고 돌아와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하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군중을 풀밭에 떼지어 앉게 하라고 이르셨다.
군중은 백명씩 또는 오십명씩 모여 앉았다.
예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드시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다.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도 모두 사람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빵조각과 물고기를 주워 모으니 열두광주리에 가득 찼으며 빵을 먹은 사람은 장
정만도 오천명이나 되었다.
(2).베드로 수위권 성당(Church of toe primacy of st. peter)
빵과 물고기의 기적성당과 같은 지역에 있으나 프랑스교구여서 담장이 처져 있다. 이 기념성당은 갈릴래아 호숫가를 따라 500m 가량 북쪽으로 걸어가면 베드로 수위권 성당( 또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발현 기념성전)이 나온다.
이곳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갈릴래아에 다시 오셔서 고기잡는 어부로 되돌아와 생업에 종사 하셨다. 예수께서는 호숫가에 서 계셨으나 베드로 일행은 알아 보지 못했다. 그때 갈릴래아지방으로 돌아온 베드로는 어느날 저녁, 다른 제자들과 함께 고기를 잡으러 배를 타고 갈릴래아호수로 나갔다. 밤새껒 그물을 쳤으나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그런데 새벽녘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호숫가에 서 계셨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제자들이 그물을 다시 던져 보았더니 끌어 올릴수 없을 만큼의 많은 고기가 잡혔다는 것이다. 그러자 베드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알아 보게 되었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제자들과 함께 숯불에 생선을 구워 나누어 먹기도 했다.(요한21,1-14),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서 계셨고, 제자들과 함께 숯불에 구운 생선을 나누어 먹었던 장소에 현재의 기념성전이 세워졌다 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발현 기념성전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바로 이곳에서 베드로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요한21,16)라는 명령과 함께 수위권을 받았다고 여기기 때문에 베드로 수위권 성당이라 불리게 되었다.. 또 예수께서 부활하신 뒤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은 이것이 세 번째 였다.(요한21,14), 예수님이 발현 하신것은“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요한20,11-18) ,”안식일날 저녁 제자들에게“(요한20,19-23)이렇게 세 번 발현 하셨다.
오늘날의 기념성당은 1,934년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의하여 새로 건립 되었다. 이성전 안에는 소위“그리스도의 식탁”이라고 불리는 바위 덩어리가 잘 보존 되어 있는데, 이바위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빵과 숯불에 구운 생선을 나누어 먹었다고 한다. 고고학자들에 따르면 ,4세기 때부터 이곳에는 기념성전이 암반위에 세워져 있었는데,1,226년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어 폐허로 방치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칠백년이란 세월이 지나고서야 오늘의 기념성당이 다시 세워진 것이다.
(3).산상 수훈 기념성당(THE MOUNT OF THE BEATITUDES)
무솔리니에 의해 1937년 이태리 건축가인 안토니오 바르루치오가 건설했으며 여덟가지
진복을 상징하여 팔각형으로 설계하여 돔을 얹고 있다.
성당 내부의 둥근기둥의 각 창문에는 예수님께서 산상수훈때 가르치신 팔복이 한 조목씩
기록되어 있고 바닥에는 라틴어로 여덟가지의 복이 모자이크로 새겨져 있다.
이곳은 예수께서 불멸의 산상수훈과 진복팔단을 행한 장소로 가파르나움 위쪽 125m 작은 언덕 위에 세워진 성당이다. 타브가로부터 완만한 구릉지대를 따라 올라가면 쉐이크 알리 라는 언덕에 도착하게 된다.. 예수께서 갈릴래아에서 부는 맞바람을 이용하여 우리에게 온화한 목소리로 복음을 들려주던 장소이다.
.바로 이언덕에서 예수께서는 많은 군중에게 아주 특별한 산상설교.(마태5-7장)를 하셨다. “여덟가지 참된 행복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3-10)을 특히 참된행복을 기리는 뜻에서 1,930년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팔복음을 상징 팔각형으로 기념성당을 세웠다.
산에서 내려다보는 갈릴래아호수는 아름답다. 산밑에 야외 극장식 벌판을 바라보면서 이천년전에 복음의 현장을 상상할수 있을 만큼 그모습은 변화가 없어, 수천명의 군중들이 운집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우렸을 때 모습을 상상하기에 충분한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장소라는 느낌이 든다.
마태오 복음사가가 전해주는 예수의 산상설교는 편집자에 의하여 예수의 여러 가지 가르침이 한데 모아진 것이다. 마르코 복음서나 특히 루가복음6,17-49와 11-12장 까지 비교해 보면 더욱 잘알수 있다. “산상설교” 라 불리게 된 것은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 군중을 가르치셨다.“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 가 앉으시자 제자들이 곁으로 다가 왔다. 예수께서는 비로소 입을 열어 이렇게 가르치셨다.”(마태5,1-2)고 해서 이다.
