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레이던 그 시절
박 지 연
내 고향 전주는 조선조(朝鮮祖)의 개국관향(開國官鄕)이다.
전주를 떠난 지 오래 되었지만 부모님 슬하에서 자란 어린시절, 사춘기와 젊은 날은 차곡차곡 고스란히 내 가슴에 담아있어 생각만 해도 들뜨게 한다.
4년 전 아들네 셋이 조기유학으로 캐나다로 떠나고 홀로 남은 내 생일이 다가오면 미국에 있는 막내가 바쁜 중에도 해마다 4박 5일 일정으로 오빠의 빈자리를 엄마와 같이 하려고 귀국하했다. 막내는 서울서 나고 자라 미국 유학을 갔기에 전주에 가 볼 기회가 없었지만 이번에는 엄마가 자란 전주를 보고싶어 이미 한옥마을에 숙소를 예약을 하고 왔다.
KTX를 타고 카톡에 열중하는 동안 어느새 전주에 도착했다. 전주역은 확장하면서 덕진구로 이전 전보다 더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며 전통적 한옥역사가 우리를 맞아주었다. 고향을 지키고 있는 사촌 동생이 마중을 나와 카 투어(Car Tour)로 구경을 하는데 너무도 많이 변해 가늠이 잘 되질 않는 곳도 있었다. 남쪽에 달려오니 풍남문이 더욱 화려하고 장엄한 모습으로 그 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었다.
전주는 후백제의 왕도(王都)로 내려와 고려 공양왕(1389)때 최유경 관찰사가 사대문을 축조했다. 전주는 조선 왕조가 개국(1392)되면서 호남지역을 관찰하는 전라도 수부가 되었다. 태조 이성계는 관향 전주를 중국 유방의 고향 풍패향, 풍패지향이라는 이름에서 따와 풍남문이 되었다. 영조 때 크게 개축했으나 정유재란에 피해를 당하기도 했다. 동학군도 고창을 지나 풍남문에서 관군을 막고 화약도 맺었다. 조석을 알리는 종소리가 이제는 제야에 한번 울려 새해를 맞는다. 보물 제308호로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되어 웅장한 전주의 명물이 되었다.
풍남문을 지나면 540여 년의 역사를 지닌 남부시장이 나온다. 가장 큰 전통시장인 이곳은 토산물뿐 아니라 없는 게 없어 어머니와 두툼한 지갑을 들고 갖가지 시장을 봤던 행복했던 시절이 생각나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바로 옆에는 전동 성당이 있다. 호남지역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이다. 색색의 스테인드 글라스가 아름답다. 친구랑 가끔 와서 소망을 꿈꾸며 기도했듯 막내와 둘이서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바로 가까이에 있는 전주 향교는 전국 향교 중 최대규모를 자랑한다. 전주를 교육도시라함은 이 향교의 규모와 운영에서 인재를 많이 배출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곳에는 수령 400여 년이 되는 은행나무가 52그루나 있어 가을이면 수북이 쌓인 노란 은행잎을 밟으며 가을을 즐기고 명륜당 툇마루에서 잠시 쉬기도 했다.
바로 지천에 전주의 명물, 한옥마을이 나온다. 검푸른 기와지붕이 빼곡해 수백 채가 되는 한옥마을에서 전통 음식을 맛보고 한복을 입고 옛 조선의 마을을 거니는 외국인 젊은이가 행복한 웃음을 가득히 채우는 곳이다. 우리도 막내가 예약한 한옥마을 숙소를 찾아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었다.
쉬면서 가만히 회상하니 갈 곳이 너무 많아 2박 3일로는 모자란다. 담장 안에는 장단에 맞춘 가락에 흥을 더한 장구 소리, 가야금을 뜯는 가락이 이웃집 담을 넘는 명창의 고을이다.
가까이 풍남동에는 우리가 다닌 여학교도 있고 노령산맥 끝자락에 기린봉도 있다.
「기린봉 푸른 줄기 뻗어간 터에/ 역사도 찬란하다 빛나는 전당/...오목대 우뚝 솟은 배움의 전당/...그 이름 빛나는 전주여고」 95년의 역사 깊은 호남의 명문으로 각지에서 재원이 모여드는 학교다. 누워서 홀로 교가를 불러본다.
학교에서 멀지 않는 기린봉 아래에는 전주천이 맑게 흐른다. 한벽루가 깎아지른 바위 위에 운치를 보이고 오목대 언덕에 올라서면 한옥마을이 시야에 가득 들어와 장관을 이룬다. 친구들과 오목대 언덕에서 노래를 크게 부르며 사진을 곧잘 찍던 아름다운 곳이다. 오목대는 고려말 이성계가 남원 황산에서 왜군을 물리치고 돌아가던 길에 승전고를 울리며 잔치를 벌인 곳이다. 조선의 순조 헌종 철종 때 시인 묵객들이 전주를 방문해 한벽루에서 밤이 새도록 시를 지으며 회포를 풀었던 곳이다. 전주 8경의 꼽히는 한벽루는 조선의 태종 때 최담이 관직을 마치고 낙향 후 세웠다.
