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자살(自殺)바위 전설들과 부엉이바위 자살 (1)
- 고란사(皐蘭寺)의 낙화암과 '자은암(子恩庵)'의 부엉이바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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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바위'가 된 부엉이바위
봉화산의 옛 명칭은 자암산(子巖山).
- 글 목차 -
제1장
1. "키요미즈(淸水) 부타이(舞台)에서 뛰어내린다"
2. 암하노불(巖下盧佛)일까? '암하노불(巖下怒佛)'일까?
3. 낙화암은 꽃잎이 아닌 피로 물들여진 '적벽(赤壁)'
4. 멀트노마 폭포(Multnomah Falls): 전염병을 멈추는 제물로 뛰어내린 자살바위
5. 이긴 추장보다 더 유명한 죽은 미안토노모(Miantonomo) 추장의 절벽 무덤
6. 버팔로떼가 집단투신한 '버팔로 박치기 절벽(Head-Smashed-In Buffalo Jump)'
제2장
7. 연인끼리 시기 질투한 전설을 가진 일본의 토진보(東尋坊) 자살바위
8. 마크트웨인 동네 한니발에서 본 인디안 청춘남녀의 자살바위
9. 댕기머리를 함께 땋아 매고 뛰어내린 괌 연인들의 자살바위
10.노르웨이의 자살바위: '강대상 바위'냐, 대팻날 바위(Tooth of Woodpalne)냐
11. 부탄의 '호랑이 굴 사원(Tiger's Nest Monastery)'의 절벽 동굴
12. 터어키의 절벽 동굴, 수멜라 기독교 사원(The Sumela Monastery)
맺는 말: 봉하마을 자암산(子巖山) 중턱에 마애석불이 쓰러져 있는 까닭
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의 고향 뒷산에 있는 부엉이바위에서 투신자살했다는 뉴스를 접하면서 세계의 여러 유명한 '자살바위' 장소들이 떠올랐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역임한 사람이 바위에 투신자살했다는 것은 대단히 전설적인 행동을 보여주고 있다는데서 충격적이다.
봉화산 정토원(淨土院) 암자가 있는 부엉이 바위는 험한 절벽 바위이다. 그와 유사한 곳이 고란사(皐蘭寺)가 있는 낙화암이다. 싫든 좋든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은 국회에서 탄핵을 받은 대통령이었으며 물러난 뒤에는 뇌물수수 사건에 연루되어 그의 수하 관리들은 물론 그를 따르던 지지자들마저 술잔을 기울이며 탄식할 정도였다는 것은 거의 '낙화암'에 떨어지는 것과 같은 분위기 속에서 부엉이 바위에서 떨어지는 결과는 강력한 반전의 충격이 된 상황이기도 했다.
그런 동시에 기독교 정권의 수사를 받은 그는 불교적인 배경을 가진 인물이었다.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일은 불교와 관련이 있다. 그런 면에서 내가 떠올린 두번째 장소는 절벽 위에 지어진 절간인 일본 교토(京都)의 키요미즈데라(淸水寺)의 절벽난간위의 무대(舞台, 부타이)였다.
바위절벽에서 뛰어내리는 투신자살은 세 가지 종류로 나뉘어진다. 종교적 배경을 가진 투신자살과 이루지 못할 사랑을 한탄하며 두 남녀가 함께 떨어져 죽는 연인들의 자살바위, 그리고 적으로부터 최후의 항복을 하느니 옥쇄의 결단을 내려 몸을 던지는 집단 투신자결이 그것들이다.
1. "키요미즈(淸水) 부타이(舞台)에서 뛰어 내린다"
얼마 전에 어떤 일본인이 우리나라에 대한 건전한 비판적인 책을 쓰면서 '맞아 죽을 각오(決死の覚悟)로 쓴' 책임을 강조한 적이 있었다. 일본인들에게 '죽을 각오'라는 말에 대한 그들 전통의 속담이 있다. 그것이 교토(京都)에 있는 키요미즈데라(淸水寺)의 부타이(舞台) 낭떠러지와 관련한 말이다.
"清水の舞台から飛び降りるつもりで"
(키요미즈 무대에서 뛰어내릴 생각으로)
이 말은 "清水の舞台から飛び降りる覚悟" 또는 "清水の舞台から飛び降りるつもりで勝負にでるよ" 등으로도 표현되지만, 그 기본은 일본의 <今昔物語集> 및 <宇治拾遺物語>에 나오는 "키요미즈 절간 무대 절벽에서 날아 내린다(淸水の 舞台から 飛び 降りる)"는 귀절이 원래의 내용으로 절벽에서 뛰어내릴 결사의 정신으로 임한다면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의미로 일본인들은 받아들이고 있다. 실제로 지난 2005년 어느 중년 일본 남성이 그곳 키요미즈의 부타이 절벽 아래로 투신자살한 사건이 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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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쿄토의 기요미즈데라(淸水寺)의 부타이(舞台) 벼랑
일본인들에게 벼랑에 뛰어내리는 자살을 심리적으로 미화시키는 장소가 되어왔다.
이에 대한 설명으로 일본의 <國語辭典 小>에는 "옛날부터 일본인들에게는 병으로 고통을 받거나 절대절명의 길흉을 점칠 때에 그리고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연모의 애타는 마음을 이루기 위하여 높은 장소에서 날아내리는 풍습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바위절벽에서 몸을 던진다는 것은 드문 일이다. 그런데 물도 없이 바위들이 깔려 있는 바위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는 일은 더욱 드문 일이다. 그것은 바위에 머리를 들이받는 행위와 같아 목을 매 달아 죽는 일보다 더욱 잔혹한 자살형태이다.
정치적인 압박 수사가 있었건, 그것을 빌미로 국면전환용으로 의도적인 투신자살을 했건 절벽 바위에서 뛰어내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은퇴한 전직 고관이 신병에 대한 고통을 못이겨 마포대교에서 뛰어내린 사건은 있었지만, 대통령직을 마친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 물도 없는 바위 절벽 아래로 뛰어래닌다는 것은 가히 종교적인 해석이 가미되지 않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의 유서에서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라는 표현은 다분히 봉화산의 불교적인 영향에서 그는 서산대사(西山大師, 1520년 - 1604년)의 임종게(臨終偈)의 귀절을 의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生也一片 浮雲起 死也一片 浮雲滅 浮雲自體 本無實 生死去來 亦如然
태어남이란 한 조각 뜬 구름이 일어나는 것과 같으며, 죽는 것 또한 한 조각
뜬 구름이 스러짐과 같아 나고 죽는 일이 자연의 뜬 구름과 같은 한 조각이
아니겠는가.
이 내용은 그대로 서산대사 시비(西山大師 詩碑)에도 새겨져 있는데 故 노무현은 화장하여 '작은 비석'을 세워주기를 바랐던 것도 이러한 서산대사의 임종게(臨終偈)를 따른 면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여기에서 서산대사는 절벽바위에서 떨어져 죽지 않고 임진왜란 때에 그야말로 '몸을 던져' 왜병을 무찌르는 일에 앞장섰던데에 비하여 노무현은 스스로 홀로 바위절벽 아래로 '몸을 던져' 자살을 했다는 것은 전혀 서산대사의 뜻과는 거리가 먼 행태를 보인 결과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는 왜 바위에서 몸을 던졌을까?
구름과 바위는 그 모양새가 닮은 데가 있다. '生也一片 浮雲'은 그에게 바위나 구름이 같은 조각으로 '巖也一片 浮雲'으로 느꼈을 수가 있다. 나는 그날 아침 부엉이 바위 위의 하늘에 구름이 있었는지 궁금하지만, 그는 부엉이 바위 위에 올라앉아 있다가 스스로 몸을 던지며 구름을 타고 내려간다고 애써 여겼을지도 모른다.
대통령까지 된 그의 명예가 다시 바위에 머리를 부딪치는 번민과 같은 곤두박질 쳐지는 상황에서 쳐해졌을 때 그 자신은 스스로의 인생이 한갖 뜬구름(浮雲)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구름만이 뜨는 것이 아니라 바위도 뜬다고 여긴 것은 부석사(浮石寺)의 부석(浮石)에서도 볼 수 있지 않는가.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의 고향마을 뒷산 부엉이바위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사건은 많은 사람들이 충격적으로 받아들였다. 특히 그 '충격'은 그의 몸이 아래로 떨어지며 바위에 몇번 '툭 탁 쾅' 부딪치는 소리를 인근의 농부가 들었다고 증언한 만큼 머리와 바위가 부딪치는 충격이기도 했다. 그러나 종교적으로 말하면 뜬구름(浮雲)과 뜬 바위(浮石) 즉 부엉이 바위와 그날 아침하늘에 뜬 구름은 '같은 자연의 조각'이 된다.
전통사회의 자살 중에서 자연지형을 이용한 자살은 바위 절벽에서 뛰어 내리는 대부분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엉이바위 투신 자살은 그런 면에서 아주 오래된 자살 풍습을 답습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바위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자살을 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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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하마을 자암산(子巖山)의 부엉이 바위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투신자살한 봉화산의 옛명칭은 자암산(子巖山)이었다.
자살바위는 대개가 전망이 내려다보이는 명승지의 하나로서 위험한 절벽을 이루고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자살바위들은 한 두 가지 이상씩 전설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전통적으로 자살에는 두 가지 방법이 유행했다. 그 하나는 목을 매달아 죽는 것이며, 또 하나는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투신자살'이다.
