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葆光의 수요 시 산책 55)
검은 밤 흰 해변
한 장씩
한 장씩
바다가 밀어내는 백지가
모래톱에 쌓인다
당신이 나 때문에 많이 괴로웠으면 좋겠어
내가 보낸 백지 받았지?
나는 생애를 바쳐 당신을 고민 중이야
파도에게는 모래톱이 절벽일 거야
흰 치마를 입고 저리 뛰어내리고 있는 저 여자를 보라고!
- 손음, 시집 『누가 밤의 머릿결을 빗질하고 있나』, 걷는사람, 2021
**
“달도 별도 없는 밤일지라도/어둠만큼 진한 밝음은 있어//보이지 않아도 길은/길인 채 있고//보이지 않아도 길을/찾을 수 있고//보이지 않아도 길을/걸을 수 있어//달도 별도 없는 밤일지라도/어둠만큼 진한 밝음은 살아”(졸시 「길1」 부분) 바다 가까운 동네에 사시는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사실 밤이라고 깜깜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이런 제가 말 그대로의 ‘깜깜한 밤’을 제대로 경험한 건 이십 대 중반쯤 예천에 갔을 때였습니다. “달도 별도 없는 밤”중에 버스터미널에 내렸는데 정말 어디가 앞이고 뒤인지 전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깜깜했습니다. 밤이 그렇게 깜깜하다는 걸, 아 이런 게 밤이라는 걸, 시간이 지나면서 그 깜깜함도 바로 눈앞의 풍경은 대충이라도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벗겨지기는 했지만, 여하튼 저는 그날 처음 알았습니다. 오늘의 시는 “검은 밤 흰 해변”입니다. “검은 밤 흰 해변”이라니, 이건 서치라이트 불빛이 비쳐서가 아니라 사실입니다. 밤은 검어도 파도 때문이겠지만 해변은 흽니다. 그래도 “검은 밤 흰 해변”이라니, “당신이 나 때문에 많이 괴로웠으면 좋겠”다고, “파도에게는 모래톱이 절벽일 거”라면서 “흰 치마를 입고 저리 뛰어내리고 있는 저 여자를 보라고!” 하면서도 굳이 “검은 밤 흰 해변”이라니! 어떠신가요. 당신은 “검은 밤 흰 해변”을 마주하고 있는 오늘의 화자가 남은 “생애를” 다 “바쳐” 이별을 고한 어떤 “당신을 고민”하리라 보이시는가요. 저는 벌써 툭툭 털고 일어나는 화자가 보입니다. “보이지 않아도 길을 찾”고 “길을 걸을 수 있”던 저처럼요. 밤이 검어도 흰 해변처럼요. ‘葆光의 수요 시 산책’이라는 이름으로 시를 읽어드린 지 일 년이 지났네요. 외국 시인의 경우는 아닐지라도 그동안 국내 시인은 대개 많이 알려지고 시력이 꽤 된 시인들의 시를 함께 읽었고, 아니라면 아주 가끔은 저와 친분이 있는 시인들의 시를 함께 읽었습니다만, 오늘 함께 읽은 시의 손음 시인은 1997년이라는 등단 연도로 보아서는 중견 시인임에도 저는 최근에야 알게 된 시인입니다. 의아해하실 수도 있겠지만 해방 전에는 수백 명에 불과했고 1980년대까지만 해도 수천 명에 불과했던 시인들의 숫자가 지금은 정확한 통계를 내릴 수는 없어도 많게는 십만 명쯤 되리라고 추산하고도 있으니 시인이라고 해서 시인들을 다 알 수 없다는 것은 이해되시리라 봅니다. 이건 저 역시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이런 지경에 최근에라도 제가 손음 시인을 이름이라도 알게 된 건 3주 전에 함께 읽은 이정모 시인 때문입니다. 이정모 시인의 마지막 시집은 시인 본인의 이름이 아니라 손음 시인의 이름으로 제게 전달되었는데 이정모 시인을 대신하여 시집을 마무리하는 등 뒷일을 도맡아 한 건 손음 시인이었다는 걸 부음을 실은 신문의 뉴스를 보고서야 알았습니다. 결국은 이정모 시인이 떠나면서 손음 시인을 제게 연결해 준 셈이 되었습니다. 하니 오늘의 시 산책은 이정모 시인을 대신해서 제게 시집을 전해준 손음 시인의 수고에 대한 감사 인사이기도 합니다. 손음 시인님, 고맙습니다. (20240717)
첫댓글 십만 명쯤 되는 시인들 중의 손음, 이정모 시인이시네요! 오늘도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