한옥마을 앞에는 경기전이 있다. 경사스러운 터에 지은 궁궐이라는 이곳에는 태조 이성계의 어진(국보 317호)이 모셔 있다. 박물관에는 당대 최고의 화가가 그린 다른 왕의 어진도 볼 수 있다. 경기전에는 울창한 대나무 숲이 하늘을 찌르듯 자라고 있다. 그 그늘에서 우리들은 사생대회를 하고 여학교 때는 백일장을 늘 치룬 곳이다.
노령산맥의 말단부에 솟은 산은 어머니가 어린아이를 품고 있는 모습처럼 전주를 품고 있다는 모악산이 있다. 이곳에서 발원하여 전주천이 흘러 맑은 공기와 자연 경관을 아름답게 선사한다, 이 산은 역사적인 금산사를 품고 있어 불자가 아니어도 상시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다. 초등학교 소풍 때 연두색 반호장 저고리와 자주색 치마를 곱게 지어주셔 친구들과 재미있게 갔다가 귀가 시 비를 만나 새 옷이 홈뻑 젖어 엄마에게 미안했던 기억도 새롭다.
내 평생 추억은 학창시절이다. 학생 내내 반장과 전교 회장 학도호국단 연대장을 했던 학창시절은 유독 바쁘게 지냈다. 반에서는 전학을 오거나 진도가 떨어진 친구들에게 노트 정리를 해줘야 하고 선생님들의 사랑을 무척 많이 받은 대신 신부름도 많아 할 일이 늘 많았다. 지방에서 유학 온 친구들의 부탁도 많았다. 기숙사에 있는 친구는 부모님에게 용돈을 좀 올려 달라는 편지를 부탁한다. 어떤 친구는 조숙해서 연애편지를 받고 읽어주며 대필을 부탁하기도 한다. 참 난감한 일이지만 교지에 시를 내기도 했던 탓이다. 모두 성공적으로 답이 오자 “너는 문학을 해야 해” 그들은 문학을 하라는 말로 고마움을 대신했다. 나이 많고 키 큰 아이들까지 통솔을 하려면 다 들어줘야 했다.
새벽 통행금지가 해지되면 뚝방길을 달리고 달려 교문을 살짝 밀고 들어서면 수백 년 됨직한 느티나무가 새까맣게 먼저 눈에 들어와 무섭다. 나는 도망치듯 뛰어 숙직실을 살금살금 지나 나무 계단을 소리나지 않게 오르면 이층 창문에 나무 그림자가 흔들려 그만 놀라 뒷걸음치다 굴러 다치기도 했다. 지금은 피아노가 학용품처럼 집집마다 있지만 그때는 학교에 강당과 음악실 단 두 대 뿐이라 다른 아이가 오기 전 피아노를 선점하려고 무서움도 참아냈다. 집에 있는 올겐은 성이 차지않아 그 고생을 했다. 소프트 페달을 밟아 소리를 죽여가며 연습을 하면 해가 뜨자 한둘 아이들도 등교한다. 그때는 패달을 풀고 힘껏 연습을 할 때면 그 쾌감이 자긍심으로 지금도 머리가 짜릿하다. Beethoven Sonate 13번은 유독 폴테가 많아 소리를 죽여가며 연습하기란 여간 힘들지 않지만 얼나마 신나는 일인지 지금도 그 쾌감이 가슴 뛰게 한다.
4교시가 끝나자마자 강당으로 뛰어가 피아노 연습을 하던 일, 점심을 잊고 뛰어다녔다. 가을에는 학예회가 해마다 있어 몇 달을 연습했다. 연극을 주연으로 1인 2역을 하기도 해서 늘 시간에 쫓겼다. 단체에는 합창을 연습하는 게 더욱 재미있었다. ‘유랑의 무리’ ‘칼맨의 합창’ 등 얼나마 신나는 일인지. 속이 시원한 연습을 마치고 밤에 귀가를 해도 피곤한 줄 몰랐다. 시험 때는 친구들이 같이 공부하자고 몇 명씩 교대로 몰려와 그 뒷바라지를 엄마는 즐겨 해내셨다. 행복했던 학창시절, 호기심이 많은 것도 그때나 지금이나 같고 일인 몇 역을 마다않고 즐겨하는 것도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어쩌면 사서 고생을 자초했어도 공부하는 것 만큽 재미있는 것은 없어 늘 행복했다.
친구들과 오르던 다가공원, 연꽃과 연못이 유명한 덕진 공원, 수많은 추억이 서린 곳이 많다. 봄이면 유난히 분홍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복사골, 여름이면 예뻐진다고 복숭아를 많이 먹을 수 있었던 추억도 어제 같다. 전주 내 고향은 언제라도 갈 수 있지만 내 마음의 고향은 다시 돌아갈 수 없어 내 마음속에 담아둔 그 추억이 진정 내 고향이다. 오늘도 그 생각만 해도 내 가슴은 설레이고 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