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어서 본 ‘상윳따니까야(Saṃyutta Nikāya)’ 18강
사나마나 숫따
Sanamāna-sutta
바람소리 경(S1:15)
사왓티 니다낭
Sāvatthinidānaṃ.~~ (생략)
데와따(Devatā)
천신
1. 티떼 맛잔띠께 까레 산니시웨수 빡키수,
Thite majjhantike kale sannisivesu pakkhisu,
사나떼와 브라하란남 땀 바얌 빠디하디 만띠.
Sanateva braharannam tam bhayam patihati manti.
1. 한낮에 이르러 새들마저 조용히 쉬고 있는데
거대한 숲에 바람 부는 소리가 있어
저에게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바가와(Bhagava)
세존
2. 티떼 맛잔띠께 까레 산니시웨수 빡키수,
Thite majjhantike kale sannisivesu pakkhisu,
사나떼와 브라하란남 사 라디 빠디바띠 만띠.
Sanateva braharannam sa rati patibhati manti
2. 한낮에 이르러 새들마저 조용히 쉬고 있는데
거대한 숲에 바람 부는 소리가 있어
나에게 즐거움이 생긴다.
이 게송은 겁이 많은 천신이 부처님께 이야기하는 것인데 숲 속에 사는 나무천신으로 보입니다. 여기서는 천신이 부처님께 숲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런 경을 보면 여러 가지의 성향을 가진 천신들이 부처님과 친견을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때로는 물리학자도 있고 때로는 천문학자도 있는 것처럼 여기에 여러 형태의 천신들이 갖가지 이야기를 말합니다. 이런 것으로 볼 때 천상에 사는 천신들도 업의 과보에 따라 다양한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천신의 말을 듣고 천신이 느낀 것과 같이 있는 그대로 말씀해주시는데 이때 두려워하고 있는 천신에게 따뜻하게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고요한 숲에 갑자기 정적을 깨는 바람소리가 들려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으로 말씀하십니다. 고요하거나 바람소리가 요란하게 나거나 단지 숲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일 뿐인데 어떤 사람은 두려워하고 어떤 사람은 즐거워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십니다. 그래서 마음의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인데 깨달음이 아닌 세계와 깨달음의 세계에 대해 두 가지를 이야기하십니다. 이것은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힘이 있는 사자는 어떤 소리에도 놀라지 않습니다.
게송 문장은 ‘티떼 맛잔띠께 까레 산니시웨수 빡키수(Thite majjhantike kale sannisivesu pakkhisu)’입니다. 티데 맛잔띠께(Thite majjhantike)에서 맛잔띠께(majjhantikie)는 ‘한낮’, ‘정오’입니다. 인도의 한낮은 너무 더워서 마음이 초조해져 안절부절 합니다. 그래서 서있거나 앉아있거나 누워있지도 못하는 것이 가장 더울 때의 낮입니다. 인도는 여름은 낮이 50도가 넘어가고 숲은 더 습하고 덥습니다. 밤에도 덥기는 마찬가지지만 지금은 여기서는 한낮의 숲을 말합니다. 이렇게 더울 때 숲이라고 예외가 아니라서 숲에서도 항상 문제가 많습니다. 이때는 너무 더워서 숲조차도 조용하고 새들도 조용히 쉬고 있는 상황을 표현했습니다.
산니시웨수(Sannisivesu)는 ‘편안하게 쉴 수 있는’입니다. 이러한 상황과 반대로 티떼 맛잔띠게(Thite majjhantike)는 한낮이라서 쉴 수 없는 상황을 말합니다. 다음에 빡키수(pakkhisu)는 ‘새들’입니다. 그래서 이 문장은 ‘한낮에 이르러 새들마저 조용히 쉬고 있는데’입니다.
