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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장
"용암이 아니다. 지심열화천(地心熱火川)이다."
운학자가 놀라고 있는 백무천을 향해서 하는 소리였다. 그런데 일행에 있어야 할 목령자가 없었다. 거미들의 공격에 의해서 목령자도 희생이 된 모양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는 목령자의 죽음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거대한 붉은 강이 나타난 것이다.
그것을 두고 운학자가 지심열화천이라 했다.
지심열화천(地心熱火川).
지하 깊숙한 곳에 흐르고 있는 용암의 열기에 의해서 상층부에 있던 바위 등이 녹아서 형성된 지하의 강이다.
그러나 그 열기는 살아있는 생물체가 견딜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오죽 했으면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열화편복 같은 그런 미개한 생물이 도검불침의 몸이 되었겠는가.
지심열화천 내부에 숨은 잠열에 비하면 밖으로 드러나는 열기는 열기도 아니라고 한다.
자연만이 할 수 있는 엄청난 창조물이 바로 지심열화천이다.
"몸은 괜찮으냐?"
열화편복에 물린 상처가 그대로 있는데도 백무천의 몸에는 중독현상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시원한 느낌입니다."
백무천도 그것이 가장 이상했다. 수중 동굴에서도 느낀 것이었지만 무엇인지는 몰라도 이곳에 온 이후로 자신의 몸이 더 편해지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열화편복에 물렸을 때도 그렇고 지금 이곳의 엄청난 열기도 자신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의 무공이 높아서 그런 것인가 하고 생각도 해보았으나 그것도 아닌 것 같고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알기로는 이곳 지심열화천이 존재하는 곳은 오직 한곳밖에 없다. 바로 화령극지(火靈極地)이다."
화령극지라 했다.
저 전설이 말하는 반신육천역, 인간이 들게 되면 신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는 그 전설의 성지인 화령극지가 이곳 어딘가에 있다는 말이 아닌가.
그러나 말하는 운학자나 듣고 있는 백무천 둘 다 반신육천역의 행운을 거머쥔 자의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왜 이런 곳이 하는 곤혹스러운 표정들이었다.
비록 이곳에 전설의 반신육천역이 있다고는 하지만 열양공(熱陽功)을 익히지 않은 자신들에게는 무용지물, 몸만 힘들게 하는 재해일 뿐이기 때문이었다.
"이곳을 건너는 것은 문제가 아닌데요, 과연 비급이 있을까요?"
가장 우려되는 부분이다. 이곳이 전설이 말하는 화령극지라면 천검 담사월이 무덤자리로 선택했다 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곳이다. 사질들의 희생은 어디에서 보상받는단 말인가.
"무천아."
"예? 아…! 아! 예! 사-형!"
"정말 오랜만에 불러보는구나."
자신의 사제가 된 후 처음 불러보는 본명이다. 아홉 살의 백무천을 처음 가르치고 키웠던 사람이 운학자였다.
백무천이 열 살 되던 해에 사제가 되었다. 다른 동문들이 어린 사제에게 막 대하지 못하도록 꼬박꼬박 사제라 불렀고, 백무천에게는 할아버지에서 사형이라 호칭하도록 했었다.
천무맹주의 제자로 발탁되어서는 더욱더 예의를 지키기 시작했고, 사사로운 감정을 배제하며 살아왔던 세월이었다.
"네가 우리 공동파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다.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는 자들이 정의를 위한답시고 나서는 것이 우습기도 하겠지."
"사형!"
백무천의 얼굴이 당혹스럽게 변했다. 단 한번도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던 운학자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계속 듣거라."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백무천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운학자가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산다는 게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바로 선택하는 것이다."
언제나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해야 하는 존재인 인간.
자신의 의지로써 선택을 하거나 또는 선택을 강요당하면서 살아간다. 그 선택이 옳았는지 잘못된 것이었는지는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
다만 그 선택의 순간에는 옳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 길을 가는 것이다.
그런데 중간 정도 와보니 그 길이 잘못된 길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길을 버리고 다른 길을 찾아야 하는데도 대개의 인간은 그렇게 하지를 못한다. 오히려 그 잘못된 길을 바로잡기 위해서 또 나머지 길을 가게 되는 것이다.