14).나자렛(NAZARETH)
나자렛은 이스라엘에 비옥한 농경지 이스르엘 평야 북쪽, 갈릴래아호수의 남서쪽 24km 지점 ,작은 언덕에 위치한 작으도시로, 티베리아스에서 31km, 하이파에서 39km 떨어진 해발 375m정도의 산으로 둘러 쌓여 있다. 나자렛은 동정녀 마리아가 그리스도를 잉태한 곳으로 유명한 성지이다. 베드레헴에서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는 남편 요셉과 이곳으로 돌아와 생활을 시작했던 곳이다. 나자렛은 예수께서 출생후 잠시 애굽으로 피난 했던 때를 제외하고는 태아에서 부터 유년기를 거쳐 성년이 되기까지 일생을 보낸 고향이다. 이곳에서 예수는 다른 어린이들과 마찬가지로 거리와 언덕에서 뛰어놀며 그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예수가 활약하던 그당시 그지방 주민들의 대부분은 유다민족 이었으며 ,지중해 연안의 모든나라와 같이 로마제국의 지배에 있었다. 예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 성서를 읽고 복음을 전했으나 그의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하였다..“저 사람은 목수가 아닌가? 그 어머니는 마리아요, 그 형제들은 야고보,요셉,유다, 시몬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다 우리와 같이 여기 살고 있지 않은가?”하면서 좀처럼 예수가 행한 기적들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마르6,3), 그를 목수라 부른 것으로 미루어 보면, 그는 이곳에서 세상에 알려지지않은 30년을 목수일을 하며 지냈다. 나자렛의 좁은거리와 언덕들은 30년동안 이곳에서 지냈던 예수의 당시 모습과 같을 것이다. 베들레헴 말 구유간에서 태어난 예수님은 헤로데왕의 박해를 피하여 애굽으로 피난 갔다가, 주의 사자가 이르는 대로 이스라엘 땅에 되돌아와서 정착한곳이 그 부모의 고향이기도 한 나자렛이다.
복음사가들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유다인들은 예수를 가리켜 ‘나자렛 사람’ 이라고 했다.“베드로가 대문께로 나가자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는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이 사람은 나자렛의 예수와 함께 다니던 사람이오“ 하고 말하였다.(마태26,71:,루가18,37:요한18,5-7:마르1,24), 탄생지 베들레헴보다 나자렛이 예수가 더 부각된 셈이다. 예수께서 공생활에 들어가시기전 전까지는 나자렛에서 상당히 오랫동안 사셨기 때문일 것이다.
나자렛은 지형적으로 볼 때, 사방이 야산으로 둘러 싸인 지대가 높은 분지요, 다른 도시나 마을과의 교류가 거의 없이 차단된 지역으로서 매우 한적한 곳이다. 역사적으로 볼때도 나자렛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곳이다. 구약성서에서도 판관기13,5-7을 제외하고는 나자렛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다.“이미 하느님께 바쳐진 나자르인이다.”,
예수의 시대에도 나자렛은 사람들의 관심거리가 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필립보가 나타니엘을 찾아가서 “모세의 율법서와 예언자들의 글에 기록되어 있는분”을 만났는데, 그 사람은 나자렛 출신이라고 말하자, 나타나엘은 “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나올수 있겠소?‘ 하며 의아해했다.(요한1,45-46),사실상 나자렛은 예수로 인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나자렛이란 명칭은 히브리어‘나자르(지키다. 수호하다)’에서 영유 되었으며, 희랍어와 라틴어식 발음을 따른 것이다. 오늘날 아랍사람들은 엔나스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나츠랏이라고 부르고 있다. 나자렛은 ‘수호자’또는 ‘파수꾼’ 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예수님의 청소년 시절을 잘 은닉했기 때문에 그런 명칭이 나오지 않았나 하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지형적으로 볼 때는 나자렛은 우뚝 솟아있어(루가4,29) 이스르엘 평야를 지켜 주고 있는 듯하다. 예로부터 적들의 공격을 막아 주는 파수꾼의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그런 명칭이 주어졌으리라 여겨진다. 나자렛은 당시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은 산골에 불과 했는데,
복음서에는 나자렛은 “도시”라고 보도하고 있다.(마태2,23,루가1,26)“나자렛이라는 동네에 살았다.”나자렛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고 기적들을 행하여도 받아드려지지 않았다. “사실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가4,24), 예수를 해치려 했던 첫 번째 사건도 이 곳에서 일어났다. 회당에 있던 사람들이 예수의 비판과 엄한 설교를 듣고 “회당에 모였던 사람들은 이말씀을 듣고 는 모두 화가 나서 들고 일어나 예수를 동네 밖으로 끌어냈다. 그 동네는 산위에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를 산 벼랑까지 끌고가서 밀어 떨어뜨리려 하였다.”(루가4,28-29) 그언덕은 오래전부터 ‘추락산’ 이라고 불려지고 있다. 그 일이 있은후 예수는 나자렛을 떠나 가파르나움으로 가서 사셨다. 나자렛은 예루살렘, 베들레헴과 더불어 세게의 순례객들이 많이찾는 성지이다.
(1).성모 영보 기념성당(The church of ANNUNCIATION)또는 주님탄생 예고 성당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 했다.(루카1, 26-38)고 전해진 자리에 지은 현대식 성당이다. 지하에는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수님 잉태를 알렸다는 동굴이 있다. 이스라엘 북부 갈릴레아
작은마을 나자렛! 2000년전 이 작은 마을 은 겨우 150여명 남짓 살았던 가난한 동네였다.
