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기법 연마 새로운 수묵화풍 창조
조개껍질로 독자적 영역 '패분화' 개척
인천미협 전신 '인천예술인협회' 결성
시립미술박물관장 등 요직 역임 '기둥'
유려한 질감과 굵은 선을 자유롭게 구사한 화가.
고여(古如) 우문국(禹文國·1917~1998)은 서양화로 첫 발을 내디뎌 한국화로 마침표를 찍은 인물이다. 고여의 몇몇 작품엔 그래서 두 개의 이미지가 공존한다.
이를 가리켜 미술평론가 김인환은 "기본적으로는 자연의 대상적 세계에 모티브의 원천을 둔 진경화"라고 말한다.
서양화(유화) 기법의 연장선상에서 수묵화의 기법을 연마, 종래의 화풍을 희석시켜 독자적 양식을 창출해 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고여의 작품세계는 어떤 틀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필치가 돋보인다.
평생 붓을 놓지 않았던 고여는 그에 못지 않게 인천예술계에 끼친 공로가 혁혁하다. 인천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인천미술의 산 증인'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타계하기 전까지 40년간을 인천미술의 중심축으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1917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고여가 그림공부를 시작한 것은 21세 때이다. 1937년 중국 상해로 건너간 그는 9년간 중국에 머물며 서양화와 한국화를 공부한다. '상해자유양화연구소'에서 서양화 실기를 가르치던 그는 우연히 검여 유희강을 만난다. '문조'였던 우문국의 호가 '고여'로 바뀐 것도 검여의 권유에 따른 것일만큼, 고여는 검여가 76년 별세할 때까지 인연을 가꾸며 예술과 인생을 논한다.
그의 인천에서의 삶은 1946년 시작된다. 당시 검여와 함께 귀국한 고여는 인천시 서구 시천동 검여의 집에서 숙식을 하다, 이후 초대 인천문화원장, 인천시립박물관장과 경기도 미술관계단체 임원과 미술협회 고문을 역임한다. 인천미술협회의 전신인 '인천예술인협회'도 49년 고여가 주도해 결성한 단체다. 검여와 함께 그가 가깝게 지내던 사람 중 한 명이 지난해 영면한 석남 이경성이다. 초대 인천시립박물관장이었던 석남에 이어 검여와 고여가 관장을 맡았다는 것은 이들의 관계가 평범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실이다.
박물관장 시절, 고여는 건물의 수리·보수, 소장품의 질적 향상, 향토문화재 수집·보존, 등 박물관 운영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시 당국과의 의견차로 2년 만에 사임하고 인천여고와 국민대학교에서 후학을 키웠다. 아울러 미협이사를 지내며 인천미술대전 운영위원, 심사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인천화단을 가꾸었다.
고여는 서양화, 한국화, 공예 그리고 그 만의 독자적인 '패분화'로 생전 18차례에 이르는 개인전을 가졌다. 초대·단체전은 100여 회에 이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흡족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69년 발행된 '월간 경기'에 쓴 '오소자변'을 통해 '이십세기 영웅이라고 할 수 있는 고 처칠경이나 일본의 유명한 문인 무자소로독 같은 이들의 그림은 프로의 작품으로 쳐도 너무나 훌륭하고, 반대로 필자 자신을 프로라고 친다면 외국의 대가나 전기한 두 아마추어의 작품에 비해 보면 프로로서의 나의 작품은 초라하기 이를 데 없다'고 적고 있다.
고여는 작가라고 해도 좋을 만큼 많을 글을 쓰기도 했다. 그는 49년 발행된 '노자공보' 1952년 '인천신문' 1960년 '인천일보' 등에 예술·미술 시평과 수필, 에세이 등 수십 편의 글을 기고했다. 그의 글들은 전반적으로 따뜻한 느낌을 준다.
자신의 예술세계를 스스로 낮춘 고여이지만 평론가가 바라보는 시각은 다르다.
미술평론가 이경모는 "서양화적 공간 구성과 입체감의 표현, 그리고 기법에 구애받지 않는 고여의 수묵(담채)화는 80년대 초에 절정기를 맞는다"며 "특히 81년 제작한 횡폭의 산수화는 말끔한 선과 절제된 준법, 현대적 채색과 공간구성 등 소상팔경도 중 '원포귀범'을 연상케 하는 전통과 현재가 잘 어우러진 수작"이라고 말했다.