다음 게송은 ‘사나떼와 브라하란남 땀 바얌 빠디하디 만띠(Sanateva braharannam tam bhayam patihati manti)’입니다. 사나떼(Sanate)는 ‘소리를 내다’인데 숲에서 바람이 불면 나는 소리를 말합니다. 때로는 이 바람소리가 나뭇가지가 부딪쳐서 놀라게도 하며 울부짖는 소리처럼 들려 무섭기도 합니다. 이처럼 바람이 불어서 부딪히고 스치는 소리가 나면 숲에 있는 동물들도 두려워하기 마련입니다. 동물뿐만 아니라 숲 속에서 명상하는 스님들도 이런 소리를 많이 듣습니다. 선정수행을 해서 깊게 집중을 한 수행자의 경우도 작은 소리에도 놀라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천신도 이러한 숲의 바람소리에 민감하게 두려움으로 반응한 것입니다. 여기서 숲에 사는 천신도 이런 두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파리에 가서 숲 속에서 하룻밤을 자면 별별 소리가 다 납니다. 그만큼 두려움을 많이 느끼도록 숲 속에는 별소리가 다 납니다. 그래서 숲 속에서는 살기가 어렵습니다. 숲에 가면 큰 나무에 새들이 쪼고 동물들도 후벼서 큰 구멍이 있습니다. 스님들이 들어가 앉을 수 있을 정도로 굉장히 큽니다. 그 안에 들어가면 웅 하는 바람소리가 엄청나게 크게 들립니다. 안에 바람이 들어가면 소리가 공명이 되어서 더욱 크게 들립니다.
다음은 브라하란남(braharannam)은 ‘거대한 숲’입니다. 나무천신이 살 정도로 크고 울창한 나무가 있는 숲을 말합니다. 다음에 바야(bhaya)는 ‘두려움’, ‘공포’입니다. 그래서 전체의 문장을 보면 ‘한낮에 이르러 새들마저 조용히 쉬고 있는데 거대한 숲에 바람 부는 소리가 있어 저에게 두려움이 생겼습니다.’라고 천신이 말하고 있습니다. 숲은 항상 조용한데 바람소리가 날 때는 거대한 숲이 온통 시끄럽고 사납고 무서운 소리를 내서 두려워진 것입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천신이 느낀 그대로 말씀하시면서 마지막에 두려움 대신에 즐거움이 있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 게송이 부처님께서 천신에게 답변하신 내용입니다.
“한낮에 이르러 새들마저 조용히 쉬고 있는데 거대한 숲에 바람 부는 소리가 있어 나에게 즐거움이 생긴다.”
그럼 부처님께서 천신에게 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다음 법구경 게송을 통하여 살펴보겠습니다.
법구경(373)
순냐가람 빠윗탓사
Suññagāram paviṭṭhassa
산따 찟땃사 빅쿠노
Santa cittassa bhikkhuno
오마누시 라띠 호르띠
Omanusi rati horti .
삼마 담맘 위빠사또
Sammā dhammam vipassato.
빈집에 들어가
비구들의 마음이 고요하다.
진정한 즐거움이 있어
정법으로 무상, 고, 무아를 명확하게 본다.
법구경 게송에 나오는 순냐가람(Suññagāram)은 ‘빈집’입니다. 빈집은 인도에 지역마다 있는데 사람이 없는 집이 아니라 주인이 따로 없고 서로 방해하지 않는 공간입니다. 이곳에서는 서로가 어디서 와서 무엇을 하는지 물어보지 않는 곳입니다. 이런 빈집은 마을에서 지을 수도 있고 주인이 있어도 마음대로 못하는 곳입니다.
왕이 오든 어떤 수행자가 오든 서로 간에 종교에 대한 논쟁도 말하지 않는 그런 공간입니다. 부처님도 누구를 만나면 절대 불교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부처님께서 다른 종교인을 만나면 다른 종교 이야기를 해서 부처님이 가고 나면 남은 사람이 궁금해서 저 사람이 누구인지 따라가 봤다고 합니다. 이렇게 부처님은 상대에게 절대 강요하지 않으면서 포교를 하신 분입니다.
스리랑카도 숲에서 스님들이 내려오실 때 시간에 문제가 되니까 중간에 집을 만들어서 공양을 놓아주기도 하고 과자 같은 것도 놓아두기도 합니다. 그래서 스님들이 필요한 것을 가져가게 합니다. 이것을 일종의 꾸띠라고 하는데 매우 작은 공간입니다.
도시에는 물건을 훔쳐가므로 이런 것이 없습니다. 명상하시는 스님들에게 공양 올리고 싶은데 못 만나니까 그곳에 놓아두면 가져가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빈집에 들어가 마음을 고요히하게 하고 완전한 진리를 명확하게 보는 비구에게는 진정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다음에는 혼자 숲에서 사는 어떤 스님 이야기입니다. 혼자 숲 속에서 아예 사람들과 관계를 하지 않고 사회와 멀리해서 살면서 숲에 대한 즐거움을 게송으로 이야기합니다.
