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미운 오리새끼의 비극
재벌가 맏며느리 피살 사건은 세상에 대단한 화제가 되었다.
여자들 두셋만 모여도 어떻게 죽었느니,
누가 죽였느니 하면서 모두가 입방아 찧기에 바빴다.
상황이 중대한 만큼 종로 경찰서 안에 수사 본부가 설치되
고 사건은 시경의 추경감이 직접 맡게 되었다.
추경감은 우선 명왕성 그룹의 가족 상황부터 조사를 해 보았다.
625때 고철 수집상을 하던 고명성 회장은 그것을 리어카 공장으로 키워 나갔다.
조그만 자전거 공장을 세워 손으로 드럼통을 두들겨 자전거를 만드는 일을 했었다.
그 규모가 좀 커지자 이번에는 월남 붐을 타고 일어섰다.
60년대 말 월남에 고철 수집 회사를 세우고 거의 멀쩡한 지프차의 엔진 같은 것을
고철로 수입해다가 개조하기도 하고 모터보트를 만들기도 했다.
한국의 많은 재벌들이 그렇게 했듯이, 월남 경기는 벼락 부자를 많이 만들었다.
그것을 바탕으로 조선 회사를 일으키고 자동차 생산 공장도 만들었다.
작달막한 키에 코가 납작하고 못생긴 축인 그는 늘 신체에
대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이마에 있는
주름살이 임금 왕(王)자처럼 생겼다고 늘 그것을 자랑해 왔다.
"백년 전에만 태어났더라도 나는 왕이 되었을 거야."
자기의 볼품 없는 용모를 늘 이렇게 자위하고 있었다.
고회장은 마침내 그룹의 총수가 되고 그 이름을 자기 이름
자 가운데 이마의 왕주름을 넣어서 명왕성 그룹이라고 했다.
함께 고생하던 조강지처는 7, 8년 전에 비행기 추락 사고로 죽었다.
그 뒤 나이가 서른여덟 살이나 아래인 명문대 출신 최화정과 재혼을 했다.
먼저 죽은 친구의 딸이기도 한 최화정을 돈으로 사오다시피 해서 결혼을 했다.
그녀는 장남인 고봉식보다 7살이나 아래로 올해 갓 서른 살이었다.
장녀인 고정혜보다는 4살 아래, 둘째딸 고영혜보다 두 살 위이고,
막내 고봉길보다는 네 살 위였다.
그러니까 어머니는 어머니지만 너무나 자연스럽지 못한 어머니가 된 셈이다.
최화정은 목이 길고 얼굴이 작아 미인형에 들지만 썩 아름
다운 인물은 아니었다. 귀엽게 생겨 남성들의 사랑을 듬뽁
받을 수있는 애교 넘친 여자였다.
임기응변이 빠르고 나이 많은 고회장을 잘 다루었다.
아들 딸이 되는 장녀 정혜, 장남 봉식, 둘째딸 영혜, 막내
봉길, 그리고 정혜의 남편인 사위 정정필과도 잘 어울렸다.
올해 서른아홉이나 된 정정필은 젊을 때부터 고회장의 비서로 일해 왔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고학으로 대학을 마치고 명왕성
그룹에 들어와 필사적인 방법으로 고회장에게 접근했다.
그는 마침내 고회장의 딸을 아내로 삼는 데 성공하고 지금
은 회장 비서실장으로, 늘 고회장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어머니 최화정은 모든 식구와 그럭저럭 어울려 지냈으나
며느리 설희주와는 언제나 기름과 물이었다.
"설희주를 미워하지 않은 식구는 누구야?"
그 집 가족들의 신상에 대해 내강 이야기를 들은 추경감이 강형사에게 물었다.
"글세요. 고회장과 고봉길을 빼놓고는 모두가 설희주를 눈
의 가시처럼 여겼던 것 같습니다."
"왜 그랬을까?"
"가난한 집에서 자란 여자가 연애라는 특별한 줄을 타고
고봉식을 함락시킨 뒤 명왕성가의 안방 후계자가 된 것이
모두 싫었던 모양입니다."
"고봉식은 직책이 뭐야?"
"명왕성 그룹의 한 계열인 명왕성 자동차 사장입니다."
"설희주의 친정은 어떤가?"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만 어머니와 오빠가 있었는데 결혼
하기 몇달 전 죽었다고 합니다. 거의 고아나 다름 없습니
다. 시집간 언니가 하나 있긴 있다고 합니다만."