스스로 목을 매달아 죽는 일은 배우 최진실 자살이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목매달아 죽는 자살은 이 세상의 한을 이기지 못하여 고통의 연속 상에서 자신을 위쪽으로 끌어 붙이는 자살행위이다. 반면에 높은 곳에서 아래로 떨어져 투신자살하는 경우는 전 대통령 노무현 자살에서 보듯이 이 세상을 작별하고 다른 세상으로 새로 들어간다는 의미가 강하다.
그런 면에서 목매달아 죽는 경우는 이 세상을 끝내 잊지 못하는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계세성(繼世性)이 강하다면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투신자살은 이승과의 이별이 강조되는 단세성(斷世性)이 강하다.
2. 암하노불(巖下盧佛)일까? '암하노불(巖下怒佛)'일까?
바위절벽에서 투신자살하는 것에도 두 가지가 있다. 바위절벽에서 몸을 던져 자살하는 경우 주로 절벽 아래쪽에 깊은 물이 있는 장소인 경우가 많다. 아래쪽에 강물이나 바다가 있는 절벽은 '자살바위'로 인기를 누리는 장소는 세계적으로 많은 곳이 알려져 있다.
물이 있다는 것은 투신 뒤에 물 속으로 들어가서 충격을 완화하는 평안한 죽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물을 적대시하는 것보다 물 속으로 안기는듯 귀의하는 의미가 있다. 반면에 바위 절벽 아래의 맨 바위를 향하여 뛰어내리는 것은 그 땅을 향하여 맞부딪치는 충돌을 의미한다.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은 과연 이 강산(江山)에 대하여 그의 고향 뒷동산에 대하여 어떤 의미로 그렇게 머리를 바위에 부딪치는 형태로 자살을 한 것일까?
물이 없는 바위들이 많은 절벽 아래로 투신한 것은 일면 목매달아 죽는 자살과 같은 현세상에 대한 불만과 충돌의 의미가 들어 있다. 그 장소가 손쉬운 바로 뒷산이었다고 해도 바위에 충돌을 각오한 투신자살은 대원군이 특정 지역의 특징으로 언급한 '암하노불(巖下老佛)'과도 유사하다.
'암하노불(巖下老佛)'도 아니고 바위 아래로 스스로 투신자살했다는 면에서 '암하노불(巖下盧佛)'이 되지도 못한 채 이 세상에 대한 분노의 충돌을 남긴 '암하노불(巖下怒佛)'이라 해도 마뜩찮은 결과가 되었다. 부엉이바위 아래는 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위에 불이 있는 봉화산(烽火山)의 바위라는데서 차라리 '암하노불(巖下怒火)'라 할 수 있겠다. 유언에 화장하라는 것을 명시한 것 또한 물보다 불 속으로 들어간 자살이라 할 수 있다.
부엉이 바위와 함께 그의 투신자살한 사건은 두고두고 우리민족의 역사에서 특이한 '자살바위 전설'을 만들 여지가 있다. 부엉이바위의 자살사건은 신화적인 이름인 미네르바 필난이 인터넷에서 있었던 그 '미네르바'가 특히 부엉이 종류의 하나로 알려진 '미네르바 부엉이'가 크게 알려진 뒤의 일이라 더욱 신화적인 내용까지 연결되어 있다.
특히 일국의 대통령을 역임하고 고향에 내려와 스스로 바위절벽에서 뛰어내린 자살은 세계사에 없는 전대미문의 사건이란데서 내가 여기에 바위절벽 투신자살에 대한 세계적인 전설들과 그 의미들을 해석해두고자 한다.
그동안 남미의 쿠데타로 인하여 현직 대통령이나 총리가 자결한 사건은 있었다. 그런 경우 권력이 직접적으로 빼앗긴 형태를 참지 못하여 스스로 죽은 경우이기 때문에 '자결'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대통령직을 수행한 뒤에 수사과정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경우는 자결은 아닌 자살일 수 밖에 없다. 특히 수사가 종결되지 않은 경우에서 그것은 분명 자살로 분류되는 사건임에 틀림없다.
그렇기 때문에 봉화산 부엉이 바위는 개인적인 자살 장소가 되기 때문에 자살바위에 속하게 될 뿐 국가를 위하거나 민족을 위한 또는 권력과 관계된 '자결 장소'로 추앙될 수는 없는 '자살 바위'가 될 수 밖에 없다.
다만 부엉이 바위는 수많은 자살바위들이 그렇듯이 또 하나의 전설을 만든 자살 바위 반열에 들어가게 된 것은 분명하다. 특히 부엉이 바위는 전직 대통령이 홀로 뛰어내린 투신자살 바위가 되었다. 그런 면에서 투신의 그 순간에 대한 증언이 오락가락하는 만큼 향후 온갖 추측성이 난무하는 이야기들이 만들어질 수 있는 '자살바위 전설'을 만들어낼 수 있는 바위 절벽이 될 수 있다.
우선 화제거리가 될 수 있는 내용의 하나는 불교적으로 화장을 했는데 그에게서 사리(舍利)가 나왔을까? 하는 것이다. 불승이 아니라도 사리가 나오는 경우가 있기도 하지만, 서둘로 유족들이 분골(粉骨)을 결정한 것은 나중에라도 사리 준재 여부 문제가 남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바위에서 뛰어내려 '온몸의 뼈'가 부셔져졌다고 했는데 유언에 따라 화장한 뒤에 화장한 유골을 분골(粉骨)까지 했다. 분골이란 뼈와 남은 잔재를 모두 가루로 갈아 재처럼 만드는 것을 말한다. 주로 화장한 뒤 가루가 된 분골은 특정한 장소에 뿌리는 산골(散骨)하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일부는 향나무 분골함에 넣어 '작은 비석'과 함께 봉화산에 묘지를 선정하여 매장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바위절벽에서 투신자살한 경우 그 자살한 사람이 어디에 묻혔는지보다 어느 절벽바위에서 자살했는지가 더 많이 알려진다. 그렇게 그 자살바위는 유명하게 된다. 그래서 '자살 명소(自殺 名所)'라는 명성까지 가진 자살바위는 세계 모든 나라에 존재한다. 특히 유명한 자살바위는 많은 투신자살율을 기록하고 있기까지 하다.
그런데 한 곳의 바위절벽에서 많은 사람들이 같은 뜻으로 자살하는 경우 자결의 장소가 된다. 특히 전쟁에서 나라의 운명과 관련된 경우 그런 '대량투신자살'은 역사에서 곧잘 일어났다.
3. 낙화암은 꽃잎이 아닌 피로 물들여진 '적벽(赤壁)'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백제가 멸망될 때 낙화암에서 '삼천궁녀'가 투신자결했다는 것은 백제의 많은 고관들도 함께 투신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나라의 멸망을 한탄하여 행한 '자결'이라 할 수 있다. 후대의 왜곡이 아니라면 낙화암 고란사는 아마도 봉화산 정토원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모의 위패를 안치한 곳만큼이나 백제의 시조를 모신 신궁의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왜곡하여 '삼천궁녀'가 떨어져 죽은 곳으로 비하 윤색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대량투신자결 양상을 물려받은 곳이 일본이다. 백제가 멸망한 뒤 그 왕족들이 일본으로 망명하여 일본역사의 중요한 왕족의 가문이 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세계적으로 장수국가로 유명한 일본인들이 자살율 또한 높다는 것은 아이러니하지만, 그것은 불교적 배경과 더불어 사무라이들의 하라키리로 알려진 자살문화의 전통에 연결되어 있다. 특히 지난 태평양전쟁 때에 미군의 공격에서 패배를 눈앞에 두고 항복보다는 집단 투신자결을 택한 일본군측의 관민들의 자살 형태는 오랜 역사적 배경이 백제의 낙화암에서 그 뿌리가 있다.
꽃잎처럼 떨어졌다는 '낙화'란 어쩌면 수많은 사람들이 집단으로 떨어지면서 바위에 몸이 부딪친 결과 피로 물들여진 '적벽(赤壁)'을 순화시킨 표현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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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로 붉지 않은 바위절벽, '적벽(赤壁)'
전쟁으로 피로 물들었기에 '적벽(赤壁)'이라 했던 것이 아닐까.
<삼국지>에 나오는 적벽대전이란 수많은 인명이 절벽에서 뛰어내리거나 죽음을 당한 피로 물든 '적벽(赤壁)'의 의미에서 나온 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중국의 '적벽(赤壁)'이 오늘날 그렇듯이 깎아지른 절벽에 암벽문자를 새길 때는 자주 붉은 글씨를 쓴다는 것은 '피로 물든 요새지의 절벽'의 의미를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바위 절벽에 떨어져 죽는 자살의 경우 전쟁에서 자결장소로도 많이 알려지기도 한다. 임진왜란 때에 문경새재 요새지를 거부하고 배수의 진을 친 뒤에 패배했던 신립장군과 그 수장들이 뛰어 내려 자결했다는 탄금대는 바위절벽이다. 그곳은 신라의 우륵(于勒)이 가야금을 탔던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명승지가 자결장소가 된데는 그 지형이 절벽스러운 바위의 특징 때문일 것이다.
