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 콜롬보 ? 아누라다푸르 여행
스리랑카 여행 2016. 1. 18(월) - 1. 26(화) 2016. 1. 18 (월) 첸나이 ? 콜롬보 ? 아누라다푸르
일행 17명이 첸나이 숙소에서 나와 9시 30분 발 콜롬보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찬란히 빛나는(Sri) 땅(Lanka)이라는 뜻을 가진 스리랑카는 약 70%가 불교를 믿는 불교국가로 대부분이 싱할리족이며 소수의 타밀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BC 5세기경 인도의 비자야(Vijaya) 왕자가 랑카섬으로 추방되어 사자(Lion)의 도움으로 나라를 세웠기에 싱할리(Sinha = Lion)족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국기에 칼을 든 사자는 사자의 혈통을 전승한 민족을 상징하고 있다.
또한 네 귀퉁이에 있는 보리수 잎은 불교, 주황색은 힌두교, 초록은 이슬람교를 상징하고 있어 종교의 화합을 나타내고 있다.
기내 식사를 마치고 인도와 스리랑카 사이에 있는 포크 해협(Palk Strait)에 길쭉이 뻗어있는 사주(沙州) ‘아담의 다리(Adam's Bridge)’를 보기 위해 비행기 후미에 있는 창문을 찾았다. 라마가 부인 사티를 구하기 위해 스리랑카로 건너갔기에 ‘라마의 다리’라고도 불리는 이 사주는 15세기경에는 인도와 스리랑카를 연결해 주었는데 열대성 저기압인 사이클론(Cyclone)으로 인해 손실되어 지금의 형태가 되었다고 한다. 조금 늦어서 라마의 다리를 자세하게 볼 수는 없었지만 아마 스리랑카 북쪽 끝에 있는 섬이나 반도(半島)를 지나고 있는것 같았다.
10시 50분 콜롬보에 도착하여 버스에 몸을 싣는다. 스리랑카 여행은 현지 가이드와 더불어 진행되는 패키지 형태 여행이었다. 스리랑카 일정에 합류하는 4명을 태우기 위해 콜롬보 북쪽에 위치한 네곰보(Negombo)로 향했다. 현지인 가이드가 아유보완(Ayubowan)이라고 인사를 하면서 스리랑카 일정에 대해 설명한다. ‘만수무강 하십시오’라는 의미를 가진 인사말을 통해 스리랑카의 역사를 더듬어 본다. 인도 북부에서 온 싱할리족이 원주민인 베다(Veda)족을 정복하고 난 후 BC 5세기부터 11세기까지 아누라다푸라 왕국이 번창하다가 한 때 인도 남부의 촐라족에게 실론에 대한 지배권을 빼앗겼으나 다시 회복하여 13세기까지 폴론나루와 왕국으로 번창하였다. 그러나 인도 남부 타밀인의 침입으로 캔디로 천도하게 되고 혼란기를 맞는다. 16세기부터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기 시작하여 네덜란드,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가 1948년 독립하게 된다. 최근 40년간 반군 단체인 타밀엘람 해방 호랑이(Liberation Tiger of Tamil Eelam : LTTE)와의 내전으로 인해 혼란을 겪었기에 목숨을 오랫동안 보존하길 기원한다는 인사말이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네곰보에 도착하여 해변으로 가서 점심을 해결한다. 더러웠던 인도 바다와는 달리 인도양의 바다는 맑고 더 넓었다. 시원한 바다 바람을 맞으면서 맥주 한 잔 하면서 스리랑카 여행의 기대감을 키워본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스리랑카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본다. 야자수를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는 논들을 바라보니 친근감이 들기도 하였다. 아누라다푸라 (Anuradhapura) 시내에 도착하여 슈퍼마켓에 잠시 들렀다가 저녁 6시경 호텔(Rajanata)에 도착하였다. 저녁을 먹고 수영장에서 스리랑카에서의 첫 추억을 만들면서 하루를 마감한다.
2016. 1. 19 (화) 아누라다푸르 - 폴론나루와 이 곳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는 수도로 터전을 잡을 때 공헌을 많이 한 장군 아누라다(Anuradha)의 이름을 딴 도시(pura)이다.