추경감은 한참 동안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미운 오리새끼가 백조의 집에 뛰어들었군. 자라온 환경이
다른 사람은 어울리기 어려운 법이야. 민물고기를 갑자기
바다에 가져다 놓으면 어떻게 되겠나?"
"예?"
강형사는 추경감의 그답지 않은 센티멘탈리즘에 어리둥절해졌다.
"참 기묘한 가정이야. 그 남편이라는 고봉식이 말야, 어딘
가 좀 멍청한 것 같기도 하고, 그러면서 자기 실속은 다 챙기는것 같기도 하고."
"그 사람이야말로 전형적인 재벌가의 멍청이 장남 스타일
입니다. 그런 사람은 마누라 죽일 용기도 없어요." 강형사가 떠들었다.
"사인은 정확하게 나왔나?"
추경감이 갑자기 생각난 듯이 말했다.
"예, 가슴을 찌른 칼의 상처입니다. 네 군데를 찔렀는데
세군데는 깊이 12센티로 치명상이 아니었고 한 군데가
심장의동맥을 건드렸습니다."
"약물 중독이나."
"아뇨."
강형사가 추경감의 말을 중간에서 잘랐다.
"그 외 이상은 없었나?"
"전혀. 아참 정교의 흔적은 있었습니다. 근데 질 속에서
발견된 체액으로 보아 최소 1주일 이전에 정교를 했던 흔적만이 남아있습니다."
"혈액형은?"
"남편의 혈액형인 O형과 같은 정자가 발견되었습니다."
"세상에 O형 혈액을 가진 사람이 고봉식뿐이야?"
그 대목에서 추경감은 갑자기 신경질적이 되었다. 추경감
은 한참 동안 다시 창밖을 보고 있다가 벌떡 일어섰다.
"다시 가 보자. 외부인의 짓일 수도 있어."
"예?"
"빨리 따라와."
그들은 청운동 고회장의 집 앞에 닿았다.
먼저 강형사가 초인종을 눌렀다.
"아! 강형사시군요."
어디에선가 젊은 남자의 목리가 튀어나왔다.
"어찌 된 거야?"
추경감이 어리둥절해졌다. 강형사가 대문 처마에 붙은 물
건을 가리켰다. 스피커처럼 구멍이 송송 뚫린 물건이 보였
다. 그 위에는 카메라 렌즈 같은 것도 있었다.
"저게 텔레비젼 초인종이란 겁니다. 여기 누가 서 있는지
집안에서 다 볼 수 있습니다."
강형사 말을 들으며 추경감은 어린아이처럼 호기심어린 눈
으로 그것을 쳐다보았다.
조금 있다가 둔중한 금속성을 내면서 대문이 열렸다.
그들이 거실까지 가는 데는 상당한 감시망이 있었다.
"자외선 경보 장치, 전자 감응식 철조망 등이 이 집에 장치돼 있습니다."
강형사가 나직하게 말했다.
거실에는 마침 여러 식구가 모여 있었다.
"형사 나으리들이 또 오셨군요. 이 분이 대명왕성 그룹 고
회장님이십니다. 회장님 뵈오러 오셨죠?"
고봉길이 여전히 비웃는 듯한 미소를 흘리며 거실 소파 중
앙에 앉아 있는 볼품 없는 중늙은이를 소개했다.
"어서들 오시오. 좀 앉으시지요."
고회장은 일어선 것도 아니고 앉은 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자세를 잠깐 보이고는 도로 앉았다. 볼품 없는 외모였다.
그러나 날카로운 눈과 일자로 꽉 다문 입이 보통 사람으로
는 보이지 않았다. 대그룹의 총수다운 분위기가 풍겼다.
"이거 처음 뵙습니다. 텔러비젼이나 신문에서 보던 얼굴과 꼭 같군요."
추경감이 인사로 한다는 말이 좀 이상해졌다.
"그래 범인의 윤곽은 잡았소?"
고회장은 추경감의 말은 들은 척도 않고 자기 질문만 했다.
"그게 아직."
"오늘 나한데 온 용건은 뭐요?"
"특별한 용건은 없고 그냥 몇 마디."
추경감이 우물쭈물하자,
"싱거운 사람들이구먼. 당신들 월급 주는 사람이 누군지
모르지만 한심하구려."
고회장은 이 말을 남기고 벌떡 일어서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미안합니다. 회장님은 원래 성격이 깔끔하셔서."
그때 커크 더글러스의 턱을 닮은 사나이가 몇번씩이나 절을하며 말했다.
"저는 고회장님 비서실장인 정정필이라고 합니다."
사나이는 연신 절을 하며 말했다.
"동시에 우리 큰누나의 남편이구요."