그럼 길을 다 왔는데도 잘못되었다고 느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때는 더더욱 자신이 걸어왔던 길을 부정하지 못한다. 그 길을 부정하게 되면 인생 자체의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인생이란 처음 선택했던 그 길이 제대로 된 선택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앞으로 너도 많은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신중하게 생각하고 한번 선택했으면 돌아보지 말아라. 너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더욱 매진하며 살아야 할 게야, 알겠느냐?"
"예, 사형."
운학자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왜 모르겠는가. 칠십 평생의 인생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하고 많은 문파 중에서 공동파란 문파를 선택했고 역부족인지 알면서도 정의수호라는 그 한마디에 인생을 걸었던 사람이 아닌가.
자꾸만 희미해져 가는 공동파의 위상을 세우기 위해서 누구보다 노력한 사람이었고, 공동의 제자인 백무천이 무시당하는 것을 참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다시 한번 할아버지라 불러줄 수 있겠느냐?"
"예? 예…! 할-아버지."
"허허! 그래도 내 인생은 잘못 산 것만은 아니야. 무천이 네가 있으니 말이다. 자 이제 가자."
운학자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백무천이 어떤 선택을 해도 괜찮다. 그는 공동파의 제자 이전에 자신의 손자인 것이다. 그 손자가 잘되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그들의 눈앞에 지심열화천이 들어왔다. 폭이 거의 칠십 장 정도 되어 보였다.
약 이십 장 정도까지는 붉은 액체밖에 없고 거기서부터 건너편까지는 다리 모양으로 바위들이 연결되어 용암교를 이루고 있었다.
언제까지 가야할지 모르지만 이미 시작된 선택이었고 끝까지 가야만 한다.
몸을 날린 두 사람이 용암교의 가장자리에 내려서자 엄청난 열기가 두 사람을 감쌌다.
또다시 뒷머리가 쭈뼛한 느낌. 지심열화천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조금 전 열화편복과 이상한 거미떼를 만났을 때와 같은 불안감이 전신을 엄습하고 있었다.
"할아버지, 제가 먼저 가보겠습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온몸을 긴장시키며 백무천이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저 끝까지는 오십여 장, 삼십 장 정도는 걸어가야 한번에 건널 수 있다.
한번에 움직일 수 있는 거리가 이십 장 정도이고 다리 상태가 어떨지 알 수가 없으니 확인을 해 보아야 한다.
아무래도 불안했던지 십여 장 거리를 두고 운학자가 뒤따르고 있었다. 거의 삼십 장 정도를 전진했을까. 이제는 경공을 이용해서 날아가면 건너편에 도착할 수 있는 지점에 도착했다.
"할아버지, 빨리 오십시오. 아무것도 없어요."
운학자를 향해 돌아서서 두 팔을 약간 벌리며 환하게 웃으며 말하는 그 순간.
크아앙!
엄청난 괴성과 함께 지심열화천 속으로부터 붉은 색 괴수 한 마리가 튀어나와 뒤쪽의 다리를 부숨과 동시에 백무천을 덮쳐 가는 것이었다.
"헉! 지극마룡(地極魔龍)?"
운학자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용암 속에서 살아간다는 지극마룡이 백무천을 덮치고 있는 것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미 용암교는 파괴되어 자신이 서 있는 곳까지 서서히 부서지고 있었다.
그때 백무천은 완전한 무방비 상태였다.
운학자를 향해서 뒤돌아선 채 양팔을 벌리고 있는 상태에서 순식간에 부서진 다리를 박차고 위로 솟아올랐으나 더 이상 움직일 곳이 없었다.
아무리 무공이 고강하다 해도 허공에 떠 있는 상태에서 위치를 바꾸어 이십 장 이상을 날아갈 수는 없다.
어떤 지지대가 없으면 지심열화천으로 그대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 순간 운학자의 몸이 허공을 날았다. 그리고 떨어지고 있는 백무천을 향해서 전력을 다한 일장을 날렸다.
백무천과 운학자의 시선이 부딪쳤다.