아누라다푸라 시내 유적지의 입장료는 전부 3700 루피였다(1 USD = 약 140 LKR). 생각보다도 비싼 비용을 치루어야만 했다. 사원 입구부터 맨발로 들어가야만 했다. 스리랑카의 왕 이름과 지명 등이 길고 발음이 쉽지가 않았다. 이수루무니야 사원의 정확한 의미를 알려고 노력을 했지만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B.C 3세기에 세워진 이수루무니야 사원은 인공 호수 티싸 웨와(Tissa wewa) 옆에 자리한 사원으로 바위를 뚫어 만든 불당이 있었고, 오른쪽으로는 연못과 왼쪽에는 하얀 색의 다고바와 박물관을 갖추고 있었다. 승려들의 생활공간인 비하라(vihara 精舍)에 있는 돔 형태의 탑인 다고바(Dagaba / Dagoba)는 다투가르바(dh?tugarbha)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한다. 신체의 구성요소, 즉 사리(유골)를 뜻하는 다투와 자궁, 즉 성소를 의미하는 가르바가 합쳐진 말로서 부처님의 사리가 안치된 장소를 의미한다. 저수지를 의미하는 웨와는 왕이 치수(治水)를 중요시 했다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다.
바위를 뚫어 부처를 안치한 본당 오른쪽 연못 뒤쪽 바위에 새겨진 목욕하는 코끼리 형상의 부조가 이곳의 명물이라고 소개한다. 위에 네모지게 페인 홈에는 많은 동전들이 얹어져 있었다. 연못 오른쪽으로 돌아 바위 위로 올라가 시내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바위를 내려와 와불을 찾았다. 두 발이 가지런히 모아져 있으면 쉬고 계신 부처님이고, 왼발이 약간 뒤로 쳐진 상태로 엇갈리게 놓여 있으면 열반상이라고 한다. 또 발바닥을 붉게 표현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맨발로 다녔기에 더운 지역의 붉은 토양 라테라이트와 관계가 있다는 말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되어졌다.
옆에 자리한 박물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먼저 왕족의 상(King’s family)이 눈에 들어왔다. 두투가무누(Dutugamunu)왕과 왕자인 살리아(Saliya), 그리고 왕비와 그 옆에 신분이 낮았기에 조그마하게 만들어진 아소카 마라(Asoka Mala)의 모습을 새긴 조각상이었다.
그리고 낮은 계급의 소녀를 사랑하였던 두투가무누 왕의 아들 살리아 왕자와 그의 연인 아소카 마라의 조각상인 이수루무니야의 연인들(Isurumuniya Lovers)의 조각이 자리하고 있었다. 조각에 대한 안목이 높지 않아 자세히는 알 수 없었지만 그냥 보기에도 멋있다는 느낌을 금방 느낄 정도로 멋진 조각품이었다.
사원을 나와 북쪽으로 가이드를 따라 발길을 옮기자 숲 사이로 안내판에 ‘황금고기 공원(The Gold- Fish Park)’이라는 뜻을 가진 유적지(Ranmasu Uyana)가 나왔다. 티싸(Tissa) 저수지의 물을 끌어와 목욕을 할 수 있도록 만든 2개의 목욕탕 시설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었다.
두투가무누(Dutugamunu)왕에게는 동생 티사(Tissa)와 아들 살리아(Saliya)가 있었는데 왕자인 살리아가 천민 계급인 아소카 마라(Asoka Mala)와 결혼을 하게 됨으로써 티사가 왕위를 잇게 되었는데, 바로 이곳이 왕자가 아소카 마라를 만났던 장소라고 한다. 나중에 자료를 정리하면서 이곳에 스타케이트(stargate)를 상징하는 표시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보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야만 했었다.
티싸 저수지 제방을 따라 걷다가 사원으로 내려와 다시 버스를 타고 북쪽으로 약 1.2Km 지점에 있는 스리마하 보리수(sri maha bodhi tree)를 찾았다.
스리랑카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BC 3세기 경 인도 아쇼카(Asoka) 왕의 아들 마힌다(Mahinda) 에 의해서였다고 한다. 또한 이 당시 왕이었던 데바남피야 티싸(Devanampiyatissa)는 마힌다의 누이동생 상가밋따(Sanghamitta) 비구니가 인도 부다가야에서 보리수나무를 가져오자 이곳 아누라다푸라에 심었는데 그 때의 보리수가 지금도 살아 있다는 것이다. 현지 가이드가 기둥으로 받쳐진 가지가 본래의 보리수나무라고 설명한다.
또한 사원 아래 부분에는 초기 사원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신성한 곳이라 여겨 많은 사람들이 소원을 빌었던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유적지에 대한 관심이 적은 일행들은 더위에 힘들다고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사원 문을 나와 루완웰리 세야 대탑(Ruwanweli Seya dagoba)으로 가기 위해 돌로 만들어진 길을 따라 가다 오른쪽에 자리한 로하 파사다(Loha Pasada, Lovamahapaya)를 구경할 수 있었다.