뿌라또 빳차또 와삐, 아빠로 쩨 나 븟자띠
Purato pacchato vapi, aparo ce na vjjati,
아띠와 파수 바와띠, 에깟사 와사또 와네.
Ativa phasu bhavati, ekassa vasato vane.
앞쪽으로나 뒤쪽으로나
다른 누구도 발견할 수 없다면,
홀로 숲 속에 사는 님에게
아주 큰 즐거움이 생긴다.
과거에 매달리지 않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일에도 매달리지 않고, 가는 사람을 막지 않고 오는 사람을 보고 기뻐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과정은 모든 것을 집착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수행이 위빠사나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두려움이 없고, 즐겁다는 뜻입니다. 숲 속이 이렇게 무서운데도 수행자한테는 아무 집착이 없어서 두려움이 없고 그래서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수행자한테는 숲이 최고로 편안한 곳입니다. 스님들도 일반적인 곳 보다 숲 속이 편하게 느낍니다.
다음에 자료 한 가지를 더 보시면 ‘유사정법’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상윳따 니까야의 깟사빠상윳따 2권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 경전 내용은 부처님과 깟사빠 존자와의 대화입니다.
유사정법 경(saddhamma-patirupaka sutta)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사왓띠에서 제따 숲의 아나따삔디까 원림에 머무셨다.
2. 그때 마하깟사빠 존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마하깟사빠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3. 세존이시여, 무슨 원인과 무슨 조건 때문에 이전에는 학습계목은 더 적었지만 구경의 지혜에 안주하는 비구들은 더 많았으며, 무슨 원인과 무슨 조건으로 지금은 학습계목은 더 많아졌지만 구경의 지혜에 안주하는 비구들은 더 적습니까?
4. 깟사빠여, 그것은 이와 같다. 중생이 하열해지고 정법이 사라질 때는 학습계목은 더 많아지지만 구경의 지혜에 안주하는 비구들은 더 적다.
깟사빠여, 유사정법(saddhamma-patirupaka)이 세상에 생기지 않는 한 정법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유사정법이 세상에 생기면 정법이 사라지게 된다. 깟사빠여, 예를 들면 황금과 유사한 것이 세상에 생기지 않으면 황금은 사라지지 않는다. 황금과 유사한 것이 세상에 생기면 황금은 사라진다.
깟사빠여, 그와 같이 유사 정법이 세상에 생기지 않는 한 정법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유사정법이 세상에 생기면 정법은 사라진다.
5. 깟사빠여, 땅의 요소가 정법을 사라지게 하지 않는다. 물의 요소가 정법을 사라지게 하지 않는다. 불의 요소가 정법을 사라지게 하지 않는다. 바람의 요소가 정법을 사라지게 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 쓸모없는 인간들이 나타나서 이 정법을 사라지게 한다.
갓사빠여, 배는 많이 실으면 침몰하지만 정법은 그와 같이 사라지지 않는다.
6. 깟사빠여, 다섯 가지 유해한 현상이 나타나면 정법을 혼란스럽게 하고 사라지게 한다. 무엇이 다섯인가?
깟사빠여, 여기 비구들과 비구니들과 청신사들과 청신녀들이 스승(sattha, 초기 불전에서 이 단어는 거의 예외 없이 부처님을 지칭함)을 존중하지 않고 순응하지 않으며 머문다. 법을 존중하지 않고 순응하지 않으며 머문다. 승가를 존중하지 않고 순응하지 않으며 머문다. 공부하는 것을 존중하지 않고 순응하지 않으며 머문다. 삼매를 존중하지 않고 순응하지 않으며 머문다. 깟사빠여, 이러한 다섯 가지 유해한 현상이 나타나면 정법을 혼란스럽게 하고 사라지게 한다.
7. 깟사빠여, 다섯 가지 현상이 나타나면 정법을 확고하게 하고 혼란스럽지 않게 하고 사라지지 않게 한다. 무엇이 다섯인가?