믿음의 성지 예루살렘과 150km 떨어져 있고 갈리레아 호수서남쪽 25km지점에 있다.
나자렛의 대표적인 순례지는 성모영보 기념성당이다. 이곳은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 예수님이 탄생 하리라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는 장소에 세워진 성당이다.
4세기 로마 콘스탄틴 황제때에 처음으로 세워 졌는데 614년 유대인들에 의해 파손, ,그후 11세기에 십자군이 나자렛을 갈릴래아를 수도로 삼으면서 큰규모의 교회가 세웠었다.
그리고 13세기에 아랍의 통치로 인해 성지순례가 힘들었다. 1,620년 프란치스카신부가 이터를 사들여 새 교회를 건축하였으나,1,955년 다시 파괴되었다. 지금의 바실리카 성당은 이태리 건축가 죠반니 무치오가 설계, 1,960년부터 짓기 시작하여 1,969년에 완성 되었다. 교회 벽면에는 전 세계에서 보내온 성화 들로 가득차 있고 양쪽으로는 마리아가 가브리엘 천사에게 수태고지를 받은곳에 제단이 있는데 바닥이 모자이크로 아름답게 장식 되어있다. 그는 한 교회 위에 또 하나의 교회를 얹어 , 안에서 서로 통하게 설계함으로써 옛 교회의 유적을 고스란히 보존케 하였다.이 성전을 짓기 전에 벨라르미노 바가티신부(고고학자)는 1,954-1,965년까지 11년 동안이나 고고학적 발굴을 했었다.
수많은 동굴,물저장 장소, 곡식 저장소, 기름틀, 포도즙을 짜내는 틀뿐만 아니라 비자틴 시대의 성전터도 찾아냈다. 성전안에 잘 보수되어 있는 소위 성모영보 동굴은 헤로데 시대에 속하는 가정집인데 마리아가 이곳에서 살았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이동굴안에 위치한 중앙 제대에는 라틴어로 “이곳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라고 씌어져 있다. 이제대를 가르켜 성모영보 제대라고 칭한다. 이 동굴 안에는 상당히 오래되어 보이는 두 개의 커다란 기둥이 서 있다. 하나는 마리아의 기둥(북쪽에 위치), 다른 하나는 가브리엘 천사의 기둥(남쪽에 위치)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 마리아와 천사가 서로 마주보며 서 있었던 곳이라고 프란치스코 수도회 어느 수사님이 설명하여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성모영보 기념 대성전에서 북쪽으로 100m 가량 떨어진 곳에 성가정 또는 성요셉 성당이라고 불리는 기념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2) 예수님 탄생 성당
이 성당의 자리는 원래 서기135년에 로마 아도니스신을 위한 신전을 건립되었던 곳이었으나
서기 324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 성녀가 베들레헴에 순례하러 와서 예수님의
탄생지로 전해오는 동굴을 참배하고 그 위에 (예수님 탄생지) 성당을 짓게 하였다.
서기 339년5월31일에 성당을 축성 하였는데 첫번째 성탄 성당을 "콘스탄티누스 성당" 이라고
한다. 이성당은 6세기 초에 불타버렸지만 다행히 콘스탄티누스 성당 바닥을 장식한 모자이크
일부가 지금의 성탄성당 중간지점에 보존 되어 있다.
지금 성탄성당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서기 531년에 완성한 것인데 그 후 지붕과 바닥, 내부 장식 정도만 바뀌었을 뿐 나머지는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이 성당은 밖에서 볼때 마치
요새와도 같다. 건물 정면은 3개의 수도원 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십자가 모양으로서 규모는
길이 2m, 넓이 24m이며 교회의 출입문 높이는 1.2m 에 불과하다. 이 문은 거룩한 장소에 말을
타고 들어 가는 것을 막고 , 이곳을 들어 가는 사람은 누구든 머리를 숙이도록 하기 위하여 12
세기 십자군 시대에 지어진 것이다. 따라서 출입문은 "겸손의 문" 혹은 "좁은문"으로 불린다.
원래는 3개의 문이 있었으나 그 중 2개는 막아서 벽이 되어 버렸고 중앙으로 들어 갈수 있는
낮은 문만이 남아 있다.
이느 페르시아 인들이 말을 타고 들어와 약탈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서기 614년 페르
시아 군대가 이스라엘을 칩입하였을때 대부분의 교회가 파괴 되었으나 이 성당은 그 당시
교회의 정면에 있던 그림 덕분에 파괴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어느 화가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아기 예수를 경배하러 온 동방 점성가들로 분장
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페르시아 군인들은 자기네 조상을 대하고 나서 감동한 나머지 유스티아누스 성당을 허물 생각
을 하지 않고 오히려 참배까지 했다고 한다.