고봉길이 비꼬아 주었다.
"이 분은 우리 큰형님, 명왕성 자동차 사장이죠."
추경감은 키가 크고 점잖게 보이는 고봉식에게 목례를 보냈다.
"회장님 사모님을 잠깐 뵈었으면 하는데요."
추경감의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옆방에서 젊은 여자 두명이 나왔다.
"내가 이 집 어머니예요."
"예?"
젊은 여자의 자기 소개에 추경감은 잠깐 어리둥절해졌다.
"최화정이라고 해요. 얘는 우리집 둘째 영혜구요."
그녀는 같이 나온 여자를 소개했다. 맏딸 정혜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화정을 늙은 고회장의 부인이라고 생각하는 데는 상당한
배려가 필요하다고 추경감은 생각했다. 너무 젊고 발랄하
게 보여서 둘째딸 정도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사모님께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평소에 며느님인 설희주
씨가 특별히 미워한 사람이 있습니까?"
추경감이 물었다.
"그 반대는 있어요. 올케를 미워한 사람이 많아요."
영혜가 촉바르게 나섰다.
"영혜씨는 올케와 다툰 적이 있나요?"
이번에는 강형사가 물었다.
"한두번 다투지 않은 시누 올케 사이 보았나요?"
영혜는 소파에 앉은 채 포개 얹은 왼발을 달랑거리며 말했다.
"그러면 다시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이 칼이 있던 방 열
쇠는 주로 누가 사용했나요?"
추경감은 포케트에서 사진 한 장을 내보이며 말했다. 살인
흉기로 쓰였던 문제의 로마 단도 사진이었다.
"그 칼은 항상 회장님의 골동품 진열장에 있었지요. 물론 열쇠는 늘 채워두고요."
최화정 여사가 침착하게 설명했다.
"진열장이나 그 방 열쇠는 항상 회장님이 지니고 다니셨겠죠?"
"지니고 다니시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무데나 내굴리지도 않았지요."
"그러니까 이 칼을 사용한 범인은 진열장과 방 열쇠가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이겠군요?"
강형사가 나서자 최화정 여사가 발끈했다.
"이 분 무슨 이런 이상한 말을 해! 그 열쇠 회장님 아니면
내가 만지는데 그럼 우리 둘 중에 하나가 칼을 꺼내다 새
아기를 찔렀단 말예요?"
최화정이 설희주를 새아기라고 부른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추경감은 생각했다.
서른 살 남짓한 여자가 같은 또래의 며느리를 아기라고 하는게 어쩐지 어색했다.
"아,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강형사가 당황해 손을 내저었다.
"제 말은 상식선에서 추론하자면."
"꼭 사람을 죽일 생각이면 멀리서 총 같은 걸로 쏘지, 뭣
때문에 손에 피묻혀 가면서 칼로 찌릅니까? 아이 끔찍해."
그녀는 자기 손에 피라도 물은 듯 손을 흔들어 털면서 말했다.
"저는 다만 이 칼이 이 집안에 있었다는 것만 확인하면 그만입니다."
강형사가 풀이 죽어서 말했다.
"그 말투는 그 칼뿐 아니고 그 칼을 사용해서 사람을 죽인
사람도 이 집안에 있다는 투군요."
최화정이 말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아, 아닙니다 그렇게 단정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외부에서 누가 들어와 우리 집안 사람을 찔렀다고
는 얼른 납득이 가지 않을 것입니다."
고봉식이 말을 계속했다.
"이 집은 평범한 주택이 아닙니다. 자외선 경보 장치까지
설치돼 있기 때문에 불시에 누가 들어와서 그런 일을 저지
른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들어오실 때 보셔서
아시겠지만 마당에는 맹견 두 마리까지 있지 않습니까. 하
여간 밖에서 누가 침입했다면 비명 소리보다 경보 사이렌
소리가 훨씬 더 요란스러웠을 테니까요. 그뿐입니까? 개
두 마리가 악을 써보세요. 파출소까지 들렸을 겁니다."
고봉식이 목소리를 점점 높이며 이 집의 완벽한 방범 체제를 신나게 설명했다.
"오빠는 지금 이 집 울타리 안에 살인자가 있다는 것을 웅
변하는 거예요? 나 원 기가 막혀서!" 정혜가 고봉식을 비난했다.
"너무 열올릴 건 없다. 아무려면 한 가족이 가족을 죽였다고 형사님들이 생각하겠어?"
최화정이 어른스럽게 말했다.