깟사빠여, 여기 비구들과 비구니들과 청신사들과 청신녀들이 스승을 존중하고 순응하며 머문다. 법을 존중하고 순응하며 머문다. 승가를 존중하고 순응하며 머문다. 공부하는 것을 존중하고 순응하며 머문다. 삼매를 존중하고 순응하며 머문다.
깟사빠여, 이러한 다섯 가지 현상이 나타나면 정법을 확고하게 하고 혼란스럽지 않게 하고 사라지지 않게 한다.
< 이상의 유사정법 경(Saddhamma-patirupaka sutta)은 각묵스님의 상윳따니까 2권에서 옮겨온 글입니다. >
깟사빠 존자가 옛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이 되었는데 지금은 왜 그렇지 않습니까? 가르침과 계율은 많은데 왜 아라한이 적습니까? 라고 부처님께 여쭤 보고 있습니다. 깟사빠 존자가 걱정이 되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부처님이 계실 때부터 이런 분들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경전에 있는 말인데 공덕이 있는 사람들이 부처님 시대에 만나면 깨달음을 얻어서 아라한 되시는 분들이 많은데 공덕이 없는 사람은 만나도 잘 안 된다고 합니다.
부처님은 정법이 아닌 정법과 유사한 법이 세상에 생기면 정법은 사라지게 된다고 하십니다. 이것을 바로 유사정법이라고 합니다. 이런 유사정법은 반드시 정법을 가장하고 있으며 오히려 정법같이 행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황금과 유사한 것이 생기지 않으면 황금은 사라지지 않는다. 명품은 짝퉁이 생기면서 명품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주석서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사람들은 금이 필요해서 금을 파는 가게에 가는데 가게 주인이 비싼 금과 짝퉁 금도 팔았습니다. 진짜 금은 비싸고 해서 일할 때 끼기 위해 짝퉁 금을 사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계속 사용한다고 합니다. 현실에 맞는다고 그것을 사용하면 지금 순간은 좋을 수가 있지만 계속 가면 그것이 문제가 됩니다. 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유투브에도 인기위주로 많이 흐르는데 사람들은 그것만 따라가서 문제가 되는 것이고, 그런 시대가 온다고 부처님이 말씀하십니다.
깟사빠여 그러나 쓸모없는 인간들이 나타나서 이 정법을 사라지게 한다. 이는 지혜가 없는 사람들이 나타나서 정법을 사라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불교를 많이 공부하고 연구한다고 해도 없어지지는 않는데 잘못된 해석으로 인해서 정법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스리랑카에서는 경전을 스리랑카어로 해석할 때 혼자 번역하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경전 번역이 중요한데 번역하지 않으면 포교도 어렵지만 잘못 번역하면 부처님 말씀이 달라지니 위험한 일이라서 단체로 번역해야 합니다. 그래서 30년간 번역했는데 180명의 스님들이 참여하여 1차로 번역해서 큰스님들께 올려드리면 종정스님들이 최종적으로 확인하였습니다. 그러나 번역 과정에서 열반이나 연기와 같은 중요한 단어는 번역하지 않고 빨리어 그대로 사용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런 단어는 해석하지 마라. 만약에 열반을 얻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스스로 노력해서 이런 말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열반이라는 말을 해석하는 순간에 시간이 지나면 계속 다른 뜻으로 해석할 것이다. 그러게 되면 원래 뜻이 사라질 것이다. 그래서 열반, 연기법, 사정제와 같은 단어는 그대로 놔두기로 했습니다. 그 이후 스리랑카에서는 혼자 번역을 금지하는 국법이 만들어졌습니다. 개인이 번역한 삼장을 팔거나 나눠주는 것을 금지하는 삼장보호법이 생겼습니다.
유사정법 6번 단락을 보면 ‘깟사빠여 5가지 유해한 법이 나타나면 정법을 혼란스럽게 하고 사라지게 한다. 여기 비구들과 비구니들과 청신녀들이 스승을 존중하지 않고 순응하지 않으며 머문다.’는 부처님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부처님께서 많은 대중들 앞에서 설법하실 때는 비구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재가자들만 있을 때는 재가자라고 했습니다. 저녁에 설법할 때나 낮에 탁발하고 나서 많은 사람들에게 설법할 때 비구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유사전법은 승가를 존중하지 않고 순응하지 않으며 머문다고 했습니다.