낙화암과 유사한 '적벽(赤壁)'을 만든 집단자결 바위절벽(Suicide Cliff )은 싸이판(Saipan) 섬에 있다. 일본군과 그 관민들이 함께 집단으로 떨어져 바다에 투신한 절벽바위는 기념비까지 만들어 두고 있다. 자살바위와 '비석'은 어쩌면 같은 비운의 장소의 세트 장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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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판의 일본군 자살바위 아래의 평화공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선친 묘자리가 풍수적으로 살기가 있다는 뉴스 기사가 이번에 보도되기도 했다. 자살바위는 풍수적으로 지형의 '외통수' 상을 논하기도 하지만, 그 장소 이름들도 들먹여진다.
봉화산(峰火山)은 본래 고문헌에는 자암산(子巖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봉화대가 그곳에 설치되어 봉화산(峰火山)이 되었다. 그런 산 아래의 '봉하(峰下)'라는 마을 이름은 봉화산(峰火山) 아래에 있다고 하여 '봉하(峰下)'라고 부르게 되었지만, 본래 봉하는 본산(本山)리에 속해 있었다. '本山'이란 '산뿌리'의 의미가 있다는데서 '봉하(峰下)'라는 이름과 같은 아래쪽을 의미하면서 '낙화암'처럼 '떨어져 내려 가는' 의미가 있다.
부엉이바위에서 투신자살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노무' 이름과 유사한 유명한 미국의 자살바위 절벽전설 두 곳을 여기에 소개해둔다. 공교롭게도 절벽 바위에서 뛰어내린 '노무현' 전대통령의 이름과 유사한 '노모' 추장과 또 유사한 '노마' 절벽 폭포 이야기도 있다.
4. 멀트노마 폭포(Multnomah Falls): 전염병을 멈추는 제물로 뛰어내린 자살바위
미국 서부의 오래곤주 포틀렌드 시티 인근에 있는 멀트노마 폭포(Multnomah Falls)에 전해오는 전설도 바위절벽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인디안 공주 이야기가 전해져온다.
멀트노마(Multnomah Falls) 폭포는 필자가 2004년 그곳 일대의 여러 폭포들을 함께 탐방했을 때 가장 멋진 이단폭포였다. 멀트노마 폭포는 미국 국립 콜롬비아강 명승지(Columbia River Gorge National Scenic Area)로 지정되어 있을만큼 강변에 높이 깎아지른 아름다운 절벽지대로 폭포들이 떨어지는 곳이다.
미국의 서부에서 큰 도로변 도시 인근의 폭포가 이곳 오래곤주 포트랜드시 인근에 자리잡고 있다. 국립강변도로 풍치를 자랑하는 명소로서 특히 멀트노마(Multnomah) 폭포를 중심한 레이토렐 폭포(Latourell falls), 면사포 폭포(Bridal Veil Fallls), 와키나 폭포(Wahkeena Falls), 오니안타 폭포(Oneonta falls), 위 아래의 말꼬리 폭포(Horsetail falls), 엘로와 폭포(Elowah falls) 등의 7-8개의 높은 폭포들이 줄지어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콜롬비아 강을 향하여 떨어지는 폭포들은 요새미티 국립공원의 폭포들에 견줄만한 아름다운 폭포들이다.
*위 사진은 필자가 찍은 오래곤주 포틀랜드 인근 콜롬비아강변의 멀트노마(Multnomah) 2단폭포.
콜롬비아강은 작은 그랜드 캐년 분위기로 랄크산쪽의 강변은 높은 절벽들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랄크 산에서 내려오는 여러 골짜기 물들이 콜롬비아 강 절벽으로 떨어지면서 멋진 폭포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곳 폭포들의 유래에 관한 인디안 전설은 무서운 전염병 이야기와 연관되어 있다. 그곳 인디안 추장의 딸이 절벽 꼭대기에 가서 전염병이 더 이상 생기지 않도록 신령님께 기원했다. 그래서 만일에 전염병이 멈출 수 있도록 그녀 자신이 절벽 아래로 뛰어내려 제물이 되겠다고 두 손을 모아 기원하고 절벽 아래로 뛰어내려 거기에서 죽었다.
다음날 추장이 이 소식을 듣고 놀라 쫓아와 그 절벽아래에서 그의 딸의 시신을 안고 크게 통곡하여 산신령이 듣도록 크게 울며 그녀의 기원이 헛되지 않기를 바랬다. 그때 갑자기 절벽 위에서 커다란 물이 쏟아지기 시작했으니 그것이 멀트노마 폭포(Mutnomah Falls)가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복수를 쓰는 것은 멀트노마 폭포가 이단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설에 따르면 멀트노마 폭포의 물의 양이 적절하게 떨어지는 날은 그 폭포수 절벽에서 추장의 딸의 얼굴이 보인다고 한다.
이러한 유사한 전설은 나이애가라 폭포에도 전해져 온다. 나이애가라 폭포 아래쪽에 유람선을 타고 들어가면 어떤 때는 그 폭포수 사이의 바위들이 보이는 모습이 여신의 모습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몇십년전 나이애가라 폭포 안내 책자에까지 그려져 있었다.
5. 이긴 추장보다 더 유명한 죽은 미안토노모(Miantonomo) 추장의 절벽 무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부엉이바위에 뛰어내린 자살사건 뒤에 연이어 그곳에서 따라 뛰어내린 전직 고위층이 없는 것을 보면 분명 바위절벽의 투신자살은 지도자의 길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역사 속에는 장수가 뛰어내리면 함께 부장들이 뛰어내린 흥미로운 사건들이 많이 있다. 특히 것은 적장이 용감하게 뛰어내렸다고 함께 뛰어내린 것은 더 흥미롭다. 그러면서 먼저 뛰어내린 장수가 더 유명해진 것은 또 뭐라고 말해야 할까.
적의 공격이 다가오자 최후를 절벽 아래로 뛰어내린 용감한 추장 이야기는 북미 인디안들에게 전해져 온다. 그런데 그 추장의 이름이 어쩌면 바위에서 뛰어내린 '노무현' 전 대통령 이름과도 유사하기까지 하다.
미국 동부에는 모히간(Mohegan) 인디안들의 유명한 바위 절벽이 있다. '인디안 투신 바위(Indian Leap)'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ㅎ는 이 절벽은 미국 동부인 코네티컷주의 노르위치(Norwich) 시티 인근에 있다. 이 절벽 지역은 운카스(Uncas) 추장이 이끄는 모히간족 인이안들의 거주지였다.
이른바 대평원 전투(The Battle of the Great Plain)로 불리는 1643년 9월 17일 이 지역의 모히간(Mohegan) 인디안들과 현재의 로드 아일랜드 지역에 살던 나래간세트(Narragansett) 인디안들 사이에서 일어났던 전쟁은 이곳 '인디안 투신 바위' 인근에서 일어났던 전쟁이다.
나라겐세트 인디안들의 미안토노모(Miantonomo) 추장은 9백명의 무사들을 이끌고 이곳의 모히간 인디안들의 중심지인 셋턱켓(Shetucket) 마을을 공격해 왔다. 이 전투가 일어났던 전날밤 모히간 인디아들은 적이 쳐들어오는 것을 감지한 뒤에 운카스 추장과 함께 전략을 짰다.
운카스 추장은 병사 수에 있어서 미안토모모 추장 군사들과 싸우는 것은 중과부적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용감한 추장이었기에 언제든지 전투 중에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특히 한 사람의 생명을 바쳐 나머지를 살릴 수 있다면 그는 언제든지 죽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몸소 강조해 왔다.
그래서 모히칸 인디안들의 운카스 추장은 많은 인명을 살상하는 대전투를 치르는 대신에 나래간세트 인디안 추장인 미안토노모에게 일대일의 결투를 신청했다. 그래서 두 추장이 중앙 선에서 만났을 때 만일에 미안토노모가 결투를 거절하면 운카스 추장은 그의 부하들이 보도록 그 자신이 땅으로 몸을 엎드리는 신호와 함께 일제히 화공으로 불화살을 발사하면서 적진을 향하여 급습하도록 전략을 짰다. 수적으로 밀리는 형국에서 최선의 방책으로 생각한 것이다.
양쪽 진영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도열한 한 복판에서 운카스 추장은 나라간세트 인디안들의 미안토노모 추장을 만났다. 그 지역은 오늘날 '이스트 그레잇 플레인(East Great Plain)' 지역이다. 예상대로 미안토노모 추장은 운카스 추장의 제안을 거절했고 운카스 추장이 몸을 낮추는 것을 신호로 모히칸 족 인디안들은 일제히 불화살을 날렸다. 갑자기 공격을 받게 된 나라간세트 인디안들은 혼비백산하여 진중이 흔들리면서 미안토모 추장과 그 중심 무사들이 달아나기 시작했는데 그곳의 지리를 잘 모르던 그들은 막다른 절벽 지형인 얀틱 폭포(Yantic Falls) 바위 절벽쪽으로 도망을 갔다.
절벽 위로 내몰린 미안토노모 추장과 일부 부하들이 모히간 인디안들에게 항복하는 대신 높은 절벽 아래의 건너편 바위로 뛰었다. 그러나 미안토노모 추장은 성공적으로 건너편 바위까지 건너뛰었으나, 그의 다리 하나가 에서 부러졌다. 나머지 나라간세트 인디안 병사들도 따라 뛰었으나 건너편 바위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많은 병사들이 절벽 아래에 깔린 바위로 추락하여 죽었다. 그것을 보자 나머지 나라간세트 인디안들은 항복하고 모히간 인디안들의 포로가 되었다.