교회 안에는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동굴의 외양간, 말구유, 아기예수를 경배하기 위해 동방으로
부터 온 세왕이 묶었던 곳, 살해당한 두살이하 아기들의 무덤이 있다. 그리고 지하실에는 초대
교부 예모니모가 라틴어 성경을 번역한 방이 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장소는 은올 만든 별을 새겨 놓아 정확한 위치를 가르쳐 주고 있으며 "이곳
에서 예수그리스도는 동정녀 마리아 에게서 탄생하셨다" 라고 라틴어로 써 놓았다.
이것을 베드레헴의별 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가토릭 교회가 1717년 만든 것이다. 이별은 어리석은
사람들의 분쟁거리가 되고 말았는데 러시아 정교회가 별을 없에자 성지를 지배하던 오스만
트르크가 원상복구을 요구했고 그 요구를 받아 드리지 않자 1853년 크리미아 전쟁이 일어났던
것이다. 성지에 대한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강대국 간에 이해다툼으로 일어난 전쟁 이었다.
15). 갈멜산
이스라엘 3대 도시 가운데 하나인 하이파시가 위치하고 있는 지중해 하이판만으로 부터 시작되어
이즈르엘 골짜기를 따라 남동쪽으로 길게 뻗은 약 25km 가량의 산맥으로 종교적 의미를 많이
가지고 있는 산으로 높이 546m이다.
B.C860년경 야합왕때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의 종교적 중심지 였다. 850명이나 되는 사제들에
의해 이방인의 종교는 꽃을 피우고 있을때, 이스라엘 예언자 엘리야는 이들과 맞대결을 통하여
참 하느님이 누구인지를 가름 하였다.
예루살렘성전이 가장 번창하였던 예수님 당시 제사장 숫자가 480명 정도 였는데 비교한다면
기원전 9세기의 바알종교가 이스라엘 내에서 얼마나 극성을 부렸는가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승리를 통하여 이스라엘으 종교질서를 세웠으며 종교적 위치를
구축하였다.
갈멜산 꼭대기에 1868년 세워진 므흐라카라 불리우는 카르멜 수도원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본래 십자군 성채가 있었던곳으로 수도원 옥상에 서면 지중해쪽(서쪽) 뿐만 아니라
이즈르엘 평야( 북쪽), 사마리아 산지(남쪽)을 한눈에 바라다 볼 수 있다.
16).무깃도(Megiddo)
무깃도는 이스라엘의 가장 비옥한 이즈르엘평야의 남쪽에 자리잡고 있다. 또 이집트에서 지중해 연안을 따라 메소포타미아지방에 이르는 바닷길(비아마리스:Viamaris)목으로 이즈르엘 평야 중에서도 동서남북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의 요지이며 전략적 요충지이다. 고대에 제국의 군대는 이곳을 통과하여 지나 갈 수 밖에 없었고, 가나안 땅에서도 역사적으로 많은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구약성경에서도 이도시는 여호수아가 기원전1,230년경 이스라엘 백성을 거느리고 요르단강 서편, 약속의 땅을 점령하여 열두 지파에게 나누어 주었다.(여호12,7), 므깃도 도성도 여호수아가 점령한 도성 이었고(여호12,21), 기원전1,130년경에는 불레셋족에 의해 점령 되었다가 기원전 1,004년경 다윗왕에 의하여 다시 이스라엘 왕국에 합병 되었다. 북부 팔레스티나에 위치한 이즈르엘 평야는 불레셋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 교전이 자주 있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이 평야를 지켜주던 도성은 무깃도, 다아낙,이즈르엘. 벳산 이었다.(열왕상4,12), 다윗의 아들 솔로몬왕(기원전 965-928)은 무깃도의 중요성을 감안 이곳을 강화 시켰고 이 지역을 행정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솔로몬왕은 이스라엘 왕국에 열 두 장관을 두었는데, 무기또는 이즈라엘 광야를 에워싸고 있는 다른 도시들과 함께 다섯 번째 지방이었다(열왕상4,12), 당시 무기또는 야훼 하느님의 성전과 솔로몬 왕국을 갖춘 도시로서 그 지방의 수도였다.(열왕상9,15) 그러나 923년경 애급에 시삭은 무기또를 파괴하었고 ,그후 아합왕때 재건 되었다. 유다왕 요시아는 북진하는 애급왕 파라오느고와 이곳에서 맞아 싸우다가 기원전609년 전사한 곳이며, 최근인 1,917년 영국의 엘엔비장군이 터키군을 패배 시켜 승리로 이끈 곳도 무깃도이다. 요한 묵시록에 기록된 “아마겟돈”은 무깃도라는 히브리말을 희랍어로 옮긴 말이다. 무깃도는 1,925-1,939년에 미국 시카고 대학 동양연구소에 의해 발굴되어 그 실체가 들어났는데, 약16,000평의 땅을 발굴한 결과 20개의 도시가 위아래 수직으로 겹쳐져 있는 유적지 들을 발견하였는데 각 도시의 유적들은 각 층마다 잘 보존되어 있었다. 이중 가장 중요한 것들은 450필의 말과 150대의 전차를, 수용할수 있었던 큰 규모의 마병장 이다 .이것을 일반적으로 “솔로몬의 마병장”이라고 부른다. , 이곳은 기원전 4,000년 전부터 도시가 형성 되었으며, 가나안 원주민들이 만들었던 신당(High place)식 신전, 식량 저장소, 놀랄만한 상수도 시설, 솔로몬때 건설한 성벽,성문, 관저, 등이 발견 되었다. 그리고 뛰어난 기술로 만들어진 수로시설이 있는데 수직 갱도를 40m나 파 내려간 다음 그곳에서부터 65m정도 떨어진 성벽 바깥쪽 샘까지 터널을 만들어 물을 끌어 들였다. 그리고 샘은 침입자들이 발견하지 못하도록 흙으로 덮어 위장해 놓았다. 이것은 3,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
