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길 - “이런 사랑도 있다!”
신애는 자살을 시도하고 정신병동까지 간 후 퇴원을 한다. 지금부터는 원작에 없는 이창동 감독의 창작 시나리오다.
언제나 그렇듯 종찬이는 신애의 퇴원을 돕는다. 신애는 회복이 된 듯 미장원에서 머리를 자르고 싶다고 했다. 여자가 머리를 자를 때는 뭔가 중대한 변화를 암시한다고 하던가? 그래서 종찬이는 미용실로 신애를 데려갔고 신애는 미용사에게 머리를 맡긴다. 그런데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고 그 살인범의 딸이 가위를 들고 나타났다. 순간 긴장은 증폭되고 마치 수류탄 안전핀이 뽑혀나가는 듯한 긴장이 흐른다.
사실 신애는 그 아이에게 복수한 적이 있다. 골목길에서 불량배 남자로부터 매를 맞을 때 서로 눈을 마주치고도 도움을 주지 않고 떠났던 적이 있다. 그래서일까? 신애는 냉정을 찾고 대화를 시작한다. 그러나 신애의 인내심은 한계를 맞이하게 되었고 미용실을 박차고 나와 또 종찬이에게 화를 퍼붓는다. 무슨 의도로 자기를 이 곳으로 데려왔냐는 것이다. 무슨 의도가 있었을까마는 신애는 원수에 대한 울분을 종찬이에게 퍼붓는 것이다. 원수하고는 싸움 한 번 못하면서 말이다. 이를 두고 ‘종로에서 빰 맞고 한강에서 분풀이 한다’고 하던가? 사람의 일이 늘 이런 식으로 나타난다. 여전히 신애는 분노에 차 있다. 그것이 솔직한 신애의 모습이다. 그러나 지금부터 신애의 변화가 시작된다.
자기를 용납하기
돌아오는 길에 길가에서 옷가게 아주머니와 만난다. 자연스럽게 머리를 자르다 말고 나왔으니 머리 모양새가 화제가 되었다. 그런데 이 아주머니가 ‘미쳤나..” 하고 말한다. 금새 그 아주머니는 실수를 알아차리고 당황하지만 신애는 곧 웃으며 “미쳤다”는 말을 수용한다. 사실 미쳤었으니까. 그런데 미친 사람에게 미쳤다는 말은 가장 극한 돌팔매일텐데 신애는 그 말을 수용한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인가? 자기의 미쳤던 과거를 웃으며 인정하는 것이다.
자기를 비우기
집으로 돌아온 신애는 스스로 거울을 앞에 두고 머리를 자른다. 무엇을 잘라내려는 것일까? 영화는 영상 예술이다. 감독은 이 한 장의 그림으로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이제 신애는 자신의 한 부분을 직접 잘라낸다. 나는 이 장면에서 예수님 의 말씀이 떠올랐다. "누구든 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마태복음 16:24/표준새번역) 이제 이 영화는 신애의 비극적인 삶이 청산되고 새 삶이 시작되고 있음을 암시해준다. 신애 스스로 가위를 들고 자신의 한 부분인 머리를 자른다.
자기를 만나기
그 때 종찬이가 대문을 열고 들어온다. 이 결정적 장면에서 지금껏 신애의 뒤를 봐 주며 따라온 종찬이는 무엇을 할 것인가? 그 궁금증은 이내 풀린다. 종찬이는 신애가 머리를 자르기 위해 앞에 두었던 거울을 들고 신애가 자신의 얼굴을 잘 볼 수 있도록 선다. 신애는 지금껏 내치기만 했던 종찬이를 순순히 받아들인다. 그리고 종찬이의 도움을 받으면서 신애는 자신의 머리를 가위로 잘라낸다. 그리고 그 잘려진 머리카락이 떨어져 마당 하수구 쪽으로 굴러가고 지저분한 마당(얼마나 지저분하고 복잡한지 사진을보라 이 것이 인간실존이다) 더러운 하수구가 클로즈업 되면서 햇볕이 비춰지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이 장면이 이 영화의 결론이다. 나는 이 장면에서 신애의 구원을 본다. 신애는 이제 이 영화의 제목처럼 비밀스러운 빛을 만나게 된 것이다.