'살아나야 한다, 무천아.'
전력을 다한 일장을 날렸고 계속해서 내공을 밀어내고 있기에 입으로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눈으로는 계속해서 백무천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자신이 날린 장을 지지대로 삼아서 저쪽으로 건너가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할아버지!'
백무천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는데, 오로지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 산 것밖에 없는데 그런 자신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고 있었다.
그리고 운학자의 눈이 또다시 백무천에게 말하고 있었다.
괴수의 먹이가 되지 않게 해달라고. 너의 손에 죽고 싶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럴 수 없다는 듯 백무천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야 다시 할아버지를 찾았는데, 지금에 와서야 할아버지라 불렀는데, 할아버지를 자신의 손으로….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해야 한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해야 한다. 어서… 어서….'
"할아버지-!"
울부짖으며 운학자를 부른 백무천의 손에서 두 번의 금광이 뻗어나갔다.
처음 금광은 운학자가 쏘아보낸 장력을 향해서, 두 번째 금광은 운학자의 몸을 향해서 무서운 속도로 날아갔다.
'고맙다, 무천아. 너는 나의 손자야, 앞으로도 영원히….'
금황신공에 격중된 운학자의 몸이 그대로 가루로 부서지며 지심열화천 위로 흩어졌다.
'할아버… 지.'
자신의 유일한 친인이었고, 사형이면서 또한 할아버지였던 운학자, 마지막에 백무천에게 보낸 것은 만족스러운 미소였다.
'할아버지, 당신의 말씀대로 후회 없이 살겠습니다. 당신을 보낸 이 손으로 세상을 개척해 보이겠습니다.'
넋 놓고 지심열화천을 바라보고 있던 백무천이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돌아섰다.
뒤돌아보지 말라고 했다.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해 보이라고 했다. 그 길을 갈 것이다. 백무천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었다.
지심열화천을 끝으로 더 이상의 위험은 없었다. 오직 직선의 동굴만이 있었다.
어느 정도 걸었을까, 저 끝에서 빛이 새어들어 오기 시작했다. 지금 이곳은 동굴이었고 빛이 나올 리가 없는 곳이다.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불이 아니라면 비도 속의 마지막 보물이 있는 장소밖에 없다.
백무천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었다. 운학자와 두 장로, 그들에 대한 생각은 가슴속에 묻어야 한다.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생각하지도 말아야 한다.
마침내 백무천이 도착한 곳, 이십 장 정도 크기의 공간이었다.
천장에 두 개의 야명주가 환한 빛을 발하며 주위를 밝히고, 그 아래 바위로 만들어진 정방형의 단(段)과 그 단 위에 조그마한 철함이 놓여있었다.
길고 긴 대장정의 끝이었다. 친할아버지 같았던 운학자를 잃었고 형님 같았던 두 장로를 잃었다.
그러나 마침내 고금오천무의 하나인 천검무극류, 수많은 무림인들의 생명을 앗아갔던 그 괴물이 바로 앞에 있었다. 또 다른 비상을 위한 매개체였다.
철함을 향해서 몸을 날리려던 백무천의 몸이 멈칫하며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자신이 나왔던 바로 옆의 동굴에서 인기척이 느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등장하는 두 사람. 몰골이 엉망이 되어있는 사진악과 그의 심복인 육소천이었다.
"오랜만이군, 백무천. 고생이 심했나 보군."
언제나 백무천의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던 운학자가 보이지 않는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자신도 이곳까지 오면서 천마군 이십여 명을 다 잃었다.
"자네도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군…."
저들이 어떻게 이곳까지 왔는지 이상할 것도 없다.
무수히 많은 무림인들이 그를 따랐고 그 중에서 이곳까지 살아서 들어온 이들도 상당히 많은 것이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무표정한 표정으로 백무천이 사진악의 말을 받았다.
"먼저들 와 계셨군요. 무량수불."
화산오검수와 무당오자가 그들의 반대편 동굴에서 나오고 있었다. 원래 십 명의 인물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 그들은 전부 네 명밖에 없었다.
무당파 세 명, 화산파 세 명 도합 여섯 명이 희생된 것이다.
