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29일 사) 한국편지가족경인지회에서는
안산시상록구에 위치한 "최용신문학관"으로 가을문학기행을 떠났다.
작은 수 이지만 알차고 보람있는 여행이었다
여기에 글은 인터넷에서 발췌하였습니다
최용신(崔容信)
농촌계몽운동으로 일생을 헌신한 여성 독립운동가, 교육가
최용신은 1909년 함경남도 덕원에서 부친 최창희(崔昌熙)와 모친 김씨 사이에서 2남 3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조부는 사립학교를 세워 교육사업을 하였고, 부친은 1927년 신간회 덕원지회 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최용신의 기독교 신앙, 교육가 정신, 민족 사상은 가정에서부터 자연스럽게 길러졌다.
최용신은 1928년 함경남도 원산의 루씨여고보를 졸업하고 이어 협성여자신학교에 재학하면서 농촌운동에 대한 사명을 갖게 되었다. 1929년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 총회 때 협성학생기독교청년회의 대표로서의 참여는 YWCA 농촌계몽사업 실천에 계기가 되었다.
1929년에는 황해도 수안과 강원도 포항 지역에 파견되어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1931년 10월 YWCA 농촌지도사 자격으로 경기도 수원군 반월면 사리 샘골(천곡 泉谷)에 파견되었다. 최용신은 예배당을 빌려 한글 · 산술 · 재봉 · 수예 · 가사 · 노래 · 성경 등의 학습을 시작하였다. 헌신적 노력으로 강습소를 찾아오는 학생 수가 점차 늘어났고, 1932년에 새로 샘골 강습소를 짓기 위해 건축발기회를 조직하였다. 1933년 1월 15일에는 마을 사람들과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완성된 강습소의 낙성식이 이루어졌다.
최용신은 1934년 체계적인 농촌교육을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으나, 지병인 각기병이 악화되어 6개월 만에 샘골로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일제 수탈 강화와 YWCA의 보조금 중단으로 학원의 운영이 어려워지자 최용신은 “조선의 부흥은 농촌에 있고, 민족의 발전은 농민에 있다"라는 호소문을 기고하는 등 샘골 강습소 운영의 정상화에 노력을 다 하였다. 강습소 운영이 다시 이루어질 무렵 과로와 지병이 악화되어 결국 26세의 나이, 짧은 생애를 마감하게 된다.
‘강습소를 계속 운영해 달라’는 유언에 따라 지역민과 교회, 자원봉사 교사들에 의해 최용신의 뜻이 이어졌다. 해방 이후에는 최용신의 약혼자 김학준에 의해 샘골 고등농민학원이 문을 열어 농촌청년을 길러내기도 하였다.
최용신의 삶과 정신은 심훈의 소설 『상록수』(1935)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상록수정신은 최용신의 정신을 상징하였으며, 또한 일제강점기 농촌계몽운동을 하는 수많은 청년들의 모범 사례가 되기도 하였다. 1995년에는 최용신의 활동이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그리고 2005년 1월에는 국가보훈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최용신(崔容信)은 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 총회 때 협성학생기독교청년회 대표로 참가하여 본격적으로 YWCA의 농촌계몽 사업에 참가했다. 1929년부터는 황해도 수안과 경북 포항 등지에서 봉사 활동을 하였다. 1931년 10월 YWCA 농촌지도원으로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천곡(샘골)에 파견된 최용신은 예배당을 빌려 강습소를 개설하고 아동과 청년,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야학을 통한 문맹퇴치에 힘을 기울였다. 생활 개선과 농가 부업 장려를 위한 부녀회와 청년회를 조직하여 주민들 상호간에 신뢰감을 조성하는 데도 앞장섰다.
일본 경찰의 감시와 탄압을 받는 등 어려움은 많았지만 굳은 노력으로 1932년 5월 강습소는 정식인가를 받았으며, 천곡학원(샘골학원) 건축발기회를 조직하고 유지들 및 YWCA의 보조로 1933년 1월 낙성식을 거행했다. 보다 장기적이고 실천적인 농촌계몽 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1934년 새로운 지식과 학문을 충족시키고자 일본에 건너가 3월 고베여자신학교 사회사업학과에 입학하여 뒤늦게 향학열을 불태웠으나 각기병에 걸려 학업을 중단했다. 9월 귀국과 동시에 YMCA 보조금 중단으로 운영난에 빠진 천곡학원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였다.
최용신 선생은 1909년 8월12일 함경남도 덕원의 두남리에서 최창희의 2남 3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로 12대조가 원산으로 옮겨간 이래 동해 영흥만에 자리잡은 원산 인근의 덕원에 정착했다. 일찍이 기독교가 전래되고 근대문물이 들어온 이곳에서 최 선생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설립한 사립학교에 입학하고 마을교회에도 다녔다.
선생이 본격적으로 농촌계몽활동을 하기로 한 것은 1928년 원산의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협성여자신학교에 재학하면서부터다. 선생은 1929년부터 황해도 수안과 경북 포항 등지에서 봉사활동을 하였는데, 현지 활동을 통해 많은 갈등과 자책감을 느낀 선생은 일제하의 우리 농촌의 현실을 깨닫고 계몽운동을 위한 큰 뜻을 품고 학업마저 중단했다.
1931년 10월 YWCA 농촌지도원으로 화성군 반월면 천곡리(샘골)에 파견된 선생은 당시 일대에서 기독교가 가장 먼저 전래된 이 곳에 예배당을 빌려 강습소(천곡학원)를 개설하고 어린이와 청년,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밤에 공부를 가르치는 한편, 더 좋은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부녀회와 청년회도 조직해 지역발전을 위한 활동도 펼쳐나갔다.
처음에 주민들은 선생을 이해하지 못해 미움과 질투를 하였고, 일본경찰은 끊임없이 감시하며 괴롭혔다. 그러나 선생의 노력으로 1932년 5월 강습소는 정식으로 인정을 받았고, 주위의 도움으로 1933년 1월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이즈음 선생은 보다 장기적이고 실천적인 농촌계몽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1934년 새로운 지식과 학문을 배우고자 일본에 건너가 3월 고베여자신학교 사회사업학과에 입학해 뒤늦게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갑자기 각기병에 걸려 공부를 중단했다. 같은 해 9월 귀국과 동시에 다시 샘골로 돌아온 선생은 1934년부터 YMCA보조금 중단으로 운영난에 빠진 천곡학원을 살리기 위해 여러가지 노력을 기울이던 중 1935년 1월23일 과로로 쓰러진 선생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