수도원(僧院)을 프리베나(Privena), 혹은 프라사다(Prasada), 아라마( Arama)라고도 한다.지붕이 청동(Loha)으로 되어 있었기에 로하 파사다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이 곳 승원은 수많은 기둥들만 과거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면서 기념사진만 찍고 다시 발길을 옮겨 황금 모래 탑(Golden Sand Stupa)이라는 뜻을 가진 루완웰리 세야 대탑 유적지에 도착하였다. 대탑 주위로 병원 등 여러 유적지의 흔적들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탑(Stupa = Seya)의 경계 부분인 울타리(vedik?)에는 코끼리 형상을 하고 있었다. 복발(覆鉢)이라고 불리는 반구형의 돔 위로 4각형의 평두(平頭, harmik?)가 위용을 드러내고 있고, 그 위로 산개(傘蓋, chatra)가 보인다.
기둥만 남아 있는 출입문(Torana)을 지나자 오른쪽에는 열쇠 모양의 목욕탕 유적이 있었다. 목욕재계하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열쇠가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 뒤로 하얀 탑이 보이고 코끼리 형상을 한 기단도 하얀 색을 띠고 있었다.
대탑 앞 기단 위에는 조그마한 탑이 모서리마다 자리하고 있었다. 이것을 참고로 하여 110m 높이의 대탑을 만들었다고 한다.
대탑 기단 입구에는 두투가무누 왕의 동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스리랑카로 넘어올 때 비행기에서 본 두투가무누 왕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가 생각이 났다. 물론 영어 자막으로 보았기에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이 나라에서 존경을 많이 받는 사람이었구나 하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이 탑은 타밀족을 격퇴하고 통일을 이룬 두투가무누 왕에 의해서 짓기 시작했는데 왕이 탑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등질 것 같아 왕자는 대나무와 흰 천을 이용해 하룻밤 사이에 탑의 모양을 만들었다. 왕자는 임종을 앞둔 왕에게 탑이 완성됐다면서 창문을 열어 보여주자 왕은 탑이 완성된 것이라고 믿고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고 한다. 루완웰리 세야 대탑을 나와 기다리고 있던 버스를 타고 지나가면서 대탑의 북쪽에 자리 잡고 있는 투파라마 다고바(Thuparama Dagoba)를 카메라에 담는다. 스투파(stupa)와 아라마야(aramaya 수도원)에서 유래된 투파라마 다고바는 기단 위에 몇 개의 돌기둥이 자리하고 있었다. 잠시 버스는 속력을 줄이면서 가이드가 랑카라마 스투파(Lankarama Stupa)를 가르킨다. 더운 날씨로 일행들은 버스에서 쳐다보기만 한다.
잠시 달려 아바야기리 대탑(Abhaya Giri Dagoba) 유적지에 도착하였다. 아바야기리의 명칭은 아바야 왕과 승려 기리의 이름을 따서 생겼다고 한다. 발라감바후(Valagambahu)로 알려진 바타가마니 아바야(Vattagamani Abhaya) 왕은 인도 타밀에게 패배하여 이곳에 피신했는데 당시 자인교의 승려였던 기리(Giri)에게 무시를 당했다가 다시 왕권을 되찾은 후 자인 사원을 허물고 이 불탑을 세웠다고 한다. 또 다른 유래는 옛날 사원들은 언덕(Giri)을 중심으로 건축되었기에 아바야(Abhaya : 두려움 없는) 왕의 이름을 따서 생겼다고도 한다. 버스에서 내려 먼저 폐허가 된 유적지를 잠시 걸어가서 찾은 곳은 랑카라마 스투파 인근에 위치한 코끼리 연못(Eth pokuna)이었다. 길이가 159m, 폭 52m 인 이 연못은 인근 저수지에서 지하 운하를 통해 물을 공급받아 5천명에 달하는 승려들이 사용하였다고 한다.
다음으로 찾은 곳은 식당(Refectory) 구역이었다. 많은 유적지가 있었지만 특히 돌로 만든 승려들의 밥통이 인상적이었다.
식당 구역을 나와 북쪽으로 도로를 따라가니 가드스톤(Guard Stone) 안내판이 있는 라트나 프라사다(ratna 보석 prasada 승원)가 보였다. 이곳은 승려들이 1달에 2번 참회하는 공간으로 5층으로 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기둥만 몇 개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가드스톤은 이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한다.