그들 뒤를 이어 점창과 청성, 종남 삼 파의 수뇌들과 당가삼룡 세 사람이 동시에 나타났고,
연이어서 나찰검 마효와 흑사파의 염후 표령지 등 십여 명의 인물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이곳에 들어서기 전에 백 명 이상이었던 인물들이 중간에 모두 희생당하고 여기에는 이십 명 정도만 도착한 것이다.
그러나 살아남은 자들의 표정에서는 그 어떤 미안함이나 죄스러움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모두가 석실의 중앙에 있는 철함만 탐욕스런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들을 따르던 무림인들이 도착했다. 그 무림인들의 선두에는 무영비추 수구해를 쫓던 만리추영(萬里追影) 도선금(途先錦)이 있었다.
추적과 경공의 달인이라는 그가 무림인들을 이끌고 이곳까지 온 것이다. 백무천 일행이 무림인들을 따돌리지 못했던 이유였다.
"배를 바꾸어 타기로 하셨소?"
백무천이 철함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며 점창 등 삼 파 일행을 노려보면서 입을 열었다.
아무리 무림의 생리가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된다고 하지만 이곳에서 나가면 다시 자신의 편으로 돌아설 자들마저 욕심을 챙기려 하고 있는 것이다.
"천검무극류와 배와는 별개의 것으로 알고 있소이다. 이것은 검을 다루는 무인으로서 개인적인 욕심이외다, 백 공자."
고금오천무는 포기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더구나 오면서 당가 삼형제와 모종의 밀약이 있었는지 그들 육 명이 앞으로 동시에 나서며 입을 열었다.
백도가 이렇게 분열되고 있는 반면에 사진악과 나찰검 그리고 염후는 한 곳으로 모여서 중앙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우리가 백 공자를 돕겠소."
뜻밖에도 백무천 옆으로 다가서고 있는 이들은 무당과 화산의 남은 사람들이었다.
이십 장 정도의 공간에서 백무천, 사진악, 점창 삼 파와 사천당문, 그리고 여타 무림인 등 네 개 파로 나뉘어 팽팽한 긴장감이 형성되고 있었다.
보물은 하나,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원하는 자는 수십 명, 모두 목숨을 걸고 이곳까지 왔고 오는 도중에 수없는 동료들이 죽어갔다. 결코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 아니다.
"고맙습니다, 네 분."
화산과 무당파의 사 인에게 가볍게 목례를 취해 보인 백무천이 검을 뽑아들고 무림인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할아버지, 선택하라 하셨지요? 저는 이미 선택을 했습니다.
군림천하(君臨天下)를 말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이용하겠습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상대를 향해서 검을 뿌렸다. 이미 할아버지 같았던 운학자마저 저승으로 보낸 손이 아닌가. 하물며 적들이야, 그의 손에는 추호도 인정이 없었다.
"으-악!"
좁은 석실 내부에 때 아닌 혈풍이 몰아쳤다. 최후에 남은 자만이 보물을 가질 수 있다.
"패천(覇天) 제 일공 파(破)!"
사진악도 이에 지지 않았다. 군웅들 무리 속으로 뛰어들며 자신의 독문무공인 패천마공을 사방으로 난사했다. 무림인들의 살이 터져나가고 피가 난무하는 결전장으로 변했다.
적도 아군도 없었다. 나를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적인 치열한 강자존의 세계만 남았다.
점창의 사일검법이 검기를 뿌리고, 화산의 매화검법이, 무당의 태극검법이, 나찰검 마효의 검기가 사방으로 난무하였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중앙에 있는 철함으로는 누구도 접근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누구라도 중앙의 철함으로 접근하는 자가 있으면 싸우던 모든 무림인들의 집중공격을 받고 가장 먼저 이승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철함을 가운데 두고 그 주위에서 정신없이 싸우고 있는 것이다.
그들 중 발군의 위력을 보이고 있는 사람은 바로 백무천이었다. 두 사람의 장로와 운학자를 잃은 것에 대한 분풀이인지 사방을 향해서 무섭게 검강을 뿌려대고 있었다.