운카스 추장이 절벽 위로 올라와 보았을 때 절벽 사이 건너편에서 적들이 우왕좌왕하는 것을 보고 마지막까지 적장 미안토노모 추장을 잡기 위하여 그 자신 그 절벽을 용감하게 건너 뛰어내렸다. 무사히 건너편에 뛰어내린 운카스 추장은 다리가 부러져 힘을 못쓰게 된 미안토노모 추장을 붙들어 포로로 잡았다. 결국 미안토노모 추장은 운카스 추장에 의하여 참수
되었고 그 시신은 그가 잡힌 그 절벽 건너편 인근에 묻어주었다. 특히 항복하지 않고 절벽 위에서 건너편 절벽 아래로 뛰어내린 미안토노모 추장의 용기를 기념하여 그의 무덤을 작은 바위돌들로 덮어주어 그곳이 미안토노모 추장의 묘지로 기려주도록 했다.
그로부터 해가 지나갈수록 그 돌더미 무덤의 크기는 점점 커지게 되었다. 그 이유는 다른 인디안 무사들도 이곳을 방문할 때마다 절벽을 뛰어내린 미안토노모 추장의 용기를 추모하여 돌을 가져다 놓았기 때문이다. 우리민족의 전통 서낭당의 돌무더기가 불어나는 이유가 같은 배경이라 할만하다.
18세기 즈음 어떤 농무가 이곳을 토지로 사들였는데 그 돌무덤을 발견했으나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그 돌들을 그의 집과 헛간을 짓는 주춧돌로 써버렸다.
그러나 그 미안토노모 추장의 무덤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어 1841년 7월 4일 노르위치 시티의 몇몇 시민들이 그 돌무덤이 있던 곳에 미안토노모 추장과 그의 용감한 부하들을 추모하여 작은 화강암 비석을 세워주었다.
On July 4th, 1841 a few citizens of Norwich erected a granite monument where the mound of stones once stood and dedicated it to Miantonomo in a solemn ceremony to honor the former warrior and chief.
그로부터 이곳 절벽과 미안토노모 추장과 그 무하들의 돌무덤 및 비석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위의 내용은 다음 사이트에서 필자가 번역한 것이다.
http://mouseski.blogspot.com/2008/12/legend-of-chief-uncas-and-indian-leap.html
6. 버팔로떼가 집단투신한 '버팔로 박치기 절벽(Head-Smashed-In Buffalo Jump)'
사람들만 함께 뛰어내린 것이 아니라 동물들이 집단으로 절벽에 뛰어내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된 '자살바위'가 미국의 인디안 지역에 있다. 미국과 카나다 국경지대의 로키 마운틴에 있는 '버팔로 박치기 절벽(Head-Smashed-In Buffalo Jump)'이라는 희한한 명칭을 가진 장소가 그곳이다.
이곳은 인디안들이 사냥을 위하여 버팔로 들소떼들을 한꺼번에 많이 죽이는 방법으로 이곳 절벽 위로 내몰리게 하여 많은 들소 떼가 바위 절벽 아래로 추락하도록 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그 바위 절벽의 별명이 "옛날 사형대(ANCIENT KILLING TOOLS)"라고도 불린다. 이곳은 카나다의 알버르타(Alberta)주의 785번 하이웨이 인근의 포트 마클레오드(Fort Macleod)에 있는 너비 18km의 평지 끝에 나타나는 일렬로 길게 띠로 이루어져 있는 바위절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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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팔로 박치기 절벽(Head-Smashed-In Buffalo Jump)'
대평원 끝에 갑자기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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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사형대(ANCIENT KILLING TOOLS)"라 불리는
'버팔로 박치기 절벽(Head-Smashed-In Buffalo Jump)
인디안 사냥꾼들을 피하여 대평원을 가로질러 집단으로 도망쳐 온 버팔로 들소떼가 10m 높이의 이 벼랑이 놓인 줄을 모르고 갑자기 나타난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게 된 것은 고고학적으로 5,500년 전의 일이다. 실제로 그 시기의 인디안들이 사냥을 위하여 그 들소 떼들을 몰아가게 되어서 죽었는지 아니면 들소떼 자신들이 천둥 등의 자연 현상에 놀라 함께 도망치다 떨어졌는지 정확히 알 길이 없으나, 그 절벽 아래에는 10미터 두께의 들소떼 뼈층이 발굴되었다.
그런데 '버팔로 박치기 절벽(Head-Smashed-In Buffalo Jump)'이라는 명칭이 붙은 것은 그 절벽 아래에서 사람 해골이 들소떼의 추락으로 눌려 죽은 채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떨어지는 버팔로를 서로 차지하려고 절벽 아래쪽에서 떨어지는 버팔로를 바라보다 버팔로와 '박치기'를 했다는 것이다. 버팔로떼가 집단 '자살한 바위'라는 의미에서 그 이름이 희한하게 지어진 '박치기 자살바위' 절벽이다.
블랙풋 인디안들은 이곳 절벽을 그들의 언어로 에스티파-스키키키니-콧("Estipah-skikikini-kots")이라고 부른다. 한 젊은 블랙풋 인디안이 그 절벽 아래에서 버팔로떼가 떨어지는 것을 구경하다가 떨어지는 버팔로떼에 깔려 죽었다. 그래서 그 절벽 이름인 에스티파-스키키키니-코트("Estipah-skikikini-kots") 즉 "박치기 절벽(where he got his head smashed in)"이라는 뜻이다.
오늘날까지 이 지역에 오랫동안 살아온 인디안들은 블랙풋 인디안(Blackfoot Indian) 족속이다. '씩씨카'로 자신들을 칭하는 블랙풋 인디안(Blackfoot Indian) 족속은 필자가 찾아내 미디어에 소개되기도 했지만, 그들의 윷과 윷말판은 우리 민족의 윷과 윷말판과 너무나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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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팔로 박치기 절벽(Head-Smashed-In Buffalo Jump)' 박물관
이미 내가 '콘디안(Kondian) 문화' 게시판에 소개한 바 있지만, 그들은 고구려 각저총 벽화의 씨름꾼의 상투처럼 뭉툭한 상투를 하기도 했다는 면에서 여러가지로 우리민족과 유사한 풍습을 이어온 인디안들이기도 하다.
블랙풋 인디안들은 서쪽 3 km 지점에 있는 폴큐파인 힐(Porcupine Hills)로 부터 버팔로 떼를 몰아부쳐 이곳 '버팔로 박치기 절벽'으로 오도록 했다는 것이다. 대평원 중간에 갑자기 길이가 300m에 달하는 이곳 바위 절벽은 평지에서 갑자기 꺼져 내려간 곳이라서 버팔로떼들이 연쇄추락하기에 알맞은 지형이 되어 있는 곳이다.
그 뼈들의 층이 무려 10m 두께에 달한다는 것은 얼마나 자주 버팔로떼들이 이곳에 추락했는지를 보준 증거라 할 수 있다. 버팔로떼가 떨어지고 나면 인근의 인디안 켐프에서 기다리고 있던 인디안들이 그 절벽 아래로 가서 고기를 손질하고 가죽은 인디안 티피나 옷을 만드는데 사용했다.
19세기 백인들이 이곳에 들어온 뒤에 이 지역은 한동안 별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었지만, 1938년 카나다 지역에 속하는 절벽 아래쪽을 미국 자연사박물관측이 발굴하게 되었다. 그 결과 1968년 카나다 국립사적지가 되었고 이어 1981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는 것은 절벽 지형을 이용한 대량 사냥을 했던 인디안들의 지혜가 문화인류학적으로 특이했다는 것이 그 이유로 보인다. 특히 유네스코의 문화유산 지정에서 이곳 '박치기 절벽'은 그 특징이 특유하여 이집트의 피라미드, 영국의 스톤헨지, 갈라파고스 섬과 같은 그룹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버팔로 떼처럼 짐승들은 전망이 잘 보이지 않는 갑자기 나타난 절벽에서 집단으로 투신 '자살'하게 되지만, 인간은 전망이 좋은 명승지의 바위절벽을 '자살 명소'로 선택했다.
오늘날의 문명사회에서도 절벽바위 자살보다 전망이 좋고 높은 인공적인 곳에서도 자살을 많이 한다. 그렇기에 금문교나 에펠타워 같은 높은 건축물에서 내려다보는 것은 '세상이 작게 보이기 때문'으로 자살을 유도하기 쉽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저에서 작은 골짜기를 건너 200 m 동쪽으로 가면 봉화산 중턱에 부엉이 바위가 솟아 있다. 사저 앞에서 보면 사저 지붕 위로 부엉이바위가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故 노무현의 삶은 작은 골짜기 하나 지나 부엉이바위로 올라간 짧은 거리의 삶이 되고 만 것일까. 일개 필부도 인생의 고해를 인내하며 살아가는데 그렇게 잔혹한 죽음을 택했다는 것은 그의 인생만큼이나 그 자신의 성품 또한 부드럽지는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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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키우던 부엉이바위는 결국 스스로 몸을 던진 살기가 서린 자살바위가 되었다.
다른 나라들에는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대통령들의 위대한 업적을 기린 '큰 바위얼굴'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투신자살한 '자살명소 큰 바위' 소문만이 전세계로 퍼져가고 있으니 이 얼마나 해괴한 일이 되었는가.