빛을 만나기
이 영화의 포스터를 보라(사진) 하나는 신애의 울고 있는 모습 뒤로(그것은 인간 실존이다) 종찬이 그리고 곧은 길 끝에 눈부신 빛이 있다(이건 구원을 의미한다). 또다른 포스터 신애가 아들을 잃고 정신을 잃다시피 하며 소파에 누워 있을 때(역시 인간실존) 그 아래로 지나가는 빛을 볼 수 있다. 또다른 하나 역시 신애 뒤에서 비춰오는 빛을 볼 수 있다. 이렇듯이 종찬이와 빛이 항상 신애의 뒤를 따른다. 그러나 신애는 이 빛을 만난 적이 없다. 이제서야 신애는 종찬이를 마주 보며 그가 들고 선 거울 앞에서 자신을 보고 온갖 상처의 아픔을 청산하듯 스스로 잘라낸 머리와 더러운 시궁창에 빛이 비춰진다. 은총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예수님의 첫 설교가 생각난다. "때가 찼다. 하나님 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마가복음 1:15) 하늘나라는 아주 가까이 있다. 돌이키고 복음을 받아들이면 된다. 나는 이창동 감독이 연출한 이 장면과 예수님의 첫 설교가 너무 일치하는데 전율을 느꼈다.
밀양, 비밀스러운 빛이 언제나 신애를 따라왔다. 그러나 그 빛을 항상 등지고 있었던 신애였다. 이 것이 성서가 보는 인간실존이다(요한복음 1장을 보라). 이제 그 하수구에 쓸려가는 신애의 청산된 아픔에 빛이 비춰지는 것과 종찬이가 처음으로 앞에 서서 신애의 자기 모습을 비춰주는 장면은 회개와 구원의 은총을 보여준다. 이제 신애는 진정한 빛을 찾았고 자신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사랑도 있다
나는 종찬이의 역할에 대하여 침묵할 수 없다. 나는 종찬이의 모습 속에서 대학시절 ‘또스또엡스키’의
‘죄와 벌’을 읽으며 감동에 몸이 떨렸던 기억이 되살아왔다. 시베리아 수용소에 살인 죄로 수형생활을 떠나는 ‘라스 꼴리니꼬프’를 따라가 함께 생활하며 저녁 황혼 시간에 일을 마치고 ‘라스 꼴리니꼬프’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쏘냐’의 뒷모습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하고 흥분했었다. 쏘냐는 ‘라스꼴리니꼬프’가 상징하는 냉소적 이고 허무한 인간에게 구원의 빛을 비추는 통로가 되었다.
신애에게 절대 도움이 필요했던 밀양으로 오던 도로가에 종찬이가 나타나 도움을 주고 줄곧 그의 뒤를 따라왔던 사실을 우리는 안다. 전형적 인 천사의 위치다. 그러나 신애는 한 번도 그 고마움을 받아들인 적이 없다. 오히려 화풀이 대상일 뿐이었다. 그렇게 천대받고 무시당하며 미움받던 종찬이는 마침내 신애 앞에서 서서 거울을 보여주며 신애가 스스로 자신을 볼 수 있게 해 준다. 영화 포스터에 “이런 사랑도 있다”라는 문구가 있다. 사람들은 그저 남녀 간의 그런 사랑 정도로 이해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종찬이의 모습에서 그리스도의 사랑, 아니 사람들로부터 온갖 모욕을 당하며 수난의 십자가를 지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기만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본다. 이런 사랑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성서를 통해 배웠다. 그리고 그 사랑이 종찬이에게서도 드러난다.
신애처럼 하나님 앞에 살면서도 언제나 하나님과 등지고 사는 사람이 없을까?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면서도 그리스도를 내치며 자기 길로만 가는 이들이 없을까? 진리의 길과 빛을 찾기 위해 신앙에 입문했지만 여전히 빛과 길을 등진 채 자기 갈 길로 가버리는 이들이 없을까? 이제 신애는 그 고통스럽고 힘든 먼 길을 돌아와 위선을 잘라버리고 참 평안을 얻으며 참 사랑을 만난다. 신애의 구원을 축하하는 마음에 서정주의 시가 떠오른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심용섭/엘파소한인신문 2009년 1월호)
첫댓글 늘 좋은 말씀을 통하여 은혜의 시간을 가질수 있음에 감사를 드립니다...항상 응원하는 저희들이 있음을 기억하시고 타국에서의 목회생활이 기쁨으로 늘 가득하시길 소망합니다...
Shalom! Thank you for your encouragement, so I am empower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