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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에 개봉했던 영화 "멀고 먼 다리 (국내 제목 / 원제목 : "A Bridge Too Far")는 2차대전 서유럽 전선에서 결정적으로 승기를 잡았던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에 프랑스를 거쳐 독일 본토까지 진격했던 연합군이 같은 해 9월 17일에서 25일까지 8일간 전개한 "마켓 가든 작전"을 소재로 제작한 할리우드 대작입니다.
마침 이글을 올리는 싯점이 70여년 전에 마켓가든 작전이 시작되었던 싯점과 거의 같은 것이 참 우연입니다. 일부러 맞추려고 이글을 미루어왔던 것은 아닌데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요.....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영화 얘기를 조금만 더 해보면.....
(일단 영화 "머나 먼 다리"(A Bridge Too Far" - 1977년作)의 예고편을 한번 감상하시고 얘기를 시작해
보도록 하지요. 예고편만 보고는 이 엄청난 사건의 전말을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전반적인 분위기 파악에
도움이 될 듯 합니다.)
1962년 제작된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소재로 한 "지상 최대의 작전"에서 존 웨인과 헨리 폰다등 엄청난 할리우드 스타들이 무더기로 출연했듯이 15년 후에 제작된 이 작품 역시 당시 내노라 하는 명배우들이 대거 출연하였습니다. 감독도 거장 리차드 아텐보러(1982년 영화 "간디"로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하였고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주라기 공원'에서 공룡 공원의 주인인 억만장자 존 해몬드 役으로 출연한 배우로도 기억될 것입니다.)를 비롯하여.....
폴 뉴먼과 함께 가장 매력적인 남자 배우 중에 한명이었던
로버트 레드포드,
1991년 "양들의 침묵"에서 한니발 박사로 유명해진
안소니 홉킨스,
영화 "러브 스토리"에서 비운의 훈남 올리버를 연기했던
라이언 오닐,
설명이 필요없는 역대 최고의 "007 제임스 본드" 숀 코네리,
사실 위에 열거한 배우들보다 훨씬 많은 명배우들이 등장하는 이 영화는 국내에 개봉했을 때 국내 영화팬들도 노르망디 상륙 작전은 알아도 마켓 가든 작전은 잘 모른 탓에 영화의 완성도를 떠나서 크게 흥미를 끌어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연합군이 빛나는 승리담이었다면 불과 몇개월 후에 벌어진 마켓가든 작전은 2차대전 戰史에서 나치 독일이 연합군을 상대로 거둔 최후의 승리였다고 말할 수 있는 매우 뜻있는 사건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으로 그해 크리스마스를 베를린에서 맞이한다는 승리감에 도취되어있던 몽고메리 장군이 수많은 연합군 병사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최악의 재앙"이었던 것입니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이 거대한 작전이 벌어진 전말이 노르망디 상륙작전 못지않게 전쟁의 비극과 모순을 한눈에 지켜볼 수 있는 매우 재미있는 스토리라는 것입니다.
제가 이미 말씀 드렸듯이 미니 시리즈 "밴드 오브 브러더스"에서 미육군 이지 중대의 행로를 쫓아가겠다는 계획에 따라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3개월 후에 벌어진 "마켓 가든 작전"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밴드 오브 브러더스"에서 등장하는 마켓 가든 작전 기간 중에 이지 중대의 모습은 실제 이 작전으로
인해 발생한 엄청난 "재앙"에 비하면 지극히 부분적인 상황의 재현에 불과했습니다.)
밴드 오브 브러더스에서는 마켓 가든 작전 기간 중에 프랑스 지역에서 독일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의외의 타격을 입고 우왕좌왕하는 미육군 공수부대 이지 중대의 전투 장면들이 연출되었습니다. 전체 마켓 가든 작전 기간 중에 극히 일부분의 현장을 보여주는 에피소드 였지만 우리는 이제부터 작전 전체를 한눈에 조감하면서 왜 연합군의 치욕스러운 패전의 기록으로 남은 이작전이 계획되었고 강행되었으며 어떻게 재앙으로 전개되었고 그 결과는 어떠했는지 차분하게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서막 : 노르망디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둔 연합군 수뇌부는 왜 "마켓 가든 작전"이라는 성급한 작전이 필요했던 것인가?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 작전은 2차대전 유럽 대륙의 승부를 결정 짓는 전환점으로 평가되고 사실 그점 어느 정도 맞습니다. 하지만 연합군이 드디어 유럽 대륙에 들어섰다는 것이 프랑스를 지나 독일 본토를 점령했다는 것과는 아직도 갈길이 먼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서 미육군 영웅 조지 패튼과의 경쟁 심리와 고집불통 자만심이 팽배해있던 몽고메리 장군의 조급한 욕심과 공수부대 전력을 과신하던 아이젠하워 연합군 총사령관의 생각이 서로 맞아 떨어져서 엄청난 규모의 작전을 입안하게 됩니다.