"나두 새엄마 말에 전적으로 동감이야. 범인은 외부인일
거예요. 어떻게 우리 식구를 그런 무시무시한 리스트에 올
리는 어처구니없는 상상을 할 수 있어요?"
둘째 영혜가 몸서리가 쳐진다는듯 팔짱을 끼고 목을 움츠리며말했다.
"전 아직도 여러분들을 그런 리스트에 올리지는 않았습니
다. 예를 들어 월부 장수나 배달원 등 이 집에 정기적으로
또는 수시로 드나드는 안면 있는 사람이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지를수도 있으니까요."
추경감이 흥분한 가족들을 가라앉힐 속셈으로 의견을 말했다.
"추리소설을 보면 범인은 언제나 엉뚱한 사람이더군요. 이번 사건도."
"그만둬요, 새어머니. 수사반장은 새어머니가 아니고 이분이에요."
영혜가 최화정의 말을 중간에서 잘라 버렸다. 그러나 최화정은 그만 두지 않았다.
"윈래 바둑이나 카드는 게임 당사자보다 옆에서 훈수하는
사람이 더 잘한다고 했어. 반장님, 포커 좋아하세요?"
최화정은 안 해도 될 질문까지 했다.
"하여간 우리 가족 중에서 뭔가 얻으려고 하는 것은 어불
성설이에요. 범인은 안이 아니고 밖이라니까요." 정혜가 결론을 짓듯 말했다.
"꼭 그렇게만 우기지 말아요. 우리 식구 중에 형수를 미워
하지 않은 사람 있으면 손들어 보라고 해! 미움, 증오, 그
것이 극에 달하면 극단적인 상황이 오는 거라고."
잠자코 있던 고봉길이 비분강개한 듯한 목소리로 떠들었다.
"안이고 밖이고 하여간 범인은 잡을 수 있는 거겠죠?"
비서실장 정정필이 사무적인 투로 다그쳤다.
"우리는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강형사가 대답을 가로 맡았다.
"최선 다 안해도 좋으니 되도록 빨리 매듭을 짓는 게 좋겠
어요. 못 잡으면 못 잡겠다고 손 들면 그만 아닙니까. 이
제부터 신문 방송이 더 떠들어댈 테니. 집안도 집안이
지만 각 계열 회사, 그리고 거래선, 외국 바이어들까지."
정정필이 사정하듯 말했다.
"매형은 어째 그래요? 사람이 죽었는데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습니까? 범인은 못 잡아도 좋다구요?"
고봉길이 발끈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솔직이 말해 요즘 같은 불경기에 이제 무슨 날벼락입니까?"
"벼락맞은 사람은 형수예요. 근데 회사가 어쩌구 불경기가 어쨌단 말입니까?"
고봉길이 다시 악을 썼다.
"얘, 매형 말이 맞지 뭘 그러니?"
정혜가 고봉길을 나무랬다.
"누나!"
고봉길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정혜를 노려보았다.
두 눈에서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그만들 둬."
장남 고봉식이 봉길의 허리춤을 잡아당겨 자리에 앉혔다.
"이 사람이 왜 좋은 인상 다 구기구 그래? 아, 누구는 칼
에 찔려 죽은 사람 두고 노래 부르고 싶은 심정인 줄 알
아? 이거 왜 이래, 정말."
정정필이 펄펄 뛰었다.
"제발, 형수님을 애도하는 마음이 손톱만큼이라도 있으면
이런 자리에서 사업 얘기는 말아 주세요, 제발. 대재벌 그
룹 만든 고회장님이 또 무슨 돈을 더 벌 욕심이 있다고 그
러세요? 하기야 우리 아버지는 돈 위에 돈 있다고 늘 말씀 하셨지만."
고봉길의 독백 같은 말은 점점 냉소적으로 바뀌었다.
"애도? 돈? 돈보다는 지금 애도를 해야지. 암!"
이번에는 정혜도 다른 방향으로 냉소적이었다.
"팔자 좋은 소리들 하고 있네요. 우리 명왕성 그룹에 목줄
을 걸고 있는 사람이 십만 명도 넘어요. 우리 그룹이 삐거덕
하면 굶어 죽을 사람이 줄줄이 나온단 말이요. 처남댁이 죽
었다는 뉴스 나간 뒤 공장 기계가 멈출 정도로 술렁술렁 난리 났어요, 난리!"
"너무 걱정 마십시오, 매형. 그룹 회장 며느리 칼 맞아 죽
었다고 자동차 살 사람 안사지 않아요. 빌딩 짓던 사람
안 짓지 않아요. 팔릴 물건이 안 팔릴 리도 없구요."