17).가나(CANA)
가나는 나자렛과 티베리아를 잇는 지방 도로변에 있는데 나자렛으로 부터 약 8km 떨어져
있는 곳이다. 오늘날 이곳에 사는 주민은 약 8천명 정도이다.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가나로 거론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나자렛에서 티베리아로 가는 길목에서 6.4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매우 작은마을, 이곳이 가장 유력한 곳으로 받아 드려지고 있다. 공관 복음사가들의 전승에 의하면 세례자 요한이 투옥된 다음에 예수의 활동이 시작된다.“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래아에 오셔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파하시며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하셨다.”(마태4,12-17: 마르1,14-15: 루가4,14-15) ,그러나 요한 복음사가의 기록에 따르면 세례자 요한이 투옥되기 전부터 예수의 활동이 시작된다.(요한3,24), 세례자 요한이 ‘요르단 강 건너편 베다니아에서 활동할때(요한1,28),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갈릴래아지방 가나에 가서 ,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첫 번째 기적을 행했던 곳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에게는 잘알려져 있는 지역이다.“물은 어느세 포도주로 변해 있었다.”(요한2,1-12),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유다지방에서 한동안 세례를 베풀었다.(요한3,22-23),
그후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갈릴래아지방 가나로 다시 가서 거의 죽게된 고관의 아들을 고쳐주는 두 번째 기적을 행하였다.(요한4,46-54), 예수의 이 두가지 기적들은 당시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정체를 드러내 주었고 동시에 예수를 믿도록 해 주는 표징이었다.(요한2,11:4,53), 그래서 갈릴래아 지방 가나는 오늘날도 그리스도인의 시선을 모으는 곳이다. 가나에는 기적을 기념하는 두 개의 성당이 세워져 있다.
1) 가나의 혼인 잔치 기념성당
현재 가나에는 예수니믜 첫번째 기적을 기념하는 성당이 두개 지어져 있는데 하나는 이곳에 가장
먼저 들어온 그리스 정교회 소속 기념교회(1566년건립) 이고 다른 하나는 프란치스코 소속 기념
성당이다.
가나 혼인잔치성당의 지하성당으로 내려 가려면제단 옆에 상당히 큰 물 항아리가 놓여 있고 물로
포도주를 만든 예수님을 기념하려고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리고 물 항아리가 놓여 있는 곳에
라틴어로 " 여기에 여섯개의 물 항아리가 놓여 있었다" 라 새겨 놓기까지 하여 이곳을 찾는 순례객
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게 된다.
우리 순례단들이 주로 찾는 곳이 프란치스코수도회 소속 성당으로 위층에는 혼인 잔치에 참석
하신 예수님을 그린 그림이 있고 성당 지하로 내려가면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의 당시의 상황을
연상케하는 돌로 만든 물 항아리를 볼 수 있다. 성당 외벽에 나타나엘을 부르신 예수님을 기억
하는 것이다. (나타나엘 바르톨로메오 라는 사도의 이름이 보인다)
나타나엘은 가나 출신으로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고 바릍로메오 사도가 된다.
6. 요르단
요르단은 지중해 동남쪽, 아라비아반도의 북서쪽에 위치한 조그마한 나라로써 동쪽으로 부터
유프라데스, 티그리스유역의 인류문명에 발생지인 메소포타미아(이란)와 인접하여 있고 서쪽
으로는 고대 인류문명이 번창하였던 나일강 유역 이집트를 접하고 있는 중요통로의 요지이다.
또한 세계 3대 단일신 종교인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
이기도하다.
요르단에서 볼만한 곳은 사해, 제라쉬, 와이럼, 페트라,아카바를 비롯하여 다수의 그리스도교
의 신구약성서에 명시되어 있는 성지들, 헤스본, 아르논, 베다니, 펠라, 길르앗, 산리, 요르단
골짜기, 엘리산, 가다라, 숙꼿 등과 고대및 중세로 부터 보존되어 내려온 역사적 지역 등이
많이 있다.
세계 7대 불가사이의 하나인 페트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와디람 사막에서 찝차로 달려
보기도하고 야영도 하였다. 에수님을 바라보고 생각하고, 모세가 40년간 광야생활을 마치고
가나안땅을 바라보고 돌아가신 역사적인 장소 느보산을 바라보니 가슴이 서글프다.
거룩한 삶! 영광스러운 은총을 받기도 했다.
1)알렌비 다리
예리고에서 8km 북서쪽 요르단으로 부터 건너가는 국경 검문소가 있다. 이 요르단강을 건너
가는 다리를 알렌비다리라고 한다.