우리는 통상 이 작전을 마켓 가든 (Market Garden) 작전이라고 부릅니다만 사실 이 이름은 "마켓 작전"과 "가든 작전"의 합성어 입니다. 즉 몽고메리가 앞장 서서 계획을 한 두 작전은,
1단계, 라인 강 주변에 7개의 다리들을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점령하고 (마켓 작전),
2단계, 지상군이 라인 강을 도하한 후에 네덜란드를 거쳐서 독일 본토로 진격해 들어간다.(가든 작전)
이상 두 단계의 작전들을 일컫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먼저 말하면,
1단계 마켓 작전은 초기에 상당 부분 성공을 거두고 일부 교량들이 연합군 공수 부대에게 점령되었지만, 독일군은 신속하게 연합군측의 공격이 시작된 후에 불과 3시간 만에 네덜란드에 집결된 B집단군 병력과 심지어 경찰 조직까지 동원한 효과적딘 방어 작전 계획을 수립하고 특히 연합군이 그 존재를 미쳐 파악하지 못했던 용맹한 무장 친위대 소속 2개 기갑사단을 동원하여 연합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내게 됩니다.
연합군은 마켓가든 작전의 실패로 엄청난 희생을 치르게 되는데 만약 이작전이 성공했다면 3개월 후에 끔찍한 겨울의 한파 속에서 혈전이 벌어진 "벌지 전투"가 없었을 것이고 연합군이 낙관하였 듯이 1944년 크리스마스 때까지 독일의 패망을 맞이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일부 역사가들의 평가가 있을 정도로 나치 제3제국의 멸망 직전에 그들이 거둔 최후의 빛나는 승리였습니다.
(마켓가든 작전 실패의 책임은 고집불통 영감
몽고메리 원수의 몫이었습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6월에 성공한 후에 9월이 될 때까지 연합군은 독일 서쪽 국경을 마주 대하고 있는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에서 아주 긴 거리의 전선을 형성하고 독일군과의 전투를 하게 됩니다. 독일 국경을 따라 흐르는 라인 강에 도달할 때까지 연합군의 파죽지세의 진격은 멀지 않아 베를린 점령이 임박한 듯이 보였고 전쟁을 하루라도 빨리 끝내고 싶었던 연합군 총사령관 아이젠하워 장군과 영국군 사령관 몽고메리 원수는 독일군이 이미 엄청난 타격을 입고 전력이 약화되었다는 그릇된 자만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노르망디 상륙 후에 몽고메리가 이끄는 영국 제21군은 벨기에 북부 국경지대까지 도달하게 되었고, 중부에서는 훗날 벌지 전투의 영웅으로 기억되는 미육군 오마 브레들리 장군의 미국 제12군이 아헨까지 치고 들어가게 됩니다. 남부에서는 제이콥 데버스 장군의 미 제6군이 남프랑스에서 독일 국경에 이르게 됩니다.
(일단 지도에 익숙해져야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하게 됩니다. 지도에서 보듯이 독일은 서쪽 국경에 위에서 아래로
네덜란드->벨기에->프랑스 이상 3개 국가들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매우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노르망디에서 엄청난 승리를 거둔 연합군은 왜 재앙이 되버린 저주받은 작전 "마켓 가든"을 강행할 수 밖에 없었을까요?
라인 강에 도달한 연합군은 보급선이 길어지고 진격의 속도가 늦춰지자 연합군 수뇌부는 당황하게 됩니다.