고봉길은 여전히 비웃음으로 차 있었다.
"넌 가서 노래나 블러라. 백날 불러도 차트에 한번 오르지
못하는 그 오지 그릇 깨지는 소리나 내!"
듣고 있던 영혜가 더 못 참겠다는 듯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쬐그만 게 혼자 휴머니스트인 척 표정 꾸미고 그러지 좀 마! 어른들 앞에서."
정혜도 거들었다.
"손님들 앞에서 무슨 쓸데없는 싸움질이냐? 그만들 두자."
최화정이 딴에는 어른스러운 말을 했다.
"우리는 상관 마시고 하실 말씀 다 하십시오.
골동품 보관한 방을 살피고 온 강형사는 거실의 이곳저곳
을 계속 돌아다니며 말을 던졌다.
"저어, 실장님 누가 좀 뵙자는데유."
그때 거실로 들어선 점퍼 차림의 사나이가 쭈볏쭈볏한 모
습으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추경감은 그가 회장 차의 운전
사 편기사라는 것을 금방 알았다.
"누구래?"
"저어 기자분들이라 하는데요. 네 분입니다."
그 말에 정정필은 표정이 굳어졌다.
"장모님, 그리고 처남 처제들, 그 자들이 오거든 무조건
아는것 없다고 입 다물어야 합니다."
"입 다물고 어떻게 아는 것 없다고 말합니까?"
봉길이 또 빈정댔다.
"봉길이 처남도 당분간 밤무대 같은 데 아르바이트 나가지 말라구."
"아이 속상해. 이럴 게 아니라 우리 단체루 발리섬 같은
데나 나가 있다가 좀 잠잠해지면 들어오는 게."
영혜의 말에 정혜가 맞장구를 쳤다.
"그래요. 오빠, 발리보다는 뉴질랜드가 어때요?"
듣고 있던 추경감이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안 됩니다."
너무도 한심한 집안이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 같아서는 한
바탕 훈계라도 하고 싶었지만 꾹 참고 그는 말을 계속했다.
"살인범의 조속한 검거를 원하신다면 여러분들은 제가 원
하는 곳에 남아 있어야만 합니다. 며느리, 아내, 올케가
죽음을 당했는데, 그 원수가 잡히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겠지요?"
추경감의 제법 엄숙한 말투에 모두 조용히 있었다.
추경감과 강형사는 대단히 씁쓸한 기분으로 그 집을 나왔다.
우선 범행에 대한 아무런 단서를 얻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집 식구들의 어처구니없는 모습에 화까지 치밀었던 것이다.
"돈 가진 사람들은 머리가 비는가 보죠.
하긴 주머니가 가득 차면 비는 곳이 있긴 있어야지."
강형사가 입맛만 다시고 있는 추경감의 기분을 위로라도 해줄듯이 말했다.
"내가 보기엔 말야, 그 고봉길인가 뭔가 하는 시동생 걔만
그 집 식구 중 좀 어긋난 사람 같아."
"그래요, 맞아요. 뭐가 답답해서 기타 들고 술집 무대에
서서 노래 부르며 돈을 번답니까? 또라이지, 또라이."
"또라이라도 그 중 나은 사람 같더구먼."
"고봉길은 평소에 설희주와는 사이가 괜찮았던 것 같기도 하고."
"그 문제의 로마 칼을 어떻게 그 진열장에서 꺼냈느냐 하
는게 우선 촛점인 것 같습니다."
강형사가 화제를 돌렸다.
"범행 당시 진열장이 있는 방문은 열려 있었나?"
"잠겨 있었습니다."
"열쇠는 어디에 있었는데."
"열쇠가 두 개 있었는데 두 개 모두 한 꾸러미로 되어 있
었습니다. 열쇠 뭉치는 회장의 서재 책상에 들어 있었습니다."
"열쇠가 거기 있다는 것을 누구누구 알고 있었나?"
"그야 고회장과 최화정씨죠. 그 외 식구들은 잘 모르겠습니다."
"범행 당시 그 방이 잠겨 있었다면 열쇠로 열고 들어가 로
마칼만 꺼내고 문을 다시 잠근 뒤 범행 후 열쇠를 그 방에
가져다 놓을 수도 있고, 방이 열려 있는 틈을 타서 칼을
훔쳐다 놓았다가 범행을 할 수도 있고, 범인이 들어왔을
때 그 방이열려 있어서 들어가 칼만 꺼내고 문을 잠근 뒤
범행했을 수도 있구먼."
추경감은 고물 지포를 꺼내 철거덕거리며 혼잣말처럼 중얼 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