수도원을 나와 아바야기리 대탑을 바라보고 왼쪽으로 발길을 옮기니 문스톤(Moon Stone)이라는 안내판이 보이면서 수도원 터가 나타났다. 폐허가 된 정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니 주 승원 터를 중심으로 보조 승원 터 4개가 자리하고 있었다. 지도에는 이곳이 마하세나 궁전(mahasena's palace) 터라고 표시되어 있었으나 현지 가이드 이야기로는 마하세나 궁전은 숲 속으로 조금 더 들어가야 있다고 하였다. 또한 이곳 안내판에는 수도원의 유적 터에 관한 내용을 잘 나타내 주고 있었다. 주 승원터 앞에는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문스톤이 있었다.
사원이나 성소 계단 앞에 만들어져 있는 반달 모양의 석판인 문스톤은 옛날에는 발을 씻고 올라가는 세족소(洗足所)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문스톤 가장 바깥쪽에는 욕망을 의미하는 불의 테두리가 있고, 그 안쪽으로는 코끼리(生), 말(老), 사자(病), 소(死)가 새겨져 있어 윤회를 상징하고 있다. 또 그 안쪽의 꽃은 풍요, 그리고 백조는 영혼의 자유를, 그리고 가장 한가운데 있는 연꽃은 극락을 의미 한다고 볼 수 있다. 문스톤을 지나면 연꽃 받침대(Lotus pedesta)와 기둥만 남아 있는 승원의 유적 터를 만날 수 있다.
영어로 설명하는 현지 가이드는 관심이 없는 사람을 무시하고 주변 사람에게만 설명하다보니 패키지 형태의 여행에 불만을 가지는 일행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내일 일정부터는 자유여행 형태가 되도록 유연성을 갖자고 결정한다. 다시 버스를 타고 아바야기리 대탑을 찾았다. 라테라이트 적색 벽돌 색이 퇴색한 것만 제외하고는 다른 탑과 별 차이는 없어 보였다.
기념사진을 찍고 다시 버스를 타고 사마디 불상 (samadhi budda statue)을 찾았다.
‘깊은 집중에 이른 상태'를 의미하는 삼매(三昧 samadhi)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불상은 왼쪽 손은 손바닥을 위로해서 배꼽 앞에 놓고 오른손도 손바닥을 위로해서 겹쳐 놓는 선정인(禪定印) 모습이고, 왼쪽 겨드랑이가 막힌 편견(偏肩)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는 편견(偏肩)은 수행할 때 입는 복식이라면, 두 어깨를 모두 가린 통견(通肩)은 부처를 만나거나 국왕을 배알할 때 입는 복식이라고 한다.
다시 버스를 타고 잠시 가니 쿳탐 포쿠나 (kuttam쌍둥이 pokuna 연못)가 보인다. 버스에서 나란히 붙어있는 2개의 목욕탕을 카메라에 담는다. 이곳은 사원에서 수행하던 승려들의 목욕탕이었다고 한다. 2개의 목욕탕의 크기는 다르다고 하는데 지금은 녹색의 물로 채워져 있었다.
버스를 타고 다시 찾은 곳은 자타바나 라마야 (Jatavana ramaya)이었다. 자타바나의 기원정사(祇園精舍)는 왕사성(王舍城)의 죽림정사(竹林精舍Venuvana-vihra)와 함께 불교의 2대 정사(精舍)이었다. 기원정사의 다른 이름은 가난한 이에게 보시를 많이 하였다하여 급고독(給孤獨)이라고도 불렸던 수달(須達)이 태자 기타(祇陀)의 소유지였던 동산을 사서 정사를 지었기에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이라고도 불린다. 아바야기리 대탑과 비슷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 자타바나의 탑은 원래 높이는 122m 이었다고 한다.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오면서 미힌탈레(Mihintale) 일정에 참가할 사람을 조사하였더니 아무도 참가 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일정에 없던 곳을 어렵게 부탁하여 일정에 넣었는데 미힌탈레 정상까지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고 하니 더워서 모두 가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데바남피야티싸(Devanampiyatissa) 왕이 아소카왕의 아들 마힌다(Mahinda) 왕자로부터 불교를 전승받은 언덕인 미힌탈레(Mahinda's Hill)에 올라 시내의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어쩔수 없이 포기해야만 했다. 점심을 각자 해결하고 버스를 타고 오후 2시 30분 폴론나루와 (Polonnaruwa)로 향했다. 오후 5시경 숙소(Mahanage)에 도착하여 내일 일정에 대해 논의하고 수영장에서 더위를 식히면서 하루를 마무리 하였다. |
출처: solbright 원문보기 글쓴이: kcs