예수님께서 지금 예리고 남쪽 요르단에서 세례를 받으신것을 기념하기 위한 조그마한 교회가
세워졌다. 그곳의 현재지명은 "베다바라" 인데 요르단지역 이기때문에 이스라엘에서 국경을
넘어와 순례할 수 있다.
2) 암만
자발 아지른 산맥 동쪽 가장자리의 기복있는 구릉지역에 자리하고 있으며 일년내내 물이 흐르는
수로를 갖고 있다.
요르단의 수도로 암만주의 주도이고 인구는 약 120만명으로 요르단 인구의 사분의 일를 차지
하고 있으며 요르단의 정치, 경제, 금융의 국제무역의 중심지 이기도하다.
사해로 물이 흘러 들어가는 요르단 동쪽 75km 지점, 아라비아 서쪽 고원 끝 해발 800m 구약
성서의 필라델피아에 해당된다. 암만 이란 이름은 구약성서 에 나오는 암몬족과 같은 어원이다.
랍바라는 말은 "수도"의 의미라고한다. 우리말로 하면 "서울"이란 뜻인 모양이다.
셈족 일파인 암몬족의 수도였다. 랍바를 중심으로한 암몬왕국은 모세의 출애굽기때 부터 이스
라엘과 끊임없이 전쟁을 겪으며 적대관계에 있었다.
옛날 이스라엘 건국후 에도 요르단강을 사이에 두고 이스라엘과 인접해 있어 두나라 사이에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랍바성은 다윗이 범한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가 죽은 장소이다. 우리야의 아내를 범한 후 다윗은
우리야를 죽이기 위해 이 성에서 벌어진 싸움에서 우리야를 전쟁에 앞장 서도록 요합장군에게
지시하여 우리야를 죽게만든다. 이 이후에도 암만은 구약성서에 자주 등장한다.
청동기시대 B.C4000-3000의 것을 비롯하여 로마시대 당시 아름다운 유적 가운데 일부도
남아있다. 솔로몬(B.C970-945), 암몬여인을 후비로 들이기도 했다. 그 영향으로 암몬사람의
우상을 따르고 심지어는 그 우상의 헤라클래스 신전을 비롯하여 비잔틴 양식의 건물을 증축
해서 만든 유마야드궁전, 비잔틴 교회터, 원형극장, 청동시대의 동굴 등이 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 보암왕이 이스라엘 분열을 유발한 왕인데 그 모친이 암몬의 여인 "나아마"
였다. 암몬은 여호사밧왕(B.C876-849)때 모압, 에돔과 동맹을 맺고 이스라엘을 공격하였고
웃시야왕(B.C785-740)때는 유다에 조공을 바쳤으며 요압왕때는 암몬을 다시금정벌하여 통치
를 강화 하였다.
암몬왕국은 733년부터 앗시리아 속국으로 신 바빌로니아 느븟갓네살 왕(B.C604-562)에 의해
멸망하였다.
구약성서 "랍바"라는 이름으로 불리웠고 기원전 5세기경 로마 비잔틴 시대에는 "필라델피아"
라는 이름으로 로마제국에 합병되어 번성하였으며 4세기초 비잔틴시대 말기에는 기독교가
전파되어 교회가 세워졌으나 6세기 이후 이곳을 정복한 아랍인들에 의해 "이슬람" 으로 현재
암만으로 정착했다. 635년 이슬람에게 점령당한후 역사속에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제1차 세계대전후 트란 요르단 보호 토호국의 수도가 되었으며 1946년 요르단이 독립된후
빠른 성장을 이루고 있다.
아랍-이스라엘 전쟁후 팔레스타인의 아랍 난민이 유입되었고 1970년 내전으로 심하게
파괴되었다. 위임 통치이었던 영국이 1921년 팔레스타인 서부지역으로 트란스 요르단을
분리해 내어 당시 헤자즈의 왕이자 메카의 샤리프로서 후세인 이분 발리의 아들 이었던
아브둘라를 군주로 삼고 트란스 요르단왕국을 건설하였다.
3) 와디럼(붉은사막)
요르단과 사우디 접경에 위치한 붉은 사막, 거대한 바위산! 페트라 남쪽에 위치한 와디럼은
요르단에서 관광지로 빼놓을 수 가 없다. 약 2km 정도의 폭과 19km 정도 길이를 가진 와디럼
은 붉은색의 모래의 색의 산에 사막의 신기루가 조화를 이루는 요기가 서린 듯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그 유명한 아라비아의 영화"아라비아 로렌스"가 촬영 되었을때 역사의 일 부분
이 된듯한 느낌을 갖게한다.
와디럼에 위치한 "모세의샘" 에서는 맑은 물이 흐르고 여기에 사막에서 먹이 찼다 지친 양떼
와 약대떼 에 목을 적시러 모여온다.
자연 문화복합 유산으로 지정 되었고, 붉은 사막, 선사시대 유목민들의 암벽도 볼 수 있어 자연 뿐만 아니라 고고학적 가치가 높은 지역이다.