노르망디의 얕은 수심의 해변에 급히 설치했던 임시 부두나 진격 경로에서 상대적으로 멀리 떨어진 코탕탱 반도에 셸부르 항구로 도착하는 연합군의 보급 물자들은 하역 물량의 한계를 보였습니다. 게다가 하역 항구에서 연합군 최전선까지 아직도 상당한 지역들이 독일군들에게 점령된 상태로 남아있었기 때문에 신속한 보급의 어려움이 컸습니다. (덩케르크와 같은 주요 항구들은 1945년 5월까지 독일군 점령하에 있었습니다.) 게다가 노르망디 상륙작전 전후해서 독일군은 프랑스 북서부 항만들을 거의 대부분 파괴하여 연합군은 노르망디와 셀부르 항구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마켓가든 작전 개시 직전이었던 9월초에 이런 상황은 더욱 심화되어 무려 7만톤의 물자가 셸부르 항구에 도착하였지만 수송 수단이 부족하여 발이 묶여있게 됩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전에 연합군의 폭격기들은 프랑스 지역에 철로들을 철저하게 파괴하여 상륙작전 후에 보급 물자 수송을 위해서 자신들이 파괴했던 철도들을 다시 복구해야 하는 아이러니컬 한 상황이 되어버렸는데 파괴된 철로들은 상륙작전 후에는 연합군의 보급 물자 수송을 막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어버렸습니다.(실제로 8월 말까지 정상적인 철도 수송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차량 수송 역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데 영국에서 가지고 온 1,400여대의 3톤 트럭들의 엔진의 심각한 결함이 발견되어 하루에 고작 2개 사단 정도를 지원할 수 있는 분량인 800톤 정도 물자 수송만 가능한 상황이 되어버립니다. -> 이런 상황이야말로 연합군 수뇌부가 성급한 속전속결 작전을 수립하도록 강요하게 됩니다.
(연합군의 주요 보급 물자 하역 항구였던 프랑스 셸부르와 9월초 독일군과의 전선 북쪽 지점까지의
보급 경로를 한번 보면 당시 연합군의 길어진 보급선을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위와 같은 보급 물자 수송의 차질로 인해서 연합군 수뇌부는 1.우선 보급 물자 상황을 개선한 후에 독일 본토를 침공할 것인가? 2. 아니면 보급 문제를 감수하고 독일 점령을 강행할 것인가 두가지 안을 놓고 격론을 벌이게 됩니다. 사실 1.안이 더 합리적인 선택일 수도 있었지만 여기서 아이젠하워를 비롯한 서방측 지휘관들과 서방 연합국 정치 수반들(루즈벨트와 처칠로 대표되는)에게 서둘러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으니 그것은 동쪽에서 거침없이 진격을 시작한 공산 소련의 스탈린 군대였습니다. 2차대전 말기 이미 서방 국가들에게는 히틀러보다 더 위협적인 미래의 적은 바로 공산주의 세력의 우두머리 스탈린과 그의 붉은 군대들이었습니다. 아직 냉전이 시작되지도 않았지만 이미 멸망이 시간 문제라고 판단되는 히틀로 나치 정부와 이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파시스트 이태리 무솔리니의 존재, 그리고 1944년 하반기에는 패망의 징조가 역력하던 일본 천황의 망상에 사로잡힌 제국주의 군대들보다 더 무서운 것은 바로 향후 전세계를 민주주의 진영과 함께 양분하여 냉전 구도로 가져가게 될 공산주의 진영에 대한 두려움이었던 것입니다.
(1945년 독일 점령 싯점에서 미육군 병사들과 소련군 병사들의 조우 모습.
미국과 소련은 2차대전 후에 민주와 공산주의 진영으로 나뉘어 냉전을 시작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미 2차대전 말기부터 속명의 대결은 시작되었던 것
입니다.)