속가에서의 친구이지만 비구계를 받은 스님을 친구로 보면 안 됩니다. 승가에 속해 있으면 위에 스승님이 계시고, 그 위에 올라가 보면 마힌다 장로가 있고, 그 위에 우빨리 존자가 있고, 우빨리 존자 위에는 부처님이 계십니다.
가사를 올릴 때 비구상가라고 하지 않고 상가라고 합니다. 상가라고 하면 비구뿐만이 아닌 상가 전체를 아우르는 말입니다. 공양을 올릴 때는 비구상가라고 합니다. 일반 사미, 사미니 등 비구가 아닌 분들도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직자들은 비구, 비구니도 있고 일반 재가자나 수다원도 들어갈 수 있는데 가사 공양은 상가들한테만 올릴 수 있습니다. 상가라는 것은 부처님 당시에 계셨던 5비구와 과거 현재미래를 연결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원래 비구는 걸식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비구는 밥을 걸식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밥이 중요합니다. 인도는 거지도 걸식하는데 주지 않아도 갖는 것이 거지입니다. 그러나 주지 않으면 갖지 않는 것이 비구의 계율입니다. 비구는 아무리 배고파도 올리지 않는 것은 먹지 않습니다. 하지만 거지는 주지 않아도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비구는 절대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비구라고 할 때는 핵심적인 사람들이 비구들이기 때문에 비구라고 한 것입니다. 비구라고 할 때 비구 외에도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를 포함한 표현입니다.
‘아난다여’, 할 때는 개인으로 있을 때의 표현이고 ‘비구들이여’는 단체들로 많이 있을 때의 표현입니다.
지금은 율장에서 정한 절차에 따라서 비구가 되는데 옛날에는 부처님이 정해서 비구가 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성도 후 20년 지나서 출가하는 숫자가 많아지니 하나의 시스템을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계율을 가지고 살아가는 법이 나온 것입니다.
아비실라(abhisīla), 아비사마디(abhisamādhi), 아비빤냐(abhipaññā)는 뛰어난 계율, 뛰어난 집중, 뛰어난 지혜인데 이것을 본인이 존경스럽게 생각하지 않으면 친구처럼 생각하는 것이고 친구가 되는 순간에 존경하는 마음이 없게 된다는 뜻입니다.
공부하는 것이라는 말은 훈련을 하는 것인데 아비실라(abhisīla), 아비사마디(abhisīsamādhi), 아비빤냐(abhipaññā) 등 계정혜 닦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세 가지는 팔정도로 마음을 훈련하는 방법, 교육받음, 훈련받는 것을 말합니다.
실라(sīla). 사마디(samādhi). 빤냐(paññā)는 계정혜 인데 실라(sīla)는 부처님 안 계셔도 있을 수 있는데 아비실라(abhisīla)는 부처님 때만 있는 것입니다. 아비실라(abhisīla)는 십계, 비구계 227계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삼매는 항상 선정 수행으로 얻을 수 있지만 위빠사나에 들어갈 수 있는 선정의 아비사마디(abhisamādhi)는 부처님 시대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성제, 팔정도가 없는 시대에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선정과 신통력은 부처님이 안 계셔도 얻을 수 있지만 아비빤냐(abhipaññā)의 지혜는 부처님 시대 때에만 드러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연기법도 진리 속에 잠자고 있는 것을 내가 발견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연기법은 부처님의 출현이전에도 있었지만 누구도 몰라서 부처님께 처음으로 발견하셔서 찾아낸 진리입니다.
아비(abhi)는 ‘~ 향해서’, ‘~을 넘어서’, ‘~을 지배하여’라는 뜻인데 ‘매우’, ‘두루’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뛰어남’을 말합니다. 산스크리트어로 ‘아디(adhi), 아누(anu), 아티(ati)’가 모두 빨리(pāli)에서는 아비(abhi)로 대체됩니다. 그래서 빨리 아비(abhi)를 산스크리트어로는 아디(adhi)라고도 합니다.