붉은 사막속에 거대한 바위산들! 조각품 처럼장관을 이루고 있는 지역이다. 욜단 사막 지형에서
가장 광대하고 아름다운지역이다.
4) 페트라
영국시인 존 윌리암 버건 "영원의 절반 만큼 오래된 장미빛 같은 붉은도시" 라고 노래한 페트라
는 제라쉬-다마스커스를 잇는 교역로의 중심 이였고 암만 서남쪽 150km 떨어진 요르단 남서부
마안주에 있는 대상도신인 페트라는 요르단 수도 암만에서 3시간 정도 떨어져 있는 바위를
깍인 암벽에 세워진 도시로서 아랍계 유목민인 나바테아인이 건설한 해발 950m의 신비롭고
아름다운 산악도시이다.
최고 높이 300m의 바위산으로 둘러 싸여 있으며 좁은 통로 골짜기가 많은 산 중턱바위를
반쯤 깍아내고 세워진 세게적으로 유명한 고고 유적지 중 하나이다.
기원전 100년경 아랍족 나바티안 왕국의 수도 였던 페트라는 향료교역의 중심지였다. 이집트
아라비아, 페니키아 등의 교차지점에위치하여 선사시대부터 사막의 대상로 를 지배하였고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거론되고 있으며 아직 사분의 일 밖에 되지 않은
광활한 유적지이다. 2500년전 고대도시 요르단 페트라는 그 당시 무역 도시로 중동의
숨은 보석으로 1995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위 층이 오벨리스크 무덤이고 아래층은 로마의 식탁과비슷한 내부 구조를 가지고 있어
트리클리니움 무덤 이라고 한다.
페트라에서가장 볼 만한 것은 무덤인데 많은 무덤이 정교한 겉 모양을 가지고 있어 지금은
거주지로 쓰고 있다. 유적지 입구 진 블록 입구는 무덤길로 처음엔 물을 저장하는 저수지로
알려졌다가 후에 무덤으로 밝혀졌다.
기원 후 106년 로마의 트라아누스 황제에게 점령 당 하였고 나바테안 왕국은 기원전 2세기
5세기 까지 영위하다가 4세기에는 콘스탄틴에 의해 기독교화가 되었다.
그 후 6세기에 있었던 큰지진과 자연재해로 인하여 함몰되어 페허화 되었다가 300년간 시간
이 흐른후 1812년 잊혀졌던 도시는 스위스의 탐험가 요한 루드비히 부르크 하르트가 시리아
를 여행하다가 전설을 듣게 된후 보물을 찾기 위해 사막을 누비다가 페트라를 발견 하였다.
그 후에 그의 여행기를 통하여 ㅔ트라를 유럽에 알렸다. 최근에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인디아나존스-마지막성배"의촬영 장소로 유명해졌고 실로 잠들어 있은지 천년만에
1989년 개봉한 영화로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몇세기동안 쇠퇴하던 라바시는 이집트의 프톨레 마이오스2세 필라델프스(B.C 285-246)에게
정복 당한다. 당시 정복자의 이름을 따서 새로 붙인 필라델피아라는 명칭은 비잔틴미츠 로마
시대까지 쓰였다. 기원전 1-2세기 존재했던 헬레니즘도시 동맹체 데카 폴리스의 일원이 되었
으며 그 뒤 로마인들이 다시 세웠기때문에 로마시대 당시 아름다운 유적지 가운데 일부가
남아 있다.
그 후 6세기에는 이슬람제국의 침략을 받은후 635년 아랍장교 야지드 이븐 아비수리안에게
점령 당했으며 이 후 1300년 무렵 까지 역사가들도 밝혀내지 못한 결과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음마야드시대( 661-750), 십자군 (1099-1268), 마엘룩 (1263-1516), 오트만(1516-1918)
시대를 지나 1878년 오스만 투르크인 들이 러시아에서 온 체르케스 난민들과 함께 이 지역에서
다시 정착하기 시작 했으며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때까지 작은 마으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세계1차대전후에 트란스 요르단이 팔레스타인 위임 통치령 일부가 되었다.
성서 속의 모세가 가나안으로 유대민족을 이끌고 이동 하던중 당시 에돔왕국의 수도였던
페트라를 통과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 곳이다. 모세 계곡은 연 노란색
으로 변해가는 빨간색과 보라색의 암맥을 가진 신암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때문에
페트라는 " 빨간 장미빛 도시" 라고 부른다.
페트라는 그리스어로 바위라는 뜻인데 아마도 성경에 나오는 셀라가 이렇게 바뀐것 같다.
5) 느보산
느보산은 비스가산 혹은 시야가 산이라고 하며 요르단 수도 암만에서 남서쪽으로 약 35km
요르단 왕국 마다바에서 북서쪽10km, 예리고 맞은편 요르단 하구 동쪽 약20km, 떨어진
아바람산맥에 있는 산이다.
구약성서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이집트를 탈출 한지 40년만에 느보산에 당도
하여 가나안을 바라본 다음 거기서 120세에 죽었다.(민수 27,12-14, 신명32, 48-52)
이 산은 3개의 중요한 봉우리로 이루어졌는데 가장 높은 봉우리 니바(835m), 두번째
무카야트(790m), 세번째 시야가(710m) 이다.
