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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55
창세기 19:23-38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하나님은 참 잔인하시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소돔을 빠져나오는 중에 잠시 뒤돌아본 것으로 인해 소금 기둥으로 만드신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신가? 흔히들 롯의 아내와 같이 우리는 세상에 미련을 버리지 않고 뒤돌아보는 것으로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받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지금도 소위 말하는 성지 순례를 하는 사람들은 사해 부근의 큰 소금 기둥이 롯의 아내라는 웃지 못할 이야기들을 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기 위해 믿음으로 잘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이해는 성경 본문을 그저 문자적으로 보고 그대로 우리에게 교훈이 된다고 생각하기에 이런 해석들이 난무한다.
성경에서 어떤 사건과 그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고 그것을 기록된 말씀으로 주셨다면 문자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하나님의 의도하신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평생을 살면서 뒤돌아보지 않는가? 그러기에 단순히 뒤돌아보지 말라는 교훈을 주시는 정도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심판을 통해 경고를 하시거나 협박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다.
“롯이 소알에 들어갈 때에 해가 돋았더라”(23절). “해가 돋았더라”라는 표현은 단순히 시간을 알려주는 말이 아니라 롯에게 임한 구원이 어둠이라는 심판에서 해가 돋은 아침, 밝음의 상태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롯은 천사에게 소알로 가기를 원하여 자기 구원에 작은 것이라도 보태기를 원하였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소알 성에 당도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이렇게 하여 심판 속에서 이루어진 구원을 보여주신다.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께로부터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사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24-25절). “유황”의 히브리어 ‘코프리트’는 방주를 만들었던 나무의 ‘고페르’(6:14)의 여성형 표현이다. 분명 “유황”과 “불”은 하나님의 임재와 심판을 상징하는 단어이지만(신 29:23) 단순히 심판만을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긍휼에 의한 구원의 의미를 같이 담고 있다는 뜻이다. 방주를 만들게 하신 고페르 나무를 역청(‘코페르’)으로 칠하게 하신 것으로 ‘속전’의 의미를 나타내셨던 것처럼 말이다(참고 사 34:9). 그러므로 여기서 “멸하셨더라”라는 말을 히브리어 ‘하파크’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는데 ‘변화시키다, 뒤집어 엎다, 돌리다’라는 뜻이다. 즉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는 것으로 되돌려서 심판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구원을 동시에 보여주신다는 것이다. “땅에 난 것”, 즉 땅적 존재를 되돌려 하늘로 돌아오게 하시는 것이 구원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않는 가운데 가두어 긍휼을 베푸시는 것이기 때문이다(롬 11:32).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26절). “아내”는 히브리어로 ‘잇샤’를 쓰고 있는데 씨 없는 존재를 말한다. 롯의 아내는 씨 없는 존재로 결국 인간의 행위 가운데, 율법의 행위로 돌아갈 수밖에 없음을 나타낸다. “돌아보았으므로”라는 말 ‘나바트’는 ‘열심히 바라보다, 골똘히 바라보다, 기쁨과 호감을 가지고 주시하다, 관찰하다, 존중하다’라는 뜻이고 “뒤”의 ‘아하르’는 ‘후에, 다음에, 배후에’라는 뜻이다. 자신의 배후가 소돔이라는 것을 떨쳐버리지 못한 상태를 의미한다. 소돔의 것, 땅의 것을 자신의 배후, 배경으로 여기고 그것을 좋아한 땅적 존재에게 심판이 임할 수밖에 없음을 나타낸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29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30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31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32 롯의 처를 기억하라 33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눅 17:29-33)
그러면 왜 하필 “소금 기둥”인가? 소금의 의미는 율법 속에서 구체적으로 밝혀지는데 일차 독자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구한 몫의 음식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한 소금 언약이니라(민 18:19)
분향단의 향을 만들 때 반드시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라고 말씀하셨고(출 30:34-36), “언약의 소금”을 소제에서 빼지 말라고 하셨다(레 2:13). 즉 소금은 정결, 거룩의 필수품으로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언약을 상징한다(대하 13:5). 이렇게 보자면 “소금 기둥”이란 하나님의 언약의 기둥을 미리 보여주시는 것이다. 땅적 존재, 씨 없는 여자를 위해 친히 저주 아래 있는 이 땅에 오셔서 소금 언약으로 영원한 언약을 성취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심판은 분리이고 구원은 하나 됨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저주라는 심판과 구원의 은혜를 동시에 보여주는 상징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뒤를 돌아보아 주신 것이다. 땅적 존재를 하늘의 것으로 만드시기 위하여 친히 율법 아래에서 태어나신 것이다. 그 율법 아래 매였기에 저주를 받으시고 언약의 기둥에 달리셨기에 오늘 우리는 소금 기둥이 되지 않는 것이다.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4-6)