마지막에 나오는 ‘삼매를 존중하지 않고 순응하지 않으며 머문다’ 에서 삼매는 근접삼매, 근본삼매, 찰나삼매 세 가지가 다 들어갑니다. 여기서 말하는 삼매는 삼매를 우습게보거나 신통력 얻는 삼매가 아니라 지혜를 얻는 빤냐(paññā)에 다가가는 그런 삼매를 말하는 것입니다. 박사학위 받는 것은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듯이 옛날에는 삼매를 통해서 신통력을 얻는 것이 첫 번째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수행자들이 먹고 사는 방편으로 선정수행을 했습니다.
옛날 어떤 스님이 신통력으로 사람들을 치료하다가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니 어느 순간 신통력이 사라져 나중에 사기꾼으로 몰려 망해버렸습니다. 물질적인 욕망 때문에 신통이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처님은 신통력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시켰습니다. 특별하게 목련존자 등의 아라한에게는 신통력을 허용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깟사빠여, 다섯 가지 유해한 현상이 나타나면 정법을 혼란하게 하고 사라지게 한다.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이렇게 반문한 뒤에 유해한 현상 다섯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다섯 가지와는 반대로 정법이 사라지지 않는 다섯 가지를 설하십니다. 이것을 실천하지 않을 때 정법이 사라지지만 오히려 이 다섯 가지를 실천하면 정법이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가 바로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비구들과 비구니들과 청신사들과 청신녀들이 스승을 존중하고 순응하여 머문다. 둘째, 법을 존중하고 순응하며 머문다. 셋째, 승가를 존중하고 순응하며 머문다. 넷째, 공부하는 것을 존중하고 순응하며 머문다. 다섯째, 삼매를 존중하고 순응하여 머문다. 깟사빠여, 이런 다섯 가지 현상이 나타나면 정법을 확고하게 하고 혼란스럽지 않게 하고 사라지지 않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깟사빠 존자가 첫 번째 결집할 때 이런 시스템을 이용하신 것입니다. 깟사빠 존자는 상가에 관심이 많았다고 합니다. 부처님 제자 중 나이도 비슷한 장로이고 비구들의 존경을 받고 있어서 깟사빠 존자와 5백 비구를 중심으로 결집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아난다 존자는 수다원이었는데 아라한들만 모이는 결집에 참석할 수 없어서 아라한이 되려고 3개월간 노력했지만 부처님 생각만 나고 집중이 안 되어서 나중에는 포기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결집 전날 밤에 걷기 수행을 하다가 침대에 올라가 쉬려고 하는 순간 행주좌와 없이 머리를 침대에 대는 순간에 깨우친 것입니다.
주석서에서는 집착을 많이 해서 집착할수록 도과에서 멀어지는데 집착을 놓아 버리는 순간 깨달음을 얻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난다 존자도 바로 그렇게 해서 문제가 풀린 것입니다. 주석서에 의하면 아난자 존자가 땅 밑으로 가서 신통력을 보여서 아라한들의 인정을 받았다고 합니다. 마지막 날까지 아난다 존자가 아라한이 못되어 안 나타날 것이라고 했는데 바로신통력으로 아라한이 된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사실 아라한이 500명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여러 다른 스님들도 있었습니다. 늦게 도착한 아라한들의 항의도 있었습니다. 깟사빠 존자는 아라한 500비구를 선택할 때 마가다 지방 중심으로 뽑았습니다. 사리불, 목련존지가 이미 돌아가셨기 때문에 부처님은 깟사빠 존자를 생각하고 돌아가신 듯합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뒤 부처님의 다비를 위해 불을 붙이는데 불이 붙지 않다가 깟사빠 존자가 와서 붙이니 불이 붙었습니다. 그 뜻이 아마도 부처님 돌아가시고 나면 이런 시대가 올 것이라는 것을 아시고 깟사빠 존자에게 힘을 주기 위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아라한에도 설법을 잘하는 아라한이 있는가 하면 깨달음만 얻은 분도 계십니다. 법을 설명할 수 있는 힘은 아무나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만 해결하신 아라한은 아라한이라도 법을 설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경전결집을 할 때 이런 아라한은 무슨 말인지 모르기 때문에 대화가 되고 법을 설할 수 있는 아라한들로만 모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라고 하였듯이 이런 것을 부처님한테서 직접 들었던 사람들 위주로 모였던 것입니다. 아난다 존자가 ‘이렇게 나는 들었다’ 라고 하고 다른 아라한이 이의가 있으면 문제에 대해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의의가 없으면 확정하여 합송하는 방식으로 경전결집이 이루어졌습니다.