그는 "만년의 작품들은 대담한 축약과 절제된 표현으로 일종의 선기(禪氣)마저 풍긴다"며 "그의 수묵담채화에서 보이는 수채화의 풍미는 이미 조선 후기 이재관, 김수철, 윤제홍, 김창수 등의 작품에서 엿보이던 신경향으로 족보 없는 한국화는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김진국기자 blog.itimes.co.kr/freebird
인터뷰
우 경 복 고여 첫째아들
"인천시립미술관이 건립된다는데 당연히 기증해 드려야지요."
고여 우문국 선생의 큰 아들 경복(59·사진)씨는 인천시립미술관이 설립될 경우 소장한 작품을 기증할 의사가 있느냐는 질문에 "그림을 판다는 것은 아버지의 정신을 파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미술관에 기증하면 아버지는 영원히 살아계시는 것 아니냐"고 강조했다.
동생들이 갖고 있는 것까지 합치면 50여 점에 이른다고 말한 그는 "다른 형제들의 생각과 나와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밑으로는 소설가 선덕, 미령 두 여동생과 남동생 경원씨가 있다.
"사람들을 워낙 좋아하셨어요. 그러다보니 약주도 많이 드셨지요."
고여는 오전에는 주로 그림을 그렸고 오후에는 사람들 만나는 일로 하루를 보냈다. 예술에만 전념하다보니 생계는 아내가 책임져야 했다.
"어머니가 올해 여든 한살 이십니다. 경제적인 능력은 아버지보다 훨씬 뛰어나셨지요."
재주가 많은 그의 모친은 경동에서 '자매수예'라는 수예점을 운영하며 여섯 식구의 생활을 억척스럽게 끌고 나갔다. 그래서인지, 그의 가슴속엔 예술을 하는 가장을 둔 집안에 대한 안타까움이 내재돼 있다.
경복씨는 "세상이 너무 상업적으로만 흐르다보니 예나 지금이나 예술가들은 먹고 살기가 힘들다"며 "묵묵히 예술에만 전념하는, 그리고 진짜 열심히 하려는 예술인들을 잘 선별해 경제적 지원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어쩌면, 세상에 대한 질책처럼도 보이는 말을 던지는 그의 얼굴에서 사람좋은 웃음이 피어난다. 욕심이 없는 얼굴이다.
고여와 절친했던 예술가는 다름아닌 검여 유희강이었다.
"본래 아버님 호는 '문조'였는데 절친하게 지냈던 검여 선생님이 고여라고 붙여줬다고 들었습니다. 검여, 고여 두 분이 워낙 친하시니까 호를 비슷하게 만드신 것 같아요."
중국에서 함께 유학한 고여와 검여는 얼마간의 나이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간 막역한 사이가 아니었다. 인천 도화동에 살면서도 아랫집 윗집에 살며 서로 내집처럼 오갔다.
검여는 고여를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사람이 진득하고 의리가 있으며 호쾌한 기개가 있으면서 남 도와주기를 좋아한다"고 말한 바 있다.
경복씨는 고여가 둔 4남매의 장남이다. 딸 선덕씨는 일간지 신춘문예에서 단편소설로 등단한 소설가이고 막내 남동생 경원씨도 고등학교 시절 그림을 뜻을 둔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사업가도 활동하고 있다.
"동생들한테는 안 그러셨는데 저한테는 유독 엄하셨습니다."
경복씨는 아버지 앞에서는 양반다리를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두주불사형인 아버지는 경복씨 또래 제자들에겐 술잔을 권해도 자신에겐 절대 술잔을 주지 않았다.
인테리어 사업을 하는 경복씨는 요즘 이따금씩 김학균씨의 작업실에 들린다. 그림을 배우기 위해서다. 물론 프로작가로 활동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김학균씨 역시 우문국씨와 교류가 있던 사람이다.
"김학균 선생님과 이런저런 얘기 하면서 그림도 배우면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그는 "인천시립미술관 건립은 전문가들이 잘 알아서 하리라 생각한다"며 "나와 동생들은 언제든지 작품을 기증할 준비가 돼 있다"고 강조했다.
/글·사진=김진국기자 (블로그)freebird
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댓글
검색 옵션 선택상자
댓글내용선택됨
옵션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