'
그는 대통령이 되지 말았어야 했다는 것은 영결식의 추모사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닌 사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자살은 국민적 롤모델이 해야 할 일이 아니라 전란에서 장수급에서나 일어날만한 일이 아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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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산 사자바위의 달밤
'큰 바위 얼굴'이 아닌 전세계가 알게 된 자살바위가 생긴 봉하마을은
'봉상(烽上)'마을이 될 수 없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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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하마을 (상공2km) 글자 오른쪽 끝에 부엉이바위가 보인다.
봉화산에서 불꽃이 타올라 봉화대가 신호를 보낸 것은 결과적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고를 알리는 신호가 되었다. 그가 부엉이바위에서 뛰어내려 봉하 마을 뒷산을 피로 물들이게 한 것은 부엉이바위를 '적벽(赤壁)'이 되게 한 것이다. 봉하마을 뒷산 정토원에 안치했다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선친들의 혼백 앞에서 과연 바위에서 뛰어내린 투신자살 사건은 국가 대통령으로서는 물론 한 사람의 자식된 도리로서도 불효의 죄를 저지른 것이다.
봉화산(烽火山)의 옛 명칭은 자암산(子巖山)이었다. 그는 봉화대 신호를 받아 국정을 다스리는 나라의 지도자의 자리가 아니라 그저 고향으로 돌아가 바위의 아들 '子巖'이 되고 말았다.
그가 살아 대통령으로서 저지른 뇌물 수뢰죄보다 국민의 지도자로서 전직 대통령으로서 바위에서 투신자살한 죄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국회에서 탄핵받은 것은 스스로를 '탄핵'시킨 것으로 자신이 정당화시키는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노무현 전 대통령이 투신자살한 봉하마을 뒷산 중턱에는 먼저 떨어져 쓰러져 있는 마애석불이 누워 있어 심상치 않은 조짐이었을까? 다음 장에서 세계 연인바위 전설들과 부엉이바위 자살의 상징성들을 해석해 보일 것이다.
- 다음장에서 계속 -
************************************************************************(05/31/09 오두)
봉하마을 자암산(子巖山) 중턱에 마애석불이 쓰러져 있는 까닭 (2)
![6_1_~1[1].JPG](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afe.chosun.com%2Fimg_file%2Fclub_file%2F96%2Fdreamview%2Fbbs%2F62%2F6_1_%7E1%255B1%255D.JPG)
*봉화산 중턱에 쓰러져 있는 마애석불
노무현 전 대통령은 결국 낙향의 꿈을 실패한 대통령이 되었다. 그 스스로 어렸을 때 타고 놀던 부엉이바위는 명당이 아니라 그에게 살기(殺氣)가 되어 목숨을 던진 곳이 되었다.
훌륭한 격투 선수는 공격도 잘 해야 하지만 낙법도 잘 해야 한다. 정말 '바보'라는 별명이 좋았다면 진실로 마음 속에서 질 줄 알고 넘어질 줄 알아야 했을텐데 그렇지 못했다.
이명박 정권이 집요하게 수사를 해서 뇌물수수죄를 물고 늘어졌다고 해도 그것이 정말 무죄이고 아무것도 아니었다면, 노무현 자신도 죽을 하등의 이유가 없는 하찮은 것이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가 부엉이바위에서 투신자살했다는 것은 수사상에 드러나는 사건 자체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반증시킨 것이 되었다.
어려울 때 즐겨 가던 산에서 정기를 이어받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노무현 전 대통령 사저의 뒷산 부엉이바위는 오히려 그에게 살기(殺氣)로 작용했다.
그것은 평소에 그만큼 노 전대통령이 '살기(殺氣) 서린' 독기를 품고 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평소에 지나친 독기어린 말을 하거나 사회적인 살기를 품게 되면 그 개인 자신이 어려울 때 스스로에게도 그러한 '살기(殺氣)'를 품기 쉽게 된다.
"어리석은 노인이 산을 옮긴다"는 말이 있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산이 자신의 몸을 바위 아래로 옮긴 꼴이 되었다. <열자(列子)> 탕문편(湯問篇)에 나오는 말인 그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사자성어를 노 전대통령이 인터넷에서 '노공이산(盧公移山)'이라고 패러디하여 그의 닉네임으로 사용하여 글을 쓰기도 했다.
그 스스로 '바보 대통령'이라는 별명을 좋아했다고 하지만, 정말 어리석은 자살행위를 한 것은 오히려 '산이우공(山移愚公)' 아니 '산이노공(山移盧公)'이 되었다. 그가 죽기 며칠 전날 걸어놓은 '우공이산(愚公移山)' 액자를 떼게 했다는 것은 스스로 자신이 바보스러운 처지에 놓인 것을 비관한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
모든 자살은 어리석은 판단에서 이루어진다. 특히 무언가 못다 이룬 한 때문에 이 세상을 버리는 행위로서 젊은 연인들 그것도 전통 봉건사회의 제한이 많았던 이루지 못할 사랑을 했던 청춘남녀가 자살바위에서 투신하는 때에사 발견되는 어리석은 행태일 뿐이다.
옛날 자살 명소들은 주로 기암절벽을 이루는 명승지들이 이용된 것은 더 좋은 세상을 이 세상의 아름다운 명승으로 다시 태어나는 의미를 가졌다. 이웃나라 일본의 경우 자살 명소는 토진보(東尋坊) 자살바위가 유명하여 이른바 일본인들은 그곳을 '自殺の名所'라고 부른다. '명소(名所)'라고 하는 것은 그 장소의 명승지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7. 연인끼리 시기 질투의 전설을 가진 일본의 토진보(東尋坊) 자살바위
높은 절벽 아래로 바다물이 출렁이는 토진보(東尋坊) 자살바위는 큐슈의 후쿠이현에 있다. 이곳 바위절벽은 금강산의 총석정만큼 뚜렷하지는 않지만, 주상절리(柱狀絶理, prismatic columns) 형태의 수직 절벽바위를 이루고 있다. 바닷가에 주상살리 절벽이 있는 곳은 금강산의 총석정이 세계적으로 유명하지만, 그 다음으로 토진보 주상절리와 노르웨이의 서해안 '강대상 바위(Pulpit Rock)' 절벽바위들이 들멱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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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진보(東尋坊) 자살바위의 전설에는 다음과 같은 시기와 질투가 얽힌 연인들의 한이 서린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토진보(東尋坊)라는 한 불승이 있었다. 사람들이 별로 그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는 '아야'라는 아름다운 공주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야 공주를 좋아하던 다른 한 사람으로부터 시기를 받아 이곳 절벽에서 떠밀려 바다로 떨어져 죽었다. 전설안 말하기를 토진보가 죽어 복수를 하기 위하여 그가 죽은 곳에서 같은 달 같은 날의 같은 시간에 언제나 세찬 폭우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런 몇 십년 후 한 사려깊은 승려가 토진보의 영혼을 불쌍히 여겨 그곳에서 토진보를 위하여 예불을 드린 후부터는 폭풍우가 잠잠해졌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것이 질투가 나서 뒤에서 절벽에서 밀어트렸다는 이곳 토진보(東尋坊) 스님의 자살바위는 한이 서린 자살바위를 라 할 수 있다. 연인들의 사랑과 질투와 시기에서 나타난 토진보(東尋坊) 자살바위도 연인의 자살바위라고 할 수 있다. 비운에 죽음을 당한 그 한 맺힌 '돌풍의 영혼'을 달래기 위하여 다른 스님의 추모의 예불을 드린 후에 잠잠해졌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흔히 한을 가지고 죽거나 비명에 죽은 사람들을 위하여서 추모 행사를 하는 것은 남은 자들의 심리를 안정시켜주는 의미를 가진다는 것은 토진보(東尋坊) 자살바위 전설에서 볼 수 있다. .
가장 한맺힌 일은 이와같이 서로 사랑하는데도 그 사랑을 이룰 수 없는 것을 알게 되어 청춘남녀 두 사람이 스스로 절벽바위 아래로 몸을 던졌다는 것은 자살바위에서 가장 많이 나나타는 현상이다.
8. 마크트웨인 동네 한니발에서 본 인디안 청춘남녀의 자살바위
전통사회에서는 언제나 사랑에도 봉건적인 제약이 많았다. 그것은 인디안들에게도 같은 현상이었다.
시카고에서 6시간 거리에 있는 미조리주 미시시피강변에 있는 한니발은 <톰 소여의 모험>, <허클베리핀의 모험>의 소설 배경으로 유명한 마크 트웨인의 유년시절을 보낸 한니발(Hannibal) 동네이다.
그 곳은 필자가 2005년 처음 시카고 동포들을 버스 투어시킨 사적지가 된 후 지금은 시카고 문인회의 필수 투어코스가 되어 있다. 한니발 동네는 미시시피 강변 마을답게 강을 내려다보는 절벽들이 주변에 있다. 특히 극소에는 '연인의 바위'라는 4-50미터 높이의 바위 절벽이 있는데 거기에서 인디안 총각처녀가 뛰어내린 전설이 있다.