만약 아이젠하워의 서방 연합군이 베를린을 함락시키기 전에 스탈린의 붉은 군대가 먼저 선수를 치게 되었다면..... 결국 노르망디에서 수많은 젊은 병사들의 생명을 희생하고 그 이후에도 수많은 전투를 거듭하여 독일 본토에 다다랐음에도 불구하고 채 베를린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소련군에 의해서 베를린이 함락된다면......... 전후에 승전국으로써 소련의 권한은 서방 연합국들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위를 점할 것이라는 예상이 서방 연합국들을 초조하게 조급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1943년 얄타 회담에서 한자리에 모인 소련의 폭군 스탈린, 미합중국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 그리고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
이런 복잡한 이데올로기 대립의 정세 속에서 영웅심에 불타는 옹고빕 몽고메리 원수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처럼 독일군의 허를 찌르는 신출귀몰한 작전으로 다시 한번 승부를 결정짓자는 생각을 떠올리게 됩니다. 연합군이 판단하건대 독일 전선 북부, 즉 독일과 네덜란드 접경 지역에 주둔한 독일군 방어 병력은 상대적으로 약하고 대부분 늙은이나 나이 어린 병력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그릇된 정보를 얻고 이곳에 총력을 기울여 공격을 가하여 일거에 라인 강을 건너 독일 본토로 돌파해들어가자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네덜란드 전선에 독일 방어 병력이 빈약할 것이라는 정보는 정말 터무니 없는 오판이었음은 얼마 후 끔찍한 댓가를 치루면서 깨닫게 됩니다.)
몽고메리의 작전은 북부 전선에 아른헴, 네이메흔, 에인토호벤 이렇게 3개 도시를 연결하는 도로 상에 교량들을 연합군 공수부대가 투입되어 점령한 후에 기갑부대들이 신속하게 라인 강 건너 독일 본토로 밀고 들어간다는 야심 찬 계획입니다.
마켓 작전
몽고메리가 앞장 서고 아이젠하워 사령관을 포함한 연합군 수뇌부가 승인한 마켓 가든 작전의 첫번째 단계인 "마켓 작전"은 사상 최대의 공수작전으로 위에서 언급했던 영화 "머나 먼 다리"의 포스터가 공수부대의 낙하 모습을 전면에 내세운 이유가 바로 이때문인 것입니다.
제30 군단이 에인트호벤과 베젤 근교의 교량을 접수하는 동안 미육군 맥스웰 테일러 소장이 지휘하는 미국 제101 공수사단은 그 북쪽에 강하하였고, 제임스 개빈 준장이 지휘하는 미 82 공수 사단은 더 북쪽에 흐리버와 네이메헌의 교량을 접수하기로 하였습니다. 영국 제1 공수사단은 로이 우크하트 중장(영화에서 숀 코네리가 맡은 役) 지휘하에 나치에 점령당했던 폴란드에서 탈출한 폴란드 제1 독립 공수 여단과 함께 아른헴 교량과 우스터비크의 철교를 점령하기로 계획하였습니다.
(TV 미니 시리즈 "밴드 오브 브러더스"의 한장면, 극 중에 실존 부대였던 이지 중대는 바로 101 공수 사단 소속이며
마켓 가든 작전 중에 에인토호벤에 투하됩니다.)
무려 13,781명의 공수부대가 글라이더에 나뉘어 탑승하여 작전 지역에 착륙하였으며 그보다 많은 20,190명은 항공기에 탑승하여 낙하산으로 투하되게 됩니다. 또 905명은 수송기에 탑승하여 지상 착륙을 통해 추가로 투입 예정이었습니다. 총 34,787명의 병력이 동웑된 "지상 최대의 공수작전"은 여러번에 걸쳐서 며칠 동안 작전 지역에 투입되도록 계획되었고 투입 병력 이외에 글라이더를 이용해서 1,689대의 차량과 290문의 곡사포 그리고 1,259톤의 탄약과 보급 물자도 함께 수송하도록 되었습니다.
가든 작전
연합군 제30군단을 주축으로 영국의 최정예 기갑사단이 최선봉에 나서고 2개 보병사단이 예비전력으로 투입되어 위에 마켓 작전에서 공수부대가 목표 교량들과 도시들을 점령하면 곧바로 대규모 전차들이 점령 지역을 통해서 독일 본토로 진격해들어가고 보병 사단들이 그 뒤를 쫓아 들어가서 공수부대의 임무를 인수 받으며 점령 지역을 인수받는다는 것이 작전 계획이었습니다.
