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이 현대미술의 중심지가 되기까지(2)

뉴욕현대미술관과 더불어 뉴욕을 대표하는 미술관 구겐하임은 세계에서 칸딘스키의 작품을 가장많이(180여점) 소유하고 있다.
미국철강계열의 거물이자 자선사업가, 현대미술 수집가인 솔로몬 구겐하임(1861-1949)이 설립자이다. 영화<타이타닉> 을 보면, 배가 침몰하려는 마지막 최후까지도 가장 비싼 턱시도로 갈아 입으며 품위를 잃지앓고 신사답게 죽음을 맞이하는 사나이가 나온다. 이제 더는 돌이킬 수없이 배가 침몰하려는 순간 그는 뉴욕의 부인에게 “나는 끝까지 최선을 다했노라 “ 는 전보를 친다. 그는 당시 애인이었던 가수 레노틴 오버와 하인만을 구명보트에 태우고 자신은 구명조끼를 거부한다. 한 손에 브랜디를 들고 시가를 피우며 마지막까지 타이타닉호에 남아 함께 침몰한 그가 바로 솔로몬의 남동생이자 페기 구겐하임의아버지인 벤자민 구겐하임이다.( 솔로몬은 7명의 형제중 다섯째였고 벤자민은 여섯째였다)
이 사건때문에 페기 구겐하임은 열네살에 아버지를 여의게 된다.
페기는 당시불모지였던 현대미술의 발전에 엄청난 기여한 또 한명의 애비 록펠러와 공통점이 있지만 이 둘은 인생도 컬렉숀도 매우 다르다.
그녀는 답답한 상류사교계나 신부수업보다 버나드 쇼, 입센, 오스카 와일드등 당대 문학에 더 관심을 보이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스무한살의 생일에 뜻밖의 유산을 받자 친구와 북미대륙 횡단을 하고 당시만 해도 검증되지 않은 코 성형수술을 시도할 정도로 어딘가 남달랐다.
20대에 미국을 떠나 유럽에 머물면서 주변의 예술가와 첫남편인 화가 로렌스 베일, 연인이면서 스승이나 다름없던 마르셀 뒤샹등의 영향을 받아 본격적으로 성장한다.
뒤샹은 페기에게 여러화가를 소개해주었고 현대미술의 기초부터 가르쳤다. 페기는 미술뿐 아니라 문학, 음악등 문화전반을 향유했다. 대형HMV 측음기를 가지고 있었고 음반을 수집했으며 보헤미안의 삶을 선망했다.
그녀는 누군가의 조언없이는 거의 움직이지않았다 해도 과언이 아닌데, 1938년 런던에 페게구겐하임 컬렉션의 시초구겐하임인 죈(Guggenhein Jenne) 를 개관한 것도 절친한 친구의 권유가 계기가 됐다.
구겐하임 죈의 첫전시를 마치고 장 콕도의 전위적인 작품을 구입하며 페기는 컬렉터로써 첫 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구겐하임 죈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녀는 뉴욕으로 돌아와 1942년 5번가에 금세기 미술 Art of this Century갤러리를 열었다.전쟁은 예술의 중심지를 파리에서 뉴욕으로 이동시켰다.
그녀의 업적은 첫째로 2차세계 대전 와중 히틀러의 군대가 시시각각 몰려오는 가운데 유럽의 미술품을 수집해 미국으로 공수한일, 막스 에른스트등 작가의 스튜디오를 찾아 다니면서 하루에 하나씩 구입했다 히틀러가 노르웨이로 걸어들어가는 날 그는 레제의 스튜디오에서 한 작품을 천달러에 샀다. 전쟁중에는 미술품은 똥값, 싼값에 많은 작가의 많은 작품들을 사들일 수 있었다. 그가 사들인 작품은 주로 초현실주의의 계열 , 수개월에 걸친 괴이한 행위는 작품성향만큼이나 초현실적이었다. 그녀는 양탄자속에 작품들을 둘둘말아오거나 가재도구로 위장해서 미술품들을 미국으로 안전하게 공수하여‘금세기 예술’의 근간이 되었다.
그곳은 어느 미술관과 달리 손님과 작품사이의 장애를 걷어내 누구나 쉽게 찾아와 작품을 두고 교감하는 곳으로 자리매김되었다. 또한 페기는 브르통부부, 막스 에른스트등 현대미술작가군의 미국행을 도와 주었고 유명인사 구명을 맡았던 마르세이유의 비상구조 위원회에 50만 프랑을 기부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그녀는 유럽작가와 미국작가들의 전시를 지속적으로 열어준다(당시 그녀가 후원해준 예술가들은 잭슨 폴록, 로버트 마더엘등의 젊은 작가들이었다) 여기서 올린 수익으로 그녀는 베니스에 있는 구겐하임을 사들이게 .된다.
전후 세계미술의 중심이유럽에서 뉴욕으로 옮겨오는 데 한 축를 담당한 셈이다.
페기의 아트콜렉션은 1938년 부터 1940년까지 영국과 프랑스에서 1941년부터 1946년 사이 미국에서 구입한 것이 대부분이다. 8년이라는 시간은 그녀의 80년생애에서 길지않은 시간이고 주요작품을 구입한 원가는 25만달러 정도밖에 되지않는다. 하지만 1910년~1950년대에 활동한 작가들의 단면을 폭 넓게 보여주는 컬렉션의 가치는 최상으로 인정받는다. 사적인 취향에는 개인의 특정한 취향이 반영되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녀는 조금 달랐다. 달리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지만 컬렉션의 완성을 위해 소장했다.그리고 미술관을 설립해 많은 사람들이 함께 나눌 수 있도록 했기에 더욱 위대하게 평가받는다.
그녀가 사망한후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은 구겐하임 재단에 통합돼 현재 구겐하임 미술관 분관이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컬렉션중 단 한점의 작품도 가족에게 남기지 않았다. 그랬기에 지금까지 그녀가 완성한 컬렉션은 모두 그 자리에 보관 돼 잇다. 아들인 신드바드는 “만약 컬렉션을 가족에게 남겼더라면 산산히 흩어져 버렸을 지도 모를 일” 이라고 인정했다.
페기는 예술을 사랑했고 예술가를 도오주려 했다.그녀는 예술가는 아니지만 컬렉팅을 창작만큼이나 창조적인 작업으로 인식했다.
현재 뉴욕,빌바오,베니스,베를린,라스베이거스, 이 다섯 도시에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의 분관이 있다. 그 중에서도 스페인 빌바오에 있는 구겐하임미술관은 도시전체를 미술관으로탈바꿈시켜 가장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
성공요인을 꼽는다면 스페인 바스크정부의 안목과 투자, 쇠락한 공업도시 빌바오를 문화 화관광도시로 재현하고자 하는 주민들의 의지 그리고 구겐하임 관장의 열정, 마지막으로 건축을 담당한 프랭크 게리(Frank Gery)의 천재성을 들 수있다. 빌바오분관은 구겐하임 글로벌 전략의 가장 큰 장점은 문화도시로 특화시키면서 동시에 해당도시의 이미지를 좋게 만들뿐아니라 관광수입을 올려주고 그 수익으로 인근주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끝으로 뉴욕의 구겐하임에서 아시아작가로대규모개인전을 연 작가는 백남준과 중국의 차이궈창, 이우환이 있다.
참고문헌:
페기 구겐하임-모더니즘의 여왕 뉴욕 미술의 발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