모세가 가나안 땅을 보았다는 비스카 봉우리는 이 산의 세번째 봉우리인 시야카라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 실제로 시야가는 가나안땅을 바라보기에 가장 전망이 좋은 곳이다.
사해와 그 서북면에 위치한 초기 예수님 시대이 유대교 수도원 유적지 쿰란동굴, 오아시스
도시 예리코와 요르단과 예루살렘사이의 유대사막 그리고 예루살렘의 동부구릉에 있는
올리브산 꼭대기 등을 환히 바라볼수 있는 곳이 바로 시야가 봉우리 이다.
예루살렘에 있는 프란치스코 성소 연구소는 1933-1976년에 걸쳐 시야가를 발굴, 많은
건축물을 발굴 해냈다.
모세의 죽음을 기념하여 4세기에 세운 소성당과 제의방, 세레당, 장레당 등을 두루 갖춘
대성당이 발굴 되엇다. 이 대성당은 5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제의방 에서는 시골풍경과
사냥하는 모습을 그린 모자이크가 발굴 되었다.
이 모자이크는 531년에 제작 되었다는 기록이 함께 발견되었다. 한편 구약성서에 따르면
모세가 느보산에서 가나안을 바라보기만 하고 들어가지 못한 이유에 대해 두가지 전승이
기록 되어 있다.
그 하나가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 반도에서 야훼께 반역죄 때문 이라고 한다. (신명 1, 37
4-2) 또 다른 하나는 모세가 시나이 반도 신 광야 키데스에서 하느님의 명을 어긴죄
때문에 가나안 땅을 밟을수 없었다고 한다.
모세가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지시 받은 산이다.(신명 3, 27)
즉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지팡이를 가지고 백성을 불러 모은후 바위를 향해 물을 내리고
명령하라고 했는데 모세는 이를 따르지 않고 지팡이로 바위를 두번 첬다고 한다.
(민수20, 1-13) 이 불충한 모세는 느보산에서 120세에 죽었다.(민수 27, 12-14, 신명
32, 48-50), 느보산 북동쪽 울창한 작은 계곡인 오늘날의 오윤무사(모세의 샘)와 오랫
동안 연관을 맺은 곳인 "벳브올 근처 골짜기"에 머물렀다. 느보산의 또다른 이스 비스가
(아랍어 스야가) 이다.
그 후 모세가 모압평야에서 느보산으로 올라가 예리코 맞은편에 있는 비스가의 산
꼭대기에 오르자 (신명 34,1) 여호수아는 모세로 부터 후계자로 지정 되어 백성을
이끌고 요르단강을 건너 모세의 사명을 완수 하고자 한다. 도하지점은 예리코 맞은편
베다바라 또는 베이트 아바라 라는 나루로 확인 되었다. 또 모세를 거역 했던 이스라엘의
범죄로 인하여 불뱀에 물려 죽은 사건의 상징 등이다.(민수21, 6-10)
6) 마다바
암만에서 30km 지점에 위치해 있는 도시로서 해발 700-800m 고원지대에 있다.
이 곳은 4000년전 부터 존재하던 "왕의 대로"(고대 국제 무역 통상로)상에 위치한
곳이다.
서기106년 로마가 이지역을 정복한 후 그리스도교가 전파 되었고, 로마에 의해 탄압을
받으면서 많은 그리스도 신자들이 순교하게 된다. 서기313년 그리스도교가 공인
되면서 서기 7세기 까지 많은 교회가 세워졌으며 서기 5세기 부터는 이곳에 주교가
임명되어 주재하게 된다. 그리스도교 도시로 번성 되었던 이 곳은 7세기 중반 현재의
요르단, 팔레스타인, 시리아까지 영향을 미쳤던 대규모의 지진으로 인하여 도시가
파괴되어 1000년이상 폐허화된 곳으로 남아 있다가 1800년 말 마다바에서 남쪽
80km지점에 위치한 케락 이라는 도시에서 2000여명의 그리스도교들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도시가 재건되는 계기를 맞는다. 당시 아랍 전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오스만 터키는 이주민 들에게 교회는 서기 8세기경 까지는 이 도시에 많이 있던
교회터를 찾아서 교회를 그 위에 짖도록 함으로써 비잔틴시대의 교회들이 발굴 되게
되는데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 1896년경에 발굴한 성 조지 교회이다.
이 교회의 바닥에서는 550년경에 만들어진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모자이크 지도
가 발견 되었는데 이 지도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성경 모자이크 지도로 유명하다.
이 지도에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중 근동지역의 성지 와 주요도시를 200여만개 이상
의 색상의 돌을 이용하여 16m*6m 짜리지도를 제작하였는데 일부가 훼손되어 현재는
삼분의 일 정도만 남아 있다.
지도의 가장 중심적인 예루살렘이 그대로 남아있고 사해, 요르단강, 예수님의 세레터,
아르논강, 세렛강, 시나이산, 나일강 등이 선명하게 남아 있어 성경 고고학적으로 매우
훌융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