무사집안의 한 용감한 인디안 청년과 그 마을의 인디안 추장의 딸과 서로 사랑을 했다. 그러나 인디안 추장과 그 부족들로부터 결혼이 허락되지 않자 어두운 밤을 이용하여 그 인디안 청년은 그의 카누를 베어 크릭(Bear Creek) 개울가에 대고 그 인디안 추장의 딸과 만나 데이트를 하곤 했다. 그것을 목격한 다른 인디안 한 사람이 그 사실을 그 인디안 공주의 아버지인 추장에게 일러바쳤다. 그러한 사실을 안 그 추장은 분노하여 그 인디안 청년을 죽이는 자에게는 수달 가죽을 주겠다고 선포했다. 많은 젊은 무사들이 나서서 그 용감한 청년을 잡으러 찾아 나섰다.
그 두 남녀는 그들이 쫓긴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들을 따돌리기 위하여 현재의 그 '연인의 바위' 위로 올라갔다. 그러나 바위 끝에서 그 청년과 추장의 딸은 잡혀 죽을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그래서 둘은 잡혀 죽는 것은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다고 여겨 그 둘은 바위 절벽 아래로 몸을 날렸다. '연인의 바위(Lover's Leap)'은 그로부터 이 두 인디안 청춘남녀의 목숨을 던진 곳으로 기념하는 의미로서 그 이름 '연인의 바위(Lover's Leap)'과 함께 전설이 되어 전해져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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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트웨인 홈타운 한니발 동네에 있는 인디안 남녀의 '자살바위(Lover's Leap)'.
미시시피 강이 바라다 보이고 있다. 사진 / 오두2003년 6월
인디안 추장딸과 함께 죽은 연인들의 자살바위 이야기는 미국에서 노예 연인들의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자살바위에서 떨어져 죽은 이야기들과 함께 자주 볼 수 있는 전설들이다. 전자는 백인들이 인디안 추장들이 고루한 아집이 있었다는 것을 선전하는 방편인 면이 있다면, 후자는 지역 흑인들이 그들의 과거 노예의 삶이 얼마나 백인 노예주들의 압제 속에서 사랑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하는 면이 있다.
캘리포니아의 아이딜와일드(Idyllwild)의 자살바위는 암벽 등반가들에게도 유명한 곳이다. 그 바위절벽 역시 인디안 추장 딸(princess)과 이루지 못하는 사랑 때문에 두 남녀가 뛰어내린 자살바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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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 아이딜와일드(Idyllwild)의 자살바위
권력자의 아집때문만이 아닌 흔히 옛날 봉건사회에서는 한 마을에서 연인들이 생기게 되고 그 결혼을 반대하는 상황이 생기기도 하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권양숙 여사가 한 마을에서 맺은 인연은 그래도 좋은 편이었다.
혼인을 이루지 못하는 연인 두 청춘남녀가 함께 바위에서 떨어져 주는 이야기는 우리나라 뿐만이 아니라 문화인류학적으로 세계 곳곳에 전해져 오고 있다. 그런데 그들 두 연인이 뛰어내릴 때의 장면은 다양하다.
9. 댕기머리를 함께 땋아 매고 뛰어내린 괌 연인들의 자살바위
괌에 전해져 오는 차모로(Chamorro) 원주민들이 사는 곳에는 '두 연인의 바위(Two Lovers' Point)'가 있다. 그 자살바위 전설에 따르면 그들의 혼인이 거절당하자 그곳 바위절벽에서 뛰어내리기 전 두 연인은 머리를 서로 연결하여 함께 땋아 묶어 바위 절벽 아래로 뛰어 내렸다고 한다.
오늘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부엉이 바위에 뛰어내리던 날 아침에 '함께 가자'고 해놓고 권양숙 여사를 뒤에 두고 간 것은 어쩌면 결과적으로 고통을 함께 가지고 살아가야 할 권양숙 여사를 생각하면 그들 두 부부는 보이지 않는 '함께 땋은 머리'로 부엉이바위 아래로 뛰어내린 것이나 같을 것이다.
절벽 전설은 요새지 문화 잔재이기도 하다. 옛날 전통 마을은 언제나 바위 절벽이 있는 인근인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전쟁을 대비하여 최후의 보루를 쌓을 수 있는 지형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북미의 오나이다(Oneida) 인디안들은 매 20년마다 마을을 이사했는데, 가는곳마다 커다란 바위가 있는 곳에 마을을 정했다고 한다.
카리비안 해안의 '연인들의 자살바위(Lover's Leap)'는 자메이카에 있다. 트레져 비치(Treasure Beach) 해안 도시인 세인트 엘리자베스 동네에 있는 이 자살바위는 높이 6백미터 가까운 절벽이다.
그곳의 전설에 따르면 노예였던 두 사람의 남녀가 사랑을 하였는데 그들을 부리던 노예주가 그 처녀를 탐하여 두 사람의 사랑을 반대하고 협박했다. 춘향전에서 '일편단심'이란 '죽음과 삶이 한 조각'과 같다는 일념으로 연인의 사랑을 지킨다는 것이 아니었겠는가. 노예주의 '수청'을 피하여 그들 자메이카의 두 남녀 노예는 그 높은 절벽 위에서 뛰어 내려 죽음으로써 그들의 사랑을 지켰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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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rs' Leap in St Elizabeth. Lovers Leap is a 1700 feet cliff
which legend state that a young couple of slave lovers leaped to their death
to escape from their master who wanted the girl all to himself.
이러한 노예 남녀의 연인 자살바위는 노스케롤라이나주의 많은 절벽들의 전설에서도 같은 패턴으로 나타난다(Almost every cliff face and bluff in Western North Carolina has a similar "legend")는 것은 남북전쟁 이전 흑인노예 연인들의 고난을 고스란히 전해주는 전설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닷가나 강가의 깎아지른 바위 절벽은 흔히 '연인 자살 바위(Lover's Leap)'라는 이름이 붙어야 관광객의 흥미를 유발시킨다. 그런 반면에 그런 인디언 지역에 남아 있는 'Lover's Leap'들은 은근히 인디언 전통 사회의 연인들의 사랑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암시하려는 경향으로 그러한 이름을 지어두는 경향도 없지 ㅇ낳다.
시카고에서 한 시간 반 가량 거리의 일리노이 강변에는 절벽이 있는 스타브드 락(Starved Rock) 주립공원이 있다. 이곳의 '스타브드 락(Starved Rock)'은 사방이 깎아지른 큰 선바위 요새지로 되어 있다. 두 인디안 족속들이 전투를 하여 한쪽이 이곳 절벽 위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포위되어 굵어죽었다는 바위이다. 사실 그 바위 이름은 '선바위'와 같은 인디안들의 천문대 바위같은 신성한 곳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디안 족속들끼리 싸운 것을 강조하는 동시에 비참하게 한쪽이 죽었다는 것을 드러내는 방법은 '스타브드 락(Starved Rock)'이라는 잔혹한 이름으로 주립공원의 명칭으로 삼은 면이 있다.
스타브드 락(Starved Rock) 옆쪽으로는 또 하나의 절벽 바위가 있다. 아래로는 일리노이강으로 떨어지는 수직 절벽바위를 이루고 있는 이 바위 그 생김새 자체만으로 '연인 투신 바위(Lover's Leap)'로 이름지어져 있다. 인디안 남녀가 이곳에서 죽었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하는 이름이지만, 사실 그곳에는 그러한 전설은 전해져 오지는 않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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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일리노이주 스타브드 락(Starved Rock) 주립공원의 '연인자살바위(Lover's Leap)'
10.노르웨이 자살바위: '강대상 바위'냐 '대팻날 바위(Tooth of a Woodplane)'냐
자살바위 중에도 가장 명승지는 아마도 노르웨이남부 해안가 높은 절벽 바위인 프레케스톨렌(Preikestolen, or Prekestolen) 절벽바위라 할 수 있다. 프레케스톨렌이란 네모진 높은 강대상 모양을 닮아 있어 그렇게 부르는데 흔히 'Pulpit Rock(강대상 바위)'로 알려져 있다. 그곳으 옛날 명칭인 하이블레톤나(Hyvlatonnå)라는 뜻은 '대패 날(The Tooth of a Woodplane)'이라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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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lpit Rock(강대상 바위)' 프레케스톨렌(Preikestolen)
**'Pulpit Rock(강대상 바위)' 프레케스톨렌(Preikestolen)
옛 명칭은 복판이 튀어오른 대팻날처럼 생겼다 하여 '대팻날 바위' 하이블레톤나(Hyvlatonnå)
나중에 교회의 삼단 강대상(Pulpit)을 닮았다고
프레케스톨렌(Preikestolen)이라 칭하게 된 것은
명승지에 대한 종교적 의미부여의 결과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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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lpit Rock(강대상 바위)' 프레케스톨렌(Preikestolen)
옛날에는 전통 목공들의 도구처럼 보인 것을 나중에 기독교적인 의미인 '강대상(Pulpit)'으로 종교적으로 표현한 것은 앞서 소개한 일본의 토진보(東尋坊) 자살바위가 불교적인 의미부여를 한 것과 유사한 명칭 전이 현상을 볼 수 있다.