백무천의 엄청난 기세에 놀란 무림인들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목숨을 걸고 보물을 취하고자 했고, 실제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이곳으로 왔지만, 정작 목이 잘릴 위험에 처하게 되자 그동안의 투지가 사라졌는지 뒤로 물러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수들의 싸움에 있어서 이십 장이란 공간은 너무나 좁았다.
백무천이 바로 앞에 등을 보이고 있는 무림인을 향해서 비쾌하게 검을 찔러가고 있었다.
무림인의 수치, 불명예, 비겁 등은 이미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이곳에서 살아남은 한 명만이 보물을 차지할 뿐이다.
챙!
검과 권이 부딪치는 소리였는데 쇳소리가 났다.
백무천의 검이 염후 표령지를 찔러가고 있었고 이것을 발견한 사진악의 권이 그 검을 막은 것이다.
"많이 비겁해졌군, 백무천."
"지금 이 상황에서 앞뒤를 가릴 처지가 아닌 것 같은데?"
"한번은 자네와 겨루어 보고 싶었지."
"나도 누가 과연 무림의 제일룡인가 알고 싶었다, 사진악."
마주한 두 사람의 몸에서 아지랑이 같은 기세가 흘러나와 사방으로 퍼져 나갔고, 서로를 향해서 동시에 뛰어들었다.
"금황신공(金黃神功)!"
"패천(覇天) 제 삼공, 무(無)!"
서로를 향해 빛살 같은 속도로 쏘아져 가던 여덟 마리의 금룡과 새파란 강기가 그들의 중앙에서 거칠게 부딪쳤다.
콰-앙!
엄청난 폭음과 함께 주변에 있던 무림인들이 피를 토하며 나가떨어졌다.
바로 그 순간 지금껏 한쪽에 숨어서 무림인들이 싸우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만리추영 도선금이 중앙을 향해서 무엇인가를 힘차게 던졌다.
퍽!
무엇인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사방이 자욱한 연막 속에 휩싸이며 모든 무림인들의 시야가 차단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경공만 믿었던 도선금은 백무천과 사진악의 무위를 너무 경시했다.
서로 싸우고 있던 두 사람이 동시에 철함 쪽을 향해 손을 휘둘렀던 것이다.
"커억!"
연막 속에서 한 줄기 비명 소리가 터져나왔다.
주변에 있던 무림인들이 재빨리 연막을 걷어내자 철함이 있던 곳의 전경이 눈앞에 나타났다.
이미 가슴과 단전 부위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어서 회생이 불가능해 보이는 도선금이 온몸에 피를 흘리며 철함을 꼭 쥐고 있었다.
가슴과 단전이 파괴되는 고통 속에서도 철함을 놓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꿈틀!
죽은 것 같았던 도선금의 몸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드-디-어 천-검-무-극-류를 가-졌-다. 고-금-오-천-무를 가졌단 말이다."
만리추영 도선금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어렸다. 비록 죽어가고 있지만 자신의 손에 보물을 쥐어 보았다는 것에 대한 만족감이 가득했다.
피 묻은 그의 손이 천천히 철함의 뚜껑을 향해서 다가가고 있었으나 누구 하나 만류하지 않았다.
죽어가는 자에 대한 마지막 예의라 생각했는지 아니면 자신들도 내용물이 궁금했는지는 몰라도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도선금의 손만 바라보고 있었다.
딸깍!
이윽고 철함의 뚜껑이 열리고 도선금의 눈이 힘에 겨운 듯 천천히 철함의 속으로 향했다.
"크! 핫핫핫!"
콰앙!
도선금의 허탈한 웃음소리와 동시에 엄청난 폭발소리가 들리며 철함이 있던 곳이 사라지며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었다.
천장이 무너지고 바닥이 갈라지고 그 사이로 지심열화천의 붉은 액체가 스며 들어오기 시작했다.
천검무극류, 오백 년 전 천하제일인이었던 천검 담사월의 독문무공,
그것을 익히고 천하제일인이 되고자 했던 수많은 무림인들의 피를 마신 천검무극류는 하늘을 비상하는 보물이 아니라 죽음을 가져오는 함정이었던 것이다.