사리불 존자 제자들이 디가 니까야를 암송하였습니다. 목련조자 제자들이 마지마니까야를 암송하였습니다. 앙굿따라니까야는 아난다 존자가 암송하였습니다. 상윳따타니까야는 깟사빠 존자가 암송하였습니다. 율장은 우빨리 존자가 암송하였습니다. 율을 중심으로 하는 종파도 있었는데 그분들도 우빨리 존자를 인정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율장을 인정하지 않는 스님들이 있었는데 그분들이 마하야나로 나가서 대승으로 전파된 것입니다.
상좌불교에서 신발을 신지 않는 전통과 관련한 것입니다. 추운 지방은 신을 신을 수 있는데 더운 지방은 신을 신을 필요가 습니다. 신지 말라고 해도 신지 않으면 못 살기 때문에 신어야 합니다. 마가다 지방은 더워서 신을 신지 않아도 되지만 결집 때 마가다 지방 사람들 위주로 모였기 때문에 견해가 갈라진 것입니다.
경전 결집을 할 때 아난다 존자를 인정하는 사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아난다 존자에게 다섯 가지에 대해 질책합니다. 부처님께 왜 오래 사시라고 하지 않았느냐. 부처님이 여자를 출가시키지 말라고 했는데 왜 했느냐. 부처님께서 소소한 계율은 없애라고 했는데 어떤 계율을 없애야 하는지 왜 물어 보지 않았느냐 등입니다. 아난다 존자는 부처님께서 열반하신다는 말을 듣는 순간부터 완전히 울고불고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고 합니다. 이것으로 보아 아난다 존자는 굉장히 자비스럽고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꼬살라 왕의 왕비들이 5백 명이었는데 궁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아난다 존자였습니다. 이때 아난다 존자는 왕비들에게 불교를 가르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왕비가 아들을 낳았는데 아난다 존자를 닮은 아들이 낳은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왕비가 아난다 존자를 너무 존경하다 보니 계속 아난다 존자와 닮은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왕이 부처님께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물어보니 아난다 존자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아난다 존자는 불법에 대한 신심이 깊은 분이고 절대 욕심을 내는 분이 아니므로 있을 수는 일이며 그는 수다원이라서 왕과 왕비들 앞에서 설법을 했습니다.
마부였던 찬나도 질투를 많이 했습니다. 찬나는 부처님 친구이자 친척이었습니다. 부처님이 태어나던 해에 말도 찬나도 태어난 동갑내기였습니다. 숫도다나 왕이 동갑들만 붙여놨습니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 옆에 있으면 출가하라는 이야기들 할 수 있어서 출가하지 못하도록 옆에 친구들 또래만 붙여놨습니다. 싯따르타의 태자비들도 동갑들이라고 합니다.
결집할 때 80먹은 노인인 찬나를 제외시키려고 결정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무관심으로 아는 척하지 않으니 자존심 상하고 얘기할 부처님도 없고 해서 나중에 가섭존자한테 가서 법문을 듣고 결국 찬나도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찬나는 사리불 존자, 목련 존자에 대해 계속 질투가 많았습니다. 목련 존자는 신통력이 있어 신도들을 끌어당긴다는 등 안 좋은 이야기를 소문냈습니다. 부처님은 절대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악업 짓는 일이라고 말렸지만 찬나를 계속했습니다. 본인이 아라한이 아니라서 그 사람이 이해가 안 되어서 오해를 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 옆에만 있다 보니 오해를 했는데 그것은 의도가 달라서 악업이 안 된다고 합니다.
아난다 존자는 성격도 좋고 머리도 좋아서 40대에 시자가 되었습니다. 부처님 열반 때는 아난다 존자는 60대였습니다. 경전 결집을 할 때 아난다 존자를 좋아하는 사람들만 모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건 맞다 이건 구별해야 한다고 아라한들이 얘기를 했습니다.
아라한들은 모든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없앤 분들이라 본인이 이익을 얻으려는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오직 미래에 부처님 말씀을 보존하는 목적이라서 2차 결집, 3차 결집으로 이어온 것입니다. 이런 아라한들 힘이 아니었으면 경전결집은 불가능 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