'대팻날' 자살바위는 높이가 자그만치 604미터나 되며 그 아래에는 빙하가 깊이 깎아 내린 수심이 3천미터나 되는 라이셉호르덴(Lysefjorden) 강이 흐르고 있다. 여름 동안 십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이곳은 자살사건도 심심찮게 벌어진다. 지난 새천년이 밝아오자 17살 오스트리아 여성과 20살 노르웨이 청년이 인터넷에서 만나 이곳에서 뛰어내렸다고도 전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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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lpit Rock(강대상 바위)' 프레케스톨렌(Preikestol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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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lpit Rock(강대상 바위)' 프레케스톨렌(Preikestolen)
이와같은 명승지의 절벽 낭떠러지는 그만큼 생명의 위험을 느끼는 곳인만큼 죽음과 삶이 단 한치의 헛발을 디디는 것으로 갈리게 된다. 그런 면에서 '강대상 바위(Pulfit Rock)'과 같 종교적인 의미의 이름을 부여하게 되는 현상이 있는 것 같다.
앞서 소개한 쿄토의 기요미즈데라(淸水寺)의 부타이(舞台) 절벽 난간은 같은 면에서 불교적인 'Pulfit'의 절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네모진 '땅'은 오히려 하늘 위에 있는 아이러니가 있다.
같은 '16대 대통령'이라고 또 '지역감정 해소'를 주장하면서 한국의 아브라함 링컨이라고 자부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링컨과는 달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링컨이 극장에서 살해되었지만, 노 전대통령은 아무도 보지 않는 부엉이바위 '독무대'에서 스스로 몸을 던졌다. 그것도 무대라면 무대이다. 유명한 자살명소는 '무대'의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은 흥미롭다.
기요미즈데라(淸水寺) 역시 투신자살이 일어나는 곳이라는데서 종교와 명승지는 어딘가 저승으로 연결된 '계세적 명소(繼世的 名所)'의 의미로 작용하는 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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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쿄토의 기요미즈데라(淸水寺)의 부타이(舞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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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쿄토의 기요미즈데라(淸水寺)의 부타이(舞台)
필자가 70년대 말 교토에서 가장 인상깊게 보았던 키요미즈 절간의 벼랑 난간은 그 벼랑 아래를 바라보는 난간의 이름이 춤추는 '무대(舞台)'라는 명칭이 붙은 것에서 신기하게 보였었다. 그 키요미즈(淸水寺) 절간의 '무대(舞台)'는 분명 옛날 선바위의 신선들이 춤추는 바위의 흔적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불교적인 사상으로 변화하여 그 신선들이 춤추는 절벽 위의 '무대(舞台)'는 "키요미즈의 무대 절벽에서 뛰어 내린다(淸水の 舞台から 飛び 降りる)"는 식의 투신자살적의 의미로 내려가는 곳이 된 것은 결코 그 어떤 종교적 사상으로 미화한다 해도 옳은 것은 아니다. 신선의 비상하는 날개 춤이 도리어 죽음으로 미화되거나 결단의 미명으로 목숨을 던지는 합리화는 환영받을 수 없는 것이다.
옛날 신선도가적 풍수를 믿었던 때의 사람들에게는 깎아지른 바위에 오를 수 없으면 선바위(立巖 또는 仙巖)라 불렀고, 그 바위 위에서 신선들이 춤을 춘 곳으로 믿었다. 나중에 불교가 들어와 바위 절벽에 작은 절을 지으면 암자(庵子/菴子)를 지었다. 그러한 절벽 바위 위의 암자들은 공중부양의 종교적 의미를 자연 지형에서 찾고자 하는 의미가 있다.
특히 절벽의 암자들은 작은 동굴을 배경하고 지어지는 경우가 많다. 오늘날 봉하마을의 부엉이바위 사자바위가 있고 작은 굴까지 있는 봉화산에 정토원 이전에도 자은암(子恩庵)을 비롯한, 굴불사, 정토원 등의 암자가 있는 것은 그러한 절벽과 동굴의 전통 배경이 있다고 할 수 있다.
11. 부탄의 '호랑이 굴 사원(Tiger's Nest Monastery)'의 절벽 동굴
세계적으로 깎아지른 절벽에 동굴을 배경한 암자는 히말라야 산맥의 나라 부탄에 있는 '호랑이 굴 사원(Tiger's Nest Monastery)'이 유명하다. 아래쪽 파로 계곡(Paro Valley)로부터 깎아지른 1,000 m 높이의 절벽에 세워진 이 사찰은 부탄에서 가장 손꼽히는 전설적인 명소이다. '호랑이 굴 사원(Tiger's Nest Monastery)'은 그곳 절벽을 뛰어내린 고승의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옛날 '두번째 부처'인 구루 린포체(Guru Rinpoche 스승이며 고승이란 의미)'가 암호랑이 등에 올라타고 절벽 꼭대기에서 아래로 뛰어내렸고 절벽 중간에 있는 동굴 안으로 들어가 호랑이와 함께 참선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호랑이 굴을 배경으로 암자를 만들고 오늘날 '호랑이 굴 사원(Tiger's Nest Monastery)'으로 알려져 있다. 구루 도르지 드롤리(Guru Dorji Droley)가 8세기에 세운 이 암자는 현재의 모양으로 지어진 1692년이래 그 공식 이름이 탁창 곰바(Taktshang Goemba)이다. 오늘날 일반인들은 접근을 막은 채 불교의 수도원으로서만 사용되고 있다.
*1km 수직 절벽에 세워진 '호랑이 굴 사원(Tiger's Nest Monastery)', 탁창 곰바(Taktshang Goem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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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굴 사원(Tiger's Nest Monastery)', 탁창 곰바(Taktshang Goem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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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굴 사원(Tiger's Nest Monastery)', 탁창 곰바(Taktshang Goemba)
바위 절벽은 호랑이 굴과 함께 고대 신선도가적 전통의 명승지 관념에서 나온 배경을 가진다. 영생불멸을 숭상했떤 풍류적 신선도가 사상은 자살을 미화하지 않았으며 경치 좋은 곳에서 장수하는 것을 이상으로 여겼다. 절벽 위의 바위 암굴은 짐승이나 사람이 침입해 들어오기 쉽지 않은 보호장치의 의미가 있었고 그러한 명승 신선들의 거처는 나중에 나온 종교들이 그 명성을 이용하여 사원이나 수도원을 세우게 된 것이다.
12. 터어키의 절벽 동굴 수멜라 기독교 사원(The Sumela Monastery)
신선도가적인 장생불노 사상과는 달리 불교와 기독교 문화는 이 세상을 타락한 세상 또는 사해(死海)로 보거나 죽음과 삶을 '같은 자연의 한 조각'으로 여겼다. 기독교 전통에서 바위 절벽 위에 지은 암자 가운데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곳은 터어키에 있는 수멜라 사원(The Sumela Monastery)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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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백미터 바위 절벽에 세워진 터어키의 수멜라 수도원(The Sumela Monastery)
수멜라 사원은 '메리엠 안나(The Meryem Ana: Virgin Mary)"라고도 칭하여 '동정녀 마리아'를 강조한 것은 그로토(Grotto) 암굴(巖窟)에 거하던 고대 태양숭배시대의 여신들의 산신신앙과 그 동굴을 이어받은 잔재라 할 수 있다. 수멜라 사원은 300 m 높이의 절벽에 세워져 있는 곳으로 동굴이 있고 감로수가 흐르는 샘물이 있다는 면에서도 여신숭배의 암호(巖戶) 그로토에 세워진 옛 여산신 숭배장소에 지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수멜라(Sumela)라는 칭호가 '수메르 산'과도 연관되기도 한다. 수멜라 수도원이 있는 그 절벽의 높은 산은 검은 산(Black Mountains)의 의미를 지니는 "Karadaglar"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특히 동정녀 마리아의 색인 검은색의 의미로"melas"를 사용했다고 전하는 것도 기독교의 전신인 태양신의 미드라교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미드라교의 신은 '검은 색(black)' 망토를 걸치고 그 검은 망토는 밤하늘을 의미하여 망토에 별들을 그려넣었던 것에서 수멜라 사원에서 '동정녀 마리아'의 상징을 '검은 색'으로 한 배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2세기까지만 해도 동정녀 마리아상은 검은 마돈나로 알려질 정도로 수많은 수도원에 검은 색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오늘날 흰 색으로 변한 동정녀 마리아상과는 비교되는 역사라 할 수 있다.
The name of The Sumela Monastery can also be associated with the black colour of the Virgin Mary icon. The colour of the icon, which is so dark that it could be described as black, was one of the things that struck the eminent historian J. P. Failmerayer (1790-1861) when he visited the Monastery in 1840. It is possible that this could be the origin of the name. it is known that the 12th century Georgian Art produced a number of Virgin Mary icons known as Black Madonnas, and that these icons found their ways into a number of monasteries.
절벽의 수도원이 호랑이 참선에서 고승의 참선으로 변하거나 검은 여신상이 흰색 성모상이 되는 것은 시대가 변하면서 달라지는 전설과 신화의 변이현상이기도 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자살한 봉화산(峰火山)은 봉화대(烽火坮)가 설치되기 전에는 여신과 관련된 자암산(子巖山)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곳에는 현재도 동굴(현재 굴 속 법당인 굴불사)이 있다는 것은 옛 여산신 문화의 잔재가 불교적으로 변이된 곳이라 할 수 있다.
맺는 말: 봉하마을 자암산(子巖山) 중턱에 마애석불이 쓰러져 있는 까닭
노무현 전 대통령의 투신자살은 대우건설 남상국 사장의 한강물 투신자살의 업보일까? 지난 2004년 그 당시의 남상국 사장의 투신자살은 누가 보아도 수뢰사건과 연관하여 억울함을 가지고 한강물에 몸을 던졌다.