"헉! 헉!"
아래쪽을 향해서 모든 힘을 다하여 달리고 있는 인물이 있었다. 산발한 머리, 여기저기 찢어진 옷과 낭패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 바로 정천무룡 백무천이었다.
"빌어먹을…."
폭발이 있던 순간에 호신강기를 펼쳐서 몸을 보호했지만 뒤쪽으로 날아가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운이 좋았는지 무너진 벽 사이로 떨어졌고, 그곳은 또 다른 동굴 속이었다.
어둠을 뚫고 얼마나 전진하였을까. 동굴이 계속해서 아래쪽으로만 이어지고 도무지 위쪽으로 향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되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리는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고 말았다.
지심열화천의 붉은 액체가 동굴을 타고 자신을 향해서 흘러오고 있었던 것이다.
하는 수 없이 몸을 날려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처음엔 경공을 이용해서 달렸으나 워낙 구불구불한 동굴이었기에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고 폭발에 의한 내상이 너무 컸다.
끊임없이 돌고 돌았으나 붉은 액체 또한 계속해서 자신을 쫓아오고 있었다.
거의 탈진할 지경이 되었을까. 저 멀리 동굴의 끝이 보이는지 붉은 빛이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비록 지하지만 당장은 죽지 않을 것이다. 붉은 빛이 새어 들어오는 동굴의 끝을 향해서 정신없이 달렸다.
"아…!"
절망에 찬 한숨소리와 함께 그 자리에 힘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백무천이 초점 없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곳, 지심열화천의 거대한 연못이었다. 이곳이 지심열화천의 발원지인 모양이었다.
거대한 연못이 소용돌이치며 돌아가고 있었다. 연못의 중심에 있는 거대한 동굴, 엄청난 속도로 돌고 있는 지심열화천이 만들어낸 소용돌이였다.
악마의 목구멍 같은 그 소용돌이가 붉은 혀를 날름거리고 자신을 노려보는 것 같았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뒤에서는 붉은 놈이 동굴을 가득 메운 채 쫓아오고 앞에는 그 놈의 동료들이 춤을 추며 백무천이라는 제물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백무천의 인생도 이곳에서 끝인가?'
더 이상 희망이 없음이다. 이제는 정리를 해야 한다. 이십삼 년의 세월. 그렇게 긴 시간도 아니었건만 무척 오래 산 것처럼 느껴졌다.
아홉 살의 어린 나이에 공동파를 선택했다.
공동파에서 거두어 준 것이 아니고 자신이 골랐던 것이다. 다 쓰러져 가는 문파였기에 그런 곳이라면 최고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고 공동파에서 최고가 되었다.
그리고 구파 일방에 단 세 자리만 주어지는 천무맹주의 제자 자리, 사문의 지원도 거의 없이 혼자만의 힘으로 노력해서 이루어냈다.
제자들 간의 암투와 견제 속에 차기 맹주 후보 일 순위까지 되었고 사랑도 쟁취했다.
모든 것이 원하는 대로 다 되었다. 정말 열심히 살았던 인생이었고 후회 없는 선택이었다.
할아버지 말대로 아무런 후회도 없다.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또다시 그 길을 걸을 것이다. 군림(君臨)의 길을.
'연매, 미안하게 되었소. 이번 일이 끝나면 좀더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 했었는데….'
아쉬움이었다. 군림을 위해서 선택한 여인이었지만 어느새 사랑하게 되어버렸다.
"으! 핫! 핫! 핫! 크! 핫! 핫! 핫!"
공허한 웃음소리와 함께 중심에 있는 소용돌이 속을 향해서 백무천이 몸을 날렸다.
죽는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 사방에서 미증유의 열기가 온몸을 옥죄고 있는데도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회전하는 붉은 액체의 힘에 의해 자신도 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 이렇게 가는 것도 괜찮겠지….'
서서히 정신을 잃어갔다.
백무천을 빨아들인 지심열화천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여전히 붉은 혀를 날름거리며 돌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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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
감사합니다.
잘 보고갑니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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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게 잘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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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즐.독.하고 있읍니다
감사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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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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