2차대전 초기 나치가 폴란드와 소련 침공 당시에 보여주었던 전격전 못지 않게 스피디하고 강력한 기갑 전력을 앞세운 "속전속결" 작전으로 보였으므로 만약 이작전이 성공했다면 몽고메리 원수와 그의 동조자들이었던 오마 브레들리 장군 및 연합군 지휘관들은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장으로 독일의 롬멜 장군 못지 않은 명성을 얻었을지도 몰랐을 것입니다.
(아이젠하워 사령관과 육사 동기이며 조지 패튼 장군과 비교되는
성격의 소유자 오마 브레들리 장군은 온화한 스타일이었지만 마켓
가든 작전 수립 단계에서 몽고메리 원수와 입장을 같이하였습니다.
하지만 마켓 가든 작전의 실패는 3개월 후에 벌지 전투에서 그를
선봉에 내세워 독일과의 결전을 치루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겉으로 번지르르한 가든 작전은 시작 단계부터 실패의 징후가 보이기 시작하였는데 우선 적진에 투입되어 교량과 목표 도시들을 점령한 공수부대들과 조우하여 점령 지역을 접수하기 위해서는 전광석화와 같은 진격 속도로 진경해야 한다는 전제가 요구되었습니다. 하지만 작전 계획대로 진행된다고 하더라도 적진에서 공수부대는 독일군의 공격을 무려 4일이나 막아내야 했으며 만약 연합군 지상군의 진격 속도가 계획대비 조금만 차질이 나더라도 공수부대들의 제한된 화력 (낙하산과 글라이더로 투입되는 공수부대원들에게는 개인 화기와 소형 곡사포 이외에 독일 전차를 공격할 수 있는 최소한의 화력도 갖추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으로는 만약 독일군의 군사력이 연합군이 입수한 정보처럼 빈약하지 않다면 큰 낭패인 상황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독일군 방어 병력 - "올스타 戰" 라인 업
위에서 우려했던 사실 "만약 연합군이 평가했던 만큼 독일군 방어 병력이 빈약하지 않다면?" 이것은 어쩌면 연합군 지휘관들이 생각하기도 싫었던 악몽이었지만 그 악몽은 현실이 되어버렸습니다. 연합군이 입수한 정보와는 전혀 따판으로 노르망디 상륙으로 패퇴하게 된 독일 지상군 병력은 연합군이 파죽지세로 진격한다고 느낄 수 있었던 만큼 엄청난 병력을 치명적인 타격을 피해 독일 본토 방어를 위해 퇴각시켜 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런 독일군들을 지휘하는 지휘관들조차 유럽대륙 서부전선에서 역전의 용사로 경험을 쌓은 우수한 지휘관들이었습니다.
네덜란드로 되각했던 독일 제15군은 무려 86,000명의 병력과 600문의 대포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독일 국방군 서부전선 총사령관은 게르트 폰 론트슈태트 장군은 이미 패잔병들을 재정비하여 연합군의 대규모 공세에 대비한 방어를 철저하게 대비해놓았던 것입니다. 그는 사실 히틀러에게 그리 신임받는 지휘관은 아니었지만 (제3제국 말기에 사실 "사막의 여우" 롬멜조차도 히틀러의 암살 음모에 연루되었다고 하여 자살을 강요받았던 당시 상황에서 우수한 지휘관이 히틀러에게 신임을 받지 못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었습니다만....) 부하들에게는 절대적인 존경과 충성을 얻어낸 우수한 지휘관이었습니다.
게다가 전설적인 독일 공수부대의 선구자인 쿠르트 슈투덴트 대령은 3,000명의 최정예 공수부대원을 규합하여 알벹르트 지역에 포진하고 있었으며 쿠르트 힐 중장의 2ㅔ 65 사단은 연합군이 목표로 하는 교량들 방어를 맡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어쩌면 연합군이 가장 두려워해야 할 상대인 무장 친위대 소속 기갑부대 제9, 10 기갑사단이 아른헴에 투입되었는데 그 이유는 공수부대의 공격이 아니라 나치 독일이 당시 가장 두려워하던 미육군 조지 패튼 장군의 저예 기갑 부대가 독일 본토 공략에 선봉에 설 것이라는 예측에 따른 기갑 전력 보강이었습니다. 비록 당시에 무장 친위대 기갑부대가 한창때의 엘리트 부대 수준과 비교하여 많이 부족한 규모와 형편이었지만 그래도 다수의 탱크 에이스들이 여전히 포진하고 있는 그들은 실전 경험 부족한 서방 연합군 기갑 부대와 비교하면 우월한 위치였습니다.