노무현 당시 대통령으로부터 수모를 당하는 말을 듣고 남사장은 한강물에 투신했다. 그러나 당시 노무현 정권은 이렇다할 위로의 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당시 국회 탄핵으로 직무가 정지되어 있던 노무현 대통령은 '용감하게 인당수에 뛰어 들었는데 국민이 용왕이 돼서 건져주었다"고 자신이 물에 뛰어들었던 것처럼 이죽거리기까지 했다. 그를 지지하던 사람들은 오히려 투신 자살한 사람에게 '자살세 헌납'까지 주장하는 해괴한 일까지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남상국 대우건설 사장의 한강물 투신자살 사건은 이제 노무현 자신에게 거의 같은 패턴으로 나타났다. 노무현 대통령 자신이 '심청'이라고 했던 것은 스스로 부엉이바위에서 뛰어들 운명의 조짐이었을까? 윗자리에 있으면서 남에게 억하심정을 남긴 결과 투신자살까지 하게 했다면 스스로 심청이가 아니라 부처라 한들 뛰어내려 연꽃은 커녕 바위덩이로 떨어져 넘어져 있을 뿐일 것이다.
봉하마을 뒷산 봉화산의 중턱에는 어디에서 굴러내려왔는지 쓰러져 누워있는 마애석불이 하나 있다. 연꽃도 없고 황제도 만나지도 않고 오히려 그 옆에 사저가 있는 일국의 대통령을 바위 위에서 투신자살하는 일이 벌어졌다. 부엉이 바위가 상인들의 뱃머리처럼 생기지도 않았지만, 심청이처럼 투신하였어도 그 아래 나라의 인당수 풍랑은 더욱 요란하기만 하다. 눈먼 심학규를 눈뜨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열과 갈등을 더 크게 만든 결과를 보이고 있다.
국민들은 모두가 뱃사공이 디어 심청이가 빌었던 천지신명에게 다시 빌어야 할 것 같다. 봉화산의 원래의 명칭은 자암산(子巖山)이었다. 그곳에는 마애석불이 떨어져 쓰러지기 전에 산신을 모신 곳이었다.
봉하마을 봉화산 중턱에 남아 있는 자은암(子恩庵) 터 옆에는 지금도 산신각(山神閣) 자리가 있다. 그 옆에는 옛날 사람들이 여신의 감로수로 믿었던 암반수가 여성의 거대한 엉덩이를 닮은 바위 사이를 흐르고 있다.
![6sansingak[1].jpg](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afe.chosun.com%2Fimg_file%2Fclub_file%2F96%2Fdreamview%2Fbbs%2F62%2F6sansingak%255B1%255D.jpg)
*봉화산 즉 자암산(子巖山)의 산신각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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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신의 성적 심볼을 닮아 있는 자암산(子巖山)의 암반수.
'자암산(子巖山)'의 구조는 동굴과 암반수의 여산신의 감로수에서 비롯했을 것이다.
그 옆에 있었다는 자은암(子恩庵) 암자는 여산신 성모의 아들로서 감은을 뜻하는 의미가 있다. 적어도 자은암(子恩庵)은 가야시대 또는 신라시대 때부터 내려오는 이름인 것은 감은사가 석굴암 암호 여신에 대한 감은의 의미가 있는 것과 같은 여신숭배문화의 불교적 계승의 의미가 있는 이름이라 할 수 있다.
불교에서 은혜란 부모 특히 어머니에 대한 감은을 의미하며 자은(子恩) 또는 자암(子巖)이란 석굴암 같은 그로토 암호(巖戶)를 바라보며 뜨는 성모의 아들 태양이 감응하는 의미를 지녔다고 필자는 주장해왔다. 수월관음상 앞에 기도하는 자세의 선재동자란 바로 자은(子恩)이며 자암(子巖)의 자세라고 할 수 있다.
가야국 또는 가락국시대는 불교 이전의 여산신 문화가 많이 남아 있다. 봉하마을 지역은 김해로 대표되는 가야지역이다. 경상도이지만, 김해지역의 노무현 전대통령이 백제지역과 신라지역의 중간에서 정치적으로 일어난 것은 어쩌면 가야시대의 한 양상이라는 면도 없지 않다.
봉화산 즉 자암산(子巖山)의 산신각은 본래 부엉이바위에서 뛰어내리는 것을 환영하지 않은 종교의 사당이었을 것이다. 부엉이바위의 '부엉이'란 어두운 음부의 새가 아니라 옛날 신선도가적 산신신앙의 시대에는 봉황과도 같은 의미로 '봉황바위'의 의미를 지닌다. 자암산(子巖山)의 자암(子巖)이란 바위의 아들 즉 암호에 거하는 바위 여신의 아들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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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하 노무현 사저도 자은암터처럼 터만 남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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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굴불사 위쪽에 마애석불이 쓰러져 있다.
가락국시대의 성모 산신과 그 아들의 은혜를 기리는 암자들은 김해 인근에 특히 산재해 있다는 것은 불교 이전의 신선도가적 가락국 산신신앙의 흔적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가락국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진 김해 인근의 대표적인 암자로는 경남 밀양시 삼랑진읍 안태리 천태산의 부은암(父恩庵), 김해시 생림면 무척산의 모은암(母恩庵),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봉하 마을 자암산의 자은암(子恩庵), 김해시 어방동 분산 해은암(盆山 海恩庵) 등이 있다.
특히 해은암(海恩庵)은 가락국 허황옥과 함께 파사의 돌을 실은 부석선(浮石船)을 타고 온 장유화상(長遊和尙)이 바다를 무사히 건너온 감사의 은혜로 창건했다는 전설이 있다. 필자는 이미 허황옥이 여신숭배시대의 가락국 '성모'였다는 글을 최근에 쓴 바가 있다. 봉하마을의 봉화산의 옛 명칭인 자암산(子巖山)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전직 대통령으로서 부엉이바위에서 투신자살한 노무현은 불교적인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은 정토원 원장의 정신적 영향을 말하지 않더라도 그 장례식에서 전국 사찰들의 참여도에서도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내려 쓰러진 큰 인물을 예시나 하는 것처럼 자암산(子巖山) 올라가는 길에는 큰 바위에 새겨진 마애여래상이 굴러 떨어져 쓰려져 오랫동안 방치되어 왔다는 점이다.
![6_1_~1[1].JPG](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afe.chosun.com%2Fimg_file%2Fclub_file%2F96%2Fdreamview%2Fbbs%2F62%2F6_1_%7E1%255B1%255D.JPG)
*자암산(봉화산) '암하노불'은 쓰러져 있다.
쓰러져 있는 마애석불 옆에서 일국의 대통령이 바위위에서 뛰어내러 자살했다는 것은 여러가지 상징적인 운명을 보여주는 면이 있다. 앞서 언급했지만, '암하노불(巖下老佛)'이되 '암하노불(巖下盧佛)'이다. 그러면서 이 세상에 대한 분노의 충돌을 남긴 '암하노불(巖下怒佛)'이기도 하다.
봉화산 중턱의 마애여래석상 바위가 굴러 누워 있는 아래쪽에는 바위 굴이 있다. 그 인근 여러 둥근 바위들이 흩어져 있는 사이의 작은 평지에 지금도 부셔진 옛 기왓장들이 남아 있는 자은암(子恩庵) 터가 남아 있고, 그 자은암(子恩庵) 터에서 내려다 바라다 보이는 곳이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저가 둥근 광배처럼 두른 담장을 하고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좋게 생각한다 해도 노무현 전 대통령이 고향 뒷동산 바위에서 투신자살한다는 것은 아름답지 못한 행태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의로운 것도 아니며 사회의 귀감이 되는 일은 더더욱 아니다. 아마도 그의 마을 뒷산 환경이 종교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변명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 또한 일국의 지도자로서 모든 세상의 신앙과 정치적인 세속의 진토의 삶도 감수하면서도 살아갔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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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노무현의 투신자살 전 노랑색의 사저 위 봉화산에서 붉은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
봉화산은 옛날 한양의 궁궐로 봉화불로 전난이 발생한 신호를 올리던 곳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엉이바위 투신자살 사건이 일어나기 전 봉화산에는 봉화가 아닌 산불이 일어났던 것은 어떤 조짐이었을까?
故 노무현은 이 모든 조짐들을 결국 이겨내지 못하고 일개 국민 개인들의 고통을 이기는 것보다 못한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람이 자신의 마을 뒷산의 가장 전망 좋은 곳에서 몸을 던졌다는 것은 봉화대의 신호를 받아 국태민안을 다스릴만한 국부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것은 스스로 자신에게 내린 '탄핵'이 되어버린 결과가 되었다.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빈다. 그러나 그의 부엉이바위 투신자살은 일개 범부들의 자살바위 투신보다 좋은 전설을 보여주지 못했다.
나랏돈으로 가장 경호를 많이 받아야 하는 자리에 선 사람이 자신의 신상을 바위에 내던져 상해한다는 것은 정토원(淨土院) 수광전(壽光殿)에 모셔진 선친들에게도 자식된 수(壽)와 빛(光)이 되지 못한 것이며, 자암산(子巖山) 자락의 산신각의 여산신의 아들로서도 신체발부 다치게 한 것은 도리가 아닌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이 분단시대의 붉은 봉화(烽火)의 불끼를 거꾸로 내려받은 결과가 아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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