“아브라함이 그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서 있던 곳에 이르러 소돔과 고모라와 그 온 지역을 향하여 눈을 들어 연기가 옹기 가마의 연기같이 치솟음을 보았더라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27-29절).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창 18:22, 33)
이 말씀이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각자 갈 길을 갔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합류되어 하나된 것을 나타내는 말씀이라고 이미 앞에서 생각했었다. 이런 점에서 “아브라함이 그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서 있던 곳에 이르러”라는 말씀은 아브라함이 저녁, 밤을 거쳐 아침으로 나아오게 되었다는 뜻으로 이 장소는 아브라함이 여호와께로부터 언약을 받았던 곳이다. 롯의 이야기 가운데 갑자기 아브라함을 언급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언약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다시 말해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은 단순히 심판을 보여주시기 위함이 아니라 그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주시는 것인데 그것은 곧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눈을 들어”라는 말 ‘샤카프’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본다’라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언약 안에 있고 하늘에서 보고 있다. “연기가 옹기 가마의 연기같이 치솟음을 보았더라”라고 하였는데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언약을 율법의 말씀으로 주실 때를 이렇게 표현하였다.
18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 가마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출 19:18)
결국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은 동성애로 인한 죄악이 심각한 자들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통해 주어질 하나님의 언약으로 인한 구원을 설명하고 보여주시기 위한 기록이다. 땅에 속한 것을 하늘의 것으로 되돌려 놓으시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생각하사”라는 말의 히브리어 ‘자카르’라는 언약 용어를 사용하여 나타내고 있다. 또한 “내보내셨더라”라는 말 ‘샬라흐’는 하나님께서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내보내신 것을 통해(3:23) 이 땅에 언약의 실체를 보내실 것을 보여주신 것처럼 아브라함을, 롯을 보내신 것이다.
그러나 롯의 모습은 하나님의 말씀과는 전혀 상관없는 모습이었다. “롯이 소알에 거주하기를 두려워하여 두 딸과 함께 소알에서 나와 산에 올라가 거주하되 그 두 딸과 함께 굴에 거주하였더니”(30절). “굴”이란 말의 ‘메아라’는 긍정적인 의미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의미하나(왕상 18:4) 부정적인 의미로는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내버려두심, 율법적 종교 행위로 이루어진 성전을 의미한다(렘 7:11, 계 6:15). 롯은 결국 천사가 지시한 산에 올랐지만 “굴”을 선택함으로 자기 종교 행위를 계속 고수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고 온 세상의 도리를 따라 우리의 배필 될 사람이 이 땅에는 없으니 우리가 우리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동침하여 우리 아버지로 말미암아 후손을 이어가자 하고”(31-32절). 큰 딸이 한 것과 같이 작은 딸도 동일하게 롯과 동침하였다(34-35절). 성경, 특히 창세기가 말씀하고자 한 것은 ‘톨레도트’로 ‘아들 낳기 역사’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고자 하신 언약과 인간이 자기 아들을 낳아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늘 상충 된다. 죄인이 낳는 아들은 자기 율법적 행위를 이루고자 하는 몸부림의 흔적이다. 두 딸은 아버지를 진리로 여기고 하나 되어 구원을 이루고자 하는 죄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술”을 이용하는 것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성경에서 “술”은 하나님의 말씀과 대조되는 개념으로 나타낸다(엡 5:18).
“롯의 두 딸이 아버지로 말미암아 임신하고 큰 딸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모압이라 하였으니 오늘날 모압의 조상이요 작은 딸도 아들을 낳아 이름을 벤암미라 하였으니 오늘날 암몬 자손의 조상이었더라”(36-38절). “모압”과 “암몬”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신 23:3)
여기서 “영원히”라는 표현은 끝없는 시간이 아니라 영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흡수되는 영원이다. 언약이 온전히 성취되면 그 영원 안에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언약의 성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을 말씀하시기 위한 표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루어진 구원이란 내가 어떤 존재였는가를 날마다 보게 하시는 은혜 안에 있는 것이다. 내가 소돔이고 고모라이며 애굽이고 바벨론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임을 늘 확인하는 것으로 십자가가 마음에 새겨지는 은혜로 생명을 누리는 것이다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롬 9:29)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계 11:8)
(20231008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