실제 패튼 장군의 기갑 부대 공세가 시작될 것이라는 예측은 빗나갔지만 무장 친위대 기갑부대는 마켓 가든 작전에서 연합군을 격파하는 결정적인 역활을 하게 됩니다.
위에서 보듯이 연합군이 과소평가했던 것처럼 네덜란드 전선에서 독일군 방어부대는 늙은이와 어린 병사로 구성된 빈약한 부대가 전혀 아니었고 전쟁 기간 내내 실전 경험으로 어쩌면 당시 히틀러가 가진 최정예 부대라고 평가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 같은 용맹한 지휘관과 병력들로 구송되어 일종의 "올스타" 팀과 같았던 것입니다.
성급한 작전 계획 - 재앙의 징조
공수부대 수송을 맡았던 미국 제9 수송 사령부는 1회 비행시 1개 사단의 절반을 수송할 수 있는 1,545대의 수송기와 478대의 글라이더를 제공하였는데 공수부대 지휘관들은 이들이 하루에 2회 비행을 하여 병력과 물자를 수송해줄 것일 요구하였습니다. 하지만 공수 작전을 총책임 졌던 미육군 루이스 브레리턴 장군은 본인의 경험 부족으로 수송기 정비와 비행사 휴식이 필요하니 1일 1회 비행을 고집하게 됩니다. 이결정은 결과적으로 현지에 강하된 공수부대원들이 추가 지원 없이 자력으로 독일군의 공격을 막아내야 하는 시간이 그만큼 길어졌음을 의미하게 되며 후에 기갑부대 진격 속도까지 늦어지자 총체적인 난국으로 악화 일로를 걷게 됩니다.
게다가 노르망디 상륙 작전때도 낙하 지점이 실제 큰 오차가 발생하여 수많은 공수부대원들의 희생으로 이어졌던 것처럼 이번에도 교량 위치에서 심하게는 무려 15km나 떨어진 곳에 낙하하게 된 공수부대원들이 교량 점령에 실패하는 차질을 초래하게 됩니다. 교량 위치에서 가까운 지점은 낙하산 투하와 함께 병행하게 되는 글라이더가 착륙하기에 너무 습지라는 이유로 낙하지점을 너무 멀리 설정한 것입니다.
이상의 계획 수립은 단 1주일만에 완료되었는데 불과 1년 전에 이태리 시실리 섬과 불과 3개월 전에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입안할 때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철두철미하게 작전계획을 세웠던 것에 비하면 터무니 없이 성급하고 엉성한 준비였습니다.
작전 수립 과정에 참여했던 제 82 공수사단의 지휘관 개빈 장군 (영화 속에서 라이언 오닐 役)은 "나무나 서툴다. 만약 성공한다면 나는 대단히 운이 좋은 사람이다"고 일기에 남길 정도로 작전에 대한 회의감을 표현했습니다.
이상과 같은 상황에서 너무나 안일한 접근의 연합군과 철저한 대비를 하고 있던 독일 최강 지상군의 격돌은 1944년 9월 시작되었습니다.
첫댓글 마켓가든을 소재로 한 머나먼 다리는 최근에 구해서 보게 되었습니다. 아주 재밌게 본 기억이 있고요...대공포화를 뚫고 공수부대 투하시키려고 애쓰는 장면은 아주 살벌 났습니다. 많은 병사가 뿔뿔히 흩어져서 허망한 죽음을 하게 되는것등... 역사 속에서 아주 슬픈 작전이더군요. 좋은 글들 또 잠시나마 읽으면서 하루의 걱정을 살짝 놓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잠시 글읽다 생각한건데.... 이차대전이 프라모델의 발전에도 아주 기여했다는 이상한 생각이 드네요^^
동감합니다:-);-);-);-);-)
역시나 지휘자의 철저하지 못한 작전의 실패군요. 전쟁 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똑같은 모습.
전형적인 예가 바로 이작전이었지요.
준만님의 이차대전 이야기를 처음부터 읽고 있습니다. 많은 정보를 실감나게 서술해주셔서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읽어주시면 제게 보람이고 기쁨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